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서장은 종이를 건네준 이후로 한 번도 에바리스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내밀어진 문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에바리스트는 문서의 중간 지점쯤에서 눈을 떼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더 이상은 읽어 볼 필요도 없었다.
“좌천입니까. 아니. 추방이라고 불러야 하던가요.”
어떤 사람에게서든지 침착하다는 평을 압도적으로 듣고 있는 그였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음색에 묻어나오는 비아냥거림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서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위험한 일에 쓸데없이 깊숙이 파고들었어.”
에바리스트가 내려놓은 종이는 정부에서 그에게 내려보낸 공문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그를 제 5 형무소의 교정직으로, 그러니까 속된 말로 하자면 간수로 비상 발령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그저 평범한 발령장이었지만 에바리스트도 서장도 그 안에 숨겨진 뜻을 알고 있었다. 에바리스트의 말마따나, 추방령이었다.
제 5 형무소는 이름만 형무소일 뿐 수용소라고 불리는 것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그곳의 목적이 교화가 아니라 격리라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때문에 세간의 사람들은 그곳을 반정부주의자의 무덤이라고 불렀다. 외딴 섬에 있다고 알려진 그곳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로 유명했다. 죄수뿐만 아니라 단순히 발령받은 사람들까지도. 정부에 불손한 행위를 했으나 법적 절차를 밟기엔 증거가 불충분한 자들, 세력 다툼에서 밀린 정치인과 같은 자들이 인사이동이라는 명목으로 그곳에 강제로 보내졌다. 에바리스트는 어느 쪽인가 하면, 전자였다.
바야흐로 갖가지로 꾸며진 명분에 의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마저 하나둘씩 먼지 속으로 사그라지는 시대였다. 어느 순간부터 비대해진 정부는 그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견제받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정부는 모든 정보와 미디어를 손에 쥐고 통제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더 쉽게 정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갔다. 그런 식으로 숨겨졌던 사건 하나를 충동적으로 캐 보려 했던 것이 에바리스트의 죄목이었다.
그의 주먹이 절로 굳게 쥐였다.
“만약 제가, 이 명령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러지 말게.”
서장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평소 에바리스트를 아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불순분자로 인해 자신들 전체가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역력했다.
“만약 불복한다 해도 자네는 어떻게든 가게 될 거야. 그때는 교정직이 아니라 죄수의 자격으로 가게 되겠지. ……긴말은 않겠네.”
서장은 입을 다물었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대신, 그는 눈빛으로 에바리스트에게 충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대우해줄 때 얌전히 끌려가는 것이 조금이나마 신상에 좋을 거라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감시당하는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그는 나름대로 현명하게 행동하는 셈이었다.
계속되는 무거운 침묵 속에서 에바리스트는 제가 선택할 길이 달리 없음을 인정했다.
그가 떠나는 날은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에바리스트는 헬기에 탑승한 채로 끝도 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5 형무소는 섬이었지만 섬 주위의 파도가 거세고 배를 댈 곳이 없어 헬기로밖에는 접근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하늘에는 그가 타고 있는 헬기 외에도 몇 명의 죄수와 보급물자를 실은 헬기 몇 대가 떠 있었다.
기계의 소음을 빼면 모든 것이 고요했다. 에바리스트의 양옆을 지키고 앉은 경비 대원들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를 유지한 채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직위로만 따지자면 에바리스트는 그들의 상관이었으나 기실 그들의 태도는 죄수를 다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싸늘한 눈초리에도 그가 무감각해질 때쯤에야 그들은 제 5 형무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해가 다 져가는 시간이었다. 거대한 건물이 헬기가 접근함에 따라 점차 가까워졌다. 노을을 등진 그 건물은 마치 웅크린 짐승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헬기는 비행장으로 접근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비행장 저 너머로 누군가가 봉을 흔들어 조종사에게 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이거.”
헬기의 프로펠러가 완전히 멎을 때쯤 느긋하게 다가온 그는 경비 대원에게 친근한 듯 말을 걸더니 뒤이어 내리던 에바리스트에게 다가와 덥석 손을 부여잡았다.
“아, 자네가 그 새로 온다던 신입? 마침 일손이 부족했는데 잘 되었네. 아차. 자세한 소개는 나중에 하고 일단 이리 오는 게 좋겠어. 조금 있으면 또 헬기들이 들이닥칠 거고 그 뒤에도 자네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많거든.”
