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도전 2(2023년)


11월 11일 / 흰동백

김래빈의 탄생화는 흰동백이다.

물론 차유진은 '동백'이라는 게 어떤 꽃인지 몰랐다. 그게 김래빈의 탄생화라는 것도 팬들의 질문이 없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그는 별자리니 혈액형이니 하는 것들도 제 입맛에 맞춰 골라 믿었고 더군다나 꽃은 그의 관심 외였다. 처음 탄생화라는 걸 알게 되고 팬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제 탄생화와 김래빈의 탄생화가 뭔지 찾아본 후에는 좀 우습다고까지 생각했다. 그 때엔 피지도 않을 것 같은 꽃까지 날짜별로 갖다붙여서 의미를 부여하다니.

그래도 제 탄생화가 데이지인 건 좋았다. 그의 집은 많은 단독주택이 그렇듯 마당에 잔디를 죽 깔았지만 그의 할머니는 그래도 한쪽 구석에 화단을 두어 꽃을 길렀다. 제라늄, 팬지, 데이지, 메리골드... 튼튼하고 꽃이 오래 피는 품종이면 무어든 그 화단을 한번씩은 거쳤고 데이지는 그 중에서도 꽤 오랫동안 화단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노랗고 하얀 꽃이 필 때면 강아지들은 꽃 사이를 주둥이로 헤집어대다가 그가 부르는 소리에 컹 짖고는 프리스비를 찾아 달렸고, 그 꽃을 꺾어다가 제게 잔소리하려 허리에 손을 올리는 엄마에게 슬그머니 웃으며 내밀면 열 마디 떨어질 잔소리가 다섯 마디로 줄어들 때도 있었다.

그러니 차유진은 김래빈에게도 탄생화와 얽힌 좋은 기억 한 가지쯤은 있었으면 했다. 정작 김래빈은 제 탄생화를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해서 그를 놀라게 만들었지만.

'동백 한국에 없어?'

'그건 아냐. 하지만 주로 남쪽 지방에 흔한 나무이기 때문에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보기 어려워. 서울이야 말할 것도 없지. 여기는 녹지를 찾아보는 게 더 어려우니까.'

김래빈도 작업할 때와는 달리 평소엔 섬세함이 떨어지는 보통의 남자애라 네 탄생화가 안 궁금하냐는 차유진의 물음에 굳이? 하는 얼굴을 했다. 그래서 차유진은 이건 제가 나설수밖에 없겠노라 예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곧바로 흰동백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무튼 바빴고, 동백이 피는 계절에 맞추어 적절한 지방으로 스케줄을 조정하는 건 차유진의 능력 밖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김래빈의 생일 즈음 제주도를 가게 된 건 천운이었다. 그 스케줄이 번다한 일이 적고 여유시간이 있어 개인적인 행선지를 끼워넣어도 되는 종류라는 것도. 차유진은 저번 휴가를 통해 제주도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섬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예전의 다짐을 실행하는 일 뿐이었다. 차유진은 아주 오랜만에 핸드폰을 들어 서치를 시작했다. 물론 김래빈에게는 어디로 가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널 위해 이런 걸 찾았다는 걸 말하기도 간지러웠다. 차유진은 그냥 제주도에서 제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만 말했고 김래빈은 행선지를 정확히 말하지 않는 건 나쁜 버릇이라고 타박하면서도 같이 가자는 조름에는 곧장 그래! 하고 동조해주었다.

그래서 둘은 지금 흰동백 군락 앞이었다.

"김래빈 사진 많이 찍어!"

"그렇지 않아도 러뷰어께 보여드리기 위해 각도별로 동백의 모습을 남기고 있어!"

Oh. 러뷰어는 꽃보다 김래빈 보는 거 좋아해. 덧붙일까 하다가 김래빈의 들뜬 목소리에 차유진은 그냥 사진을 찍는 김래빈의 뒷모습이나 찍기로 했다. 누구든 본인의 뒷모습은 스스로 사진으로 남길 수 없다. 김래빈의 어떤 팬들은 분명 그의 뒷모습도 보고싶어할 거다. 그러다 김래빈이 그를 돌아보고 웃으면 그 모습도 얼결에 사진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가을이었고, 하늘이 쨍했다. 푸릇한 잎사귀와 흰 꽃이 만발한 제주도의 풍경은 가을답지는 않았지만 그 사이에서 밝게 웃는 김래빈은 그럴싸했다. 차유진은 잘 나온 사진을 골라 단체톡방에 올리고는 메세지를 남겼다.


[김래빈 신났어요 XD]

형들이 답장하는지 몇 번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곧바로 답을 확인하는 대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몸을 돌렸다. 김래빈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차유진, 이리 와서 너도 같이 찍자. 그는 꽃과 김래빈 사이에 섰다. 그는 시선을 살짝 떨구었다. 두껍고 광택이 있는 잎사귀들이 보였다. 꽃잎도 두께가 있어보이는 걸 보면 본디 잎이건 꽃이건 두꺼운 나무인 모양이었다. 셀카의 각도를 맞추고 있는 김래빈을 쿡 찌르고 여길 보라며 잎사귀의 두께를 가리키면 김래빈은 별 거 아니라는 것처럼 눈을 끔벅였다.

"잎이 얇으면 추운 겨울을 나기 어렵다고 했어. 그래서 한국에서는 겨울에도 잎이 푸른 나무는 대개 잎사귀가 두꺼운 편이야."

"Oh. 튼튼한 나무!"

네가 살던 곳에는 이런 나무가 없어? 김래빈이 물었다. 그는 기억을 되짚었다. 그가 관심이 없었을 뿐 생각해보면 그런 나무가 꽤 많았다. 오렌지나무들이 대개 그랬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대체로 온난한 기후를 자랑했고 해변가를 따라서는 열대 품종에 가까운 나무들도 곧잘 자랐다. 그런 나무들이 한국의 겨울까지도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몰라.

"자, 그럼 찍는다."

적당한 각도를 찾았는지 김래빈이 차유진을 톡 건드렸다. 반사적으로 그는 시선을 카메라를 향해 돌렸다. 김래빈은 자동타이머기술과 연사를 활용할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진을 찍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셋, 둘, 하나 하고 숫자를 셌다. 셋이 하나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그는 동백을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두껍고 튼튼한 잎사귀들 사이로 아직은 수줍은듯 오므려져 있는 꽃송이와 그 속의 노랗고 풍성한 꽃술이 눈에 들어왔다.

"김래빈 탄생화 김래빈 닮았어."

찍은 사진을 넘겨보고 있는 김래빈 뒤에 가만히 속삭이면, 김래빈은 의아한듯 그래? 하고 제게 고개를 기울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제스쳐였다. 추운데도 튼튼하고 반짝거리고 예뻐. 그는 그렇게 답해주었고 김래빈은 제게 좋은 덕담을 해주어 감사하다며 엄숙하게 그에게 인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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