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가 자리를 비우면 소소하게 이런저런 사고를 터트리곤 하는 멤버 사이에서 일단 붙여놓으면 자기들끼리 별 사고 없이 놀거나 뚱땅거리는 막내들이란 손 덜 가는 한 묶음 취급받는 법이었다.
연습하고 있으라며 연습실에 덩그러니 그들을 데려다 놓고 바쁘게 전화하며 사라진 매니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에게 붙은 새끼 매니저는 썩 성실한 사람은 아니어서 일부러 바쁜 척 자리를 비우고 노닥거릴 때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닫힌 연습실 문을 멀뚱히 바라보다가 스트레칭에 돌입한 김래빈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그는 옆에서 박자 맞춰 함께 몸을 풀다 짧게 코웃음을 쳤다.
“김래빈 신경 너무 써.”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역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최근 회사는 묘하게 어수선했고, 류청우 역시 바쁘게 회사에 불려 다니는 걸 보면 무슨 일이 터지기는 한 모양이니까. 그래도 지금 당장 그가 손댈 수 있는 건 없어서, 대체로 낙천적인 성격의 차유진은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바로 춤 연습 말이다!
“오늘은 뭐 틀어?”
“음…. 우리 항상 하던 거.”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익숙한 곡들을 연달아 플레이리스트에 올렸다. 서바이벌로 만들어진 그룹에는 체계가 없었고, 연습 루틴에서도 자율성이 강조되었다. 말이 자율성이지 반쯤은 방임이었다. 그래서 차유진은 김래빈과 연습할 때는 그냥 옛날 연습곡을 그대로 썼다. 그나마 둘은 같은 소속사 출신이라 이제까지 서로 맞추고 익혀온 소속사 특유의 루틴이 있어 괜찮았지만, 다른 멤버와 연습할 때는 서로 고유의 방식과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많아 솔직히 좀 답답했다.
“매니저 형 늦으시려나 봐.”
익숙한 연습곡들로 한 바퀴를 돌릴 때까지도 매니저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계를 확인한 김래빈이 고개를 갸웃하고 땀에 젖은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뒤부터는 제멋대로였다. 그들의 곡, 해보고 싶었던 곡, 유행하는 곡 등이 기준도 없이 하나씩 끌려 나왔다.
“우리 이거 해!”
“이거 한 번도 연습 안 해본 노래잖아?”
그래도 해. 차유진은 우겼지만 제대로 익히지도 않은 채 영상만 보고 어설프게 안무를 따 냅다 시도해 본 곡은 엉망이었다. 서로 동선이 꼬여 제게 된통 엎어질 뻔한 김래빈을 겨우 붙들다가, 당황해 뻣뻣하게 굳은 그 얼굴을 보고 그는 그만 웃어버렸다.
“김래빈 표정 웃겨!”
“…친구가 당황한 모습을 보고 그렇게 웃으면 안 돼!”
버럭 소리를 지르는 김래빈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툭툭 털어주며 그는 여상하게 농담을 던졌다. 김래빈 나한테 돌격했어. 나 김래빈 나한테 키스하는 줄 알았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처음 방향이 틀린 건 차유진 네 쪽이잖아! 그리고 돌격이라는 표현은 그런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아!”
김래빈의 반응도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익숙하게 티격태격했다는 소리다. 그래서 김래빈이 뒤늦게 제 입술을 흘끔 봤다가 귓가가 빨개졌을 때 차유진은 처음엔 제가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두 번 세 번 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서 그게 아님은 금방 눈치챘지만.
“김래빈.”
“왜?”
너 나 좋아해? 차유진은 묻지 않았다. 대신 다시 한번 상대에게 고개를 훅 들이밀며 팔로 연습실 거울을 턱 짚었다. 거리가 훅 가까워졌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사람 지나가는 길목을 막는 거야?”
김래빈은 질겁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설레는 얼굴도, 두근거리는 느낌도 아니었다. 눈썹을 기상천외하게 움직여 당황을 표현하는 얼굴은 굳이 따지자면 떨떠름함과 익숙한 체념 사이 어딘가에 더 가까웠다.
‘이게 아닌가?’
갑자기 헷갈리는 느낌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기야 방에서 게임할 때는 이거보다 더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더 확인할 수 없었다. 이상하네. 나는 이런 쪽의 직감은 틀린 적이 없는데. 그는 길을 막았던 팔을 떼어 항복의 표시처럼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며 뻔뻔하게 입을 놀렸다.
“장난 아니야. 나 그냥 김래빈 얼굴 자세히 봤어.”
“내 얼굴?”
뭐라도 묻었나. 김래빈이 미심쩍은 얼굴로 소매를 들어 제 얼굴을 슥슥 문지르는 걸 그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이렇게 보면 목이 좀 벌건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연습을 열심히 해서인 것 같기도 하고. 역시나 알 수 없었다. 알쏭달쏭한 느낌에 심술이 올라 그는 짖궂은 얼굴을 했다. 김래빈 지금 얼굴 바보 같아. 여유롭게 덧붙이면 상대는 잔뜩 약 오른 얼굴을 했다.
그날 이후로도 차유진은 김래빈을 종종 떠보았다. 어떤 날엔 김래빈의 시선이 차마 그를 향하지 못해 여기저기 헛돌았고, 어떤 날엔 장난치지 말라는 듯 그의 등짝을 퍽퍽 쳤다. 긴가민가한 추측이 매일매일 바뀌었다. 김래빈이 그를 좋아하는지 아닌지, 그런 사소한 일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그도 김래빈에게 호감이 있다는 증거인 줄도 모르고.
정작 확신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생겨났다. 김래빈을 떠보려는 그의 시도를 비웃는 것처럼, 정말 의도치 않은 일로부터.
“차유진. 자?”
그를 부르는 소리가 설핏 들렸다. 그는 반쯤 잠들어있었다. 이동 중인 벤 안에서였다. 잠자리를 가릴 만큼 까다로운 성격도 아니었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에게 배정된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해내려면 항상 잠이 부족해서 그는 어디든 머리만 붙이면 잠에 들곤 했다.
그의 몸 위에 무언가 따뜻하고 포근한 게 덮이는 느낌이 났다. 아마 김래빈이겠지. 차에서 잠드는 건 차유진뿐만이 아니었고 그런 멤버들을 위해 벤 안에는 항상 담요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는 잠결에도 쉬이 손길의 주인을 짐작하곤 무심결에 웃었다.
손가락이 뺨에 가볍게 닿은 건 그 다음이었다. 스치듯 지나쳐간 그 감각에 처음 그는 제 머리카락이 잘못 닿은 줄 알았다. 한 번 더 온기가 닿고,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간질거림이 지긋이 뺨에 닿은 다음에야 그는 제 얼굴을 누군가 어루만지고 있음을 알았다. 잠을 깨우지 않으려는 듯 아주 살금살금, 미련을 덧그리듯 꽤 오래.
‘김래빈 정말로 나 좋아하는구나.’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 오히려 잠이 확 깨버렸다. 차유진은 눈을 감은 채 애써 자는 척하며 확신했다. 더는 헷갈리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것도, 조금 난감한 것도, 입가나 목이 간지러운 것도 같았다. 동시에 그는 수긍했다. 나도 김래빈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다른 이가 그처럼 굴었다면 깨지 않은 척 손길을 즐기는 대신 딱 잘라 선을 그어버렸을 제가, 김래빈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두근거리는 정도라면 말 다 했지.
그는 아주 살짝 눈을 떴다.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김래빈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낯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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