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일을 겪으면 오히려 침착해지는 모양이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크레니히는 일단 서둘러 방문을 닫아걸었다. 이건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잠금쇠가 잠긴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크레니히는 숨을 몰아쉬며 힘 빠진 몸을 문에 기대었다. 방 안은 그가 나가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박한 탁자 위에 놓여있는 누군가의 잘린 머리를 빼면.
지독한 기시감이었다. 방에 놓인 것이 머리 없는 몸이 아니라 몸뚱이 없는 머리라는 것만 제외하면 그가 생전에 겪었던 일과 똑같았다. 범인이 누 구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크레니히는 속삭였다.
“나와.”
길고 검은 형체가 방 천장에 스르륵 똬리를 틀었다. 그 아래에는 그림자가 없었다. 이 세계의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대상이었다. 심연이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6개의 눈이 히죽 웃듯 가늘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혹시 복도를 지나가는 누군가가 듣기라도 할까 크레니히는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사실은 목소리가 잘 나오지도 않았다. 한편으론 두려움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론 분노 때문이었다. 크레니히는 그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마르세우스였다.
“보이는 대로.”
심연이 대답했다.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화가 나서 발을 쾅 구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크레니히는 심연을 쏘아보았다. 알면서도 일부러 저러는 것이 틀림없었다. 성유계에 온 뒤로는 간혹 자신의 주변을 떠다닐 뿐 돌발행동 없이 자신의 말에 순순히 응해주었기에, 이제는 제어할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넓지 않은 방 안을 천천히 선회하면서 심연은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걸 들어준 것뿐이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거짓말.”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자신은 이런 걸 바란 적이 없었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었다. 심연이 자신을 위한답시고 했던 일들이 크레니히에게 달가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레니히의 시선이 창백한 안색의 마르세우스에게 가 닿았다가 테이블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피 웅덩이로 옮겨갔다. 저렇게 끔찍한 것을 자신이 원했을 리가 없었다. 크레니히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불안하게 움직이던 크레니히의 시선이 심연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그때 심연이 말했다.
“그를 가지고 싶어 했잖아. 그렇지?”
마치 급소를 찔린 듯 숨이 턱 막혀왔다. 크레니히는 눈을 깜박였다. 애써 부정하려는 말이 더듬더듬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심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심연의 얼굴은 표정을 읽을 수 없이 기묘해서 꼭 그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는 가장 어둡고 질척한 감정들까지도.
“아냐.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었어. 아니란 말야! 나는 그냥…!”
크레니히는 필사적으로 말을 찾아내려 애썼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답답했다. 바라는 모든 것이 전부 현실로 이루어지길 원하는 건 아니라는 걸 저 이형의 생명체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크레니히는 그저 보통의 인간이었다. 가끔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간혹 어둡고 파괴적인 상상을 떠올리기도 하는. 그러나 그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그런 상상만을 골라 실현시켜준다면 누구라도 기뻐할 리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크레니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을 저 환수에 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채 눈치채지 못했어.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그는 다시 부활할 거고 이 일에 대해선 조금도 기억 하지 못하겠지. 자. 그가 네게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나?”
더듬거리는 크레니히의 말을 자르며 심연이 머리를 기울였다. 환수에게는 최소한의 도덕적인 기준마저도 없는 것 같았다. 어째서 그런 것에 구애받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순간 조용히 말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크레니히는 언성을 높였다. 그런 크레니히를 가만히 바라보던 심연은 꼬리지느러미를 살랑였다.
“이 이후의 선택은 네 몫이지.”
크레니히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심연은 느긋한 어조로 말하곤 그대로 사라졌다. 이제 방 안에는 크레니히와 마르세우스 의 잘린 머리뿐이었다. 전반적으로 편안한 톤으로 꾸며진 방 안에서 피가 빠져나가 희게 질린 창백한 안색은 눈에 확 들어올 만큼 이질적이었다.
홀린 듯 크레니히는 그 머리에게로 다가갔다.
피 웅덩이가 신발 끝에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는 테이블 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세워져 있었다. 환수의 힘으로 몸 에서 뜯겨 나온 듯 목의 단면이 들쭉날쭉했다. 희게 튀어나온 뼈와 너덜너 덜한 조직은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서 크레니히는 얼른 시선을 떼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크레니히는 알 수 없었다. 성유계의 전사들은 아 무리 죽기 직전까지 힘을 소진해도 조금 쉬고 나면 다시 멀쩡해졌다. 그러 나 목과 몸통이 분리된 전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언젠가 다시 살아날 거라는 건 크레니히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머리도 곧 사라질 터였다. 이 세계는 원래 그런 세계였으니까.
