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늦은 시간이었지만 식당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시간을 흘끔 확인한 에바리스트는 아이자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아이자크가 고개를 돌렸다. 에바리스트는 벽에 걸린 시계를 가리켰다.
“지금 가지 않으면 점호 놓칠걸?”
“아,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되었어?”
아쉬운 듯 중얼거린 아이자크가 사람들 틈새에서 몸을 빼냈다. 그들 외에도 훈련생 몇 명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애들은 들어갈 시간이지, 하고 앉아있는 대원 하나가 손을 흔들었다.
식당을 나와 복도를 걷는 와중에도 떠들썩한 소리는 희미하게나마 계속 들려왔다.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대로 밤을 새울 터였다.
저들은 낮 동안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레지멘트의 대원이었다. 소용돌이가 하나 사라지고 나면 그날 밤 식당에서는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위한 조촐한 만찬이 열렸다. 만찬이라고 해 보았자 약간의 술과 음식을 늘어놓은 것뿐이었지만. 임무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친분이 있는 몇몇과 함께 그곳에 모여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고 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을 추모했다.
가끔은 오늘처럼 훈련생들이 그들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기도 했다. 임무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듣기 위해서였다. 그들도 언젠간 소용돌이로 향할 운명이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정작 소용돌이마다 그 내부는 각기 천차만별이어서 실제 상황에선 또 어떤 일이 일어 날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경험자의 이야기를 들어두어 나쁠 건 없었다. 가끔 짓궂은 대원들이 몰래 쥐여주는 술잔은 또 다른 재미였다. 그러나 그것도 딱 점호시간 전까지였다.
“우리도 이제 얼마 안 남았지.”
복도를 걷던 도중 아이자크가 나지막하게 말을 걸었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지도 어느새 3년이 지나 있었다. 훈련생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시간도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부대 배치는 어떻게 되려나? 이왕이면 같은 부대로 배치받으면 좋겠는 데. 그치?”
“모르지. 부대 내 결원이라든가, 실력이라든가, 이런저런 걸 고려할 테니까. 나는…”
아이자크의 말에 대답하던 에바리스트는 그들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을 보곤 황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베른하드였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으면 점호에 늦을 거다.”
둘을 본 베른하드는 그 말을 남기곤 식당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 파견된 부대에는 그가 이끄는 소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제야 식당에 도착한 이유는 아마 보고와 같은 뒷일을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리라. 이곳에 오기 전 씻고 옷을 갈아입은 건지 베른하드의 제복은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 모습이 저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에바리스트는 각이 잘 잡 혀있는 그 제복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에바, 뭐해?”
아이자크가 그를 불렀을 때에야 에바리스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까 하려던 말을 속으로 삼키며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겼다.
베른하드와 같은 부대였으면 좋겠다고.
아이자크가 다시 물어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유독 베른하드를 잘 따랐다. 주변에서는 베른하드를 잘 따르는 에바리스트를 신기하게 여겼지만 그를 구해준 것이 베른하드였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베른하드 본인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넘겨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에바리스트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숨어있던 어두운 공간과 꼭 붙어있던 아이자크의 떨리던 몸을. 집도, 부모님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는 게 도통 믿기질 않아 난쟁이가 자신을 죽이려 도끼를 드는 걸 보면서도 어딘가 몽롱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에는 틀림없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망연해 있었던 것도 같았다.
그 순간에,
그의 얼굴에 피가 튀고, 무기를 떨어뜨린 난쟁이의 몸이 서서히 쓰러졌다. 날붙이의 반짝이는 빛이 사라지자 그제야 그 뒤에 서 있던 사람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그게 베른하드였다. 그는 아이자크와 에바리스트가 무사한지를 확인하고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준 후 자신을 따라오라며 등을 돌렸다. 그 등을 에바리스트는 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등만큼이나 듬직하고 단단한 등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을 잃고 새로 지내게 된 곳에서 낯익은 얼굴은 베른하드 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른하드는 에바리스트의 생각보다도 더 바쁜 사람이었고 에바리스트도 레지멘트에 적응하기에도 벅찰 때였다. 그러니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대신에 에바리스트는 오래도록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베른하드는 그에게 이상적인 어른의 이미지였다. 그의 나이가 에바리스트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젊다는 걸 알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생각이 바뀐 건 그가 베른하드를 좀 더 잘 알게 된 이후의 일이었다.
