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발단
1일차
2일차
3일차
발단
마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분분하다.
당신이 관료라면 마탑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행정 용어로 쓰일 것이다. 관료들의 손과 손 사이를 넘나드는 서류 위에서 마탑이란 가장 상징적인 그 탑을 포함하여 그 지근거리에 형성된 관계자들의 거주 공간, 시장, 주변의 공업지구와 과수원, 농장을 전부 포괄하는 도시공간을 뜻하는 말이니까.
만약 당신이 보다 야망 넘치고 고귀한 이들에 속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마탑은 어쩌면 공간보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마탑주를 중심으로 뭉친 마법사들은 정치에 뜻이 있는 이라면 그 누구든 쉬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며, 권력을 탐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실로 중요한 대상이 아니다.
물론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답하려면 당장 손을 들어 각 도시 중앙에 있는 높은 탑을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이 왕국 사람 대부분은 관료나 권력자만큼 마탑이라는 공간과 그 안의 마법사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마탑과 마법사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높은 탑과 그 안에서 마법사들이 일으키는 경이로운 현상을 보며 백성들은 경외와 감탄을 담아 외치는 것이다.
‘역시 마탑이야!’
그럴 만했다. 마탑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경이였다. 하나같이 낡아빠진 그 탑들의 내부 공간은 겉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넓이를 자랑했고 상식을 벗어나게 기상천외한 공간의 배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그 공간감이야말로 마탑이 마법사들의 공간이라는 증거이며, 그러므로 마법사가 아닌 자는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천연의 방어막 역할을 했다.
용의 피를 타고난 차유진에게는 그 모든 것이 별 소용 없는 이야기였지만.
비행하든 공간이동을 하든 기묘하게 중첩된 공간 속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는 자에게 마탑은 그저 조금 복잡한 놀이터에 가까울 터. 그러니 차유진에게 마탑은 그저 재밌는 공간이었다.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그가 최근 애착을 품고 있는 인간, 김래빈이 머무르는 공간쯤 되려나?
“김래빈 뭐해?”
불쑥, 김래빈의 공간에 차유진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엄밀하게 차유진은 마탑 외부인이니, 원래대로라면 복잡한 허가 절차를 거쳐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김래빈의 공간으로 이동되어야 했다. 하지만 누가 용에게 허가며 안내를 운운하겠는가. 그건 그의 혈통이 반쪽짜리여도 마찬가지였다. 차유진은 제가 용과 같은 형질을 타고났음을 스스로 능력으로 증명한 지 오래다. 게다가 김래빈을 본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상대라면야.
여하튼 마탑은 예전부터 차유진의 방종한 출입을 스리슬쩍 눈감아주고 있었다. 허가도 안내도 없이 불현듯 쳐들어오는 차유진의 작태엔 김래빈도 이미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그래도 보통은 말 좀 하고 오라거나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잔소리가 안부 인사처럼 붙었는데 오늘은 어째 조용했다.
그는 안쪽 공간을 기웃거렸다. 김래빈은 서재 안쪽 책상에 거의 구겨지다시피 앉아있었다. 제 용건에만 집중하는 동그란 뒤통수에서 무언가 잘 안 풀리는지 끙끙거리는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흠, 하고 뒷짐을 진 차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두루마리를 헤치고 그의 뒤까지 다가갔다. 책상 위에 펼쳐진 양피지가 바로 눈에 걸렸다. 그는 그걸 휙 들어 올렸다.
“김래빈 고민 많아?”
양피지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몇 개나 중첩된 수식이 그려져 있었다. 졸지에 연구 대상이 사라진 김래빈이 습관적으로 공중에 손을 허우적거려도 차유진은 요리조리 용케도 손을 피해 가며 마법진을 훑어보았다. 잡힐 듯 말듯 약 올리며 제 손을 빠져나가는 양피지 조각에 김래빈이 결국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볼 때까지.
“차유진 그만해! 나한텐 중요한 연구 자료야!”
눈 아래에 짙은 다크서클이 선명했다. 차유진은 소리 없이 입술을 모았다. 오. 한 며칠 밤새웠나 본데. 그는 굳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바로 입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김래빈 또 잠 안 잤어? 김래빈 눈 마수보다 빨개!”
그 말에 김래빈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김래빈을 약 올리듯 팔랑거리던 양피지 조각을 책상에 대충 내려놓았다. 한번 쓱 들여다본 게 끝이지만 그 정도만 훑어봐도 충분했다. 인간의 마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모든 마법은 용에게서 비롯된 바, 차유진이 양피지 속 마법진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 없었으니까.
‘스스로 빛을 내는 기구?’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이 마법의 상용화에 관심이 많은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만들어왔던 소소한 보조기구와는 달리 이번의 구상은 보다 본격적이다. 아직 완성작이라 부르기엔 한참 남았지마는.
