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추억

그는 연습실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환한 조명에 눈이 부셔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눈이 부신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의 신경은 온통 어쩌다 떠올려버린 기억에 쏠려 있었으니까.

‘흠. 이런 걸 한국 속담으로 뭐라고 했더라?’

하여튼 뭐가 어둡고 그랬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끝내 떠올리지 못한 차유진이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김래빈을 연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좀 어이없었다. 연애를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스티어 시절의 자신은 그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허리라….’

차유진은 조금 더 생각해 본 뒤 20대 초였을 그때의 자신에게 발랑 까졌다는 평을 추가했다. 물론 김래빈의 허리선은 퍽 예쁘고, 이건 그가 김래빈과 내밀한 사이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주관적인 감상을 제외해도 그들의 팬들 역시 동의할 만큼 보장된 사실이었지만….

“이건 내가 이겼어.”

적어도 이번의 그는 자기 마음도 모른 채 불순한 호감부터 품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 중얼거렸다. 편한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채 막 연습실로 들어오던 김래빈이 그 말을 고스란히 들어버릴 줄은 모르고.

“뭐가 이겼는데?”

어리둥절한 얼굴로 절 내려다보는 김래빈에게 고개를 대충 저은 차유진은 몸을 일으켰다. 편곡은 얼추 끝났으니 이제 안무를 확정해야 할 때였다. 김래빈을 연습실로 부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김래빈은 한 며칠 편곡팀과 뚱땅뚱땅하는 것 같더니 곡이 결정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금세 편곡을 들고 왔다. 물론 전체적인 방향이야 스티어 때 의견을 주고받았던 게 있어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혀있었겠지만, 테스타의 상황에 맞춰 새롭게 고려해야 할 점이 있을 텐데도 이 정도의 속도로 곡이 완성되었다는 건 경이로운 일이었다.

‘김래빈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지.’

그는 음악을 틀고 있는 상대를 흘긋 바라보았다. 기죽을 건 없었다. 자신은 그 속도에 맞춰 안무를 멋지게 짜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김래빈 파트야. 잘 봐.”

음악을 틀고 첫 음이 흘러나오기 직전의 짧은 정적을 팔을 쭉 뻗어 가른다. 씩 웃은 차유진은 흘러나오는 첫 음에 맞춰 발을 굴렀다.

테스타의 안무만큼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상하지는 않았다. 댄스 멤버가 충분히 받쳐줄 수 있는 그룹 활동과 댄스가 주력이 아닌 멤버와 맞춰가야 하는 유닛 활동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난이도 높은 동작을 연이어 하는 대신 그는 분명한 포인트를 성글게 엮어냈다. 김래빈은 던져진 여백을 알아서 채울 수 있는 사람이라 얼마간은 공백이 있어도 좋았다. 곡이 끝나고 돌아보며 박수를 짝, 치면 한껏 집중한 미간이던 김래빈이 방금 본 안무를 느릿느릿 더듬는 얼굴을 했다.

“방향 바꾼 게 나아?”

“난 이쪽이 나은 것 같아. 거기서 네가 이렇게 치고 오는 거지?”

“응. 그럼 더 좋아져. 테스트 해보고 괜찮으면 이걸로 해.”

그는 미리 비치해 둔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김래빈은 조금 버벅거렸지만 대략적인 움직임만은 어떻게든 따라 해냈다. 화면상으로 확인한 그들의 동선은 썩 나쁘지 않았다.
김래빈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최종 안무가 결정되었다. 안무가와 한 번 더 이야기하는 과정은 거쳐도 여기까지 오면 거의 확정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김래빈은 온 김에 조금 더 연습하고 싶은 모양이었고 그는 김래빈이 아직 제대로 익히지 못한 동작을 하나씩 끊어가며 다시 설명했다.

“김래빈 외웠어?”

“….”

“하다 보면 외워!”

그 뒤부턴 뭐, 익숙한 무한반복이다. 안무 기초 역시 스티어 시절에 다 다듬었지만 안타깝게도 춤은 몸의 기억이라 되돌아온 기억이 크게 소용이 없다. 그룹 곡에 비해서는 쉬운 안무라고 해도 둘이서 넓은 무대를 존재감 있게 채워야 하는 만큼 움직여야 하는 범위는 오히려 더 넓었다. 동작을 끊어 익히고 차유진과 동선을 몇 번 맞춰보는 걸로도 김래빈은 벌써 숨이 가빴다.

