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어야 했다

  • 소설의 미리니름이 군데군데 들어가있고, 날조가 심합니다.
  • 슽윶랩의 관계를 특별하다고 상정하고 있지만, 특정한 커플링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각 번호는 떠오르는 대로 갈긴 내용을 정리한 정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0. 

박문대는 대비했다.
차유진이 쓰러진 직후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당시 차유진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멤버는 셋. 그것도 류청우, 배세진, 김래빈이다. 전부 한때 스티어에 속해있던 멤버들이었다. 이제까지 시스템에게 수없이 뒤통수를 맞아온 사람으로서 그는 언젠가 차유진과 유사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면, 하는 생각을 안 해볼 수 없었다.
다만, 그도 알았다.
사실 확률은 높지 않았다. 시스템의 '업데이트'는 첫번째 조각과 두번째 조각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예외적인 상황이었고, 남은 조각은 고작 하나인데 스티어의 멤버였던 이들은 셋이나 남았으니까. 시스템이 업데이트 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라고 가정하기엔 숫자가 맞지 않았다. 다음 업데이트는, 혹시나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다른 양상으로 튀어나올 확률이 더 많았다. 그래도 박문대는 대비하기로 했다. 한때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어떤 누군가가 아주 낯선 세상에 떨어졌을 때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 느끼게끔. ...혹은 그의 멤버들이 더는 마음을 졸이며 컨디션을 갉아먹지 않아도 되게끔, 지금의 활동에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남지 않게끔.
어쩌겠는가. 그는 여전히 그 자신에게 다는 솔직해지지 못한 사람인 것을.



1.

박문대는 신이 아니었기에, 일이 터지는 정확한 때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김래빈이 쓰러졌을 때 그가 미리 마련해놓았던 비상체계는 무리 없이 돌아갔다. 언론이 차단되었고 관계자들은 입단속에 들어갔으며 김래빈은 신속하게 숙소로 옮겨졌다. 차유진 때와는 달리 매니저는 김래빈이 과로로 쓰러진 것 같다는 말에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앨범 작업 때마다 그가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한다는 건 관계자들 사이에서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AR 팀 안에서는 김래빈이 추천한 에너지 음료 순위가 부적처럼 돌기도 했다. 심지어 관계자가 아닌 팬들마저도 김래빈의 개인 팬이거나 그룹 코어 팬이라면 눈치채고 있을 거라는 게 테스타 내에서의 정설이었다.
김래빈을 제외한 테스타의 멤버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숙소에서 김래빈을 케어하는 그룹, 다른 하나는 활동과 그룹 외부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그룹이었다. 차유진의 일이 일어난 후에도 과거의 스티어에 얽힌 정확한 사정을 아는 멤버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만큼은 그룹 내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짧지만 치열한 고심 끝에 박문대는 배세진과 류청우를 그룹 외부 활동으로 뺐다. 눈을 뜬 직후의 김래빈이 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문대가 그룹 외부에 시선을 돌리기 힘든 지금, 팬들이나 회사와의 소통과 조율은 이세진이 맡아줄 것이다. 그는 다시금 이세진의 존재에 감사했다.
숙소에 남은 건 그리하여 그와 차유진, 선아현이었다.
'선아현은......'
박문대는 거실에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앉아있는 선아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아현 역시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박문대는 그를 남기기까지 제법 고민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두 명만 남기기에는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일차적으로, 그는 선아현의 무해해보이는 인상에 기대를 걸었다. 같은 아주사 출신이면서 폭력이나 비행과 같은 이슈와는 관련이 없었던, 그래서 설사 낯선 곳에서 깨어나 마주치더라도 비교적 경계심이 덜 할.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김래빈을 제압할 수 있는 인선이기도 했다.
"차유진, 네 생각엔 어떨 것 같아?"
"Umm. 그 경험, 기억... Whatever, 그건 Bad차유진 거에요. [그러니 그 때의 일로 이번에는 어떻게 될 거란 가정을 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죠.] "
차유진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찌푸린 채였고, 제스쳐에는 과장이 묻어났다. 그 역시 완전히 평정한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염려, 혹은 긴장일까. 박문대는 생각했다. 아무리 투닥거려도 차유진이 김래빈을 친구로 아끼는 건 사실이었다. 차유진의 눈이 미동없이 누워 있는 그의 동갑내기 친구를 향했다. 그렇지만 김래빈, 항상 김래빈이에요. 이번에도 그럴 거에요. 그 믿음만이 여전히 굳건했다.
"그래. 그렇겠지."
박문대는 동의했다.
그때 김래빈이 눈을 떴다.



2.

