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도전 2(2023년)


11월 3일~11월 8일 / 재봉사 차유진과 귀족 김래빈

"당신이 내 손님?"

재봉사는 그렇게 물었다. 예의를 갖춘 말씨는 아니었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김래빈입니다. 국경 너머에서 온 이였다. 이 나라의 예의에 서툴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예약이 쉽지 않은 의상실이었다. 그가 가진 이국의 기술과 자유분방하면서도 매력적인 말씨로 재봉사는 이 나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중요한 단골들을 여럿 확보했는데, 그 단골들에 의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금방 명성이 붙었다. 다들 차림새에 신경을 쓸 만한 시즌에는 아예 예약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성황이라고 했다.

어렵게 예약했지. 그의 누님은 어떻게 예약하셨냐는 그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래빈아. 너도 이제 제대로 맞춘 옷 한 벌은 있어야 할 시기잖니.'

'저는 꼭 그 곳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알아. 하지만 기회가 있었는데 굳이 물릴 필요는 없잖아.'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지팡이를 꽉 쥐었다. 나는 유진이에요. 환영한다는듯 양팔을 벌린 재봉사가 안쪽의 공간으로 그를 이끌었다. 제법 넓은 그 공간의 한쪽 벽에는 거울과 마네킹, 견본품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고 반대편 벽에는 큰 창이 있어 빛이 깊게 들었다. 빛이 잘 드는 쪽에 놓인 책상으로 그를 안내한 유진은 의자를 빼주더니 그의 앞에 두꺼운 노트를 내려놓았다.

"원하는 Style 있어요?"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의 눈 앞에서 노트를 촤르륵 펼치면 장마다 스케치된 정장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의 종류와 전체적인 모양새가 끊임없이 늘어놓아지는가 싶더니, 그 다음에는 깃이며 라펠, 소매, 단추처럼 세부적인 부분에서의 차이를 묘사한 그림들이 연이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어느곳에서도 멈추지 않고, 그렇다고 시선을 떼지도 않던 김래빈은 노트가 다시 닫힌 후에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성인식 이후 처음 사교계에 저를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걸맞는 격식이 있되 연주를 해야 하니 특히 상체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움직임이 가능해야 하고요. 어느 정도 생각해둔 바는 있습니다만 제가 이 분야에 있어 전문가는 아니니 가능하다면 옷을 직접 만드실 분의 고견을 들어 정하려고 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들은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는 거 잘 골랐어요."

그게 유진의 평이었다. 그러나 미심쩍은듯 기울어지는 고개는 그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김래빈이 골랐던 세부적인 사항들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다. 김래빈은 상대를 차분히 기다렸다. 이윽고 유진은 김래빈이 애초에 제쳐두었던 스와치를 다시 끌어다 대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보다 이거 좋아요. 이걸로 해요."

김래빈은 그가 선택한 원단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좋은 원단이었다. 그에게 어울리기도 했고. 하지만 결정적으로 제외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난감한 얼굴을 눈치챈 것처럼 유진은 웃었다.

"부드러운 이미지 원해요?"

".....그렇습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약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퍽 위압적인 인상을 가졌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그것도 좋은 표현으로 돌려 말한 거였지 자신이 없는 뒤에서는 더 적나라한 말이 오갈 것을 알았다. 인상은 선입견을 부르고, 선입견은 다시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앗아갔다. 김래빈은 제 인상을 죽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부드럽고 화사한 원단을 골랐다. 그러나 유진은 다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옷으로 단점 감추는 거 가능해요. 근데 정답 아니에요."

거침없이 뻗어온 손이 놀라지 말라는 듯 가볍게 그의 뺨을 건드리더니, 이윽고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제대로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접촉에 그는 놀라 눈을 부릅떴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김래빈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본 차유진이 경쾌하게 결론지었다.

"나 전문가에요. 나 믿어요. [어떤 단점은 감추지 않는 게 더 매력적이죠.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그걸 매력으로 소화할 수 있고.]"

이어진 말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실례지만 뭐라고 하셨습니까?"

김래빈이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자 유진은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내 말 몰라요?"

