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 유진래빈 앤솔로지 PLAYLIST 수록 글
  • Spring out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날조가 많습니다.

  긴 기적소리가 울렸다. 기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흐린 하늘로 증기가 쉴 새 없이 솟아올랐다. 김래빈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주저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기차 어딘가에 그가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가 타고 있으리라. 그는 회중시계를 들어 올렸다. 곧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길고 긴 세월을 살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요괴들은 보통 시계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으나 인간의 세계는 이제 정해진 시간에 맞춰 굴러가는 고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가자. 차유진. 역까지 마중을 나가려면 지금쯤은 출발해야 해.”

  그의 옆에서 입 안의 것을 우물대던 차유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사람, 뭘 찾아?”

  “자식.”

  차유진은 여전히 말이 조금 어눌했다. 처음 만났을 때야 어린 요괴라 그랬다지만 이제는 둘이 만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말이 늘 법도 한데, 언제나 그의 앞에선 아이 같은 말투가 먼저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대상이어서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차유진이 다른 나라의 말에 지나치게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툭하면 몇 달을 사라져 바다 건너 인간들의 주변을 맴돌며 경호 일을 도맡아 하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차유진은 그 덕에 미리견(彌利堅 : 아메리카의 음역)의 말인지에 아주 능통해졌다. 그들의 말은 통 알아듣지 못하는 김래빈과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둘 사이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둘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찾던 이들은 한참이나 뒤에 나왔다. 허름한 인상의 노부부였다. 내내 서서 왔다는 그들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넷은 걷기 시작했다. 기차역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다시 또 야트막한 산을 올라 채석장이 나올 때까지.

  아무리 가스등이라는 게 생겨났다고 해도 어디에나 설치할 수는 없으니 여전히 많은 작업장이 어둠이 내리면 문을 닫았다. 채석장 역시 작업을 하는 인부 하나 없이 굳건히 닫혀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한다는 간판과 철조망 앞에서 김래빈은 차유진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벼운 몸짓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그 뒤를 따르기 전, 그는 뒤를 돌아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선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산 위로 올라올 때부터 불안한 기색이던 여자는 채석장의 안내문을 보고 무엇을 직감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았다. 제 아내를 붙든 남자가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리 없이 철조망을 건너뛰었다. 날이 흐려 달빛도 비치지 않아 철조망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요괴에게는 어둠을 비추기 위한 불이 필요 없으니 그에겐 문제없었다. 더구나 김래빈처럼 그 본신이 등불 자체라면. 도깨비불조차 켜지 않고 채석장의 샛길을 걷던 김래빈은 차유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채석장의 한구석이었다. 비탈이 무너진 것처럼 거대한 돌이 어지럽게 쏟아진 틈으로 작고 가냘픈 팔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혼의 빛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인간으로선 불가능할 힘과 속도로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김래빈은 시신을 쌀 무명을 바닥에 주섬주섬 펼쳤다.

  아직 성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어리고 마른 체구였다. 가출인지, 납치일지, 제대로 된 고용이었을지 아니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 있는 시대였다. 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어디에서나 일을 찾는 사람들과 그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힘들고 고된 일일수록 드문드문 인력이 부족했고, 어릴수록 더 싸게 부릴 수 있어서 작업장에서는 납치되어 온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암암리에 사람을 샀다. 언젠가 집을 나섰다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인간의 무너지고 상한 얼굴을 그는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서툰 손놀림으로 그를 감쌌다. 김래빈이 염한 시신을 차유진이 둘러멨다. 이 영혼도 이제 제 가족에게 돌아갈 때였다.

  수습한 시신을 노부부 앞에 내려놓으면 비명을 닮은 오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차유진은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잠시 침묵했다. 일면식 없는 인간의 슬픔은 그들에게 너무 멀었고 보편적인 수준의 비애를 느끼기에는 그들은 이미 비슷한 광경을 너무 많이 보았다. 아들의 시신을 되찾아 준 것으로 저 인간과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그들에게는 노부부의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돈과 인간을 도와주었다는 증표가 남았다.

  김래빈은 조용히 읊조렸다.

  “돌아갈까?”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허가받지 않은 잡상인들이 모인 시장은 정돈이 되지 않아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그 가운데를 헤쳐 나가던 사람들은 간혹 차유진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낡은 군복, 파란 눈에 빨간 머리. 한성(漢城)은 조선의 수도로 조선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데다 다른 곳보다 양인(洋人 : 서양 사람을 가리키던 말)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이국적인 외모를 볼 일이 다른 곳보다 많을 텐데도 그랬다.

  물론 차유진은 양인이 아니다.

  김래빈은 인간들이 그에게 붙인 이름을 떠올렸다. 불가살(不可殺), 혹은 불가사리. 불을 제외한 무엇으로도 죽지 않고 끝없이 쇠를 삼킬 수 있는 요괴. 그래서 차유진은 전투가 일어나는 곳 근처를 좋아했고 가끔은 양인의 경호원이나 용병으로 가장하기도 했다. 본인 말로는 그 근처가 아무래도 주워 먹을 게 많다던데, 다른 사람 눈은 신경도 안 쓰고 고철을 사탕마냥 자꾸 까득거려서 그는 걱정이었다. 저게 인간 무서운 줄을 모르고.

  ‘그러다가 소멸할 뻔한 적도 있었으면서.’

  이제 인간은 요괴를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종 4년, 서력 1518년. 한양의 모 씨가 집에 숨어든 요괴를 횃불로 쫓아낸 일이 조정에까지 올라 임금이 친히 교지를 내린 이래 인간은 불과 화약으로 요괴를 물리치는 법을 익혔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총통을 개량하고 화란(和蘭 : 네덜란드의 음역)으로부터 무기를 들여오더니, 기술을 익혀 기계라는 것으로 하여금 인간의 손을 대신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디서든 동과 구리, 철이 환영받았고, 산을 깎아 기차가 달리고 바다 깊숙이까지 스스로 헤엄치는 탐사정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산과 바다의 요괴들이 제 터전을 빼앗기고 인간 사이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배척의 대상인 채로.

  “차유진.”

  시장을 빠져나가 그들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골목에서 그는 다시 차유진을 불렀다.

  “응?”

  또 시장 어디서 빼 온 건지 손톱만큼 작은 못을 손가락으로 굴리던 차유진이 해맑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 뒤로 골목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보와 방이 보였다. 눈을 굴려 혹시나 그 벽보 중 그들을 찾고 있는 수배지가 있지 않을까 확인하면서 그는 물었다.

  “넌 시민권을 요청할 생각 없어?”

  요괴 시민권에 대한 칙서가 내려진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신문에서 며칠에 걸쳐 그 칙서에 대한 내용을 떠들썩하게 보도했기에 김래빈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리고 순한 나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 산천에 살고 있는 요괴 역시 그 책무를 다한다면 시민의 권리를 부여하기에 모자람이 없음이라. 일정한 재산을 갖추어 국가에 이바지하고 인간과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요괴에게는 시민 증서를 부여하여 다른 백성과 동등하게 대할 것이니…’

  한때 인간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이 오간 모양이지만 자격을 갖춘 요괴를 대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 자격요건을 갖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인간들 역시 초반과는 달리 최근에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차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못을 공중에 튕기더니 그대로 입을 벌려 묘기처럼 받아먹었다. 아드득.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꼭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인간과 이렇게 지낼 줄 예상하지 못했잖아. 그리고 있어 나쁠 것도 없지.”

