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12월 1일 / 후원자x피후원자 윶랩
그곳은 명성만큼이나 아주 유서깊고 오래된 극장이었다. 내부는 명성에 맞추어 몇 번이고 화려하게 단장했지만 건물을 이루는 골격과 구조는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 내부를 단장하면서 건물의 외골격 사이와 내부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고 그 틈은 종종 무대 장치를 보관하거나, 관리인들이 관객 눈에 띄지 않고 오가는 통로가 되거나, 혹은 비밀스럽게 밀회하는 배우와 어떤 귀족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단, 주의할 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틈은 약간의 공간이 있는 막다른 길이었지만 어떤 틈들은 다시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이어졌는데 그런 곳들은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런 곳들은 극장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불완전한 구조와 설계 탓에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공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고 그런 곳에 한번 잘못 발을 들이면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영영 나오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관리인들은 그런 틈마다 출입을 금하는 봉을 세워두었고, 극장에서 일하는 이들과 배우들에게도 그 곳으로는 출입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하였다.
물론 세상에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싶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열 다섯살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가 그랬다.
부모를 따라 극장에 놀러왔던 그 소년은 다른 또래들과 얌전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좀 지겨웠다. 그의 지위며 외모는 다른 이들에게 선망을 사기 좋았기에 어릴 적에는 제게 쏠리는 시선에 좀 우쭐할 때도 있었지만, 계속 우쭐함에 머물러 있기에는 유진은 너무 영리한 소년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관심에는 다정한 호의만큼이나 껄끄러운 열광과 삐죽삐죽한 적의도 같이 섞여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고, 그걸 예쁘게 포장해 모르는 척 주고받는 대화에도 신물이 났다.
그는 부모가 어느 저명한 저술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조용히 옆으로 빠졌다. 휘황찬란한 촛대가 기둥마다 달려있는 벽면을 따라 걷다보면 극장의 '그 틈'을 발견하는 건 금방이었다. 그 틈 앞에는 예의 출입을 막는 봉이 세워져있었지만 그는 거뜬히 쳐진 줄을 넘어 그 틈새로 들어갔다.
틈 안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평범했다. 어두컴컴하고 먼지 냄새가 났지만, 뼈가 굴러다니거나 쥐나 벌레같은 것들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유진은 뒤를 한번 흘끔 돌아보았다가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불빛을 길잡이삼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헀다.
'조금만 탐험하다가 돌아가면 엄마도 눈치 못 챌거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어두워졌다. 유진은 처음에는 그냥 걷다가, 그 다음에는 발밑을 보며 걷다가, 이후로는 바닥조차 잘 보이지 않아서 손을 뻗어 벽면을 더듬어 걸었다. 몇 번인가는 넘어질 뻔했고, 몇 번인가는 건물이 울리는 것 같은 이상한 삐걱대는 소리와 바람소리에 놀라 돌아갈 뻔 했지만 그는 꿋꿋히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기라도 했으면 좀 망설이다가 돌아갈 것을, 하나로 쭉 뻗은 이 길이 결국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싶다는 이상한 오기가 그를 계속 걷게 했다. 중간중간 건물 외벽의 환기구로 들어오는 빛이 통로를 걸을만 한 곳으로 만들어준 것도 그의 고집에 한 몫 했다.
그 길의 끝에서 그는 기묘한 문을 발견했다. 온통 녹슬고 심지어 이끼처럼 보이는 것까지 끼어있는 문이었다. 유진은 문 손잡이를 잡아당겨보았다. 벽에 꽉 끼인듯 한참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던 문은, 그가 한 다리까지 들어 벽을 지지대 삼아 온 몸으로 매달리고 나서야 조금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그 안에서 유진은 어둡게 빛나는 눈 한쌍과 마주쳤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악!!!!"
그는 소리를 치며 뒷걸음치다가 제가 연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뒤늦게야 비명소리를 깨달았다. 짐승소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제가 마주친 것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 넓게 열렸다. 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를 통해 그는 상대가 그만큼이나 겁먹은 채 저만치 물러나 있으며, 어쩌면 그만큼 어린 소년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넌 누구야?!?"
