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추억

어쩌면 설렐 법도 했다. 호감이 생긴 상대와 서로 마음이 맞아떨어지는 우연이 흔한 건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정말로, 조금쯤은 그랬겠지.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분간 세진이는 활동을 중단할 거야.’

그 일방적인 통보가 시작이었다. 이세진이 경찰에 소환되고 언론에 이야기가 떠돌 때부터는 스티어 역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손댈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어떻게든 그들에게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끊임없이 악의와 오독이 반복되는 갑갑하고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사랑을 논하는 건 너무 사치스러운 일 같았다.

그래도 곧 괜찮아질 거야. 그는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세진의 탈퇴로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이름과 내용만 바뀐 새로운 소문들이 그들을 따라 떠돌았기 때문이다. 이미 그들에게는 무엇을 하든 꼬리표가 너무 쉽게 붙었고 스티어의 멤버들은 구설수를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 만큼 철저하거나 결벽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연애 스캔들은 아이돌 활동에 치명적이거든.’

민정훈의 연애사가 대중에게 들통났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눈치채지 못한 차유진을 붙잡고 김래빈은 침중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여전히 한국의 팬 문화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그 말을 들으며 그럼 김래빈이 나한테 고백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김래빈은 그룹에 폐 끼치는 건 죽어도 안 하려고 할 테니까.’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상황이 괜찮았다면 어쩌면 우리 둘은 정말 잘 지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차유진은 연애의 기미라도 보일까 눈을 부릅뜨고 절 감시하는 회사와 팬들의 눈앞에서 굳이 살벌한 분위기를 감수해 가며 몰래몰래 김래빈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까지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김래빈이 제게 자각 없이 내비치는, 때로는 숨기고 숨기다 겨우 조심스레 들이미는 호감을 친구라는 이름으로 모르는 척 적당히 흘려보냈다. 썩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애매한 관계는 원래부터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아주 밀어낼 수도 없었다. 상대방이 밝히지도 않은 마음에 마음대로 선을 긋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니와, 김래빈이 영문도 모른 채 제게 매정하게 대해질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안 좋았다.

‘원래 감정을 정리할 때도 시간 필요해.’

그는 그렇게 제 미적지근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밀어낸다 해도 김래빈과 아주 멀어질 수도 없었다. 그의 팬들은 종종 그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공격적이었고, 그렇지 않아도 예전 같지 않은 멤버들 사이에서 그와 김래빈 사이에 불화설이라도 돈다면 그것도 골치 아픈 일일 터였다.

시간이 흐르면 점점 아무렇지도 않아지겠지. 그는 그걸로 위안을 삼으려 했다. 착각임을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김래빈.”

“응….”

“저번에 말했던 거 팬들 좋아했어. 김래빈 생각 맞아.”

“…응.”

“김래빈, 자?”

늦은 밤, 형들 몰래 거실에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다 제게 기대어 조는 김래빈에게 충동적으로 고개 기울여 키스할 뻔했을 때, 차유진은 흐릿하게 제게 경고하던 제 직감이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뚜렷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은 생각보다 김래빈을 더 좋아하고, 어쩌면, 우유부단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김래빈의 마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마음부터 감출 수 없을 만큼 커지리라는 걸.

‘shit….’

그건, 스스로의 감정에 위협당하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늪이 차곡차곡 제 목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그가 좀 덜 피곤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달랐을까. 그때의 차유진은 당장 들이닥친 문제를 넘어 넓게 시야를 가질 여유가 없었다. 마치 강요당하듯 그의 앞엔 막다른 선택지가 놓였다. 커리어를 위해 제 사랑과 김래빈을 포기하고 이제까지처럼 계속해서 모른 척 마음을 정리하거나, 비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김래빈을 선택하거나.

그건 십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굳건하게 자아를 쌓아왔고 셀레브리티와 아티스트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확고했던 차유진이 처음으로 제 자아와 꿈에 회의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벼랑이었다. 자기방어처럼, 본능적인 거부감이 거세게 솟아올랐다.

