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래에는 영어로 된 낯선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는 짐을 챙겼다. 먼 길이었고 챙겨야 할 짐도 많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이제는 이력이 난 짐 싸는 일보다도 비행기표를 끊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비행기 안에 비좁게 앉아 구글로 찾아본 예상 이동 경로를 중얼중얼 복습해보며 그는 비행기모드로 바꿔둔 핸드폰을 열어 자신이 받았던 메세지를 눈에 담았다. 꼼꼼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뛰쳐나와버렸으니 마음이 불안해야 할텐데, 어쩐지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강했다. 아직 차유진과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그런 감각.
11시간을 비행해 낯선 공항에 내려서 다시 샌디에이고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창 밖으로 풍경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점점 더 분위기가 낯설어졌다. 이국적인 광경을 그는 느리게 둘러보았다. 시즌 그리팅을 제작할 때였나 뮤비를 촬영할 때였나. 그들은 이 인근까지 오게 된 적이 있었다. 차유진은 한껏 들떠있었고, 자신은... 잘 모르겠다. 차유진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가지 못했던 것만 기억났다.
'차유진은 집이니까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은 당연히 개인행동 금지야. 김래빈 너도 나가지 말고 숙소에 있어.'
김래빈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차유진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자유롭게 놀러나가면 형들이 섭섭해하실 테니까.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되뇌며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차유진은 조금 아쉬워했지만 친구를 혼자 둔다는 아쉬움이 집에 간다는 기쁨을 이길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음에 좀 더 한가할 때 같이 놀러오자는 약속을 남기고 집으로 떠났다.
물론 그 뒤에도, 그들이 오래 한가할 때에도, 김래빈이 차유진의 집에 가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가 상상한 차유진의 집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와 차유진은 연습생 생활을 함께 했고, 자연스레 그의 가족이나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드문드문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김래빈이 상상한 차유진의 집은 강아지를 포함해 대가족이 살고 있는, 해변가에 가까운 마당이 딸린 주택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곳은 공동주택에 좀 더 가까운 형태를 가진 건물의 좁고 작은 현관 앞이었다. 바다 근처도 아니었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가 타고 온 택시는 이미 야속하게 떠난 상태였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있더라도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물어볼 만한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아무렴 택시가 영 이상한 곳에 떨궈두었으려고. 그는 호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차유진에게 도착했다고 메세지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 초인종을 눌렀다. 삑. 소리가 짧게 울렸다가 사라질때까지도 문은 조용했다가, 그가 실례를 무릅쓰고 한 번 더 눌러야 할지 아니면 차유진에게 전화를 걸어볼지를 고민하는 사이에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녕, 차유진."
어색한 인사였다. 몇 년만이더라. 그는 상대를 응시하며 느리게 세월을 가늠했다. 그래. 그가 떠난 지 그새 최소 3~4년은 흘렀다. 다 빠진 머리 염색에 군데군데 못 보던 상처가 보였고, 조금 피곤하고 거칠어보이는 얼굴이었다.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은데도 낯설었다. 차유진은 잠깐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차유진을 훑어보는 것처럼 상대 역시 그를 뜯어보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이 지나고 나서야 들어와, 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차유진이 비켜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인삿말을 주워섬기고, 그는 그 공간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을 뻔 하다가 멈칫한 그는 신을 신은 채로 어색하게 발을 옮겼다. 그리 넓지 않은 그 공간은 정돈된 듯 그렇지 않은듯 조금 어수선했는데, 집의 넓이도 그러려니와 널린 물건들도 혼자 사는 게 역력한 분위기였다. 그의 가족에게 선물하려 들고왔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네가 독립한 줄 몰랐어."
"...나 하이스쿨 졸업하면 미리 이래야 했어. 돌아와서 새로 집 빌렸어."
단어를 찾는 것처럼 모든 대답이 반박자 느리고 어색했다. 마치 그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았다. 한국말을 잊어가는 걸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김래빈은 조금 쓸쓸해졌다. 서로 만나지 않은 기간 동안 그와 차유진 사이의 거리는 착실하게 멀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나씩, 서로 공유했던 것들을 떨궈가면서.
"그러면..."