‘베른하드 소대장? 난 잘 모르지만 괜찮은 사람인 건 확실하지.’
‘글쎄. 좀 딱딱하게 생기지 않았나?’
훈련을 제외하면, 훈련생들은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무료한 그들에게 ‘베른하드 소대장이 구해줬다는 꼬맹이들’은 좋은 이야깃거리인 모양이었다. 소문은 전광석화처럼 퍼졌고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는 어느 새 나름 부대 내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자신들에게로 향한 관심에 에바리스트는 무반응으로 대응했지만, 간혹 베른하드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기 라도 하면 절로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베른하드에 대한 평은 꽤 일관적이었다. 유능하고 성실하며 책임감 있지만 고지식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 참 신기하게도 베른하드의 사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있다면 에바리스트의 교관이자 베른하드의 쌍둥이 형제인 프리드리히 정도일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 으면 베른하드는 꼭 소대장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인간 베른하드 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했다.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더 알고 싶었다. 베른하드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가능하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넘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까지도.
그런 점에서 에바리스트가 베른하드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 건 큰 행운이었다.
베른하드는 자주 다쳐서 돌아오곤 했다.
소용돌이를 없애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살아 돌아오는 것 자체가 매 순간 행운이었다. 그러나 같이 갔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베른하드는 굳이 무릅쓰지 않아도 될 위험에 뛰어들어 입지 않을 수 있었던 상처까지도 입는 경우가 자주 있는 모양이었다. 베른하드의 그런 행동 덕에 잘 풀리지 않던 임무가 어떻게든 해결되거나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다치게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런 탓에 베른하드는 임무가 끝나면 의무반에 신세를 지는 일이 잦았다. 베른하드가 다쳤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에바리스트는 훈련 사이 비는 시간에 의무반으로 달려갔다. 병동 앞을 기웃거리고 있으면 제자랍시고 달려온 아직 어린 훈련생이 귀여웠는지 의무반 대원들은 베른하드가 쉬고 있는 곳 을 넌지시 알려주곤 했다.
그렇지만 에바리스트는 쉬고 있는 베른하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고, 또 자신이 베른하드를 걱정했다는 것이 본인에게 알려지는 게 어딘가 멋쩍었다. 결국 언제나 그는 창문 너머로 베른하드가 무사한지만 확인하고 병동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 베른하드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쳤을 때, 에바리스트는 그가 누워있는 병실 안까지 살금살금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베른하드는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에바리스트는 그를 숨죽여 바라보았다. 베른하드가 그렇게 다친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였다. 베른하드의 눈꺼풀이 움직였다. 에바리스트는 온몸이 뻣뻣이 굳을 만큼 놀랐다. 다행히 베른하드는 에바리스트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곤 다시 눈을 감았다. 약효가 도는 모양이었다. 에바리스트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다가 베른하드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문을 열고 그곳을 나왔다.
그 날 온종일 에바리스트는 그 한숨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깨달은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지쳐있던 그 긴 한숨 소리. 그걸 이해하기 위해 에바리스트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한참 고민하고 나서야 그는 어쩌면 베른하드는 어딘가에 실망한 걸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에 실망 했던 건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어린 그에겐 지나치게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베른하드의 뒷모습을 예전같이 볼 수 없었다.
유능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베른하드가 얼마나 노력해야 했는지 에바리 스트는 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끝없이 노력하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는 베른하드가 누군가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적어도 그가 알고 있는 선에선 그랬다.
하소연뿐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베른하드의 사생활에 대해 잘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가 보기에 베른하드는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겐 이 세계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유일한 가족인 프리드리히마저 그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에바리스트는 그가 한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바뀐 시선으로 본 베른하드의 등은 퍽 쓸쓸하고 아슬아슬했다.
2.
“아이자크와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던데.”