“쉬어?”

“조금만.”

뚝뚝 흐르는 땀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낸 김래빈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물을 들이켰다. 그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차유진은 세운 무릎 위로 대충 팔을 걸쳤다.

“김래빈 이번 곡 평소랑 느낌 달라.”

그는 자신이 작곡에는 재능이 별로 없다는 걸 이미 오래전에 인정했다. 취미 삼아서 했던 작곡 캠프를 몇 차례 거치며 머리에 있는 음악을 음표로 뽑아내는 방법은 곧잘 익혔지만 그 멜로디들이 하나의 곡으로 완결성을 얻도록 세심하게 조정하고 조합하는 일은 그의 성미에는 썩 맞지 않았다.

그래서 차유진은 이번 김래빈의 편곡을 들으면서 느낀 감상을 작곡가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했다. 다행히 김래빈은 그가 난데없이 던지는 말을 해석하는 데에도 충분히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귀가 좋네, 하고 대꾸해왔다. 어조는 한껏 점잖지만, 자꾸 들썩대는 눈썹과 눈 끝에 맺힌 웃음으로 그는 김래빈이 은근히 신나있음을 깨달았다.

“편곡 방식을 조금 바꾸어 보았어! 이제까지 시도해 본 적 없는 스타일이어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곡과 잘 어우러진다는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어.”

그 뒤로 김래빈이 한껏 떠드는 내용은 언제나 그랬듯 적당히 흘려들었다. 그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전문용어 사이에서 인지하는 건 김래빈이 본인의 성취를 은근히 뿌듯해한다는 것, 그래서 신났다는 것, 김래빈의 곡이 끝내준다는 감상 정도다. 거기서 끝났으면 참 좋았을 텐데.

“기억이 되살아난 김에 스티어 때의 경험을 접목시켜 본 게 아무래도 가장 큰 영향이겠지. 당시의 AR팀이나 외부 전문가들은 아무래도 지금과 구성원이 달랐으니까.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내가 감히 평가할 순 없겠지만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협업을 해봤던 경험이 이번 일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

스티어. 다시 그 이름이 끼어든다. 더없이 즐거워하는 목소리로.

김래빈은 그 시절의 일을 완전히 소화했다. 그 사실이 이제야 그에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김래빈에게 그 시절의 일은 오롯이 그 시절의 일일 뿐이며 후회 대신 그 시간을 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너는 정말로 괜찮구나.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서러움이 난데없이 차올랐다. 나는 자꾸 여기서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는데 너는 어떻게 혼자 앞서갈 수 있어? 그 책임을 김래빈에게 묻는 게 비겁한 일인 걸 알면서도 차유진의 눈썹이 불만스러운 선을 그렸다.

“김래빈은 미련 없어?”

“! 물론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다듬고 싶은 부분은 있긴 해.”

“그거 말고. 스티어.”

바보, 하고 덧붙이면 습관적으로 발끈한 김래빈이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팔을 순간 잡아당겨 일부러 균형을 흐트러뜨린 차유진이 제 쪽으로 휘청 기운 김래빈을 끌어안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잡아당기면 위험하잖아!”

냅다 끌어당긴 행동에 짧은 타박을 던진 김래빈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유진은 그를 힘주어 안고는 여기저기 이마며 콧날을 갖다 박았다. 마치 어리광 부리듯이.

“김래빈.”

“왜.”

노래나 랩을 할 때와도, 그와 티격태격할 때와도, 회사 직원이나 형들과 말할 때와도 다른, 그 잔뜩 누그러져 부드러운 목소리는 애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조금만 쉬자고 하는 걸 이렇게 잡아당겨 드러누웠는데도 조금만 어리광 부리는 것만으로도 별 재촉 안 하는 것도. 그는 제 몸 위에 편하게 사지를 늘어뜨린 채 땀에 젖었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김래빈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김래빈은 스티어 차유진 원망 안 해?”

김래빈의 손이 멈추었다. 잘 보이지 않아도 상대의 얼굴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건 분명했다.