지금은 뭐 해? 질문이 혀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딱히 실례가 될 만한 질문이 아닌데도 그랬다. 어쩌면 언제까지고 아이돌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차유진이 지금 와서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공간 한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유진은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냥. 나 일 해. 차 고치고..."
차를 고친다고. 김래빈은 차유진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습생 신분이었고, 그 후에도 쭉 아이돌인 차유진만을 봐 와서일까. 아이돌이 아닌 차유진의 모습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만 아까부터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가만히 상대의 목을 향해 눈짓했다.
"그럼 그 흉도 혹시 차를 고치다가 다친 거야?"
목에 길게 남은, 눈에 띄는 긁힌 자국. 제 목 언저리를 대충 더듬어본 차유진이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위험한 거 아냐. 이건 실수했어. 나 일 금방 배웠어. 지금은 잘 해."
전혀 신경쓰는 얼굴이 아니라서 김래빈은 오히려 조금 더 속상해졌다. 우리는 항상 부상을 입지 않게끔 조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부분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대충 세탁기 안에 던져둔 차유진이 냉장고에서 탄산을 꺼내 내밀었다.
"김래빈은 싱어송라이터 잘 해?"
내미는 병을 손에 쥐고 상대가 툭툭 미는 대로 걸음을 옮겨 소파에 걸터앉으면 병의 서늘한 표면에 금방 습기가 서려 손 안이 축축해졌다. 어딘가에 손을 닦지도, 물방울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병을 쥐고 있다가 김래빈은 젖은 손 그대로 힘주어 병 뚜껑을 열었다. 칙,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병을 양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탄산은 그보다는 차유진의 취향이었다. 지금도 탄산을 좋아하는 입맛만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뜻 들여다 본 냉장고 안이 탄산으로 가득했다. 몇 병인가는 맥주도 섞여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는 그건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들은 이제 아이돌도, 미성년도 아니었고, 그들이 일탈을 할 것 같으면 엄하게 분위기를 잡았던 사람도 없으니까.
"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지 않았어, 차유진."
"뭐??"
"...내 역량을 다시금 검토해본 결과, 내가 그럴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군대는 다녀왔고, 작곡을 시작했어. 아직 프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맙게도 이런 나에게도 곡을 맡겨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고."
말을 꺼내자 목이 타는 것도 같아서 김래빈은 손에 든 병을 기울였다. 따가울 만큼 날카로운 탄산과 들쩍지근한 맛이 기묘하게 섞인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싱어송라이터가 되지 않았다는 말에 차유진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대신 의례적인 말들은 그만하자는 것처럼 직설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가 이전에 언제나 그랬듯이.
"그래서, 김래빈 여기 왜 왔어?"
그 질문 앞에 던져져,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줄 게 있어서 왔어."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차유진에게 몇 번이고 메세지를 보낸 이유. 메세지를 받자마자 다른 무엇도 생각할 겨를 없이 미국으로 향했던 이유. 그는 긴장한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다 마시지 못한 탄산 병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가방 깊숙이에 두었던 USB를 꺼냈다. 자. 그는 손을 내밀었지만 차유진은 받지 않았다. 대신 미묘한, 혹은 애매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 곡이야. 예전에 약속했잖아."
이제야 지킨다는 게 면목 없을 만큼 오래된 약속이었다. 한번 더 권하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차유진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받아가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그는 기어코 여기까지 들고 온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고 폴더를 열어, 단 하나뿐인 파일을 재생했다.
"......"
노래가 재생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래빈 역시 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흐르는 내내 둘은 침묵했다. 가끔 노래 사이에 얇은 벽 너머 다른 집의 소음이 슬금슬금 섞여들었지만 듣는 걸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생바가 오른쪽 끝에 다 닿을 때까지 차유진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 고요를 앞에 두고 그는 아주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김래빈, 나 곡 준다고 했어! 잊으면 안 돼!'
열 여덟. 아직 그가 언젠가 자신의 곡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세상 어려운 것이 없던 차유진이 그에게 서스럼없이 곡을 달라고 조를 수 있던 때.
차유진은 지금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김래빈, 고마워. 그런데..."
