그림자 날개

국경의 그림자

STier ver. 차유진(용)X김래빈(인간)

해가 지고 있었다. 전투의 막바지였다. 이보다 더 어두워지면 눈 밝은 마법사와 용 이외에는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서 두 진영은 암묵적으로 해가 지기 전까지를 전쟁의 시간으로 삼았다. 저 멀리 해보다 밝은 불이 어른거렸다. 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냄새에 비명과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사그라들고, 붉게 타는 대기에 검은 연기가 묵직하게 섞여 들었다. 이쪽의 피해도 상당했지만, 적군도 제법 많은 사상자를 냈으니 오늘 밤은 기습이 없을 터였다. 한동안은 서로 각자의 진영에서 군을 추스르리라.

김래빈은 휘파람을 짧게 끊어 불었다. 산 자들은 돌아갈 때였다. 그의 용은 멀리서도 그의 휘파람 소리만큼은 기가 막히게 찾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서 있던 망루에 기이한 돌풍이 불었다. 흩날리는 제 머리카락을 대충 잡아매며 그는 망루의 가장자리에 선 채 시간을 가늠했다. 셋, 둘, 하나. 그리고 추락.

낙하의 감각은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눈을 감고 중력과 거센 바람, 제 몸이 부러져버릴 것 같은 저항력을 느끼며 그는 이대로 지상으로 던져져 죽는 상상을 했다. 이럴 때면 종종 드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마치 지금처럼, 망루의 그림자 아래로 그의 몸이 잠겨들기를 기다렸다는 듯 검은 용의 주둥이가 그를 낚아채 올릴 테니까. 용의 등 뒤에 얹어진 김래빈은 급격한 선회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갈기를 붙들고 고맙다는 듯 그 목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귀환하자.”

전장에서 죽은 이들을 수습하지 않은 지도 꽤 되었다. 의미가 없었다. 벌써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곳은 이제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보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 더 많이 오는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한 번 날개를 크게 펄럭이는 것으로 그에게 화답한 용이 고요히 활공했다. 전장이 점점 더 멀어졌다.

 

그의 나라와 옆 나라가 이 국경의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인 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국경을 맞대고 싸워왔고 서로에게 던진 도발로 이 땅의 몸값은 불필요할 만큼 부풀려졌다. 이제는 왜 싸우게 되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정탐과 작은 분쟁, 승패 없는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수많은 자원과 병력이 성과 없이 소모되었다.

이건 그냥 자존심 싸움이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그 옳은 말을 대놓고 왕 앞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지원도 없이 지지부진한 싸움이 계속되는 이 국경에 파견되는 건 결코 영광이라 부를 수 없었다. 군에 들어왔을 때부터 열다섯 가지 주요 수신호와 세 종류의 군사 암호체계를 완벽하게 숙지하고 지형지물 및 보급체계에 대한 이해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래빈은 그 길에 승리가 없으리란 걸 곧 파악했다. 다만 그는 광휘 없는 의무라고 그 무게를 바닥에 내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뛰어난 사람이 왜 영광 없는 길에 내몰리게 되었을까. 뻔한 이야기다. 김래빈의 파견에는 몇 가지 이해관계와 높으신 분의 괘씸죄가 얽혀있었다.

그의 페어 용, 차유진은 좀 특별했다. 건국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검은 용을 길들이게 된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용과 페어를 맺을 수 있는 건 선별된 용기사와 왕족뿐. 차유진은 그 성미며 능력이 전투에 나서 공을 세우기에 좋았고 약간 까탈스러워 제어하기 어려운 느낌까지 완벽하게 콧대 높은 어느 왕족 나으리 취향이었다. 예컨대 예전부터 왕족에게 가기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다는 뜻이다. 차유진이 김래빈을 선택하지만 않았더라면.

차유진은 용이었고 제 페어를 선택하는 데 인간 사이의 알력을 신경 쓰지 않았다. 김래빈은 그 모든 성취에도 불구하고 공격에 반복적으로 머뭇거리고 종종 상사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열등생으로 낙인찍혀 용기사 대신 정찰병으로 빠질 예정이었지만 용의 지목에 모든 게 뒤집혔다. 왕이야 제 자리를 언제 노릴지 모르는 왕족보다는 아무 힘 없는 김래빈이 오히려 좋았고. 용은 사납고 기사가 영리하니 좋은 한 쌍이 되겠구나. 왕은 그렇게 명령했고 차유진을 오래 노리고 있던 왕족은 심사가 뒤틀렸다.

‘용기사가 제 용에게만 기대는 것도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닐 테지. 공격이 어렵다면 수비는 잘할 테냐?’

