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을 밀어 스크롤을 내리던 차유진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연미복에 가까운 정장을 차려입은 김래빈과 그가 화면을 보며 테스타 특유의 제스쳐를 하고 있었다. 진성 승부 때네. 그는 어렵지 않게 기억을 되살렸다. 냅다 셀피를 들이밀었지. 김래빈은 처음 몇 컷은 당황해 제대로 포즈를 취하지 못하더니 아이돌답게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물론 허둥지둥하는 김래빈의 사진도 핸드폰에는 제대로 남아있었다.
“이건 콘서트 연습 사진이 아닌데. 조금만 위로 올려보자.”
옆에서 이세진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콘서트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슬슬 콘서트 준비하는 사진을 추려 공식 계정으로 스포 겸 홍보를 하자는 이세진의 주장은 무리 없이 회사의 승인을 받았다. 사진 솜씨라면 박문대가 제일이기는 했지만, 테스타는 서로 돈독해 꼭 박문대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사진을 곧잘 찍었다. 당연히 차유진의 핸드폰에도 사진이 제법 있었다. 다시 연습 때의 사진을 찾으면서 그는 입술을 가볍게 삐죽거렸다.
“우. 어차피 유닛 스포 못 해요. 사진 얼마 없어요.”
멤버가 일곱 명이어도 근 7년을 활동했으니 어지간한 유닛 조합은 이미 다 나왔을 텐데. 그래도 콘서트 세트리스트는 항상 첫 콘서트까지는 비밀인 법이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유닛이며 세트리스트 궁예에 한창 즐거워한다는 팬들 소식을 들은 게 바로 얼마 전이었으니, 그와 김래빈이 막내즈라는 이름으로 붙어 다니는 모습이 팬들에게 아무리 익숙한들 아직은 조심하는 게 좋았다.
“그치~ 그래도 그 사진만 올릴 것도 아니고, 너희 유닛도 한 장 정돈 섞어 올려야 팬들이 콘서트 끝나고 다시 찾아봤을 때 즐겁지 않겠어?”
그건 맞는 말이었다. 차유진은 김래빈과의 사진을 포함해 시간 맞는 멤버끼리 연습할 때 기념 삼아 찍었던 사진을 고스란히 이세진에게 넘겨주었다.
“오. 우리 유진이도 날이 갈수록 사진 실력이 늘어난단 말이야~”
태그를 어떻게 달아 올리는 게 좋을까, 고민하던 이세진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다른 멤버에게 향하는 걸 보다가 그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려 사진첩을 눌렀다. 김래빈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자동으로 분류되는 폴더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폴더 옆에 적힌 숫자가 제법 많았다.
‘많이 찍었지.’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꼭 애인이라서는 아니었다. 그들은 데이트하는 사이가 되기 전에도 오래 친했고, 그 시간만큼 사진이 쌓이는 건 당연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그보다 먼저 이세진에게 풀려났던 김래빈은 업로드할 사진을 고르는 데 한창 목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곁으로 와 있었다. 그는 화면을 기울여 김래빈에게도 그가 보고 있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아. 이때 사진은 나도 있어.”
김래빈이 사진 한 장을 콕 찍었다. 그의 본가에 놀러 갔을 때의 사진이었다. 계곡 찬 물에 포도며 단감 같은 과일을 띄워놓고 나란히 발을 담근 채 흐르는 물결과 일렁이는 발그림자 사진을 찍었더랬다. 가을 모기가 정말 무섭긴 하더라, 중얼거리는 김래빈은 조금 다른 추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지만.
“다시 생각해도 차유진 네가 그때 모기 쫓는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된다고 우기는 데 넘어가지 말았어야 했어.”
“그치만 그거 냄새 별로야.”
냄새가 중요하냐며 험상궂은 얼굴을 하는 김래빈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던 그는 화면을 좀 더 내렸다. 아래로. 더 아래로. 작년, 재작년, 그 전, 그러다 그들이 연습생 때 찍었던 사진이 나올 때까지.
“김래빈.”
“왜.”
“그거 기억해? 우리 트래킹.”
“??? 저번에 우리끼리 여행을 계획했던 예능을 말하는 거야?”
아니, 그거 말고. 그는 고개를 저었다. 김래빈 발목 다친 거. 덧붙이자 김래빈은 그제야 가물가물 떠오른 표정을 했다.
“스티어 때 일 말하는 거야?”
“응. 김래빈 할머니 집에 산 많아. 그래서 나 김래빈 트래킹 잘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한동안 발목에 테이핑이며 보조대를 차고 다녔던가. 그는 흐릿한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도 김래빈이 내려오는 길에 삐끗하기 전까지는 분위기가 제법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류청우도 그때만큼은 유한 모습이었고, 단풍으로 온통 물든 거리는 아름다웠으니까.
“물론 기억하고 있어. 그런데 그때는 왜 기억하냐고 물은 거야?”
“우리 그때도 사진 찍었어.”
“그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도 가을이었지?”
응.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풍이 너무 예쁘고 아까워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따라다니던 촬영 스텝들도 모두 쉬던 그 짧은 휴식 시간 동안 김래빈과 둘이 사진을 남겼다. 그때도 그 둘의 사이는 친한 걸로 유명했고 김래빈의 어깨를 끌어당기는 그의 손에 사실은 약간의 긴장과 사심이 담겨 있었다는 건 차유진밖에 모를 거다.
