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와 놀라기엔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게 이번만이 아니었다. 김래빈은 머쓱하게 생각했다. 음. 차유진이 왜 그때 아침을 하겠다고 날뛴 건지 알겠는걸. 다행히 큰 일로 번지진 않은 것 같지만 그동안 밀려있었을 앨범 작업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했다. 할 일이 많았다. 일단 밖으로 나가면 형들에게 폐를 끼친 데 대해서 제일 먼저 사과를 해야 했고, 가능하다면 개인 스케줄도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아봐야 했다. 그러고 나면 AR 팀에게 할 변명을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마 형들이라면 어떤 것이 좋을지 같이 고민해줄 터였다. 또...
문득 그는 잠시 가슴 부분을 꾹 눌렀다 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릿함이 잠시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그 자신을 되찾으면서, 그의 것이 아닌 낯설고 무거운 기억들은 곧 밀도가 높은 무엇처럼 천천히 저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제 헷갈릴 일은 없었다. 그는 테스타의 김래빈이었다. 20여년동안 그가 쌓아온 기억이 점차 흐려지는 기억들을 제치고 굳건하게 현재의 김래빈을 구축했다. 하지만 감정의 조각들은 달랐다. 그 감정이 기반하고 있는 경험은 제 것이 아닌데 아릿하고 벅차고 쓸쓸한 파동이 가슴을 간질이는 감각은 꼭 제 것 같았다. 영화나 소설을 보며 주인공에 감정이입하는 것과도 달랐다. 아주사에 출현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완전히 같았던, 그리고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될 수도 있었던 어떤 존재가 남긴 흔적은 그에게 불분명한 불안감을 남겼다.
다만 그에게는 다행으로, 김래빈은 그 감정을 곱씹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밀린 일이 폭탄처럼 그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2.
'그 날 인류는 월궁도, 항아도, 계수나무와 달토끼까지 모두 잃어버렸다.'
묻어두었던 감정은 기습적으로 찾아왔다. 보던 만화의 어떤 부분이 이유도 없이 눈에 걸렸는데 그 원인을 바로 떠올릴 수 없었다. 조금 함축적인 표현은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만화는 아니었다. 달 탐사 이후 인류가 잃어버린 상상력에 대한 내용이었다. 다만 평소라면 별 일 없이 넘어갔을, 그 상실에 대한 문장이 어딘가 마음에 쓸렸다. 김래빈은 더듬듯이 패드의 액정 너머 그 문장을 따라가보았다.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기기는 무심하게 그 다음장으로 만화를 넘겨버렸지만 그는 더이상 액정을 보고 있지 않았다. 상념이 떠돌았다. 공통된 키워드를 징검다리 삼아, 만화에서 그들의 무대로 건너뛰면서.
<기다림이 좋아>
달토끼를 모티브로 한 무대의상, 둥치만 남은 계수나무가 설치된 무대, 그리고 기다림에 대한 노래. 콘서트 세트리스트를 그들이 활동기에 발표한 곡들만으로 채울 수 있게 되면서 그 노래는 점점 후순위로 밀려났다. 그래서 그가 그 노래를 떠올리게 된 건 꽤 간만의 일이었다. 그 무대를 구성했던 가장 최초의, 아주사의 3차 팀전 때의 기억이었다.
만화와는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그 달토끼들 역시 상실을 경험했다. 그랬다. 기다림은 상실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니까. 그걸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충격이었다.
'그때는 정작 달토끼의 마음을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어.'
김래빈은 인정했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앞에는 가사까지 완전한 원곡이 있었고 편곡 방향에 대한 명확한 컨셉이 있었다. 곡 선정부터 무대까지 고작 열흘이었다. 노래의 주인공이 어떤 마음일지까지를 가늠해보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끝이 있는 기다림, 언젠가 만날 누군가. 김래빈은 그것이 설렘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들 동의한 방향이었다. 컨셉을 섹시로 잡기에도 그 편이 좋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회상하는, 그 때의 추억, 은밀한 환희와 같은 것들.
그 역시 아주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다만 달에도 뒷면이 있듯 기다림의 이면에 존재했을 막막함을, 그저 흘려보냈던 아득한 감정을.
오늘 김래빈은 그 대신 둥치만 남은 계수나무와 그만큼 흘렀을 시간을 보았다. 그 긴 시간동안 지속되었을 어떤 기다림을 상상했다. 그 오랜 세월을 넘어, 기억도 사라진 누군가와 언젠가 만나리라는 믿음이 무엇으로 유지되었을까를 생각했다. 그 불확실한 상황에서 훼손되고 흔들리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연약한 그 무엇에 대해서.
