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체관측동아리


목차

  • 태양
  • 금성
  • 낮달
  • 광년
  • 플라네타리움
  • 유성우
  • 별의 궤도
  • 오로라

태양

차유진이 그가 다니는 예고로 전학을 온 건 김래빈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듣기로는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했고, 오기 전부터 이미 데뷔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성한 소문의 당사자가 전학 온 그날, 그 반 복도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그도 들었지만 그 사이에 끼어들어 얼굴을 구경할 자신은 없었다.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다수가 모여들어 구경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실례되는 일이야.’

그때 그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구경하기 힘든 빽빽한 사람들 틈새를 흘긋 보고는 교과서를 끌어안고 이동수업을 위해 자리를 옮겼더랬다. 그러니 김래빈이 차유진을 제대로 마주친 건 그가 전학 오고도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차유진이라는 건 금방 알았다. 예고는 학생 수가 적었고, 새로운 얼굴은 드물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 김래빈은 왜 데뷔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아이들이 왜 그렇게 술렁였는지 알 수 있었다.

스쳐 가듯 본 게 다인데도 기억에 남을 만큼 눈에 띄는 얼굴, 그리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분위기. 실력도 만만찮아 댄스 실기를 담당하는 교사가 첫 수업에 벌써 차유진을 격찬했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를 건너 돌았다. 언젠가 프로듀스까지 영역을 넓히고 싶은 작곡 지망생으로서 그는 차유진을 눈여겨보았으나 그뿐이었다. 한 번쯤 같이 작업을 해 보고 싶은 건 김래빈의 소망일 뿐 그와 차유진은 반도, 교우관계도, 생활영역으로부터 습관까지 겹치는 게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절 지나쳐 가는 그를 보며 김래빈은 앞으로도 그와 친해질 일은 없지 않을까, 추측했다. 차유진이 폐부 직전의, 그가 속해 있는 천체관측 동아리를 찾아오기 전까진.

천체관측 동아리는 고 3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활동하지 않고 이름만 올라가 있는 선배들과 김래빈으로 겨우 최소인원을 맞춘 채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자율 동아리였다. 그마저도 신입생이 들어오지 않아 내년에도 동아리가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학교에서는 동아리에 예산을 많이 할당하지 않았고 천체관측 동아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낡은 장비로 겨우 구색을 갖춘 정도였다. 그러니 담당 교사도 거의 들르는 일 없는 학교 옥상 밑 동아리실을 처음 차유진이 열고 들어왔을 땐 적잖이 놀랄 수밖에.

‘너라면 네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동아리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잖아?’

어색하게 서로 통성명을 하고, 두어 번 복도에서 마주쳐 떨떠름하게 인사를 하고, 그러다 사소한 대화를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김래빈이 비로소 던진 질문에 차유진은 No,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안 해 본 거 좋아! 여기 자유로워서 더 좋아!’

그거야 선배도 담당 교사도 다른 학생도 없이, 오로지 김래빈과 차유진만 활동하는 동아리니 그럴 법도 했다. 심지어 차유진은 곧 데뷔를 목전에 두었다는 이유로 학교도 종종 결석하는 탓에 규정대로 한 달에 세 번씩 꼬박꼬박 활동하는 건 오로지 김래빈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간만에 차유진이 있었다. 본래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 아니지만 부분 일식 예고가 있어 미리 옥상 출입을 포함한 활동 허락을 받아 둔 때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차유진은 오늘 시간 괜찮은지 묻는 그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일식 관측이 가능한 시간에 맞추어 종례가 끝나자마자 학교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옥상에 자리를 잡은 채 초조하게 차유진을 기다렸다. 동아리에는 일식을 관찰할 때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할 만한 별도의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 차유진은 사정을 듣더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며 어딘가로 휭하니 가버렸다.

‘빨리 와야 할 텐데.’

혹시 차유진이 오기 전에 일식이 끝나버리면 어쩌지 싶어 그는 자꾸만 하늘과 옥상 문을 번갈아 보았다.

“김래빈 나 왔어!”

옥상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그는 차유진이 들고 흔드는 걸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납작한 사각형 물체 여러 개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게 뭔데? 셀로판지를 얻으러 미술 선생님께 간 게 아니었어?”

“나 물어봤어! 이게 더 좋대! 플로피디스크?”

차유진이 기묘한 물체의 쇠로 된 부분을 밀어 그 내부의 검은 디스크를 보여주더니 경쾌하게 외쳤다. 나 어떻게 하는지 배웠어! 김래빈 나 따라 해. 그는 차유진이 내미는 사각형의 물체를 머뭇머뭇 받아 들었다.

차유진을 따라 검고 반투명한 디스크를 눈에 대면 그 너머로 아주 조금 먹힌 해의 모습이 작고 붉고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날 둘은 옥상에 나란히 앉아 한 쪽 눈은 감고 다른 쪽 눈은 플로피 디스켓에 고정한 채 태양이 반쯤 이지러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거 불편해. 차유진은 조금 투덜거렸고 김래빈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태양을 맨눈으로 보면 눈이 상해, 차유진.

*




그런 날이 있었다. 별것 아닐 일이 기억에 오래 남는 건 김래빈이 이후 TV에서 차유진을 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는 까닭이다. 카메라와 TV라는 몇 겹의 가림막 너머로 보아도 차유진은 여전히 눈부셨고, 마치 태양처럼 차유진 역시 맨눈으로 보면 눈 어딘가가 상해버리는 존재인 건 아닐지 하는 실없는 상상을 그는 몇 번이고 해왔기에.

그리고 스물여섯 살. 작곡가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김래빈은 취직한 회사에서 그 어떤 가림막도 없는 차유진을 다시 마주쳐야 했다.

무대용 화장을 반쯤 지우다 만 얼굴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글리터가 반짝였다. 리모델링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회사 복도는 아주 밝았고 글리터와 무대의상의 장식들은 그 빛을 사정없이 반사해 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차유진을 똑바로 바라보기 조금 어려운 건 꼭 글리터와 쇠 장식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7년의 공백과 아주 오래 묵은 감정. 여전히, 혹은 그때보다 더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차유진. 오랜만이야. 덧붙이며 그는 하릴없이 쓸쓸해졌다. 그를 만나자마자 차유진이 부재하던 김래빈의 시간이 천천히 휘발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구석에서 비상등이 울렸다. 차유진은 그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김래빈 설마 나 기억 안 나?”

“그럴 리가. 방금까지는 공적인 자리였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여도 예의를 갖춰 대해야지, 차유진.”

그는 대학 때 들었던 교양을 떠올렸다. 신화와 인문이라는 교양과목이었다. 그때도 고지식했던 대학생 김래빈은 이카루스 이야기를 들으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을 보며 반갑다 웃는 차유진을 보면서 그는 알면서도 재앙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욕망을 이해했다.

