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10월 11일 / 유령 AU
숙소에서 유령이 나온다.
차유진은 심각한 얼굴로 거실을 노려보았다. 유령이 나오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환한, 빛이 잘 드는 거실이었다. 적어도 그가 숙소를 계약할 때까지는 수상한 점이라곤 없었다. 에어비앤비기는 했지만 이 집은 외딴 곳에 위치하지도 않았고, 크고 오래된 집도 아니었으며, 가구나 벽지가 최근에 새로 바뀐 흔적도 없었다. 주인은 본래 살던 사람이 오랫동안 집을 비울 사정이 생겨 이 집을 숙소로 내놓는다고 했을 뿐 가격이 다른 숙소에 비해 뛰어나게 싼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보통 공포영화에서 나오는 클리셰는 다 빗겨나갔다는 뜻이다.
그 유령은 거실 한복판에, 반투명한 몸체를 하고 조용히 서 있었다. 새벽에 물을 마시러 갔다가 그 유령을 목격했을 때 그는 조용히 숨죽여 뒷걸음질쳤다. 뒤늦은 비명은 그가 큰길까지 도망쳤을 때야 터졌다.
'망할, 저게 대체 뭐야! 내가 본 게 진짜 맞아? 유령이라고? 21세기에?? 도시 한복판에서?'
길 한가운데에서 욕을 섞어가며 궁시렁대는 그를 사람들은 수상한듯 힐끔힐끔 보며 지나갔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숙소 바로 근처가 도심이었다. 이 근방의 사람들은 한 밤중에 술 취해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게 익숙했다는 뜻이다. 24시간 운영하는 PC방에서 불편한 의자에 기대 한뎃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차유진은 그냥 긴 비행의 피로로 제가 뭔가 잘못 본 걸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숙소로 돌아갔다. 한낮의 밝은 숙소는 유령같은 건 전혀 나올 것 같지 않게 아늑해보였고, 그게 그를 방심시켰다.
둘째날, 차유진은 다시 유령을 목격했다. 이제는 제가 잘못 봤으리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그는 머리를 싸매고 고심했다. 잠을 벌써 이틀째 설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숙소를 옮기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별 이유 없이 중간에 나가면 위약금이 있던가? 아무튼 비용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리라는 건 자명했다. 그렇다고 주인에게 이 숙소는 유령이 나와 내가 더 머물 수 없다고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그건 좀 너디하고 겁쟁이같잖아.'
갓 스물. 차유진은 제가 약해보이는 걸 견딜 수 없는 나이였고, 그런 삶을 살았다. 그는 손에 묵주를 꾹 쥔 채 시계를 노려보았다. 첫째날 목격한 시각은 추정하건대 대략 오전 1시쯤, 둘째날 목격한 시각은 자정 조금 넘어서. 곧 자정이니 다시 유령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을 터였다.
삼초, 이초, 일초.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바뀌며, 자정을 알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집어삼켰다. 역시 오늘도 유령이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날과는 달리 숨죽여 그 유령을 관찰했다. 유령은 예상외로 그리 끔찍한 몰골이 아니었다. 피도, 어딘가 상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비슷한 연배쯤일까. 창백하게 질린 얼굴의 소년 모습을 한 유령은 차유진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거실을 조용히 가로지른 유령은 어딘가에 못박히듯 서서 내내 그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그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졌다.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1시 정각이었다.
차유진은 며칠간 그 유령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주 정확한 시각에 나타나 정해진 행동을 반복하고는 아주 정확한 시각에 사라졌다. 칸트가 따로 없었다.
이걸 덕분에라고 해야 하는지. 유령과 함께하면서 차유진의 일상은 아주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자정부터 오전 1시까지 유령을 관찰한 뒤 유령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걱정없이 숙면을 취한다. 그리고는 오전 느지막하게 일어나 장기간 여행 온 사람답게 계획 없이 숙소를 나서 자유롭게 쏘다녔다. 어설픈 한국말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나면 다시 숙소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러면 씻고, 잠시 멍때리거나 사진을 정리하고 있다가, 다시 유령이 나타날 자정을 기다리는 하루의 반복.
