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 사그라들고 나자 그들은 어느새 동터오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래빈이 제 볼을 꼬집었다.
“김래빈 아파?”
“응.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네가 직접 꼬집어 봐, 하고 받아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래빈이 차유진 쪽을 보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멈칫했다. 주변 풍경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의 동행인 역시 평소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너 차유진 맞아?”
“맞아. 왜?”
“모습이 갑자기 바뀌었어.”
차유진은 고양이와 인간을 그야말로 반반 섞은 모양새로 변해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오른 짐승의 귀, 더 밝아진 홍채와 가늘어진 동공, 더 날카로워진 송곳니, 전반적으로 변한 얼굴과 몸의 골격, 얼굴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얼룩무늬, 그리고 꼬리까지. 아니다. 고양이보다는 조금 더 맹수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 얼룩덜룩한 무늬와 날렵한 모습을 찬찬히 훑던 김래빈은 차유진이 염불처럼 외던 말을 떠올려냈다.
“진짜 재규어 신이었구나. 이게 네 원래 모습이야?”
“김래빈, 그게 보여?”
“응.”
차유진의 귀가 몇 번 쫑긋거렸다. 동공이 실시간으로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턱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웃하는 움직임에 맞춰 꼬리를 두어 번 살랑거린 차유진이 잠시 후 제 손바닥에 주먹을 탁 내리쳤다.
“나 알았어! 여기 신이 만든 곳이야. 내 생각에 여기 특별한 공간이라 김래빈도 보여.”
몇 번 제 귀와 얼굴, 꼬리를 만지작거리던 차유진은 손가락을 탁, 튕겨 익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유진이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다시 고양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때처럼 김래빈은 이번에도 또 댕그랗게 눈을 떴다. 차유진은 그게 어쩐지 우스웠다.
“어…. 굳이 나에게 익숙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아, 차유진. 너 그것도 능력 쓰는 일 아니야? 힘을 비축해야 한다면서.”
“알아. 나 다른 모습도 멋져. 그래도 난 사람 모습 좋아. 이거 힘 안 써서 괜찮아.”
차유진의 소망이 다시 인간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는 김래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공간은 드넓었지만 그들이 뭘 해야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초가집 한 채. 다른 건 보이지 않으니 시도해 볼만한 일도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저기로 가야 하나 봐.”
“동의해. 저기에 우리 부른 신 있어.”
초가집을 한참 바라보던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으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게 그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가 제사를 지냈던 곳이 원래도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으니까, 우리가 만나는 상대도 농사의 신일 확률이 높을 거라는 전제 하에 자료를 좀 찾아봤어. 우리가 만날 신은 아마 신농씨나 후직씨일 거야. 둘 다 사람들한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줬대.”
“그럼 좋은 신이야?”
터벅터벅. 그들이 초가집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점점 변모했다. 발 아래에서 마른풀이 두텁고 푹신하게 밟히던 들판에서 사람의 발길이 닿은 게 분명한 풀이 없고 단단한 흙바닥으로. 그리고 그 끝은 초가집을 둘러친 돌담과 싸릿대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기록상으로는 긍정적인 서술이 대다수기는 했어. 물론 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신을 만난 후에 서술했다기보다는 그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옮겨 적은 거라 얼마나 실제 신의 모습이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하면 좋으신 분들이셨으면 좋겠어. 우리가 그분들께 간청해서 재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성격이 좋지 않거나 까다로운 신이면 아무래도 일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할 테니까. 더구나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신을 만나는 편이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기에도 좋을 거라는 결론이…”
아. 김래빈 긴장했네. 낮고 빠르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차유진은 짐작했다. 그로 말하자면, 별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따지자면 김래빈보다 그가 더 일상적이지 않은 것, 신의 영역, 신비에 더 가까운 존재일 텐데도 그랬다. 어쩌면 그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각을 포함한 감각에 쉽게 현혹되는 인간과 달리 차유진은 그래도 반은 신이기에, 이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적인 존재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환상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계십니까?”
김래빈이 싸리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이 문을 살짝 밀었다. 빗장이 달리지 않은 문은 금세 틈을 열어 안쪽으로 통하는 길을 내보였다.
