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추억

선곡과 편곡 방향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부터 회사 사람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하는 건 섣부른 일이었다. 그래서 김래빈과 차유진의 비공식적인 첫 번째 유닛 무대 회의는 테스타의 숙소, 류청우가 자리를 비운 차유진의 방 안에서 이루어졌다.

김래빈은 고지식하게도 노트북을 들고 왔다. 시력 보호용 안경 너머로 차유진을 바라보는 눈에 약간의 긴장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차유진은 턱을 괸 채 그 눈을 아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애정. 그리고 언젠가부터 덧씌워진, 아주 조금 빛바랜, 따스하지만 어쩐지 꺼림직한 무언가.

안경을 한 번 고쳐 쓴 김래빈이 입을 열었다.

“형들께서 염려하시는 바도 이해하지만, 일단은 콘서트 무대를 꾸리는 게 우선이니까 곡을 먼저 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불만 없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류청우를 비롯한 다른 형들에게 김래빈과 유닛을 하고 싶다고 말할 때부터 그에게도 생각해 둔 곡이 있었다. 그는 핸드폰 화면을 조작했다.

“나 아이디어 있어. 우리 이거 해.”

재생 버튼을 누르면 익숙한 곡이 흘러나왔다. 얼터너티브에 가까운 메탈 사운드에 서정적인 멜로디, 그리고 공백을 메우는 하울링. 둘이 유닛을 하게 된다면 언젠가 이 곡을 꼭 시도해 보고 싶노라고. 숙소에서 숨죽이며 속삭이던 때가 있었다. 스티어 시절의 일이었다.

김래빈이 핸드폰 화면에서 고개를 들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도 기억하는 게 분명했다. 차유진은 그 시선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김래빈 생각한 거 맞아. 우리 그때 이거 한 번도 못 했어.”

어쩌면 당연했다. 그 시절은 지금에 비해 그들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회사는 정해진 컨셉 이상의 모험을 하려 하지 않았고 외부 인력에게 부담스러울 법한 편곡 의뢰를 맡기는 것도 꺼렸다. 김래빈은 회사에 그렇다면 자신이 직접 편곡하겠다며 부탁도 해본 것 같지만 그게 받아들여질 회사였다면 애초에 데뷔 때부터 김래빈의 능력을 그런 식으로 경시하진 않았으리라.

제게 들이밀어진 핸드폰 화면을 얼마간 바라보던 김래빈이 나지막하게 흥얼거렸다. 기억에 있는 아주 오래된 멜로디와 꼭 같았다. 습관적으로 노트북의 패드 부분을 톡톡 두드리는 손끝이 어떤 식으로 편곡하면 좋을지 떠오른 게 분명해서, 안도를 담아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차유진, 하고 김래빈이 덧붙이기 전까진.

“이 곡이 좋은 곡인 건 맞아. 전체적인 콘서트의 컨셉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무대를 꾸리는 덴 문제 없어. 하지만 이 곡, 진짜 하고 싶은 거 맞아?”

눈치 없다는 소리를 종종 듣긴 해도 김래빈은 음악에 한해서는 퍽 예민하고 섬세했다. 사람을 잘 의심하지 않기는 해도 그 점을 믿고 거짓말을 하면 결국 언젠가는 들통나고 말 거다. 그래서 차유진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하고 싶었다. 지금도 하고 싶다. 그때나 지금이나 좋은 곡이었고 충분히 그의 취향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때도 둘의 무대에 그 곡을 올릴 생각을 했지. 하지만 온전히 무대와 콘서트만을 고려해서 고른 노래는 아니었다.

“하고 싶은 거 맞아. 필요하기도 해.”

그가 할 수 있는 답이라곤 그게 최선이었다.

차유진. 그를 부른 김래빈이 노트북을 덮었다. 조심스레 깍지 낀 손이 그 위에 얹혔다. 상대는 말을 고르고 있었다. 둘 중 하나였다. 그가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쉽게 고치는 방안을 생각 중이거나, 아니면 팬들마저 김래빈이 허물없이 대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으로 꼽는 차유진에게조차 쉽게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접근해야만 할 내용이거나.