깨어났을 때 눈 앞에는 낯선 사람이 하나, 둘. 그리고 차유진이 있었다.
"차유진? 한국엔 언제 돌아왔어?"
습관적으로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불렀다가, 김래빈은 문득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낯선 공간이었다. 반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차유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바로 납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전화기를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할머님, 할머님께 전화를 드려야... 아니, 그게 안 된다면 누나한테라도 연락을 남겨야 합니다. 제가 갑자기 없어지면 다들 놀라실 텐데,"
몸을 일으키는 그를 부드러운 손길이 내리눌렀다.
"쓰, 쓰러졌을 때 머리를 부딪혔을, 수 있어서... 몸을 바로 일으키면, 위험해, 래빈아."
선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내용이 걱정이었다는 것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불렀다는 것도 김래빈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 여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때 옆에서 불쑥 핸드폰이 내밀어졌다. 김래빈, 바보야. 위험하잖아. 일어나지 마. 이거 네 거야. 이걸로 연락해. 차유진이었다.
"괜찮겠어?"
"하지 못하면 김래빈 더 불안해요. 가족은 김래빈 우선순위니까, 존중해 줘야 해요. 김래빈 가족들 나중에 우리가 설명하면 돼요."
알 수 없는 대화를 뒤로 한 채 그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3.

박문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간략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단단하게 정돈된, 울림이 좋은 미성이었다. 여긴 네가 살던 세계와 다른, 평행세계의 일종이고 너는 사고로 잠시간 이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장이라도 질문이 범람할 것 같았다. 그래도 김래빈은 일단 참았다. 무작정 던지는 질문과 단서 없이 전개하는 추론은 제대로 된 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이제 그는 알았다. 사람들은 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속였고, 그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역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서툴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상황을 파악하며 입을 여는 게 옳았다. 지난 5년의 세월동안 그는 큰 댓가를 치러가며 그걸 배웠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제가 여기서 테스타라는 그룹에 속해있고, 또 프로듀싱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익숙한 기기들이 보였다. 작업실도 따로 있다고 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기기들의 품명을 김래빈은 믿을 수 없었다. 회사는 그가 기기며 녹음실에 자유롭게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비로 구입해 채워넣기에는 자금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아니면 잘 지어진 꿈일지도 몰랐다.
"문대형. [내가 보는 게 지금 경계하는 김래빈이 맞아요?]"
"너는 그런 반응이면 안 돼, 차유진. 너 때를 생각해봐."
"Oh, 나 이젠 기억 안 나요."
영어를 쓰는 차유진. 잘 들리지 않는 소곤거림.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차유진이 낯설었다. 평행세계라면 그럴 수 있겠지. 그는 붕 뜬 머리로 생각했다. 그래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하는 차유진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박문대가 선아현에게 눈짓을 보내는 걸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탕, 하고 물병이 놓였을 때 놀라서 옛 버릇마냥 움찔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박문대와 눈이 마주쳤다. 제 앞에는 생수를 두 병 둔 채, 어쩐지 비장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시작하자. 김래빈. 이제부터, 궁금한 게 해결될 때까지 뭐든 다 물어봐도 좋아."
그에게는 올바른, 그러나 너무나 낯선 대응에 김래빈의 입이 벌어졌다. 차유진이 옆에서 팔장을 꼈다. 길고 긴 문답이 이어지는 동안 차유진은 그 자리를 계속 지켰다.



4.

"드세요."
선아현이라고 했다.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었다. 같은 팀은 아니었다. 얼굴과 춤선이 인상적이어서, 지나가듯 그가 들어간 무대를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벌써 옛날 일이었다. 김래빈은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그가 내미는 사과를 받아 입에 넣었다. 생수 두 통을 다 비우고도 깔깔한 목에 과즙이 달게 돌았다. 뜨개질 바늘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그 일정하고도 태연한 움직임이 어쩐지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도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은.... 몰라요. 그렇지만 역시 믿,기 어렵죠? 그래도 저기, 우리가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괜찮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납득했습니다. 번거로우셨을 텐데 충분한 설명을 해주신 점에도 감사드립니다. 믿기 어렵지만 일단 일어난 이상 이 상황을 부정하는 건 지금의 현실 인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차유진이 근본적으로 제가 아는 차유진과 다르지 않다면, 그가 믿는 사람은 적어도 저희, ...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간주해도 될테니까요."
이렇게 침착하게 말할 수 있을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이 남자는 김래빈의 옆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했다. 차유진은 김래빈 고장났어요!를 외치다 다른 남자에게 연행되었다. 체구상 그가 차유진에게 억지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로는 문대형이 어쩌고 해도 차유진이 그에게 대충 맞춰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박문대를 향했던 것을 기억한다. 여전히 사람 사이의 일에는 눈치가 그렇게 좋지 않은 김래빈조차 바로 알아차릴 만큼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중에는 차유진도 있었다. 활기가 죽지 않은, 반짝반짝한, 기대도 설렘도 아직 살아 있는. 차유진은 한국말이 서툴렀다. 예의와 규칙도, 종종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판단력은 자신보다 나았다는 걸 김래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비상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때 바로 그를 바라볼 정도라면.
"...혹시, 유진이, 불러줄까요?"
김래빈은 제 세계의 차유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동안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5.

