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게 올리는 술은 가장 귀한 것으로 공들여 빚어야 한다. 이 땅에서 술 빚는 재료 중에 가장 귀한 건 곡식, 그중에서도 쌀이다. 쌀과 약재를 넉넉히 써 여러 번 덧술을 해서 빚은 술. 김래빈이 빚어야 하는 술은 그런 술이었다. 물, 쌀, 누룩과 약재. 신에게 올리는 것 중 가장 귀한 술이니 그 재료 역시 신에게서 받아 쓰거나 처음부터 아주 정갈하게 길러내 준비해야 한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은 할머니 텃밭 가꾸는 걸 도와준 정도인 김래빈이나 아예 경험이 없는 차유진이 쌀이며 약재를 처음부터 기르는 건 어려우니 결국 남은 건 신에게 기대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 제사 해?”
눈썹 위에 손날을 얹어 주변을 휙휙 돌아본 차유진이 의아한 얼굴로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3월의 첫 주말. 새순도 올라오지 않은 잔디밭에 포석이나 겨우 놓인 그 공간은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기엔 다소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모양새가 좀 이상할지 몰라도 여기는 조선 시대부터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유서 깊은 곳이야. 요새도 4월에 제사를 지낸대. 그러니까 여기가 맞아.”
그는 어깨에 이고 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접이식 미니 탁자, 작은 도자기 접시, 휴대용 라이터, 술잔, 무당이 그들에게 준 향, 그리고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가장 호평을 받았던 제사용 청주 한 병.
“차유진. 나를 잠깐 이목에서 가려줄 수 있어?”
“가능해! 왜?”
“그래도 여기는 문화재인데 불 피우는 걸 남들에게 보이는 게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딘가에는 CCTV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관리기관에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누가 이런 걸 믿어주겠는가? 신고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이건 비상 상황이라 어쩔 수 없노라고 김래빈은 마음을 다잡았다. 고개를 갸웃한 차유진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제 됐어. 그 말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본 김래빈이 바닥에 주섬주섬 탁자를 펴고 그 위에 접시와 술병, 술잔을 올렸다.
향에 불을 피워 접시 위에 올려 사르고 술잔에 술을 따른 후 서서히 올라오는 향의 연기 위로 술잔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돌린다. 술잔에 담겨있던 술은 주변에 뿌리고, 다시 새 술을 따라 반복한다. 술을 총 세 번 올린 후 바닥에 엎드려 절하고 무릎 꿇은 채 남은 향이 다 타기를 기다린다. 향이 다 타고 나면 주변을 정리하고 가게로 돌아가 신이 부르기를 기다린다. 그게 무당이 그들에게 설명한 방법이었다.
“다 끝났어?”
“응. 절을 여러 번 해야 하니까 다음번엔 무릎 방석 같은 걸 같이 준비하는 게 낫겠어.”
“나는 제사? 안 하는 거 맞지?”
“그래. 보살님의 말에 따르면 너는 신에게 간청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역할이라고 하니까 너는 안 해도 되는 게 맞아.”
무당의 말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았다.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해보면 알 거라고도 했다. 그들은 일단 가게로 돌아갔다. 김래빈은 잠깐 고민하다가 바의 문 앞에 ‘출장으로 당분간 쉽니다’라는 종이를 붙여 두고 SNS에도 같은 공지를 띄웠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한동안 계속 바를 비워두는 게 나았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바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터앉았다. 바 근처 스탠드를 제외한 나머지 전등은 꺼 둔 채였지만 아직 낮이라 가게 안은 제법 환했다. 바 뒤로 벽장을 가득 채운 술병 장식들이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을 반사해 희미하게 빛났다.
“우리 언제까지 기다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들은 바가 없어.”
“집에서 기다리는 거 안 돼?”
“여기가 도깨비 터라서 영적인 분야에선 집보다 가게가 낫대.”
그들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무것도 안 하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중간부터는 너무 심심했던 차유진이 가게의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왔다. 행맨을 했을 때는 차유진이 연전연승하는 수준이었고, 오목은 그래도 승률이 반반이었다. 제 처참한 영어 어휘 실력을 지적당한 김래빈은 바에 머리를 박았다가, 채소만 가득한 저녁 식사를 주문하는 것으로 차유진에게 복수했다. 나중에는 패드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서로 머리를 맞댄 채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거 말 안 돼. 이야기 너무 이상해! 김래빈 왜 이거 골랐어?”
“할머님께서 좋아하던 드라마라….”
“…오.”
한국의 막장 드라마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차유진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고 남의 할머님 취향을 매도할 순 없는 일이다. 특히 그 할머님이 보내주시는 반찬에 환장하는 차유진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계속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남녀가 한창 싸우고 있는 화면에 금방 흥미를 잃은 차유진은 어느새 느껴지는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직은 해가 짧은 계절, 어느새 창밖도 어둑해져 바 주위를 제외한 가게 안은 어두컴컴한 그늘에 잠겨있었다.