사실, 이제 예전보다는 흥미가 많이 떨어지기는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새로운 게 없는걸. 그래도 며칠 봤다고 담이 커진 그가 바로 코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차유진의 존재는 유령에게 아예 인식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무해한 유령이었다.
'살아있을 때의 행동을 반복하는 유령을 한국에서는 [지박령]이라고 해.'
어느 스케이트장에서 마주친 한국인은 영어를 썩 잘 했는데, 그의 설명을 듣더니 지박령이라는 개념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차유진은 그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유령이 나온다는 숙소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제 숙소를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던 차유진은 초대는 어렵겠다고 그의 요청을 물렸다.
'어쩌면 그냥, 유령을 가만히 바라보는 한 시간동안의 정적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건지도 모르지.'
그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근처 건물에 반사되어 거실에 옅은 온기를 드리웠다. 길게 늘어진 그 빛은 유령이 멈추어서곤 하던 거실 근방에 멈추어있었다. 문득 그는 걸음을 옮겨 그 앞에 서보았다. 유령이 긴 시간을 머무는, 계속 바닥을 내려다보고만 있는 그 자리에. 생전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죽어서까지 이 자리를 맴도는지.
"Well....."
그리고 차유진은 바로 그 자리에서, 그가 이전까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자국을 하나 발견했다. 무언가가 살짝 눌리고 끌린 것처럼 거실 장판에 남아있는, 거뭇한 자국을. 그는 번뜩 깨달았다. 그러니까 유령은 그냥 가만히 서 있던 게 아니었다. 분명 그의 생전에는 이 자리에 분명 무언가 올려져 있었으리라.
자국이 깊지 않으니 그렇게 무거운 물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국은 그의 어깨너비보다 조금 더 좁게, 양쪽으로 나 있었다. 팔을 벌려 그 너비를 가늠해보다가 그는 그 자리에 올려졌을 물건을 상상해보았다. 수납장? 아니다. 벽보다 통로 한가운데에 가까운 위치는 수납장을 놓기엔 너무 애매했다. 수납장이라기엔 너비도 너무 작았다. 협탁이나 테이블? 그건 가능성이 있겠다.
갑자기 흥미가 솟아나는 걸 느끼며 그는 그 자리를 뱅글뱅글 맴돌았다. 자국은 그 가장자리가 뚜렷했고, 색깔이나 모양을 보았을 때에는 옮겨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현관 근처 닫혀있는 방문을 바라보았다. 이 작은 숙소에서 유일하게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된 그 곳은,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을 보관해둔 창고같은 공간이었다.(숙소 주인은 그곳을 다용도실이라고 불렀다) 차유진은 첫날 그곳을 열어보고는 잘 쓰지 않을 것 같은 제 짐 몇 가지를 넣어두고 그대로 신경을 꺼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 잘 안 쓰는 가구들 같은 것도 몇 가지 있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신중하게 자국의 너비를 가늠하고는 창고의 문을 열었다. 주인 모를 물건에 함부로 손 댈 생각은 없으니 손은 뒷짐을 지고, 어지럽게 쌓인 물건들 사이를 조심스레 넘어다니며 눈대중으로 너비를 가늠했다. 접이식 의자? 아냐. 철제 선반?이것도 아냐.
그러던 그의 눈에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물체가 하나 띄었다. 그는 홀린듯 그 앞에 섰다. 비록 다리가 졉혀있었지만, 접힌 다리를 펴면 얼추 길이가 맞을 것 같았다. 눌린 자국의 모양새나 색깔마저 엇비슷했다. 그는 나란히 세워진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전자피아노였다.
세 발짝. 차유진은 숨을 죽였다. 오늘따라 시간 가는 게 더뎠다.
두 발짝.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묘한 초조감이 일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 발짝.
