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그가 이곳에 도착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에바리스트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갔다. 그리고 그는 왜 아치볼드가 그렇게 취미생활을 강조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간수가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었다. 보통의 감옥이라면 죄수의 노역을 감독한다거나 밤 보초를 서는 등의 일로 분주했겠지만 이곳에는 그런 일조차 없었다. 죄수들은 온순했고 그나마 최근에 들어온 죄수 중 일부만이 여전히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기물을 파손하거나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런 일들을 제외하자면, 시간을 보낼만한 일이라도 찾지 않으면 지루함에 몸서리쳐질 만큼 평온한 시간이었다.
“자네 봤나? 우리 에밀리한테 열매가 열리기 시작한 거?”
아치볼드는 틈만 나면 에바리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적잖이도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이곳에는 죄수 외에도 빨래며 청소, 요리와 같은 잡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십여 명 가까이 있었지만 대개는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에바리스트와도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의 태도를 아치볼드는 풍파에 찌든 탓이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예. 그렇더군요.”
“가을이 되면 예쁘게 익을 거야. 에밀리 성격이 좀 급해서 그렇지 조금 있으면 마리나 마샤에게도 열릴걸?”
아치볼드의 취미는 농사였다. 형무소 한구석에 있던 작은 텃밭과 몇 그루의 과실나무, 닭장, 염소 무리가 전부 그가 키우는 것들이란 걸 들었을 때에는 에바리스트도 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밀리는 그중 포도나무로 아치볼드가 특히 애지중지하는 상대였다.
정기적으로 육지에서 식료품이 오기는 하지만 대부분이 저장하기에 적합하도록 가공된 식품이었던지라 신선한 것이 먹고 싶다는 일념하에서 시작했던 것이 어느새 규모가 늘었다고 했다. 그래도 여기 있는 모두에게 돌아가기에는 양이 턱없이 적어서 직접 신선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치볼드와 에바리스트를 포함해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자네는 여전히 돌아다니고만 있다고 하던데.”
“아직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도 하고요.”
“산책도 나쁘진 않지. 않은데…, 구경은 적당히 해. 특히 밤늦게는 나가지 말고.”
에바리스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이렇다 할 취미를 찾지 못한 채 그는 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돌아다녀 본 바로는 이 섬은 형무소와 비행장, 그리고 형무소에 딸린 몇 가지 부속 시설들을 제외하고는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형무소의 반대편에는 무성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고 섬 가장자리는 대부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치볼드의 말마따나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는 섬이었다. 설령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한들 바위에 부딪히거나 거센 파도에 휩쓸릴 확률이 높았다.
아치볼드는 에바리스트가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이곳이 위험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재차 물어도 얼버무리거나 말을 돌릴 뿐 제대로 대답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은 확실했으나 에바리스트로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그 답을 알게 된 것은 그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전날 밤엔 바람이 미친 듯이 불었다. 유리창이 덜컹거리는 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아침을 먹으러 내려오면서도 에바리스트는 반쯤 잠에서 덜 깬 상태였다. 그런데 그가 아침 식사를 하러 채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심각한 표정의 아치볼드가 들어와 그를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죄수 하나가 탈출했어.”
“……예?”
잠이 퍼뜩 깨는 기분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아치볼드를 따라 본관 2층으로 이동했다. 웅성거리는 죄수들 사이로 열린 철창문이 보였다. 에바리스트와 같은 날에 들어왔던 죄수 중 한 명이었다. 계속 나가겠다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독방에 가두어진 자였다. 어떻게 문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어제저녁 에바리스트가 점호할 때에는 있었으니 밤을 틈타 탈출한 것이 틀림없었다.
아치볼드는 옆방 죄수를 상대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언제 나갔는지 몰라?”
“모르지. 간밤엔 온통 시끄러웠고, 걔는 잠도 없는지 원래도 밤에 요란하게 굴어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그냥 그러려니 했으니까.”
“어디로 나갔는지는 ……당연히 모르겠지. 미치겠네. 정문 쪽엔 연 흔적이 없어. 창문을 타고 내려간 것 같은데 어느 쪽 창문인지도 모르겠고.”
“왜. 찾으러 가게?”
“일단은.”
놀랍게도 그 말을 들은 죄수는 킬킬,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이미 죽은 놈 찾아서 뭐하게.”
“시체라도 찾으면 다행인데, 일단 보고서는 올려야 할 거 아냐.”
아치볼드와 그 죄수는 이미 도주한 죄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둔 채 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잊어버릴 만하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며, 아치볼드가 푸념하는 소리도 들렸다. 아치볼드가 부탁한 물건들을 챙기다가 에바리스트는 결국 그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미 죽었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얘는 아직 몰라?”
