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추억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라 했다. 초동이 60만 장 팔렸어도 회사의 기대치에는 못 미친 모양이었다. 그래도 데뷔였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는 안도와 그렇게 바라던 무대에 선다는 기쁨으로 차유진은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회사의 으름장 섞인 격려를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냈다. 

그래도 괜찮을 때였다. 멤버들 사이는 간혹 삐걱거렸고 류청우는 서서히 주변에 사정없이 금을 그어두곤 조금만 넘어가면 쏘아져 나가는 차가운 화살처럼 굴었지만 그래도 다들 눈에 희망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차유진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그랬다. 제각각의 욕망과 꿈이 떠들썩하게 혹은 아주 조용히 전시되는 가운데 그의 바람은 언제나 명확했다. 무대, 기왕이면 콘서트!

‘김래빈은 기대 안 해?’

‘물론 기대하고 있어! 우리는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콘서트를 스티어의 곡으로 전부 채울 수는 없겠지만, 반드시 우리의 곡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색을 보여줄 수 있는 방도는 무궁무진할 거라고 봐.’

같은 소속사 출신, 동갑, 아주사 때부터 여러 번 무대를 같이 해 결국엔 1등과 2등으로 나란히 스티어로 선발된 사이. 그의 룸메이트는 자연스럽게 김래빈으로 정해졌다. 3명이 함께 지내는 방은 피했지만 막내들이라는 이유로 가장 좁고 좋지 않은 방이었다. 그만큼 침대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서 마치 연습생 때처럼 밤을 새워가며 이야기를 하기에 좋았다. 스케줄을 소화하고 녹초가 되어 늘어지면서도 둘은 틈이 날 때마다 머리를 모으고 속삭였다.

목소리를 높일 순 없었다. 류청우는 ‘떠들지 말라’고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공동생활에서 남에게 피해를 줄 만한 일’에는 엄격했으니까. 물론 차유진이야 겁먹지 않았지. 문제는 김래빈이었다. 김래빈은 그가 조금만 류청우가 그은 선을 삐져나갈 것 같으면 당사자보다 더 질겁하면서 그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니 좀 갑갑해도 목소리를 낮출 수밖에.

‘그럼 김래빈 나랑 무대 해.’

‘너랑 나는 같은 그룹이니 당연히 무대도 같이 할 텐데, 대체 무슨 소리야?’

‘유닛!’

그걸 우리끼리 정할 순 없어. 고지식하게 말하면서도 김래빈 역시 설렌 얼굴이었다. 꼭 지금이 아니더라도 콘서트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유닛으로 묶일 때도 있을 거다, 미리 준비를 해서 나쁠 건 없다. 차유진은 그런 이유를 한국어로 토막토막 쏟아내며 상대를 부추겼다. 홀랑 넘어간 김래빈이 하고 싶은 곡을 쏟아내는 건 금방이었다.

‘이거 너무 마이너해!’

‘차유진, 네가 춤에 자신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유닛 무대라는 건 무대를 꾸리는 다른 멤버의 사정을 고려해 가면서 곡을 골라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해.’

둘 다 무대에 대해서라면 서로 욕심이 뒤지지 않았다. 아직 결정되지도 않은 무대로 별걸 다 가지고 투닥대는 와중에도 어느 순간엔 어김없이 취향이 겹쳤다. 이 곡이 좋다고, 동시에 말하고 웃어버렸던 그 순간에는 나눠 낀 무선 이어폰에서 비트와 선율이 강렬하게 서로를 가로지르는 곡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곡을 고른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회사에서는 그들이 소화해야 할 곡을 이미 다 정해둔 상태였다. 유닛 역시도. 기획 회의에서 그들이 입을 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김래빈은 저도 아쉬워하는 게 눈에 보이는 얼굴로도 그를 달랬다. 그들이 앞으로 회사에 더 기여를 해서 발언권이 세진다면 그때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적어도 5년간은 항상 같이 있을 테니까, 언제라도 가능해.’

글쎄. 차유진은 어렴풋하게 그게 쉽지는 않으리라고 예감했다. 그래도 그들은 틈이 나면 가끔씩 곡을 다듬었다. 김래빈이 음률을, 차유진이 안무를.

“이 부분을 이런 식으로 바꾸면….”

“그거 맘에 들어!”

“좋아.”

연습실에는 둘 뿐이었다. 개인행동을 금지하고 통금시간을 두었어도 류청우는 둘만 연습실에 남아 조금 더 몸을 풀다 가겠다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구간 반복, 재생, 멈춤, 다시 구간 반복. 연습용으로 어렵게 받은 휴대폰을 조작하던 김래빈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회사도 저 재능을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쩨쩨하게 굴까. 그 허밍에 귀를 기울이다가 차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 하고 부르고 덥석 손을 잡아 일으키면 영문도 모르고 끌려 일어선 김래빈이 안면에 물음표를 띄웠다.

“우리 거짓말 안 해. 그러니까 스트레칭!”

그대로 상대의 팔을 잡아 등 뒤쪽으로 고정하고 다른 팔꿈치로 등 중앙을 눌러 쭉 늘려주면 곡소리에 가까운 신음이 김래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몸을 푸는 걸 핑계 삼았으니 간단한 스트레칭이라도 하고 가는 게 나았다. 내일도 연습이 예정되어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갑자기 그러면 놀라잖아!”

그에게서 풀려난 김래빈이 어깨를 살살 돌려보며 항변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럼 말하고 해. 김래빈씨 앞으로 쭉~ 숙여요!”

트레이너의 말버릇을 따라 하며 이번엔 상대의 팔을 앞으로 쭉 잡아당기면 김래빈은 떨떠름한 얼굴로도 순순히 허리를 숙이며 몸을 늘렸다. 땀에 젖었던 연습복 상의가 그의 상체에 휘감기듯 달라붙으며 배 아래가 훤하니 드러났다. 무심코 팔부터 허리까지 일자로 쭉 이어지는 선을 눈에 담다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래빈, 오늘 굶었어?”

“? 아니?”

원래도 저에 비해 좀 비실거리는 게 아닌가 생각은 했지만, 오늘따라 아무리 봐도 보통 남자애들보다는 좀, 얇았다. 그러니까, 허리가.

차유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의 남자애들 허리둘레를 가늠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냐마는 풋볼팀에 들며 본의 아니게 목격한 몸들을 떠올려 보면 역시나 김래빈은 좀 가늘었다. 풋볼팀이 운동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을 고려하고서라도.

‘과장을 조금만 더 하면 내 손으로도 다 덮이겠는데.’

그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는 김래빈의 등 위로 제 손을 슬그머니 쫙 펴고 제 손과 상대의 허리를 번갈아 들여다보았다. 참 새삼스러운 감상이었다. 김래빈과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연습이며 숙소며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상대의 벗은 몸에도 금방 익숙해지게 되어 있는데도.

어쩐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내 차례야, 하고 외친 차유진은 상대를 힘으로 일으키고 이번엔 제가 냅다 허리를 푹 숙여버렸다. 광대부터 귓가까지 미미하게 치솟는 열은 눈치채지도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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