  시민권이 없는 요괴는 제대로 된 재판을 받기 어렵다. 그걸 제하고서도 김래빈은 항상 차유진이 지하나 밤보다는 햇빛 아래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제 정체를 감추거나 인간들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시민권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차유진은 영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김래빈 하면 나도 해. 돌아오는 말도 열의 없이 대충이다.

  그는 저와 차유진의 조건을 되짚어 보았다. 둘 다 인간을 섭취하지 않으니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요괴라는 건 금방 증명할 수 있었다. 인간의 일을 하는 것도, 인간과 섞여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생활하는 방식이 그를 증명할 테니. 하지만 다른 조건은? 글쎄. 재산이 부족한 건 확실했다.

  “그러면 일단 인간을 도왔다는 증거를 모으면서 가능성을 고려해 보자.”

  그들은 골목의 그늘 속으로, 연이어 지하 수로로 파고들었다. 한성의 상수도가 연결된 복잡한 지하의 수로, 한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빈민이 둥지 트는 성 외곽에 그들의 보금자리도 있었다. 가로등의 빛도 닿지 않아 기계와 건물이 드리우는 어둠 속을 걸으면 빈민의 자식들이 헐벗은 채 그들 근처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김래빈만 보면 울거나 도망가던 아이들이었다.

  김래빈은 시장에서 싸게 산 누룽지 덩어리를 뭉텅이로 건네주었다. 그에게서 이미 여러 번 먹을 걸 받았던 아이들이 잽싸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물에 넣고 잘 끓이면 서너 명은 먹을 양으로 불어나리라. 얼굴이 환해진 아이들에게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대면 아이들은 깔깔 웃으면서 다시 흩어졌다. 그들이 요괴인 걸 아이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관계없었다. 어쨌든 비밀은 지켜지고 있었다.

  위로, 조금 더 위로. 그들은 걸었다. 계단과 파이프를 밟아 오르다 보면 보다 지상에 가까운, 그리고 좀 더 깨끗한 물이 지나는 곳에 그들의 은신처가 있었다. 사는 이들이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아 비를 막는 용도의 천장만이 어설프게 하늘을 가리는 곳이었다.

  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차유진 역시 덩달아 멈추었다. 누군가 그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인간. 중년 남성. 옷차림은 썩 대단치 못했고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무력이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김래빈 저 인간 약해. 걱정 없어. 옆에서 차유진이 속살거리는 목소리에는 조용히 해, 하고 같이 속닥이면서.

  “도깨비님이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차유진의 말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던 인간은 서신을 내밀었다. 서신에 찍힌 인장은 익숙한 것이었다. 옆에서 차유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인장을 확인하고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인장은 그들에게 인간의 일을 소개해 주곤 하는 다른 요괴, 박문대의 것이었다. 그는 서신을 열었다. 종이 위에서 붉은 꽃이 끝없이 피어오르다가 기다란 천이 되어 사라졌다. 인간은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그림이 또다른 증명이 되어주었다. 그걸 확인한 차유진이 은신처의 입구 역할을 하는 장막을 걷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요력(妖力)으로 가려뒀던지라, 인간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무엇이든 찾을 수 있으시다 들었소. 맞소?”

  넓지 않은 보금자리 안에서 인간은 무릎을 꿇었다. 서신의 인장을 봤을 때부터 그 질문을 예상하던 김래빈은 평연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도깨비를 찾아올 만한 일은 많지 않다. 이전에는 대개 요괴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기 위해 왔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었고, 그 외에는 절박하게 찾고 싶은 게 있을 때 왔다.

  그는 등불이었다. 정확히는 청사초롱. 인간에게 경사가 있을 때 가장 앞장서 들리던 등불이 아주 오랜 세월을 먹고 자라 요괴가 되었으니 그 역시 도깨비불을 길잡이 삼아 원하는 길을 찾아주는 데 능했다. 하지만 등불은 발 바로 앞을 비추는 불. 목적지가 불분명하다면 아무리 등불이 있어도 좋은 길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러니 목적지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길에서는 등불을 든 이의 의지가 개입할 수밖에. 김래빈의 능력 역시 그랬다. 조금 헤매어도 괜찮다면, 등불을 목적지로 이끌 수 있는 건 탐색을 요청한 자의 굳은 의지였다. 그래서 김래빈은 인간을 시험해 보아야만 했다.

  “그러면 당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는 등불을 띄웠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나타난 도깨비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차유진이 손을 들어 등불을 톡 건드렸다.

  “하지 마, 차유진.”

  그는 소리 낮춰 속삭였다.

  “김래빈 불 예뻐.”

  반대로 차유진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점잖지 못한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 차유진은 입술을 몇 번 비죽이고는 인간의 손을 끌어다 등불에 가져다 댔다. 인간은 흠칫 몸을 떨며 팔을 빼내려는 듯하더니, 불이 뜨겁지 않다는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손을 등불에 맞대었다. 곧 꺼질 듯 흐리던 불은 어느 순간 점점 커져 환하게 은신처 내부를 밝혔다. 상대의 의지가 목적지에 도달할 만하다는 증거였다. 은신처에 그림자처럼 몇 개의 상이 떠올랐다. 부유한 차림새를 한 사람. 한성으로 추정되는 공간. 술자리. 좁고 어두운 통로. 그 모습들이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을 잇는 징검다리일 터였다.

  “저걸 보고 뭔가 떠오르는 게 있습니까?”

  그는 상을 하나씩 띄우며 물었다. 상대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상을 한참 보더니 망설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괜찮았다. 김래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몰라도 어차피 의지가 확고하니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실마리를 알게 되리라. 대신에 그는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찾으러 예까지 오셨습니까.

  남자는 할아버지의 서화첩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의 조부는 서예로 이름을 날린 이였다. 당연히 그가 쓴 글씨며 서화 역시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가 찾고 싶어 하는 서화첩은 금전적 가치가 높은 건 아니라고 했다. 널리 알려진 시도 아니고 그가 어린 시절 시를 연습하며 썼던 것을 할아버지가 다듬고 그림을 그려서 감상을 붙인, 굳이 따지자면 조부와의 추억이 제일 귀한 가치일 법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조부 이후 그의 집안이 서서히 몰락해서 할아버지의 작품들도 하나씩 팔려나갔을 때도 그 서화첩만은 남자가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물건이 사라졌다고 했다.

  ‘도둑을 맞은 게 아닌가 싶소.’

  가산이 바닥난 후 식솔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집안이 어지러운 시간이 길어 물건이 드나드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고 했다. 남자는 이제 제게 남은 조부의 흔적은 그것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걸 찾아달라고. 집안이 몰락하여 사례는 충분치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애원은 낡고 지치고 구차했지만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문대가 그림을 맡긴 이라면 사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남자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갔다. 다시 인기척이 사라진 집 안에서 김래빈은 의관을 정돈했고 차유진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김래빈.”

  제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 못 하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풀어헤친 옷자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인간이 돌아가고 나자 굳이 등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해 공간을 채운 어둠 속에서 절 바라보는 차유진의 빛나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의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무언가를 훔치거나 꼭꼭 감추어진 귀한 물건을 찾는 의뢰를 유독 좋아했다. 저번의 의뢰에서 차유진이 씹어 삼켰던 은행의 금고 문을 떠올려 봤다가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포식했지, 그때.