“가르쳐줘서 뭐하겠어. ……어차피 이젠 모르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겠지만. 그거 들고 따라와. 가보면 알게 될 거야.”
아치볼드는 못내 착잡한 표정으로 챙겨놓은 물건을 나눠 들고는 앞장서서 복도를 빠져나갔다. 뒤따르는 에바리스트의 뒤에서 죄수들은 간밤의 일에 대해 여전히 떠들고 있었다. 언뜻 괴물, 이라는 단어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시체는 숲으로 통하는 입구에 버려져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죄수는 발가벗겨진 채로 사지가 온통 찢어져 있었다. 언제 버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공기 중에 여전히 희미한 피 냄새가 감돌았다. 쯧, 하고 옆에서 아치볼드가 혀를 찼다.
“결국엔 이렇게 되었군. 그래도 자네, 저런 시체를 본 것치고는 안색이 제법 멀쩡한데?”
“……반정부분자를 제압하다 보면 종종 보는 광경입니다. 물론 저 정도로 참혹한 상태인 건 아니지만요.”
잘 되었네, 라고 중얼거리다가 자신이 꺼낸 말에 스스로 머쓱해졌는지 아치볼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바리스트는 죄수들이 떠들던 말들을 떠올렸다.
“괴물입니까?”
“들었나? 그래. 죄수들은 그렇게 부르곤 하지. 사실 정확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나도 몰라. 단지 밤늦게 숲을 돌아다니는 자는 전부 저렇게 된다는 것만 알 뿐이지.”
일단 궁금증은 나중에 풀고, 이것부터 처리하자고. 아치볼드는 모포를 펴며 그렇게 말했다. 그제야 에바리스트는 아치볼드가 챙기라고 했던 것들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 수 있었다. 사람 하나를 감쌀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모포와 밧줄을 가져온 건 시체를 감싸기 위함이었다.
아치볼드가 한때 인체였던 파편들을 그러모으는 사이 에바리스트는 시체의 몸뚱이를 끌어 모포에 눕혔다. 목뼈가 부러져 있었다. 팔다리가 찢긴 것보다도 이쪽이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처럼 보였다.
“시체는 묻습니까?”
“아니. 던지지.”
시체를 감싼 모포를 풀어지지 않도록 밧줄로 묶은 아치볼드가 답했다. 그는 묵묵히 아치볼드와 시체를 나누어 들고 절벽으로 향했다. 아치볼드는 짤막한 기도를 읊조린 후에 시체를 절벽 아래로 밀었다. 파도가 거세게 부딪히는 절벽 아래에서는 물길이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었다.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 터였다.
그 절벽 앞에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아치볼드는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말했다시피 나를 포함해서 그 괴물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전 간수장의 기록에 따르면 아주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야.”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까?”
“맞아.”
“그렇다면 그때는 왜 괴물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알려주시지 않은 겁니까?”
“그런 말을 하면 보통 반응은 두 가지더군. 믿지 않거나, 호기심에 차서 몰래 돌아다니거나. 자네는 어느 쪽이었을 것 같은가?”
에바리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방금 시체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그도 믿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대신에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정부는 이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대충은 알겠지. 기대하지 마. 정부는 그저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여기에 밀어놓고 인심 쓰듯이 먹을 것과 쓸 것을 넣어주는 게 다니까.”
아치볼드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는 지쳐 보였다.
“자네는 제발 오래 살아. 괴물뿐만이 아니야. 어떻게 해도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사람은 쉽게 무력해지고, 그러다 보면 때론 자살하거나 미치기도 해. 지금 저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기를 택한 사람들뿐이고. 그러니까 빨리 정붙일만한 무언가를 만들라고. 솔직히 시체를 보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니까.”
세월에 지친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다. 한때 그의 스승이었던 사람이 마치 저이처럼 말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바리스트는 본래라면 묻지 않았을 말을 던졌다.
“당신은 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겁니까. 이런 곳에서.”
아치볼드는 고개를 돌렸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 들어올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글쎄.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 죄수로 같이 들어온 탓에 나라도 잘해줘야지 싶어서 버텼고…. 아. 농사도 그 사람에게 주려고 그때부터 시작한 거야. 그리고 그가 죽고 난 뒤부턴 혹시라도 또 아는 사람이 들어올까 확인하려고 버텼고, 지금은……”
아치볼드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역시 농사 때문인가, 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페이지: 1 2 3 4 5 6 7 8 9
답글 남기기
댓글을 달기 위해서는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