아주 멀리 돌아 지킨 약속을 상대는 썩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착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지른 차유진은 그 앞에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천장의 조명을 등진 그늘진 얼굴에 뜻모를 표정을 담은 채.
"이제 필요없어. 나 이거 못 해. 나는 이제 아이돌 아냐. 무엇보다 안 하고 싶어."
"......."
그는 차유진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였다. 그런 답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 입으로 듣는 건 역시 더 숨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알아. 차유진 네가 그 때의 너와는 다르다는 거. 너는 더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안 하고 돌아가기를 선택했으니까. 그리고 사실 이 곡,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남에게 선물하기에는 부족한 곡이라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단 한 곡을 완성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연습생 시절 차유진이 조르듯 던진 한 마디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몇 년이던가. 활동하는 중간중간 틈이 나면 다듬었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엎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결국에는 계약이 종료되고 차유진이 떠날때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마음의 빚으로만 남았다. 바빠서,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차피 차유진은 없으니까. 그 핑계들을 다 물리치고 다시 곡을 잡은 건 대학을 수료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난 이후부터였다.
"왜?"
차유진이 물었다. 여전히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높이의 차이 때문일까. 불현듯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자신이 썩 환영받지 못할 손님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막무가내로 문자를 보냈을 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걱정이었다.
"...나는 곡을 만들 때 그 곡을 누가 부르는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을 하는 편이야. 그런데 이건 너에게 약속한 곡이고, 그렇다면 너 외에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셈이니까..."
김래빈. 차유진이 나지막하게 그를 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멈칫하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거면 메일로 보내도 돼. 메세지도 좋아. 그치만 김래빈 여기 왔어. 나는 그 이유 궁금해."
그거라면 답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 전, 그는 차유진을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변한 모습과 달라지지 않은 부분까지. 현관에서 스치듯 눈치챈 것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마주친 눈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피하듯 시선을 내리면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맺혔다. 그렇게 궁금해할 만큼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안녕! 우리 보러 왔어요?'
팬이 찍어올린 아주 예전의 영상이었다. 곡을 다듬고 있다가 참고 차 틀게 된 영상을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의 차유진이 어땠는지를 더 객관적으로 알고 싶어 찾게 된 영상이었다. 마지막 활동 즈음의 기억은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항상 흐릿했고, 일기를 뒤져봐도 그 때는 남긴 말이 많이 없었다. 결국 의존할 수 있는 건 남들이 찍어 올린 기록뿐이었다. 광고, 예능, 무대. 팬들이 개인적으로 찍어 올렸던 영상들까지.
맞아. 그땐 이랬었지, 하는 마음이 반. 그때 우리가 정말로 이랬었나? 하는 마음이 반.
자신이 기억하는 활동 후반부의 차유진은 열심히 하다가도 가끔 지치고 가라앉고 날선 모습이었는데, 영상에서는 훨씬 희망차고 밝고 유쾌한 얼굴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일까. 그걸 본 뒤로 도리어 그가 기억하는 차유진과 영상 속 그의 모습이 뒤섞여 음악이 얼룩덜룩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차유진의 얼굴이 점점 더 가물가물 흐려져서.
"그냥.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으니 갑자기 메세지나 메일로만 선물이라고 곡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몰상식한 일이잖아. 그리고, 네가 보고싶기도 했고."
지금의 차유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직접 보고싶었다. 얼마나 변했는지. 지금은 괜찮아졌는지. 핑계처럼. 충동처럼.
그는 파일을 다시 갈무리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USB는 빼서 잠시 옆에 올려두었다. 받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차유진이 기어코 받지 않겠다면 이대로 다시 들고갈 생각이었다.
"그럼 김래빈 진짜 그거 주러 온 거야?"
"응."
"....숙소는?"
"거기까지는..."
그도 그가 대책없이 왔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멋적게 말끝을 흐린 그 말에 김래빈에게 서스럼없이 바보라 부르며 장난치던 아주 예전의 차유진 얼굴이 잠깐 돌아왔다가 곧 사라졌다. 한숨을 푹 쉬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팔짱을 풀고는 소파를 훌쩍 건너 무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눈앞에 하나, 둘 옷가지가 쌓이고, 차유진이 몇 모금 비워지지 않은 병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김래빈 오늘 여기서 자.
