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유진치고는 침묵이 길었다. 항상 반쯤 웃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입매가 굳은 선을 그렸다. 그걸 본 김래빈은 내심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교로움에 가까울 그 표정을 성대하게도 오독한 결과다.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데. 그렇다면 차유진은 지금 진지하게 고민중인 거구나. 그렇다면 설령 내가 바란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내 마음을 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어.
생각이 영 이상한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도 둘만이 남아있는 빈 교실에서 김래빈에게 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김래빈은 차유진이 난감해하는 걸 알아도 제가 헛소리를 했다며 황급히 말을 주워담을 수 있는 유형의 사람도 아니니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평범하게, 고백을 한 사람과 누가 봐도 곧 거절할 사람이 남았다.
“미안. 나 김래빈하고 데이트 생각 없어.”
차유진은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았다. 네 맘이 고맙다거나, 비록 나는 너를 거절해야 하지만 너는 좋은 사람이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말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간결하고 명백한 거절을 수긍하며 김래빈은 단순하게 안도했다. 결과적으론 거절했어도 어쨌든 그의 마음은 오해 없이 전달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비장하게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했던 말을 꺼내들었다.
“차유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 둘 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네가 나를 거절했어도, 나는 네게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거야. 약속해.”
아무리 열심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막상 정말로 거절당하고 나자 눈물이 찔끔 나려고 해서, 김래빈은 서둘러 시선을 내리까느라 상대가 짓는 희한한 표정은 보지 못했다. 보통 그건 찬 쪽이 하는 말 아니냐고, 어이없어하는 차유진의 생각이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차유진은 5월에 그의 반으로 편입했다. 보통 5월은 전학생이 잘 없는 달이다. 갑자기 나타난 차유진은 교내 구성원들에게 오롯이 주목받았고, 외국에서 왔다는 사실과 잘생겼다는 점은 그 관심을 더욱 부추겼다. 차유진이 온 첫날 교단에 선 교사는 칠판에 차유진 석 자를 쓰고는 회장과 부회장을 번갈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회장은 성격은 참 좋았지만 영어 성적은 그저 그랬고 부회장은 새침하고 약았지만 어쨌든 성적은 좋았는데, 결국 교사가 고른 건 부회장이었다.
“부회장 너는 전학생 좀 많이 도와주고.”
네에-. 성의없게 말을 길게 끌며 부회장이 대답했다. 천성적인 귀찮음이 묻어 있긴 해도 약간의 호감과 호기심이 섞인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빈 자리가 한 군데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김래빈의 옆에 앉게 된 차유진의 움직임을 따라 졸졸 따라오는 시선도 그랬다. 사실 부회장 뿐만 아니라 반 전체의 시선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회장만큼, 혹은 회장보다 더 영어가 약한 터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있던 김래빈만이 양손을 불끈 쥔 채 긴장하느라 제 자리로 함께 쏠리는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긴장을 하지 않았다고 눈치를 과연 챘을까? 그의 명예를 위해 공란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질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차유진은 김래빈의 곁으로 왔다.
“안녕해?”
하이. 나이스 투 미츄. 중학교 때 배웠던 기본회화를 소리없이 되새김질하는 김래빈에게 툭, 익숙한 언어가 던져졌다. 종이 치고, 교사가 나가고, 눈을 부릅뜬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첫 마디를 던졌다.
“한국말 할 줄 알아?”
“몰라! 나 연습해.”
차유진이 어설픈 발음으로 답하며 웃었다. 그 순간 김래빈은 긴장이 탁 풀렸다. 안녕. 나는 김래빈이야. 만나서 반가워, 머리속으로 읊던 영어 문장을 고스란히 한국어로 옮긴 듯이 어설픈 문장이 튀어나왔다. 뒤늦게, 허둥지둥. 긴장으로 미간 한 번 찌푸렸다고 누구 하나 죽일 듯이 사납던 인상도 그 순간에는 와르르 헐거워졌다. 그게 차유진에게는 퍽 인상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김래빈과 친해진 후 차유진은 몇 번이고 키득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나 김래빈 시비걸 줄 알았어. 하지만 그거 어물? 없는 일이야. 김래빈은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빼내며 점잖게 받아쳤다. 설마. 초면에 시비를 거는 건 무례한 일이야.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가르쳐줄 때 차유진은 그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고 특히 그는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라는 건 김래빈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 날이 더워질 때쯤에, 계절이 하나도 채 지나가기 전에 둘은 금방 친해졌다. 김래빈과만 친해진 건 아니었다. 차유진은 언어의 장벽을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처럼 넘나들었다. 잘 웃고, 겁없이 말하고, 여기저기 끼어들면서도 밉지 않은 애들 싫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반 전체가 차유진을 좋아하게 된 것도 금방이었다. 오히려 노는 무리로만 따지면 김래빈과 차유진이 겹칠 일이 없었다. 농구든 축구든 크게 마다하지 않는 차유진에겐 쉬는시간이건 급식시간이건 관계 없이 운동장 한 켠을 차지하고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애들이 금세 붙었다. 김래빈이야 원체 혼자 무언가 끄적끄적하기 바빠서 누구랑 같이 있는 걸 보기가 힘든 축이었고. 하지만 차유진은 지나가면서도 가벼운 인사 한 마디를 건네는 사람이었고 김래빈은 그 인사에 기어이 인사를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었다. 한두마디씩 말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덧 대화가 한가득 쌓였다.
