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1

백주

  김래빈의 바가 위치한 곳은 미류동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 

지금은 도로명주소를 더 일반적으로 쓰지만 미류라는 이름은 아무리 보아도 근처에 있는 미류산으로부터 온 게 틀림없었다. 미류산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미류동은 동산에 가까운 높이의 그 산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골목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골목골목을 따라 오래된 상권이 마치 버섯처럼 웅크린 채 버티고 있는 그 동네에서 그의 바는 번화가와 주택가 사이쯤 위치한 낡고 깨끗한 건물에 있었는데, 1층에는 제법 큰 규모의 낙지 철판볶음 집이 있는 그 건물에는 그 외에는 별다른 간판이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2층에 칵테일과 양주를 파는 바가 있는지 눈치채기 어려웠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냥 거기 2층이라고 통용되는 곳이 김래빈이 자신의 바를 꾸린 곳이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그는 한참 오픈 준비 중이었다. 두터운 유리문에 부딪힌 주먹이 텅, 텅 하고 둔중하게 먹히는 소리를 냈다. 김래빈은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는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되었는데, 생각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가 문 가까이 다가가자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를 바짝 들이대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미류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계십니까?”

유리창에 들이밀어진 것이 경찰 공무원 신분증인 것을 확인한 그는 문을 열었다. 경찰 로고가 새겨진 외투를 걸친 사내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둘 중 하나는 김래빈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영업, 특히 술을 팔다 보면 반년에 한두 번쯤은 경찰과 만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갔을 때는 뭐였더라? 주취 폭력, 아니면 기물 파손…?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류의 자잘한 일일 게 분명했다.

“아이고,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에게 좀 더 낯익은 경찰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에게 상대가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저희가 여쭤볼 게 있는데,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협조를 구하는 것 치고 썩 열정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혹시 최근에 이런 사람 목격하신 적 없습니까?”

사진에는 어떤 남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생김새는 언뜻 평범했다.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짧은 패딩을 걸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경찰은 바 주인이 금방 대답을 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지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김래빈의 입에서는 어,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미심쩍은 반응에 경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신 적 있나 보네. 아는 사람입니까?”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긴 어렵긴 합니다만…”

“어쨌든 얼굴 기억하잖아요. 아닙니까?”

그의 우물쭈물하는 반응에도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손님이 아주 특색있거나 어지간히 진상이 아니었던 이상, 보통 자영업자들이 얼굴 한두 번 본 손님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편이다. 그들이 찾는 자는 영 별 특색이 없는 자였고 이전에 들렀던 다른 곳에서도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여긴 번화가도 아닌 데다 이렇게 좁고 가게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바는 단골들 위주로 굴러가기 마련인데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 자주 오던 사람이었나?’

어쩌면 경찰은 조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구대 소속으로 수사를 전담하는 직분은 아니었지만, 협조 요청으로 출동한 이상 뭐라도 하나 건져 가는 게 모양새가 좋다. 좀 귀찮아서 그렇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 주인이 한숨과 함께 꺼낸 내용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말씀드리자면, 지난주 금요일에 처음 오셨는데… 본인이 마신 술값을 안 내고 도망가셨습니다….”

김래빈에게 그 얼굴이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제가 착각한 게 아닌가 걱정하며 몇 번이고 가게 내부를 비추던 CCTV를 돌려 보았기 때문이리라. 아래층의 음식집만큼은 아니더라도 금요일 저녁이면 충분히 손님이 많은 때였다. 바텐더 역할을 하느라 바빴던 그가 어느새인가 사라진 손님이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금방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 그러니까, 무전취식이요?”

“네.”

그러면 기억에 남을 수밖에. 경찰은 순식간에 바 주인을 이해했다. 그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작은 해프닝은 경찰의 귀에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펜으로 뒷머리를 슥슥 긁더니 수첩을 꺼내는 동작에 긴장이라곤 없었다.