  “우리 내일부터 찾아?”

  “짐작 가는 바가 없으니 우선 범위를 좁히는 것부터 해야겠지.”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과 방안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휴식해야 할 때였다. 인간의 의복을 가지런히 정돈해 둔 김래빈이 낡은 초롱으로 돌아가자 그 곁에 머리를 댄 차유진이 웅크렸다. 한성의 수많은 기계가 증기를 내뿜으며 삐걱대는 소리가 흐릿하게 적막을 채웠다. 그 위로 매연과 가스등의 불빛에도 살아남은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맑은 새벽이었다.

*

  남자는 서화첩을 찾을 때까지 한성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체류비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그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와 차유진은 그 남자와 지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점차 범위를 좁혀나갔다. 그나 차유진이나 인세의 소문에 썩 밝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소문을 물어다 주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신문 좀 봐요. 나야 까막눈이래두 도깨비님은 글자도 읽을 줄 안다 하셨으면서.”

  막자는 글은 못 배웠어도 몸이 날쌔고 귀가 좋았다. 눈치가 있어 일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김래빈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소문을 곧잘 물어오곤 했다. 이 빈민촌에 사는 아이 중에서도 제법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였다. 그는 막자의 호의를 몇 년 전 고작 약 몇 포로 샀다. 더는 아이를 낳지 말자고 자식 이름을 막자로 붙이고도 기어이 또 막냇동생을 보고 만 부모 대신 동생의 약을 그가 구해주었을 때 막자는 제가 언젠가 꼭 보답해 드리겠다고 울었다.

  그런 막자가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서화첩을 찾는 남자 앞에서 등을 띄웠을 때 나타났던 누군가의 모습이 모르기에는 지나치게 유명한 사람이어서였다. 김래빈이 머쓱하게 갓 끝을 매만졌다. 옆에서 차유진이 코웃음 쳤다.

  “김래빈 기억력 나빠.”

  “아니…! 나는 그저 인간에게 관심이 덜하고 더구나 인간보다 오래 살다 보니 신문에 자주 실리곤 하는 얼굴들은 어째 죄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잘 구분할 수 없었던 것뿐이야! 게다가 차유진, 그렇게 따지면 너도 알아보지 못했잖아!!”

  “나는 신문 안 봐! 김래빈은 신문 자주 봐! 그러니까 김래빈이 더 바보야!!”

  “고작 사람의 얼굴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바보로 칭하는 건 대단히 부적절한 언사야!”

  저기요, 할아버지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요. 막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건 말건 잠시 차유진과 투닥거리던 김래빈은 이내 갓을 고쳐 쓰며 어린 것 앞에서 뒤늦게 면목이 없다는 듯 헛기침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형조판서란 말이지. 고맙구나.”

  막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 이상은 모른다며 그에게서 약간의 고기를 받아 돌아갔다.

  그 뒤부터는 소문을 긁어모으기 어렵지 않았다. 육조의 판서들이야 하나같이 높으신 어르신들이니 관심 갖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을 만했다. 알아보니 형조판서는 본디도 예술을 사랑하는 걸로 유명했던 모양이었다. 제 소장품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전시했다는 기사를 이전의 신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형조판서의 소장품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그 서화첩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둑이면 훔친 거 안 보여줘.”

  차유진은 당연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그들에게 형조판서는 도둑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가 직접 훔친 게 아니라도 최종적으로 서화첩이 그에게 흘러 들어갔음은 분명했다. 그의 등불이 그 증거였다. 형조판서씩이나 되었으니 누군가에게 샀다고 하더라도 그게 장물임을 모를 리 없겠지. 서화첩 주인을 불러야겠네. 김래빈은 착잡하게 필묵을 꺼내 들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그림자를 보면서도 혹시나 했습니다만 역시 그 사람이었군요. 허나 상대가 형조판서라면 설사 그 사람에게 정말 그것이 있더라도 제게 돌아올 길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제게 있는 것보다 화첩을 아낀다는 그분께 있는 것이 좀 더 귀하게 다뤄질 테고….”

  여인숙의 작고 초라한 방에 셋은 겨우 끼어 앉아있었다. 남자의 신세로는 그 방을 얻는 게 고작이었을 터. 김래빈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하얗게 질리던 남자는 결국 말을 하다 말고 막막한 듯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차유진이 그 남자에게로 몸을 기울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방법 있어. 훔치면 돼.”

  예? 남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김래빈이 상황을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던 차유진이 어느새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본론만 던지면 상대가 당황스러우니 그렇게 대뜸 던지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거늘. 김래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장죽을 물었다. 차유진이 저렇게 치고 나갈 건 이미 예상하였기에 대비책 역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소리를 먹는 풀에 도깨비불로 피운 연기가 자욱이 방을 메웠다. 방음이 좋지 않은지 옆방의 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왔지만 그들의 대화는 새어나갈 일 없을 터였다.

  역시 여러모로 남들에게 들려주기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그는 소리 없이 뻐끔대었다.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그쪽이 먼저 훔쳤잖아. 그러니까 우리 안 나빠.”

  형조판서 신고 못 해. 자기 거 아니야. 차유진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그야 평소에도 요괴가 인간의 법을 지킬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김래빈도 이제까지 인세의 흐름을 보아온바 인간의 법을 어긴 자를 항상 인간의 법으로만 처단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다만 의뢰 대상자에겐 제발 정중하게 굴어달라는 그의 말을 오늘도 어긴 건 아무래도 좀 짜증나서 그는 차유진의 옆구리를 냅다 찔렀다. 갑자기 찔려 어이없다는 얼굴로 돌아본 그가 무어라고 항의하기도 전 김래빈은 말을 받아 이었다.

  “원하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만약 붙잡힌다면 저희는 당신이 부탁했노라고 말할 테니까요. 그리고 설령 서화첩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걸 찾았다는 걸 드러내어 밝히지 못할 겁니다. 형조판서가 보복할 테고요.”

  “그건….”

  상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혼란을 이해하기에 김래빈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장죽을 허리끈에 찔러넣고 갓을 비스듬하게 써 얼굴을 가리는 김래빈의 옆에 머리를 두건으로 대충 싸매 색을 감춘 차유진이 섰다.

  “마음의 결정이 되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입김을 후 불어 연기를 흐트러뜨린 김래빈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차유진은 눈앞의 인간이 해야 할 고민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안녕, 하고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한성의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짧게 내기했다.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내기였다. 아쉽게도 성립되지는 않았다. 김래빈은 인간의 의지를 근거로 들었고 차유진은 그쪽이 재밌고 속 시원한 결론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어쨌든 둘 다 서화첩의 본래 주인이 훔쳐서라도 그걸 되찾겠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주장에 걸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심부름꾼을 통해 각오를 다졌으니 그대로 실행해달라는 쪽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차유진은 그래도 제가 먼저 주장했으니 제가 내기에서 이겼노라고 우겨댔다. 어차피 내기에 이겼다고 해 봤자 걸었던 게 입맞춤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김래빈은 이건 성립되지 않은 내기라고 뻐기어 보았지만 결국 제가 먼저 차유진의 입술을 찾아 물고야 말았다.