“김래빈 얼굴 너무 어두컴컴해! 그런 얼굴론 빛나는 마도구 못 만들어!”
“말장난 하지 마, 차유진. 얼굴빛과 마법의 성취 사이에는 구체적인 연관관계가 없어!”
김래빈 역시 차유진이 제 마법진을 정확히 해독했다는 데에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한층 장난기가 붙은 차유진의 어조에 발끈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게 휘둘러질 일 없는 그 주먹을 키득거리며 지나친 그는 상대의 책상 위를 차지한 책 무더기를 밀어 기어코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냐. 상관있어! 김래빈 잠 못 자면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해! 그러면 좋은 마법진 못 만들어. 지금도 그거 안 완성이야.”
그럴 땐 미완성이라고 하는 거야. 그의 말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도 김래빈은 물끄러미 제가 그리던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은근슬쩍 축 쳐졌다.
‘차유진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한눈에 알아본 게 틀림없어.’
자신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마법진의 목적이 빛을 내는 마도구라는 것도 양피지를 단 한 번 흘긋대는 것으로 아주 손쉽게 알아차렸다. 인간이 저 마법 생물과 마법적 성취를 동등하게 논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거듭해 실패하다 보면, 사실은 제가 너무 못나서 차유진처럼 쉽게 해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이 슬그머니 들 때도 있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밤을 새우려고 했던 건 아니야! 이건 마나석을 에너지로 삼는다는 조건과 특정한 밝기의 빛을 만들어낸다는 조건을 결합해 만든, 내 생각으로는 이론상으로 분명 문제없어야 할 마법식이었어. 그렇지만 실제로 조합해 시험해 보았을 땐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가설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마법식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딘가 실수를 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건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살펴보려다가… 그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잠깐 잊은 것뿐이야.”
그 눈매만큼 풀죽은 변명이 김래빈에게서 슬그머니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길고 구구절절한 항변에 차유진은 넘어가지 않았다. 코웃음을 치고는 딱 한 마디만 물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잤어?”
“…아니.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의로 밤을 새우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뜻인데,”
“그 전날은?”
“어… 조금?”
“그럼 김래빈 안 잔 거 맞잖아.”
잔 건 잔 거고, 안 잔 건 안 잔 거야. 김래빈 또 쓸데없는 핑계 붙여. 딱 잘라 말한 차유진이 책상에 걸터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낮춰 턱을 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얼굴 사이로 대치하듯 시선이 꽤 오래 닿았다. 시선을 먼저 돌린 쪽은 김래빈이었다. 자각 못 한 채로 입술을 두어 번 삐죽인 그는 다시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를 끌어당기며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핑계가 아니라, 너에게는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을 설명하면서 네 염려를 내가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뜻을 표현하려고 했던 거야.”
“….”
차유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김래빈은 옅게 한숨을 쉬곤 펜을 들었다. 마나석으로부터 마법진으로 마력이 전달되는 통로를 따라 증폭의 의미를 담은 마법진을 추가해 볼 생각이었다. 사각사각. 특수한 잉크를 담은 펜촉이 아주 조심스럽게 마법진 위로 도형을 덧붙여갔다.
언어만으로도 아주 정교하게 마법을 행할 수 있는 용과는 달리 인간은 주문만으로는 마력의 제어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그걸 보완하려 만들어낸 게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일종의 제어문과 조건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법을 시전할 때 세부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은 편리했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혹시 잘못 그리기라도 하면 마력이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하기 일쑤니까. 마도구는 일반적으로 마법을 시전할 때보다 훨씬 많고 섬세한 마법진이 필요해서 아무리 그가 마법진을 자주 그려보았다고 하더라도 할 때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느라 본의 아니게 차유진을 내버려두었던 건 김래빈으로서는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썩 마뜩잖은 얼굴을 한 상대를 그는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김래빈은 바보야.”
“뭐?”
맥락을 알 수 없는 비난이 떨어져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유진은 그를 계속 보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치는 건 금방이었다. 그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며 차유진은 뚱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김래빈 생각 너무 복잡해. 자기 행동에 자꾸 설명 붙이려고 해. 그거 부끄러워서 그래?”
“그게 아니라,”
“그거 나쁜 습관이야. 김래빈 저번에도 그랬어.”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차유진이 냉큼 말꼬리를 낚아챘다. 순간적으로 억울해 말문이 막힌 김래빈이 펜을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훅 높아진 그의 눈높이를 따라 차유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잉크가 점점이 마법진 위로 튀어 선과 문자를 어그러뜨린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언제?”
“김래빈 저번에 나한테 키스하고 나서도 그랬어! 내가 나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답 안 하고 딴소리했어!”
“아니, 그건…!”