그는 눈을 크게 떴다. 항상 그 자리에서 바닥을 내려보기만 했던 유령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반투명한 손이 천천히 전자피아노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입이 벌어지고, 다시 다물렸다가 아주 가느다란 호선을 그렸다. 그가 웃고 있었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는 머슥하게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옮겨 뺨을 문질렀다. 전자피아노를 옮겨서 재조립해 연결하느라 저녁시간을 다 날렸지만 과연 그만큼의 보람이 있었다. 그의 가설이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 장소에 있었던 건 전자피아노였다. 그리고 차유진은 이로부터 또다른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전자피아노의 기종이나 상태로 보았을 때, 저 유령은 상당히 근래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한동안 전자피아노를 쓰다듬던 유령이 그 앞에 앉았을 때, 차유진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유령은 과연 실제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연주할 수 있다면 그 곡을 자신은 들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쓸데없는 의문이었다. 피아노앞에 앉은 유령은 잠시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사라질때까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 시간동안 내내.
"[이건 뭐랄까. 현실에서 게임하는 기분인데.]"
스테이지 하나를 클리어하면 다음 스테이지가 나오잖아. 소파에 제멋대로 드러누운 채로 차유진은 중얼거렸다. 기껏 피아노 앞에 앉혀둔 유령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 혹시 전자피아노의 전원 문제일까 싶어 유령이 등장했을 때를 기다려 일부러 전원을 켜 봐도 마찬가지였다. 유령의 반응 대신 그는 가까이에서 유령을 보면 좀 음산해서 그렇지 퍽 잘난 얼굴이라는 쓸데없는 정보만 얻게 되었다.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는 그 얼굴은 남자 얼굴에는 별로 관심 없던 차유진에게도 제법 섬세하니 그럴듯했던 것이다.
그는 핸드폰을 들었다. 캘리포니아는 아직 새벽이겠지만 알게 뭐람. 답변을 하고 싶다면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언제나처럼 무시할 것이다. 형제자매사이란 사이가 나쁘지 않다 해도 그런 법이다. 그는 냅다 그의 누나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집에서 피아노 비스무리한 걸 다뤄본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누군가가 피아노 앞에 앉았는데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답장은 몇 시간 뒤에야 왔다. 유진, 미쳤어? 하는 인사는 덤이었다.
- [연주하기 싫은가보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답장을 마친 후 핸드폰 액정이 내뿜는 파르스름한 빛에서 고개를 돌려 그는 어둠 속 전자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희끄무레한 인영을 보았다. 전자피아노를 쓰다듬으며 웃던 그 표정을 떠올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연주를 싫어할 것 같지 않았다. 그가 유령을 본지도 벌써 며칠째. 유령에게 내적 친밀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친밀해졌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관찰이 아닌가 싶지만. 그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메세지창에 다시 떠오른 메세지를 읽었다.
- [아니면 연주할 곡이 없거나.]
오. 차유진은 소리없이 입을 모았다. 그가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유령은 아무것도 못 듣는 것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그게 그랬다. 차유진은 가끔 그를 무심결에 살아있는 사람처럼 취급하곤 했다. 몸이 좀 투명하고, 소통이 안된다는 것 외에는 어딜 봐도 멀쩡하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더 자꾸 상대와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그게 유령의 아주 사소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거라도.
아무튼 마지막 메세지만큼은 일리가 있었다. 깜박거리며 조용히 사라져가는 유령의 뒷모습을 졸린 눈으로 바라보다가 그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길게 하품이 나왔다. 일단 오늘은 자고, 내일 무슨 악보라도 있는지 찾아볼 예정이었다. 그러고보니 창고에서 전자피아노를 찾을 때 근처에서 무슨 클리어파일인가를 본 것 같은데. 침대로 천천히 걸어가며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I got it!"