  의뢰인이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는 계획을 짤 때였다. 온통 깨물려 욱신거리는 입술에 간혹 미간을 찌푸리며, 김래빈은 가장 빠른 전서구로 이제까지의 진행 상황을 박문대에게 알리고 조언을 구했다. 박문대의 서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도움이 될 만한 요괴를 하나 소개해 줄 터이니 연락해 보시게.

  그렇게 소개받은 이세진은 호조에서 적당한 지위를 차지한 채 둔갑 중이었다. 우두머리는 일만 많잖나. 그는 눈을 찡긋했다. 어중간한 직책이 눈에 띄지 않으면서 오히려 어색하지 않게 고위 관리와 접촉할 수 있다는 설명이 덤으로 붙었다.

  “호조 선택한 거야 별 이유 있으려고. 예나 지금이나 돈이 인간을 움직이는 거 아니겠어~? 특히 요새는 말야.”

  형조판서라. 그는 중얼거리며 그의 단안경에 붙은 작은 톱니바퀴를 손으로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니 이세진의 눈앞에 투사될 정보 역시 알 길 없는 김래빈은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그와 달리 차유진은 지루한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지고 자욱한 연기 속 방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귀한 돌로 만든 벼루며 멋스럽게 청화 얹어진 두꺼비 연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이 무심하게 흘러갔다가, 철로 만든 기물이 등장하고 나서야 눈을 빛낸다. 손에 들고 맛을 가늠하듯 스읍, 입맛을 다시는 걸 뒤늦게 발견한 김래빈이 기겁했다.

  “차유진!!”

  “나 아직 입 안 댔어, 김래빈.”

  억울한 듯 꿍얼거린 차유진이 얌전히 기물을 내려놓았다. 자네들도 참 여전해. 혀를 차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묘한 얼굴을 한 이세진이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눈을 찡긋했다.

  “형조판서라~. 호조랑 형조는 평소에 교류가 잦지 않으니 아는 게 많진 않지만, 도움이 될 만한 건 하나 알지.”

  그들에게 모임이 있는 거 알고 있나? 이세진은 말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부러 그러듯 소리를 낮추어 속닥대었다. 자연스레 그에게로 고개를 숙인 김래빈의 옆으로 불쑥 차유진이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이세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악을 사랑하는 관리들이 모인 것처럼 가장한 그 모임은 비정기적으로 한성의 어느 주루에서 모임을 갖는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그 모임에서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내보이지 않는 작품들도 간혹 선보여진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을 내보이고 자랑하는 자는 호조판서라고.

  “서화첩이 나올 가능성도 있겠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실마리는 찾는 셈이지.”

  소개해 준 이의 면을 보아 그 모임이 어느 주루에서 열리는지 까지는 알아내 보겠노라고, 이세진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얼굴로 웃고는 그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대문을 나서서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리 뭐 해?”

  “지금 당장은, 글쎄. 어디 사는 지나 먼저 눈여겨볼까.”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골목에 자박이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사람 수로 팔도 제일인 한성이라도 어디든 북적이는 건 아니었다. 궁궐과 가까운 북촌은 달그락거리는 인력거 소리와 담장 너머로 은은하게 울리는 인기척을 제외하면 퍽 고요한 곳이었다.

  그는 담장 너머와 너머로 길게 이어진 기와지붕들을 더듬었다. 저 기와집들 어딘가에 형조판서가 머무르는 곳도 있겠지. 아무리 돌과 철로 벽과 기둥을 보강해 하늘처럼 전각을 올린 건물들이 늘어나고 승강기라는 것이 새로 생겨 도르래로 사람들을 위아래로 실어 날라도 그건 성곽 바깥의 사정일 뿐, 여전히 부유하고 높은 이들은 너른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걸 고아한 양 여겼다. 특히 대대로 벼슬길 하며 북촌에 터 잡은 가문들이야 오죽하겠나. 형조판서도 그런 집안의 일원이었다.

  김래빈은 도깨비가 된 후로부터 태백의 깊은 산속에 살던 이였다. 처음에는 산 속 동굴에. 나중에는 탄광의 광맥 속에. 한성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형조판서가 어디 사는지도 알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등불이자 길잡이. 염원이 그를 이끌고 의지가 그의 앞을 밝혔다. 그는 그에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차유진이 당연한 듯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굉장히 묘했다.

  “요력이 느껴지는데.”

  부채로 얼굴의 반절 가량을 가리며 김래빈이 속삭였다. 옆에서 봇짐을 맨 채 머슴인 척 행세하던 차유진은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는 담장 기와 위를 돌돌 굴러가는 도둑잡이 자명종에서 시선을 떼었다.

  “형조판서 우리랑 같아?”

  소리 좀 죽여. 손가락을 제 입 앞에 가져다 대며 김래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이세진이 미리 일러주었을 테다. 둔갑의 귀재가 인간인 척하는 요괴 하나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럼 뭐야?”

  “글쎄. 정확히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추측건대 어느 요괴의 비호를 받고 있거나?”

  인간 중에는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는 힐끔 형조판서의 집을 다시 보았다. 역시 은근한 요력이 마치 그물처럼 그의 집을 감싸고 있었다.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어도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이러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겠는데. 뒷짐을 진 김래빈이 중얼거리면 옆에서 차유진이 발을 두어 번 굴렀다. 나 싸우는 거, 자신 있어! 평화로운 풍경 속에 평화롭지 않은 말들이 소곤소곤 돌아다녔다.

*

  이세진은 약속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차유진은 요괴들만이 읽을 수 있는 표기로 쓰인 서신 한 통을 받았다. 그 서신에는 한성의 유명한 기루 한 곳의 이름과 특정한 날짜, 들어갈 수 있는 방법과 시간이 적혀 있었다. 서신을 다 읽은 김래빈은 도깨비불로 편지를 태웠다. 편지는 흔적도 없이 불에 먹혀 사라졌다.

  오랜만에 역할을 바꿀 때였다. 차유진은 제 옷 꾸러미를 뒤졌다. 그 옆에서 김래빈은 회중시계며 지팡이 같은 것들을 꺼내주고는 저는 외출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갖춰 입었다.

  그들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한성의 골목을 소리 없이 누볐다. 아직은 가스등이 없어도 골목이 밝아 순라군이 돌 때가 아니었으니 기척만 죽이면 될 일이었다. 이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주루의 입구는 시끌벅적해도, 일하는 이들이 주로 오가는 뒷문은 고요했다. 하품하며 긴장감 없이 걸어 나오는 인간을 제압하는 건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오늘은 김래빈이 내 하인 해.”

  옷을 벗긴 인간은 근처 창고에 두고 문을 걸어 잠그며 차유진은 짓궂게 웃었다. 혹시 다른 이들이 올까 초조한 안색인 김래빈과는 정반대로, 아주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그는 화사하게 꾸민 채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정장을 각 잡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채 지팡이를 든 차유진은 이국의 어느 귀한 집 자제 같았다. 기루에서 일하는 이의 복장을 옷 위에 걸치며 김래빈은 짧게 반박했다.

  “네 하인은 아니지.”