“음… 뭐. 어쨌든. 그러면 그때 상황을 한번 말씀해 보실까요.”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CCTV를 돌려 보느라 익숙해진 정황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분은 혼자 오셨고, 바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가져온 짐 같은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옆자리 분이랑 어떤 술을 마실지 잠깐 이야기하셨던 것 같고요.”

혼자 오는 손님이 바 자리에 앉는 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칵테일 바에서 서로 모르던 사람이 한두 마디씩 주고받는 것 역시도. 술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음료니까. 가게에 설치된 CCTV는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둘이 메뉴판을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어렴풋이 떠올리기로 그때 손님은 옆 손님에게 술 추천을 받고 있었다.

‘…꿈을 꿀 수 있을 겁니다.’

바텐더는 자신이니 그 대화에 끼어들어 술을 추천해 드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손님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도 실례라 판단하여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건 그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술을 한 잔 시키셨습니다. 몽지람(夢之藍)이라고, 중국의 맑은 술인 백주의 일종입니다. 자주 나가는 주종은 아니지만 종종 찾는 분들이 있어서 한 병 갖춰 두고 있습니다! 결코 도수가 낮은 편은 아닙니다만 취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술이 나오고도 한참을 그냥 보고만 있었고, 또 딱 한 잔이었으니까요.”

이만한 잔으로요. 김래빈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벌려 소주잔만 한가 싶은 잔의 크기를 묘사했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의 주문을 내가는 사이에 잠깐 보니까 잔이 비어 있었고, 그리고 저에게 화장실이 어딘지를 물으셔서 알려드렸습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입니다. 나중에야 그 손님이 돈도 안 내고 가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만 그때는 벌써 화장실을 핑계로 나가신 지 좀 되어서요.”

“화장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화장실은 가게 바깥에 있습니다. 1층이랑 2층 사이에요.”

“그 뒤로는 따로 보신 적 없고요?”

“예. 그 뒤로는 전혀요.”

“그런데 무전취식으로 신고도 안 하셨다고…?”

“그거야 술 한 잔이니까요. 일반적인 술보다는 조금 가격이 있긴 하지만… 제 할머님께서 먹는 장사하면서 너무 쩨쩨하게 굴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둘의 대화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다른 경찰관 하나가 몸을 돌렸다.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 경찰관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까 알겠네. 거 원래 여기 밑에서 백반집 하시던 분 손주죠? 근데 왜 음식점은 안 물려받고?”

“저희 할머님을 아십니까? ”

“예. 할머님 계실 땐 내가 꽤 자주 드나들었는데 손주분은 나 못 봤나? 지금 낙지볶음도 나쁘지 않은데 예전에 있던 백반집이 진짜 괜찮았어. 반찬도 잘 주고. 아직도 가끔 생각나잖아. 할머님은 잘 계세요?”

“예. 시골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 몸은 잠깐 안 좋으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고요. 답변해 드리자면, 음식점은 안타깝게도 제 솜씨가 할머님만 못 해서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그런 큰 음식점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아주, 아주 잘 쳐봐야 30대 초반이나 겨우 될까 말까 한 술집 주인의 앳된 얼굴에 경찰은 그건 그렇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끝이었다. 등을 돌린 채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닥거리나 싶던 경찰들은 이윽고 수첩이며 무전기를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그래요. 협조 감사합니다. 혹시 그 뒤에 그 사람 오면 연락 좀 해줘요.”

그러면 이 주변 CCTV부터 다시 봐야겠네. 경찰들이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말들이 유리문에 가려 점점 흐려졌다.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마저 잦아들자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김래빈은 마치 안도하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찬장을 뒤져 작고 검은 잔과 얇고 주둥이가 긴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가 잔에 술을 따르자 청량한 사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혹자는 파인애플 향이라고도 평가하는 농향 특유의 향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따뜻하게 데우면 좀 더 농밀한 과실 향을 느낄 수 있을 테지만 그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갔어?”