베른하드의 말에 에바리스트의 입이 꾸욱 다물렸다. 철없어 보이는 행동인 걸 알면서도 에바리스트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발끝으로 애꿎은 지면만 툭툭 건드렸다. 그가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드문 일이군. 하기야 아직 그럴 때인가….”
말끝을 흐린 베른하드가 가볍게 미소지었다. 에바리스트의 나이를 그제야 떠올린 것 같았다.
베른하드가 느슨한 표정을 짓는 건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에바리스트는 기뻐할 수 없었다. 벌써 저런 식의 말을 한 서른 번쯤 들은 탓이었다. 아이자크와 그간 징하게 붙어 다녔던 건 그 자신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라고 꼭 아이자크와 사이가 좋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가 싸웠다는 말에 마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 것 마냥 유난을 떨었다. 솔직히 이쯤 되면 지겨울 정도였다.
“저번에 가르쳐주신 걸 연습하면 되나요?”
절로 심통 맞은 목소리가 나왔다. 베른하드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에 바리스트는 한쪽 구석으로 가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가르쳐준 기술은 다루기가 까다로웠다. 검의 주변으로 흰색 빛무리가 어른거렸다. 희미하게 가시나무의 형상을 띄고 있는 그것을 좀 더 뚜렷하게 이끌어내기 위해 에바리스 트는 힘을 가했다.
훈련이 없는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 그는 베른하드에게서 이형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레지멘트 중에서는 그처럼 드물지만 간혹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고 했다. 그래도 알려져서 좋을 건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에바리스트가 베른하드에게 별도로 훈련을 받는다고만 알고 있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아이자크 정도일까.
아, 아이자크. 에바리스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애는 결국 끝까지 자신에게 주먹을 들지 못했다.
그 순간 일그러진 가시나무의 형상이 그의 손등으로 감겨들었다. 가시나무는 적에게서 자신을 지키고 반격을 가하는 좋은 수단이었지만 통제하지 못하면 시전자를 상처 입혔다. 손에서 느껴지는 쓰라림에 에바리스트는 검을 놓았다. 욱신거리는 손을 쥐었다 펴자 손등에 붉게 긁힌 자국이 도드라졌다.
“정신이 흐트러졌구나. 너무 가까이에 두어서도, 너무 멀리까지 뻗어 나가게 두어서도 안 된다. 힘을 가하는 건 그다음이다.”
에바리스트의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던 베른하드가 나지막하게 충고했다. 그러나 에바리스트에게는 그것이 꼭 자신을 질책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서러워져서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침부터 제대로 풀리는 일이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를 괴롭히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어 투정부린 적은 없지만 레지멘트에서의 생활은 절대 쉽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해서 훈련과 교육이 이어졌다. 무기의 무게와 반동에 익숙해지고 상대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익히는 건 어렸을 때부터 조숙하단 소리를 듣던 에바리스트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자크는, 한때 아무것도 모르던 겁 많던 소년은 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에바리스트를 능가하곤 했다. 에바리스트는 그런 아이자크를 질투했고 동시에 그를 질투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속의 갈등이 조금씩 쌓이다 결국엔 아이자크의 앞에서 폭발해 버렸던 것이다. 그게 아이자크와 그가 다툰 이유였다.
“저는 정말로 많이 노력했어요.”
자꾸만 울컥하려고 하는 속을 억누르며 에바리스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밖엔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눈치채진 못했지만 그는 정말로 절박했다. 레지멘트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자신은 정말로 갈 곳이 없음을 그는 알았다. 떠받들어지던 도련님에서 갑자기 많은 것을 혼자 해야 하는 위치로 처지가 바뀌었지만 서툴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어디서도 뒤 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마음이 약해질까봐 차마 고향에 관한 건 떠올리지도 못했다.
베른하드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알고 있다. 계속 보아왔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
툭. 어깨에 온기가 닿았다. 에바리스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그 손길은 이내 그의 머리를 쓰다듬곤 떨어졌다. 다정한 위로였다. 손이 떨어질 때까지 에바리스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면 꼴사납게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떨려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는 깨달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베른하드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어째서?