  차유진은 키득댔다. 김래빈 진짜 아니니까 내가 맞아.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쪽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섰다. 정문으로는 갈 수 없었다. 복장을 갖춰 입었어도 다른 종업원을 만난다면 김래빈이 그곳에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 채일 터였다.

  “여기쯤이지?”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가 바닥과 벽을 통해 울려 되돌아오는 느낌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밀통로나 숨겨진 공간은 아무리 잘 숨겨놓는다고 하더라도 방식에 한계가 있다. 특히나 이런 곳에 만들어지는 공간은 더욱 그렇다. 종업원이나 손님이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하므로 오래 드나들면 알 수 있도록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은행 금고도 털어봤던 몸. 김래빈은 쉽게 손잡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손으로 벽을 짚으면 미묘한 벽의 요철이 느껴지는 곳 바로 옆,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족자의 걸이대를 매만지자 돌리는 방향에 따라 인간의 귀로는 잡을 수 없는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좌로 세 번, 우로 두 번, 위로 한 번. 소리를 따라 손을 움직이면 소리 없이 드르륵 벽이 열리고 홈이 드러났다.

  “열쇠가…”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혹시 이 옷의 주인은 여기까지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 종업원이었던가. 김래빈이 곤란한 얼굴을 하는 사이 홈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차유진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김래빈.”

  “왜.”

  “이거 그냥 뜯어먹어 버리면,”

  “당연히 안 돼, 바보야. 벽을 뜯으면 침입한 게 바로 티가 나잖아. 이 정도 규모의 주루에는 반드시 경호 인력이 있을 테니 나갈 때 곤란해지게 돼. 일부러 종업원도 한 명만 기절시켰는데 네가 시선을 끌어버리면 소용이 없어!”

  김래빈은 소리를 낮춰 그를 꾸짖었지만 차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멀뚱한 얼굴이었다. 언제쯤 저 이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텐가. 그가 탄식하고 있으면 그를 빤히 바라보던 차유진이 손을 뻗었다. 목 부분이었다.

  “그래도 김래빈 나 없으면 성공 못 해.”

  씩 웃으며 차유진이 내민 건 카라핀이었다. 그가 착용한 종업원 복장에 달려있던 물건이었다. 목 바로 아래에 달려있어 그의 시선에는 닿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살펴보니 핀의 머리 부분이 홈과 딱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차유진 잘 했어, 속삭이며 손을 뻗어 상대 손을 도닥이면 우쭐거리듯 그와 시선을 맞춘 차유진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는 카라핀을 홈에 맞춰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가늘게 진동한 벽이 스스로 갈라져 열리고 그 사이로 계단이 보였다. 그들은 계단을 올랐다. 새롭게 등장한 복도의 양옆으로 놓인 화분이며 키 높은 장식장들 사이로 가려진 것처럼 드문드문 장지문이 보였고, 한적하고 향기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여기야. 차유진이 나지막하게 그를 부르더니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어느 방인지 알겠어?”

  “응. 여기서 형조판서 대감이라고 했어.”

  장지문 너머 어른거리던 그림자를 눈으로 어림하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숙였다. 차유진이 그 앞을 가리듯 섰다. 그는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다행히도 이 주루는 최신의 유행을 따라 벽돌과 타르로 벽을 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나팔처럼 끝이 벌어진 기구를 꺼내어 뾰족한 끝을 힘주어 벽에 박았다. 픽,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힌 그 기구에 귀를 가져다 대고 톱니를 돌려 초점을 맞추면 벽 안의 소리가 보다 또렷이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한성 각 기루의 술과 음식, 그리고 기예를 평가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김래빈 아직 멀었어? 차유진이 입 모양으로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복도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손을 접었다.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들은 복도 장식장의 그림자 옆으로 몸을 숨겼다. 혹시 들킨다면 소란을 일으키기 전 빨리 제압해야 했다. 다행히 술이며 음식을 양손에 아슬아슬하게 쌓아 나르던 종업원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재게 발을 놀려 복도를 지나갔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음식을 나르러 간 사람이니 볼일을 마치면 다시 또 돌아올 터였다. 차유진과 그는 몸을 돌려 장식장 반대편에 숨었다. 이윽고 아까의 종업원이 다시 복도를 지나쳤다. 주변으로는 눈길 하나 안 주는 태도에 어이없는 얼굴이 된 차유진이 중얼거렸다.

  “여기 너무 쉬워!”

  “은행처럼 뭘 지켜야 하는 곳도 아니고, 고작해야 별도의 공간을 원하는 높으신 분들을 위한 곳이니 그럴 수밖에. 애초에 손님이 약속한 이 아닌 다른 이를 데려와도 들여보내 주는 허술한 곳인걸.”

  “그래도.”

  맥이 빠졌단 얼굴의 차유진을 제 앞에 가림막처럼 세워둔 채 그는 다시 기구에 귀를 기울였다. 몇 마디의 대화를 듣고 나니 형조판서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목소리에 특히 집중했다.

  웃는 소리가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형조판서가 헛기침했다. 각자 떠들던 소리가 다시 고요해졌다. 김래빈은 본능적으로 저 모임의 중심이 형조판서임을 알아챘다. 형조판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좀 더 귀를 가까이 대었다. 어쩌면 형조판서의 집에 둘러진 그 알 수 없는 요력에 대해 들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드르륵.

  김래빈이 재빨리 벽에 꽂아두었던 기구를 수거해 소매 안에 넣는 사이 문이 열렸다. 손님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것처럼 차유진의 앞으로 허리를 숙여 고개를 가리면 나오던 이의 시선이 그의 정수리에 꽂혔다. 혹시 무언가 어색해 보이는 걸까. 그의 손이 긴장으로 느려졌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 나가는 가죽신이 시선에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의 머리 위로 즐거워하는 차유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뭘 봐! 할 걸 그랬어.”

  “괜히 시비 걸었다가 일이 더 커지면 골치 아파.”

  손님이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허리를 일으켜 세운 김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있으면 위험할 테니 이제 가야겠어. 속삭이고 턱짓하면 차유진이 진짜 손님마냥 당당히 앞장섰다. 그 반 발짝 뒤에서 따라가듯 걸으며 김래빈은 그가 들은 말들을 조합해 보았다. 정리하자면 은행 금고가 털린 일로 귀한 물건들을 집에서 보관하는 이들이 늘었고, 형조판서도 그 중 한명인 듯싶었다.

  ‘그런데 요력을 동력기관으로 쓴다고?’

  김래빈은 흘긋 좋은 천으로 감싸인 제 앞의 등을 바라보았다.

  “김래빈 할 말 있어?”

  그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챈 차유진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대가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비호가 아니었어.”

  요력을 동력기관으로 쓴다? 요괴의 비호를 받는 자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조판서는 대체 요괴를 어디서 어떻게 데려다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그 복잡한 심경을 조용히 전달하면 차유진은 그 맘도 모르고 또 신나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 우리 또 탐정놀이 해?”

  끝까지 종업원인 척 차유진을 앞서나가 나가는 손님 배웅하듯 쪽문을 열어준 김래빈이 약간 작아 불편했던 복장을 주섬주섬 벗어 문 안으로 던져넣으며 으레 그랬듯 차유진의 말을 받았다. 차유진. 우리가 하는 건 놀이 같은 게 아니래도.