김래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차유진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는 상대에게 쭉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둥실 띄운 차유진이 도망가지 말라는 듯 그를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른 김래빈의 손이 책상 위에 쌓여있던 책 무더기를 건드린 건, 그래. 우연이었다. 기울어 쏟아진 책은 실험을 위해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마나석 위로 떨어졌고, 마나석 더미가 우당탕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다 말던 마법진 위로 정확하게.
지지직-. 마나석이 닿은 마법진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새어나온 빛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변명을 더 해 보려던 김래빈이 책상을 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보호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강하게 그를 감싸는 팔이 느껴졌다.
삼 초, 이 초, 일 초.
쾅 하는 굉음이 마탑을 울렸다.
1일차
“그러니까 결론은 둘 다 부주의했다는 거잖아. 뭐. 됐어. 할 일이나 하자고. 마탑주의 이름으로 명하건대, 김래빈과 차유진은 마탑을 훼손한 벌로 사흘 동안 플라멜의 베일을 각자 200뿌리씩 채집해 오도록 해. 그게 내가 내리는 징계야.”
앞뒤 사정을 들은 마탑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 처리가 된 배낭이 한 개씩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김래빈은 묵묵히 배낭을 받아 들었고 차유진은 다른 걸 하면 안 되냐고 작게 투덜거리다가 김래빈에게 옆구리를 거하게 찔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김래빈과 차유진이 각각 걸었던 보호 마법으로 그들은 마법 폭발 한가운데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다만 서로가 상대에게만 보호 마법을 걸었던 탓에 김래빈의 연구실은 아주 아작이 나버렸다. 김래빈은 아직 시간을 다루는 마법을 모르니 복구를 할 수 없었고, 차유진의 마법은 마탑을 구성하고 있는 마법과 성격이 달라 섞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마탑주 앞까지 불려 와야 했다.
“잘 됐어. 이 기회에 아예 강화도 몇 겹 더 걸자고.”
“하지만 탑주님. 그건 일반적인 복구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이 필요한데요.”
마탑주 옆에 서 있던 총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골치 아픈 얼굴이었다. 마탑이 평소 충분히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고 해도 마탑의 재정을 책임져야 하는 총무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일이 떨어진 셈이었다. 마탑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자기야, 생각해 봐. 쟤가 아무리 잠재력이 뛰어나도 고작 마탑주 후보일 뿐인데 벌써 연구실을 날려먹었다고. 그러면 마탑주가 정해질 때까지 김래빈이 오늘처럼 방을 날리는 일이 또 생길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저, 저는 충분히 반성하였으니, 앞으로 절대로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한다면…!”
“…제로는 아니지요. 탑주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땀을 삐질거리며 넙죽 무릎을 꿇은 김래빈의 말은 마탑주와 총무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턱을 쓰다듬은 총무는 어차피 강화하려면 공간을 다시 구성해야 하니 아예 모든 게 터진 지금이 차라리 잘 되었다며 이런저런 서류를 끄집어내기 시작했고, 마탑주는 나가라는 듯 그들에게 대충 손을 저어 보였으니까. 결국 차유진과 김래빈은 배낭과 기본적인 야영 물품만을 든 채 마탑을 나와야 했다.
“나 이제 이 길 외워.”
쫓겨나오듯 뛰쳐나온 탑을 등 뒤로 한 채 차유진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김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와 차유진이 친해진 후로 둘이 사고를 몇 번을 쳤던가. 개수와 날짜만 달라졌을 뿐 플라멜의 베일을 채집해 오라는 징계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번. 차유진이 마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특이하기는 해도 마탑의 모범생 축에 속하던 김래빈은 이제는 아주 차유진과 싸잡아 사고뭉치로 낙인찍혀버렸다.
“사흘 안에 플라멜의 베일을 총 400뿌리나 채집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서두르자.”
그러니 이제는 체념도 빨랐다. 김래빈이 차유진을 잡아끌었다. 그는 순순히 김래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날이 좋았다. 마탑을 돌아 숲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밟으면 서서히 무성해지는 나무가 그들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마탑의 뒤로 위치한 가파른 산맥의 꽤 험난한 길을 넘어 플라멜의 베일이 서식하는 계곡 근처 분지까지 도착하는 게 그들의 첫 과제였다.
“네가 마탑을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연구 중인 마법사를 함부로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고 반성하도록 해, 차유진.”
아직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길에는 흙과 들꽃과 초목의 향이 깔려있었다. 선선한 공기와 새 소리 사이로 발걸음마다 한 마디씩 김래빈의 잔소리가 떨어졌다. 차유진은 그 말을 배경음처럼 흘려들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 위험한 행동 한 거 김래빈이야.”
“무, 물론 실제로 행동을 한 건 나일지도 모르고 그건 내 잘못이 맞지만, 그건 네가 이상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잖아!”