저녁은 간단하게 먹었다. 차유진의 스튜디오는 좁아서 여분의 손님방이 없었고, 그와 김래빈은 한참을 설왕설래한 끝에 차유진이 소파에서 자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김래빈은 자기가 갑자기 찾아와 벌어진 일이니 자신이 소파에 자겠다고 의견을 피력했지만 나를 손님 대접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차유진의 말은 이길 수 없었다. 불을 끄고 각자의 자리에 누우면 길게 적막이 흘렀다.
예전에는 이럴 때 별 거 아닌 이야기들을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활동 초기까지만 해도 둘은 자주 밤을 새가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하기야 지금은 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류청우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안부는 알 길이 없었고, 그동안의 일을 묻기에는 조금 전 이미 같은 주제로 대화를 했다. 그는 도리없이 눈을 감았다. 다시 돌아가는 긴 비행 시간을 버티려면 자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밤을 새고도 멀쩡하게 무대를 뛸 수 있을 체력이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기초적인 체력 단련은 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이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어떻게 하지.'
박차고 떠나올 때는 잊고 있던 뒤늦은 현실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김래빈."
그는 눈을 뜨고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 차유진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 그리고 벽을 한 번 바라봤다가 그는 대답했다. 응.
"할머니 일은, ....유감, 그래. 유감이야. 나 그때 못 갔어. 미안해. 늦게 알았어."
자그마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건너왔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숨죽인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때 메세지 보내줬잖아. 괜찮아. 너는 멀리 사니까 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알리지 않았던 거고."
할머니는 그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병이 재발했고, 그 이후로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 처음 발작이 일어났을 때에는 활동 때문에 곁을 지키지 못해 많이 울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임종 때까지 옆에 있으면서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의 고모는 할머니 장례를 치르며 내내 통곡했다. 할머니께 생전에 못해준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니 할아버지만큼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해서 결국 할아버지는 하우스를 정리하고 고모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할아버지도 슬슬 허리가 안 좋으시고 고모의 집은 큰 병원에서 가까우니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께 걱정 말라고 고개를 젓고는 곧 자취방을 얻어 나왔다. 하지만 가끔은 그리웠다. 강원도의 그 집은 오랫동안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스티어가 계약을 종료했을 때에도 그는 섭섭했지만 돌아갈 곳이 있어 아득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것마저 없었다. 김래빈의 20대는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걸 깨닫는 시기인 모양이었다. 그룹도,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꿈도.
"김래빈 그 때 많이 울었어?"
"아냐. 조금밖에는. 장례를 치를 때 어른들을 도와드려야 할 게 많아서 바빴어. 슬펐지만... 슬프다고 손님맞이를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까. 일하다보니 괜찮아졌고... 진짜야.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그 과정을 거치며 김래빈은 예전과는 달리 감정을 감추는 데 조금 능숙해졌다. 그는 차유진에게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사실 나 그때, 차유진 네가 많이 필요했어. 네가 가르쳐 줬잖아. 생각을 비우고 싶을 때 쉽사리 생각을 지우는 방법.
시작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스티어 시절 그들은 종종 섹스했다. 소리는 죽인 채로. 조금 거칠고 급하게. 사귀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몸을 맞붙이는 데 가까웠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싶지만 그 때는 그게 나름대로의 위안이었다. 그때의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김래빈은 뒤늦게 적당한 비유를 떠올렸다. 탄산 같았다. 몸에 안 좋고, 그래도 종종 생각나고, 따가운데 끈적거릴 만큼 들쩍지근하기도 한.
그 비틀린 관계가 그때만큼은 이상하게도 자꾸 떠올랐다. 그 행위가 그리운 건지 남의 온기가 그리운 건지 차유진이 그리운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차유진이 그런 식으로 제게 붙들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도 차유진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김래빈."
차유진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는 응, 하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예전 차유진의 얼굴과 영상 속 차유진의 얼굴과 지금 차유진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오르다가 서서히 지금의, 낯선 얼굴만이 남았다. 그가 모르는 세월을 살아낸. 그 기간동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그리고는 잠과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
다음날 김래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차유진은 그래도 마지막에는 USB를 받아갔다.
