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차유진이 스티어 때의 차유진에게 바라는 게 없었냐고 물었다면 좀 더 쉽게 답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원망하지 않냐고 물으며 저를 샅샅이 살피듯 올려다보던 그 시선을 회상하다 김래빈은 신이 나 말 조련사에게 질문 폭격을 던지는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콘서트 이후로 차유진은 그때의 망설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잘된 일이다. 그의 입장에서도 그 편이 더 좋았다. 종종 너무 무모한 게 걱정이기는 해도 그 역시 차유진이 걱정 없이 웃는 쪽이 더 좋았으니까.
‘예전에 차유진은 지금보다도 더 힘들 때가 많았던 것 같으니까….’
그는 재차 과거를 떠올렸다. 차유진이 돌아가고 난 후 그에게 유일하게 남았던 미련이, 사실은 딱 하나 있었다. 원망보다는 바람이었다. 스티어 차유진에게 스티어 김래빈이 언제고 바랐던 것.
그에겐 한때 차유진에게 기댈 곳이 되어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있었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쓸쓸함을 느꼈던 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를 보지 않는 그 등에 서서히 익숙해졌다는 게, 그게 싫어서, 차라리 그에게 화를 내고 투정을 부렸으면 했다. 그에게 등 돌리지 말았으면 했다. 그를 혼자 두고 차유진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던 바람이었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번에도 어쩌다 말할 기회 없이도 모든 일이 해결되어 버렸지만.
하지만 괜찮았다. 그들이 유닛 무대를 준비하며 나눴던 대화와 차유진의 고백은 고스란히 남은 채, 둘의 사이는 예전처럼 돌아왔다. 김래빈은 자신을 보는 차유진의 눈에서 견고한 애정을 읽어낸다. 감추었던 걸 다 털어내고 혼란을 전부 떨쳐낸 후의 단단한 온기.
김래빈은 그게 퍽 찬란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면서도 동시에 아주 오래된 소원이 이루어진 듯 정말 기쁘고 홀가분했다. 차유진이 감추고 있던 고민과 혼란을 그는 기어코 듣고야 말았다. 그 고민과 혼란이 언젠가의 그를 두고 떠나던 그 등 주인의 것은 이제 아니더라도. 그러니 무언가 속에 꾹꾹 누르고 있는듯한 상대를 보며 느꼈던 불안과 초조함도 다시는 느낄 일 없으리라.
“준비 다 했어?”
그는 살짝 목청을 높여 물었다. 차유진이 팔로 크게 원을 그리며 웃었다. 몇 번이고 예행 연습을 한 장면이었다. 차유진은 승마에 능숙했고 장애물이나 위험한 요소가 있을 만한 길도 아니었으니, 돌발상황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비교적 단순한 장면인 차유진 파트의 뮤직비디오 촬영은 순탄하게 흘러갈 게 분명했다. 이윽고 조련사가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곳까지 물러나고 스텝들이 차유진을 쫓아갈 촬영 장비를 점검했다. 그는 스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합니다. 스텝들이 지시를 반복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셋, 둘, 하나. 슬레이트!”
딱, 하는 소리가 울리고 곧 말에 올라탄 차유진이 사방이 뚫린 평원을 달려나갔다. 절로 마음이 시원해지는 광경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쫓아가는 스텝들을 잠시 눈으로 좇다가, 시나리오상 차유진과 합류할 장소로 서둘러 이동했다. 벌써 저만치 작아진 차유진을 그는 흘끔 돌아보았다. 상대의 등은 점점 멀어졌지만 이제 그는 괜찮았다. 김래빈은 더 이상 차유진의 뒷모습을 보는 게 서글프지 않았다.
낯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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