그의 손이 얇은 클리어파일의 표지를 툭툭 쳐냈다. 그 사이에 엷게 쌓인 먼지가 부스스 떨어졌다. 그는 파일을 열어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무언가 써진 악보가 몇 장. 그리고 반쯤 써진 악보가 하나. 아무것도 안 써진 악보 여러 개. 그는 악보뭉치를 꺼내들었다. 악보를 읽는 법은 학교에서 배워 알았다. 음표와 음표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어설프게 멜로디를 머릿속에 따라 그리면 경쾌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음률이 목 안에서 맴돌았다. 어쩌면 이 나라의 음악일지도 몰랐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클리어파일을 통째로 챙겨나왔다.
그 날 새벽. 그는 자신이 머릿속에 그려냈던 멜로디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유령이 연주하는 본래의 멜로디는 왼손의 반주가 더해져 훨씬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피아노 건반은 눌리지 않았지만 유령이 손을 유려하게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피아노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울리며 그에게 닿았다. 연주를 멈친 유령은 길게 숨을 내쉬는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리더니, 다시 소리없이, 그러나 조금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그 옆모습을 소파에 기대 바라보다가 그는 천천히 손뼉을 쳤다. 유령은 아마 들을 수 없겠지만 상관 없었다. 좋은 연주를 들으면 갈채를 보내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헀다.
하지만.
다시 변화가 일어났다. 유령이 황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치 박수소리의 근원을 찾는 것처럼 그가 앉아있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는 어쩐지 좀 당황한 얼굴이었다. 여전히 양 손을 박수 치는 것처럼 들어올린 채, 차유진은 얼빠진 얼굴로 굳었다. 여전히 유령은 그를 볼 수 없는 것처럼 계속 시선이 허공을 헤맸지만, 그건 분명 그의 박수소리를 들은 자의 반응이었다.
"[혹시 들려?]"
혹시나 해서 조심스레 건넨 말에는 역시나 반응이 없었다. 유령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사라졌다. 차유진은 제 얼굴도 거울에 비추면 그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령과 대화한다고 하면 그의 외할머니는 성호를 그을까, 아니면 그것 참 멋진 일이라고 웃어줄까. 차유진은 빈 악보에 유령에게 전할 말을 끄적거리다가 펜을 물고 몸을 굴렸다. 그 날 이후, 정확히는 그가 유령의 연주에 박수를 쳤던 그 이후 유령은 기존의 패턴을 잃어버렸다. 출몰하는 시간은 여전히 동일하다. 하지만 이전처럼 정확하게 피아노에 앉지는 않는다. 유령은 피아노 주변을 빙글빙글 돌거나, 악보를 미심쩍은듯 바라보거나 연주를 끝마치고 나서도 주변을 휙휙 둘러보곤 했다.
"[더이상은 '지방령'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어.]"
여전히 발음을 틀린것도 모른 채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안녕. 나는 유진 차야. 네 연주는 잘 듣고 있어. 친구를 처음 만나는 여섯살짜리나 할 것 같은 말이었지만 제 존재를 모르는 유령에게 건넬 수 있는 말로 다른 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근데 내 이름을 알려줘도 되는 건가? 악마에게 함부로 이름을 알려주면 안 된다는 건 그의 문화권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속설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날 해칠 것 같지 않단 말이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 악보를 펜과 함께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다. 그 와중에도 혹시 빈 악보라 유령이 다시 예전처럼 아무것도 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을 가능성을 부지런히 계산하면서.
투덜거리고는 있지만 차유진은 사실 요 며칠이 꽤 즐거웠다. 그야 이제는 제가 예측하지 못하는 패턴을, 그것도 생동감 남치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유령을 지켜볼 수 있었으니까! 유령이 제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덕택에 본의아니게 퍽 일방적으로 상대를 보며 즐거워한다는 찝찝함은 남아있지만, 어쨌든 재밌는게 우선이었다.
그는 열두 시에 가까워지는 시계바늘을 보며 항상 그가 유령을 관찰하곤 했던 소파에 몸을 웅크렸다. 그가 옆에 둔 핸드폰 화면의 시계가 곧 12시로 바뀌었다.
"Hey. [오늘도 안녕.]"
