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10월 31일 / 스티어 김래빈과 차유진은 같은 방에서 뭘 했나
차유진은 본래도 제 들쭉날쭉한 수면시간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물며 예능 출현을 제외하고는 비활동기에 가까운 때였다. 마음놓고 새벽을 지새울 수 있는 시간. 그는 그날도 늦게까지 깨어있었다. 같이 놀 사람이 있어도 좋았겠지만 그의 룸메이트건 친구건 지금은 맘편하게 놀아달라고 쳐들어가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때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입술을 비죽이고는 룸메이트를 고려해 액정밝기를 조금 낮춘 화면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동물 영상 몇 개가 그의 손가락을 따라 스쳐갔다.
그때 핸드폰 액정에 메세지가 둥실 떠올랐다. BM으로 저장된 사람, 류건우, 아니 지금은 말투를 보아 박문대였다. 그런 게 틀림없었다.
[자냐?]
그는 메세지를 터치했다. 그러나 그가 답장을 채 보내기도 전, 메세지의 숫자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자고 있지 않음을 확신했는지 상대에게서 다시 메세지가 도착했다.
[할 말이 있는데, 내가 류청우 데리고 갈 테니까 넌 김래빈한테 먼저 가 있어.]
테스타에서의 의사결정은 대체로 민주적으로 흘러가는 편이다. 좋은 팀이지. 차유진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일단 말을 따라야 하는 상황도 있는 법이었다. 박문대와 그의 뭐라더라, 시스템? 아무튼 그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던 SF 어쩌고 하는 상황에서는 납득보다 행동이 더 빠르고 효율적일 때도 있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박문대의 문자를 보고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 방 정도는 거실 불을 켜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었다. 그는 노크를 하는 대신 조용히 문을 열었다. 김래빈은 자고 있었다. 그는 그의 친구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김래빈은 잔걱정이 많아서 걱정을 하다못해 생각이 많아지면 잠을 깊게 못 자는 타입이었다. 지금도 미간에 옅게 주름이 서려있었다. 그는 이불 위로 올라온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흔들었다.
"김래빈."
으응.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상대가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아직 졸음이 맺힌 눈이 차유진을 잠시 스치는가 싶더니 불 꺼져 완전히 깜깜한 방안을 확인한다. 손을 뻗어 차유진의 팔 언저리를 쥔 김래빈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차유진. 오늘은 어딜 갔다 왔길래 이렇게 늦었어. 형들 깨시니까 조용히 하고 얼른 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스티어 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손쉽게 구분해버렸던 어떤 이는 상대의 말에 약간의 거북함을 느낀다. 그건 내가 아니야, 김래빈.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알고 있는 탓이다. 지금 그에게는 이제 아주 희미해진 기억이다. 하지만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겠지. 차유진은 다시 한 번 김래빈을 흔들었다. 김래빈. 일어나. 그리고 침대 옆 수면등을 켜버렸다. 다시 한 번 눈을 뜬 상대는 빛에 비춰진 차유진의 얼굴과 그에게는 조금 낯설 방 안을 다시 한 번 눈에 담더니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는다. 몸을 일으킬 때는 이미 멋적은 얼굴이다.
"미안. 잠시 헷갈렸어."
"알아. 여기 우리 '옛' 숙소 아니야."
차유진은 이 김래빈이 쉽고 어려웠다. 대하는 거야 어렵지 않지. 하지만 망설임없이 차유진에게 너는 내 친구라고 선언했던 김래빈과는 달리 그는 심통처럼 지금의 김래빈을 '내' 친구라고 불러도 될지를 자꾸자꾸 되물었다. 김래빈이 방 안에 들어서서 낯설고 귀한 걸 만지듯 제 전자기기며 녹음기기를 만질 때도 그랬고, 자꾸 쭈삣쭈삣 눈치를 보면서 이걸 물어도 되는지 말해도 되는지를 가늠할 때도 그랬다. 어쨌든 이 김래빈이나 저 김래빈이나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을 것이고, 정작 김래빈은 전혀 신경쓰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내' 김래빈은 저 안 어딘가에 잠들어있을지. 눈을 마주치고 속을 가늠한다. 심경이 복잡한 부루퉁한 얼굴을 김래빈이 잔소리를 들은 차유진이 좀 삐졌을 거라고 자체적으로 해석해줄 것을 알고 있어서 감추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졸지에 그와 눈싸움 아닌 눈싸움을 하게 된 김래빈이 떨떠름하게 눈썹을 올린다.