그는 멋적게 예, 하고 답했다. 귀족의 후계자라면 당연히 외국어 두어 개 정도는 교양으로 익히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후계자로 논해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흠, 하고 팔장을 낀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나 멋지게 만들어요. 그리고 다시 노트를 펼쳤다.

"그러면 여기랑 여기 이걸로 바꿔야 해요."

다시 김래빈이 잘 모르는 부분이었다. 둘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하면, 유진은 웃고는 마네킹에 걸려있던 견본품을 냅다 걸쳤다. 서툰 말 대신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차이가 유진이 손으로 가리키고 움직일 때마다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유진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법 잘 이해하게 된 것과는 별개로, 그는 짧게 감탄했다. 어떠한 형태의 옷을 걸치든, 그 모든 옷들은 마치 유진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는 제가 느낀 바를 무심코 뱉어냈다.

"당신이 만든 옷은 당신에게 매우 잘 어울립니다."

유진은 재봉사이니 어쩌면 당연할 이야기를 칭찬처럼 건넸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김래빈은 뒤늦게 아차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의 말에 개의치 않는 것처럼 과장하여 한 바퀴 돌아 인사를 건넸다. 뒤이어 이어진 말은 솔직하다 못해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쳤다.

"난 아무거 입어도 잘 어울려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옷을 맞출 때에는 치수를 아주 세세하게 재야 했다. 특히나 그처럼 상체를 과감하게 움직일 것이 예정되어있는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유진은 줄자를 들고 그의 몸을 몇 바퀴고 빙빙 돌았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팔로, 팔에서 손목으로, 다시 가슴에서 허리까지. 김래빈은 유진이 요구하는 온갖 자세를 다 취해야 했고 그러면 유진은 그가 알 수 없는 차이를 운운하며 쟀던 곳을 다시 재갔다.

몸을 계속 움직이기는 했지만 지루한 시간이었다. 김래빈은 대신에 제 몸을 재는 유진을 퍽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가 치수를 재는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는데, 불필요한 접촉과 반복을 최소화하면서도 정확하게 치수를 재는 걸 보면 과연 전문적으로 옷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유진은 다시 매끄러운 재질의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길게 이어진 소맷단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통이 좁았지만 팔꿈치 부근부터 위로는 품이 넉넉하여 유진이 팔을 움직일때마다 흘러내리거나 부풀거나 하면서 그의 실루엣을 어렴풋이 드러내었다. 그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있다보면 유진이 시선이 제게 닿은 걸 눈치챘는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심심해요?"

김래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Oh. 솔직해도 괜찮아요. 이거 지루한 사람 많아요."

"정말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신의 옷이 주름지고 다시 펴지는 모습이 신기해서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옷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야 이해한 기분이에요. 감탄을 섞어 그가 꺼낸 말에 다시 웃은 유진이 숨을 내쉬어요, 하고 지시했다. 숨을 내쉬고 몸의 긴장을 풀면 다시 다가온 유진의 양 팔이 그의 허리를 둘러 줄자를 동여매듯 당겼다. 그 감촉에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면 유진은 고개를 젓고 다시, 하고 짧게 외쳤다.

"여기, 좁게 할 거에요."

그의 허리춤을 가리킨 유진이 다시 손으로 한번 더 강조하듯 실루엣을 그렸다. 거울을 통해 그가 그린 실루엣을 확인한 김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셔츠를 입고 있는 그의 허리라인에 거의 가까울 만큼 바특하게 그려진 라인이었다. 그는 머리속으로 제가 입게 될 옷을 아까 유진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그려보았다. 높은 목깃, 단단히 잡아맨 허리, 클래식한 폭보다 조금 좁은가 싶은 라펠, 그리고 매끄럽고 단단한 느낌의 흑청색 원단. 그나마 팔을 움직여야 하니 어깨 부분은 조금 넉넉하게 잡힐 게 다행인가. 하지만 어깨 부분에도 각이 들어간다면.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단히 절제되고 엄격한 느낌의 옷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깨달았다. 그가 피하려 했던 이미지를 유진은 정확하게 불러와 다시 그에게 씌우고자 한다. 그는 저에게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김래빈은 새삼스러운 의문을 담아 유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진은 그게 맞아요, 하고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줄 뿐이었다. 치수 재는 게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옷 약속한 날에 보내요."