“그 시절이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과거라고 해도, 테스타로서 올라야 할 콘서트 무대에 스티어 시절에 우리가 무대에 올리자고 약속한 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곡을 선정하는 게 과연 적절한지도 의문이 들지만,”

“김래빈이 그랬어. 그 노래 콘서트 올리는 데 문제없다고.”

“그건 맞지만…! 아니,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차유진! 나는 네가 자꾸 스티어 시절을 떠올리는 걸 걱정하는 거야.”

저번부터 이상하게 굴고 있잖아, 너. 안경을 벗은 김래빈이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손가락을 타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가닥가닥 가라앉았다. 차유진은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눈치 꽝인 김래빈이 알아챘다는 점부터 이미 말 다 한 셈이었다.

“우리가 지금 연인 사이인 만큼 네가 내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쓰이리라는 점은 이해가 가. 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도 지금 네 처신은 좀 지나친 감이 있어!”

그때 일은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김래빈이 덧붙인 말에 그의 입술이 슬그머니 튀어나왔다.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그를 염려하는 게 역력한 목소리로,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다는 것이 뻔히 보이는 그 표정으로 던지는 게 결국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라니.

“몰라. 그치만 신경 쓰여!”

무언가 야속했다. 그런데 김래빈의 말이 크게 틀린 게 아니란 걸 알아서 그 이상으로 무얼 말하기도 어려웠다. 차유진도 알았다. 그가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걸. 평소의 그 같았다면 진작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의 우리에겐 아무 문제 없으니까 괜찮다고 선을 그었으리라는 걸.

하지만 자꾸 돌아보게 되잖아. 스티어의 너를, 테스타의 내가.

기어코 다시 원점이었다. 차유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그가 박문대의 앞에서 말하지 못했던, 그간 있었던 김래빈과 그 사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기억이란 참 이상했다. 분명 제 것인데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같은 시절을 공유하는 이상 그때부터는 제 손을 떠나버린다. 차유진에겐 스티어 시절이 그랬다. 아주 옛날의 일처럼 꿈처럼 묻어버리고 싶었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추억.

그래서 차유진은 류청우가 기억을 찾은 게 반갑지 않았다. 박문대까지는 괜찮았다. 어차피 그는 그룹 바깥의 사람이고 그룹 안에서의 일은 그만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류청우가 깨어나며, 배세진의 승리를 축하하며, 김래빈이 엉겁결에 스티어 기억을 되찾으며 차유진은 원하지 않아도 스티어 시절을 반복해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어질 일은 뻔했다. 오랜 친구를 만나 추억을 되새길수록 희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점점 자세해지는 것처럼 그가 원하지 않아도 한번 실체를 가지게 된 스티어는 점점 뚜렷한 형상으로 자리 잡았다. 기억으로도, 감정으로도.

“김래빈.”

여전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차유진은 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렸다. 피로로 졸도했던 김래빈이 막 깨어나고 스티어가 다시 스티어의 이름으로 식탁에 앉았던 날이었다. 형들은 형들끼리 대화하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아 거실을 넘겨주고 박문대가 촬영으로 자리를 비운 방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속삭였던 그때.

‘김래빈 그때 왜 나한테는 말 안 했어?’

박문대가 했던 몇 마디 말로도 그가 한국에 없는 사이 김래빈에게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는 걸 눈치채는 데는 충분했다. 류청우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에게는 서곡의 가사가 있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세세하게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만은 껄끄러운 가시처럼 걸리적거렸다. 그 희미한 거북함을 김래빈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당황한 얼굴로 허우적거리더니 이상한 이야기나 하는 걸 보면.

‘혹시 내가 여전히 스티어 때의 일에 영향을 받아 내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는 게 걱정이라면…’

‘김래빈 바보야?’

그런 건 하나도 걱정되지 않았다. 그의 곡과 무대가 보여준 성장이 아니더라도 김래빈은 걱정을 거듭해 가며 기어코 제 몫을 찾아 해낼 성정이었다.