에바리스트는 자신에게 물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 해 에바리스트는 부쩍 자랐다. 그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방구석에 표시해둔 눈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개인적인 차이는 있었지만 또래의 다른 훈련생들도 나날이 커가고 있었다. 그들은 바야 흐로 어른이 되어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래도 에바리스트의 얼굴엔 아직 청년이라 불리기엔 이른 앳된 기가 남아있었다. 기성품인 레지멘트의 옷 역시 여기저기 품이 남았다. 그 시기의 소년들이 얼마나 부쩍 크는지 알고 있는 행정담당은 딱 맞는 옷을 주어 금방 버리느니 조금 큰 옷을 지급하는 것이 낫다고 믿었다.
에바리스트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와이셔츠 역시 조금 큰 건 마찬가지라 가장 위의 단추까지 단정하게 채워도 목둘레가 남아돌았다. 소매도 마찬가지였다. 에바리스트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야 다 클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 그는 베른하드를 떠올렸다. 그만큼만 자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베른하드는 키가 크고 자세가 반듯해서 제복이 잘 어울렸다. 검을 일직선으로 들어올리면 소매 사이로 엿보이는 팔뚝의 힘줄 같은 것이나 단단한 목덜미 따위가 에바리스트는 퍽 부러웠다. 그에 비하면 에바리스트는 아직도 한참 어렸다.
“빨리 자랐으면 좋겠어.”
에바리스트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야 했다.
동경이 동질감으로, 그리고 다시 애정으로 변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 지 않았다. 그와 베른하드는 어딘가 닮아있었다. 소용돌이로 고향을 잃고 레지멘트로 흘러들어오게 되었다는 점이 그랬고,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점이 그랬다. 에바리스트의 옆에는 언제나 아이자크가 있었지만 에바리스트는 그에게도 맘놓고 힘들다 하소연하지 못했다. 자신과 똑같이 힘들 아이자크에게 차마 걱정을 끼칠 수 없어서였다. 아직도 아이자크는 가끔 에바리스트를 자신이 지켜주어야 할 도련님으로 보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외로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베른하드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자신과 유사한 삶을 살아온 그가 괜찮다고 해 준다면 자신은 잘하고 있는 거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라면 에바리스트를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갔다. 시선이 가니 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여갔다. 끝내 자신을 부르는 베른하드의 어조나 그의 손에 박힌 굳은살 같은 것들이 특별하게 느껴졌을 때, 에바리스트는 자신이 베른하드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가끔 에바리스트는 꿈을 꾸었다. 단편적으로밖엔 기억나지 않는 그 꿈에는 꼭 베른하드가 나왔다. 그런 날엔 잠이 얕았다. 기상시간을 훨씬 앞둔 이른 새벽에 혼곤하게 깨어나면 어느새 바지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면 에바리스트는 룸메이트가 깨기 전 서둘러 빨래를 처리하곤 침대에 하 염없이 앉아 기상시간을 기다렸다.
따로 성교육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그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모인 집단에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음담패설이었고 아직 어린 소년들을 몽정이나 해 보았느냐며 놀리고싶어 하는 어른들은 의외로 많았다. 냉막한 인상인 그에게 대놓고 그런 농을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알 음알음 주워듣다 보면 어떻게든 알게 되는 법이었다.
그런 날에는 에바리스트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베른하드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한편으로는 그를 보면 제 입이 어떤 말이든 내뱉어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낯선 감정이었다. 그리고 통제하기는 지독하게 어려웠다. 짧은 순간에도 에바리스트의 시선은 무심코 베른하드를 쫓았다.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같이 있으면 마냥 좋았다. 어쩌다 손끝이라도 우연히 닿으면 그날은 종일 그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정말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에바리스트는 그가 좋았다.
그러나 에바리스트는 그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었다. 그가 자신보다 13살이나 나이가 많다는 것과, 그가 자신과 같은 성별이라는 것과, 그리 고 아마도 그의 감정을 베른하드는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에바리스트를 가로막았다.