듣지 못할 인사를 건네며, 그는 유령이 악보를 발견하길 숨죽여 기다렸다. 오늘도 미끄러지듯이 피아노를 향해 이동한 유령이 곧고 긴 손가락으로 악보를 집어들었다. 악보를 읽어내리는 것처럼 흔들리는 시선을 따라 눈이 몇 번 깜박이고, 그러면 희끄무레한 속눈썹이 눈꺼풀을 따라 움직였다. 그 간격이 길었다. 차유진은 문득 의아해졌다. 그렇게 긴 내용을 써놓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유령의 침묵이 길었다. 혹시 글자로 쓴 건 못 읽는 건가? 그가 새로운 가설을 세우기 직전. 유령이 입을 열었다. 처음으로 그에게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목소리는 차유진의 주의를 순식간에 앗아갔지만, 그 내용은 그의 어이를 탈출시키기에 충분했다.
헬....로우.... 아임... 이우.... .....뭐라고 읽는 거야.
"[설마 영어를 못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한국 속담을 차유진은 몰랐지만 아마 알았다면 무릎을 내리쳤을 것이다. 그랬다. 설마는 사람을 잡았다. 그 뒤로도 상당히 경직된 발음으로 더듬더듬 악보에 쓰인 말을 읽어내리던 유령은 한참 미간을 찌푸리고는 악보를 노려보았다. 차유진조차 유령이 영어를 읽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혹시 제가 결투장이라도 남긴 게 아닐까 착각했을 정도로.
전자피아노는 쓸 줄 아는 현대의 유령이? 한국은 영어를 엄청나게 가르치는 나라가 아니었어?
이제까지 한국을 쏘다니면서 영어와 서툰 한국어만으로도 아주 가끔을 제외하면 소통에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차유진은 황당한 얼굴로 마른 세수를 했다. 피아노조차 치지 않고 끝까지 악보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해석하려 애쓰던 유령은 어느덧 사라진 채였다.
그 어이없음이 오기를 불렀다. 그 다음날 차유진은 번역기 앱을 켰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화면에 뜬 한국어 번역을 그는 악보 아래 천천히 그려 옮겼다. 어제와 같은 내용에 더해 삐뚤빼뚤한 글씨로 두 가지 질문이 더 추가되었다. 너 영어 못해? 네 이름은 뭐야? 다행이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그 다음날 한층 편해진 얼굴로 악보를 읽던 유령은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시간을 꽉꽉 채워 그에게 긴 답을 남겼다.
안녕하십니까. 혼령님. 제 이름은 김래빈입니다. 어쩌다 영어를 사용하시는 혼령님께서 이곳 한국까지 오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연주가 마음에 드셨다니 영광입니다...
"[뭐야. 지금 자기가 유령이면서 날 혼령이라고 한 거야?]"
그는 어이없다는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혹시 유령, 그러니까 김래빈은 자기가 죽은지 모르는 거 아냐? 하긴. 그러니까 아직도 여기에 남아있겠지.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답례인지 뭔지, 유령은 제가 쓴 글 위에 두마디 정도의 짧은 멜로디를 악보로 남겼다. 짧게 흥얼거리기에 좋은 멜로디였다. 그걸 흥얼거리다 그는 깨달았다. 김래빈이라는 이름이 묘하게 익숙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는 악보뭉치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그가 밤마다 감상하던, 빼곡히 차있는 악보마다 작곡가가 쓰여야 할 란에 완전히 동일한 필체로, 동일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Mr. Ghost 대신 김래빈이 된 유령과 그는 며칠간 악보를 통해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쓴 곡이 좋다는 칭찬, 겸양의 표현, 한국에는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 김래빈이 서울에서 겪었던 일들. 악보에 한국어를 적어내려가면서 차유진은 본의아니게 한글 쓰는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김래빈은 악보마다 한국어 첨삭과 함께 짤막하게 멜로디를 하나싹 남겼고 그게 그 날 하루 그가 흥얼거리는 곡이 되었다. 여전히 그는 낮에는 낯선 거리와 사람을 즐겼지만 자정부터 오전 1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숙소에 돌아왔다.