하지만 그 전까진?
크레니히는 다시 마르세우스의 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손끝에 시체의 차디찬 뺨이 닿았다. 석고로 깎은 듯 희고 매끄러운 얼굴이었다. 하기야 본래도 참 흰 사람이었다. 크레니히도 피부가 흰 편이지만 그는 더욱 희어서 가끔은 살아있는 인간 같지가 않았다.
죽어서도 그는 참 아름다웠다.
2.
사후세계는 소설에만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성유계에 대한 크레니히의 첫 감상이었다. 우습게도 그 직후엔 ‘이걸 알게 되면 엔지니어들은 얼마나 흥분할까?’ 라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판데모니움은 지식과 이성이 근간이 된 사회였고 주민의 대부분은 엔지니어였다.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크레니히가 느낀 성유계의 첫 인상이 고 작 그런 것들인 것도 어쩔 수 없었다. 크레니히는 자신이 죽었을 때를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흐릿하게나마 생전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있고, 이곳에 떨어졌으니 죽은 것만은 확실했지만. ‘고통스러웠을까? 아니면 그런 걸 느낄 새도 없이 즉사했을까?’ 지시자라고 불리는 인형은 이곳이 미련이 남은 전사들이 현세로 부활하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라고 했다. 미련이라. 크레니히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은 어디에 미련이 남았던 건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다른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흐릿하기만 했다. 그 이후 크레니히는 그 기묘한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다. 가끔은 자신의 키의 반도 안 되는 인형을 따라 싸워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심연이나 환상의 힘까지 빌려야 했다. 이상하게 내키진 않았지만 그 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 같다는 추측은 이미 이곳에 온 첫날부터 하고 있었다. 다른 기억은 없어도 머릿속엔 아직 희미하게나마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남아 있었고, 거기엔 어디에도 환상을 보는 사람이나 이상한 힘을 쓸 수 있는 사람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크레니히는 기억을 찾아가면 서도 큰 혼란을 느끼진 않았다. 그저 생전의 자기 자신이 조금 불쌍해졌을 뿐이었다. 성유계엔 크레니히 외에도 다수의 전사들이 있었다. 크레니히가 갓 들어 왔을 때만 하더라도 몇 명 안 되던 전사들은, 어느 순간 슬금슬금 늘어나더니 어느새 저택을 꽉 채울 정도로 많아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지시자는 그들이 생전에 인연이 있던 사이일 거라고 했다. 좋은 사이든 나쁜 사이든, 크레니히는 그들이 서로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부러웠다. 그에겐 전부 낯선 얼굴뿐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은 단 한 명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쩐지 볼 때마다 씁쓸해서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기억을 거의 다 찾아 나갈 때에야 크레니히는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였음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 는 건 없었다. 그는 여전히 가능하면 마르그리드를 피해 다녔다. 그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크레니히는 이해할 수 있었 다. 자신은 비교적 기억을 빨리 찾은 편이었지만 전사들 중에는 아직도 전 혀 기억을 찾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므로. 마르그리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크레니히는 마르그리드가 기억을 찾는다 한들 그녀가 자신을 반가워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은 실험체 1이었을 뿐일 테니까.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크레니히는 가끔 소외감을 느꼈다. 그들 중에는 마음씨 좋은 사람들도 많아 자신을 볼 때마다 인사를 건넨다거 나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막상 먼저 다가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크레니히는 적당히 사람들에게서 거리를 둔 채 긴 시간을 홀로 보내곤 했다. 기억을 전부 찾고 나자 지시자는 다른 전사들의 기억도 찾아주어야 한다며 예전만큼 크레니히를 자주 데려가지 않아서, 원한다면 크레니히는 온종일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었다. 마르세우스가 온 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는 성유계에 오고 나서도 한참을 뒤늦게야 지시자 손에 이끌려 올 수 있었다. 지시자는 마르세우스가 늦어진 것이 브라우의 심술 탓이라고 했다. 크레니히는 성유계에서 지시자에게 발견된 타입이었던 탓에 브라우는 만나 본 적이 없어서, 지시자의 말에도 그냥 그러려니 했지만 어떤 전사들은 지 시자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브라우에 대한 말들이 잠시 오갔다. 크레니히는 그 대화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겐 오히려 마르세우스의 모습 쪽이 훨씬 인상적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가늠이 가지 않는, 중성적으 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흰 얼굴에 검은 머리와 붉은 계통의 옷은 멀리서 도 눈에 확 들어왔다. 독특한 사람이었다. 자신을 칭할 때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그걸 들은 로쏘는 마르세우스에게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저거 다중인격 아니야?’ 라 고 했지만 마르세우스는 그 말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덧붙여 존재감은 그렇게 뚜렷한데도, 그에 대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성별조차도. 