그 뒤로 둘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다.
2. C
그 날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외로웠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묻지 못한 건 하필 그 때 적절한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한때는 모국어보다도 더 자주 쓰던 언어였는데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드문드문 말이 어색했다. 불도 다 끈 상황에서 핸드폰을 들어 단어를 굳이 찾아보는 것도 이상해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김래빈은 잠들어버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가 돌아간 뒤 차유진은 김래빈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많은 게시물 중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몰라서 일단은 뉴스 기사부터 살펴보았는데 스티어 활동 종료 이후에는 이렇다 할 기사가 없었다. 김래빈은 그의 말대로, 정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귀도 깨끗했지, 김래빈...'
피어싱은 말하자면 김래빈의 각오 같은 거였다. 답도 없는 원칙주의자에 때로는 어른들보다 더 고지식하고 꽉 막혔는데도 오로지 아이돌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귀에 주렁주렁 매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두가 그랬겠지만 김래빈은 특히나 더 진심이었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
'그래도 김래빈은 어떻게든 끝까지 무대 위에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김래빈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지막 보루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포기였고 차유진은 조금 허망해졌다.
그는 김래빈이 두고 간 USB 속 곡을 다시 재생해보았다. 솔로 아이돌에 어울릴만한, 화려하고 강렬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김래빈은 여전히 김래빈이라서, 선물하기엔 부족한 곡이라 평가한 이유를 차유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그에게는 종종 한국으로부터의 메일이 도착했는데, 그런 날에는 유독 그 곡이 듣고 싶었다. 그렇게 반복해 듣다보면 이 곡을 혼자 듣는 게 아까웠고, 아주 가끔은 예전처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춤도 노래도 놓은지 이미 몇 년 째. 그의 몸도 목소리도, 더이상은 가수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음을 따라 허밍해봤다가 매끄럽게 올라가지 못하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진짜로 정신차릴 때도 됐잖아, 차유진.
그 사이 주고받은 메일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김래빈이 보낸 메일은 그가 가끔 쓰던 일기처럼 여전히 장문이고, 시시콜콜하고, 어려운 말이 많았다. 그는 마음이 내킬 때 느릿느릿 답장을 보냈고, 답장을 보내면 또 이야기가 돌아왔다. 아주아주 긴 이야기들이 몇 번을 오갔다. 그때쯤에는 더이상 스티어 때의 기억이 불편하지 않았다. 잊고 있던 버릇, 특유의 습관, 조금 달라진 모습. 메일에서 지금의 김래빈이 읽히면 읽힐수록 김래빈과 스티어 사이의 연결도 점점 흐려졌다.
'비는 시간에 취미삼아 재즈를 건드려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작곡을 해서인지 결과물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 상담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차피 취미라면 실패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냐고 나에게 되물으시는 거야.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팀에서 오랫동안 좋은 곡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해왔고, 그 결과는 팀의 성적이랑 직결되니까. 그래서 쉽게 낙담했던 것 같아. 지금은 예전보다는 평가에 덜 흔들리는 것 같아. 물론 더욱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정진해야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김래빈은 여전히 작곡을 했고, 또 가족의 권유로 상담을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김래빈은 아주 오래된 친구로 되돌아오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옛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그런 날엔 차유진은 김래빈이 준 노래의 가사를 제멋대로 사랑 노래로 개사했다.
김래빈은 모를 거다. 차유진은 아주 예전부터 그를 꽤 좋아했다. 그래서 더 보고싶지 않았고, 몇번쯤은 일부러 연락을 무시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메일에서 읽히는 김래빈이 점점 단단해져갈수록 차유진 본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꼭 김래빈과 제가 한몸인 것처럼. 여전히 그는 카센터에서 일했고 아이돌 쪽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찌뿌둥할 때에는 옛날 버릇대로 스트레칭을 했고 가끔은 틀어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김래빈의 커리어가 하나둘씩 자리잡아갈 즈음엔 그도 다음에는 뭘 배워볼지 고민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언제까지고 계속 정비공으로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들은 계속 메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보내는 메일에는 점점 다정한 말들이 늘었고, 그러면 김래빈은 또 문장 사이에 염려와 제멋대로의 잔소리와 온기와 그만큼의 사랑스러움을 한가득 담아 보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사랑하는게 가능할까. 십 대의 차유진은 그 말을 비웃었는데 삼십대가 된 차유진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처럼 잔잔한 마음이었다. 보고싶은 마음이 물결처럼 일어도 이제 차유진은 그 동요를 관조하며 덤덤히 내가 꼭 그만큼 김래빈을 좋아하는구나, 읊조릴 수 있었다.