아주 특별한 친구가 생겼어. 한국에서의 여행을 묻는 부모에게 그가 남긴 메세지에는 언제나와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근사하네, 유진. 차유진은 그 특별한 친구가 유령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유령 본인에게도. 차유진이 혼령이라고 믿고 있는 김래빈의 오해를 그는 굳이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김래빈."
이름을 불러도 돌아보는 일은 없다. 악보에 무언가를 적어내려가는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턱을 괴었다. 서로 곧바로 대화할 수가 없으니 매일 악보에 적어내리는 말이 점점 길어지는 탓에 요새는 그의 연주가 줄었다. 네가 살아있는 진짜 친구여도 좋을 텐데. 요새는 부쩍 그런 생각이 늘었다. 곧 한국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갈 날이 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미국에 돌아가면 다시 보기는 어렵겠지. 제가 이 숙소를 비우고 나면 그 다음 이 숙소에 묵을 사람은 그를 발견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김래빈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은 악보를 들어올렸다. 아직도 낯선 언어를 더듬더듬 눈에 담다가 핸드폰으로 인식해 번역을 보았다. 아마도 본래의 뜻보다 훨씬 딱딱해지고 반 정도는 혼란스러운 의미로 왜곡된 말들일텐데도, 몇 번이고 비슷한 말투를 보다보니 김래빈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을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김래빈. 사실 내가 아니라 네가 유령이야. 넌 죽었어.]"
차유진은 마지막으로 그에게 해야 할 말을 가다듬었다. 그는 열성적인 신자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김래빈이 지상에서 계속 떠도는 삶보다는 평안한 안식을 얻기를 바랐다.
미국으로 놀러오겠냐는 그의 질문에 김래빈은 돈이 많이 들고 아는 사람이 없어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을 남겼다. 유령이 체류비를 걱정하는 게 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차유진은 악보를 차곡차곡 정리해두었다. 김래빈이 본래 남겼던 악보는 처음처럼 그대로 모아 클리어파일에 넣었지만, 그와 김래빈이 주고받았던 글들이 적힌 악보는 제 짐가방에 넣은 채였다. 그 정도는 가져가도 될 것 같았다. 전자피아노는 그가 체크아웃을 하기 직전에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오늘이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그는 마지막 악보를 피아노 위에 올려둔 채 김래빈을 기다렸다. 중간부터는 빈 악보가 모자라서, 그는 PC방이라는 곳에서 빈 악보를 한 뭉터기 출력해와야 했다. 그마저도 이번에 거의 다 썼다. 김래빈은 가뜩이나 문장이 길었고 중간부터는 차유진도 할 말이 많아져서 그들은 항상 악보 몇 장씩을 소모해가며 대화했기 때문이다.
김래빈은 언제나처럼 자정이 되자마자 모습을 드러냈고 이제는 당황하거나 경계하는 일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읽었다. 그는 초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실은 자신이 아니라 네가 유령이었노라고, 그가 악보에 털어놓은 날이기 때문이었다.
'김래빈이라면 조용히 수긍하고 넘어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이제까지 접한 매체에서(대부분은 공포영화였다) 유령은 대체로 본인이 유령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심지어는 폭주하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차유진은 어쩌면 오늘의 이별이 그리 아름답지 못게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입술을 삐쭉 내밀고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김래빈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떨리는 그 손을 보기 전까진.
내가 죽었, 아니, 나는 분명....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상대로 김래빈은 자신이 이미 죽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당황하고 놀란 얼굴이었다. 반투명한 시선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손가락이 악보를 바투 쥐면 악보 가장자리가 구깃구깃 접혀들었다.
'...넌 못 믿겠지만 진짜야. 내가 널 왜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네가 평안했으면 좋겠어.'
차유진은 제가 악보에 남긴 글귀를 떠올렸다. 길게는 적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한국어가 서툴었고 번역기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믿을 수 없었다. 제가 쓰고도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문장들을 적어내리며 그는 그게 그래도 김래빈을 위로해주기를 바랐다.