이미 몇 년간 공방이 이어져 온 저 먼 국경으로, 마치 넌 몇 년이나 버틸 수 있는지 보겠다는 듯이. 그들은 그렇게 페어를 맺자마자 이곳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돌아갈 기약은 없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는 이상, 혹은 중앙에서 누군가 그들을 불러들이지 않는 이상 요원하리라.

그들은 익숙하게 요새의 무너진 성벽 안쪽에 내려앉았다.

“다친 데는?”

없어. 김래빈은?

“나야 뭐, 직접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

말끄트머리에 죄책감이 묻어있었다. 남들이 보면 화났다고 오해할 만한 얼굴이었지만 차유진은 미간이 찌푸려진 그 얼굴이 염려에서 나왔음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날개 부근을 쓸어내리는 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확인해보게 변해봐.”

검은 비늘 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는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김래빈은 상처를 확인하고 싶을 때면 그에게 인간의 형태를 요구했다. 순순히 인간의 형태로 변한 차유진을 김래빈은 한 바퀴 돌아가며 꼼꼼히 살펴보았다. 크게 다친 데는 보이지 않았다. 몇 군데에는 마법으로 인한 화상 흔적이 남았지만, 그 정도라면 이런 곳에서는 대단히 경상이었다. 안도와 착잡함, 숨기지 못하는 염려를 담은 눈동자를 앞에 두고 차유진은 인간의 손으로 김래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묻은 재와 묵은 피로를 털어내듯이.

“김래빈.”

“왜?”

차유진은 오늘도 잘 버텼다고 하는 대신 용으로 변해 그 목을 휘어 상대를 제게 끌어당겼다. 용의 큰 몸에 가려진 김래빈의 어깨에서 점점 긴장이 풀리고 힘이 빠져 결국 그에게 툭 기댈 때까지. 그 뺨을 한번 길게 핥아준 차유진이 작은 인간의 걸음에 맞춰 서서히 다리를 움직였다. 내일은 그래도 전투가 없겠지. 용의 그늘 아래에서 아주 자그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유진은 가만히 날개를 기울여 그 연약함을 감춰주었다.

서로 마주치지 못한 시선들이 서로를 향해 엇갈렸다. 차유진에게 모든 전투를 일임한다는 죄책감, 자기 때문에 김래빈이 힘든 곳으로 발령받은 게 아닐까 하는 부채감. 서로 말하지 않는 각자의 상처가 표면 아래에 고여있었다.

둘은 서로 사랑을 했다. 통하지 않을 마음이었다.

* * *

지리멸렬해도 전쟁이었다. 부상과 죽음은 언제든 그들 가까이 있었다. 차유진이 아무리 빠르고 사나운 용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용을 상처입히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작살이 그에게 날아왔을 때 그는 피하지 못했다.

난전의 한가운데였다. 추락을 면하고 요새로 돌아오는 게 고작이었다. 차유진의 부상으로 용 대신 말을 타고 돌아온 김래빈은 오자마자 그를 찾았다. 희게 질린 얼굴에 곧 울 것 같은 밭은 숨을 그의 비늘 사이에 쏟아낼지언정 김래빈은 울지 않았다. 울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작살을 뽑아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가 온몸을 매달려 작살을 뽑아내고 나서야 차유진은 인간의 모습을 취할 수 있었다. 언제나 보급품, 특히 의약품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처치를 받는 게 여러모로 나았다. 물론 뒤늦게 쏟아진 김래빈의 눈물을 닦아주기에도 날개나 혀, 꼬리보다는 인간의 손이 더 편리했다.

다음 날은 비가 거세게 내렸다.

용의 모습을 선호하는 차유진을 위해 요새에서는 반파된 건물을 얼기설기 수리해 통째로 그의 공간으로 넘겨주었다. 비를 가리는 방수천 너머로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석조 건물을 울렸다. 김래빈은 여전히 약 냄새를 풍기는 차유진에게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대어있는 용의 몸이 나지막한 숨소리를 따라 느리게 오르내렸다. 인간들이 머무는 공간은 따로 있었다. 그래도 그는 여기가 제일 편했다. 용과 기사 사이의 유대를 제하고서도 김래빈은 친해질 만하면 구성원의 면면이 바뀌는 이 요새가 좀 낯설었다.

“비가 오면 전투가 없으니까, 만약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린다면…,”

거기서 김래빈은 말을 멈췄다. 떠나온 고향의 방향을 더듬던 시선이 내리깔리더니 긴 한숨으로 흘러나왔다.

“아니야. 그보다는 전쟁을 빨리 끝내 평화가 오는 게 더 맞겠지.”

김래빈.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용의 투명한 홍채가 그를 향했다. 나랑 같이 도망쳐. 말이 혀끝까지 아슬아슬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그 말에 돌아올 답을 알아 차유진은 고개를 젓고는 그를 품에 둔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내 짝. 야속한 내 반쪽.

너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이미 두 번이나 짝 맺기를 거절당했다.