그의 앞에 언제라도 그를 태울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잘못하면 추락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김래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샛별

데뷔가 확정된 게 아니라면 동아리 활동마저 대학 입시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 선택해야 하는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김래빈이 천체관측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첫째, 그는 대학 입시를 따져가며 동아리를 고를 만큼 썩 영악한 편이 못 되었다. 둘째, 그는 별 보는 걸 좋아했다. 셋째, 천체관측 동아리는 당시 신입생이 좀 급했다. 세 번째 항목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꽤 중요했다. 당시 2학년이었던 동아리 회장은 폐부의 위기를 맞아 엉성한 포스터를 기웃거리는 잘생긴 인상파 후배를 어떻게든 천체관측 동아리에 영입해야 했고 놀라운 말발을 발휘한 끝에 신입생을 성공적으로 낚는 데 성공했다.

천체관측 동아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동아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름만 남긴 채 활동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주 괴짜거나 대책 없이 낭만적이거나 둘 다였다. 동아리 회장은 괴짜 축에 속하는 사람으로, 금성에 반쯤 미쳐있어 종종 새벽에도 금성을 관측한다고 학교에 오곤 했다.

‘눈으로 보는 금성도 좋지. 하지만 금성의 매력은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부분에 있다고 난 생각해.’

간혹 회장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쏟아내곤 했다. 천체역학, 역행 자전, 중력 섭동, 대기 초회전…. 더 놀라운 건 회장의 그런 단어를 이해하고 받아쳐주는 사람이 천체관측 동아리에 꽤 많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두꺼운 물리학이나 천문학 책을 넘겨보다가 김래빈은 주저하며 물었다.

‘저, 선배님. 혹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 과학 분야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래도 저는 그쪽 분야의 지식이 희박한 편이라 동아리 활동을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혹시 저처럼 입문자도 읽을 만한 책을 선배님께서 추천해주신다면 기꺼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선배와 눈빛을 주고받던 동아리 회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그럴 필요 없는데. 네가 관심 있는 건 이런 분야 아니잖아. 그냥 하늘 보는 게 좋아서 들어온 거라며.’

‘하지만 다른 선배님의 사례를 보더라도 많이 알면 그만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선배님들과 대화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고요.’

좀 엉뚱해도 어쨌든 성실하고 의욕 넘치는 신입 부원을 보며 웃고 있던 다른 선배가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이 동아리에서 그나마 그의 인상에 주눅 들지 않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선배였다.

‘래빈아. 억지로 시야를 늘릴 필요 없어. 너는 지금도 열심이니까 궁금해지면 그때 찾아보거나 물어봐도 돼. 솔직히 회장 얘가 좀 또라이인 거지, 안 그래? 누가 고등학교에서 이런 걸 읽어. 여긴 심지어 예고라고. 과탐 선택과목이 열리지도 않는 곳인데.’

너 죽는다, 진짜. 회장의 주먹에 어깨를 맞으면서도 웃는 그 선배를 바라보다가 김래빈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도 두 분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건 궁금한 게 아닌가요?’

그것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동아리 회장은 순순히 인정했지만 책을 추천해주는 대신 그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런데 지금 넌 우리랑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금성에 흥미가 있어 궁금한 건 아니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지. 네가 더 깊게 알고 싶어지는 천체가 생기면 그 때 질문해.’

좋아하면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모르는 걸 찾다 보면 이전에 흥미 없던 분야까지 궁금해지고, 그렇게 되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읽어보게 되어있으니 지금은 물을 필요 없다고. 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었다. 회장은 그에게 동아리 회장직을 물려주고 홀가분하게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했고, 수시에 합격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마주치기 더 어려워졌다. 그의 가르침은 김래빈에게 인상 깊게 남았지만 그는 여전히 물리학도 천문학도 어려웠고, 심지어 근래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하늘 위에 떠 있는 별도 아니었다.

김래빈의 시선이 슬그머니 창밖의 차유진을 향했다. 얼마 전부터 붉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운동장을 활보하는 소년은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골을 넣었는지 즐거워하는 얼굴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친구랑 하이파이브를 하고, 그러다가 고개를 돌리고 이쪽과 눈이 마주쳤나 싶을 때 크게 손을 흔들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래빈!!! 나 골 넣었어!!!!!”

발성연습도 따로 하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아주 우렁찼다. 으악, 하고 몸을 움찔한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 질렀다.

“차유진, 이 바보야! 지금 수업시간인 거 몰……!!! …라…?”

그렇지. 수업시간이지. 급격하게 깨달음을 얻은 그의 고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말끝도 순식간에 소리가 줄어들었다. 제게로 쏠린 같은 학급 친구들의 시선과 교과서를 든 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국어 교사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김래빈. 국어교사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어질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밖에서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나 김래빈 위로해. 김래빈 이거 먹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90도로 몸을 숙이며 사과하는 김래빈에게 교사는 푹 한숨을 흘리고는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게 하라며 딱딱거리고 사라졌다. 교대하듯 올라온 차유진은 잔소리를 시작하려던 그의 입에 제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냅다 밀어 넣었다. 점차 서늘해지는 날씨에 반팔 하나 입었으면서도 그에게서는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뛰어서겠지. 희미하게 풍기는 땀 냄새를 인지하며 그는 일단 제게 물려진 하드를 베어 물었다.

“입에 그렇게 갑자기 먹을 걸 넣다가 상대가 사레라도 들리면 큰일 나잖아! 상대방의 의사를 묻고, 그냥 건네주는 걸로도 충분해.”

“의사? Oh. I see. 그거 Doctor 아냐! Opinion이야! 그럼 김래빈 아이스크림 먹어?”

“…물어보는 건 입에 넣기 전에 해야 한다니까, 차유진.”

졸지에 한 입 더 강요당하게 된 아이스크림은 귤 맛이었다. 차유진은 아주 단 맛도 좋아했지만 한두 번씩은 꼭 이렇게 새큼한 맛을 찾았다. 그래도 자신이 먹던 채로 나눠주는 일은 드문데 오늘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제가 알고 있는 차유진을 찬찬히 되새겨보았다. 활동적인 일이라면 운동이든 춤이든 가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데 요령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주 가끔은 부상도 무섭지 않은 것처럼 승부욕에 몸을 던진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하이 톤의 목소리를 내면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댈 때는 톤이 퍽 낮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굴 때도 많고. 같은 반에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는 둘에서 셋 정도. 발이 넓으면서도 방과 후 동아리실에 들를 때에는 그 누구도 데려오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차유진과 음악이나 별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그 역시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더 많지만….’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여기로 전학 오기 전에는 어땠는지, 왜 가끔은 제게 그렇게 거리낌 없게 구는 건지. 누구와 데뷔 조를 이루고 있으며 저와 있는 시간은 충분히 즐거운 건지…. 반으로 돌아가는 차유진의 등을 바라보며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헤아리다가 김래빈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를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금해지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보게 되는 이유. 이제는 회장이 아닌 옛 선배의 목소리가 고요히 그의 마음을 울렸다.

‘좋아하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

낮달

열여덟의 차유진은, 김래빈이 쉽게 잊힐 인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서워서, 스물여섯의 차유진은 미팅 룸에서 서로 인사할 때까지도 김래빈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처음엔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고, 김래빈이라는 이름을 들은 그 다음에야 어렴풋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을 기억해냈다. 