간혹 그를 아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중에서도 그와 친밀한 관계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상적인 사람이었지만 크레니히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자신과는 어떠한 접점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였고. 그러니 한밤중에 그와 마주치게 된 건 상당히 의외의 일이었다. 크레니히는 밤을 좋아하지 않았다. 잠들면 어김없이 꿈을 꾸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들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건 생전이나 여기나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깨어있을 때라면 다른 일에 집중이라도 할 것을. 꿈은 원할 때 깨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훨씬 나빴다. 그래서 크레니히는 자주 밤을 새웠다. 그러다 하루 날 잡아 곯아떨어지더라도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방 안에서 고요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지루해지면 발소리를 죽여 저택 주위를 맴돌았다. 성유계는 위험한 곳이었지 만 저택 주변만큼은 밤에도 안전했다. 그리고 그곳에 마르세우스가 앉아있었다. 마르세우스와 우연히 저택 밖에서 마주친 이후로 크레니히는 잠들지 못 하는 밤에는 대부분 저택의 밖으로 나왔다. 그러면 때론 마르세우스가 거기 있었다. 주로 날씨가 맑을 때였다. 마르세우스는 밤하늘을 퍽 좋아하는 것 같았다. 마당 가운데 고요히 앉아 무기를 손질하다가도 그는 틈틈이 고개를 들어 별을 보았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그들이 대화하는 일은 없었다. 마르세우스는 묵묵히 무기를 손질하거나 하늘을 보았고 크레니히는 조금 떨어져 앉아 그런 그를 구경했다. 크레니히가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아도 그가 크레니히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크레니히의 존재 자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 다. 그러나 그런 무관심이 크레니히는 오히려 편했다. 대화를 나눴던 건 단 한 번 뿐이었다. 그 날도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은 크레니히도 마르세우스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이 아는 별자리를 찾아보려 했지만 언제나 수없이 쏟아지는 많은 별들을 어떻게 이어야 할지 몰라 포기하곤 했다. 천문도가 아닌 진짜 밤하늘을 상대로 그의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 번 물어볼까?’ 크레니히는 마르세우스를 흘끔 쳐다보았다. 매일 밤하늘을 보는 그라면 잘 알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크레니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었다. “이곳의 하늘은 언제나 바뀌므로 그 질문에 대해선 애석하게도 대답해줄 수 없을 것 같군. 그대는 몰랐나?” 전혀 몰랐다. 벙찐 채로 크레니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그 전날의 하늘과 지금의 하늘이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기껏해야 달의 변화 정도밖에는 눈치채지 못할 그의 눈썰미로 그걸 알아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마르세우스 씨는…” “우리가 보는 건 별 그 자체. 어차피 이 마르세우스에게 인간이 정한 별 자리는 의미가 없다. 우리들은 별의 궤도와 별과 별 사이의 관계를 보고 운명을 가늠할 뿐.” 마르세우스가 말을 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조보다는 오히려 마르세우스의 입에서 나온 운명이라는 단어가 크레니히의 주의를 끌었다. 언제나 냉정한 마르세우스의 입에서 나오기엔 지나치게 낭만적인 단어였다. 운명이라. 크레니히는 무릎을 모으곤 팔에 얼굴을 묻었다. 운명은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였다. 그 단어를 긍정하는 순간 불행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어서.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그게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진다고 해도 결국엔 그저 통계치를 적절히 활용하는 것뿐이잖아.” 크레니히는 중얼거렸다.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다. 고개를 묻은 채라 마르세우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들이 보는 별을 고작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통계니 과학이니 하는 건 제법 유용하지만, 가장 결정적일 때에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니. 그대는 판데모니움 출신이라고 했나? 그들은 과학을 너무 믿었다. 그래서 때로 실수를 저질렀지.” 마치 판데모니움을 잘 아는 것 같은 말투였다. 크레니히는 침묵했다. 마르세우스의 말이 맞았다. 과학은 편리했지만 크레니히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레니히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까지의 대화가 마치 거짓말인 양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무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달빛을 받아 그의 얼굴에 기묘한 음영을 드리웠다. 크레니히에겐 그 광경이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어딘가 현실감이 없었다. 크레니히는 어쩌면 그도 인간이 아닌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감각이 침몰했다. 마르세우스를 감싼 어둠 사이로 반짝이는 물결 같은 환상이 나타났다가 곧 희미해졌다. 환상이 일으킨 파동이 미약하게 손끝에 와 닿았다. 아름다웠다. 표면적으로는 어쨌든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대화 없는 고요한 밤이 그 뒤로 몇 날이고 더 지나갔다. 