  김래빈은 은신처에 큰 지도를 주르륵 펼쳤다. 한성의 지도였다. 한성의 모든 건물과 샛길들까지 샅샅이 표기되어 있으니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형조판서의 집 위치를 그 위에 표기하며 그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 은행 털어먹을 때 금고 위치랑 도주로 찾으려 잘 사용했었지.

  “가택은 기억하기론 평범했어.”

  형조판서의 말을 엿들은 뒤 그는 막자의 도움을 받아 식료품 배달부로 분장하여 그 집에 접근한 적이 있었다. 안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바깥채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담장 내부에 무언가를 획책할 만한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절 두고 혼자 잠입했을 때부터 골나있던 차유진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눈을 흘겼다.

  저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그 눈초리에 김래빈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차유진?”

  “김래빈은 어린 것한테 약해.”

  차유진이 소매에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쇳조각을 꺼내어 손 위로 굴렸다. 어느 기계의 부품인지 나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벽에 등을 기대며 시선을 던지면 그걸 다시 소매 속에 집어넣은 차유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붙었다.

  “어린 것들한테는 당연히 잘 해줘야 하는 게 맞지만, 대체 어떤 맥락에서 차유진 네가 그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 둘이서도 할 수 있어! 다른 인간 없어도 돼!”

  막자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눈을 끔벅였다. 그는 차유진이 왜 그 어린 인간에게 불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야 그렇지마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는 데다 도움을 주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잖아.”

  “…김래빈 그 인간도 주울 거야?”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인 차유진이 입을 비쭉이더니 어린 강아지가 주인에게 매달리듯 그에게 뺨을 부볐다. 그 어리광에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끼며 김래빈은 제법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는 몸을 틀어 차유진과 마주 보았다. 절 보는 빛나는 눈을 시선으로 더듬으며 손을 뻗어 얼굴을 감싸면 매끄러운 피부가 그의 손에 감겼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이가 아니야. 하물며 단명하는 인간들이야.”

  제가 주워 건사하는 건 차유진 하나로도 족했다. 그는 새삼스레 차유진의 얼굴을 훑었다. 이제는 그도 다 자란 요괴가 되어 더 이상 건사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차유진은 제법 어렸다.

  그는 우연히 제가 살던 곳에 굴러들어 왔던 어릴 적의 차유진을 떠올렸다. 아직 인간이 요괴를 불로 물리칠 줄 모르던 때인데도 어찌 불가사리가 불에 약한 걸 알았는지, 차유진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내릴 기미는 한참을 없었다. 이대로라면 죽어버리겠지. 같은 요괴인 걸 알아 제게 뻗던 손을 그는 뿌리치지 못해 그 몸에 도깨비불을 온통 덮어씌워 주었더랬다. 허구의 불이 실제의 불을 잡아먹고 불에 담긴 요력이 상처 입은 몸을 치유해 주도록.

  ‘예뻐.’

  제게 얹어진 푸른 불을 한참 바라보던 어린 요괴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때 김래빈은 제 불만큼 깊게 반짝이는 그 푸른 눈을 보며 어렴풋하게 지금의 결과를 예감했다. 언젠가 제가 완전히 닳아 없어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저 어린 요괴가 계속 신경 쓰이겠구나, 하고.

  “인간 주울 거 아니면 김래빈 왜 자꾸 시민권 얘기해?”

  “? 그거야 시민권을 확보한 요괴는 비교적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데다, 굳이 요괴인 걸 숨기지 않고도 지낼 수 있고 기차며 인간들의 이동 수단을 이용할 때도 편리하잖아. 무엇보다도 서북부 지역에서 미개척지에 대한 우선 점유권을 가질 수 있고.”

  한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차유진이 한 말이었다.

‘김래빈, 여기 너무 답답해.’

  한성은 어디든 건물과 사람으로 그득한 도시였다. 그전에 그들이 머물던 곳은 사람이 드나들었어도 산이었다. 그때도 차유진은 인간의 발이 닿지 못하는 가파른 절벽 위에 훌쩍 올라가 있곤 했다. 나는 넓은 데 좋아. 바다도 좋아. 막 달릴 수 있는 곳도 좋아. 머무는 곳의 한 뼘짜리 하늘로 손을 뻗으며 차유진이 어느 날 밤 중얼거렸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넌 넓고 트인 데가 좋다며.”

  상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돌려주면 상대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연신 깜박이다 물었다.

  “진짜 그거 때문이야?”

  “바닷가는 힘들어. 배 타고 오가는 이들이 늘었으니까 여기만큼 번잡할 거야. 하지만 서북부 지역은 다르지.”

  “…김래빈 그거 빨리 말했어야지!! 나 갑자기 의욕 마구 생겨!”

  그를 와락 끌어안은 차유진이 제 머리가 죄 헝클어지는 것도 아랑곳 앉은 채 그에게 고개를 마구 문댔다. 그는 제게 달려드는 그 무게를 익숙하게 받아내며 좀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당연히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어.”

  잠깐의 포옹과 짧은 입맞춤들이 오가고,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김래빈의 손가락이 지도 위 형조판서의 집을 툭 건드렸다.

  “그럼 이제 여기 좀 봐봐.”

  차유진의 시선이 고분고분 지도로 향했다.

  “집안에 광이나 곳간은 많았지만 감춰진 곳은 없었어. 요력은 여전했고. 형조판서는 지금 집이 아닌 어딘가에 요괴도 두어야 하고, 실험도 해야 하는 상황이야. 차유진 네가 그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세진은 알아낸 걸 알리는 그들의 연락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걸 아직도 연구하는 치들이 있단 말이지?’

  놀랍게도 요괴에게서 요력을 뽑아내어 기계의 동력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요괴를 확보하는 것도, 그들에게서 요력을 뽑아내는 것도, 그 요력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보관하는 것도 요원한 일이라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의 왕은 요괴조차 제 백성으로 삼아 국가에 필요한 재원과 능력을 구하려고 하는 자. 조정에서는 진즉에 그러한 논의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물밑으로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혀를 끌끌 찬 그는 그러니 형조판서가 드러내 놓고 실험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제일 쉬운 데 김래빈도 알아. 지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 금고가 그랬다. 지하 깊숙이 공간을 파고 방과 금고를 어지럽게 배치했었지. 무언가를 숨기기에도 가장 편한 장소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는 한성의 지하수로와 파이프를 그려둔 반투명한 종이를 꺼내어 지도 위에 겹쳤다. 톱니바퀴를 돌리고 기계를 움직이는 힘, 증기기관은 불과 물의 혼합으로 돌아간다. 한성은 조선의 수도답게 가장 최신의 기계들이 움직이는 곳이었고 각 기계과 기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파이프가 거미줄처럼 지하를 차지하고 있었다. 형조판서의 가택이 위치한 땅 아래도 그런 곳이었다.

  “형조판서의 집 아래에는 그만한 공간이 없어. 파이프 아래까지 공간을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워서 그가 그런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한 차유진이 한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김래빈 나 돈 많이 벌려고 수배된 요괴 잡은 적 있잖아.”

  차유진은 그에게 제 행선지를 숨기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런데 그게 왜?”

  “나 그때 들었어. 옥에 들어간 후로 친구 요괴 사라졌댔어.”