사람의 기억은 놀라운 데가 있어서, 하나가 생각나기 시작하자 연관된 기억이 사슬마냥 줄줄이 딸려오기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결국 고등학교 때까지 거슬러 살아나 그는 김래빈에게 웃으며 물었다.

“김래빈 아직도 별 봐?”

상대는 의외의 답을 했다.

“군대 이후로는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왜? 하고 묻는 그에게 김래빈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한국에 머문 지 벌써 9년이 넘은 차유진에게 여전히 고등학교 때의 습관이 남은 것처럼 어휘와 발음을 신경 써 가며.

“서울은 별이 잘 안 보이는데, 장비는 값이 비싸서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거든.”

그는 약간 그늘진 김래빈의 눈 아래와 익숙하게 노트북을 펴는 손, 그리고 좀 더 두꺼워진 안경을 순서대로 훑었다. 어른이 된 그는 조금 더 피곤해보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조차 없었던 걸까. 차유진은 입술을 알게 모르게 삐죽였다. 미팅 룸에서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여전히 음악에는 진심인 것 같았지만.

너 고등학교 때에는 장비가 있건 없건 하늘을 봤잖아. 그는 그렇게 물어보려 했으나 김래빈으로부터 먼저 질문이 돌아왔다.

“너는?”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바쁜 몸이었다. 그것이 무대 조명이건 카메라 플래시건, 쉴 새 없는 빛을 받고 있노라면 그가 스스로의 직업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때때로 빛이 피곤했다. 저 멀리서 빛나는 것들을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었다.

“그거 봤어, 한국어로, umm…, 낮달?”

새벽부터 차를 타고 스케줄을 위해 여기저기 이동할 때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면 종종 낮달이 보였다. 빛나지 않지만 거기에 있고, 곧 태양빛에 사라져버릴지언정 그때까지는 마치 그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내내 보이는 희고 뚜렷한 형상.

그렇구나. 김래빈은 짧게 긍정하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옛 친구를 차유진은 가만히 기다렸다. 고등학교 때에도 김래빈은 간혹 저랬다. 열심히 생각했고, 제멋대로의 답을 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엔 썩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너희 반 김래빈 있잖아. 잘생겼긴 한데 좀 무섭지 않아?’

차유진은 어느 날 복도에서 스쳐들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걔 그렇게 무서운 애는 아냐. 착해. 근데 좀 독특해. 말을 못 걸겠어.’

키득거리며 흘러나온 대화에는 딱히 악의가 없었지만, 글쎄. 김래빈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 배제되었다.

“차유진 너는 고등학교 때에도 별을 좋아해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뒤로 별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응. 그래도 동아리 가끔 재밌었어.”

김래빈의 결론에 그가 산뜻하게 긍정하면 김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곳엔 둘 뿐이었다. 매니저는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에 적당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를 오래 담당해 온 매니저는 그의 성격을 파악한 후로는 종종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다. 좋은 처세였다. 덕분에 그는 이 화려하고 차고 비정한 세계에서도 적당히 건강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둘만 남아서 차유진은 한층 편하게 물을 수 있었다.

“김래빈 내 무대 봤어? 내 노래 어때?”

차유진은 자신이 꽤 성공한 아이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의 노래 역시 찾아듣지 않아도 쉽게 들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아까 미팅룸에서 김래빈이 회사 관련자와 주고받던 이야기에서도 그가 차유진의 노래를 들었다는 전제가 당연한 것처럼 깔려있었지만 그는 김래빈에게서 친구로서 해줄만한 좀 더 개인적인 감상을 듣고 싶었다.

예상대로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상대의 입에선 그가 원하던 방향의 감상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의 전 작업을 내가 함부로 평가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야. 특히 생산적인 피드백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하물며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후임자인 내가 너에게 전임자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봐.”

무대나 노래에 대해 물으면 신나서 차유진이 모르는 부분까지 줄줄이 늘어놓던 열여덟 살 김래빈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대신에 예의와 규칙을 따박따박 잔소리하던 김래빈만 그대로 남았다.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김래빈이긴 했다. 차유진은 샐쭉하니 턱을 괴었다.

“그 노래 내가 불렀어. 나도 피드백 받을 자격 있어. 김래빈 무례한 거 걱정되면 그 사람 말고 내 피드백 주면 돼.”

솔직하게. 그는 그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은 통할 모양이었다. 김래빈이 다시 말을 골랐다. 생각에 잠긴 눈이 길게 가늘어진다. 동공이 허공을 향했다. 네가 떠올리는 무대는 이제까지 했던 내 많은 무대들 중 무엇일까. 차유진은 턱을 괸 채 답을 기다렸다. 김래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네 표현력은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좋았고 무대로 볼 때에도 여전히 굉장한 박력이 느껴져. 하지만 가끔 무모한 퍼포먼스가 눈에 걸리거나 애드리브가 불필요하게 많을 때가 있는데, 안무를 네 마음대로 변형하는 게 꼭 좋은 결과로만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조언을 먼저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신중하고 그만큼 가차 없는 평이었다. 차유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까지 이쪽 업계에 취직한 바 없던 김래빈이 안무가와 가끔 삐걱거리는 제 속사정까지는 모를 텐데도. Right. 네 말이 맞아. 동의하며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건 자신의 무대를 여러 번 본 이후에 나올만한 분석이었다. 애드리브와 안무의 구분은, 동일한 무대를 여러 번 봤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일이니까.

“김래빈 내 무대 많이 봤어?”

거짓말을 잘 못하는 김래빈은 대답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네 무대라면, 아마 볼 수 있는 건 전부. 돌아오는 간결한 대답에서 차유진은 김래빈이 의도치 않게 말에 엮어낸 감정의 결을 읽는다.

김래빈은 음악에 진심이니 많은 무대를 챙겨보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건 사실이니 어쩌면 그의 무대를 좀 더 집중해서 봤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볼 수 있는 걸 전부 챙겨보고 그 차이를 비교하는 건 제 팬 중에서도 아주 열성적인 이나 그러할까.

차유진은 아주 뒤늦게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잊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기억을 끌어올렸다. 때때로 제게 붙던 조심스럽고 열 띤 시선을, 고개를 돌리면 높은 확률로 김래빈과 눈을 마주쳤던 것을.

우습게도 다시 낮달이 떠올랐다. 저 멀리서 그를 따라다니던 것처럼 보이던 희고 고요한 그 무엇.

광년

차유진은 가이드보컬의 목소리가 더해진 제 솔로곡을 주의 깊게 들었다. 큰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나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곡에 색이 덧입혀져 있었다. 이전의 데모버전에선 없던 변화였다. 별빛처럼 톡톡 튀어서 그에게 잘 어울리는 그 색에서 그는 고등학교 때의 김래빈이 자주 쓰던 기법의 흔적을 읽어냈다. 익숙하게, 한층 더 원숙해진 채로 김래빈은 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네 동창, 실력이 꽤 좋은 모양이야.”

매니저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끼어들었다. 그는 기쁘게 긍정했다.