솔직히 그들에게 첫 번째 과제는 의미가 없었다. 김래빈이 아직 공간이동 마법에 능숙하지 않다 뿐이지 차유진이 그를 들쳐업고 날아간다면 고작 몇 분 만에 도착할 거리였다. 실제로 두어 번은 그렇게 하기도 했다. 처음 난데없이 그에게 낚아채여 공중에 떠오른 김래빈이 지른 비명은 마탑에까지 다 들렸을 거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날아가기를 포기한 건 상대와 걷는 시간이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김래빈 안 힘들어?’
‘응. 이런 건 익숙해. 나는 평민 출신이라 마탑에 오기 전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약초를 캐며 살았거든.’
그 대화를 나눌 때의 그는 어쩌면 가파른 산길이나 호미질 따위의 것들을 조금쯤은 그리워하는 것도 같았다. 산골에서 약초를 캐는 평민과 마탑의 전도유망한 마법사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텐데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가팔라지는 길을 따라 계곡을 타고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온통 흔들렸다. 제가 항변하던 것도 잊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김래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징계받는 사람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나는 여기에 오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래. 바로 저 얼굴. 양심에 찔린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제게 숨죽여 속삭이며 웃는 저 얼굴이 좋아 이 길이 차유진에게도 특별해졌다. 어쩐지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다. 크게 홰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신 그는 곧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는 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상대를 당겨 안았다.
“김래빈 너무 느려.”
그리 싫지도 않으면서 습관처럼 입에 붙은 타박을 주워섬기며 무릎 아래를 받치고 발을 힘껏 구르면 목에 팔을 걸어 몸을 바짝 붙인 김래빈이 그의 귓가 언저리에 숨을 폭 내쉬었다.
아마 그 순간 공중으로 붕 떠오른 건 꼭 그의 몸만은 아닐 터다.
분지에는 늦은 오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기울어져 황금빛으로 물든 햇살이 등 뒤를 따스하게 데웠다. 김래빈은 배낭에서 호미를 꺼내어 손에 바투 쥐었다. 어두워서 작업하지 못하는 시간과 탑까지 왕복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만 이틀, 만 이틀 안에 400뿌리를 캐려면 오늘 적어도 100뿌리는 캐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퍽 비장했다.
“지난번처럼 해?”
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친 차유진이 태평하게 그에게 던진 말에 대답하며 김래빈은 제 소매를 바짝 걷어붙였다.
“내가 판단하기로도 그게 효율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대충 고개를 끄덕인 차유진이 손에 마력을 둘렀다. 손가락이 길게 자란 풀숲을 한번 훑고 지나가고 나면 마법처럼 흐리게 빛나는 푸른 꽃이 그 아래에서 우수수 피어났다. 그 빛이 사라지기 전 줄기를 조심스레 휘어 감은 김래빈이 땅에 호미를 꽂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곧 뿌리가 고스란히 딸려 나왔다.
플라멜의 베일은 캐기가 아주 까다로운 약초다. 함께 서식하는 다른 풀과 아주 흡사해서 구분하기 위해서는 마력에만 반응해 피어나는 푸른 꽃을 확인해야 하지만 정작 그 뿌리는 마력에 아주 예민해 마법을 사용해 캐면 약초의 효능이 반토막 아래로 떨어졌다.
각종 마법 약을 만드는 기본 시약의 재료로, 특히 김래빈이 몸담은 마탑에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재료임에도 플라멜의 베일을 캐는 게 마법사들에게 일종의 징계인 건 그 때문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고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는 번거로운 노동이니까. 게다가 이 분지는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늑대 같은 맹수도 곧잘 나타나는 곳이라, 견습 마법사들은 최소 3인 1조로, 일반 마법사들은 2인 1조로만 파견되었다.
“두 뿌리…, 세 뿌리….”
수많은 시도 끝에 김래빈과 차유진은 역할을 나누는 게 그나마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유진은 호미질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마력을 둘러 풀을 찾았다가 다시 그 마력을 해제하고 호미질을 하기를 반복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러니 그나마 호미질이 익숙한 그가 호미질을 전담하고, 차유진은 경계를 서며 수시로 마력을 휘둘러 꽃을 피워내는 게 나았다.
‘채집에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만큼 징계를 받았다는 게 썩 자랑스러운 이력은 아니지만….’
그는 묵묵히 호미를 휘둘렀다. 차유진은 넘쳐나는 마력을 굳이 아끼지 않아서 그의 옆에서 느리게 걷는 차유진의 걸음을 따라 파란 꽃이 한두 송이씩 피어올랐다.
“김래빈.”