"왜?"
"문대 형이 할 말 있대."
문대 형, 하고 그의 말을 따라하던 김래빈이 상대의 얼굴을 가물가물하게 기억해냈는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을 전달하고 나자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김래빈의 침대 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침대 위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김래빈의 시선이 수면등의 빛을 타고 그에게 닿는다. 차유진,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왜, 하고 답하면서 차유진은 대답하는 제가 스티어의 차유진인지 테스타의 차유진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니 정신이 없어 묻는 걸 잊었어. 넌 잘 지냈어?"
아. 그랬지. 스티어 김래빈이 깨어나고 나서는 실질적으로 둘만 있을 시간이 없었다. 차유진은 이게 김래빈이 제 친구에게 실질적으로 건네는 '진짜 첫 마디'라는 걸 깨닫는다. 동시에 그는 제게 서스럼없이 면회를 왔냐고 묻거나 안부를 묻는 김래빈의 그늘 없는 얼굴을 보며 어렴풋한 추정이 완전히 확신으로 바뀌어가는 걸 느꼈다. 김래빈은 저와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공항에서의 배웅 이후로 언제라도 만나면 씁쓸함도 어색함도 없이 안부를 물을 수 있는 사이로.
"...아니. 별로였어."
이미 한번 털어놓았던 사정이었다. 다시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체 이후 제게 일어났던 일들을 김래빈에게 간략하게 전하면서도 차유진은 머릿속으론 딴 생각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들어온 김래빈의 연락에 그는 딱히 답장을 하지 않았다. 챙겨 답장하기에 그는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고, 특히나 스티어가 떠오를만한 건 보고싶지 않았다. 처음에야 김래빈도 그가 바쁘다고 생각하거나 시차가 달라서 연락이 안 닿겠거니 하겠지. 하지만 만약에 그 세계가 회귀 없이 지속되었다면, 그럼 김래빈은 차유진이 제 연락을 피한다는 걸 언제 깨달았을까. 뒤늦게 입안이 씁쓸했다.
"재밌었어?"
"응?"
"차유진. 너 혹시 지금 수면이 많이 부족한 상태인 거야?"
아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를 미심쩍게 보던 김래빈이 여상하게 질문을 반복한다.
"차 고치는 일 했다며. 그 일은 재밌었냐고 물었어."
차유진은 입을 잠시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언젠가 그와 김래빈이 반대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에게 던져졌던 질문이 시간을 거슬러 동일하게 떨어졌다. 그순간, 차유진은 스티어의 차유진과 테스타의 차유진을 굳이 구분지어 상대를 대하려던 태도를 그만두었다. 그는 웃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김래빈은 진짜 김래빈이야."
의아하다는 기색이 가능한 얼굴을 앞에 두고 웃음을 갈무리한 차유진은 스티어 김래빈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면서 동시에 테스타 김래빈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차유진이 되었다. 그렇게 답했다.
"별로였어."
일부러 같은 답을 고른 건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때였다. 너는 어땠어? 차유진은 그렇게 물으려 했다. 왜 무대에는 설 수 없다고 말한 거야? 너는 나만큼이나 무대를 사랑하던 사람이었잖아. 내가 떠나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어? 군대는 어떻게 간 거야? 군대에서 힘든 일은 더 없었어? 하고 싶은 질문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그 순간 문은 열렸고, 류건우와 류청우가 나란히 방으로 들어왔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김래빈이 그를 돌아보았다. 저분은 네가 박문대라고 했던 형이 아니잖아. 궁금증이 슬그머니 묻어나는 얼굴을 보며 입술을 움직인다. 그 형 맞아. 설명은 나중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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