그래서 김래빈이 다시 그에게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차유진은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그가 올 용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일일까, 궁금해하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곡이야."
김래빈의 뒷머리는 어느새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는 뒷모습을 차유진은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이전과는 다르게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듣기 좋았고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느리고 쓸쓸하고 귀에 쉽게 들리는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차유진은 그 노래가 자신에게 편한 음역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노래를 그만둔 지금의 차유진조차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김래빈은 패드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악보가 띄워져 있었다. 다행이 악보를 읽는 방법은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다. 차유진의 눈이 음표를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이 그 위를 짚었다.
"이 곡의 메인 멜로디, 혹은 코드는 파와 도로 이루어져있어."
파-도. 김래빈이 천천히 발음하는 음계는 마치 한 단어처럼 들렸다.
"웹에 취미로 올리는 곡들 중 하나로 예정했던 거라 처음 음을 찍었을 때만 해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곡 설명을 쓰려고 메모장을 켠 순간 떠올랐어. 이걸 음이름으로 읽으면 영어로는 F랑 C지만, 한글 음이름으로는... 바- 다라고 읽어."
악보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음표 한 쌍을 김래빈의 손이 유연히 따라갔다. 파도, 그리고 바다. 그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차유진의 귀에서 철썩이는 환청이 맴돌았다. 그는 돌아온 이후 오랫동안 바다를 보러 가지 않았다. 평화로운 해변의 모습과 즐거운 사람들을 보고싶지 않았던 건 물론이려니와 바다를 보면 예전을, 후회를 자꾸 되짚어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점점 그에게서 멀어졌던 소리와 광경이 한순간에 다가왔다. 그 위로 상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얹혔다.
"그걸 안 순간에, 차유진 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그래서 왔어. 이걸 들려주고 싶어서."
너는 바다를 좋아했잖아. 웃음기마저 담겨있는 목소리였는데도, 차유진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김래빈. 그는 잠기려는 목을 가다듬어가며 상대를 불렀다.
"우리 바다 보러 가자. 여기서 오래 안 걸려. 나 차 있어. 그러니까, 같이 가. 나랑."
김래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근처 해변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저멀리 지평선이 빛에 반짝이는 시간, 사람들은 맥주를 들고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몰랐는데 김래빈은 기타도 가져온 모양이었다. 모래사장에 대충 주저앉아 그에게 들려주었던 곡을 연주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손이 멎었다. 그간 메일을 통해 어느정도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 차유진은 그에게서 기타를 뺏어들었다.
"너 기타 칠 줄 알아?"
"조금. 근데 나 잘 못해. 듣고 웃으면 김래빈 미워할 거야."
서툰 손이 몇 번 엉망으로 음을 튕겼다. 미심쩍은듯이 그를 응시하는 그 시선을 피해 차유진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겨우 코드를 짚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연주가 되지 못할 음의 조각들이 듬성듬성 떨어졌다. 어쿠스틱기타로는 어차피 연주하지 못할 곡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기준을 잡을 음이 필요했다. 아주 예전에 김래빈이 그에게 가져왔던 노래를 차유진은 가능한 만큼만 불렀다. 엉망이었고, 제멋대로에, 랩으로 된 파트는 다 잘라먹었다. 그래도 김래빈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주변에서 야유에 가까운 휘파람이 들렸다. 그는 씩 웃으며 우스꽝스럽게 인사했다.
"...그 곡은, 반기지 않아서 어디다 두고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거 맞아. 나 아이돌 아니야. 그래서 내 곡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생각 틀렸지?"
"응. 아이돌을 그만뒀더라도 그건 네 곡이었어. 이것도 마찬가지고."