“김래빈. 술 있어? 아까 쓴 거.”
“제사 올리고 남은 거? 왜? 마셔보게?”
차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을 응시했다. 그늘 사이에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가 계속 한 곳을 응시하는 게 신경 쓰이는 듯 김래빈 역시 같은 곳을 향해 흘긋 시선을 돌렸지만,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건 인간이 아닌 존재의 흔적이다.
“저기 귀신 있어. 김래빈 안 보이지?”
귀신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김래빈이 차유진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흡사 목에서 끼기긱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도였다. 김래빈은 쭈삣거리면서도 꽤 오랫동안 가게 한구석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안 보이던 귀신이 보일 리는 없었다.
“너…,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냐. 김래빈 겁 많아. 그러니까 나 약속 지켜.”
한때 차유진은 시도 때도 없이 저기 귀신 있다를 외치며 김래빈을 질겁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소리 없이 얼굴로만 경악한 채로 펄쩍 뛰는 상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였다. 조금 심했던 건 인정한다. 김래빈에게 목 잡혀 흔들릴 뻔한 뒤로 그와 김래빈은 극적인 타협을 보았다. 적어도 귀신으로는 김래빈을 놀리지 않는 걸로.
귀신이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건 김래빈에게는 비밀이다. 도깨비 터인지 뭔지, 이 술집에는 정말로 생각보다 많은 영이 드나들었다. 그게 설령 전부 귀신은 아닐지라도, 김래빈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체질이라 다행이었다.
‘사람이 인간 아닌 거랑 자꾸 말 섞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김래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술을 찾는 동안 자신도 반쯤은 인간 아닌 존재라는 걸 망각한 차유진이 다시 귀신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은 언뜻 보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나라의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끔찍하거나 징그러운 외양을 가진 귀신은 아주 일부분이다. 대부분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생겼다. 저게 사람이 아니라는 감각만 명확할 뿐.
“자. 여기. 이것만 있으면 돼?”
“컵도.”
김래빈에게서 술과 잔을 받아 든 차유진이 잔에 청주를 반쯤 채웠다. 크게 원한이 없이 떠도는 귀신이라면 술을 올리는 것만으로 조용히 사라지리라. 그가 구석진 테이블에 잔을 올리고 돌아오는 내내 김래빈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 갔어?”
“아직. 김래빈 저기 자꾸 보지 마. 귀신은 자기 보는 사람 좋아해. 그래도 내 생각에 쟤 금방 가. 여기 귀신 오래 못 있어. 다른 신한테 걸리면 혼나.”
그가 이제까지 이 바에서 돌아다니면서 목격한 바로는 대체로 그랬다. 저승사자든 신이든, 귀신은 상위의 존재에게 꼼짝 못 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무슨 기준인지는 몰라도 그가 다가가기만 하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넋들도 몇 보았고. 그건 다행이네. 김래빈이 여전히 구석을 흘긋거리며 술병을 받아 들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 이제까지는 술 올리고 그런 거 안 했잖아.”
보통 차유진은 귀신을 살살 달래 내보내는 대신 힘으로 밀어내는 편이다. 귀신이 보이지 않는 김래빈도 차유진이 그를 한창 귀신으로 놀리고 난 후 제가 한 일을 주절주절 떠들어댄 통에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바꿀 거야! 나 힘 아껴.”
차유진은 김래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술을 올리고 제를 지내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힘으로 꼼짝 못 하게 누르는 게 더 편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당의 말 때문이었다. 차유진이 거의 떠밀다시피 상대를 재촉한 탓에 먼저 문을 나섰던 김래빈은 듣지 못한 말이었다.
‘술을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범아.’
차유진이 돌아보았을 때 무당은 부채로 얼굴 반을 가린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신에게 간절히 빌고 싶은 소원은 꼭 너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인간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악에 받친 삿된 것들이 그 술을 보고 무엇을 하겠느냐.’
무당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낯설어도 직감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지켜야 할 것이 술이든 김래빈이든, 지금까지처럼 힘을 낭비할 수 없었다.
“힘이 걱정이면 주기적으로 제주(祭酒)를 받으라니까.”
김래빈은 어이없다는 듯이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붕붕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흔드는 걸 보니 그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청주가 대체 어디가 어때서. 바텐더를 준비하면서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루 매료되었던 김래빈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기다림은 새벽녘에나 끝이 났다. 가게 한구석에서 때이른 빛이 흘러들어오는 걸 눈치챈 김래빈이 바에 엎드려 반쯤 졸고 있던 차유진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이 빛에 삼켜지기 전 확인한 시계는 오전 2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신인진 몰라도 정말 너무하네. 차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녹록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우화 3
—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