변한 건 크레니히 혼자였다. 성유계에는 맑은 날보다는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다. 그런 날이 되면 크레니히는 다시 날이 맑아지기만을 기다렸다. 비나 눈이 며칠이고 계속될 때 에는 그의 기분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르세우스를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아주 어린 시절 이후로는 잊고 있던 감정이었다. 그러나 마르세우스를 만날 밤을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크레니히는 낮에는 애써 마르세우스를 찾아보려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는 밤과는 달리 낮에는 무슨 이유를 대고 그를 찾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 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아는 마르세우스는 오직 밤의 마르세우스 뿐이었다. 어둠 속에 녹아 들 것처럼 까만 머리카락 아래에서 유독 흰 얼굴이 도드라지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시시각각 변하는 별의 궤적을 눈으로 좇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낮의 마르세우스에 대해선 크레니히는 무엇도 알지 못했다.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와 자주 어울리고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이상하게도 그런 것까지 알아버리게 되면 밤 동안의 마르세우스는 사라 져버릴 것 같았다. 밤은 둘 만의 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오로지 단 둘 뿐이었다. 미묘한 동질감과 편안한 침묵에 둘러싸인 채로 날이 샐 때까지 크레니히가 마르세우스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지나치게 소중해서 차마 누구에게조차 털어놓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이 깨져버리는 것을 크레니히는 원치 않았다. ‘미인에게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크레니히는 설핏 웃었다. 그와 같이 있으면 시간이 참 빠르게 흘렀다. 마르세우스의 동작에는 특유의 우아함이 있었고 그걸 바라보는 건 언제나 질리지 않았다. 판데모니움에 살면서 수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어떤 그림도, 음악도, 아름다운 배우도 그의 눈길을 사로잡진 못했다. 그런데 마르세우스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크레니히의 시선을 뺏어가고, 가끔은 넋을 놓고 바라보게끔 하였다. 하기야 그때는 어쩌면 아름다움에 눈을 돌릴 여유마저도 없었는지도 몰랐다. 그때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데에, 이상한 것들이 느껴진다는 데에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기에도 바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환상을 보아도 예전만큼의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좋지는 않았지만 그것들을 느끼는 데에도, 그들을 이용해 무언가를 하는 데에도 퍽 익숙해져 있었다. 요새는 환수도 얌전해서 크레니히는 오랜만에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이계의 환상과 마르세우스는 잘 어울렸다. 둘 다 이 세계의 것 같 지 않은 면모가 있어 더욱 그랬다. 마르세우스를 보고 있으면 간혹 다른 세계의 풍경이 그의 뒤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주 가끔은 그 광경이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럴 땐 자신이 환각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전의 크레니히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크레니히는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기를 바랐다. 가능하면 영원히. 매 순간이 그냥 흘려보낼 수 없을 만큼 아까웠다. 그럴 수만 있다면, 크레니히는 시간을 박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공간을 이어 이계를 불러올 줄은 알았지만 시간에 간섭할 줄은 몰랐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더라면 그의 모습을 그려 간직하기라도 했을 텐데. 크레니히는 아쉬워했다. 한편으론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 하더라도 저 모 습을 완벽하게는 담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갈망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조금씩 자라났다. 크레니히는 자신이 마르세우스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크레니히는 사랑받는 자신도, 마르세우스 옆에 선 자신도 상상할 수 없었다. 사랑을 받는 법도, 사랑을 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소년이었다. 그래서 크레 니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의 마음을 그냥 방치했다. 그렇게 두면 언젠가는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단 한 번, 박제해서라도 그를 자신이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충동적으로 생각했던 게 전부였다.
3.
비록 머리뿐이었지만 마르세우스가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 사실에 크레니히는 상반된 기분을 맛보았다. 어딘가 붕 뜬 듯 고양된 것 같기도 하고 판데모니움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볼 때보다 더 절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이건 꿈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크레니히는 피식 웃었다. 이제 와 현실도피를 하기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크레니히는 마르세우스의 뺨을 천천히 쓸어보았다. 차갑고 딱딱했지만 인간의 촉감이었다.