전승되는 전설에서는 마치 운명처럼 굳건한 신뢰 관계로 묘사되지만, 이 나라에서 용-기사 페어는 근본적으로는 계약 관계였다. 용과 기사 사이 페어 계약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친구처럼, 혹은 가족처럼 가까워진다고는 해도 용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오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의 수명에 비하면 인간의 삶은 너무 짧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건 용들에게 아주 어리석고 덧없는 일로 여겨졌다. 그래도 차유진은 귀하고 제멋대로 굴어 모두가 어려워하는 용에게 오로지 그것이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따라다니며 잔소리하는 김래빈을 마주했을 때부터 불가항력처럼 그를 사랑했다.

인간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용 모습인 채로 한 번. 처음에 고백했을 때는 거절의 이유를 듣지 못했고, 다음엔 용 모습이 더 좋냐고 물어보았다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는 고함만 들었다.

‘용이 짝을 버리는 일은 없다며.’

김래빈은 아주 나중에야 지나가듯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네 짝이라는 이유로 차유진 네가 여기 계속 붙잡혀있게 된다면 좀 싫을 것 같아서.’

그러면 같이 떠나면 되잖아. 차유진의 말에 김래빈은 고개를 젓고 나는 그럴 수 없지, 하며 그와의 사이에 선을 그었다.

‘너는 가도 돼. 잘못한 건 인간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 지켜야 할 게 있어.’

빌어먹을 책임감이었다. 차유진은 그러고도 몇 년을 더 머물렀다. 멈추지 않는 분쟁 속에 보급이 점점 더 줄어들고, 아군마저 하나둘 도망쳐 점차 황량해지는 요새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희망으로. 요새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로. 하지만 결국엔 한계였다. 떠나기 바로 전날, 노을이 내린 성의 꼭대기에서 김래빈을 제 위에 앉힌 차유진은 물었다.

김래빈. 여길 지키는 게 아직도 의미가 있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눈을 감았다.

그날 차유진의 거처에는 마치 떠날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비상약 몇 가지가 든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어둠에 몸을 숨긴 채 거대한 용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검은 그림자가 날개를 펄럭이며 저 멀리, 아주 천천히 사라져 갔다. 상부는 뒤집히겠지만 이미 놓친 용을 다시 잡을 방법은 없을 터였다. 성벽의 어두침침한 그림자 아래에서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던 김래빈은 이제 나도 무기를 들 때가 왔구나, 하고 쓸쓸히 중얼거렸다.

* * *

용은 정말 오래 살았다.

‘나중에 이 지역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지면 그때 다시 와 보자. 여기도 지금은 이렇지만 원래는 꽤 아름다운 곳이었대.’

밤을 새워 보초를 서던 어느 날 요새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김래빈이 소곤거렸던 말을 기억해낸 건 용이 요새를 떠나고도 아주 한참이 흐른 뒤였다.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곳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인간의 땅을 잊었던 차유진은 기억을 더듬어 옛 요새를 찾았다.

놀랍게도 그 땅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오랜 전쟁으로 훼손되어 쓸모가 없어진 땅은 그 어느 나라에서도 탐내지 않았다. 그렇게 잊혔다. 모든 게 폐허가 되어 그들이 머물던 요새도 터만 남아 자연만이 무성하게 덧없는 아름다움을 그리고 있는 그곳에서 차유진은 조금 허망해졌다. 이제 네가 그렇게 지키고 싶던 땅의 미래야, 김래빈. 우습지.

김래빈이 그리웠지만 만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았다. 그러나 차유진은 예상외로 제 기사의 흔적을 일찍 찾았다. 근처 묘비에 익숙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그 아래 생몰 연도를 보면서 차유진은 그래도 오래 살았다 중얼거렸다. 아마 새로운 용을 만난 모양이지. 용 없는 용기사는 보통 오래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유진이 모르는 게 있었다. 김래빈은 다른 용과 계약을 맺지 못했다. 이득 없는 전장에 새 용을 보내는 건 수지가 맞지 않는 일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용이 없는 용기사란 한낱 병사였고, 김래빈은 제 무기를 들고 전투에 나가 이리저리 소모되다 부상으로 퇴역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옛 요새 근처에서 전쟁에 떠밀려가며 살다 죽었다.