아무도 없는 가게 안에서 목소리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람이 아니었다. 주황색에 가까운 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하나가 깨끗하게 닦아둔 바 테이블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 사람 못 찾을 텐데. 너무 늦었어.”

고양이가 키득거리며 인간의 말을 하는 놀라운 광경에도 잔을 닦아 내려놓는 술집 주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다만 불만스러운 어조로, 거기는 다 닦아둔 데니까 내려와, 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걸 뿐이다. 그야 말하는 고양이라면 사람과 대화가 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애초에 말하는 고양이를 태연하게 대하는 가게 주인도 평범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잖아.”

“오, 맞아. 믿지도 않을걸?”

고양이, 차유진은 지루하다는 듯 꼬리를 살랑대더니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걸어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나 바닥에 착지했을 때, 그는 더 이상 고양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의 술집 주인만큼이나 키가 큰 인간이 좀 더 붉어진 머리를 대충 넘기며 바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의 앞에는 김래빈이 따라두었던 술잔이 놓여있었다.

“이게 그 술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은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리저리 잔을 돌리며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향이 좋았다. 그래봤자 지금은 평범한 술일 테지만.

경찰이 찾는 손님에게 술을 권했던 건 저승사자다.

김래빈은 영적으로 아주 둔감하기 그지없어 귀신도 신도 잘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손님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인간으로 둔갑한 저승사자였다는 건 차유진이 귀띔해 주고야 알았다. 그제야 김래빈은 일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바의 조명이 켜졌으니 검은 술잔에 고인 맑은 술은 마치 거울처럼 그 앞에 있는 걸 비추어내었으리라. 저승에서 거울은 보통 망자의 업과 덕을 비추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다. 그 순간 손님이 내려다본 술은 저승의 업경이 되었으리라.

그 손님이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모른다. 저승사자가 직접 지목하여 보여주었으니 가볍지 않은 죄였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 뒤의 일도 불분명하다. 자신의 죄에서 도망쳤거나, 저승으로 떨어졌거나, 아니면 이승과 저승 사이 그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거나.

“차유진 네가 갑자기 검은 잔에 내가라며 우길 때 알아차려야 했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제대로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김래빈 그거 변명이야. 김래빈 안 바빠도 눈치 못 채.”

김래빈이 인간 아닌 것들을 태연하게 인간처럼 대하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닌 차유진은 코웃음을 팽 치더니, 제 앞에 놓인 술을 홀짝 마셔버리고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 총총 사라져 버렸다. 저는 바보가 아니라고 피력하려 주먹을 불끈 쥐었던 김래빈은 고양이가 사라지자 김샜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밀대를 꺼냈다. 슬슬 가게를 열 준비를 끝내야 했다.

블러디메리

  세상에는 도깨비 터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도깨비 터를 찾으면 수많은 게시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방법으로 도깨비 터를 정의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김래빈의 할머니는 도깨비 터를 영적인 존재들이 오가는 통로라 했다. 

‘그러니까 그걸 생기로 누르려면 사람이 많이 오가야 하는 거란다, 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단언컨대, 김래빈의 할머니도 귀신을 보는 능력은 없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무당도 그 홀로는 그 모든 제사와 굿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악기를 다루어야 하고 누군가는 제단을 차려야 하며 누군가는 무복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제단에 올라갈 술을 빚어야 할 테고. 김래빈의 친가가 그런 역할을 했던 가문이라고 한다. 뭐, 김래빈이 예전에 지나가듯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가 아주 어릴 때 만났던 어떤 친척은 우리 가문이 왕실의 제사에 올릴 술을 만들기도 했다고 떠벌렸지만, 김래빈은 솔직히 거기까지는 믿지 않았다.