“그냥 들어가면 집주인에게 실례이지 않을까?”
김래빈이 불안한 눈을 하든지 말든지, 차유진은 안쪽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우물쭈물하는 상대를 잡아끌어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을 지나 한지 바른 창호문 앞에 선 차유진은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괜찮아. 우리 초대한 거 저쪽이야.”
쾅쾅. 두어 번 문을 두드린 차유진이 한 발짝 물러났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봤지? 하는 얼굴로 절 돌아본 차유진 옆에서 김래빈은 크게 한 번 숨을 골랐다. 곧 방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 한가운데 소의 머리를 닮은 모습의 신이 소박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신은 그들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걸 시도하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인데.”
김래빈에게는 그 말이 반쯤 소의 울음소리와 섞인 것처럼 들렸다. 신농씨인가 봐. 그가 바짝 긴장한 채로 그에게 속삭이는 동안 옆에서 차유진은 김래빈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소를 잡아서 탕을 끓여 나눠줬거든….’
차유진은 신농씨의 머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소머리를 한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소를 잡다니 이게 무슨 블랙 조크람. 하지만 그는 그가 잘 모르는 문화에 간섭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고는 김래빈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쌀 필요해요. 줄 수 있어요?”
“차유진…! 그렇게 대놓고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야!”
옆에서 김래빈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신농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머리를 한 그 신은 차유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신성에서는 피와 수렵과 힘의 냄새가 나는구나. 나로선 마뜩잖은 일이다만… 네 역할이 저 인간을 비호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내 신농씨는 김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고 검은 눈이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인간이여. 짐작하겠지만 나는 함부로 재료를 내어줄 수 없다. 나를 비롯해 네가 앞으로 만날 모든 신들은 네가 그 술에 합당한 인간인지를 시험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위엄있게 공간을 울렸다. 반질반질 빛나는 눈이 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마치 그가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겠다는 듯이. 그동안 김래빈은 차마 눈 한 번 깜박할 수 없었다. 소의 모습을 한 신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의 기준으로는 꽤 길었던 눈 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신농씨는 입을 열었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무릇 농사에는 끈기와 성실함이 필요한 법이지. 너는 충분히 성실한 인간인가? 그걸 증명하는 게 네 시험이다.”
그는 동쪽을 향해 팔을 들었다. 창 너머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신은 그 가운데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세 가지 일이 있을 테니, 그걸 수행하고 다시 돌아오너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곧 공간이 바뀌었다.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그와 차유진은 초가집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초가집의 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굳게 닫혀있었고, 그들이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동쪽을 향해 생겨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차유진 역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움직였다.
“갈까?”
첫 번째 일감은 초가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두막의 위에 거대한 됫박이 하나 올라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모래와 쥐눈이콩,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낱알이 섞여 있었다. 됫박 옆에는 곡물을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역센 천 주머니 두 개와 바가지, 대나무로 만들어진 소쿠리, 주먹밥이 놓여있는 큰 접시 하나도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차유진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지만 김래빈은 원두막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금방 답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걸 종류별로 골라내야 하나 봐.”
할머니에게 전래동화를 듣고 자랐던 김래빈의 유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됫박을 막막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곧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먹을 게 있으니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어!”
“그건…, 맞아.”
하지만 차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어쩐지 그 주먹밥을 볼 때마다 그들이 만났던 신농씨가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배가 고파질 때까지 노동하게 될 거란다…, 하고.
“자. 그럼 시작해 보자.”
김래빈은 마음속으로 기합을 한번 넣었다. 그리고 바가지로 됫박 안의 것들을 한 바가지 퍼 소쿠리에 부었다. 그도 방법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딱 봐도 차유진은 이런 쪽의 지식이 전혀 없어 보이니 자신이 먼저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소쿠리를 느리게 흔들면서 내용물이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했다. 듬성듬성 짜인 소쿠리 사이로 모래가 떨어지는 사이에 여전히 알갱이가 큰 모래들은 곡물 사이에 섞여 있었다. 쥐눈이콩은 다른 것들과 색깔이 다르고 크기에서도 차이가 있어 금방 골라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모래와 곡물을 구분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음…. 이렇게 하자. 차유진 너는 바가지로 저걸 퍼서 그 안에서 콩만 골라내도록 해. 까맣고 동그란 게 콩이야. 골라낸 콩은 여기에 넣고.”