고작 그런 걸로도 사람은 충분히 누군가한테 반할 수 있었다. 사례가 나온 이상 명제는 지위를 획득한다. 김래빈이 그랬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비슷한 장르가 귀에 붙는 것처럼, 한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여겨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새로운 좋은 점들이 끝없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유진이 좋았다. 처음에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할머니. 저 좋아하는 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고민에 김래빈의 할머니는 크게 웃었다. 우리 강아지가 벌써 누굴 좋아할 때가 되었냐고. 잘 되면 한번 데려와 보라고.
‘좋아한다는 말은 했고? 그게 중요한 거다.’
할머니. 만약 잘 안되면요? 아끼는 손주가 우물쭈물 꺼내는 걱정에 할머니는 노인 특유의 낙관과 오묘한 무관심이 섞인 다정으로 그 등을 슥슥 쓸어내렸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김래빈은 할머니의 다정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윽고 고지식하고 순하게 수긍했다. 상대가 나를 받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이내 그의 안에서 그 말은 기묘하게 재조립된다. 그러니 상대의 마음을 미리 재고 간보고 따지지 말고 제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해보자고. 그래서 어느 방과후, 청소도 다 끝난 교실에서 단 둘만 남았을 때, 김래빈은 냅다 차유진을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널 좋아한다고. 서로의 거리를 재고 눈치를 보고 상황을 살피는 것이 젊은이들에겐 소위 썸이라는, 연애의 전단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다시 첫 장면이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거절했다.
그 뒤로 김래빈은 자신이 했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려 노력했다. 둘은 여전히 친구처럼 지냈다. 가끔 차유진은 김래빈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친구 사이를 망치지 않겠다는 맹세 -반쯤은 일방적인-를 굳건히 마음에 품은 김래빈을 말리지도 멀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도리없이 주체 못 하는 감정이 흘러넘쳤다. 사랑이 처음인 열일곱 김래빈은 제어되지 않는 감정에 당황하다가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도 그보다 몇 년은 더 살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경험도 많을 테니까. 평소 다정보다는 엄격에 가까운 태도로 김래빈을 다잡았던 그의 누나도 그 순간에는 어쨌든 팔이 안으로 굽어서, 혀 차는 소리가 말 사이 드문드문 돌았다.
“그냥 눌러둬봤자 소용 없어. 적당히 풀어야지.”
김래빈은 누나의 조언 역시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일기장이 나날이 두꺼워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을 만들었다. 오히려 차유진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그의 염려는 어쨌든 감정을 되돌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누나의 격려를 들으며 흩어졌다.
차유진은 아직도 한글이 서툴었다. 예전엔 더 그랬다. 수업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 심심한지 자꾸 그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집중하자고. 충고라고 한 마디씩 건넸다가 그게 쌓이고 쌓여 결국 떠든 게 되었다. 둘이 나란히 벌을 받으면서도 교사에게 그래도 차유진이 한글을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조심스레 변호하던 그런 날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차유진이 금방 친해진 게 못내 신기해서, 시선으로 차유진을 졸졸 쫓았다가 그 웃는 얼굴과 허물없는 태도에 감탄했던, 유독 차유진이 반짝여보이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멜로디가 하나씩 늘었다. 어디에도 공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래빈은 도취하듯 음악에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걸 조금 부끄럽게 여겼다. 사람들에게 들려줄 음악은 좋고 어울리는 것들만 다듬어 직조해야 했다. 지금 만드는 것들은 너무 사적인 조각이었다. 가끔은 가사를 떠올렸지만 굳이 붙이지 않았다. 허밍조차 들어가지 않은 멜로디 조각들이 차곡차곡 하드에 쌓였다. 김래빈은 도서관에서 봤던 과학 잡지를 떠올렸다. 외계인의 회신을 기다리며 우주로 신호를 쏘아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꾸준히, 계속. 김래빈은 그들과는 다르다. 그는 답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우주에서 그가 쏘아올리는 메세지들은 이미 도착지가 정해져 있다. 상대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않을 종착지. 그의 감정과 추억을 집어삼켜 그 무엇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종내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대한 블랙홀.
상상하면 아득한데, 이상하게 허망하지는 않았다. 이건 나중에 한꺼번에 지워야겠다. 날짜를 제목삼은 파일들을 보며 김래빈은 광대 근처를 슥슥 문질렀다.
다만 어떤 메세지들은, 우연히 정확한 수신처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MP3에 연결된 이어폰이 차유진의 한쪽 귀에 꽂혀있었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갔다 느지막히 교실로 돌아온 김래빈은 퍽 당황했다. 굳이 차유진을 위해 변명을 해 주자면,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청소하던 아이들은 그날따라 빗자루로 칼싸움이 하고 싶었고, 그 서슬에 아직 채 정돈하지 못한 김래빈 책상 위의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진 건 차유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액정 전원이 들어온 MP3를 주워주려다 제 이름이 적힌 곡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날짜를 제목삼지 않은, 차유진 석 자를 담은 곡을 차유진이 듣게 된 건 그런 연유였다. 멜로디들이 고스란히 블랙홀로 흘러들어갔다. 김래빈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라지지도, 집어삼켜지지도 않은 채로.
“김래빈 이거 뭐야?”
김래빈은 변명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들어버렸다는 데에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성실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로 답한다.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돼.”
차유진이 최초로 흔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서운함이 알게모르게 그를 감돌았다. 아직은 차유진 스스로도 모를 때였다. 김래빈이 그 마음을 차유진에게 듣기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
전력 60분 –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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