아무튼 결론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집안은 무당들과 좀 인연이 있다, 이 말이었다. 조금씩 주워듣기만 해도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많이 알 정도로. 그들이 관리하게 된 터가 도깨비 터라는 걸 알게 된 그의 조모는 백반집을 차렸다. 그의 조모는 손맛이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백반집을 찾았다. 도깨비 터를 잘 누르기만 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식당은 번영했다.

그걸 물려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안타깝게도 그는 조리에도 음식점 운영에도 조예가 없었다. 결국 경찰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는 건물의 가장 넓은 구역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2층에 작은 바를 차렸다. 아래층 음식점만큼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지 않아서일까. 종종 그의 바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마치 손님처럼 드나들었다. 마치 이 고양이처럼.

“아니, 여기 언제부터 고양이 키웠어요? 귀엽다! 사람 엄청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두어 번 쓰다듬자마자 귀찮다는 듯 슥 피해버리는 고양이를 본 손님이 멋쩍게 말끝을 흐렸다. 고양이답네요. 덧붙이는 말은 칭찬인지 욕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김래빈은 흔들던 쉐이커를 내려놓고 그새 떨어진 고양이 털을 손등으로 밀어 치웠다. 차유진은 진짜 고양이도 아닌 주제에 왜 털은 진짜 고양이만큼 빠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는 식음료를 다루는 곳이라 동물의 모습으로 오가기에는 위생적인 측면에서 부적절한 공간이라고,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따져 물은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차유진은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갑자기 여기로 오더니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집사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보통 그렇게 시작하던데…”

그 말에 김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꾸 대신 그가 단골에게 내미는 건 블러디 메리가 담긴 잔이었다. 해장용이니 보드카의 비율은 조금 낮추고 타바스코 소스는 조금 더 넣었다. 단골이 좋아하는 대로였다.

고마워요. 가볍게 인사한 손님은 잔을 우아하게 잡는가 싶더니 장식으로 올라간 셀러리를 앞접시에 올려 치우곤 그대로 술을 쭉 들이켰다. 무릇 칵테일은 향과 맛과 색을 즐기는 거라던데 그런 기색은 일절 없고 대신 걸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우. 이제 좀 살겠네요. 난 꼭 이걸 마셔야 좀 술 깨는 것 같더라. 아니 어떤 미친 회사가 화요일에 술 퍼마시는 회식을 하냐고. 근데 그게 우리 회사네. 이게 말이 돼요?”

“소미 님께서 저번에 회식 날짜에 대해 건의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겁니까?”

“네! 진짜 짜증 나요. 오늘 오전 내내 토할 것 같은 걸 참고 일했더니 아주 그냥 죽겠는데 윗대가리라는 새끼는 자기는 반차 쓰고 안 나오고, 내가 진짜 카드값만 아니면 때려치웠다, 이런 회사.”

수요일 오후는 아무래도 한가한 시간이다. 지금은 다른 손님들도 없으니 그가 단골의 푸념을 받아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프레첼 몇 개를 담아 손님 앞에 밀어준 김래빈은 손님의 맞은편에 살짝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그 구성원의 정당한 건의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회사가 극히 드물다는 말은 제 누님으로부터도 들은 바 있긴 합니다만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댁으로 귀가하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숙취 해소에는 적절한 수분 섭취와 충분한 숙면이 도움이 된다는 건 이미 충분히 증명된 명제이기 때문에….”

“아뇨. 괜찮아요. 여기 있는 게 내 힐링이야. 진짜 래빈 씨 은근히 웃긴 거 알아요?”

“저 말입니까?”

김래빈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의 바를 찾는 많은 손님이 그의 까닭 없는 진지함과 끝없이 늘어지는 말들을 즐거워했지만 김래빈의 눈치는 차유진의 표현에 따르자면 바닷가 모래알 크기만큼이나 작고 하찮은 고로, 그는 대체 왜 손님들이 저를 웃기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종 다른 손님들께서도 유사한 평을 제게 해주시는 걸 보면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저에게 특정 손님에게 통용되는 유머 감각이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합리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저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칭찬은 감사합니다.”