김래빈은 느리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물러나고 싶은 것처럼 주춤거리기도 했다. 부정하는 방식마저도 고요하고 무해해서 차유진은 아주 조금 속이 상했다.
아냐. 분명 사고는 있었지만, 그러니까... 그때, 나는, 분명...
살았었는데. 김래빈의 입술이 소리없이 속삭인 말을 차유진은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우뚝 멈춰선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리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그래도 그 순간에는 부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김래빈?"
마치 귀신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김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크게 뜬 눈이 정확히 차유진을 직시했다. 김래빈을 부른 당사자인 그는 정작 김래빈이 돌아본다는 데 놀라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이제까지 김래빈이 반응하는 소리는 기껏해야 피아노 건반 두드리는 소리거나 박수 소리 정도였다. 왜 계속 불편함을 감수하고 악보로만 소통했겠는가. 차유진의 당황한 얼굴과 김래빈의 놀란 얼굴이 서로를 마주했다.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퍽 오래 미간을 찌푸리던 김래빈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혹시... 차유진?
마치 촛불이 꺼지듯, 김래빈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배경에 동화되듯 흐릿해지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치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듯 다급한 공백이었다. 사라지기 직전 당황한 얼굴로 차유진은 그게 김래빈의 뜻이 아니었음을 추측했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황급히 확인해 본 시계는 12시 반 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아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김래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숙소를 둘러보았다. 완벽하다곤 할 수 없겠지만, 최대한 그가 머물기 전의 상태로 정리해둔 숙소는 여전히 밝고 아늑한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전자피아노가 있던 장소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제 배낭에 잘 보관되어있을 악보 뭉치와 다시 다용도실로 돌아간 전자피아노를 떠올렸다. 툭. 다시 툭.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발로 방 바닥을 의미없이 몇 번 차내던 그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오늘 체크아웃해요.]"
전화 건너편의 호스트가 의례적인 말투로 여행은 즐거웠냐고 물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 숙소에서 유령 나오던데 알고 있었어요? 다용도실에 있는 전자피아노 주인인 것 같던데.]"
호스트는 펄쩍 뛰면서, 이제까지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잡아뗐다. 심지어는 제가 집을 렌트해준 모든 사람들이 현재 생존해있다고 장담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런 것 치고는 전자피아노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게 느렸다. 그는 숙소를 나섰다. 마지막으로 문을 잠글 때까지 통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아. 호스트는 그제야 떠올렸다는 듯 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 [이제 기억났네. 사정이 있어서 잠시 방을 비웠다는 사람이 그 청년이에요. 전자피아노 주인.]
"[그래도 한 번 연락해봐요. 혹시 몰라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지. 만약에 내 말이 맞다면 그의 가족들에게 유품을 돌려주세요.]"
그랬으면 벌써 방을 뺐겠지. 주인이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린 한국어를 차유진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그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지막으로 한강으로 향했다. 출발시간도 도착시간도 어중간한 때의 티켓을 예매한 탓에 비행기가 뜨는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시간이 많았다.
평일 낮의 한강은 비교적 한가했고, 그는 별 방해 없이 강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김래빈이 서울에 와서 처음 한강을 보러 나왔던 공원이라고 했다. 높은 건물들을 이고 있는 넓은 강은 밝고 평화로웠다. 점퍼의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그의 손 끝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무심코 발신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그가 묵었던 숙소의 주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그에게 연락처 하나를 알려주었다. 차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다. 메세지로 도착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면,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차유진인가요? 내 동생이 당신을 보았다고 했어요.
내 동생은 사고를 당했고, 어제 깨어났어요. 서툰 언어로 짧게 상황을 설명한 여성은 곧 누군가에게 전화기를 넘겨주었다. 여보세요. 어딘가 갈라지고 힘없는 목소리로 상대가 입을 열었을 때, 차유진은 찡하게 저려오는 것도 같은 코를 무시하며 웃었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금방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몇 번은 연습해봤던 인삿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안녕, 김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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