그는 차유진에게 바가지와 천 주머니 하나를 주었다. 흘리지 않게 조심해.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콩을 다 골라내고 나면 남은 걸 나한테 줘. 그럼 내가 모래랑 곡물을 잘 분리해 볼게.”
그렇게 역할 분배를 마친 그들에게 남은 일이라곤 평화로운 노동의 시간뿐이었다. 바가지를 살살 흔들어가며 손가락으로 콩을 골라내던 차유진은 금방 지루함에 입술을 내밀며 괴상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손을 멈추지는 않았어.
“이거 내 생각이랑 많이 달라. 나 신들이 시험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이름은 멋져도 하는 건 안 멋져.”
신중하게 소쿠리를 흔들며 모래를 골라내던 김래빈은 소쿠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너는 우리가 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모험? Like a True Hero! 괴물 잡거나 문제 해결하는 거!”
차유진이 우스꽝스럽게 양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평범한 사람이야, 차유진. 그런 걸 시키면 아마 첫 단계부터 막혔을지도 몰라. 그리고 손 놀지 말고 계속 일해. 일하면서 이야기해. 내 생각엔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와우. 김래빈 진심이야?”
뜬금없는 차유진의 감탄사에 김래빈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유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뭐가?”
“김래빈 안 평범해.”
“…? 물론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개성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너처럼 반쯤 신인 것도 아니고 귀신도 안 보이고 다른 능력도 없으니 이런 임무와 관련해서는 지극히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차유진은 그의 설명에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야. 김래빈 진짜 안 평범해. 평범한 사람이면 김래빈 여기 못 와. 그리고 김래빈한테는 나 있어. 나 뭐든 잘해. 어려운 거 나와도 우리 걱정 없어!”
그 순간 그에게 꼬리가 드러나 있었다면 분명 그 꼬리는 의기양양하게 위로 바짝 세워져 있을 게 분명했다. 그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어쩌면 지금 그의 꼬리가 감춰진 상태인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김래빈은 무심하게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소쿠리에서 모래를 골라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차유진은 그 반응에 그만 김이 새 버렸다. 대단한 찬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무반응이라니.
“그런데 차유진.”
앙금이 아주 조금 남아있던 차유진은 그만 은근슬쩍 비딱하게 상대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물론 김래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했다, 쪽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네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오른 건데, 네가 쓸 수 있는 능력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지?”
차유진이 멈칫했다. 오…. 말꼬리가 흐릿하게 늘어졌다. 이제까지 자신만만했던 반신의 어깨가 살짝 처지더니 시선이 슬그머니 먼 곳을 향했다.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차유진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응. 없어.”
김래빈은 별로 실망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래. 사실 이미 예상하기는 했어. 네가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너는 벌써 그 힘을 썼을 것 같거든.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시 일 하자.”
차유진은 급격하게 말이 줄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귀가 축 처진 재규어 신 한 명과 인간 한 명은 다시 열심히 콩과 곡물과 모래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김래빈이 습관적으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마치 노동요처럼 오두막을 둘러싼 평화로운 광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농씨는 고지식할 만큼 자신의 말을 지키는 신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못 할 만큼 어렵지는 않으나 끈기와 성실함이 필요한 일’들을 직면해야 했다. 곡식과 콩을 다 구분했더니 다음으로는 잡초를 뽑아내야 하는 넓은 밭이 나타났고, 만 하루 동안 잡초를 전부 없애고 들고 온 씨앗을 심었더니 그다음에는 또 짓이긴 풀과 진흙으로 어떻게든 깨진 물독을 메꿔 씨앗에 물을 줘야 하는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김래빈도 물독 옆에 놓인 떡과 경단을 보면서도 웃지 못했다. 음식이 마련되어 있다는 건 배가 고파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반복된 경험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집이 준비되어 있으면 해가 져서 하룻밤 묵어야 할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 신 이상한 신이야….”