봐요. 방금도 그랬잖아. 손님이 깔깔 웃는 소리가 퍼졌다. 그러더니 곧 잦아들었다.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내는 손님에게 김래빈은 단골에 대한 의리를 담아 꿀을 한 스푼 넣은 미지근한 물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근데, 그러고 보니… 여기 지난번에 되게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하나 있지 않았어요? 오늘은 안 보이네.”

“아, 그 친구는…”

김래빈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친구의 근무시간은 일정하지 않아서요. 너무 바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때만 오라고 부탁하는 편입니다. 오늘은 안 왔고요.”

“…하긴 여기가 좁아서 굳이 아르바이트까지 안 써도 되긴 하겠죠. 아니다.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 아르바이트생까지 SNS에 소문나면 나만 알고 싶은 내 술집 같은 거? 없잖아요. 지금도 주말에 손님 너무 많아서 못 오겠는데.”

김래빈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지금 손님 다리 옆을 총총 지나쳐 가는 갈색 털의 고양이가 사실 손님이 찾는 그 잘생긴 알바생이라고. 그는 대신 그저 웃었다. 단골은 그 뒤로도 무알콜 칵테일을 두 잔이나 더 시키고 회사의 온갖 부조리함을 그에게 떠들다가 돌아갔다. 김래빈이 조심스럽게 ‘저, 내일은 혹시 출근 예정이 없으십니까?’ 하고 물은 뒤였다.

그날은 그 손님이 마지막이었다.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는 김래빈의 뒤로 언제 인간으로 변한 건지 모를 차유진이 살금살금 접근했다. 고양이 모습으로 손님한테 애교를 부리고 먹태까지 야무지게 얻어먹어 기분이 좋은 채였다. 팔을 뻗어 김래빈의 어깨 위로 올린 그는 그대로 그의 어깨를 한번 끌어당겼다 놓았다.

“Hey, 집사?”

놀리는 게 역력한 어조였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너는 실제로는 고양이가 아니잖아.”

“나 고양이로 변할 수 있어. 하프-고양이야. 그러니까 김래빈도 하프-집사야.”

그가 닦을 식기를 모아오는 사이 차유진은 테이블 위로 의자를 올리더니 밀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대로 바닥을 쭉 밀어내는 동작에는 시원스러운 데가 있다. 차유진은 그의 장담대로 꽤 일을 잘했다.

“그래서 정말로 언제까지 있을 건데?”

“나 분명히 말했어. 김래빈이 내가 원하는 거 주면 가.”

“나한테는 그런 거 없다니까. 아무래도 그 신께서 착각하신 것 같아, 차유진.”

“김래빈. 신은 거짓말 안 해.”

“할머님께서 찾아보신다곤 하셨지만….”

“그럼 나 더 기다려. 그리고 여기 재밌어.”

그냥 처음부터 받아주질 말아야 했는데. 김래빈은 아주 잠깐 후회했다. 반대로 차유진은 퍽 의기양양한 태도로 밀대를 내려놓고 각종 비품을 착착 정리했다.

‘나 특별한 술 찾아.’

‘메뉴판에 없는 술을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새로 주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습니다만…’

‘내가 찾는 거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야.’

‘…그건 새로 나온 술 이름입니까? 저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아냐. 김래빈 찾을 거야. 그때까지 나 여기 있어도 돼?’

‘? 예. 제가 서둘러 검색해 보겠습니다.’

‘김래빈 분명 허락했어.’

그러지 말고 더 자세히 물어봐야 했는데. 차유진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아무리 반은 신이어도 그의 허락 없이 그의 공간에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김래빈은 길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차유진은 일을 참 잘했으니까. 근래 바빠진 그의 바에는 확실히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가끔은 고양이로 변하는 사람이라도.
그는 문의 표지를 ‘close’로 돌리고 셔터를 걸어 잠갔다.






