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유진. 아마도 열 일곱.
연습실 바닥에 열댓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있었다. 앞으로 같이 연습을 할 팀이라고 했다.
"자자. 나이 순서대로, 또 이름 순서대로 한 명씩 앞에 나와서 소개를 해 볼까?"
자기 소개를 하는 방식 치고는 아주 고루했다. 그래도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엇비슷한 자기 소개가 줄줄이 이어졌다. 듣는 이들 역시 야유 하나 없이, 호응은 박수뿐이다. 하기야 트레이너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누가 감히 튀려고 하겠는가. 그들의 평가에 자신의 데뷔가 걸려 있을 텐데.
"안녕! 나 차유진! 캘리포니아에서 와요! 아이돌 멋져요. 재미! 기대해요!"
아이돌로 무대에 서는 게 멋져보였다고. 앞으로의 나날을 기대하며 설레고 있었다고.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게 즐거울 것 같다고. 영어였다면 좀 더 근사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었고, 차유진은 말은 쓸수록 늘어난다는 한국어 강사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그러므로 그는 용기있게 낯선 언어로 자기소개하기를 감행했다. 차유진이 생각하기엔, 원어민들은 제가 좀 서툴다 한들 관용을 베풀어주는 게 맞았다. 무릇 외국어를 배운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보이는 건 제 말에 웃음을 참는 사람들의 면면들이다. 박수소리가 드문드문 울리지만 아무래도 이전 사람에 비하면 작고 뻘쭘하다. 웃음을 참느라 박수 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다수의 호의, 드문 적의, 익숙한 질투, 어쩌면 경외. 학교를 다니던 때 흔히 보아온 감정들이 또래들의 눈에 떠다닌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도 세상이 뒤집어지지는 않는구나. 그 점에만은, 차유진은 조금, 아주 조금 실망했다.
다만 그 중에서도 오직 한 명은, 읽기 어려운 표정을 한 채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차유진은 눈썹을 까딱 위로 올린 채 입술을 오므렸다. 오며가며 마주친 얼굴이었다. 김래빈. 생긴것과는 영 다르게, 빠르게 부르면 토끼처럼도 들리는 그 이름. 그렇지만 김래빈은 그렇게 소리내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하는 내도록 아주 진중한 태도를 취했던 그는, 한 글자씩 새기듯 그의 이름을 말했다. 김래빈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직선으로 끝맺어지는 래-와, 비교해 단호한듯 매듭지어지는 빈. 외국인인 자신이 듣기에도 발음에 혼동이 없으니 같은 한국사람이 듣기에는 더 명확히 들렸으리라.
랩 하는 것도 들어보고 싶은데. 자기소개를 들으며 언뜻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의 곡은 이미 들어봤다. 네 또래의 작곡 잘 하는 친구도 있어. '실장님'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차유진에게 데모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잘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미리 들려주는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쉬이 읽히는 것보단 읽히지 않는 것이 더 흥미롭다. 게다가, Artistic. 재능있고. 응. 좋아. 잘 지내면 좋겠네. 같은 팀 하면 즐겁겠어.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원래 인간관계란 연연하면 될 것도 오히려 안 되는 법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했고, 시간은 대개는, 적어도 이럴 때 만큼은 차유진의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차유진은 가볍게 생각했다.
2. 차유진. 어떤 열 일곱.
김래빈은 그의 생각보다 더 재밌고 진지하고 골때리는 인간이었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은 올곧아 읽을만 했는데, 입에서 줄줄줄 나오는 문장은 발음만 약오를 정도로 정확했다.
"이번에도 부탁을 하게 되다니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할머님이 말씀하시길 부족한 걸 배우는 것이 모르는 걸 숨기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어. 물론 너는 나와 동갑이지만 스승이란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들 해. 그러니 차유진 네가 지금 시간이 된다면 부디 월말평가 연습곡에 대해 기탄없는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
일단 차유진을 배려하기는 한 모양인지, 속도는 느렸다. 그렇지만 발음이 정확하고 속도가 느리면 뭐 해. 뜯어보면 죄 모르는 단어, 단어, 조사, 접속사, 차유진 - 앗 이건 내 이름- 연습, 그리고 또 모르는 단어, 조사, 근데 이게 조사가 맞나? 아무튼 모르는 단어가 한무더기였다. 김래빈은 나름대로 쉬운 단어로 고쳐 말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지 몇 개월 안 된 태생 미국인을 너무 얕봤다. 영어에도 서로 비슷한 발음은 차고 넘치지만 적어도 스펠링은 다르건만 한글은 무슨, 생김새마저 정확하게 같은 단어들의 뜻이 제각각이다. 그 말은, 차유진은 아직도 한글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차유진은 해맑게 웃었다. 알아들은 건 몇 개의 단어밖에 없고, 그게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평소처럼 그저 떠드는 거라면 차유진도 듣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단어를 열심히 주워들어 가며 대화의 분위기를 즐기겠지만, 지금의 김래빈은 대답을 요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김래빈이 한번 더 말해주는 수밖에. 이건 김래빈이 말을 너무 어렵게 하는 탓이다.