그는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어. 그래서 불렀어. 김래빈이 준 거니까."
기타를 품에 끌어안듯 잡아 그는 고개를 기댔다. 어쩌면 이것도 무대였고, 어쩌면 이것도 노래였다. 그리운 음악의 한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는 상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캘리포니아의 노을이 그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아주 오래된 과거를 끌어올렸다.
"김래빈."
"응."
"내가 섹스하자고 했을 때, 왜 거절 안 했어?"
섹스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는 건 여전했다. 그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김래빈은 그런 쪽으로는 한층 깐깐했기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순순한 태도로 차유진을 받아들였다. 가끔은 먼저 덤벼들기도 했다. 위안의 명목으로 서로가 몸을 갈취하던 시절, 그때부터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괜한 의문을 불러일으켜 아슬아슬한 합의를 깨고싶지 않았다. 어리고, 영악한 셈이었다.
귀가 발개질만도 했는데 김래빈은 생각보다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나는 위로가 서툴고 너는 뭐든 몸으로 겪어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네가 그런 방식의 위로라도 필요한 것 같아 시작했는데...."
나나 네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었겠지만 우린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덧붙는 말은 역시나 김래빈다웠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래. 그게 나한테도 필요했어."
김래빈에게도 필요했구나. 그는 속삭였다.
쉴 새없이, 온화하게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공백을 메우는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며 차유진은 그때의 김래빈을 다시 어림짐작했다. 20대의 자신이 무심코 넘겼을 장면을 30대의 눈으로 다시 돌아보고 곱씹었다. 나는 그때 네가 참 한결같고 부지런하게 무던해서, 곡에 그렇게 예민한 예술가치고는 일상에 무뎌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김래빈도 제 생각보다 조금 더 금 가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위안을 얻었을까.
차유진은 던지듯 입을 열었다. 김래빈. 나는 필요해서 하자고 한 거 아니었어.
"나 그때 비겁했어."
그때는 꺼내지 못했던 휴대폰을 차유진은 뒤늦게 꺼내들었다. 단어를 치면 한글로 번역된 말이 떠올랐다. 편법.
"나 편법 했어. 제대로 하려면 나 김래빈 좋아한다고 했어야 해. 그런데 안 그랬어."
핑계는 많았다. 그럴 수 없었던 분위기, 모자랐던 여유. 어리고 서툰 사이, 자존심.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했던 자만, 불안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 안그래도 쏟아져내릴 고민에 또 하나를 더해주고 싶지 않았던 연민.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비틀린 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끊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미안. 그는 평온한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김래빈의 답을 가늠할 수 없어서 그쪽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김래빈은 한참 답이 없더니 하지만, 하고 말문을 열었다.
"네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어, 차유진. 그래. 네가 한 일이 적절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도 어쩌면. 김래빈은 불현듯 말을 꺼냈다가 그 한 마디를 완성하지 않은 채 입을 닫았다. 둘은 해가 다 질 때까지 거기에 앉아 바다를 봤다. 희미한 감정과 맺지 않은 결론들이 그들의 사이를 떠돌도록 내버려두면서. 이번에는 숙소 잡고 왔냐고, 차유진이 좀 더 후련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내기 전까지.
김래빈은 이번에는 숙소 잡는 걸 잊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그는 숙소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검색했다. 우연이겠지만 숙소는 그 해변에서 아주 가까웠다. 차유진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철회하고 그와 같이 해변가를 걸었다.
"다음에도 또 올 거야?"
밤의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지나가듯 물었다. 호텔의 문 앞에 서서, 김래빈은 그를 돌아보았다.
"응. 그치만 아주 자주 오지는 못할 거야. 우리는 또래보다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게 흥청망청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썩 나쁘지 않은 답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다음에 올 땐 우리집도 가 보자. 아주 뒤늦은 약속을 이번에는 제 쪽에서 꺼내놓으며. 어릴적만큼 밤을 새워 이야기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그냥 좁은 침대에 우겨 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그가 먼저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좀 더 괜찮아진 후의 그와 김래빈은 어떤 형태로든 함께 있을 것도 같았다.
"김래빈."
그는 상대를 불렀다. 이번엔 잘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중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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