“나도 알아요. 김래빈은 brilliant하니까!”

김래빈의 재능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첨예했다.
둘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천문 관측 동아리는 그 특성상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늦은 밤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연습을 빠지고 싶은 날이면 차유진은 학교 동아리 핑계를 대며 별을 보다 갔다. 별을 보다 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별 보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별이 뜰 때까지 동아리실에 누워 노닥거리거나 김래빈을 졸라 별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으니까.

그 이야기조차도 듣고 싶지 않을 때면 차유진은 김래빈이 하나 둘 쌓아둔 습작들을 제멋대로 듣곤 했는데 아직은 터치가 거친데도 하나같이 선명하던 그 곡들을 떠올리면 그가 스물여섯에야 커리어를 시작한 건 그의 기준에선 한참 아까운 일이었다. 대학이며 군대며 그런 것들이 다 뭐라고.

물론 차유진은 알았다. 재능과 별개로 김래빈이 맞춘 것처럼 그에게 맞는 편곡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차유진을 잘 알고 오래 지켜봐 왔기 때문이란 걸. 그 근간에는 김래빈의 감정이 있었다. 그가 눈치 챈, 눈치채버린.

물론 그 고지식하고 작곡을 사랑하는 김래빈이야 사람을 가려가며 일감에 공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취향이 분명하고 안목이 있으니 그의 무대는 틀림없이 그 마음에 들었을 테고, 특히나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상대라면 별 사감이 없더라도 계속 챙겨 봤겠지. 그러나 이런 독특한 강조는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 이건 그보다는 좀 더 사적인 질감이다. 무대 밖의 차유진, 그러니까 일상에서밖에 드러날 수 없는 그의 성격, 성향, 특징,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모으고 걸러 이제까지 차유진이 무대에서 잘 보여주지 못했던 매력의 색을 입혀 곡으로 뽑아내는 그 솜씨.

그거야말로 김래빈이 한 때 그를 내도록 생각했음을, 몇 번 안 되는 동아리에서의 만남과 일과 속에서의 엇갈림에서 집요하게 차유진을 그 시선 끝에 두었음을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든이 이걸 알게 되면 감 다 떨어졌다며 놀렸겠는걸.’

왜 그 때는 눈치를 못 챘을까, 궁금해하며 차유진은 다시 곡을 재생했다. 다시 별의 반짝임이 튀었다.

노래 가사건 팬서비스건 아이돌로 살다 보면 별별 비유와 표현, 의미부여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지구에 닿는 별빛이 사실은 저 먼 우주, 빛의 속도로도 몇 십 년이 걸리는 거리에서부터 왔음을 노래 가사로 배웠다. 정작 별을 보던 동아리에서는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지식 토막이었다.

별빛처럼 몇 년을 흘러 그에게 도달한 감정의 흔적을 허밍으로 더듬어가다가 차유진은 그 별의 현재가 못내 궁금해졌다. 8년이라는 시간은 김래빈에게 꿈처럼 길었을지, 혹은 어제처럼 짧았을지, 김래빈의 감정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일지.

‘뭐. 곧 알 수 있겠지.’

차유진은 김래빈과 잡은 다음 약속을 떠올렸다.

플라네타리움

김래빈은 빈말을 할 줄 몰랐고 차유진은 그 뿌리를 이 나라에 두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관용구로 받아들였을 언제 밥 한 번 먹자던 그 흔한 약속은 그 둘에게는 결국 두 번째 만남을 예고하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차유진과 그는 활동을 앞둔 차유진의 식단 조절용 메뉴를 앞에 두고 다시 만났다. 

약 8년 동안 연락도 거의 없던 동창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오로지 사소한 몇 개의 기억과 음악, 음악뿐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마치 비즈니스 미팅처럼 차유진의 솔로곡으로 넘어간 그의 작업을 대화주제로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차유진은 여전히 차유진이라, 어색하게 시작한 그 대화가 김래빈의 작업 겸 개인공간을 즉석으로 방문하는 것으로 결론 나는 데에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공간 안에서도 차유진은 주눅 들지 않고 그의 곡들을 들려주기를 요구했고, 심지어 미완성곡 중 하나를 다음 앨범에 쓰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조르며 이제 고작 팀의 막내이자 경력 반년 차 김래빈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군기가 바짝 든 신입사원 김래빈은 규칙과(“차유진! 회사에는 체계와 절차라는 게 있어!”) 상식을(“내 경험이 아직 프로젝트를 주도하기에는 변변치 못해”) 들먹여가며 겨우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억누르곤, 묘하게 불만 가득해진 차유진의 주의를 돌릴 겸 작곡 프로그램의 창을 열고 음을 찍었다.

정말 별 거 아니었다. 비록 김래빈이 차유진이 탐내던 그 미완성곡의 빈 공간을 습관적으로 차유진에게 어울릴만한 요소들로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긴 했지만, 곡의 밀도가 높아졌음 높아졌지 김래빈과 차유진 사이에는 뭔가를 촉발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어진 차유진의 질문은 그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재앙이었다.

“김래빈 나 좋아해?”

키보드를 만지던 손이 삐끗, 어긋난 건반을 누른 탓에 뜬금없는 불협화음이 작업실을 울렸다. 차유진은 폭탄 같은 말을 던져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이어트용 탄산음료 병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김래빈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가, 모니터 속 마디에 어울리지 않는 흔적을 남긴 그의 동요를 꾹꾹 눌러 지웠다. 눈치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은 지금보다도 더 많이 서툴고, 사람들은 종종 그가 속내를 전혀 감추지 못한다고 평했으므로.

그래도 혹시 몰라 그는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그 좋아함이 혹시 친구 사이의…,”

어림도 없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빤히 절 보는 차유진의 얼굴이 김래빈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좋아했어. 옛날에, 고등학교 때.”

그는 기어이 자백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시선을 내리깔며 김래빈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자신의 부끄러움은 차유진에게 그대로 탄로 났으며 곧바로 다음 질문이 떨어질거란 것도 모르고.

“그럼 지금은?”

“뭐?”

“지금도 내가 좋아?”

그가 되물은 건 질문을 다시 듣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지만 차유진은 회피하지 말라는 양 다시 한 번 물음을 못박았다.

“그건 왜 묻는데?”

그는 대답 대신 이유를 물었다. 아까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었던 것은 차유진과 그가 공유했던 저 옛날의 시간과, 그를 일방적으로 바라봐왔던 그간의 날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재회하고 나서 이제 고작 두 번째, 일로 묶인 남에 가까운 사이.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착각을 할 만한 어떤 일도 없었다.

차유진은 대답 대신에 나지막하게 허밍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다른 사람이 만든 뼈대와 살에 그가 몇 번의 터치를 덧대어 그에게 넘겼던 곡이었다. 그에게 갈 것이 분명해 작업 내내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유진을 생각하며 덧대었던 아주 소소한 부분에서 정확하게 끊은 차유진이 여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듣고도 발뺌할 거야? 시선에서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옛날 몰라. 이거 김래빈 최근에 작업한 거야. 이거 듣고 알았어. 김래빈 나 계속 생각했어.”

