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60분 – 놀이공원

주말이었고 꽃이 피었고 날이 좋았다. 놀이공원에 사람이 넘쳐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놀이공원 입구를 막 들어섰을 때 김래빈은 조금 당황했다. 예상보다 인파가 적었다. 조금만 기다림을 감수하면 어떤 놀이기구든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구밀도가 낮아서 그런가. 이 시기쯤 되면 간혹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사람이 몰리던 조국의 놀이공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한 그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라와 인구밀도는 달라도 놀이공원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노랫소리, 화사한 빛깔로 칠해진 각종 놀이기구, 여기저기 널려있는 간식과 기념품 부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성.

'뭘 해야 하지?'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쭉 걷다 그는 조금 어색하게 놀이기구 사이에 우뚝 섰다. 벤치에는 이미 한껏 지친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달래거나 먹이거나 옷을 추슬러 주고 있어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그에게는 썩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가 자랐던 강원도는 놀이공원이라고 부를 만한 게 마땅치 않았고, 그의 보호자는 먼 지역까지 그를 데리고 가 북적이는 인파에 치이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았다. 그래도 분명 한두번 정도는 그의 누나와 함께 사촌들 사이에 끼어 가 본적이 있었다. 그의 보호자는 어쨌든 그를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웠으므로,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는 손주들의 소망을 다른 자식의 손을 빌려서나마 들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다.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놀이공원의 상은 20대 때의 것이다. 그것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는 다시 놀이기구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각 놀이기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비어있는 펜스에 몸을 기대면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천천히 올라가며 내는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롤러코스터라도 타 볼까. 고개를 바짝 들어올리면 레일 사이로 햇살이 내리꽂혔다. 레일의 가장 꼭대기에 도달한 열차가 천천히 기울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하강이다. 점점 가속도가 붙어 굉음을 내며 내리꽂듯 떨어지는 열차를 따라 고개를 내리다가 비명과 함께 저 멀리 멀어지는 열차에 잠시 웃고 다시 시선을 돌리면,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차유진?"

난처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달래는 낯익은 얼굴. 무심코 불러버린 이름에 이쪽을 돌아본 차유진의 얼굴에도 언뜻 놀람이 스친다. 어, 어어. 무심코 손을 뻗어 예의 없이 사람을 삿대질하는 버릇도 여전했다. 누구야? 슬금슬금 차유진에게 붙은 아이가 제 딴에는 작게 속삭인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 들렸다. 차유진이 난처한듯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자 아이가 그의 옷깃을 몇 번 잡아당겼다. 뒷목을 몇 번 주무른 차유진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내 친구야. 아이가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크게 떠지는 눈이 언뜻 차유진을 닮았다.

"나 미리 말해. 내 아이 아냐."

조카라고 했다. 둘째를 임신 중이라 거동이 어려운 부모 대신 차유진이 아이를 데리고 놀러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아직 차유진이 그를 친구라고 소개하기 전 망설인 이유나 세상에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여러 복잡한 관계들이 있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렸다. 방금전까지 낯설었을 사람에게 금방 경계를 푼 아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혼자 회전목마를 타러 들어가버렸다. 혼자 보내도 괜찮아? 그의 질문에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 없어."

벌써 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 나무 위 아지트도 정복한 날다람쥐같은 말괄량이 오렌지인걸. 내가 함께 가면 오히려 싫어할걸? 영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퍽 애정이 묻어있었다. 김래빈이 알아들을 것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 혼잣말에 가까운 그 말을 그는 이제는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주황색처럼도 보이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는 별명이네."

그 반응에 차유진은 퍽 놀란 기색이다. 부모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동영상 촬영을 하던 손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개만 돌린 휘둥그레한 눈이, 역시 제 조카와 조금 닮았다.

"김래빈 영어 알아들어?"
"응. 내 커리어와 관련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좀 더 신경써서 배웠어. 여전히 간혹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 별 문제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제 일상적인 회화는 그럭저럭 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해. 그러니까 네게 영어가 더 편하다면 굳이 한국어를 쓸 필요 없어, 차유진."

오. 짧은 감탄사를 뱉어낸 차유진이 제 쪽을 돌아보는 조카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든다. 한 팔로 회전목마의 손잡이를 야무지게 움켜잡은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다시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동영상 촬영 종료 버튼을 누른 차유진이 반쯤 몸을 돌려 펜스에 기댔다. 표정은 조금 더 차분해진 채다.

"여기서 김래빈을 만날 줄 몰랐어.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어. 잘 지내? 김래빈 할머니 할아버지도 안녕하셔?"
"응. 다행이 건강하셔. ...여기서 널 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차유진이 사는 곳과 같은 지역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연찮게 다시 만나는 걸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놀이공원에서 그의 조카와 함께 마주치는 상상은 해본 적 없었다. 놀이공원을 고른 건 충동이었기에.