"나 말 몰라."
김래빈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화난 것처럼도 보이는 저 얼굴은, 차유진이 이제까지 봐온 바에 따르면 그저 진지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는가 싶던 김래빈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앞뒤에 붙이던 설명과 예의와 형식을 과감하게 다 걷어내고 나면, 아주 짧고 핵심적인 한 마디만이 남는다.
"차유진. 연습곡 도와줘."
단어는 대충 세 개. 차유진, 연습곡, 도와줘. 셋 다 아는 말이다. 아하.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 내 도움 필요해?"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미간의 주름이 어느덧 말끔하게 사라졌다. 역시 화를 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제가 맞았다. 차유진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김래빈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재능에 비해선 받는 평가가 낮았다. 김래빈은 그것이 제 춤과 노래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김래빈이 모르는 게 하나, 어쩌면 두 개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기서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려줄 수 있었다. 아, 물론 춤도.
적임자를 잘 찾아왔네. 제 잘난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차유진은 뿌듯하게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좋아. 나 전문가. 김래빈 같이 가."
죽죽 걸어나가는 차유진의 뒤를 따르던 김래빈이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혼란스러운 것처럼 그를 불렀다.
"? 그쪽은 연습실이 아닌데?"
Nope! 차유진은 경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김래빈의 팔을 잡고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속도를 올려서 뛰기 시작하면, 김래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일단 같이 뛰었다. 차유진 어디 가? 당황에 길고 긴 꼬리를 뗀 물음은 예의를 차린 말씨보다 훨씬 알아듣기 좋았다. 차유진은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들로부터 배운 단어를 써먹어보기로 결심했다.
"'땡땡이' 알아?"
땡땡이라니, 그건 속된말로, 입에 담기, 부적절한, 아니 그 전에, 알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로서... 당황하고 숨 찬 김래빈은 횡설수설하더니 이내 상황을 깨달았는지 어? 하고 꽥 소리를 지른다. 오, 그래도 용케 상황을 알아차렸는데. 차유진은 그 와중에도 감탄했다.
"차유진!!!"
그는 대답 없이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올려다보면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놀러가기 좋은 날이었다.
3. 김래빈. 올해로 방년 17세.
"김래빈 너무 심각해."
차유진은 너무 가볍다. 김래빈은 한숨을 쉬었다. 차유진의 입에 물린 닭꼬치의 막대기가 리듬에 맞춰 까닥였다. 한국인도 맵게 느끼는 맛이라고 말렸건만 매운 걸 잘 먹는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반쯤은 제가 먹고 차유진은 소금구이 한 꼬치를 더 들었다. 자신이 많이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우기는 얼굴은 당당하고 뻔뻔하다. 김래빈은 그저 심란했다. 자율연습이라고 해도 연습을 빠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뜻 연습생 계약을 권유해주신 회사 사람들, 손자가 서울 생활을 잘 할 거라 믿고 있을 할아버님, 그리고 할머님, 잠깐은 반대했지만 이내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라며 저를 든든히 지원해주던 누나, 나중에 테레비에 나오냐며 응원해주던 마을 주민 분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는데 벌써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래빈은 속으로나마 열심히 사과했다.
'이거 김래빈 필요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유진은 단호했다. 차유진은 영어를 섞어서 뭔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김래빈이 태반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나왔다.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울의 번화가를 맴돌았다. 차유진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꼬아 말하지도 않는다. 말이 서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차유진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놀고 싶었던 거라면 진작에 그에게 놀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차유진을 이제까지 몇 번 거절해왔기에 김래빈은 안다. 차유진은 거절에 별로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Well, 하고 한번 눈을 굴리고는 다음에 놀아, 하고 가버린다. 쟤는 가끔 진짜 쿨해. 형들의 속삭임에 김래빈은 동의했다.
그러니까, 차유진이 내린 판단이 옳은지 여부와는 별개로, 차유진은 이게 정말로 김래빈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차유진, 언제까지 있을 거야?"
"더."