그는 침묵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몰랐구나.

“그럼 앞으로는?”

“…….”

“김래빈?”

“…모르겠어.”

침묵은 별 소용이 없었다. 김래빈이 패배를 선언했다.

차유진은 데뷔를 하자 학교에 나오는 날이 점점 더 적어졌고 그 역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동아리 활동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부원을 맞이하지 못한 천문관측 동아리는 곧 폐부되었다.

차유진과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동아리 외에는 딱히 연락할 용건으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데뷔 후에 얼마나 바쁠지 충분히 짐작 가니 용건 없이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꾸준히 연락하기도 좀 그랬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고는 혹시 들킬까 더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

그래도 한동안은 때때로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아주 간간히 뒤늦은 답장이 왔다.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도 스크롤을 내리면 그의 메신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차유진과의 대화방은 김래빈이 대학에 가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점 아래로 밀려나갔고, 번호를 바꾸었는지 대화방 너머의 상대가 사라진 이후로는 몇 번의 업데이트와 데이터 초기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졌다.

그 뒤로는 오로지 화면 너머의 차유진만이 존재했다.

차유진은 잘 나가는 아이돌 일원 중 한 명이었고 청소년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그와 같은 예고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김래빈에게 학창시절의 차유진을 묻곤 했다. 그 때마다 그는 말을 아끼며 고개를 저었는데 그의 성격과 주변머리를 아는 사람들은 으레 같은 학교라도 친하진 않았나보다, 하고 결론 내렸다.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차유진과의 추억이 다른 사람에게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지 않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

고등학교 때의 차유진은 그의 이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춤도 재능도 상관없이 그저 오롯이 차유진이어도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김래빈은 종종 닿을 수 없는 화면 속 차유진이 낯설었다. 그가 알고 있던, 제 옆에서 말하고 움직이던 차유진과 연예인 차유진은 가끔 다른 사람 같았다.

‘화면 속 차유진도 어쨌든 차유진일 텐데.’

그는 때로 그가 기억하고 있는 차유진이 실제의 차유진인지 아니면 그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의 차유진인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가 그리웠지만 저 차유진이 제가 그리워하는 그 차유진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화면 속의 차유진을 보면 친숙한 듯 낯설고, 존재감만이 폭력적이었다.

8년 동안, 살아 숨 쉬던 언젠가의 차유진이 점점 화면 너머 우상으로, 그리고 다시 관념으로 제 안에서 변해가는 과정을 그는 전부 겪었다. 장막에 투영된 가짜의 별을 보는 것처럼,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어떤 존재를 더듬는 것처럼. 차유진이 소속된 회사에 들어가면서도 재회할 때까지 그를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지금의 네가 비현실 같아. 가만히 말을 삼키다가 그는 아, 하고 떠올린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어느 쪽이든 일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야, 차유진. 애초에 우리가 마주칠 일이 많을 리도 없고.

유성우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이었다. 사람들이 맨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제법 많은 양의 유성우가 떨어질 거란 예측은 큰 사건 없던 연말의 소소한 뉴스거리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별은 웬걸. 차유진은 하늘 한 조각 볼 수 없는 서울의 어느 엔터 사옥 지하 연습실에 드러누워 있었다. 데뷔를 앞두고 예정자들을 갈아 넣는 바쁜 스케줄은 그 차유진조차 별을 보러 잠깐 나가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유성우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몇 달 전부터 알게 모르게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김래빈과는 달리 그가 천문관측 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는 별이 좋아서가 아니었으니까. 떨어지는 별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그 오래되고 로맨틱한 기원행위를 진심으로 믿는 건 어린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아직 만으로 열여덟 살에 불과한 차유진은 섣부르게 으스댔다.

‘김래빈? 김래빈은 그럴 수 있지.’

김래빈은 생일도 그보다 한참은 늦을뿐더러 묘한 구석에서 순진해빠진 데가 있었으니까. 그는 코웃음 쳤다.

그럼에도 고작 별 하나 못 봤다고 이렇게 삐딱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 아마도 그가 여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데뷔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데뷔 조 사이에서는 안도와 초조가 동시에 돌았다. 서로 대칭을 이루는 감정이 양보 없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아닌 듯 은근히 날을 세웠고, 차유진 역시 그 속에서 유례없이 피곤했다. 갑갑했다. 어딘가 탁 트인 곳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군중 속 고독이라도.

지하실에 벌렁 드러누운 그에게 데뷔 조 동료 몇 명이 숙소에 안 들어갈 거냐며 말을 걸었지만 차유진은 설렁설렁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래. 그럼 내일 봐.”

굳이 그의 곁에 남아있지도, 그를 끌고 돌아가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의 동기들은 적막을 남기고 사라졌다.

연습은 끝났으니 지금 주차장에라도 나가면 별똥별 한 두 개 정도는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유진은 미적미적 몸을 굴렸다. 막상 볼 수 있다고 하니 내키지 않았다. 빛공해 심한 이 도시에서 가느다란 빛줄기를 찾을 일이 막막해서일지, 아니면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유성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넬 누군가가 없어서일지.

그는 맥없는 손길로 휴대폰을 죽 끌어당겼다. 김래빈은 평소에도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답장은 성실하게 잘 해주었지만 먼저 연락을 하는 건 용건이 있을 때 정도일까. 방학을 맞아 간만에 조부모를 본다 했으니 핸드폰은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두었을지도 몰랐다. 김래빈의 교우관계야 올해 전학 온 그보다도 빈약했고, 묘하게 올드한 데가 있어 십대들이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만한 이유를 차지하는 태반의 것들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도 시시콜콜 연락을 하는 편도 아니었고. 최근에는 바쁘다고 휴대폰을 버려둔 지도 꽤 되었다.

‘마지막 연락은, 가만있어보자. 언제였지?’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별을 볼 게 아니라면 이제는 진짜로 몸을 일으켜 숙소로 돌아가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켰다. 켜자마자 울리는 각종 알림은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를 찾는 친구들, 시답지 않은 연락들, 아, 동생한테 온 메시지는 좀 이따가 체크하기로 하고.

“음?”

알림을 손가락으로 연신 넘겨 없애던 차유진이 영문 모를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김래빈. 이름 세 글자로 저장해두었던 연락처가 그 알람들 사이에 조붓이 끼어있었던 탓이다. 무슨 일 있나, 하고 대화창을 열면, 항상 사담 없이 말풍선을 꽉 채워 용건을 보내던 김래빈답지 않게 짧은 몇 마디와 영상 한 개가 올라와 있었다.

[서울은 별이 잘 안 보일 테니까.]

차유진은 영상을 재생했다. 까만 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줌을 엄청 당긴 것 같았지만 휴대폰으로 직접 촬영한 건지 화질은 좋지 않았다. 1분 30초 남짓? 영상은 길지 않았다. 그는 영상을 다시 한 번 재생했다. 먼지인지 뭔지 모를 작은 점들이 겨우 별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 그 사이에서 몇 줄기인가의 실선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김래빈 이거 뭐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메시지 옆의 숫자가 사라졌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차유진은 이어폰을 연결했다. 곧 메시지가 떴다.