고개를 들자 산머루가 붙은 가지를 쥐고 흔드는 차유진의 손이 불쑥 눈앞으로 들이밀어졌다. 김래빈은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붙은 흙을 털고 손을 내밀었다. 잘 익은 머루알 여러 개가 손 위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그가 머루알을 입에 넣고 그 새콤함에 잠시 몸을 떠는 동안 차유진이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우리 저녁 토끼 잡아?”
“육포랑 빵이랑 챙겨 오지 않았어? 직접 사냥해서 먹는 건 번거롭잖아.”
“그래도 육포랑 빵 맛없어.”
“너 저번에 왔을 때도 똑같이 말해 놓고는 소금이랑 향신료 없으면 고기도 맛없다고 투덜거렸잖아.”
열네 뿌리, 열다섯 뿌리. 차유진이 피워낸 꽃이 다시 지기 전에 김래빈은 재개 손을 놀렸다. 그의 옆으로 플라멜의 베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다섯 뿌리씩 엮어 배낭 안으로 던져넣던 그는 씩 웃는 차유진을 보며 낯익은 불안감을 느꼈다.
“너 설마?”
“소금이랑 향신료, 내가 챙겼어!”
참으로 경쾌하기도 했다. 대체 언제? 그가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더욱 활짝 웃는 얼굴을 한 차유진이 자랑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올 때 사라 만났어. 사라가 챙겨줬어.”
그 귀한 걸 징계받아 떠나는 사람, 아니, 용, 아니, 아무튼 차유진에게 덥석 넘겨주다니.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사라는 마탑 주방에 고용되어 일하는 하녀였다. 차유진의 친화력이야 몸으로 겪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마탑주에게 불려 간 직후부터 탑을 나올 때까지 그 짧은 순간 기어코 제일 먼저 챙긴 게 소금과 향신료라는 게 어이가 없을 뿐.
“저번처럼 불 피우다 불똥이 튀면 곤란하니까, 제대로 주변을 정돈하고 하도록 해. 짐승 조심하고. 하지만 차유진, 넌 우리가 지금 놀러 나온 게 아니라 징계를 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유념할 필요가 있어! 플라멜의 베일을 캐는 것보다 먹을 걸 가리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건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야!”
기어코 스무 뿌리를 채우고야 몸을 일으켜 손목을 한 번 툭툭 턴 김래빈은 결국 또 잔소리를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차유진은 나도 그 정도는 안다거나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라고 투덜대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쉿. 상대의 엄중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덩달아 소리를 낮춘 그는 눈썹을 들어 올려 의문을 표했다.
“김래빈 소리치면 토끼 다 도망가.”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호미를 던질 뻔했다. 하지만 차유진은 집요했다. 결국 그날 김래빈이 꼬박 100뿌리를 채우는 동안 차유진은 돌을 던져 꿩을 잡는 기염을 토하며 토끼와 꿩으로 풍족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2일차
김래빈은 눈을 떴다. 얇은 침낭 하나로 밤을 버틴 탓에 몸 여기저기가 찌뿌둥했다. 약간 후덥지근한 느낌에 옆을 보니 역시나 차유진이 바짝 붙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낭 밖으로 팔을 빼내어 쭉 기지개를 켰다. 차유진, 하고 흔들어 깨우면 여전히 비몽사몽 중인 것이 분명한 웅얼거림이 돌아왔다.
“오늘도 200뿌리를 캐려면 슬슬 일어나야 해.”
어제 그들이 조금 늦게 잠들기는 했다. 천막을 치고 들짐승을 대비해 은폐 마법을 몇 겹씩 둘러 걸며 겸사겸사 이야기를 시작했던 게 생각보다 길어졌던 탓이다. 별이 예뻐 이야기하기 좋은 밤이기도 했다. 그래도 더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그는 차유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보들보들하고 탄력이 있는 게 제법 찌르는 맛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키득거림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김래빈 자꾸 그러면 잡아먹어….”
크와아앙. 반쯤 잠긴 목소리로 어설프게 짐승 흉내를 내며 입을 쩍 벌리는 차유진의 입술 너머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건 하프 드래곤의 특징인 걸까, 아니면 차유진 개인의 특징인 걸까? 그 뾰족한 끄트머리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답했다.
“용의 생태에 대해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용이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프 드래곤인 넌 더더욱 그럴 테고.”
재미없어. 투덜댄 차유진이 그제야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잠이 눈꺼풀에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마탑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수면시간이 더 길었던 김래빈이 말똥한 얼굴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차유진의 눈동자 속 동공이 줄어들었다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침낭을 정리하고 천막을 나섰다. 등 뒤에서 큰 하품 소리가 들렸다.
천막 밖으로 나온 김래빈은 주변을 점검했다. 새벽 내내 안개가 끼어있었는지 공기가 아직 축축했다. 전날 걸었던 은폐 마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고기를 구워 먹었던 장소 근처에 짐승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발자국이었다. 김래빈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국만 보아서는 무슨 짐승인지 알기 어려웠다. 천막을 다 정리했는지 차유진이 슬금슬금 그의 뒤로 다가왔다. 그는 상체를 뒤로 물려 발자국을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차유진, 너는 알겠어?”