그는 며칠 뒤 차유진을 강변에서 만났다.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도 아는 척을 해도 괜찮을까 잠시 망설였던 김래빈과는 달리 유진은 대뜸 손을 흔들고 잘 있었어요? 하고 인사를 붙여왔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차유진은 편한 옷을 걸친 채 강변에 걸터앉아있었다. 유진이 고개를 돌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강변에서 테니스를 치거나 크로켓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얼 보고 계십니까?"

유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며 뜬금없는 요청을 했다.

"말 편하게 해요. 높은 사람 그래요."

"전 별로 높은 사람이 아닙니다."

김래빈은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그럼 그래요, 하고 다시 어깨를 으쓱하더니 뒤늦은 답을 내놓았다.

"사람 움직이는 거 봐요. 움직이면 옷 잘 보여요."

김래빈은 새삼스레 운동하는 사람들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유진의 말마따나 그들이 격하게 움직일수록 옷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이나 옷감이 뒤틀리는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그렇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진에게 옆에 앉아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조금 재밌어하는 기색으로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옷자락을 잘 정돈해 손수건을 깐 풀 위에 앉았다.

"움직이기 편하게 옷을 만들어주신 덕분에 저번의 연주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뒤늦은 인사였다. 하지만 저번부터 하고 싶었다. 옷은 약속한 날짜에 어김없이 도착했다. 상자 안에 귀히 접힌 옷은 그의 몸에 딱 맞았고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싸는 천은 팔을 어떻게 움직여도 불편하지 않았다. 가봉때도 신기해했었는데 완성된 옷은 더 놀라웠다. 신기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우려했던 대로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의 인상에 엄격하고 딱딱해보이는 느낌의 옷까지 걸치자 사람들은 그에게 쉽사리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퍽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오히려 진중한 대화를 원하는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그에게 말을 붙여와 평소의 교류보다 사람들과 더 알찬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 내용을 느리게 그에게 털어놓으면 유진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내 옷은 도와줘요. 한 건 당신이에요. 그러니까...?"

"김래빈입니다."

늦은 통성명이었다. 내 이름 알죠. 유진이 물었고 그는 긍정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대로 넘어가는 대신 악수하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여기선 차유진이에요."

그냥 유진이 아니었구나. 뒤늦게 깨달으며 그는 상대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연주 잘 했어요? 양팔을 뒤로 뻗어 몸을 편하게 기대며 차유진이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가 있었다. 김래빈은 예, 하고 짧게 대답하고 마찬가지로 한동안 운동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재봉에는 식견이 없었다. 아마 같은 풍경을 보더라도 차유진의 볼 수 있는 것과 그가 볼 수 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리라. 그는 왼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동하는 사람들 대신 편하게 앉아있는 차유진이 보였다. 그가 입은 옷은 치수를 쟀던 그 날과는 다른 옷이었다. 좀 더 일상복에 가까웠고, 편해보였다.

"여전히 놀랄 만큼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계십니다."

연주를 잘 했냐는 차유진의 물음처럼, 김래빈의 말도 안부를 묻는 정도의 가벼운 한담에 가까웠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이거 내가 만든 거 아니에요. 나 이거 샀어요."

못 믿겠다는 마음이 얼굴에 드러난 걸까. 차유진은 자그맣게 덧붙였다. 재봉사라고 모든 옷 안 만들어요. 그러면 자신은 왜 착각했을까. 김래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의 상황에 어울릴만한 옷을 골라준 것처럼 어쩌면 차유진은 제게 가장 어울리는 옷을 골라낼 안목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럴지도 모르지.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만큼 차유진씨가 매력적이라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그거 [설마 플러팅이에요?]"

"예?"

"아니에요. 나 귀족 아니에요. 그래도 괜찮으면 다음에 연주 나 불러요."

반가운 요청이었다. 그는 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아니에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냐고 물어보아도 차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후로도 한동안 강변에 앉아 사람들을 보다가 각자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차유진은 손을 흔들었고, 그는 고개를 숙이려다 멈칫하고 어설프게 손을 움직였다. 그가 뒤를 돌아서고 나서도 차유진이 웃는 소리가 오래 들렸다.

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 11 12


코멘트

답글 남기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