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또 하나의 무대가 끝났다. 무대 사이 삽입된 VCR의 음향이 흐릿하게 울리는 사이 김래빈은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대기했다. 스탭들이 붙어 인이어며 마이크를 붙이더니 마지막까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렇지 않아도 피어싱으로 화려한 귀에는 댕기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추가하고, 양손에 낀 결속 팔찌며 포인트로 맨 노리개 장식에도 자잘한 금속 조각들이 달랑달랑하다. 의상 불편한 곳 없으시죠. 다음 무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덩달아 초조해진 스탭들이 마지막으로 점검하듯 질문들을 쏟아낸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편 김래빈이 단단하게 대답한다. 예. 좋습니다.
VCR이 끝나면 무대는 캄캄해질 것이다. 김래빈의 솔로 무대는 애초에 그렇게 계획되었다. 그가 무대 위에 올라가고 나면 다른 빛이 사라진 곳에서 빛나는 건 팬들의 응원봉과 등불 뿐일 예정이었다. 그의 솔로곡 <반짝>이었다. 두번째 콘서트 때에는 무대 조명으로 불빛을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키네틱 아트에 초롱을 접목했다. 앨범과 무대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그룹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십 수 개의 초롱이 빛을 발하며 느릿하게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정작 리허설 무대에서 장치를 확인하던 김래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푼젤이었지.'
수백 개의 풍등이 하늘로 오르던 바로 그 장면. 유진이라는 이름이 다른 한국인들의 이름처럼 한글 아니면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일 것이라 김래빈이 믿어 의심치 않았을 때, 차유진이 대뜸 들이민 영화였다.
'이거 몰라? 내 이름, 유진.'
손가락이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습생의 신분으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차유진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김래빈이 라푼젤의 남자주인공 이름인 'Eugene' 역시 영어 이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막엔 영문 이름 표기가 없었고, 엔딩롤에 흘러나오는 ost는 들어도 엔딩롤 자체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어린 김래빈을 그 역시 몰랐던 탓이다. 반응은 반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아... 그 머쓱한 반응에 차유진의 목소리와 눈썹이 함께 휙 올라갔다. Seriously?
'내 이름도 유진, 얘도 유진, 그래서 친구 놀림 많다.'
"그럴 때는, 친구가, 많이, 놀렸다 라고 해.'
'...친구가 많이 놀렸다?'
작은 화면으로 함께 영화를 보면서 얼기설기 꿰어맞춘 한국어로 그 때 일을 들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이름으로 놀림받는 일은 흔하다. 초등학교에서 동물과 관련된 영어 단어를 가르칠 때부터 김래빈 역시 종종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들을 들었다. 나도, 하고 그 때의 김래빈은 중얼거렸다. 어렴풋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차유진은 라푼젤이 지겹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흥얼거림이 한쪽씩 나눠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그 날 차유진은 결국 김래빈과 엔딩롤이 다 끝날 때까지 영화를 지켜봤다.
사실 차유진을 생각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무대였다. 이 무대는 구성부터 차유진을 의식한 무대였다. 세트리스트상 중간에 짧은 VCR은 끼웠지만 차유진의 솔로 무대 바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솔로 무대로는 누가 들어간대도 부담스러울 자리. 박문대는 세트리스트를 고민하던 자리에서 김래빈을 따로 불러 물었다. 차유진 뒤에 무대 하는 거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서두가 그랬다.
'형께서 물으신 말은, 혹시 저에 대한 말입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 무대 퀄리티에 대한 걱정이었다면, 객관적으로 차유진을 능가하는 무대를 만들 수 있으리란 판단은 들지 않습니다만... 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래빈의 대답에 박문대는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내가 또 행간을 잘못 읽었나. 김래빈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하나, 둘 떠오르고, 침묵을 이기지 못한 김래빈이 그 뜻이 아니라면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긴 문장을 뱉어내려 할 때쯤, 다행히 박문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는데, 네 능력엔 한 점 의심도 없다. 솔로 무대건 유닛 무대건 이제까지의 네 무대는 다 좋았어.'
다만. 박문대는 김래빈의 역량을 담백하게 인정했지만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김래빈조차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차유진이지. 과찬이십니다, 하고 답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문대가 떠올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에너지와 장악력을 지레 걱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김래빈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콘서트에서 무대구성과 관련된 고민은 저희가 이제까지 계속 해오지 않았습니까? 축적된 경험을 통해 좋은 전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 다른 분들의 염려는 감사합니다만, 차유진과의 비교가 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힐 것 같진 않습니다.'
테스타의 그 누구도 김래빈만큼 차유진과의 비교에 익숙할 수 없었다. 같은 소속사의 연습생, 동갑, 부분적으로 겹치는 포지션. 연습생 때는 물론 같은 데뷔조에 들어서도 달마다 평가를 받았다. 종종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심할 때에는 몇 달을 연속해서 차유진과 매치된 적도 있었다. 그러니 1 대 1 비교라 해도 이미 물릴 만큼 들었다. 편집으로 잘려나갔지만 아주사의 첫 번째 등수 산정일에도 비슷한 인터뷰가 들어왔다. 같은 소속사 출신과 나란히 1, 2등을 했는데 2등이라 아쉽진 않나요?