  그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흐린 차유진이 북촌에 위치한 형조판서의 집으로부터 손가락을 쭉 아래로 내렸다. 김래빈은 지도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전옥서. 형조의 관할로 죄수를 관장하던 너른 공간이 그 손끝에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도 한성을 이리저리 옭아매는 수도관과 파이프가 유독 전옥서의 주변에는 성기게 배치되어 있었다. 형조판서의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면서 형조가 손댈 수 있고, 요괴를 공급하기도 실험을 숨기기에도 알맞은 공간이 있을 곳.

  아무래도 습격해야 할 곳이 두 군데가 될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한숨을 쉬었고, 차유진은 사납게 웃었다.

*

  차곡차곡 계획이 세워졌다. 역할을 나누고,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지도에 진입로와 도주로를 표시하고, 지키는 이들의 신경을 끌 방도와 추격할 이들을 따돌릴 방도들을 두런두런 의논했다. 형조판서의 집과 전옥서 부근을 몇 번이고 왕복하는 사이 어느덧 그들은 빈민가 동냥 분장의 귀재라는 꽃단이라는 아이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꽃단이의 손길 아래에서 그들의 정체는 몇 번이고 바뀌었다. 지친 인력거꾼, 새벽의 채소 배달부, 옥바라지하러 가는 늙은 아비. 차유진은 한 번쯤은 부부로 가장하고 싶다 했지만 누가 되었든 키 육척의 멀대같은 요괴를 인간 여성으로 분하는 건 어려워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그들의 계획은 조밀하지 않고 성겼지만 지도에는 그들이 남긴 선과 짧은 소견이 덕지덕지 붙었다. 애초에 서화첩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김래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자연스레 형조판서의 집에 그가, 전옥서 지하에 차유진이 가게 되었다. 한 번 헤어지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유사시에는 각자의 판단을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하루 이틀 합을 맞춰온 것도 아니니 그들의 생각이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란 신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뭘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차유진?”

  결행의 시간을 앞두고 북촌과 종로로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김래빈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저 멀리서 순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공간 찾기. 실험 자료랑 이상한 거 다 없애고 증거 가져오기. 무사히 도망치기. 김래빈 너는?”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나열했다.

  “서화첩 찾기, 형조판서에게 있을 증거 빼 오기, 무사히 도망치기.”

  마지막이 제일 중요했다. 그들의 의뢰인이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일에 목숨까지 걸 생각이 없었다. 요괴가 얽혀있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이따 봐. 뻗은 손에 상대의 손가락이 굳게 감겼다 떨어졌다. 먼저 출발하는 차유진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다 김래빈도 걸음을 옮겼다.

  딱딱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가스등의 불빛에 유의하면 순라군을 피해 돌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촌 드넓은 저택들 사이 샛길에서 김래빈은 쉽게 익숙한 방향을 따라 형조판서 저택의 옆길로 들어섰다.

  여전히 형조판서의 집은 알 수 없는 요력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는 근처 느티나무에 몸을 기댔다. 저게 무슨 힘인지 알 수 없는 한 그는 섣불리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때 형조판서의 말에 의하면 요력을 동력으로 쓰는 기술은 아직 실험 단계야. 어떤 형태든 동력기관의 크기는 아직 눈에 띄게 클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집이 아니라 그곳에 제어장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차피 요력은 거리와 관계없이 작동하니까.’

  ‘알았어! 이상한 거 다 때려 부수면 돼?’

  ‘너무 소란 피우지는 말고.’

  그는 차유진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확률은 반의반. 전옥서 지하에 수상한 공간이 없어도, 그곳에 제어장치가 없어도 문제였다. 그는 고개를 빼어 종각 쪽을 바라보았다. 축시(丑時 : 새벽 1~3시)가 다 되어가도록 이쪽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전옥서에서 제어장치를 찾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실험의 증거를 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형조판서를 실각시키고 팔다리 잘린 그의 집을 다시 뒤지면 되니까.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문득 형조판서의 저택이 크게 깜박이는 것처럼 빛났다.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찢어지듯 늘어나더니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동시에 저택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횃불이 하나둘씩 솟아오르고 병장기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담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곁으로 바짝 붙었다. 전옥서와 습격이라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곧 곁문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차유진이 뭔가 한 모양인데.’

  사람이 빠졌으니 몰래 들어가기 쉽겠다, 생각하면서도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걱정 어린 눈길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 방향을 흘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체할 순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잘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 그는 손가락을 튕겨 그가 변장하면서 봐 두었던 저택의 곳간 근처에 실제의 불과 아주 흡사한 도깨비불을 피워 올렸다. 한차례 소란이 일면서 이미 저택의 많은 사람들이 깨어난 상황. 불은 금방 발견될 터였다. 그의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아 이내 집 안에서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와 허둥지둥하는 사람들의 기척, 물을 떠 오라는 고함이 함께 섞여서 들렸다.

  ‘한밤중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지키는 사람마저 빠져버린 쪽문을 살짝 열고 들어섰다. 잘못한 건 형조판서이지 그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어디선가 희미하게 쾅 소리가 들려왔다. 원인이야 뻔했다. 그는 물건을 뒤지는 손놀림을 더 빨리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차유진, 너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운이 좋았다. 형조판서는 병졸들과 함께 전옥서 방향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다. 차유진이 그와 마주칠지도 모르니 운이 좋은 게 아닌가? 아무튼 그는 주인이 없는 바깥사랑으로 손쉽게 숨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전옥서에 실험을 명하는 그의 수결이 담긴 문서가 서재 금고에서 금방 발견된 것과는 달리 서화첩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공간이 있었다. 채소 배달부로 분장하고 바깥사랑까지 들어와 본 게 적어도 세 번. 4칸의 긴 건물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바깥에서 걸었던 발걸음 수와 방과 방을 잇는 마루에서 셌던 발걸음 수, 그리고 이 방에서 걸었던 발걸음 수를 조합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여기였다. 그의 직감도 이곳에 서화첩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도, 책장 뒤에도 서화첩을 둘 만한 비밀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차유진이 날뛰는 모양이니 형조판서는 금방 돌아올 수 없을 테지만 혹시 그가 피운 도깨비불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나고 집이 습격당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언제까지고 차유진의 양동작전에 의지할 수만도 없었다. 차유진이 습격한 건 어쨌든 관아였고 저러다 수배라도 붙는다면 시민권은 한층 요원한 길이 될 게 분명했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형조판서가 이 방 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은 건 분명해.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 장치를 작동시키는 손잡이를 그는 어디에 두었을까.’

  주루와는 달랐다. 그곳은 종업원을 비롯해 자격이 있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지만 여기는 형조판서의 개인 공간. 더구나 그 비밀공간은 아무나 손댈 수 없어야 했다.

  ‘객이나 부리는 자가 건드리지 않을 만한 물건이면서 이 방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물건. 장치와 연결할 수 있도록 위치가 고정된 물건. 그러면서도 혼자서 조작할 수 있을 만한 물건.’

  몇 가지 물건이 그의 눈을 스쳤다. 하지만 죄다 만져볼 여유는 없었다. 그는 과감하게 움직였다. 키 낮은 서탁 위에 놓인 단계석 벼루가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는 벼루 뚜껑의 무늬를 매만지다 힘주어 돌렸다. 흐릿하게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물도 붓지 않고 먹을 갈 수야 없는 일이지.’