‘왜 연락 안 해?’

차유진이 두 번째로 그의 바에 찾아왔을 때 김래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바에 한 번 찾아왔던 손님이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 쪽지 줬어. 기억 못 해?’

김래빈은 쪽지라는 말을 듣고야 제대로 떠올렸다. 아. 지난주에 왔던 손님. 그를 빤히 바라봐서 무언가 잘못이라도 했냐고 물으려던 그 순간 이름을 묻더니 대뜸 쪽지를 내밀어서 그가 더 놀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차유진이라는 이름과 11자리의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그는 이걸 왜 제게 주지 고민하다가 이벤트 함에 넣어버렸다. 명함을 넣으면 추첨을 통해 무료 칵테일 한 잔을 드립니다. 그때 벽에는 그런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아직 직업이 없으면 명함이 없을 수도 있지. 취업 준비생의 삶은 고달픈 법이다. 무료 칵테일 한 잔이 고플 정도로.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 그대로 연락을 달라는 말이었던 건 모르고.

차유진은 김래빈이 이벤트 함에서 뒤늦게 그의 쪽지를 주섬주섬 꺼내는 걸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 뒤 소원을 들어주는 술을 그에게 요구했고, 김래빈이 허락한 틈을 타 그대로 눌러앉았다.

띠리리릭-. 알람이 울렸을 때 김래빈은 피곤한 눈을 꿈뻑였다. 옆구리가 뜨끈하고… 무거웠다. 그는 익숙하게 팔을 들어 제 옆구리에 상체를 올리고 있는 고양이를 밀어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눈을 가늘게 뜬 고양이가 불만스러운 듯 애옹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가 곧 당당하게 김래빈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차유진, 일어나. 오늘도 계속 고양이인 채로만 있을 거야?”

“김래빈 일어나는 거 너무 빨라….”

김래빈은 차유진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밥을 다 차리고 나면 알아서 어슬렁거리며 올 것이니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는 밥을 하러 몸을 일으켰다.

조부모가 시골로 내려간 뒤 조부모와 김래빈의 누나, 김래빈까지 넷이 살던 집은 김래빈이 물려받았다. 정확히는 그 집의 명의는 여전히 조부 앞으로 되어 있었지만 김래빈의 누나까지 회사 근처로 집을 얻어 나가면서 실질적으로 김래빈이 혼자 사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때는 이 넓은 집을 어떻게 건사해야 하나 고민했던 김래빈은 최근에는 집이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처음에 그가 주장했던 대로 집을 내놓고 원룸이나 얻었다면 차유진이랑 같이 지내기에 곤란했으리라. 고양이 모습까지야 어떻게 같이 산다고 쳐도 멀대 같은 남정네 둘이 부대끼며 살기에 원룸은 너무 좁다.

“김래빈 할머니 아직 답 안 했어?”

식탁에 수저를 내려놓자 때맞춰 거실로 나온 차유진이 반찬 뚜껑을 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리신다고 이미 말했잖아.”

차유진이 처음에 김래빈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 김래빈은 바로 그의 조부모에게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이 썩 신통치는 않았지만.

‘에구. 우리 집이 술 빚는 집안이었던 건 맞지. 그런데 사실 맥이 끊긴 지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 때는 빚으면 큰일 나서 한동안 못 빚었다고 들었거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술도 처음 듣지만… 우리 강아지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나? 그럼 이 할미가 한번 알아봐야지!’

그 뒤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장조림을 반찬통째로 제 쪽으로 끌어가는 차유진의 젓가락을 제 젓가락으로 툭툭 내리쳐 멈춘 김래빈이 그 대신 가지구이를 차유진 쪽으로 밀었다. 차유진이 입을 비쭉거리더니 가지구이를 한 무더기 집어 올렸다. 이럴 때의 차유진은 그냥 아주 평범한 인간 같았다.