‘내가 원했던 게 이런 길이라고?’

아무리 그가 평소에 ‘우리 무엇이든 잘 하면 돼요’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도 차유진은 꿈속에 빠져 사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무대가 좋았고 언젠가 노력한다면 사람들은 언제고 그들의 무대에 환호를 보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대중들이 제멋대로 쌓아올린 환상과 그들이 요구하는 빡빡한 기준으로 가로막힌 그 길 위에, 그의 감정과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팬들의 반대와 선입견을 전부 이겨내고 아이돌 활동과 연애를 둘 다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하기에는 그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았고 그가 그의 꿈에 너무 진심이었다.

답답해. 불쑥 날카로운 감정이 차올랐다. 어디든 절 따라올 시선이, 함부로 나갈 수 없는 숙소가, 외출할 때마다 감시하듯 붙는 매니저까지도. 이제까지 당연한 것처럼 감내해 왔던 모든 것이 어쩐지 그때만큼은 견딜 수 없었다. 잠시만이라도 아이돌 차유진이 아니라 그냥 차유진이고 싶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숙소를 나섰다. 특별히 원하는 곳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금 당장 무어라도 호흡할 수 있는 공기가 필요했다. 거센 바람을 맞고 거리를 걸으며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김래빈을 깨우지도, 누구에게 문자를 남기지도 않았다. 그게 처음이었다.

“차유진 너 왜 그랬어?”

그가 돌아왔을 때 김래빈은 당연히 기겁했다. 이미 돌아오는 길에 매니저와 류청우까지 한바탕 겪은 뒤였다. 연이은 닦달과 냉소에 마음이 지쳐있던 차유진은 김래빈의 그 물음이 매니저가 그에게 몇 번이고 따져 묻던 ‘너 미쳤어?’와는 어조도 목적도 확연히 다르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퉁명스레 답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어.”

“그래도….”

“그만. 더 참견하는 거 싫어. 내 일이야.”

김래빈은 계속해서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그는 씻는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제게 뻗어오는 손을 밀어내고 몸을 돌리자 김래빈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물러났다. 그 눈에 서린 염려도, 어중간한 선의도 지금은 보고 싶지 않았다. 김래빈이 제게 무언가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건 알았지만 그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아. 김래빈이 마음을 접는 건 좀 나한테 도움이 되려나. 차유진은 삐쭉 웃었다가 곧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그래봤자 제 마음이 그대로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게 분명한데 뭘.

그날을 기점으로 그는 종종 바깥을 떠돌았다. 생각을 정돈하고 싶을 때마다 마음이 먼저 밖으로 튀었다. 이미 그의 그룹은 하루하루 하락세를 겪고 있었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니 도리어 외출은 편했다.

돌발행동이 반복되면서 그를 가장 먼저 포기한 건 매니저였다. 어느 순간부터 매니저는 그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그룹이 데뷔하면서 회사 전체적으로 스티어를 케어하는 인력이 점점 줄어들 때였다. 회사가 점점 손 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다른 멤버들의 탈선도 꾸준히 이어졌다. 류청우는 그들의 고삐를 채어잡기에 바빠 그나마 다른 사고는 치지 않는 차유진은 나중으로 미루는 눈치였다. 김래빈만이 꾸준히 그를 걱정했다.

“차유진, 적어도 나갈 땐 행선지라도 말하고 가면 안 돼? 연락이 잘 안되니까 걱정되잖아.”

비난이 아니다. 알고 있었다. 김래빈은 말에 걱정이라는 껍데기를 씌운 채 빈정거리는 법을 모른다. 부릅뜬 눈이 마치 화내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껏 연약하고 무른 것이 있었다. 그게 안쓰럽고, 그 와중에도 사랑스럽고, 조금은 심술이 나서.

‘넌 왜 아직도 날 좋아해? 내가 뭐가 그렇게 좋아서?’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고 그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떠돌 뿐 행선지라고 말할 만한 데도 없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만 안 걸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클럽이나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냐는 삐딱한 마음 역시 한켠으로 감추었다.