  그 주변에 붓은 걸려있을지언정 연적이 보이지 않았던 게 그가 벼루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맞았다. 드르륵거리는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은은하게 울렸다. 가구가 마룻바닥의 널판 째로 레일 위를 움직였다. 방 안이 통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감탄마저 나오는 광경이었다. 마루 아래에서 튀어나온 공간이 층층이 선반을 구성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방 한쪽 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진열대가 되어 있었다.

  “허….”

  김래빈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서화첩뿐만이 아니었다. 도둑맞았거나 어느 순간 사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귀물 몇 점이 그곳에 있었다. 꼴에 귀하게는 모셔두었는지 상태는 멀쩡한 채였다. 그는 서화첩을 손쉽게 찾아 떨어지지 않게 싸매 단단히 제 허리춤에 매었다. 이제는 여기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시간을 지체한 모양이었다. 사랑채를 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는 다른 사람과 맞닥뜨렸다. 하인인지 무언지, 그와 정통으로 마주쳐 버린 젊은 청년은 김래빈이 무언가 대처하기도 전에 으악 고함을 질러버렸다.

  “도둑이야!!!”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연막탄을 던지고 냅다 가장 가까운 담을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서 무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 연기를 헤치며 달렸다. 사람들이 습격이라며 소리치는 소리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그를 바짝 뒤쫓았다. 눈치채이기 전에 빠져나갔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이 더 몰리기 전에 잽싸게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뒤에 꼬리를 붙인 채로 미리 약속한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차유진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김래빈의 머릿속에서 한성의 수많은 골목길이 떠올랐다 재조립되었다. 그는 차선을 골라 방향을 틀었다. 통금령 내려 고요한 길에 그를 뒤쫓는 인간들이 내는 소리가 다닥다닥 따라붙었다. 담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넘는 것으로 가볍게 도둑잡이 자명종의 함정을 피하고 북촌의 고택들 지붕 위를 뛰어, 그는 시전 거리를 덮은 아케이드의 철제 아치 위를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유리가 덮이지 않은 곳을 골라 그대로 땅으로 낙하해 시전 거리의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그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의 팔을 누군가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숨을 삼키고 몸을 비틀자 차유진이 귓가에 나야, 하고 속삭였다. 그는 몸에 힘을 빼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둘 다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도주로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상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어느 상점의 뒤편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있어야 할 자물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천이 그득하게 쌓여있었다. 그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숨으면 서로의 숨이 엉켰다. 골목 밖에서 인기척이 어지러이 울렸다. 두터운 면포 더미가 한동안은 그들의 모습을 가려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머물면 곧 발각될 터였다.

  탈을 벗은 차유진이 그를 보며 말했다.

  “김래빈이 나중에 나가.”

  차유진이 도망의 귀재라는 건 이미 증명된 명제였다. 외국 공사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한번은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낸 것도, 그래서 유사시엔 치외법권의 특권을 이용해 즉시 한성을 떠날 수 있는 것도 그였다. 그러니 혹시 추적에 몰린다면 상대가 시선을 끌기로 한 것 역시 사전에 합의된 일이었다. 지금이 그럴 때야. 차유진이 눈으로 말을 건넸다. 김래빈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차유진의 손으로부터 그의 손으로 미끄러지듯이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들어 올려보니 실험일지처럼 보이는 종이 묶음이었다. 거기 있었어. 차유진이 속삭였다.

  “잘 찾았네.”

  그는 두건 사이로 삐져나와 제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손이 관자놀이를 스쳐 뺨으로 향하자 차유진이 눈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고 상대의 머리카락을 쓸어보다가 다시 두건을 끌어당겨 잘 여며주었다. 당분간은 이 부슬거리는 감촉도 안녕이었다.

  “불 조심해.”

  조선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불과 철과 증기의 나라로 변모해 가는 그 모든 세월 속에서도 김래빈의 염려 가장 첫 마디는 변하지 않았다. 널 죽일 수 있는 건 불 뿐이니 불을 제일 조심하라고. 김래빈이 나 또 구해주면 돼. 짐짓 장난스레 되받아쳤던 차유진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불만 어린 잔소리를 뿜어낼 기색을 보이자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쉿, 김래빈 들켜.

  “나 김래빈한테 꼭 돌아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김래빈 잘 도망쳐. 제 손을 거둔 차유진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망설이던 그는 제 하관을 가리고 있던 입가리개를 내리고 고개를 들어 제 입술을 붙였다. 짧은 입맞춤이 오가고 다시 손에 탈을 든 차유진은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둑잡이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소란을 피우려 일부러 노렸겠지, 하고 김래빈은 추측했다. 주변을 배회하던 기척이 저쪽으로 홱 쏠리는 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감시망에 빈틈이 생겼다. 그는 기민하게 제 퇴로를 계산했다. 셋, 둘, 그리고 지금. 시끄러운 호각 소리와 고함을 뒤로 하고 그는 달렸다. 가장 주된 병력이 저쪽을 향한 이상 추격을 따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성의 여느 병졸보다 그에게 익숙할 골목과 지하 수로를 달음질쳐 누비는 동안 그를 쫓는 이들은 다시 반으로, 또 그 반으로 줄었다.

  마침내 모두를 따돌린 그는 숨을 고르며 어느 골목에 가만히 섰다. 해야 할 일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한 이상 병조판서는 절대로 정도 이상 소란을 피울 수 없을 터였다. 북촌 근처 골목이야 계속해서 시끄럽겠지만 그가 선 이곳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소리 없이 산을 올라 절벽 위에 서면 탁 트인 정경 속 한성이 보였다. 아직 캄캄한 새벽 속에 몸을 숨긴 채 김래빈은 어떠한 신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하늘이 희뿌옇게 밝았다. 긴장된 얼굴로 고개 너머를 응시하다 그는 이내 안도하듯 큰 숨을 내뱉었다. 가까운 한성의 외곽에서 비행선의 기체가 검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떠오르고 있었다.

  차유진은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비행선을 띄우느라 이지러진 공기가 돌풍이 되어 그가 서 있는 곳까지 치달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넘겨 누르며 김래빈은 비행선이 점점 더 작아져 점이 될 때까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쪽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는 손을 흔들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중에 봐, 차유진.

  한성이 좀 잠잠해지고 제 목표한 바를 이루고 나면 차유진은 다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언제 떠나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그때까지는 저도 무사해야겠지. 김래빈은 그들의 은신처에 요력으로 남긴 암호를 떠올렸다. 그들이 찾은 서화첩과 증거는 꼼꼼하게 싸매 안전한 전서구를 거쳐 이세진에게로 갈 터였다. 그 뒤는 이세진의 몫이었다. 미덥지 않을 리 없었다. 이세진은 궁에서 그 수많은 세월을 견딘 요괴였다.

  남은 건 다시 지하로, 광맥을 따라 개미굴처럼 얽힌 무수한 미로로 숨어드는 것뿐이었다. 막자를 포함해 빈민가에서 인간들과 맺었던 연들은 또 끊어지겠지. 하지만 괜찮았다. 그는 그런 세월을 질리도록 겪었다. 그는 가까운 광산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언젠가 찾아올 이를 위한 은밀한 표식이 걸음걸음 남았다. 아주 오래, 어쩌면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을 연이었다.

끝.


코멘트

답글 남기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