투덜대는 차유진을 김래빈이 엄중한 표정으로 만류했다. 물독의 깨진 부분을 어떻게든 메꿔보느라 손에는 온통 짓이겨진 풀과 진흙이 묻은 채였다.
“일은 분명 힘들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차유진. 보살님께서도 그러셨잖아. 신에게서 직접 재료를 받는 게 훨씬 더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고. 그러니까 주어진 기회를 감사히 생각해야 해. 물론 내가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건 다 네가 내 수호신 역할을 하겠다고 한 덕분이라는 점도 잊지 않았으니 네게도 고마워하고 있고.”
“김래빈. 나도 이거 좋은 기회인 거 알아. 그래도 힘들어.”
물독을 든 차유진이 노골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보며 김래빈은 땀이 흐르는 뺨을 한 번 훔쳤다. 그는 깨진 물독과 끝도 없이 이어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입이 열렸다.
“사실 차유진, 우리나라에 콩쥐 팥쥐라는 동화가 하나 있거든.”
넓은 밭에 흩뿌리듯 물을 끼얹던 차유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김래빈 여기 흙 묻었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다시 뺨을 문지르던 김래빈은 포기하고 그냥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을 하다 보면 흙이야 또 묻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일을 다 끝내고 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깨진 물독을 막는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났어. 거기도 깨진 물독으로 물을 길어야 하는 내용이 나오거든. 콩쥐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보다 조금 더 조건이 까다로워서 시간 안에 끝내는 게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여럿 해야 했지만….”
“왜? 콩쥐도 술 만들어? …잠깐, 쥐 술 마셔?”
“아니, 술은 빚는다고 해야 해. 그리고 콩쥐는 쥐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야. 주인공.”
차유진의 말을 정정하면서 그는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뭐였더라…. 콩쥐 어머니는 새어머니였는데, 콩쥐만 잔치에 못 가게 하려고 일부러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 거야.”
“나 그거 알아. 신데렐라? 조금 비슷해.”
비슷하긴 하네. 김래빈은 어릴 적에 들었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물에 젖어 떨어져 나가려는 진흙 덩어리를 다시 새 덩어리로 바꿔 물독의 틈을 메꾸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거기서는 콩쥐가 해야 하는 일을 동물들이 도와주거든. 예를 들자면 넓은 땅에 뿌려진 곡식을 다 모으라고 하니까 개미가 도와줬던가…? 음. 아무튼 콩쥐가 착한 소녀라 여러 동물이 도와주는 것처럼 나와.”
나머지는 황소, 그리고 두꺼비였나?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동화를 제대로 읽은 것도 너무 예전의 일이었다. 확실한 건 콩쥐의 깨진 물독은 두꺼비가 막아줬다는 거다. 김래빈은 두꺼비 대신 진흙과 풀을 이겨 구멍을 막아 낸 물독에 물을 채웠다.
“처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는데, 콩쥐가 해야 했던 일과 너무 비슷한 거야. 그래서 나는 우리 일도 동물들이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지.”
차유진만큼 강렬하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김래빈 역시 조금은 아이 같은 꿈을 꾸었다. 신을 만나는 게 모든 사람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그도 콩쥐를 도와줬던 동물들처럼 기이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들판은 고요했고, 그는 차유진과 함께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그 모든 일들을 해내야 했다.
“김래빈 실망했어?”
옆에서 물을 뿌리던 차유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땀을 훔쳐냈다.
“처음에는 조금. 내가 그만큼 착하게 살지 않은 걸까 싶었지.”
조금 서운했다. 전혀 서운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한 번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도.
그 양가적인 감정을 더듬어보며 김래빈은 차유진을 떠올렸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순도 이와 비슷한 걸까. 신으로써 가진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하지만 그는 구구절절하게 제 감상을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짧게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시 떠올려 보니, 신께선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 시험하겠다고 하지 않고 우리의 끈기와 성실함을 시험하겠다고 하셨잖아? 그렇다면 동물이 와서 도와주지 않은 쪽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어. 동물이 도와주면 우리가 착한 사람이라는 건 증명될 수 있어도 얼마나 끈기가 있고 성실한지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좀 힘들어도 일을 열심히 하면 시험을 통과하기에는 전혀 문제없다는 결론이 나왔어.”