말년에 김래빈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데려다 건사하며 지냈다. 전쟁으로 부모며 터전을 잃은 아이들은 드물게 용이 뜨는 날에는 겁에 질려 울었다. 김래빈은 우는 아이들을 품에 안고 혹시 모를 위협을 피해 바위 뒤에 숨어 조곤조곤 속삭이곤 했다. 용이 다 저렇지는 않다고. 가끔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용은 아름답고 영리하고 경외할만한 종족이라고. 인간이 저 용들을 전쟁에 쓰는 게 잘못된 거라고. 그런 날 김래빈은 제 용의 검은 비늘과 빛나던 눈과 가끔 지친 날 말없이 제게 드리워주던 거대한 날개의 그늘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그런 이야기들을 차유진에게 전해 줄 사람이 없어 그는 약간의 배신감과 슬픔을 느끼면서도 그가 떠난 후로도 김래빈이 크게 힘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묘비를 내려다보다 변덕처럼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버려진 땅에 용이 산다는 소문이 느리게 돌았다. 용은 지나가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땅에 접근하려는 군사와 다른 용, 귀족들의 존재에는 퍽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행객 중 하나는 그 용이 언젠가 인간에게 길들었던 개체일 거라고 장담했지만, 인간이 용을 자유자재로 길들였던 것도 꽤 이전의 일이라 국경에 나타난 원숙한 용을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

폐허에 살 수밖에 없는 빈한하고 절박한 사람들은 곧 용의 그늘에서 조심스레 삶을 꾸리는 데 익숙해졌다. 용은 대개 일정한 구역에 머물렀고 그 땅을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놀랍게도 평화로웠다. 용은 대부분 김래빈의 묘비 근처 좁은 땅에 몸을 뉘이거나 근처 계곡을 선회하며 호수에 몸을 담갔다. 차유진은 그렇게 여러 해를 살았다.

어느 날 차유진은 땅에서 솟아나고 자라는 작은 보랏빛 꽃을 보았다. 그는 그 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김래빈이 알려주었던 수많은 초목 중 하나였다. 먹어도 되는 꽃이라고 그가 일러주었던 게 기억나 무심코 꽃을 땄다가 긴 줄기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꽃이 꼭 김래빈 같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뒤로 그 꽃을 눈여겨보았다. 그 꽃은 따로 키우지 않아도 봄이면 산과 들에 지천으로 자랐지만, 용의 몸뚱이를 전부 덮기에는 아무래도 수가 부족했다.

그는 오랜만에 인간의 모습을 취했다. 한때 김래빈이 충성했던 나라는 저 경계 너머로 물러갔으니 예전의 화폐를 그대로 쓸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인간의 땅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었다. 차유진은 주변에 서식하던 짐승 몇을 손쉽게 잡았고 그걸 다시 곡식과 돈으로 바꾸어 그 돈으로 작고 하찮은 꽃의 종자를 다량으로 얻었다. 그 종자를 묘지 주변 땅에 뿌리며 그는 온통 피어난 보라색 꽃들 사이에 파묻히는 상상을 했다.

다음 해 봄, 묘비 주변을 온통 뒤덮은 꽃 사이에 누워 잠들었을 때 차유진은 꿈을 꿨다. 다른 용과 페어를 맺지 않고 그를 기다리던 김래빈에게로 다시 돌아오는 꿈이었다. 김래빈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같이 떠나자며 웃었다. 둘은 전쟁도 슬픔도 없는 땅으로 날아가 인간의 짧은 생애 내내 서로 거리낌 없이 사랑했다. 차유진은 용이라 인간과는 그 기억력이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김래빈의 웃는 얼굴은 꿈속에서도 흐릿했다. 어쩌면 그가 실제로 웃는 모습을 본 게 아주아주 오래전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꿈에서 깨어난 차유진은 조금 울었다. 거대한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묘비를 툭툭 적시며 흘러내렸다.

* * *

시간이 계속 흘러도 여전히 그곳은 어떠한 국가도 차지하지 못했다. 지형이 바뀌고 나라의 이름이 달라질 때까지 차유진은 오래 그곳에 머물렀다.

용은 묘비에 이끼가 끼고 틈새로 식물이 자라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는 바람과 비에 묘비의 균열이 커지고 어설프게 새겨진 이름과 생몰 연도가 점차 지워지고 깨져가는 걸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묘비가 완전히 무너져 무성한 꽃들 아래로 사라진 그날 차유진은 묘 아래를 파헤쳤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김래빈에게 사과하지는 않았다. 묘비 아래에는 다 삭아가는 인골이 있었다. 그는 소박하고 녹슨 반지 두 개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와 김래빈이 나누어 끼던 반지였다. 요새를 떠날 때 그의 거처에 두고 갔던 반지가 소중한 것처럼 손가락뼈에 걸려있었다. 두 반지는 나란히 걸려있었는데 마치 잃어버릴 걸 걱정하듯 좀 더 큰 사이즈의 반지가 아래에 있었다. 그는 반지를 소중하게 챙긴 후 계곡 옆 널찍한 바위 위에서 다 삭은 뼈를 태워 날렸다.

차유진은 어느 날엔가 그 반지 두 개를 삼키고 사라졌다.

용은 사라졌지만, 그곳에는 그 뒤로도 보라색 꽃물결이 봄마다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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