'김래빈'의 감정이 살아났다. 비어버린 관객석과 잃어버린 열정을 김래빈은 자신이 그인 것처럼 더듬었다. 그랬다. 상실이었다. 그래서 그 만화를 넘기지 못했다. '김래빈' 역시 기다리는 상대가 있었다. 쓸쓸함과 외로움을 차곡차곡 쌓으면서도 끝내 놓지 못한 것이 있었다.
'작곡, 차유진, 우리 팀, 무대, 관중, 미래......'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단어들이 결국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졌다.
작고, 연약하고, 그래도 빛나는,
희망.
3.
"차유진, 너는 어떻게 생각해?"
"Huh?"
차유진은 바닥에 드러누운 채 소파에 다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한국인이 다 된 모양새였다. 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힌 차유진 앞에, 김래빈은 쪼그려앉았다. 소파에 다리를 올리면 안된다는 잔소리마저 잊은 채였다. 그 일에 대한 최초의 질문이었다. 그들은 그동안 암묵적으로 그 기묘한 경험에 대해 입을 다물어왔기에.
"그거 꼭 알고 싶어? 그건 우리 일 아냐."
차유진은 쉽사리 자신과 그때의 차유진을 분리해냈다. 못된 차유진은 못된 차유진, 그리고 나는 나. 김래빈 역시 자신은 그가 아님을 알았다.
"...나도 알아."
김래빈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뱉어냈지만, 물러나지는 않았다. 대신에 입술이 다물렸다. 잠시 말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신경 쓰여. 책무감도 아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래. 물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니까 널 설득하긴 어렵겠지. 너는 그때 일을 말하는 걸 안 내켜하니까. 그래서 가급적이면 물어보지 않으려 했지만 나 혼자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렇다고 다른 형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너에게 물어본다는 선택지만이 남게 돼."
그 일은, 비록 진짜 너와 진짜 나의 일이 아니라고 해도, 너와 나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야. 김래빈이 단정했다.
"......"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는 차유진을 김래빈 역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차유진의 동공 속에 그의 상이 거꾸로 맺혔다. 웃는 것처럼, 혹은 찡그리는 것처럼 차유진의 눈꺼풀이 반쯤 접혔다. 김래빈, 바보야. 차유진이 속삭였다. 바보한테 바보라고 불렸는데도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다정한 타박이었다. 마치 그 '차유진'이 돌아가기 전 새벽에 부른 그의 이름처럼. 차유진이 이어 말했다.
"너 이미 답 알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정답이야."
입술이 소리없이 벙긋였다. Black-hole.
그 순간 김래빈은 어떤 멜로디를 떠올렸다. 짧은데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서는 이미 다른 곡에 녹아들어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는 아주 사소한 것. 그래도 차유진은 알아차렸다. 그때의 김래빈은 몰랐지만 '김래빈'과 기억을 공유하는 지금의 김래빈은 알았다. 그 뒤로 차유진이 퍽 누그러진 것도 기억했다. 그 눈에 다시 피어난 익숙한 빛을 보았다.
아. 김래빈은 짧게 탄식했다. 어떤 김래빈도 그건 차마 폐기하지 못했다. 혼자서도 계속 다듬고 덧붙이며, 언젠가 쓸수 있을까를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놓지 않았던 멜로디. 그는 웃었다. 눈썹 부근을 손으로 문지르며, 조금 멋적은 듯이, 그러나 어느새 익숙한 자기 확신을 무기처럼 두른 채로.
이곳과 같을 수 없는 세계. 그 곳엔 오르빗도, AR 분들도, 문대 형도, 다른 다정한 그룹 멤버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확실한 지표는 없다. 그래도 멜로디가 있었다. 그 작고, 가늘고 불확실한 가능성을 길잡이 삼아 흔들리고, 믿고, 또 흔들리다가도 다시 믿게 되는 그 길을 그들이 기어이는 걸을 것을 알았다. 이제는 진짜로 묻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Wooow. 김래빈. 똑똑하다고 말하면서 이거 몰라. 역시 김래빈보단 내가 똑똑해!"
어느새 다정을 내팽개친 차유진이 키득였다. 이어지는 허밍이 익숙했다. 복수하듯 몸을 일으킬 수 없도록 그의 이마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다 김래빈 역시 옮은 것처럼 가사를 읊조렸다.
그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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