“몰라. 나 사냥꾼 아니야.”
그건 김래빈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로 발자국을 슥슥 밀어 지웠다. 크기가 크진 않으니 아주 위험한 동물은 아니리라. 그보단 오늘의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는 손목을 돌려 풀고 다시 호미를 들었다.
“플라멜이 사실은 실존 인물이라는 설도 있는 거, 차유진 너는 알고 있었어?”
반복 노동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차유진의 인도에 따라 한 뿌리씩 할당량을 채워가며 그는 입을 열었다. 슬슬 지루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어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였다.
이름이 붙은 꽃답게 플라멜의 베일에도 얽힌 설화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대마법사가 거인, 요정, 용, 유니콘,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여러 신화 속 존재들과 계약을 맺어 그 맹세의 말을 실로 자아 만든 길고 신비로운 베일. 위대한 마법사가 아끼던 이에게 베일만 남기고 인간계를 떠난 후 남겨진 이는 베일을 끌어안고 한 송이 꽃이 되었다 하는.
어떤 이유에서건 플라멜의 베일을 캐러 가면 선배가 후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왔다. 김래빈은 처음 차유진과 플라멜의 베일을 캐 오는 징계를 받았을 때 다른 마법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 이야기는 다시 고스란히 그의 입을 거쳐 차유진에게로 넘어갔다.
“떠돌아다닐 때 몇 번 들었어.”
만약 그게 사실이면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야. 차유진이 미미한 감탄을 담아 덧붙였다. 나라 여기저기 플라멜과 관련된 전설 하나 없는 곳이 없었다. 그도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처럼 전국 단위로 유명해질 자신은 없었다.
“만약에 플라멜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플라멜은 정말로 대단한 마법사였음이 틀림없어! 물론 플라멜이 실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과 별개로 전해 내려오는 모든 플라멜 전설의 등장인물이 실제로 그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 중 사분의 일만이라도 진실로 밝혀져도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이 구현할 수 있는 마법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걸로 추측되거든.”
김래빈은 손을 바지런히 놀리며 생각에 잠겼다. 흔히 가장 까다로운 마법이 생명과 정신을 다루는 마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제 생명은 신전이나 정령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정신 마법은 대개 실전되었다. 대단위의 시간이나 공간 마법을 구현해 내는 마탑주조차 정신 마법을 쓰려면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도 플라멜은 그 모든 영역을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마법사로 묘사된다.
실로 악마와도 같은 재능. 그는 입속으로 이야기의 한 구절을 되새겼다.
“그럼 김래빈 목표 바뀌어?”
“응?”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잠시 호미질을 멈춘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진은 손 위에 붉은 새를 얹은 채로 몇 마디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용족 특유의 언령으로 빚은 새가 그의 손을 떠나 포르르 날아갔다. 그는 잠시 새가 날아가는 궤적에 눈길을 두었다. 차유진이 구사하는 탐색 마법은 언제 보아도 퍽 아름다웠다. 그제야 그와 시선을 맞춘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 마탑주 되고 싶어했어. 다음엔 플라멜이야? 대마법사?”
“으음.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일단 지금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다음의 일을 논하는 건 너무 자만하는 것 같잖아.”
대답하며 무심코 턱을 매만지느라 묻어버린 흙을 대충 훔치다 김래빈은 문득 옛일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예전에 내가 마탑주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마탑주가 되고 싶다던 그에게 차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럼 김래빈 빨리 탑 세워. 나는 바닷가가 좋아! 마치 마탑이 모래성처럼 쌓기만 하면 되는 양 명쾌한 어조였다. 마탑을 가지고 있으면 마탑주. 그 단순한 사고방식을 그때는 몰랐던 그는 한참을 차유진과 입씨름해야만 했다. 마탑주가 되고 싶다는 말이 제 탑을 가지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격을 인정받아 마탑주 자리에 오를 만큼 마법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뜻이노라고,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고쳐 설명하고 나서야 그는 정확히 제가 뜻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었다.
“우. 그거 내 잘못 아니야. 김래빈 원하는 거 정확하게 말 안 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내 의사소통 방식에는 문제가 없었어. 차유진 네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한 거야.”
“틀려! 나 마법 쓸 때 정확하게 말해. 소원도 똑같아. 김래빈 더 솔직해야 해.”
