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도전 2(2023년)


10월 27일~10월 29일 / 이능력자 AU

모든 소리에는 고유의 파동이 있다. 이건 물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어쩌면 이 우주는 각개의 파동이 서로 다른 화음을 자아내는 거대한 음악일지도 모른다. 김래빈은 눈 앞의 교각을 바라보았다. 고전적인 범행예고였다. 그러나 무시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이그나치오라면. 무전기에서 카운트다운이 들어왔다.

- 모든 대원들은 정위치에서 대기 바랍니다. 오늘의 최우선 목표는 테러의 저지. 이그나치오의 생포 혹은 사살은 후순위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전이 뚝 끊겼다. 폭파 예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예정시간까지 약 10초 남았습니다!

카운트다운은 정확했다. 폭발음이 들렸다. 그 순간 김래빈은 시야를 개방했다. 눈이 보라빛으로 빛나자 세상의 모든 물체들이 제 고유한 파동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휘둘렸다. 교각에서 시작된 강력한 파동에 그의 파동을 걸어, 폭파의 여파가 최소화되도록 잡아누른다. 목표는 연쇄적인 폭발의 저지. 파손된 교각을 처리하는 건 다른 팀의 일이다. 교묘하게 얽어 공명시키고, 끝내는 제 파동값에 동화시킨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파동이 점차 가라앉는다.

가라앉는가 싶었는데.

다시 폭발이 쾅 터진다. 흔들린다. 파동이 제어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고함소리가 들린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가장 복잡한 형태의 파동, 에너지덩어리가 보였다. 이그나치오였다. 가장 광폭한 불의 주인, 폭파가 특기인 이능력자. 저걸 막지 않으면 결국 교각이 무너질 거라고, 김래빈은 직감했다. 지휘봉을 든 그의 손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모든 물체에는 파동이 있다. 그 말은 그 자신 역시 파동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파동에 파동을 걸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 공중을 딛듣 몸을 움직이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물체를 진동시켜, 그 위에 올라탄다. 발 디딘다. 그대로 허공을 달린다. 그러나 김래빈은 그것이 얼마나 집요하게 힘을 컨트롤해야 가능한 건지는 몰랐다. 그래서 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속칭 이그나치오가 휘파람을 불었다는 것도.

공기가 불온하게 팽창한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김래빈에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 그 파동의 일부가 닿기도 전, 공기를 진동시켜 맞폭발을 일으킨 탓이었다. 지휘봉이 허공을 휙, 갈랐다. 움직임은 우아하다. 그러나 팽창한 공기가 만들어낸 여파는 그렇지 못했다. 지상의 물체들이 흔들린다. 흔들림은 다시 파동을 만들어내고, 김래빈은 오히려 그걸 반동삼아 몸을 더 높이 띄운다. 교각보다 더 높이 올라, 상대를 내려다본다.

이그나치오. 그가 속삭였다. 인간도 결국 파동의 결합이라면, 그 본질적인 값만 읽어낸다면 어쩌면 인간 역시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김래빈의 눈이 상대를 훑는다. 지휘봉의 흔들림이 점차 교묘해진다. 흔들렸다가 넓게 퍼져나가는 그 움직임. 그 흐름을 읽을 수 있다면. 거기에 제 진동을 걸고 그대로 증폭시켜...

그 순간이었다. 문득 상대가 히죽 웃었다. 어딘가 찜찜한 기분에 김래빈이 공기를 진동시켜 뒤로 물러서려던 그 때,

공기가 변했다.

파동이 크게 휘어진다. 변형된다. 느리고 무거워지다가 점점 흐려진다. 휘어진 파동을 무언가 쉴새없이 빨아들인다. 세상에 공백이 생겨난다. 파동을 걸 다른 파동을 찾지 못한 김래빈이 공중에서 휘청인다. 그 흡입의 중심에 있는 건, 가장 묵직한 침묵이다. 그는 신음을 흘렸다. 제가 디딜 파동을 포함해 모든 파동이 빨려들어가는 중이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자칫하면 그 역시 빨려들어갈 수도 있다.

추락을 각오하고 그는 능력을 거둬들였다. 시야가 뒤집히고, 그는 추락했다. 스치듯 교각 근처를 지날 때, 그는 이그나치오의 소리를 읽어냈다.

네가 김래빈이구나?

다시, 세상에 소리가 되살아난다. 그를 도와주듯, 혹은 약올리듯, 김래빈의 근처에서 미약한 폭음이 생겨난다. 팝! 그 작은 파동에 다시 제 파동을 걸어, 김래빈은 천천히 지상으로 착지햇다. 이그나치오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 마에스트로, 무슨 일이야?

뒤늦게 무전기가 울렸다. 김래빈은 조금 멍한 머리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이그나치오 도주. 임무 실패했습니다. 특이점 두 가지 발견."