"넌 안 들어가봐도 되겠어?"
박문대는 차유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이 어느 정도 진정했을 때부터 차유진은 태연한 태도를 되찾았다.
"Oh. 나랑 김래빈 달라요. 김래빈 지금 나 필요 없어요. [예상치 못한 일에 대응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잖아요. 그쵸? 하지만, 음. 궁금하긴 하네요.] 김래빈 눈 자주 안 마주쳐요. [김래빈은 나쁜 차유진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걸까요? 글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만약 사과받을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은 나 여기 있어요. 대신 김래빈에게 맛있는 거 먹여요. Umm. 치킨?"
".........."



6.

김래빈은 조심스럽게, 그가 작곡에 개입한 곡은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견해를 전달했다. 만약 언젠가 다시 그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면 작곡에 영향을 받을 만한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 게 나았다. 특히 그와 악기와 기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면 더욱 그랬다. 여기가 평행세계라도 김래빈은 작곡가로서 그가 행해야 하는 도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은 뮤직비디오나 음악방송 무대를 보는 대신, 자체컨텐츠를 포함한 예능을 골라 보았다.
김래빈은 화면 배경에 작게 잡힌, 차유진과 그가 투닥거리는 모습에서 잠깐 화면을 멈추더니 그 장면을 오래 응시했다.



7.

지표가 없었습니다.
김래빈은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이걸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지금 이걸 그에게 털어놓는 건 부러움 때문인지, 미련 때문인지.
"그저 무대에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유진도, 저도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에서 나온 구설수가 활동에 그렇게 방해가 될 때까지 커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에는 늦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본받을 대상이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말려주거나 도와주거나 감춰주는 사람 역시 적었다. 회사의 대응은 서툴렀고, 리더는 지쳐 있었고, 멤버들은 각자 자신들의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김래빈은 그들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종종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대신 '수용'해야만 했을 때,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아주사'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분명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더 크고 교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끝없이 평가가 이어지지만 관객은 점점 줄어드는.
"여기의 차유진은, 그러니까....."
"문대 형이라고 부르면 된다."
"예.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호칭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음.. 문대 형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듣기로는 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 다 잘 해결되었다고... 다행인 일입니다."
자신들의 세계에서 차유진은 그러지 못했다. 김래빈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자신 역시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인관계에 요령이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노력은 했지만,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재빠르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았을까, 떠올렸을 때에는 이미 기회가 다 떠나고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프로듀싱에도 사람 사이의 알력이나 정치, 경제논리 따위가 개입했다. 그가 손댈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의 의도는 종종 왜곡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불안한 그룹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의사소통의 서툶에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관계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의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룹 내의 분위기도 한 몫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저 영상처럼 서로 편하게 장난치는 빈도를 점점 줄였다. 서로가 너무 무거웠기에, 친밀하면서도 종종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언제라도 좋은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네 재능엔 문제가 없어. 문제가 있었다면 그 상황이었겠지"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과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때에는 막막해서 곡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한 적도 많으니까요."
김래빈은 차유진이 아까웠다.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는 소중했고 그의 재능과 안목을 아꼈다. 그렇지만 주눅들어있었다. 체념은 점점 빨라졌고 시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제 능력을 자신할 수 없었다. 가끔은 일단 해보자는 차유진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종종 그 대책없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화를 냈다가도 곧 후회했다.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이해자를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저런 사이여야 했습니다. 제가 더 단단했다면, 어쩌면 가능했을 겁니다."
가끔 티격태격하고, 그래도 서로의 무대를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고, 가끔은 차유진이 김래빈의 랩에 비트를 넣고, 김래빈이 짚어내는 멜로디에 차유진이 즉석에서 춤을 추는. 그 대신 그들 사이에는 짧은 작별 인사와 넓고 깊은 바다가 남았다.



8.
김래빈은 오래 훌쩍였다.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님이 그때 잠깐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가족들의 신경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고 했다. 말하는 걸 멈출 줄 몰랐던 막내는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긴 말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작곡을 놓았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역시나 김래빈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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