[너 요새 연습 때문에 바쁘다며. 유성우까지 챙겨 볼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찍었어. 그래도 강원도가 서울보다는 별이 잘 보이니까. 더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은 그게 내 휴대폰 한계야.]

그 뒷말은 약간의 텀을 두고 도착했다.

[너는 아마 이런 게 없어도 잘 하겠지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응원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친구 입장에선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는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소리의 볼륨을 조금 더 키우자 적막 사이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잘 안 보이네. 속삭임에 더 가까운 목소리였다. 작은 한숨 소리, 그리고 추운 듯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는 소리. 추운 겨울이었다. 강원도는 서울보다 더 춥다고 했던가, 따뜻하다고 했던가. 그 소리를 들으며 차유진은 김래빈이 몇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렸을 지를 어림해보았다.

화면은 일정하지 않았고 가끔 떨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노이즈가 잔뜩 낀 어둠 속에서 다시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가느다란 빛줄기가 하나, 둘.

차유진은 웃고 있는 제 입가를 문질렀다. 놀랍게도, 위안이 되었다. 천문대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유성우를 송출하는 이런 시대에 잘 찍히지도 않은 핸드폰 영상을 직접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It’s so sweet of you. 고마워. 나 더 열심히 해. 그를 응원했던 사람들에게 보내던 상투적인 문구 대신 그는 김래빈 소원 뭐 빌었어? 하는 뜬금없는 말이나 보내길 선택했다. 곧 돌아온 김래빈의 답장은 정말로 그다웠다. 조부모의 건강, 안녕, 누나의 건강과 성공, 선생님들과 그가 아는 사람들의 건강, 내년의 희망….

[물론 차유진 너도 마찬가지고.]

신기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의 부귀영화 대신 의미 있는 타인의 행복을 줄줄이 늘어놓는 어느 남자애의 리스트 마지막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꾸 웃음이 난다는 건.

그 순간 차유진은, 그 스스로도 명확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스치듯 아주 짧은 소망을 가졌다. 그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혔고, 김래빈의 존재 자체가 흐려지며 다시 꺼낼 일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별을 향한 궤도에서 이탈해 세상에 부딪혀 깨지더라도, 산산조각난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줄기로 겨우 흔적을 남기다 사라지더라도, 어느 다정한 누군가의 옆에 내려앉아 그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노라고.

별의 궤도

[It’s me, 래빈! 전화 저장해.]

이름 한 글자 없어도 저절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히는 메시지였다. 그는 발신인 칸에 표시된 열 한 자리의 숫자를 눈으로 반복해 훑었다. 저번에 명함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매니저의 번호와도 달랐고,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차유진의 학창 시절 번호와도 달랐다. 차유진의 개인 번호인 모양이었다. 

[차유진?]

답장을 보내면서 그는 의외라고 중얼거렸다. 차유진의 솔로 활동 작업이 끝난 뒤로 그를 한동안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데뷔한 지 만 7년. 재계약을 앞두었으나 그 가능성은 불투명한 그룹의 활동을 회사가 제대로 지원해줄 것 같지 않다는 게 김래빈이 속한 팀의 중론이었다. 그 그룹이 한동안 앨범 낼 일이 없으니 공적으로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사적으로 만나기에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가 껄끄러웠다.

‘어느 쪽이든 일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야, 차유진. 애초에 우리가 마주칠 일이 많을 리도 없고.’

그 말에 차유진은 잠시간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 눈치로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표정 변화가 풍부해서 다행이라고 한때 생각했던 얼굴이 알 수 없게 적막한 채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채 흘러가던 시간이 일초, 이초, 삼초.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그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하나 둘 띄울 때쯤 느지막한 답이 돌아왔다.

‘응. 김래빈은 그럴 거야.’

자신을 좋아하는지를 캐묻던 사람치고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기뻐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아쉬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나오지 않는 손, 애매하게 내리깔리던 시선. 

그러고는 활동기간 내내 연락이 없어서 김래빈은 역시 만날 일이 많지 않으리란 제 예측이 맞았구나 싶었다. 그는 대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방송을 틀었다. 그가 좀 더 정교하게, 조금 더 풍부하게 다듬은 곡을 덧입은 차유진이 거기에 있었다. 여전히 반짝이고, 예전만큼 사무치게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 김래빈 나랑 별 보러 가!

“갑자기?”

- 예약했어! Camper van? 매니저 형이 별 잘 보이는 곳 찾았어. 김래빈 안 바쁘면 나랑 가.

예약한 날짜라며 차유진이 읊는 숫자를 그는 달력에서  찾아보았다. 연차를 낼 필요도 없는 주말. 토요일에 출발해 일요일에 돌아온다면 몸이야 좀 피곤하겠지만, 회사에는 당장 급한 일이 없으니 일에 큰 지장은 없을 터였다. 마치 노린 것 같은 날짜 선정이었다.

“따로 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차유진, 넌 나랑 가도 괜찮겠어?”

우리는 아마 어색한 사이로 남았다가 서서히 멀어지리라 비관했던 이성이 끝내 말끄트머리에 조심스러운 질문을 붙인다. 돌아오는 답변은 명쾌했다. 

- 난 김래빈이랑 가고 싶어.

결국 그는 같이 가겠노라고 대답한 후 통화를 끝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번부터, 정확히는 차유진이 그의 감정을 알고도 별 대응 없이 돌아갔을 때부터 모든 게 뭉그러지고 경계선이 흐려져 서로 섞이는 느낌이었다. 차유진을 향한 그의 감정도, 차유진이 그와 맺고 싶어 하는 관계도, 그와 차유진 사이의 거리도, 그래서 그 자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지도.

‘차유진은 저번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지도 몰라.’

이건 차유진이 미국인이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나이를 먹어서일까. 차유진은 워낙 단순하니까 이 일도 별거 아니라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에게는 고백이 너무 흔해서 감흥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김래빈이 그의 옛 여자 친구처럼 쿨하게 굴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 아주 예전에 들었던 차유진의 연애사를 떠올리며 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안 된다 핑계를 대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는 차유진에게 다시 연락하는 대신 캘린더 앱에 일정을 추가했다. 미련인 걸 알면서도 보고 싶었다. 

차유진, 별, 캠핑. 그 와중에도 셋 중 설레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




별 보러 가는 캠핑. 김래빈은 열여덟 살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비슷한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 가 보진 못했다. 미성년자끼리는 숙소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연습생이 회사가 정해준 연습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둘 다 보호자가 강원도에, 그리고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고로, 보호자 동반을 기대해볼 수도 없었다.

“학교 옥상 빌리는 것도 실패했어. 그때 선생님, Hmm…. 뭐라 했지?”

“아무리 부 활동이라도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활동은 안전 및 형평성 문제로 학교에서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을 걸. 그리고 학교를 벗어난 캠핑은 허가해줄 수 없는 활동이라고 했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대충 비슷한 내용이었을 거야.”