그래도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그는 빽 소리쳤다. 상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그에게서 흘러나온 소리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유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이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다. 동대륙 사람인가?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상대는 주춤주춤 물러났지만, 애초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지라 금방 반대편 창살에 걸음이 막혔다. 한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상대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다 헤진 옷, 그 사이로 보이는 파리하게 질린 피부와 마른 몸. 삭은 나뭇가지로 보이는 막대기를 불안정하게 들고 떠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설마 인신매매가 아직도 있단 말이야? 진짜로?'
"진정해."
그는 말을 걸었지만 상대는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는 양 손을 들어 해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그렇다고 한들 어쩌다가 계속 여기 갇혀있게 된 거지. 그는 뒤를 다시 돌아보고서야 이유를 알았다. 그가 들어왔던 문은, 이 쪽에서 보면 마치 벽처럼 교묘하게 위장되어 문인 줄 알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는 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일단 저 아이는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그 좁은 공간을 온전히 채운 순간, 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
작은 돌로 긁어서 하얗게 일어난 자국이, 혹은 삭은 나뭇가지로 그어서 표시한 것처럼 얼룩덜룩한 검댕이, 그 작은 곳을 완전히 채우고 있었다. 창살문을 제외한 사방의 벽과 바닥까지, 온통 음악이었다. 그 어두운 곳에서 애써 그린 것처럼 비뚤비뚤한 오선지와 음표가 쉼없이 이어진 그 광경을 보다가 유진은 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마저도, 악보였다. 차유진의 눈이 저도 모르게 음표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얼마 전에 공연한 오페라의 아리아 한 구절, 저건 얼마 전에 발표했던 어느 연주가의 피아노 연주곡. 극장을 드나들며 익숙해졌던 음률이 아주 어설프고 거친 솜씨로 그 공간에 구현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매섭게 치켜올려진 시선이 그가 밟고 있는 악보로 향한 것을 깨달아 음표가 없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면, 그와 소년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후에 유진은, 제가 그때 저도 모르게 김래빈에게 압도당했음을 인정했다.
유진이 그 소년을 데리고 다시 극장의 홀로 들어갔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잠시 소요가 일었다. 그에게서 사정을 들은 그의 부모는 극장의 관리인과 길게 대화를 나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선과 웅성거림 속에서 그가 데려온 소년은 불안한 것처럼 주춤대기는 했지만 물러서거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돌아온 그의 부모는 일단 집에 가자며 그를 이끌었다. 의외였던 건 그가 데려온 소년이 그와 함께 그의 집에 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후원의 자격으로 우리가 맡게 될 거야."
이유를 묻는 유진에게 그의 부모는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데려왔잖니. 덧붙여진 말은 열다섯 살 소년이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간결했다.
그의 저택에는 동대륙의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그의 부모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교양 수준의 배움이었던지라 의사소통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무어라 전달을 한 건지, 소년은 순순히 사용인을 따라갔다. 동대륙어를 할 줄 아는 교사부터 구해야겠구나. 그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집사를 불렀다.
"나도 동대륙어 배워도 돼요?"
유진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별로 상관은 없다만, 이제까지 붙여준다는 교사를 귀찮다는 이유로 고사한 건 너라는 걸 기억하렴, 유진."
"그때는 할 이유를 몰랐지만 지금은 달라요. 나 마음먹으면 잘 할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잠시 흘겼지만 이번에는 잘 해보라는 허락을 남기고 그를 내보냈다.
잠시 뒤에 만난 소년을 유진은 못 알아볼 뻔했다. 제대로 물에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소년의 모습은 그의 눈에도 제법 그럴듯해 보였던 것이다. 길게 뻗은 눈꼬리가 절 흘끔 바라봤다가 다시 곧게 정면을 향했다.
“유진, 유진이 주워왔다며.”
집안의 막내인 제시가 그에게 몸을 붙이며 소곤댔다. 그는 다시 소년을 흘끔 보았다. 주워왔다고 표현하기엔 좀 크지 않나? 그도 또래 중에서는 키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소년 역시 비쩍 마르긴 했어도 눈높이가 유진과 얼추 맞았다. 사람한테 주워왔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되지, 맞은편의 이든이 나지막하게 꾸중했다. 입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게 무슨 복화술 수준이었다. 나이 차가 제법 있어 이든을 조금 어려워하는 제시는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찾은 거 맞아.”
