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닛 무대는 성공적이었다.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타고 증폭된 드럼과 현악기의 울림은 넓은 콘서트장의 먼 거리를 뚫고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언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냐는 듯 무대를 활보했다. 곡 마디마디마다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새삼스레 눈이 부셨다. 물 흐르듯이 맞아떨어지는 무대의 요소요소도, 말 한마디 안 한 채 눈빛만으로 뜻이 맞는 파트너도, 그들에게 열광하는 팬들의 거대한 함성도.
“고마워요!!!”
그는 냅다 소리 질렀다. 비명과 환호성, 박수, 팬들이 그에게 답하는 소리가 인이어를 타고 진동처럼 전해졌다. 취한 것처럼 웃음이 터져서, 무대의 끝에서 차유진은 결국 김래빈을 꽉 끌어안았다.
아주 오래 전의 추억이, 그가 잊고 있던 어떤 순간의 잔해물이 뒤늦게 그를 휩쓸었다. 그건 상실감인 것도 같았고 충족감인 것도 같았다. 무대에서 차유진은 웃었고 내려와서는 조금 울었다. 비하인드 카메라에 찍힌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황한 김래빈은 그를 되는대로 달래주려다 다음 무대를 위해 달려온 스타일리스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그 뻘쭘한 얼굴이 웃겨서 눈썹을 찡그렸다가 한바탕 볼멘소리를 듣게 된 차유진은 얌전히 화장을 수정하는 브러쉬에 제 얼굴을 맡겼다.
아무튼 무대는 끝내줬고 아직 투어는 한참 남아있었다. 오늘은 울었지만, 즐겁게 쏟아내고 내려와 무대 아래서까지 웃을 날도 곧이었다.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묵는 방 앞에 서서 벨을 눌렀다.
김래빈, 나야. 누구냐고 묻기도 전에 냅다 문 사이로 목소리를 높이면 안에서 허겁지겁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호텔 복도에서 그렇게 소리를 높이면 어떡해.”
김래빈은 벌써 씻고 나온 건지 차림새가 편했다. 차유진은 별 대꾸 없이 제가 끌고 온 캐리어를 문 옆에 일렬로 늘어놓았다. 짐이 잔뜩 들은 캐리어 두 줄. 그것만으로도 김래빈은 익숙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같이 자게?”
“응. 김래빈 거절은 거절해.”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워온 거야….”
회사 제일의 아티스트 대우에 걸맞게, 제공된 침대는 둘이 자기에 적당히 넓었다. 어차피 콘서트 후에는 서로 곯아떨어지기에도 바쁘니 불순한 의도로 온 건 아니었다. 물론 차유진은 자러만 온 건 아니었지만.
“김래빈.”
그는 김래빈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네 행동이나 말이 지금의 너를 대입해서 보면 이해가 간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콘서트를 준비하는 내내 조금만 빈 시간이 생기면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오던 말이었다. 그러면 차유진은 김래빈이 지금은 그 눈으로 어느 때의 저를 더듬고 있을지가 궁금했다가, 김래빈한텐 제 무엇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의아해하기도 하고, 스티어 시절의 김래빈과 지금의 김래빈을 번갈아 비교해 보기도 했다.
아쉽게도 김래빈은 참으로 한결같은 사람이라 그는 새로운 김래빈을 이해하는 보람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스티어와 테스타에 걸쳐 찬찬히 김래빈을 회상하는 과정에서 그에게도 명료해진 게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김래빈은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그를 좋아했다. 한때는 부담스럽고 때로는 서글펐던 그 감정이 그때로부터 몇 걸음 거리를 둔 지금의 그에겐 오해 없이 스며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말하고 싶었다. 말할 수 있었다.
“나도 너 좋아했어.”
아주 뒤늦은 고백이었다. 배경에는 정리하지 않은 캐리어들이 잔뜩에, 옷이며 얼굴도 콘서트의 여파로 얼룩덜룩했다. 조금은 배가 고팠고 피곤해서 눈이 감겼다. 우스꽝스러울 걸 알면서도 차유진은 한 번 더 고백했다.
“스티어 때 사실 나 너 좋아했어.”
김래빈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랬구나. 이어 멍하니 흘러나온 말은 아마 반사적인 대답에 더 가까울 거라고 그는 추측했다. 그들은 잠시간 말없이 침묵했다. 그는 김래빈을 기다렸다. 김래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눈길로 그의 얼굴과 바닥과 천장을 연달아 바라보았다.
“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머쓱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김래빈이 문득 어리숙하게 웃었다. 나는 진짜 하나도 몰랐네, 다시 한번 혼잣말하듯 속삭이고는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어, 하는 사이 차유진은 방에 딸린 화장실 앞까지 끌려갔다.
“김래빈?”
“일단 씻고 나와. 너 옷은 매일 쓰는 주황색 캐리어에 담은 거 맞지? 내가 갈아입을 건 알아서 꺼내놓을 테니까.”
당황하는 그의 얼굴에도 김래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마 너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너 지금 너무 피곤해 보여. 그러니까 일단 씻자.
“우리 오래 같이 있을 거잖아.”
“응.”
“그러니까 천천히 이야기해도 될 거야.”
이번엔 진짜로. 김래빈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그는 못 이긴 척 등 떠밀려 욕실에 들어갔다. 호텔에 준비된 어매니티를 뜯으며 그는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어리둥절하면서도 한층 홀가분해진 얼굴이 거기 있었다.
‘바보 같고 피곤한 얼굴.’
그는 피식 웃었다. 고백으로 달라진 건, 글쎄. 별로 없었다. 그래도 모든 게 되돌아왔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칫솔을 입에 물었다. 얼른 씻고 나가서 김래빈 옆에 누운 채 모든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아직 듣지 못한 과거 김래빈의 일들까지도.
드디어 그는 거리낌 없이 과거를 돌아볼 수 있었다. 더 이상 괴롭지도, 한심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가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상대가 과거를 어떻게 새롭게 추억해 낼지 생각하면 기대되기까지 했다. 김래빈의 말처럼 정말 할 말이 많았다. 밤새도록 떠들어도 다 못할 것 같았다. 말하다가 그냥 잠들어버릴지도 몰랐다. 그래도 내일이 있고, 그다음 날도 있고, 그리고 또 곱씹을 추억만큼이나 무수한 날들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 모든 날에 김래빈이 그의 옆에 있을 것임을, 다시 떠올린 기억과 앞으로 쌓아나갈 세월이 모두 그와의 추억으로 쌓일 것임을 차유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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