그랬다. 에바리스트는 알았다. 베른하드는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소명을 넘기고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질 사람이었다. 묘비들이 열주처럼 늘어서 있던 그곳에서 어린 에바리스트에게 각오를 물었던 그때, 그가 했던 말처럼. 베른하드가 그에게 직접 말해 준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를 계속 지켜보며 에바리스트는 깨달았다. 세상이 그에게 짐이었다. 어릴 적 들었던 그의 한숨 소리는 한 번 더 주어진 삶의 기회가 버거웠던 자가 세상을 향해 내뱉었던 무언의 원망이었다. 그런 사람에겐 그의 감정조차 짐일 터였다.
붙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에바리스트는 그럴 수도 없었 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무슨 일이 생겨도 네게 뒤를 맡기고 갈 수 있다면 기쁘겠지.’ 베른하드가 언젠가 지나가듯 말했던 그 한 마디 때문에.
지친 듯이 내리깔린 시선과는 정반대로 자신이 사라질 미래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에바리스트는 갈등했다. 오래 살아달라고, 자신은 베른하드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좀 더 어렸으면, 자연스럽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성격이었으면 베른하드도 말로 만이나마 그럴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속으로 조소했다. 오히려 레지멘트에 들어온 이상 그건 당연히 각오해야 할 일이라고 혼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에바리스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결국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열심히 할게요.'
그 말에 베른하드는 안심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오직 사석에서만 간혹 보이곤 하는, 남들은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아렸다. 그리고 그 말은 그대로 에바리스트의 목표가 되었다. 그가 만족할 만큼 실력을 쌓아서 그가 언제라도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해서라도 베른하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에바리스트는 그걸로 족했다.
3.
에바리스트는 점점 더 가시나무를 다루는 데 익숙해졌다. 완전히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그의 가시나무는 베른하드의 것과는 다른 모양새였다. 베른하드는 무릇 기술은 사용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 법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일 거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에바리스트는 아쉬웠다.
‘이왕이면 베른하드와 같은 형상이었으면 좋았을걸.’
그는 베른하드가 쓰는 가시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메마르고 단단하며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 꼭 베른하드를 닮아 있었다.
“너무 가까이 두어서도, 너무 멀리 두어서도 안 된다, 라.”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가 했던 말을 되뇌었다.
그는 이제 베른하드를 예전보다는 퍽 덤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음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었다. 우습게도 가시나무를 제어하는 법과 비슷했다. 애정과 동경 사이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래도 주체하지 못할 열망은 모두 그를 따라잡는 데 쏟았다. 여전히 가끔은 마음이 출렁거렸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모른 척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던 예전보단 나았다.
그 모든 것이 힘들어질 때면 에바리스트는 목표를 되새겼다. 그러면 어떤 때에는 베른하드 뒤에 선 자신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날이 갈수록 에바리스트의 상상엔 조금씩 더 살이 붙었다. 언젠가부터 그는 베른하드의 죽음까지도 당연한 듯 떠올리게 되었다.
그의 죽음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지멘트는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새로운 소용돌이가 생겨났다 사라지고 나면 시신 없는 묘비도 몇 개고 세워졌다. 상상 속에서 베른하드는 언제나 에바리스트를 남겨둔 채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묘비 아래에는 때로는 검이, 때로는 군번줄이 묻혔고, 어떤 때에는 아무것도 묻히지 못했다. 상상의 결말은 언제나 동일했다. 에바리스트는 유일하게 그의 뒤를 이을 자로서 베른하드의 빈자리에 서 있었다.
그 후로 그는 의식적으로 베른하드를 닮으려 애썼다. 그의 어조, 그의 걸 음걸이 같은 것들을 눈여겨보곤 그대로 따라했다. 사람들이 언제고 자신과 베른하드를 함께 떠올릴 수 있도록. 자신이 언제고 그의 자리를 잇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도록. 그렇게 하면 베른하드의 이름과 명망은 그가 죽은 후 에도 영원히 에바리스트를 따라다니게 될 터였다. 한 묶음으로. 에바리스트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와중에도 에바리스트는 계속해서 자라났다. 조금 컸던 옷이 슬슬 에바리스트에게 작아질 무렵 그는 훈련생에서도 졸업하게 되었다. 부대 내에 디 아이 소멸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슬금슬금 돌 때쯤이었다. 부대 전체에 희망과 불안의 기운이 혼잡하게 뒤섞여 퍼져있었다. 디 아이 작전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성공하면 이번에야말로 소용돌이를 모두 없앨 수 있었지만 실패 확률도 그만큼 높았다.