그러니 기도도 소원도 마법의 주문도, 결국엔 동일한 뿌리를 가진다. 말, 그리고 뜻.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언령의 재능으로 차유진은 그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감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래빈을 내려다보았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를 보니 그는 여전히 그의 말이 와닿지 않는 모양이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번성하는 데 김래빈이 말하는 예의며 도덕 같은 것들이 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은 차유진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어쨌든 반은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은 결국 시전자가 욕망하는 걸 마력을 빌려 현실로 구현하는 힘. 욕망을 감추고 돌려 모호하게 표현하면 마력은 가야 할 방향을 잃는다.
‘마음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그에게 김래빈의 마음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과 같았다. 아무리 그가 일찍이 눈치챘어도 발화되지 않은 ‘좋아해’는 의미가 없으니. 나는 너 좋아해. 몇 번을 말했어도 아직 상대에게 진정으로 닿지 못한 그의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혹시 내가 그렸던 마법진도 그런 이유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걸까?”
“조금은.”
그걸 고민해 보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맥 빠진 얼굴로도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이 마법 바보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점까지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제 팔자였다.
그래도 이렇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민에 빠진 얼굴이라니. 역시 조금은 약 올랐다. 김래빈 손 놀아. 그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를 써 그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김래빈은 잠시간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곧 그들이 캐야 할 뿌리의 개수를 떠올렸는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유진은 그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방향을 따라 푸른 꽃이 점점이 피어난 들판이 보였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나 확인이 간단하면 참 좋을 텐데.
중간에 이쪽을 향하던 들개 무리가 탐색 마법에 걸려들어 멀찍이 쫓아냈던 걸 빼고는 평온한 노동의 시간이었다. 김래빈의 몸 상태만 빼면 그랬다. 머리에서 제가 썼던 마법진의 수식이 온통 굴러다니는 바람에 힘든지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손을 놀린 결과 그는 지금 손목, 허리, 무릎을 포함해 온몸이 삐거덕거리는 상태였다. 바보라며 입을 삐죽거리는 차유진의 말에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내일 김래빈 나랑 바꿔 해.”
“알았어.”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차유진이 건넨 말에 그는 가만히 수긍했다. 그가 이미 할당량 대다수를 캔 만큼 내일은 차유진에게 맡겨도 문제없을 터였다.
“그럼 불 꺼?”
“응.”
잘 자. 너도. 여상한 말이 오가고 천막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각자의 침낭 안에 기어들어 가며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가 그것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날씨가 괜찮고 위험한 짐승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맹수야 쫓아내면 그만이라지만 날씨가 궂으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번이 그랬다. 워낙 비가 거세게 내리는 데다 분지는 계곡 바로 옆이어서, 둘은 결국 차유진의 힘을 빌려 마탑으로 철수했다. 마탑은 비 오는 날에도 그들을 내몰 만큼 매정한 집단이 아니었지만 받아야 할 벌이 한도 끝도 없이 미뤄지는 것 역시 찝찝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이 정해진 기한 안에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마법식을 다시 살펴봐야지.’
약초를 캐며 떠올렸던 여러 구상을 재점검해 보다가 김래빈은 침낭 속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잠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고약만으로는 근육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혹사당한 팔과 어깨가 아릿하게 욱신거리는 통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디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그랬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냉찜질이라도 하면….’
그는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 숨죽여 주문을 외웠다. 냉기가 그의 손을 타고 돌았다. 차가운 기운이 아픔을 가라앉히는 감각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하다가 잠들면 되겠지. 그 순간이었다.
“김래빈 아파?”
차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도 깨운 모양이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차유진이 침낭 채로 꿈틀꿈틀 몸을 붙였다. 김래빈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마력의 빛과 냉기를 확인한 차유진이 흠, 하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손 줘봐.”
“미안. 내가 잠을 깨웠나 본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차유진 너는 자도 돼.”
“김래빈 어깨랑 손목이랑 혼자 다 하려면 불편해.”
양손에 쉽사리 냉기를 피워올린 차유진이 냅다 침낭 너머로 팔을 뻗어 그의 빈 손목과 어깨를 감싸 잡았다. 욱신거리던 부위가 시원해지는 감각에 김래빈은 괴상한 신음을 뱉어냈다.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확실히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도 겸연쩍은 기분에 그는 한 번 더 상대를 만류했다.
“그래도 너 자야 하잖아.”
“우리 둘 중에 잠 더 부족한 거 김래빈이야.”
코웃음과 함께 심드렁한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사실이었다. 할 말을 잃은 그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우습게도 통증이 가라앉으며 아까까지는 죽어도 오지 않던 잠이 슬금슬금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잠들면 너도 그만해도 될 거라고 말해주려 시선을 들었다가 김래빈은 마력의 희미한 빛 너머로 절 바라보고 있는 차유진의 눈을 보았다. 예상외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김래빈 좋아해!’