이대로 그를 내버려두고 머리가 스스로 사라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최선일 터였다. 그 뒤에 마르세우스에게 찾아가 어떻게 된 일인지 솔직히 이야기하고 사과해야 했다. 그게 옳았다. 크레니히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곤 하지만 어쨌든 심연이 벌인 일이니 반쯤은 그의 책임이었다. 이렇게 일이 된 데에 마르세우스의 의지는 없었다. 그러니 비록 지금 여기 있다 해도 자신에게 이 머리를 마음대로 할 권리는 없을 터였다. 이 이상 무언가를 하는 건 마르세우스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런데도 크레니히는 자꾸만 욕심이 났다. 그와 닿아있을 수 있는 건 지금뿐이었다. 앞으로 이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으리란 걸 크레니히는 알았다. 마르세우스는 쉽게 접근을 허용하 지 않는 사람이었고 하물며 자신은 인간관계에 서툴고 어렸으며, 그리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마르세우스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겁먹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제에 이 이상 마르세우스와 가까워질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지막 기회….’
크레니히는 쉽게 손을 떼지 못했다. 그는 심연의 말을 이해했다. 이 이후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한 발짝에 모든 게 갈릴 터였다. 앞으로 나가 그의 머리를 쥘 것인가,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 방관할 것인가. 그의 머리가 사라지기 전까지 크레니히는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를 만져보거나, 쓰다듬거나,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다거나 혹 은 그 이외의 일들도. 단 한 발짝만 내딛는다면.
끔찍한 상상이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자신은 꼼짝없이 심연과 공범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비난해도 자신이 원한 일이 아니었다며 항변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마르세우스의 머리를 그대로 놓아둘 기회도 있었으니까.
고작 한 발짝 거리 안에서 치열한 감정이 맞붙었다. 서로 다른 선택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온갖 가정과 상상들이 그 짧은 시간 안에도 수십 번쯤 크레니히의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결국 크레니히는 한 발짝을 내디뎠다.
심연이 옳았다. 자신은 언제라도 이러고 싶었다. 크레니히는 자신이 순수하게 마르세우스를 좋아하는 줄 알았다. 언제고 별이 뜬 밤에 그와 같은 공간에 앉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짓말이었다. 단 한 번 손이 닿았던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데.
테이블 아래 고인 피가 신발을 물들이고 발끝을 적셨다. 크레니히는 양 손으로 마르세우스의 뺨을 감쌌다. 마르세우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적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크레니히는 자신을 위로했다. 고요히 감긴 눈꺼풀을 어루만지자 속눈썹이 엄지손가락을 간질였다. 이마, 관자놀이, 광대뼈를 지나 양쪽 귀를, 그리고 다시 돌아와 콧날, 뺨, 그리고 입술을. 처음에는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듯이 건드렸다가 다시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서 어루만졌다. 가만히 손을 대고 있으면 그의 피부로 부터 서늘한 냉기가 전해져왔다.
크레니히는 마르세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허리를 숙이다 여의치 않자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크레니히와 마르세우스의 눈높이가 같아졌다. 피에 옷자락이 무릎까지 젖어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는 마르세우스의 머리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머리카락에 손을 얽어 자신의 쪽으로 당기자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져왔다. 인체 중 가장 무거운 부분이 머리라 했던가. 실없는 생각이 잠시 크레니히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테이블 위에 고여 있던 피가 그의 팔을 타고 흘렀다. 크레니히는 마르세우스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무언가가 사라진 것 같았다. 닿고 싶다. 그 한 마디의 욕망이 크레니히를 삼켰다. 검고 질척했다.
마르세우스와 크레니히의 콧등이 서로 닿았다.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 다. 차라리 눈을 감고 크레니히는 허공을 더듬었다. 다른 곳과는 다른 부드러운 감촉이 크레니히의 입술에 닿았다. 잔뜩 긴장한 크레니히의 입술에서 떨리는 숨이 새어나왔다. 돌아오는 숨결은 없었다.
그 순간 크레니히는 모든 것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밤의 마법은 깨졌다. 이제 자신은 영영 그 평온한 순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설령 되살아난 마르세우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여전히 크레니히에게 무심한 시선만을 보낸다 해도.
무엇도 예전 같을 수 없었다. 죄책감, 자기혐오 같은 것들을 속에 담은 채 마르세우스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뿐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크레니히는 그 입술의 감촉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한 번도 닿아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한번 불붙은 정념이 이후엔 또 무엇을 원하게 될지 크레니히는 짐작할 수 없었다.
만약 앞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다면?
심연은 언제고 크레니히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먼저 환수에게 부탁하게 될지도 몰랐다. 크레니히는 자신이 그렇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게 두려웠다.
이상하지. 크레니히는 웃으며 다시 한 번 마르세우스에게 입 맞췄다. 자신이 이 한 번의 입맞춤으로 잃은 것이 이렇게나 많은데, 슬프고 두려워해야 하는 게 맞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입맞춤은 달콤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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