그 사진은 지금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겠지. 그 전에 찍었던 사진들도 스티어 때의 것이라면 무엇 하나 없이 지금은 사라졌을 터다. 김래빈이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그날을 증거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차유진의 기억밖에 없는 셈이다. 순간의 씁쓸함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진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들과 감정들도 어쩌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곳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돌아볼 수밖에 없는 곳에 남겨진 그 감정이, 김래빈이 제게 보내던 반짝이는 눈빛이, 간혹 내비치곤 하던 설렘이, 감추지 못하던 호감과 제게 조심스럽게 닿던 손길과 항상 제게 귀 기울이던 김래빈의 그 마음이.
테스타 차유진은 새삼스레 아까웠다. 그리웠다. 그는 제게 남아있는 기억을 조심스럽게 그러모았다. 그때의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혹은 가볍게 흘려보냈던 그 모든 것들을 다시 올올이 손 위에 올려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애쓰며. 그러다 그는 불현듯 제 모순을 깨달았다.
‘그때 일에 미련이 있는 건 내 쪽이었던 거야.’
그 시절의 자신을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상대도 자신만큼 그 시절에 미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차라리 자신을 원망했으면 하는 마음. 그래서 어떻게든 상대에게 제 행동을 변명하고 그 시절을 보상해 주고 싶은 마음. 김래빈이 미국으로 간 그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이유가, 더는 차유진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차유진은 언제고 김래빈이 그를 좋아하기를 바란다. 지금의 김래빈이 그를 아주 좋아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스티어 때의 여파로 김래빈이 지금까지 흔들리기를 바랄 정도로.
“그건 최악인데.”
지나가듯 중얼거리자 김래빈이 제대로 듣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우뚱 기울였다. 그는 고개를 젓고는 말을 돌렸다. 아무리 애인이라도 보여주기 싫은 밑바닥이라는 건 있는 법이니까.
“그 사진 없어서 아까워.”
“그렇게 말하니 나도 아쉬운 게 없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응. 어쩔 수 없어. 동시에 둘은 비슷한 말을 서로에게 건네곤 또 동시에 웃고 말았다.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목에 손깍지를 껴 크게 고개를 젖혔다. 제가 미련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오히려 속시원하게 터놓을 수 있는 게 생겼다.
“김래빈도 김래빈 생각보다 스티어 많이 신경 써.”
“내가?”
“응. 김래빈 나 보면서 이상한 눈빛 해. 내 생각엔 그때 김래빈 스티어 생각해. 괜찮아. 나도 옛날에 김래빈 보면서 그 눈빛 했어.”
그가 자신에게 종종 보냈던 애틋한 눈빛에 대해 차유진은 그제야 솔직히 털어놓았다. 김래빈은 역시나 자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잠깐 눈을 크게 뜨더니 곧바로 제 행동을 되짚는 얼굴이 되는 걸 보면.
“으음….”
그는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분명 김래빈은 대답해줄 것이다. 그의 기대에 걸맞게, 상대는 곧 입을 열었다.
“그건 조금 달라.”
“어떻게?”
김래빈 역시 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턱과 입가를 손으로 가리는가 싶더니 시선을 허공으로 하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그게 회피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에게든 차유진에게든, 무언가 복잡하고 어려운 걸 설명하고 싶을 때의 김래빈은 꼭 그랬으니까.
“스티어를 종종 떠올리는 건 맞지만 네가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어. 나는 그저, 스티어 때까지 포함해서 계산하면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7년에서 8년은 더 늘어나는 셈이잖아. 그래서 그런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네 행동이나 말이 지금의 너를 대입해서 보면 이해가 간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물론 이해가 간다는 게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최근에는 대체로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해.”
김래빈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제게 엄청나게 소중한 것을 떠올리듯이.
“…….”
“한때 너는 지금보다 더 나와 시간을 많이 보냈으니까. 그때 네게 들은 말로 널 다시 보면 지금의 네가 또 이해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런 부분이 좋아서 내가 자꾸 그랬나 본데, 네게 오해를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겠지만 신경 쓴다고까지 표현할 만한 일은 아니야.”
김래빈은 약간 부끄러운 듯 점잖기까지 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지만 그는 상대만큼 차분하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그 한마디에 은은하게 묻어나는 애정이 너무 반짝거리고 벅차서, 오히려 마음이 아팠다. 그 아릿함에 힘입어 그는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또 해야 할 말이 아주 길었다. 마치 그들 사이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만큼.
“그때 나 김래빈한테 잘못한 거 많아.”
“저번에 말한, 내 마음 모른 척한 일 말이야?”
그거 말고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와 다시 떠올리면 참 서툰 것도, 잘못한 일도, 엇갈린 때도 많았다. 그래도 그중 제일 먼저 사과하고 싶은 것 하나를 고르라면 곧바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했던 거, 진심 아니었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비겁한 변명이었다고, 드디어 차유진은 말할 수 있었다. 아주 옛날, 한때 뿌리쳤던 김래빈의 손을 그는 다시 찾아 쥐었다. 김래빈의 손이 그의 손을 굳건히 마주 쥐었다.
낯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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