"놀러왔어? 혼자? 놀이공원을 혼자서라도 올 만큼 좋아했던가?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문장이 줄줄 흘러나왔다. 여전히 어조는 경쾌하고, 제스쳐는 조금 더 정신없어졌다. 그는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놀러왔다기보다는..."

그냥 와 보고 싶었다. 날씨가 좋았고, 마침 주변에 큰 놀이공원이 있었다. 아직 여행 예산은 넉넉했고, 놀이공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쩐지 롤러코스터가 보고싶었다. 그의 선명한 기억 속, 차유진과 함께 놀러갔던 20대의 놀이공원 나들이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던.

"나는 차유진 네 덕분에 롤러코스터가 퍽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거든."

어릴 적 사촌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을 때, 삼촌 부부는 날뛰는 사촌들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것처럼 힘들어해서 김래빈은 주로 그의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다. 그와 나이차이가 꽤 나는 누나는 아주 어린애들이 타는 놀이기구보다는 좀 더 스릴넘치는 기구들을 타고 싶은 눈치였다.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도 기억하기론 대개는 어쩔 수 없이 김래빈에게 맞춰 탄 것 같지만, 딱 하나, 롤러코스터만은 누나가 직접 골랐다.

키 제한을 그가 통과한 걸로 보아 아마 그 놀이공원에서는 비교적 어린 아이도 탈 수 있는 덜 무서운 롤러코스터였을 것이다. 그마저도 한바퀴 돌고 나니 무서워서 입을 꾹 다문 채 다음부터는 절대 롤러코스터는 타지 않겠다고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은 강렬하다. 20대가 된 김래빈도 롤러코스터는 타지 않으려 했다. 다시 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의 팔을 잡아끌던 차유진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롤러코스터를 무서운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우면 내 손 잡아!'

잔뜩 긴장한 채 안전바를 생명줄마냥 붙잡고 있는 그를 보며 킥킥댄 차유진이 손을 내밀었을 때, 김래빈은 망설이다 그 손을 꾹 부여잡았다. 하강하기 직전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고, 이리저리 쏠렸고, 비명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손에 있는대로 힘을 주고 있었다는 건 궤도가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릴 때야 알았다. 차유진은 손뼈 부러지는 줄 알았다며 장난스레 손을 털었다.

'재밌지!'

아직 조금 얼빠진 얼굴을 한 채 그들이 빠져나온 롤러코스터와 바닥을 번갈아 보고 있던 김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가 그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 추락하는듯한 부유감이 마치 해방되는 것 같았다.

"한번 시도해보니까 내 상상보다 덜 무섭다는 걸 알게되어서 그 후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두려울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면서 이것도 해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몇 번은 성공적이었고."
"와우.... 그건 분명 내 덕분이네!"
"응. 네 덕분이야."

언제나 동화같은 결말만 있지는 않았다. 몇 번은 도전이 실패로 돌아갔고, 몇 번은 결국 마지막 한 발짝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망설임이 길어질 때면 종종 생각났다. 다시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며 그를 잡아끌던 손의 온기와 경쾌한 목소리가.

"그럼, 김래빈 오늘 왜 왔어? 이번에도 뭔가 두려운 거라도 있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분명 처음 놀이공원에 들어설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멈춘 회전목마에서 달려온 아이가 차유진에게 안긴다. 익숙하게 아이를 들어올린 차유진이 무겁다고 불평하면서도 아이를 몇 번 흔들어주고 내려놓는다. 차유진의 손을 잡은 아이가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차유진 역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놀이공원에서 잠깐 만난 옛 친구와 내내 붙어다니는 건 역시 좀 이상하다. 적당히 안녕을 고하고 헤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또 우연히 만날 일은, 아마 다시는 없겠지.

그러니 다시 또 선택이다. 그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는 여전하다. 미국에서 일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확정된 건 없다. 그들은 이제 놀이기구 펜스 바깥에 서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나이, 놀이기구의 빛과 노래, 환상 속에서 한 발짝 벗어난 곳에 발 붙이고 서 있는 어른이 되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아직 꿈꾸고 싶다는 건 미련일까. 이 선택이 차유진에게 오히려 부담만 주는 건 아닐까. 고민은 계속해서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 성장을 끊어내듯 멀리서 흐릿하게 다시 롤러코스터의 굉음이 울렸다. 해보자며 제 팔을 잡아끌던, 언제고 상상 속에서 등을 밀어주던 손이 떠올랐다. 기억 속 얼굴의 주인이라면 아직 꿈을 꾸어도 좋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같은 얼굴을 한 현실의 차유진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결정했다. 두려움을 여전히 발 아래 둔 채 그는 입을 열었다.

"---"

한 발짝 내딛는다. 추락이다. 어쩌면 비행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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