그 순간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며 손목은 여전히 차가운데 그 너머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는 그냥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일차
차유진이 언제까지 그의 냉찜질을 도와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만 중간에 잠들어버렸으므로.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차유진이 그를 반쯤 끌어안고 있었던 걸 보면 아마 꽤 오랫동안 그에게 힘을 쏟다 잠든 게 분명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는 차마 차유진을 깨우지 못하고 어물댔지만, 상대가 잠결에 그를 좀 더 끌어안으려 하자 그만 당황해서 후다닥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 서슬에 차유진 역시 덩달아 깨어버린 건 덤이었다.
“뿌리를 파낼 땐 특히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호미 날에 잘리기 일쑤니까.”
간밤의 그가 얼마나 심란했든 오늘은 징계 이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 전날 서로 합의한 대로 오늘은 차유진이 호미를 들고 그가 경계를 섰다. 차유진의 호미질은 그보다 느리고 김래빈의 마력량은 상대보다 적어서, 그는 차유진처럼 내도록 마력을 휘두르는 대신 호미질이 끝나는 걸 기다렸다 한 송이씩 느리게 꽃을 피워냈다.
“우우. 김래빈 잔소리.”
플라멜의 베일 한 포기를 캐낸 차유진이 다시 피어난 꽃을 따라 호미를 땅속에 콱 박았다. 살살 하라는 그의 말을 그새 잊은 게 틀림없었다. 그 엉성한 호미질을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쭈그려 앉은 차유진의 정수리로 옮겨갔다. 붉은색의 폭신폭신한 머리 뒷부분이 우습게도 붕 떠 있었다.
‘꾹꾹 눌러주고 싶다.’
그는 손가락을 잘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그는 팔을 뻗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유독 차유진을 대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자각은 꽤 오래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키스도 그런 충동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차유진의 오해와는 다르게 그는 퍽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차유진에게 키스했는지를.
‘확실히 들떠있기는 했지.’
봄 축제의 밤이었다. 마탑도 축제 분위기를 피할 순 없었다. 탑 안쪽까지 음악이 들려왔다. 마법사들은 삼삼오오 가장 좋은 옷을 빼입은 채 거리로 놀러 나갔다. 김래빈은 그때 차유진과 함께였다. 일이 바빴는지 간만에 마탑을 들렀던 차유진이 축제라며 그를 끌고 나갈 때 내심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맛있는 걸 먹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어디서든 꽃을 받고, 광장에서 사람들의 손과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추기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은 불꽃놀이였다. 불꽃이 터지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올 때 무심코 차유진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돌아보고 나니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실수였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그냥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네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그때 키스는 하고 싶어서 했는데, 해 보니 좋기는 했다…. 이건 너무 파렴치한 대답이잖아.’
차유진이 아무리 정확하고 솔직한 게 좋다 해도 안 될 말이었다. 줄곧 키스의 이유를 묻는 차유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차유진의 말마따나 그가 차유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건 더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가끔 상대가 제게 던지는 좋아한다는 말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게 충동인지 아닌지,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제 마음이 확실해지면 그때 대답해야지, 하고 김래빈은 오늘도 대답을 보류했다. 차유진이 들으면 속 터지는 소리라고 할 만한 결론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스무 뿌리!”
호미를 잠시 내려둔 차유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쭉 위로 뻗어 늘렸다. 김래빈은 육포를 꺼내 반으로 톡 쪼개어 반은 제 입에 물고 나머지 반은 차유진의 입에 물려주었다. 김래빈. 육포를 우물거리면서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왜?”
“우리 갈 때는 날아서 가.”
피곤할 만도 하지. 그는 제 손목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김래빈은 못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다시 작업이었다. 차유진은 쭈그려 앉아 호미를 들었고 그는 마력을 둘러 주변의 풀을 부드럽게 훑었다. 꽃이 두어 송이 더 피어났다.
“돌아가면 씻고 맛있는 걸 먹고 잘 거야. 김래빈도 자. 안 자면 또 마수 돼.”
“너 어차피 또 내 침대에서 잘 거잖아.”
“응.”
호미질 사이사이마다 말들이 퐁당퐁당 튀어 올랐다. 피워내고, 캐고, 다시 피워내고. 종종 고개를 들어 탐색 마법을 점검해도 김래빈의 시선은 결국 다시 차유진을 향한다.
“그럼 너 잘 동안 나는 어디서 자? 불편하게 자꾸 그러지 말고 아예 네 방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하라니까.”
“싫어. 김래빈 나 쫓아내? 침대 나누면 돼. 마음 넓게 써.”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가 다시 소곤거림으로 바뀌었다.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바람처럼 일렁였다. 나란히 걷는 발자국이 풀숲에 흔적처럼 남았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마력이 점점이 떨어진 자리, 잎새 그늘 사이에서 푸른 꽃이 고개를 드러냈다.
어쩌면 어떤 마음도 이미 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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