반가운 듯 마구 악수를 하던 그는 서둘러 에바리스트를 끌고 비행장 한구석으로 물러났다. 헬기들이 연이어 다가오고 있었다. 무언가 물어볼 새도 없이 끌려 나온 에바리스트는 마구 불어 닥치는 바람과 헬기의 소음 속에서 당황한 채 그를 돌아보았다. 제법 수더분한 인상의 그는 분명히 자신의 상관이 될 사람임이 틀림없었지만 아까와 마찬가지로 봉을 흔들어 연이어 착륙하는 헬기를 안내하는 모습은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아주 낙천적인 사람이거나, 혹은 완전히 체념했던가.
에바리스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것이 과연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형무소 안까지 죄수를 호송하는 일은 경비대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을 각각의 방으로 밀어 넣는 일은 오롯이 둘의 몫이었다. 들어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죄수들을 하나씩 방으로 들여보내는 일은 설령 그 죄수가 수갑을 차고 있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죄수들이 완전히 방 안으로 들어간 뒤 창살 사이로 수갑을 풀어주고 나서야 겨우 그들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 몸부림을 치고도 여전히 팔팔한지 창살을 두드리거나 여기서 꺼내달라며 고함치는 몇몇 죄수들을 뒤로하고, 그의 상관은 근처에 있는 걸상에 주르륵 내려앉았다.
“역시 젊다는 게 좋긴 좋은가 봐.”
완전히 지친 기색인 그에 반해 비교적 멀쩡한 상태인 에바리스트를 훑어보며 그는 장난스레 휘파람을 불었다.
“아치볼드라고 부르게. 형무소장 겸 간수장을 맡고 있지. 바로 어제까지는 유일한 간수이기도 했고………여기에 있은 지도, 보자, 한 10년 되었나?”
“에바리스트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에바리스트. 서류는 진작 받았지. 의경 출신이라 했나? 허. 참. 자네도 어쩌다 여기에 온 건지.”
에바리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치볼드는 그런 에바리스트를 보고 혀를 한번 쯧, 찼다.
“그래. 뭐, 더 해야 할 일은 일단은 없어. 물품은 그쪽 담당들이 알아서 옮겨놓을 테니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럼 이제 자네 방이 어딘지 알려주도록 할까?”
대략적인 건물 소개는 가면서 해주겠노라고, 아치볼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그리 밝지 않은 전등이 깜박거렸다.
제 5 형무소는 본래 본관과 별관으로 이루어진 4층의 거대한 건물이었지만 지금 쓰는 곳은 아주 일부일 뿐이라고 아치볼드는 설명했다. 수감자 자체도 많지 않은데다 건물을 관리할 인원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주요 시설들과 죄수들의 방은 본관에 마련되어 있었지만, 교정직이나 상주인원의 방은 별관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본관을 나와 별관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걷고 있었다. 건물에서 나오는 어두침침한 빛과 앞서 가는 아치볼드의 실루엣에 의지해 걸어가면서 에바리스트는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내일부터 저는 뭘 하면 됩니까?”
“할 일? 그렇게 많진 않은데. 음. 일단 매일 나와 교대로 점호를 해야 하고, 가끔 시설물 상태를 체크해서 보고하는 정도이려나. 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수감자들 사이에 일이 생긴다면 해결해주어야 하고.”
“야간 교대 같은 건 없는 겁니까?”
“없어. 의미가 없거든. 어차피 이 섬에선 도망 못 쳐. 시체가 되어서 나가면 모를까. 자. 여기가 자네 방일세.”
언제 도착했는지 아치볼드는 손수 방문을 열어주며 에바리스트를 돌아보았다.
“짐은 다른 사람이 이미 갖다놓았을 거야. 아무튼,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든 정붙일만한 무언가를 찾는 일이지. 이를테면 취미생활 같은 거? 다른 일에 대해서는 차차 알아가게 될 거고. 시간은 많으니까.”
“…….”
“오늘은 이만 푹 쉬어. 여기는 쓸 수 있는 전기가 넉넉하지 않아서 전등을 오래 켜 놓을 수 없거든. 그러니 밤늦게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말고. 여긴 아주 위험하니까.”
미묘한 어조였다. 그러나 에바리스트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는 손인사만을 남기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할 수 없이 에바리스트는 묻는 것을 나중으로 미뤄두고 침대에 누웠다. 짐을 정리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손 하나 까닥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다. 불을 끄고 드러누워 에바리스트는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이루고 싶었던 꿈, 이제까지 살아왔던 삶,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인 어떤 사진 한 장까지도. 여전히 믿고 싶진 않았지만,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도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제 이 섬에 갇힌 몸이었다.
아마도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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