“내가 너를 미워했으면 하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는 착잡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제 위에 올렸던 김래빈을 조심스레 옆으로 옮기면 덩달아 허리를 세워 앉은 김래빈의 시선이 아까보다는 비슷한 높이에 있었다. 혼란에 빠진 그 얼굴을 차유진은 손으로 톡톡 건드렸다. 김래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지금은 분명 그를 보고 있지. 가끔은 아니었지만.

김래빈은 기억을 되찾은 뒤로 그를 보면 언뜻 흐리고 애틋한 눈빛을 했다. 그게 뭔지 차유진은 알고 있었다. 워터밤 직후에는 그도 어쩔 수 없이 김래빈을 보며 그런 눈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정말 그 시절을 기억하는 건 자신뿐인 건지. 스티어의 김래빈이 여기의 그들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현재의 김래빈을 보며 희미한 기억을 곱씹어봐야 할 정도로 별수 없이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 눈과 똑같았다. 과거를 보는 눈. 제 위에 스티어 차유진을 덧씌워 바라보는 멀고 먼 시선.

처음엔 그 눈빛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당연했다. 걔가 뭐라고 날 보면서 그런 눈빛을 해. 나는 바보처럼 굴던 그때의 차유진이 아닌데. 하지만 그런 불만도 잠깐이었다. 그는 남에게 오래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김래빈 잘못 아니야.’

금방 알았다. 문제는 저였다. 정확히는 김래빈이 절 좋아하는 걸 모른 척하고 때때로 호의로 건네진 손길에마저 날을 세웠던 그때의 차유진이 문제였다. 그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우니 자격지심처럼 김래빈이 그때를 떠올리는 게 내키지 않았던 거다. 이를 악물고 제 한심함을 인정하자 그때는 보이지 않던 의문이 남았다. 절 보는 김래빈의 눈에 아주 조금이라도 비난이나 서러움 같은 게 있었던가?

‘이상하잖아. 김래빈이 스티어 차유진한테 아무런 원망이 없다는 건.’

그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분명히 서운한 게 있을 텐데. 아깝거나 섭섭한 것도 있을 텐데. 김래빈이 제게 던지는 애틋한 시선에는 일말의 원망도, 서러움도 없었다. 차유진은 그게 무서웠다.

김래빈은 기본적으로 아주 바르고 선한 인간이기는 해도 성인군자는 아니며, 미움과 원망은 때때로 기대와 애정 같은 말들과 동치된다. 그러니 김래빈이 스티어 시절의 저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제가 모르는 그 빈 시간 어딘가에서 그가 미련을 버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차유진을 좋아했던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렸던가.

그런 가정을 떠올리면 자꾸만 불안했다.

‘김래빈 그럼 지금은 스티어 차유진 안 좋아해?’

그래도, 아무리 그가 김래빈을 좋아해 치기 어리고 꼴사납게 굴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대신에 차유진은 말을 돌렸다. 원래 하고 싶던 말이랑 크게 다르지 않고 어쩌면 엇비슷하게 꼴사나운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언젠가 제가 저 말을 고스란히 뱉어버릴 것 같아서.

“스티어 때 김래빈 나 좋아했어. 그때 나 그거 알았어.”

“…알고 있었어?”

“응. 그래서 나 신경 써. 그때 나 김래빈 마음 모른 척 했어. 그러니 김래빈은 b-a-d 차유진 원망해도 돼.”

일부러 반 음절씩 길게 늘여 말하는 걸로 스티어 때의 저와 마음의 거리를 성큼 벌리며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김래빈은 조금 오래 생각하는가 싶더니 그와 똑같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는 무심코 그 입술에 짧게 입맞췄다. 땀 냄새가 스치고 짠맛이 느껴졌다.

“차유진 네가 뭘 염려하고 있었는지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운데….”

“고마운데?”

그는 갓 한국어를 배울 때처럼 김래빈의 말 끄트머리를 따라 했다. 김래빈이 슬핏 웃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조차 잘 모르는 얼굴로.

“역시 그때의 네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본의 아니게 내 감정을 무시하는 방향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때의 너에게는 그게 아마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으니까. 진지하게 대답해 준 김래빈은 돌려주듯 그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하더니 예정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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