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도전 2(2023년)


11월 17일 / 가사

"래빈씨도 그 노래 알죠?"

패널 하나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차유진은 제 친구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 보고도 나올 답을 알았다. 저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넵! 김래빈이 힘차게 대답했다.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있었습니다. 음악 시간에 함께 불렀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습니다. 서정적인 음률과 시적인 가사가 인상깊었습니다!"

"나는 그 노래 몰라요. 들어본 적 없어요!"

그는 슬그머니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그들은 나이가 제법 있는 패널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방금전까지는 세대 차이를 주제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그때 그와 김래빈은 한편처럼 취급되었다. 지금은 패널과 김래빈이 같은 편이고 차유진이 혼자 외따로 다른 편인 모양새다. 그렇다고 한들 대화에 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차유진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졸랐다. 무슨 노랜지 궁금해요!

저들끼리 허허허 웃으며 흥얼거리던 패널들의 시선이 그 순간 김래빈에게 쏠렸다. 이들도 방송을 안다. 이 타이밍에 저들이 노래를 불러버리면 나이 들은 사람이 어린 사람을 가르치는 꼴밖에 안 되리라는 걸 아는 거다. 결국 패널 하나가 김래빈씨 노래 기억하면 한번 불러줄 수 있어요? 하고 운을 뗀다. 앗 넵! 이제까지 그래왔듯 연장자의 요구에 5초도 지나지 않아 바로 튀어나온 순순한 대답에 패널들이 다시 와글와글 웃는다.

"반주 없어도 돼요?"

"가능할 것 같습니다."

핸드마이크를 건네받아 쥔 김래빈이 잠시 목을 가다듬는다. 동그-라미-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저음의 목소리가 느리고 구슬픈 가락을 나지막하게 읊었다. 랩이 메인 포지션이긴 해도 김래빈도 어쨌든 가수로 불리는 직종이었다. 차유진은 처음 듣는 노래였지만 그럼에도 반주 하나 없이 정확한 음정이란 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패널들의 표정이 편안했으니까. 그 중 일부는 입모양으로 중얼중얼 따라부르기까지 하고 있었다.

차유진은 턱을 괸 채 노래를 감상했다. 느리고 또렷한 발음이어도 한국어로 된 가사는 언제나 이해가 반박자 느렸다. 그러다 문득 김래빈과 눈이 마주쳤다. 차유진은 뒤늦게야 김래빈이 빛나던 눈동자를 노래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박수가 터져나왔다. 패널 하나가 신기하다는듯한 얼굴을 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아니, 이걸 2절까지 기억하기가 쉽지 않은데. 좋아하는 곡이었나봐요?"

김래빈이 멈칫했다. 노래에 대해선 줄줄줄 말하던 김래빈을 떠올리면 흔치 않은 반응이었다. 차유진은 잽싸게 끼어들었다. 김래빈 노래 다 잘 기억해요! 지난번에 트로트 춰서 1등했어요! 그의 말에 패널들이 관심을 보였다. 트로트로 1등이요? 차유진은 이쯤에서 제작진이 티홀릭의 컨텐츠를 자료화면으로 넣어줄 거라 예상했다. 그 뒤로는 대화 주제가 또 확 튀었다. 최대한 티내지 않으며 안도하는 그 얼굴을 보며 차유진은 돌아가면 묻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김래빈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 눈썹 부근을 긁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본가 돌아가서 짐정리를 할 때 중학교 음악교과서를 발견했거든. 그 때 봤어."

"그거 말하면 문제 돼?"

"그건 아닌데, 할머니께서는 아직도 내가 나오는 방송은 다 보시니까. 그건 .......저번, 그러니까, 더 오래된 때의,"

차유진은 김래빈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렸다.

"STier?"

김래빈은 왜 말을 끊냐고 따지지도 않고 잠시 차유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할머니께서 들으시면 혹시 의아해하실까 싶어서."

김래빈의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그가 말하지 않은 부분을 좀 더 알았다. 김래빈이 다양한 노래를 듣고,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건 맞지만 모든 노래를 전부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다. 머뭇거림 없이 부를 수 있는 건 여러 번 반복했거나 관심이 있는 노래여야만 했다. 그러니 김래빈은 어떠한 이유에서였든 그 노래를 몇번이고 되짚어본 적이 있는 것이다. 그는 김래빈을 툭 쳤다.

"김래빈 나 생각했어?"

뭐?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듯 눈썹을 찌푸리던 김래빈은 아까 눈이 마주쳤던 걸 떠올렸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도 했지. 그는 입술을 비죽였다.
"그럼 나 말고 무슨 생각 했어?"

"그 때? 그냥 가사가 이랬었나 하는 생각."

가사? 차유진은 제가 들었던 가사를 떠올렸다. 애초에 딱 한 번 들은 노래였다. 대충 슬픈 느낌이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김래빈을 다시 보았다. 상대는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쓸쓸하거나 회한에 찬 것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그건 다행이었지만. 차유진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다시 입술을 비죽였다.

스티어가 해체되고 난 뒤의 김래빈의 삶은 그에게 아직 미지수였다. 그도 아주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가 있었고 박문대나 류청우에게 물으면 아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만, 또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김래빈에게 물어 알 수 있는 건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마치 래빗홀에 제 모든 심상을 털어낸 것처럼 굴었다. 고통도 고뇌도 혼자 떠올리고, 혼자 품어내고, 또 혼자 해소해버린 것처럼.

물론 다른 멤버들도, 심지어는 그도 곡을 쓰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하기는 했지. 하지만 차유진은 래빗홀 이후 후련해진 김래빈을 보며 제가 언제까지고 그 때의 김래빈은 알 수 없으리라는 예감을 했다. 그 예감은 지금까지도 맞아떨어지고 있는 중이었고.

그걸 가지고 징징댈 생각은 없었다. 저도 김래빈에게 '그' 차유진의 모든 걸 말한 건 아니었으니까. 대신에 차유진은 그 때의 김래빈이 궁금해질 때마다 래빗홀의 가사를 곱씹었다. 그에게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한자어를 뒤져가며. 오랫동안 어두운 심해와 벼랑끝 난해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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