그가 차유진과 살게 된 지도 벌써 반년. 부대끼고 산다는 게 뭔지, 둘은 금방도 친해졌다. 김래빈이 차유진의 사정을 대강 전해 들은 지도 꽤 되었다는 말이다.

‘나 원래 인간이었어. 할머니 도와줬는데, 신 되라고 했어. 그 할머니 배움만득이야.’

‘배움만득?’

‘김래빈 저번에 말했어!’

‘아. 그건 배은망덕이야!’

스물두 살의 차유진은 차에 치일 뻔한 할머니를 구해주고 대신 바닥에 굴렀다. 할머니는 차유진의 두 손을 잡고 네게 신의 축복이 내려질 거라 빌어주었다. 글쎄. 그 스스로는 그다지 열성적인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유진은 가톨릭의 분위기가 익숙한 집안에서 자라온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신이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어느 순간 그는 그가 반쯤 신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능력과 잘 상처 입지 않는 몸, 그리고 세월이 비껴나간 얼굴.

차유진은 자신의 상태를 저주라고 표현했다. 김래빈은 글쎄,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었다. 역사에서나 이야기에서나 불로불사라던가 신이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것처럼 굴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 그 사람들에게는 차유진이 받은 건 마치 축복처럼 여겨질 테다.

하지만. 김래빈은 속으로 작게 차유진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자기 뜻과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설령 준 쪽이 더없이 선한 의도였더라도. 그는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런데, 차유진.”

“왜?”

“어쨌든 너는 지금 반절은 신인 거잖아? 그러면 제사용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낫지 않아? 우리 할머니께서 이전부터 말씀하시기를 신이 공양을 받지 않으면 점점 힘이 약해진다고 하던데.”

“나 반 사람이야. 그 술 맛없어.”

참고로 차유진의 취향은 위스키 쪽이다. 달짝지근한 맛을 가미한 하이볼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고 칵테일도 제법 잘 마신다. 소주는 마시자마자 으, 하고 입을 헹궜고 제사용 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청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 너는, 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그 힘도 곧잘 쓰잖아.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랬다. 새롭게 얻게 된 수많은 힘을 차유진은 진상 퇴치에 곧잘 써먹었다. 환각이라던가, 괴력이라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김래빈은 둔감하기만 하니 눈치 못 챘지만 차유진이 몰래 도깨비 터에 이상한 게 꼬이는 걸 막아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래빈 대신 인간이 아닌 존재와 소통하는 것도 차유진의 몫이었다. 김래빈의 집안에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 있다는 정보도 방법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 신 비스무리한 존재한테 들은 것이다. 차유진도 그게 무슨 신이었는지까지는 잘 모른다. 아주 멀리서 온 그는 이 동방 작은 나라에 둥지 튼 신들의 이름과 내력을 잘 몰랐다.

“그래도 싫어!”

단호하게 말한 차유진이 잘그락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는 그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할 뿐이다. 그때 김래빈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막 화장실에서 씻으려던 김래빈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의 할머니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예, 할머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칫솔을 내려놓고 공손히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 아이고 내 새끼 잘 지내나? 반찬은 안 모자라고? 남자애 둘만 사니 아무리 너희가 요리를 한다고 해도 얼마나 하겠어? 아무튼 잘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반찬 좀 더 부쳐줄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요, 건강은 어떠십니까? 반찬은 괜찮습니다! 요새는 시장에서도 반찬을 팔아서 반찬이 모자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차유진이 할머님께서 만들어주신 장조림 정말 맛있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나야 잘 지내지! 여기 내려와서 텃밭이나 가꾸니 아주 좋다. 괜찮긴 무슨! 시장에서 만든 게 아무리 맛있어도 이 할미가 만든 것만 하겠어? 금방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니, 이게 아니지. 지난번에 우리 강아지가 물어봤던 거 말이야. 그거 할미가 찾았다.

“예?”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차유진을 돌아봤다. 통화를 듣고 있던 차유진 역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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