그때 자신은 차유진을 질투했던가? 가슴을 간혹 찌르던 약간의 따끔거림과 비쭉거림, 그리고 막연한 슬픔과 흐릿한 아득함이 질투라면 그는 차유진을 질투한 게 맞았다. 그렇지만 김래빈은 강원도의 자연과 농사하는 조부모 아래서 자랐다. 온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면, 혹은 날이 가물면 작황이 안 좋은 걸 염려하다가도 한숨 한 번에 모든 걸 털어버리고 다음을 대비하는 농사꾼의 기질은 김래빈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그렇게 한숨으로 털어내고 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그래서 김래빈은 항상 그랬듯 말할 수 있었다.
'예. 아쉽지 않습니다. 차유진 참가자는 배울 점이 많고 뛰어난 친구입니다. 결과에 승복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테스타로 데뷔하고 나서는 오히려 차유진이 센터로 가고 김래빈의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 부각되면서 둘을 비교하는 여론 자체가 급격히 감소했다. 아예 영역이 다르다는 거다. 그래도 김래빈은 은연중 차유진의 무대를 프로듀서의 눈 뿐만 아니라 같은 아이돌의 눈으로도 지켜봤다. 종종 돌려보고 분석했다. 그 역시 아이돌로서의 욕심이 있었기에.
"VCR 종료 10초 전, 10!"
아주 대조적으로 가죠. 박문대가 결론을 내렸을 때 김래빈은 그래서 망설임 없이 곡을 고를 수 있었다. 래퍼로서의 실력, 그리고 곡의 작곡가만이 가질 수 있는 이해, 그리고 무대 구성. 이 세 가지를 제 패 삼아.
"9!"
차유진에겐 이제 한자로 된 이름이 생겼다. 다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뒤져가며 한자를 고를 때 김래빈도 옆에 있었다. 오로지 유에 별 진. 하나의 오롯한 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8!"
다만 평소 사전을 끼고 살았던, 그래서 단어의 어감과 미묘한 뜻 차이에 예민했던 김래빈만은 성(星)과 진(辰)의 차이가 궁금해서 한자의 어원을 다룬 두꺼운 책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 두꺼운 책마저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렴풋한 차이는 인지할 수 있었다.
"7!"
진(辰). 별자리, 별이라는 관념 그 자체, 태양과 달을 포함해 행성과 항성까지를 포괄하는 천체의 총칭, 광활한 우주의 모든 빛나는 것과 빛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글자. 김래빈은 생각했다. 태양이든 별이든 무엇이든, 너는 거대한 천체임에 틀림없겠지.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까진 될 수 없었다.
"6!"
김래빈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숨소리가 고동을 타고 다시 몸으로 흘러들었다. 다시 숨을 내쉬고. 김래빈은 차유진만큼이나 그 자신 또한 오랫동안 곱씹어왔다. 비교란 그런 것이다. 너를 객관적으로 보는 만큼 나 자신 역시 객관화된다. 그것을 토대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5!"
피치를 낮추고, 조성을 바꾸고, 플로우 위로 자유롭게 언어를 얹는다. 본인이 만들었던 비트를 스스로 헤집고 가사를 비틀어 즉석에서 유영하듯 노래의 이면을 드러낸다. 탈바꿈한다. 변형은 김래빈만의 것이 아니지만 숨쉬는듯한 능란함은 그의 것이다. 차유진도 즉흥에 강하지만, 박자와 가사를 가지고 노는 건 김래빈이 한 수 위다.
"4!"
안다. 태양이든 별이든 차유진은 스스로 빛날 것이다. 때로는 그 빛이 모든 걸 압도한다. 김래빈은 그 대신 가장 인공적인 빛을 끌어들였다. 빛을 반사하는 금속의 장신구를 온 몸에 두른 채, 만들어진 불을 켜고. 그 반짝임은 너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이것은 모방이 아니다.
"3!"
퓨쳐 베이스. 가장 오래된 도깨비인 김래빈이 극도로 미래의 장르를 끌어들였다. 등불은 네온 빛이다. 번화한 도시의 찬란한 밤거리, 그리고 도깨비불이 뒤섞인다. 요사한, 아른한, 혼몽한. 장르와 무대장치가 뒤섞인다.
"2!"
도깨비불은 사람을 홀린다. 네가 별이라면, 천체라면, 나 역시 숲을 적시는 색채, 빛나는 무엇, 찬란한(彬) 것이다. 김래빈은 제 리허설 무대를 눈에 담은 차유진의 반응을 기억한다. 너는 좋아했다. 네 안목을 안다.
"1!"
팬들도 그럴 것이다. 등불이 켜졌다.
함성이 쏟아졌다.
이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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