하지만 김래빈의 용건은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계속 흘끔거리나 싶더니 다시 조심스레 말을 붙여왔다.

“혹시 정말로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자꾸 외출을 하는 거라면, 설령 나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청우 형이나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어.”

정말로 견딜 수 없었다.

내가 너를 마음껏 좋아할 수 없는 게 짜증 나. 나는 그냥 이 일이 즐거워서 계속하고 싶은 것뿐인데,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마치 죄처럼 되어버리는 이 구조가 너무 답답해. 마음을 계속 감추고 있는 것도 싫고, 너를 계속 사랑하면 언젠가 내가 아이돌을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까지 후회할 것 같아서, 그렇게 약해질 내가 너무 싫어. 그런데 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이 구니까 네가 이제 나를 그만 좋아했으면 했다가 그래도 계속 좋아했으면 했다가…. 김래빈 나는 내가 요새 좀 돌아버린 것 같아.

‘이런 내용을, 네가 나라면 류청우나 전문가에게 말할 수 있겠어?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쏟아내지 못할 수많은 말들이 그의 목을 맴돌았다. 정말 고역이었다. 이제까지 그는 대체로 하고 싶은 말은 죄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김래빈. 그는 상대를 불렀다.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직후부터 언제나 애정을 가득 담아 불러보고 싶던 이름이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목 졸린 사람처럼 매가리가 하나도 없는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거 내 일이라고 했어. 김래빈 간섭할 자격 없어.”

나쁜 말인 건 알았다. 유난히 감정이입을 잘하는 그의 누나가 이 말을 들었으면 그의 등짝을 두 대는 때렸을 거다. 그렇게 말하면 김래빈이 슬퍼할 걸 짐작하면서도, 거의 처음으로 고의를 담아 차유진은 상대를 찔렀다. 그가 입을 다물었으면 해서. 하지 못할 말을 제 안에만 꾹꾹 눌러 담는 게 더는 힘들어서.

“…차유진.”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김래빈은 따져 묻지 않았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이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답 없이 입술을 꾹 물었다. 상대는 그런 그를 보며 길게 한숨 쉬더니 조용히 물러섰다.

“늦었으니까 푹 쉬어.”

탁, 하고 문이 닫혔다. 첫 단절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그들은 기약 없이 계속해서 노력했다. 완전한 승리도 패배도 아닌, 아주 망하지도 않아서 포기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썩 만족스럽지도 않은 어중간한 결과물이 연이어 떨어졌다. 그들이 씁쓸함에도 점점 무뎌져 갈 때쯤 멤버들 역시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한때는 가장 손 안 가는 막내 중 하나였던 차유진은 스티어가 셋만 남은 유닛이 되자 제일가는 사고뭉치로 낙인찍혔다. 그래도 김래빈은 변함없이 그의 곁에 있었다. 일이 없으니 함께 있는 시간은 더욱 길었다. 그들은 여전히 노래를 같이 듣고, 시시콜콜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회사에 대해 불평하고, 하고 싶은 무대를 이야기했다. 둘만의 유닛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 일은 없었다.

“차유진, 뭐해?”

“게임.”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빈방이 남아돌아도 김래빈과 차유진은 여전히 같은 방을 썼다. 심심하면 서로 어깨에 기대는 습관은 여전해도 각자 할 일을 하느라 시선은 마주치지 않았다. 그가 기댈 때마다 습관적으로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긴장하는 목덜미를 느끼며 차유진은 김래빈 마음은 여전하구나, 하고 짐작했다.

‘김래빈 정말로 한결같네.’

지금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나? 옛날만큼 조심하지 않아도 될 테고. 무심코 가능성을 점쳐보다가 그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김래빈이 드디어 제 마음을 밝히든, 그가 김래빈에게 좋아한다고 털어놓든 이제는 별 소용 없었다. 마음을 정했으니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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