차유진은 그 덤덤한 목소리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김래빈이 그렇게 결론을 낸 건 하나도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김래빈은 옆에 반신(半神)인 그를 두고도 신의 힘을 빌릴 생각 한번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이제는 촉촉하게 젖은 넓은 밭을 어깨 너머로 가리키며 으쓱했다.
“응. 우리 많이 일했어. 이만큼 하고 통과 못 하면 그 신 눈 부러?졌어.”
차유진은 마지막으로 물을 손에 부어 손을 씻고 그와 김래빈의 입에 나란히 경단을 밀어 넣었다. 눈이 삐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차유진이 원래 하려던 말을 짐작하며 경단을 우물거리던 김래빈은 기어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차유진이 신농씨에게 ‘눈 부러졌어요?’하고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그 초가집으로 돌아왔을 때 신은 그들에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커다랗고 통통한 참새를 한 마리 안겨 주었다. 그 참새가 너희에게 곡식과 약재를 줄 것이라고 덧붙이며.
김래빈이 신농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그 참새는 차유진이 받더니 냉큼 제 팔 사이에 끼웠다. 참새는 잠시 날개를 퍼덕이며 몸부림치는가 싶더니 차유진의 동공이 가늘어지고 송곳니가 드러나자 곧 조용해졌다. 김래빈이 신에게 허리를 몇 번이고 숙이느라 보지 못한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참새는 참새 모양 도자기 연적이 되어 있었다. 보통의 연적보다는 주둥아리가 좀 더 큰 그 연적을 기울이자 물 대신 쌀 낱알과 말린 약재들이 쏟아져나왔다. 손으로 그 낱알을 문지르니 기름진 윤기가 돌았다.
“좋은 쌀이네.”
낱알들을 매만지던 김래빈이 다시 그걸 연적의 주둥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계는 이제 막 오전 세 시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머문 건 적어도 이틀은 넘었을 텐데, 현실의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연적이 없었다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차유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간단하게 평했다. 거기 환상이라서 그래. 여기랑 시간 달라.
“그래도 한동안 가게 휴무라고 적어놓길 잘한 것 같아. 아무래도 나 근육통 올 것 같아.”
김래빈은 뻐근해져 오는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가게의 창고에서 500ml 맥주병 두 개와 생강 전병이 담긴 종이상자 한 개를 들고나왔다.
“김래빈 이거 다 뭐야?”
김래빈의 칵테일 바에는 여러 종류의 술이 있었지만 맥주는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차유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김래빈은 병따개를 그들 사이에 놓고 접시를 하나 꺼내 생강 전병을 옮겨 담으며 답했다.
“얼마 전에 주류 관련해서 업계 사람이 영업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맥주도 한번 생각해 보시라며 한 팩 두고 갔거든. 여전히 맥주까지는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들이진 않았지만…. 에일 종류고, 맛과 향이 괜찮았어. 우리 일 열심히 했잖아. 들어가기 전에 한잔하는 것도 피로를 푸는 데 좋을 것 같아서.”
그는 병따개로 제 맥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좁은 주둥이 사이로 꽃과 과일을 닮은 향긋한 향이 퍼졌다.
“일반적으로 파는 맥주보다는 쌉쌀한 맛이 더 강하겠지만, 지금 안주로 먹는 건 좀 달콤한 종류니까 괜찮다고 생각해. 지난번에 이렇게 먹어보니까 괜찮았어.”
김래빈은 병을 들었다. 그리고 차유진 쪽으로 팔을 기울였다. 차유진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맥주병을 들어 그의 병에 살짝 부딪히고는 외쳤다. 건배!
“좋아! 우리 성공 축하해.”
그는 병을 기울였다. 부드러운 거품과 탄산감이 적은 맥주가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놀랍도록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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