유진은 굳이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이쪽의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했고 제가 한 말은 설령 알아듣는다 한들 실례가 될 말도 아니었다. 그는 제시가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저와 그 소년을 번갈아 보는 걸 내버려두고 식탁 의자에 등을 대충 기댔다. 그 방만한 자세는 식탁으로 내려온 그의 어머니가 유진, 하고 나지막하게 그를 부를 때까지 지속되었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 그의 조모가 식탁에 착석하고 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별생각 없이 음식을 덜어 입에 넣던 유진은 제게 드문드문 와닿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 절 보고 있었다. 그는 의아해하다가 소년이 슬그머니 들고 있는 식기를 바꾸는 걸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은 이곳의 제대로 된 식기 사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식탁 위에 올라온 식기가 몇 개던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몸에 익은 바를 따라 자연스럽게 식기를 바꾸고 있었지만, 저 멀리 동대륙에서 온 소년이 그 순서를 알 리 만무했다.
‘흠.....’
그의 입꼬리가 장난기로 움찔댔다. 그는 음식이 바뀌기를 기다려 슬쩍 잘못된 식기를 집어들었다. 다시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유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년을 흘긋 살펴보았다. 유진을 따라서 식기를 들었던 소년은 그걸로 음식을 먹어보려다 멈칫하고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것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다시 유진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과 유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웃음기 담고 있는 그의 눈에 상황을 파악한 건지 소년의 눈이 더 커지더니 미간이 슬쩍 우그러졌다.
소리죽여 키득거리던 유진은 절 보던 조모와 딱 눈이 마주쳤다. 몇 번 헛기침을 한 그는 다시 제대로 된 식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어김없이 식사가 끝나고 조모의 부름을 받아 올라가야만 했다.
“유진.”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있는 할머니 앞에서 일단 잘못했어요! 먼저 외치고 보려던 유진은 이어지는 조모의 말에 그 타이밍을 삐끗 놓쳐버렸다.
“그 애가 마음에 드나보지?”
엑? 그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조모는 느리게 의자를 흔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할머니. 저는 걔 오늘 처음 봤어요!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말할 정도는 아닌데.”
“그렇지만 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처음부터 책잡힐 만할 일을 아예 안 하잖니. 오늘 보니 장난만 잘 치던데.”
“장난친 건 잘못했어요. ..걔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마음에 드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잖아요.”
그는 슬그머니 덧붙였다. 물론 조모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맞다고 하면 마치 제가 상대에게 관심이 있어서 장난을 친 것처럼 되지 않겠는가. 유진은 겉으로는 의젓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앞으로 그 아이는 계속 네 곁에 둘 생각이거든.”
“...왜요?”
“들어보니 나이가 너와 동갑이라고 하던데 딱 좋지 않니. 너도 주변에 둘 사람 하나 있어야지. 귀족 모임이라고만 하면 도망가는 이 말썽꾸러기야. 그래서 네 측근은 대체 어떻게 만들래?”
“그거 꼭 만들어야 해요?”
귀찮은데. 투덜거리는 유진을 그의 할머니는 손을 들어 불렀다. 그는 고분고분 의자 바로 앞에 섰다. 그의 할머니가 팔을 뻗어 그의 팔뚝 언저리를 토닥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진은 할머니를 좋아했고 그가 저를 제일 귀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네가 대단한 정치나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한 또래는 있어야 한단다. 어차피 너도 동대륙어를 배우고 싶다 했다며? 자주 대화해 보렴. 내가 보니 썩 괜찮은 품성을 가진 것 같던데.”
“할머니도 걔를 오늘 처음 봤잖아요.”
주변의 의자를 끌어다 눈높이를 맞춘 유진에게 그의 조모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웃었다. 어쩌면 아직 어린 것을 보는 시선 같기도 했다.
“그야 얼마 안 봤어도 이 나이가 되면 알지. 자세가 곧고, 말할 땐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 하잖니. 쉬워보이지만 막상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좋은 집안에서 자랐거나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고. 말을 마친 그의 조모는 다시 그의 의중을 묻듯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눈을 마주치다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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