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림노래

  • 할로윈 합작을 모집하고 수합하느라 고생하셨을 3333님께 감사드립니다. (합작페이지는 지금은 삭제되었습니다.)
  • 음악과 함께 보시면 좋을지도…  
차유진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앞섶이 피로 범벅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흐느끼는듯한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맞은편에 첼리스트가 앉아있었다. 우아한 연미복에 볼로타이를 한 채 목과 양 손은 온통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얼굴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촛대에 올려진 촛불이 겨우 희미하게 식탁을 비추는 어두운 방이었다. 주변은 안개가 낀듯 희끄무레했다. 음산하고, 온통 어둡고, 몇명이고 앉을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식탁에는 그와 첼리스트뿐이었다.

식탁에는 방금 조리한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지만 식욕은 들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은식기는 아주 묵직해서 도리어 피로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쩐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끼익- 하는 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활줄이 다 끊어질 것 같은 강하고 기분나쁜 불협화음이었다.

차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첼리스트가 굳은 것처럼 멈춰있었다. 붕대로 감겨 움직임이 무딘 손이 가만히 활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먹으면 안 돼.”

잔뜩 쉰 목소리였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 다 긁힌 목소리만으로는 나이와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차유진은 물었다. 왜?

“이유는 듣지 못했어.”

그건 알려주지 않았잖아. 중얼거린 첼리스트가 그에게로 무언가를 던졌다. 그의 앞접시로 둘둘 말린 종이가 안착했다. 종이를 펼쳐보니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가 보였다. 짧은 악보였다. 급하게 그린 것처럼 형태가 들쭉날쭉했다. 그래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음악을 배웠던가?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 악보를 읽는 방법은 —에게 배웠던 것 같다. 구박을 엄청 들었던 것도 같았다.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차유진은 악보를 더듬었다. 단순한 멜로디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디의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도돌이표 위에 무한대 기호(∞)가 표기되어 있다는 것 정도. 이 악보대로라면, 이 멜로디를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노래였다.

“차유진, 모르겠어? 네가 알려준 거잖아. 악보도, 식사도.”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첼리스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나 알아?”

“너는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만큼은 잘 하니까 괜찮을 거야. 다른 곳 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 노래는 멈추지 말고. 절대 멈추면 안 돼.”

첼리스트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잘 가 차유진. 붕대 감긴 손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식탁 역시 사라져 있었다. 촛불도 사라지자 주변이 완전히 어두컴컴했다. 당황한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잔뜩 쉰 목소리의, 작은 흥얼거림이 들려온 건 그 때였다.

단순한 멜로디였다. 차유진은 그 노래에 귀를 기울여 그것이 제가 받았던 악보의 그 멜로디임을 알아챘다. 처음 듣는데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그는 입을 떼었다. 첼리스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이 흘러가기를 기다려 중간마디 부분을 잡고 끼어들면, 그가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앞선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졌다. 노래는 멈추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했지.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 멜로디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차유진도 멈추지 않았다. 연습한 적도 없는데 음을 헷갈릴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동일한 선율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 음을 쫓아 걸었다. 그러다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헐떡이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빛이 보였다.





“—!!”

그리고 눈을 뜨면. 낯선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헉, 차유진, 정신이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그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랬다. 맞다. 김래빈이다. 그에게 악보 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 잔소리 많은 나의 친구. 그런데 왜 아까는 기억나지 않았지. 차유진은 부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김래빈, 여기 어디야. 약의 기운에 아직 절어, 그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걸 들으며 떨리는 숨을 훅 들이키던 김래빈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다시 크게 숨을 내쉬고. 아 김래빈, 화났네. 차유진이 깨닫자마자.

“너는 왜 항상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고함이 그의 귀를 울렸다. 그는 그제야 떠올렸다. 도주한 범인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가 칼에 찔렸던가. 그는 가슴을 더듬었다. 온통 붕대가 감겨있었다. 김래빈. 그는 친애하는 그의 친구를 불렀다. 목이 말라 목소리가 다 갈라졌어도 지금이어야 했다. 그가 모든 걸 잊어버리기 전에.

“나, 김래빈이 작곡해줬으면 하는 거 있어.”

“뭐?”

“녹음기 있어? 따라리라, 따, 하는 멜로디로 시작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게 문제야? 너, 넌… 죽다 살아났다고!”