핸드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검색하던 차유진은 아까부터 같은 자리에 죽치고 앉아았다. 곧 해가 저물 시간이었다. 김래빈은 더 묻는 대신 제 앞의 현수막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20XX년 OOO의 날 기념. OO구민을 위한 저녁 음악회. 나온다는 사람에도, 곡 리스트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참가자명으로 추정해보건대, 동아리와 아마추어 연주가들도 반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연습곡과는 장르부터 달랐다.
'혹시 차유진이 여기 나오는 누군가를 알고 있나? 차유진은 한국말로 길게 말하는 걸 불편해하니까, 그 누군가는 분명 아이돌 활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서 좀 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의 확실한 조언을 위해 차유진이 여기로 나를......'
길게 흘러가던 사념은 무대가 시작되며 끊겼다.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아주 많지는 않은 수가 드문드문 공간을 채운다. 조깅하다 온 것처럼 위아래로 운동복을 챙겨입은 사람, 유모차를 끌고 가다 잠시 들른 것처럼 보이는 부부, 손에 커피를 들고 걷던 직장인들. 공연하는 사람들만큼 소박한 관중이었다. 색소폰 소리를 열린 공간에서 실제로 들으면 저런 느낌이구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김래빈은 짧게 감탄했다.
그때 차유진이 김래빈의 팔을 쿡 찔렀다. 김래빈 봐. 공연을 의식해서인지, 에너지 넘치는 평소보다는 훨씬 낮고 소곤대는 목소리였다. 김래빈은 차유진 쪽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차유진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킨다. 무대, 하고 속삭이고는, 이번에는 옆쪽을 쭉 훑듯이 손을 움직인다. 보는 사람. 그럼에도 여전히 물음표를 띄우는 그에게 좀 더 길어진, 그러나 여전히 느리고 대부분이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설명이 음악 사이로 드문드문 들려온다.
"아이돌, 무대 하는 사람. 내 말 맞아? 무대, 보는 사람 있어. 김래빈, 보는 사람 몰라. 그 사람 김래빈 봐. 김래빈 곡 잘 골라. 잘 만들어. 음악 중요한 맞아. 근데 음악 하나 아냐."
너, 하고 다시 차유진이 김래빈을 가리킨다. 관객들은 너를 보러 와. 툭툭 끊어지는 문법 속에서 김래빈은 어설프게 뜻을 잡아올린다. 그걸 다 소화할 새도 없이 말이 이어진다.
"무대 즐거움, 에너지. 김래빈이 보여줘. 다른 사람 아냐. 보는 사람 너 봐. 무대에서 꼭 솔직한 행동 이유. 근데 아니다. 김래빈 규칙 좋아해. 선배 존중? 존경? 해. 김래빈 많이 말하는 단어. 맞아? 좋아. 근데 김래빈 안 보여. 숨어. 김래빈 예의 좋아. 근데 무대 나빠."
중간중간 영어가 섞인다. 그래도 차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영어가 흘러나오면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가, 다시 서투른 한국어가 힘겹게 등장한다. 김래빈은 김래빈 알아? 솔직해? 그걸 말하는 게 목적이라는듯, 무대에서 완전히 눈을 돌린 차유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래빈은 그제야 떠올린다. 차유진은 오늘 온종일 돌아다니며 그에게 많은 걸 물었다. 김래빈 재밌어? 김래빈 좋아? 대답하면서도 왜 묻는지 몰랐던 질문들이 연이어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오락실은 시끄러웠고 게임은 낯설었다. 동전을 많이 바꿔갔지만 인형뽑기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피티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반쯤 녹슨 금속 가벽 위에 뾰족하고 과장되고 색색이 화려한 글자와 그림들이 엉켜 있었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기가 커서인지 압도적으로 인상깊었다. 차유진은 누가 그런 걸 입나 싶은 옷을 골랐고, 김래빈은 평소라면 입지 않을 옷을 잠시 매만져보았다가 곧 내려놓았다.
그랬던가. 듣는 걸 내려놓고 김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첫째. 내가 나를 모르는가?'
김래빈은 어릴 적 잠깐은 이구아나를 기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이구아나를 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조부모는 이구아나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누나는 난처해 했고 김래빈은 여기서는 이구아나를 기르는 게 불가능하다는 길고 다정한 설명을 들었다. 어린 김래빈은 낙심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는 달팽이에 빠진 덕이었다. 그 느릿하게 더듬이를 움직이는 모양새와 반질거리는 껍데기, 야채를 갉아먹는 식성 따위를 김래빈은 퍽 귀엽다고 느꼈다. 다행이 달팽이는 이구아나와는 달리 집 옆 텃밭에만 가도 잡을 수 있었다. 김래빈의 누나는 질겁했지만, 그래도 김래빈은 달팽이를 꽤 오래 길렀다.
