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 60분 – 비바체

  너는 날 차유진이라고 불러도 돼. 동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의 형태를 알게 된 유진은 그에게 뻐기듯 말했다. 그때부터 유진은 김래빈에게 항상 차유진이었다. '차'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유진의 가문도 한때는 동대륙에 뿌리를 둔 가문이었다고 한다. 다른 가문보다 동대륙어를 배운 가문의 일원이 조금 더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김래빈이 유진에게 구출된 건 어쩌면 그에게 행운일지도 몰랐다. 그를 납치했던 유랑민들과는 달리 적어도 차유진의 가족들은 동대륙 출신인 그를 신기한 구경거리 취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김래빈이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구출되어 유진의 집안으로 간 뒤부터 그들은 하루하루 자라났다. 서로 다투듯 키가 부쩍 커지다가, 키만 너무 훌쩍 자란 거 아닌가 싶을 때쯤부터는 골격이 잡히고 몸에 양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로 대놓고 경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차유진의 승리였다. 유진의 가족은 그를 피후견인이라기보단 반쯤 차유진의 젖형제마냥 대했기 때문에 먹는 것과 지내는 것에서 차유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김래빈은 제가 차 가문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았음을 항상 잊지 않으려 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은혜를 되돌려드리는 게 사람의 도리일 터였다. 교육을 받고 서대륙의 사회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 김래빈은 피후견인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금전적인 보답이 어렵다면 명성을 떨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방식으로라도! 원래 교양있는 귀족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가문의 우아함을 자랑하지 않던가!

"그래서. 김래빈 내린 결론이 궁정악사 되는 거야?"

"그래! 궁정악사는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고, 내가 궁정악사가 되어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 내면 차 가문 역시 예술적으로 좋은 안목을 지녔음이 증명될 테니까!"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가 계획한 바를 피력했지만 차유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샐샐 웃고있는 그 얼굴을 보니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김래빈은 양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가문을 물려받는 건 이든 형님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하지만, 둘째도 아닌 셋째는 짊어져야 하는 가문의 의무가 거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역시 차유진은 가끔 너무 사람이 가벼웠다!

"김래빈 지금도 유명해!"

"아니야. 평론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내가 네 가문의 피후견인이라는 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바람에 내 명성은 실제 내 성취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해. 물론 그렇게라도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어주고 그게 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이왕이면 선입견 없이 실력을 평가받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오. 그렇게 따지면 궁정악사도 공정하진 않은데..."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려놓으며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응에 김래빈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생겨난 피후견인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가문의 어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음악의 길을 권유한 게 차유진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궁정악사가 된다고 하면 네가 제일 반길 줄 알았는데. 나에게 궁정악사가 되라고 제일 먼저 추천해준 게 차유진, 너였잖아."

"나, 궁정악사도 될 수 있겠다고 했지 궁정악사 되라고 안 했어."

음악 시켜봐요. 그렇게 말했던 걸 차유진도 기억하고 있기는 했다. 그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그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손 닿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써 빼곡히 채워져있던 그 악보들. 그걸 보았다면 누구든 그에게 음악을 시키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납치당한 후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수도의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몇 달간 숨어 지내듯 끌려다니면서 악보 읽고 쓰는 법이나 겨우 들었던 주제에, 벽 사이로 울리는 음악을 정확히 훔쳐듣고 악보로 구현해내는 능력을 봤다면 그 누구라도.

궁정악사 따위 되지 않아도 지나치게 찬란한 재능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 실속없는 명예직을 차지하느라 벌어지는 난장판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나 의심가는 성격으로 궁정악사를 지망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김래빈을 내심 차유진의 심복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그의 할머니도 한두 해 김래빈을 지켜보더니 그건 안되겠다, 하고 혀를 쯧쯧 찼는걸. 물론 김래빈이 작곡한 곡을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의 할머니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차유진이다.

"김래빈."

차유진은 그에게는 조금 낯선 형태의 이름을, 이제는 친숙하게 입에 담았다. 김래빈은 열심히 살았다. 새로운 말과 예의와 관습과 음악을 죽도록 익혀가면서. 차유진은 옆에서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단어는 알고 있으되 어색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기가 부끄러워 유독 말이 서툴던 시절부터 몇 문장에 달하는 긴 말도 막힘없이 내뱉는 사람이 된 지금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건 미덕이기는 해. 차유진은 얼핏 냉소적으로 김래빈을 평가했다. 곧이곧대로 감탄하기에는 그의 눈에는 김래빈이 조금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은 간혹 가족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차유진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의 가족들은 김래빈에게 최선을 다해 잘 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도 차유진은 이해했다. 그게 왜 가문에게서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나타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김래빈 궁정악사 되는 거 응원 못 해."

한번 더 못을 박는다.

"이상한 의뢰 받아준다고 밤 새는 것도 별로야."

그렇게 고심해서 만들어진 곡에 김래빈의 이름이 아닌 어느 덜떨어진 귀족의 이름이 붙는 건 더 싫었다. 아직까지도 이 나라에 신기한 게 많은 김래빈은 어딜 데려갈 때마다 시시때때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차유진이 느끼기에는 김래빈은 그 곡들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곡을 쓰기를 바랐다. 비바체. 차유진은 악보에 날아갈 듯 갈겨쓰여 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넌 항상 체력이 넘치는 것처럼 활기차니 너한텐 알레그로보다 비바체가 더 어울려. 김래빈이 진지하게 그에게 설명해주었던 내용도.

하지만 그 단어는 김래빈에게도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눈을 반짝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표정부터 변하고야 마니까. 그러니까 차유진은 그런 김래빈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궁정악사같은, 그가 보기에는 김래빈의 재능을 오히려 가리기만 할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마음은 우정일까? 아직 덜 자란 청년은 슬며시 드는 위기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특유의 낙천성으로 그 껄끄러움을 날려버린다. 여전히 자신의 책무를 설명하는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얹어 상대가 휘청거릴 때까지 무게를 더해 말을 끊으며 차유진은 제 팔 아래로 버둥거리는 체온에 웃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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