안 돼. 지금 해야 해. 휴대폰을 찾기 위해 차유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김래빈은 미친놈 보는 눈으로도 질겁하며 그를 만류하곤 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차유진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너 아직 덜 아물어서 그렇게 몸을 일으키면 의사선생님께서 애써 봉합한 게 아무 소용이 없잖아, 이 바보야! 차라리 내가 꺼낼게. 빨리 안 누워?“

물론 차유진은 제가 움직이면 김래빈이 저럴 걸 알았다. 소리죽여 웃고는 그는 김래빈이 녹음기 버튼을 누르기를 기다려 점점 가물거리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이거 꼭 다듬어줘야 해. 맨 마지막에는 무한대로 도돌이표가 들어가고. 두 명이서 불러. 한 명은 늦게 들어가. 알겠어, 김래빈? 떠오르는 대로 제멋대로 말을 꺼내다보면 다시 약과 함께 잠이 밀려들어왔다. 김래빈 꼭 해줘야 해. 차유진은 제가 그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른 채 잠들었다.



*



김래빈은 약속을 지켰다. 퇴원은 애저녁에 마친 차유진이 연락을 받고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짧은 악보를 내밀었다.

“자. 부탁했던 거. 이게 맞는진 잘 모르겠지만, 네가 녹음해준 멜로디로 미루어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런 형태야. 이거 말고도 후보군을 세 개 정도 더 만들어두었으니까 아닌 것 같으면 말하고.”

차유진은 악보를 들어올렸다. 아주 단정한 필체로 그려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가 한때 보았던 악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수정할 게 없었다. 과연 김래빈이었다.

“아냐. 이거 맞아.”

“그럼 됐어. …근데, 차유진. 대체 이런 멜로디를 언제 떠올린 거야?”

네 말로 유추해봤을 때, 이건 아주 단순한 형태의 돌림노래야. 2성부만으로 제대로 된 화음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데, 네가 이제까지 작곡에 조예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궁금했어. 물론 내가 모르던 너의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너는 작곡을 배운 것도 아니잖아? 주절주절 의문점을 털어놓은 김래빈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그 시선에 차유진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네가 알려줬어.”

“? 나는 이런 걸 작곡한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의문을 못 들은척 하기로 했다. 대신 김래빈에게서 펜을 빌려, 그는 악보의 서두에 제목을 슥슥 적어넣었다. 이걸로 하자! 경쾌하게 말하면 김래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도 그 제목을 진지하게 눈에 담았다. Orpheus.

“상황을 떠올려봤을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제목은 아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김래빈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연미복에 볼로타이, 그리고 얇게 잘린 붕대. 차유진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익숙한 행색이었다. 한켠에 놓인 첼로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저 가방을 메고, 저 붕대를 목과 손에 감으면, 그러면.

“….김래빈, 오늘 어디 가?”

“자선연주회. 저번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말 하긴 했는데, 분장한다는 말 없었어!”

할로윈이잖아. 붕대가 좀 거추장스럽긴 하겠지만, 단순한 곡이고 또 익숙해질까지 연습을 반복했으니까 문제 없어. 김래빈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차유진은 웃을 수 없었다. 김래빈. 겨우 이름을 부르고는,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꾹 쥐었다. 그랬어. 그랬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그를 스쳤다. 그는 김래빈에게로 척척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완성된 악보를 쥐어주었다.

“김래빈. 잘 들어.”

“뭐야. 이걸 왜 나를 줘?”

김래빈은 눈치는 꽝이지만 진지한 부탁을 무시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납득시키지 못해도 꼭 필요하다고 우긴다면 들어줄 것이다. 차유진은 거기에 믿음을 걸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무것도 먹으면 안 돼. 이 멜로디도 잊어버리면 안 돼. 김래빈 나보다 노래 잘 하니까 괜찮을 거야. 다른 곳은 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 가.”

“지금 너 빼고 맛있는 거 먹을까봐 이래?”

차유진은 김래빈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무시하기로 했다. 말하고 있는 게 저인지, 아니면 기억 속의 목소리가 제 몸을 빌려 흘러나오는 건지. 차유진은 알지 못했다.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계속 말했다. 돌림노래야. 김래빈 알고 있어. 노래는 멈추지 마. 절대 멈추면 안 돼.

차유진? 의아한 얼굴을 한 김래빈에게 시선을 맞추며, 그는 그 손을 꾹 잡았다. 내 말 잊지 마.

“김래빈. 꼭 돌아와.”





차유진은 그 밤 내내 김래빈 없는 공간에서 그 단조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



화재가 난 보육시설의 아동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연기를 들이마신 걸로 추정,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한국계 첼리스트는 병원에 실려간 그 다음날 아침에 무사히 깨어났다.

코멘트

답글 남기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