- 보고해.

"첫째, 이그나치오는 이중능력자로 짐작됩니다. 중력 계열, 잠재력은 무한대."

무전기는 침묵했다. 그러나 그는 이어 말했다.

"둘째, 이그나치오가 제 이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나간 것 같습니다. 고위직의 신분 노출이 우려됩니다."



*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 만큼 보고해야 할 것도 많았다. 상부에서는 이그나치오와의 접촉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김래빈은 사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방첩사가 위치한 사령부건물에는 드나드는 고위직도 많았고 특수부 출신이어도 아직 계급이 높지 않은 김래빈은 일일이 경례를 붙여가며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러니 그를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중위 김래빈! 하고 답해버린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야. 우리 래빈이 각이 철저하게 잡혔네. 근데 아직도 김래빈이라고 답하면 어떡해. 이제 마에스트로라고 해야지."

씩 웃으며 보다 편하게 저에게 말을 거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슬그머니 팔을 내렸다. 이세진이 웃고 있었다. 계급차이는 꽤 났지만 같은 특수부 출신으로 그를 편하게 대해주어 제법 친근한 사이였다. 적어도 김래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앗,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명은 아직 익숙치 않고, 게다가 마에스트로라니 제게 붙기에는 지나치게 거창한 이명이 아닌가 하여... 아무튼 간만에 뵙습니다. 형. 사령부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나야 뭐. 우리 총통께서 전달하라는 거 심부름하러 왔지. 이세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가 총통의 최측근 인물로 이루어진 수뇌부에 위치해있다는 건 이 나라의 누구나 다 알았고, 심부름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어도 뭔가 중요한 일이리라는 건 자명했다. 최측근 치고는 홀로 젊어 눈에 띄는 이세진을 보며 누군가는 총통이 정부에 젊은 피를 수혈하기 위함이라고 평가했고 또 누군가는 총통이 포용력을 보여주려 일부러 옆에 두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이래저래 양쪽에 이득인 관계라고 하지 뭐. 이세진은 언젠가 경쾌하게 총통과 자신의 관계를 일컬었다.

"그러고보니 오늘 너, 그 현장에 파견되었다면서."

"예? 아. 맞습니다. 본래 엑스 건을 담당하는 소대는 따로 있습니다만, 현재 합동훈련을 위해 타지역에 파견되어있는 상황이라 급히 현장에 가주었으면 한다는 상부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엑스. 반정부단체. 정확한 목적과 구성원은 모른다. 테러 예고를 던진 후 예고에 맞춰 시행하고, 모여든 정부군을 비웃듯이 유유히 사라지기만을 반복할 뿐이다. 제일 널리 알려져있는 엑스의 구성원은 둘 다 이능력자로, 하나는 머스킷티어, 하나는 이그나치오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그나치오. 그는 오늘 마주쳤던 상대를 떠올렸다. 섬광을 반사해 샛노랗게 빛나던 그 눈동자.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아, 그 새끼들이 진짜. 이세진이 중얼거렸다. 김래빈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가, 이내 혼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엑스가 교각을 부숴두었으니 당분간 그 다리는 쓸 수 없을 테다. 복구에도 손과 돈이 많이 필요하겠지.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항상 그랬듯 엑스가 예고를 요란하게 던지지 않았습니까? 덕분에 인파를 통제하기 수월하고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부분에서는 양심이 있다고 평가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 ....뭐... 그래서 만나보니 어떻든? 우리 래빈 동생 감상을 듣고 싶은데?"

"능력의 운용에 있어서 저희 특수부 출신 이상으로 능숙하다는 판단이 듭니다. 폭파능력만이었다면 능력의 상성상 제압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두 번째 이능력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무래도 규격외지. 이세진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김래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력 하나를 제대로 갈고닦는 것도 실패하는 이가 무수히 많은 이 세계에서 이능력 두개를 원하는 대로 펼쳤다 거둬들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괴물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가 김래빈을 장난치듯 놓아준 것도 그 실력의 격차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래빈의 추리를 듣고 있던 이세진이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이건 주관적인 감상에 가까워 상부에는 따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만."

적당히 수고했어, 따위의 인삿말을 늘어놓던 이세진의 발걸음이 멈췄다. 김래빈이 흥얼거린 멜로디 때문이었다.

"이그나치오의 능력으로 추락하던 때 갑자기 들려왔습니다."

이세진이 표정없는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당황하려는 때, 낯선 노랫말이 들려왔다. 새 세계를 펼칠 동지들의 깃발 아래. 정확히 그가 흥얼거렸던 멜로디를 따라 읊조리듯 나지막하게 노래했던 이세진은 조금 찡그리듯 웃더니 그에게 단호하게 일렀다.

"그건, 상부에는 말하지 마. 래빈아. 가급적이면 다시 떠올리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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