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3일 / 백 곡 달라는 차유진
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던 김래빈이 불현듯 의자를 빙글, 돌렸다. 그의 침대에서 주인마냥 바디필로우를 깔아뭉갠 채 흥얼거리고 있던 차유진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김래빈이 어느새 헤드폰을 벗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차유진, 들어봐."
지금까지 김래빈과 부대끼고 살았던 그의 경험에 의하면, 그 서두는 지금부터 김래빈이 할 이야기가 길고 장황할 거라는 신호였다. 벌써부터 열없는 얼굴이 된 차유진이 다시 침대에 고개를 푹 묻었다. 너는 사람이 할 말이 있다는데 집중을 하지 않고 있냐는 김래빈의 타박은 I'm-li-sten-ing-을 질질 끌며 외치는 걸로 끊어냈다. 김래빈은 좀 더 잔소리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이어지는 건 다행이도 그의 용건이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특정한 숫자는 그 숫자 자체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냥 많다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쓰이기도 해. 우리나라의 경우 백이라던가 만, 억 같은 경우가 그런 경우야. 예컨대 백년해로를 한다는 말은 정말로 백년동안 살자는 뜻이 아니라 오래오래 함께 하자는 뜻이지. 만석꾼 같은 경우도 정말로 딱 일만 석을 수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정도의 땅을 소유한 부자를 이야기해. 이건 네 나라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고 들었어. 너희의 경우에는 백보다는 백만을 주 단위로 쓰는 것 같지만..."
뭐라는 거야. 차유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김래빈 머리 너무 길어. 그냥 하고 싶은 말 해."
그의 말을 끊고 차유진이 투덜거리면 김래빈은 또다시 친절하게도(반어법이다.) 머리가 아니라 서두야, 하고 그의 말을 고쳐준다. 그리고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예전에 네가 요청한 거 말이야, 하고 운을 뗀다.
"네가 100곡이라고 언급하기는 했지만,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10년동안 100곡은 무리가 있어. 그러니 나는 그 때의 네가 그래도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성인이었던 걸 고려했을 때, 라디오의 재미를 위해 우리의 언쟁이 조금 과열된 바는 있었겠지만, 결국 네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반드시 100곡이라는 특정한 숫자가 아니라 내게 최대한 많은 곡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김래빈의 말에서 답을 찾아내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차유진 스스로는 반쯤 잊고 있던 어느 날의 투닥거림이었다. 저런 걸 대체 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지. 차유진은 새삼스럽게 그의 친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욕심이 아주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차유진한테 그건, 그러니까, 김래빈이랑 항상 하는 장난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그는 답을 알 것 같았다. 김래빈은 항상 그랬지 뭐. 진지하고 별것도 아닌 것까지 다 무거워서 사람을 어이없게도, 감동하게도 만드는. 그래서 그는 그냥 뻔뻔하게 밀어붙이기로 했다.
"No! 아냐! 나 진짜 김래빈한테 100곡 달라고 한 거야!"
그도 나름대로는 진심이었다. 아마도. 일단은.
"바보야! 내가 아무리 상대적으로 작업속도가 빠르다는 평을 받는다고 해도 10년동안 100곡은 무리라니까! 그리고 나는 테스타라는 그룹에 속한 일원으로써 그룹 전체의 음악적 성취에 보다 힘을 쏟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룹 멤버들 중 너에게만 다른 형들에 비해 많은 곡을 써줄 수도 없어!"
그렇다고 100곡을 선물하기 위해 퀄리티에서 타협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어. 김래빈은 실제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유진은 고집스레 다물린 입에서 그 뜻을 쉽사리 읽어냈다. 활동과 활동 사이 귀한 휴식기에 무슨 개인작업을 그렇게 오래 붙들고 있나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제 생일날 또 곡을 선물해줄 모양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나한테 곡 줘?
"이번에 영감님 뭐 왔어? 뭐 써? 재밌어? 나 빠른 거 좋아!"
김래빈의 의자를 책상으로 죽 밀고 그 뒤에서 그에게 친숙하지 않은 작곡 프로그램 화면을 들여다보면 얼결에 마우스를 놓치며 밀려난 김래빈이 다시 왁왁거린다. 차유진 갑자기 밀면 놀라잖아!
"Oh 나 기대 많이 해! 혹시 surprise? 그거 실패야. 김래빈 벌써 들켰어."
아랑곳하지 않은 차유진이 신나서 발을 구르건 말건, 김래빈은 습관처럼 다시 ctrl+s를 누른다. 그러더니 뭐가 또 심기에 거슬린 건지 차유진이 재생바를 눌러 뭔가를 들어보기도 전에 프로그램을 톡 꺼버린다. 그럼 나타나는 배경화면에는 그의 친구가 곡들을 차곡차곡 백업하는 폴더와 그의 이름이 붙은 폴더가 나란히 떠올랐다. 하나, 둘, 셋, 넷... 차유진이 무심코 그 안의 파일 갯수를 센다. 언젠가는 저에게 도달할지도 모르는, 아직 싹트지 않은 그의 세계들이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난 네 요구가 내게 부당할 만큼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는 걸 말해주고 싶은 거야."
"그거 틀려!"
"차유진, 네가 나를 과대평가하거나 작곡을 과소평가하는 모양인데..."
"아냐! 나 무시 안 해. 김래빈 이미 나한테 많이 줬어. 우리 곡, Testar! 거기 내 이름도 있어. 나도 참여했으니까 그것도 내 곡이야!"
김래빈 바보, 하고 덧붙이면 순간적으로 말을 잃은 상대가 버벅거린다. 아니, 나는 네가 말하는 네 곡이라는 게 공동저권을 소유한 곡을 내포한 의미인지를... 그러더니 머리속에서 계산하는 게 역력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테스타도 이제는 제법 연차가 찬 아이돌인만큼 발매한 앨범 수도 결코 적지 않다. 대부분이 몇 곡 수록되지 않은 미니앨범이라도 그렇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테스타의 이름을 달고 나온 곡, 차유진에게 드문드문 선물했던 곡, 유닛이나 솔로의 명목으로 차유진의 이름을 달고 발표된 곡들을 세면 제법 갯수가 나오리라.
어쩌면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게 분명한 그 혹한 얼굴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실 곡의 갯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차유진의 가장 빛나는 순간엔 항상 김래빈의 곡이 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빛나지 않아도 중요한 순간, 중요하지 않아도 특별한 순간,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때에도.
"김래빈 그럼 나한테 200곡도 줄 수 있어!"
다만 은근슬쩍 그를 회유해보려던 건 칼같이 거절당해서, 그는 입술을 비쭉이며 다시 김래빈의 침대에 제 침대처럼 드러누웠다. 어쨌든 그의 생일 때에는 또다시 김래빈의 헌정이 도착할 것이다. 마치 대단한 것도 아닌 것처럼 겸손하게,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무궁무진하게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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