“나 아직도 이해 못 해….”

삼각대를 설치하는 그의 옆에서 차유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위로 묵직한 카메라를 올리고 핫팩을 뜯어 흔들면서 그는 책임소재의 문제인 거겠지, 하고 덧붙였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왜 기록과 절차가 그렇게 중요한지, 왜 어른들은 어느 순간 몸을 그렇게 사리는 것처럼 보였는지. 비겁한 이해와 여전한 무지, 실낱같이 살아있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그 역시 천천히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웃음처럼 한숨이 샜다.

“이제 불 꺼?”

김래빈이 카메라를 세팅한 걸 확인한 차유진이 캠핑카의 모든 등을 껐다. 사위가 캄캄해졌다. 조리개를 잔뜩 넓혀 둔 카메라 액정에 밤하늘이 떴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단발의 셔터 음을 시작으로 설정해놓은 간격에 맞춰 데이터가 하나하나 쌓이기 시작했다.

별의 일주운동. 지구의 자전에 맞춰 별이 남기는 궤적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그들은 아주 오래도록 동일한 공간을 찍을 예정이었다. 이것도 고등학교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그 때는 엄두도 못 냈던 고스펙의 카메라를 이틀 동안 대여하는 게 지금은 너무나도 쉬웠다.

“추워.”

어둠 속에서 패딩을 걸친 차유진이 조심성 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곁에 앉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겨울밤이란 대개 차고 시리고 바람이 날카롭기 마련이었다. 잔뜩 준비한 핫팩을 하나 더 그의 손에 얹어주고, 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차유진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카메라가 빛에는 예민해도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추우면 들어가 있어도 돼. 어차피 사진은 자동으로 찍히잖아. 넌 이제 아이돌이니 목도, 몸도 아껴야하기도 하고.”

나 혼자 있으면 재미없어. 투덜거린 차유진이 그에게 몸을 기울인다. 사람 한 명의 무게가 두터운 패딩과 패딩을 완충재 삼아 그에게 전해졌다. 체온까지 맞닿기엔 너무 두꺼운 방벽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김래빈 옆이 편해.”

차유진은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찰칵, 또 찰칵. 주변에 빛이 없고 인적이 드물어 적막하고 별 보기 좋은 공간에 연속적인 셔터 음이 고요히 흘렀다. 그 사이로 가끔 패딩끼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입김을 길게 뿜어내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세상에 그들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꺼운 착각에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한 장, 두 장. 셔터 음이 들릴 때마다 카메라의 작은 SD 카드에는 별의 미세한 움직임이 기록될 것이다. 수천 장의 사진을 합성하면 드러나는 거대하고 또렷한 원.

“김래빈.”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왜. 핫팩 더 줘?”

어둠 속에서 모자를 뒤집어쓴 고개가 좌우로 움직인다. 나 할 말 있어. 핫팩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차유진의 손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따뜻한 손끝이 얼어있는 그의 손을 매만졌다가, 느슨하게 손가락을 끼웠다가,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나도 답 못 냈어, 김래빈.”

그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백이었고,

“나랑 데이트 해.”

그건 그가 들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뭐? 하고 되물으니 손을 쥔 차유진의 아귀힘이 좀 더 강해졌다. 초조한 듯이, 불안한 듯이. 손이 잘게 떨리는 게 꼭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김래빈 나 지금 좋은지 잘 모른다고 했어. 모르면 알 때까지 해보면 돼.”

시선이 마주친다. 이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반짝임 어린 눈이 그를 잡았다.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 사이로 그가 한동안 느꼈던 모호를 아는 것처럼 말이 이어졌다.

“나도 몰라. 옛날에도 지금도 그래. 그러니까 데이트 해. 그러면 확실해져.”

차유진의 말은 길고 서툴게 이어졌다. 만나보고 즐거우면 또 만나고, 또 즐거우면 그 다음 약속을 잡고. 감정에도 관계에도 잠시간은 유예라는 도장을 찍어두었다가 마음이 명확해지면 결론을 내자고.

“우리 너무 오래 안 만났어. 그러니까 우리 시간 필요해. 기회도.”

그 기회는 나에게 주는 거야, 혹은 너에게 필요한 거야?

김래빈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유진은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데이트가 연인간의 행위일 필요가 없다는 걸 그는 미국의 드라마들을 통해 배웠다. 그런데도 말이 끝난 차유진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긴장으로 다물어진 입은 낯선 표정이었다. 결론은 불확실했고, 많은 것들이 아직 불명의 영역에 놓여있었다. 그래도 그의 말대로 여러 번 만나고 나면, 자신의 마음도 이 관계도 보다 명확해질까.

“그래.”

김래빈은 그렇게만 말했다. 서로 즐거운 동안만 데이트를 하다가 어느 날엔 결론을 내자. 수천 장의 사진이 별의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하루하루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면 우리의 궤적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보일 거라고 믿자. 그 많은 말들은 다짐으로만 가슴 속 어딘가에 남겨놓고.

“네 말대로 우리 만나보자, 차유진.”

그는 다시 대답했다. 허락을 받는 것처럼 차유진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시작이었던 거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닿은 숨이 따뜻해서 맞닿은 코끝이 차가운 건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오로라

차유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을 때 김래빈은 마침 개인 작업을 끝내고 헤드폰을 벗고 있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그는 젊음을 불태우는 대신 앞으로의 커리어를 대비해 개인 작업을 쌓고 있었다. 회사에 말뚝을 박는 것보다는 작곡 팀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걸 고려해보라던 대학 선배 및 주변의 충고를 신중히 고려한 결과물이었다. 충고를 해준 사람 중에서는 심지어 회사 사람까지 있었으니, 충분히 새겨들을만한 조언임이 분명했다.

하루는 좀 쉬어볼까 고민하다 그래도 꾸준히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노트북을 열었는데, 다행이었다. 피로에 못 이겨 먼저 누웠다면 전화가 왔다는 것도 몰랐을 테니.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Hello, 김래빈! 좋은 밤! 내가 깨웠어?

화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차유진이 통화가 연결된 걸 확인하더니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제 얼굴이 잘 나오도록 휴대폰을 올려둔 거치대를 조정하고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상대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 Oh. 김래빈 침대 아냐. 안 자?

“작업을 좀 하고 있었어. 너는 지금 촬영 중인 거 아냐? 이렇게 전화해도 돼? 내가 깨어있었으니 무사히 받긴 했다만, 설마 한국이 몇 시인지 생각도 안 해보고 무작정 전화한 건 아니지?”

걱정으로 시작해 습관적으로 타박으로 끝내고야 만 김래빈이 제 풀에 찔려 입을 다물었다. 선배들에게는 깍듯이 대하고 있는지, 하고 싶은 거 한다고 막 튀어나가는 건 아닌지. 아직도 입 안에 걱정이 간당간당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열여덟 김래빈이 열여덟 차유진에게 익숙하게 던졌던 걱정과 잔소리들은 스물일곱 김래빈이 스물일곱 차유진에게 익숙해지면서 슬그머니 다시 부활했다. 이제는 차유진이 그보다 촬영과 방송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 걸 알면서도.