‘김래빈 곡 멋졌어! 김래빈 성공적으로 극복한 거 나 느꼈어. what I mean, 난…’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지면 언제나 그랬듯 말은 토막토막 끊어져 흘렀다. 말하면서도 어렴풋하게 이걸 이제야 와 따져 묻는 게 퍽 얼간이 같은 짓이라는 건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무대를 포기할 만큼 힘들었다면 나한테 한 번쯤 연락할 수도 있는 거였잖아. 때에 맞지 않는 투정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김래빈 내 연락처 잊어버렸어?’

그런 한심한 말까지 흘러나오고 나서야 김래빈은 그가 뭘 묻고 싶은지를 파악한 모양이었다.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김래빈은 차유진의 초조함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너에게 연락하지 않은 데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 차유진. 그냥 연락할 만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안 한 거야.’

김래빈은 도리어 의아한 얼굴이었다. 이어 던져진 말을 차유진은 잊지 못한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김래빈의 호기심이 결국 가 닿고야 만 질문, 의도치 않았을 게 분명한데도 그 무엇보다도 단호하게 그와 상대의 사이에서 다정한 단절을 긋던 그 의문을.

‘그러면 차유진, 너는 내가 그때 네게 연락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왜?’

그러게.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때 우리는 결국 친구 이상은 되지 못한 사이었는데.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것마저도 도망치듯 김래빈의 방을 나오고 나서 아주 뒤늦게야 든 의문이었다. 분명한 건 차유진은 그때 김래빈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거다. 아무것도 아닐 법한 일로. 그날부터 그를 대하는 태도가 형들이 눈치챌 만큼 교묘하게 삐걱대고 어색해질 만큼.

하지만 계속 그렇게 지내고 싶진 않았다. 차유진은 오랜만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결론은 한 가지였다.

“내 생각에 우리 이 무대 해야 해. 나 김래빈 도움 필요해.”

스티어와 관련된 문제는 표면적으론 전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류청우와 김래빈도 다시 돌아왔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배세진 역시 스티어라는 과거를 그럭저럭 받아들인 모양이니까. 그가 겪었던 실패의 경험 역시 시원한 깨달음과 희미한 희망을 남기고 사라졌다. 해결법은 간단헀다. 무대는 무대로, 노래는 노래로.

하지만 엇나간 감정과 멀어졌던 관계에 대해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티어 시절의 김래빈과 차유진은 서로를 좋아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잘 되지 못했음. 지극히 단순한 이 문장은 그 아래 가려진 수많은 시간과 일들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그만큼 오래된 사이였고, 서로가 소중해 더 어려웠다.

마음을 접지도, 마음껏 표현하지도, 제대로 끝맺지도, 하물며 잊지도 못했던 미적지근하고 애매한 관계. 그가 제일 싫어하는 어정쩡한 결말. 그렇게 꼬이고 꼬인 매듭이 하나 남아있었다.

“못된 차유진 그때 무대 하고 깨달았어. 그거랑 똑같아. 나 김래빈이랑 하고 싶었던 거 해봐. 그러면 알 수 있어. 그게 이 노래야.”

그게 차유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모르겠다. 그때 못 했던 걸 다 해본다고 일이 잘 풀릴지는. 꼬인 실을 풀다 보면 뭐가 나올지 모르는 것처럼 어떤 기억들은 추억으로만 남겨두는 게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차유진은 해보기로 했다. 그때 해보지 않아서 후회한 곡, 그때 하지 않아서 후회한 말. 그의 직감이 그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답이 아닐지라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라도 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김래빈을 보며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지금의 김래빈과의 관계 역시 그에겐 소중했으니까.

그는 김래빈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노트북 덮개를 들어 올리고 노트북을 돌려 김래빈이 열어두었던 메모장에 직접 곡 제목을 적었다. 그대로 눈에 힘을 주면 입매가 고집스러운 선을 그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그래. 그럼.”

김래빈은 여전히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마우스가 저장 버튼을 눌렀다. 곧 그들이 정한 곡 제목이 테스타와 회사 직원들에게 전달되었다.

페이지: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코멘트

답글 남기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