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10월 26일 / 아픈 김래빈
테스타는 여전히 7명이 같은 숙소를 쓴다. 그 말은 한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컨디션 관리도 아이돌의 덕목이라지만 세상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을때가 있는 법이었다. 이번에는 김래빈이 독감에 걸렸다. 본가가 서울에 있는 사람이라면 본가에라도 머물텐데, 하필이면 집이 먼 막내들 중 하나가 독감이라 형들은 의논 끝에 둘이 쓰던 방을 혼자 쓰게 비워주기로 했다. 부엌에는 김래빈 전용 컵이, 화장실에는 김래빈 전용 수건이 새롭게 생겨났다.
김래빈은 콜록거리면서도 끝까지 단체 생활에 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뻗었다. 거실에 남겨진 테스타의 멤버들은 어쩔 수 없지 하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졸지에 1인실에서 2인실로 삶의 질이 하락한 배세진은 각종 짐을 들쳐매고 있는 박문대를 보더니 그나마 박문대라 다행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의 방으로 임시 룸메이트를 안내했다.
그리하여 거실에는 스케줄로 부재한 선아현을 제외한, 류청우와 이세진, 그리고 차유진이 남았다.
"유진이는 래빈이 없어서 당분간 심심하겠네~"
"나 김래빈 없어도 괜찮아요! 애 아니에요!"
이세진의 너스레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굳게 닫힌 방문을 한번 힐끔 바라보는 게 걱정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번 독감이 정말 독하기는 한지 간밤엔 김래빈이 열이 제법 많이 올랐다. 간밤에 청우가 김래빈 열을 잴 때 덩달아 같이 깬 차유진도 옆에 서 있었으니 김래빈이 얼마나 아픈지도 알 테다. 류청우는 김래빈이 빠진 채 돌아가야 할 스케줄을 점검해보고는 넌지시 차유진의 등을 밀었다. 그럼 유진이가 래빈이 일어나면 먹을 수프 해줄까? 어쨌든 이 덩치산만하고 가끔 정신도 산만한 개념적 막내가 혹시라도 저 방에 들어가 독감을 옮아오지 않도록 적절히 신경을 분산시켜줘야 했다. 다행이 그가 리더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건 아니라서, 차유진은 닭고기 수프를 한답시고 꽤 오랜 시간을 부엌에서 소모했다.
김래빈은 오후 늦게야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웠고, 코며 목이 부어올라 화끈거렸다. 침대 옆에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것 같은 물통이 있었다. 그는 느리게 물을 들이켜 마른 목을 축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콜록거리다 마스크를 주섬주섬 찾아 끼고 예, 하고 거친 목소리를 냈다.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고개를 들이민 차유진 역시 얼굴에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김래빈 깼어? 나 들어가!"
마스크에 한 겹 막혀 평소보다 우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아무리 마스크를 썼다 해도,"
김래빈은 거기서 한번 더 콜록댔다. 이번 독감은 유난히 기침이 잦았다. 감염의 우려가 있어 들어오면 안 돼.. 그래서 이어지는 말은 기가 다 빨린 것처럼 힘없이 흘러나왔다. 그 말을 못 들은 건지, 아니면 듣고도 무시한 건지 차유진은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침대와 약간 거리를 두고 의자를 죽 끌어와 주저앉은 차유진은 의자의 등받이를 앞으로 돌려 양 팔을 걸어 기대며 그에게 대뜸 말했다.
"Chicken Soup 해놨어. 김래빈 먹어."
마스크가 불편한지 두어 번 손이 입가로 올라왔지만 어쨌든 벗지는 않았다는 점에 안도한 김래빈은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 네가 했어? 별 의미 없는 질문에 응, 하고 답이 돌아왔다. 스티어 차유진의 영향이든 아니면 이제까지의 경험치가 쌓인 것이든, 차유진이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어내게 된 지도 꽤 오래 전이라 그 수프가 못 미더운 건 아니었다. 다만 입맛이 별로 없어서인지 몸을 바로 일으킬 생각은 들지 않았다. 꾸무적대며 어깨에 이불을 둘러매자 의자를 돌돌 밀며 다가온 차유진이 손을 내밀었다. 이마를 잠깐 짚었다 떨어진 그 손의 주인은 영 확신이 없는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아직 많이 추워?"
그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약을 먹고 푹 자서인지 높았던 열도 어느새 많이 떨어져 있었다. 입맛이 없어. 중얼거리면 상대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먹는 거 중요해. 이거 김래빈 할머니 말씀이야. 그리고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어. 밥 먹고 먹어."
흑임자맛! 경쾌하게 덧붙인 차유진이 그가 밀어내는 손짓을 따라 다시 돌돌돌, 의자를 물렸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상대의 말을 곱씹어본 김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사 왔어?"
"Nope. 아현 형!"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사 오신 모양이구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차유진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나 말했어. 김래빈 아플 때 아이스크림 먹어야 한다고."
그는 눈을 깜박였다. 예전에 차유진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는 했다. 정확히는 '목이 아프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였다. 그들이 소속사를 나와 함께 살 때였다.
그때 아팠던 건 차유진이었다. 평소 몸이 워낙 건강한 편이라 그가 아픈 일은 드물었는데도,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사는 환경이 또 바뀌어서였는지 감기 증상이 꽤 심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가지는 않았다.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차유진은 엄연히 외국인이었고 그 때문에 챙겨야 하는 각종 서류나 절차는 전부 전 소속사가 처리해왔다. 외국인도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병원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말로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보다 한국을 잘 모르던 차유진은 병원에 안 가도 된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는 아픈 차유진을 이불로 둘둘말아 눕혀놓고 막막한 얼굴로 그 옆에 앉아있었다.
병원이나 누나에게 한번만 전화해서 물어봤어도 방법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랬다. 하지만 그때는 김래빈도 아직 미성년이었다. 몸을 일으켜 집 밖으로 나왔지만 기껏해야 약국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감기약을 사고, 편의점에 들러 데워먹을 수 있는 죽을 사다가 목이 아프다던 차유진이 떠올라서 아이스크림을 샀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유진."
그는 이불속에 몸을 더 파묻으면서 상대를 불렀다. 응. 하는 답이 돌아왔다.
"나를 걱정해서 이것저것 준비해준 건 고마워. 하지만 정정해야 할 부분이 있어. 아이스크림을 섭취하는 게 목이 아픈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고는 해.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니 아플 때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건 올바른 정보가 아니야. 형들께 내가 아플 때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퍼트린 부분을 반드시 다시 제대로... "
콜록. 다시 기침이 터졌다. 이불을 좀 더 둘둘 말며 연신 콜록거리면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느껴졌다. 김래빈 바보야? 목 아프다며 목 많이 써, 하는 타박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고 바보라는 거야. 기침때문에 나가지 못한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이제는 둘 다 그때만큼 어리지 않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선아현은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이제 당연한듯 김래빈의 취향을 맞춰 흑임자아이스크림을 사오고 김래빈 없이도 테스타의 스케줄은 문제없이 돌아간다. 차유진도 이제는 한국의 건강보험이 어떤지 알고 있다. 그런데도 굳이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한다며 스케줄을 갔던 형에게까지 번거롭게 요청했다는 게, 정말 꼭 바보같고, 아파서 그런지 좀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해서.
"차유진, 너 아팠을 때, 그때 그 아이스크림, 너에게 도움이 됐어?"
저도 똑같이 바보같은 질문이나 던지게 되는 것이다. 차유진은 다시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러니까 김래빈도 먹어, 하고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말했다. 그 말에 그는 그냥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 11 12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