- 촬영 잠깐 쉬고 있어! 우리 Aurora 보러 간대. 김래빈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턱을 괸 차유진이 잔소리에 고개를 막 젓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웃으며 소리 낮춰 속삭였다. 우리 전화 많이 못한 거 아쉬워서 전화했어. 김래빈 안 받으면 끊으려 했어. 이어지는 말들은 속삭임이 늘 그렇듯 지나치게 간질거렸다.

차유진은 지금 예능촬영을 하러 아이슬란드에 가 있었다. 시차가 9시간이라고 했던가. 지금이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좀 넘은 시간이니 그가 있는 곳은 늦은 오후쯤 될 터였다. 밀도 있는 작업으로 평소보다 피곤한 뇌가 느리게 답을 도출해냈다. 차유진은 한국의 아이돌은 예능이니 모델이니 하는 부가적인 활동을 너무 많이 한다고 거침없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새로운 시도를 할 만한 대부분의 일을 좋아했다. 이번 촬영도 선배 연기자들과 함께 레저를 접목한 여행을 가는 예능이라는 걸 듣자마자 신나서 받아들였던 걸 김래빈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도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라도 보는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다 좋아서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했다. 결국 가보진 못했지만.

“나 대신 잘 보고 와.”

- 응. 김래빈 보고 싶으면 나중에 나랑 또 와. 여기 좋아.

화면 속 차유진의 뒤로 촬영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습관적으로 차유진과 나누던 대화를 곱씹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대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중에, 하고 답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을 기약할 수 있을까.’

그들이 데이트라는 이름으로 결론을 미뤄둔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 사이 그는 어느새 관계자와 차유진의 열성 팬들 사이에서 차유진의 절친으로 도장 찍혔다. 그간의 데이트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심야 영화, 그 다음에는 국악 공연이었나. 김래빈은 맹세코 그런 자리에서조차 차유진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어쩌면 그 추임새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던 걸 기억해 맘대로 움직이고 추임새를 넣어도 되는 공연을 일부러 골랐는데 그가 생각해도 차유진의 목소리와 발음은 귀에 독특하게 꽂히는 데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알아볼 만 했어. 내가 경솔하게 장소를 고른 게 맞아.’

목격담은 빠르게 번졌지만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차유진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게 알려지고, 같은 소속사에서 일하게 된 일반인 친구 정도로 관계가 정리된 뒤부터는 둘이 어딘가에서 함께 목격되어도 친한 친구끼리 같이 놀고 있겠거니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종종 차유진은 김래빈을 놀리듯 익명의 목격담(‘캘리촤 지같은 존잘남하고만 다니네. 동창이라더니 쟨 왜 데뷔 안함?’)을 들고 왔지만, 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아이돌로서 차유진의 입지를 고려한다면 다행인 일이기는 하지만….’

김래빈? 대답 없는 그를 차유진이 다시 불렀다. 통화 연결을 확인하고 있는 듯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차유진, 오로라를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는 건 우리가 아직 나중을 기약해도 되는 사이라는 뜻이야?”

김래빈은 지난 데이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차유진의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밖에서 돌아다니는 덴 한계가 있어 데이트장소는 주로 그의 작업실이나 차유진의 개인 거처였다. 둘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주 티격태격했다. 밥을 할 때가 제일이었다. 레시피 순서나 방법을 가지고 엄청 다퉜으니까. 그래도 꼭 그만큼 자주 입을 맞췄다. 남는 시간엔 머리를 맞대고 음악을 논하거나 가까운 미래를 이야기하거나 영화를 봤고, 서로에게 어깨나 고개를 기대는 데 점점 더 익숙해졌다. 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가끔은 멀리 놀러갔는데, 짚라인을 타러 갔을 때 김래빈은 차유진이 어린아이에겐 무릎을 굽혀 눈을 맞대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데이트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어서, 힘들게 날짜를 맞춰 천문대를 예약했을 때에는 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바로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곡예처럼 오르는 버스를 타고 올라 볼 수 있었던 건 겨우 뚜껑 덮인 지붕 아래의 대형 망원경이었다.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허탈하게 웃고는 기념품을 사러 갔었지. 그래도 즐거운 기억이었다.

차유진도 그동안 나만큼 즐거웠을까.

그의 물음에 차유진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잠깐이었다. 시선을 든 차유진이 그에게 또렷이 눈을 맞춰왔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김래빈은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차유진이 아니라 내 쪽이었구나.

- 응. 나 김래빈이랑 하고 싶은 거 많아. 같이. 물론 김래빈도 Yes 해야 해.

단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그 말에 김래빈은 깨달았다. 제 무의식 속에선 이미 예전에 났을 결론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다음 기회가 있을지 의심하며 데이트 약속을 잡던 시기를 지나 데이트의 횟수가 쌓일수록,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점점 차유진과 연락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는 게 당연해지고,

다시 일곱, 여덟, 아홉, 열, 혹은 그 이상.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중을 기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컴퓨터 하드에는 차유진에게 선물할 곡이 하나 둘 쌓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궁금해 했던 차유진의 옛 모습이나 가족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고, 사진첩에는 친구와 그 이상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진이 가득했다. 최근에는 차유진이 아이돌에서 은퇴한 후의 계획을 이야기해보기도 했다. 김래빈은 변한 자신을 깨달았다. 차유진이 무대에서 내려와도, 그래서 저 먼 하늘에 빛나던 항성이 하나 사라져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차유진이 제 곁에 있으리라고 상상하게 되었으니까.

아주 길게, 또 멀리 돌아온 기분이었다.

“차유진.”

그는 상대를 불렀다. 휴대폰 화면의 화질 너머로 제게 귀를 기울이는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근사하게 웃는, 빛나는 그 얼굴.

김래빈은 아직도 가끔 열여덟 그들의 시간과 오래도록 차유진을 그리워했던 날들을 곱씹었다. 그렇지만 이제 화면 너머 차유진의 얼굴도 예전처럼 아득히 멀지 않았다. 8년의 공백. 어정쩡했던 사이. 그 간극이 좁혀지기까지 그들에게 부족했던 기회와 시간은 차유진이 벌었다. 그렇다면 그 결론은 그가 전해야만 했다.

“네가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이라 지금 당장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해.”

-김래빈?

“아주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우리 미래가 걸려있으니까. 그러니 통화는 여기까지 하자. 촬영 잘 해. 조심히 돌아오고.”

김래빈이 제 마음을 돌아보는 사이 제멋대로 아이슬란드의 명소를 줄줄 늘어놓으며 떠들던 차유진이 무엇을 예감했는지 입을 벌렸다. 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지 않았다. 마음이 너울거렸다. 기억과 감정이 총천연색의 빛을 띠고 그를 맴돌았다. 이곳에도 오로라가 있었다. 설레도록 아름다웠다.

비로소 그는 열여덟 차유진에게 안녕을 고하고 스물일곱의 차유진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 둘은 아마 오래도록 지상을 함께 걸으리라. 김래빈은 차유진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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