'상황에 따라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건 당연해.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지 않다고 거짓을 말해본 적은 없어.'
그렇지만 강원도에서 보고듣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울에서 접한 건 사실이니, 취향에 대해서는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김래빈은 내심 끄덕이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둘째. 규칙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차유진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럼 또 다음은.
'내가 무대에서 나를 숨겼던가?'
소속사에서 지정하는 연습곡들은 대개 그 소속사 선배 아이돌의 곡이었다. 소속사의 색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선학들에 대해 공부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김래빈은 그래서 연습곡이 정해지면 그 아이돌의 무대를 끊임없이 돌려보고 분석했다. 그리고 최대한 구현해보고자 노력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이 하는 건 답이 될 수 없었다. 편곡에야 당연히 손을 댔지만 퍼포먼스는?
김래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따라하기에 급급했는지도. 김래빈은 긍정했다. 차유진이 한 말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검토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겨, 김래빈은 입을 열었다.
"차유진, 넌 아이돌에 진지해?"
차유진은 왓? 하더니 도리어 의아하다는듯 얼굴을 기울인다.
"매일 진지해!"
그렇구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유진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돌에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대와 관중에 대한 고찰은 쉽게 생각해서 나올만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너를 오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조언에 대한 보답으로, 차유진에게 좀 더 적절한 표현을 알려주기로 했다.
"차유진. 재미로 아이돌을 하냐는 질문은, 너는 아이돌에 진지하지 않냐고 묻는 거야."
너는 재미로 아이돌 해? 누군가의 질문에 Yes 나 재밌고 잘 해, 하며 선선히 웃던 얼굴. 듣고 있던 다른 연습생들이 오히려 더 경악하며 수군대는 가운데 차유진 혼자만이 태연했다. 얼굴이 잘 나서, 미국 출신이라서, 학교에서도 잘 나가는 애였다고 하니까. 그 이후 차유진의 행동에 붙던 수많은 꼬릿말을 김래빈은 알았다.
'차유진은 한국말이 아직 약하니까.'
차유진은 그런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차유진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다시 김래빈을 끌고 갔다. 둘은 저녁 때에야 다시 복귀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몫만큼 그들을 걱정하고 꾸중하는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4. 차유진. 여전히 열 일곱.
차유진!
김래빈이 저를 부른다. 다가온 김래빈의 눈이 반짝반짝하다.
"내가 선배님들이 아닌 이상 동일한 방식의 무대로는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없으니 자신의 색을 섞어서 선배들의 무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대중의 만족도에 좀 더 유의미할 거라는 너의 뜻은 과연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어."
차유진은 알게 되었다. 신난 김래빈의 말은 평소보다 더 장황하고 어렵군. 그리고 생뚱맞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내가 저렇게 이야기를 했던가? 결과물을 보면 김래빈이 자기 뜻을 이해한 것 같기는 한데, 그가 하는 말에서 제가 실제로 썼던 단어는 무대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김래빈은 신났고, 결과는 좋았다. 그러니까 HAPPY ENDING.
다만 김래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해져보라는 네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봤어. 결론적으로,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제까지 너의 해석을 존중해서 하지 못한 말을 지금 해볼까 해."
차유진. 브릿지 부분에서의 너의 안무는 분명 멋지지만 내가 저번에 작곡가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부분은 좀 더 무겁고 단조롭게 표현하는 것이 맞아.
Oh. I see. 나도 김래빈 몰랐어. 제게 똑바로 와 꽂히는 시선, 그 완전한 확신을 보며 차유진은 중얼거렸다. 너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래도 웃음이 샜다. 그런 김래빈 역시 멋지니까.
"좋아. 나 해봐. 김래빈 말 더 좋으면 바꿔. 아직 누가 맞다 몰라."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의 아이디어는 일단 듣기로 썩 나쁘지 않았다. 떠오르는 동작도 몇 가지 있었다. 그래도 차유진은 제 표현에 자신이 있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 눈을 빛내며 차유진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면, 김래빈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다음엔 바다 놀러가! 차유진의 말이 복도를 울렸다. 그래. 그렇지만 연습은 빠질 수 없어. 꾸준한 노력은 아이돌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져야 하는 미덕이고, 그것이 설령 자율 연습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김래빈의 느리고 길고 정확한 말이 그 뒤를 잇는다. 둘 사이 거리는 이전보다 좁았다. 설령 차유진의 한쪽 귀로 흘러간 그 문장이 그래, 를 제외하곤 전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다고 한들 아직은 괜찮을 때였다.
땡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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