디 아이 임무에 파견되는 부대 중에는 에바리스트가 소속된 부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베른하드와 같은 부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외곽에서나마 같은 임무에 참여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에바리스트는 자신을 달랬다.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가 죽을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디 아이라는 무대는 베른하드가 죽기에 딱 적합했다. 만약 소용돌이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베른하드는 아마 이번에야말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겐 말할 수 없었지만 에바리스트는 설령 임무에 실패하더라 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 그는 훈련생이 아니었고 베른하드가 남겨준 소명은 자신이 이으면 그만이었다.
약속을 지킬 시간이었다.
모닥불이 금방이라도 꺼질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바리스트는 주변의 나뭇가지를 더 던져 넣었다. 불이 타올랐다.
밤은 추웠다. 그와 아이자크는 야영 중이었다. 에바리스트가 보초를 서는 사이 잠에 빠져든 아이자크가 추운지 몸을 웅크렸다. 희미하게 신음이 들려왔다. 아이자크의 눈에는 피에 젖은 붕대가 감겨있었다. 저것도 고작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가 눈을 잃은 건 자신의 책임이었다. 에바리스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빈 동공에 본래 담겨있어야 했을, 사라진 눈동자의 무게가 그를 짓눌렀다.
밤을 새우는 것도 벌써 여러 날이었지만 조금도 잠이 오지 않았다. 많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소용돌이는 사라졌다. 베른하드 역시 소용돌이와 함께 사라진 것 같았다. 소멸에 말려들기 전에 구조될 수 있었던 건 자신들처럼 소용돌이 외곽에 있던 몇몇 사람들뿐이었으니까.
‘스승님은 그 안에서 기뻤을까?’
에바리스트는 소용돌이 안으로 향하던 베른하드의 마지막 뒷모습을 떠올렸다. 아마 홀가분했겠지. 에바리스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와 어울리는 최후였다.
그러나 에바리스트는 세상에 남겨져 버렸다. 소용돌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레지멘트는 해체되었다. 이어받아야 할 소명도, 지켜야 할 목표도, 돌아갈 곳도 소용돌이와 함께 영영 사라졌다. 이제 자신과 베른하드를 잇는 것은 고작 가시나무 정도였다. 그와 베른하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 졌고 베른하드의 묘비는 영영 세워질 일이 없게 되었다. 베른하드처럼 될 기회를, 이로써 에바리스트는 강제로 박탈당했다. 레지멘트에서 그가 했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차라리 그 때 소멸에 말려 죽었어도 좋았을걸.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에바리스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소용돌이도, 레지멘트도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다시 포레스트 힐에 살던 행복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상처 입은 아이자크가 있었다. 그가 눈을 다쳐가며 자신을 살렸으니 그의 잃어버린 눈을 대신해서 에바리스트는 어떻게든 살아있어야만 했다. 가끔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어떤 때는 아버지와 베른하드와 자신의 평온했던 삶을 삼켜버린 소용돌이가, 어떤 때는 자신들을 구해준 람이, 또 어떤 때는 혼자서 할 일을 마치고 떠난 베른하드가.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예전에 베른하드의 한숨을 이해하려 노력했을 때처럼. 눈 뜨고 지새는 밤이 길어질수록 점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베른하드를 잃은 상실감도, 그를 향했던 열망도 점차 빛바래어 가슴 한구석으로 가라앉았다. 슬펐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그렇게 그는 소년기의 마지막을 떠나보냈다.
숲을 벗어날 때쯤엔, 에바리스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여기서 신병을 모집하고 있다고 하는군, 아이자크.”
지치도록 걸은 후였다. 제국의 변경,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성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Fin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