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추억

그의 손에 서류 한 뭉치가 들렸다. 류청우가 그에게 살짝 눈짓했다. 그는 익숙하게 제 몫의 종이를 한 장 빼내곤 옆자리에 앉은 김래빈에게 나머지를 넘겨주었다. 소파를 중심으로 둘러앉은 일곱 명에게 자료가 모두 돌아가는 건 금방이었다. 

“방금 회사로부터 전달받은 콘서트 세트리스트 3차 안이야. 아직 가안 형태긴 하지만 우리가 요청했던 내용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고, 내 생각엔 거의 확정으로 보아도 될 것 같은데. 한번 살펴보고 다른 의견이나 이상이 없으면 이대로 진행한다고 전할게.”

테스타에게 이제 이런 회의는 너무 익숙했다. 리더의 말에 서류를 살펴보는 각자의 눈길이 보다 분주해졌다. 활동기의 바쁜 스케줄로 다들 조금씩은 피곤한 기색이었지만 콘서트를 좋아하는 이들답게 눈만은 빛나고 있었다.

지난번이랑 비교했을 때 달라진 부분은 여기랑 여기야. 류청우가 종이를 손으로 짚어가며 옆 사람에게 바뀐 부분을 설명하는 목소리를 배경음처럼 들으며 그는 세트리스트를 눈으로 훑었다. 그가 찾는 건 세트리스트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옆자리, 그의 친애하는 예술가 친구는 궁금한 게 있는 모양이었다.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그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형, 유닛 조합이 제가 기존에 알고 있던 바와 달라진 듯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저와 형이 유닛을 이룰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유닛 변경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차유진은 놀라지 않았다. 사실 김래빈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유닛 변동에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차유진은 유닛 변경을 요청한 당사자였고, 다른 형들은 그가 왜 유닛 변경을 요청했는지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류청우는 김래빈이 가리킨 부분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음. 그랬지. 혹시 유닛이 바뀌면 곤란할까? 일단 저번 기획 회의에서 유닛 구성을 바꾸어도 되냐고 물었을 때 래빈이 네가 언제든 편하신 대로 바꿔도 된다고 해서 바꾸기는 했는데.”

오. 과연 리더. 김래빈이 꼼짝 못 할 것 같은 말을 골라 잘도 포장했다. 김래빈이 저 말에 안 된다고 할 리가 없었다. 그가 그렇게 예상하자마자 역시나 화들짝 놀란 김래빈이 고개를 크게 저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이제까지 누적된 콘서트 경험을 통해 형뿐만 아니라 저 역시 멤버 중 누구와 팀을 꾸려도 안정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음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아직 콘서트까지 시간이 충분히 남아있는 만큼 편곡 및 연습에 요구되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그룹에 보다 도움이 되는 변화라면 언제든 수용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네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믿어, 래빈아.”

청우가 온화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차유진과 김래빈의 유닛을 기정사실로 몰아가는 솜씨를 구경하면서 그는 속으로 킥킥 웃었다. 하지만 김래빈은 아직도 그 외에는 아무도 이 변동 사항에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전히 말이 길었다.

“하지만 저와 차유진의 무대가 콘서트의 구성을 변화시켜야 할 만큼의 이점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 헉! 혹시 제가 모르는 사정이 있습니까?”

글쎄.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한 류청우가 그를 돌아보았다. 짧은 눈빛이 오갔다. 유진이는 이걸로 괜찮지? 이어지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Yup. 고마워요. 부탁 들어줘서.”

김래빈은 한 발짝 뒤늦게 그를 바라보고, 류청우를 보았다가, 별말 없는 다른 형들을 한바퀴 쭉 둘러보더니,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저를 다시 돌아보는 입이 멀거니 벌어져 있었다. 그 안에 손가락을 콕 찔러넣는 상상을 하면서 차유진은 김래빈의 회의자료까지 주섬주섬 모아 류청우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유진이랑 래빈이 둘이, 서로 마음에 담아둔 게 있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충분히 풀 수 있을 거라 믿어.”

뻣뻣하게 굳은 김래빈의 어깨를 선아현이 부드럽게 도닥이며 응원의 말을 건넨 게 화룡점정이었다. 형들이 주섬주섬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고 둘만 남은 거실에서 김래빈이 삐걱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형들 다 알고 계셔?”

“다 알아. 나 김래빈한테 뭐 잘못했냐는 질문 많이 들었어.”

소리 없는 경악과 긴장, 자책이 어려있는 그 얼굴에 차유진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김래빈이 생각하는 바야 뻔했다. 형들께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와 연애한다는 사실을 형들에게 정식으로 밝힌 이후, 김래빈은 그들의 연애가 팀에 불러올 수도 있는 위험을 형들께서 감당해 주신 만큼 그들이 더 잘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으니까.

그랬다. 김래빈과 차유진의 연애 전선에 이상이 생겼다.

이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표면적으론 김래빈과 차유진은 여전히 사이가 좋았다. 단지 예전 같지 않은 부분들이, 반쯤은 일방적인 머뭇거림이 끼어들었을 뿐이다.

몇 년 동안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을 보아왔던 형들의 눈엔 고스란히 그 간극이 보인 모양이었다. 김래빈과 무대하고 싶다는 차유진의 말에 선선히 형들이 고개를 끄덕인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하지만 김래빈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왜 하필 유닛이야? 아무리 우리가 서로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개인적인 일로 그룹 전체의 계획을 바꾸는 건….”

아냐. 우리 이거 해야 해. 그는 부러 강한 어조로 상대의 말을 끊었다. 지금 당장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그의 심장과 직감이 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내일 쉬어. 김래빈도 내일 아침 스케줄 없어. 우리 선곡 그때 해.”

그냥 놔두면 언제까지고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표류할 게 분명해 그는 아직도 할 말이 많은 눈빛인 김래빈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더 말이 이어지기 전에 그의 방으로 도망치듯이 쏙 들어가면 머뭇거리는 발걸음이 방문 앞을 맴돌다 멀어졌다. 그 희미한 흔적에 귀를 기울이다 차유진은 제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분명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는데도 조금 심란했다.

‘무슨 일인지 말 못 하겠냐?’

이제까지의 일에서 그가 발휘한 능력을 익히 보아왔음에도, 박문대가 지나가듯 물었을 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스티어 때문이에요 하고 말하면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일조차 해결하려고 머리 터질 것처럼 고민하는 박문대가 무슨 생각을 할지 뻔했기 때문이었다.

‘내 문제에요. 김래빈 잘못 아니에요.’

대신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것만은 사실이었으므로.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약간의 자만을 섞어, 차유진은 김래빈과의 연애에서 제가 먼저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항상 자신만만했으니까.

“[정말 사람 일은 모를 일이네.]”

그는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먼저 자리를 뜬 쪽은 제 쪽인데 우습게도 감은 눈에 김래빈이 어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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