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Chapter 6

그날은 아침부터 호출이 있었다. 에바리스트는 애써 졸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치볼드에게 찾아갔다. 호출당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는지 아치볼드의 옆에는 이미 잡역을 담당하는 총책임자인 게오르그도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게오르그와 잠깐 눈인사를 나눈 에바리스트는 서류를 팔락거리는 아치볼드에게 곧장 물었다. 아치볼드는 고개를 돌리더니 까닥까닥 손을 흔들었다.

“좋은 아침. 배급품이 도착한다는 전신이 와서. 이번엔 새로 오는 죄수는 없다는 것 같지만 일단 인수인계 과정엔 너도 참여해야 하니까 불렀어. 별건 없어.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일이야.”

아치볼드는 가볍게 말했다. 육지로부터 헬기가 도착할 모양이었다. 예의 그 수신호 도구를 챙기면서 아치볼드는 맑은 하늘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비 한 방울 없이 가문 날씨가 농사에 해라도 끼칠까 염려하는 모습을 일전에도 본 적 있는 에바리스트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날씨가 맑으니 적어도 과일은 맛있겠군요.”

그제야 자신이 넋 놓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아치볼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옆에서 게오르그도 픽 웃었다.

“아아. 아무튼 가자고. 그래도 너무 비가 안 오면 안 되는데 말야.”

그들은 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죄수들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상황은 에바리스트가 여기에 처음 도착했을 때와 동일하게 흘러갔다. 헬기는 차례차례 내려와 짐을 내려놓고는 아치볼드와 에바리스트의 확인을 받아 떠났다. 그 일련의 과정 내내 아치볼드가 수신호 봉을 들고 분주하게 움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에바리스트는 정말로 서명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쌓여있는 배급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처 신경조차 쓰지 못했는데 이제 와 보니 생각보다 쌓여있는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50여 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써야 하는 물품들이라면 하기야 많을 법도 했다. 에바리스트는 게오르그를 돌아보았다.

“혼자 옮기기엔 제법 양이 많아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는데요.”

게오르그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급한 일 끝나면 몇 명 더 옵니다. 신경 쓰지 마쇼.”

본래도 말이 별로 없는 이였으나 이상하게 선을 긋고 있는 느낌이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예의상 한 번 더 물으려고 에바리스트가 입을 떼었을 때 마지막 헬기까지 전부 보낸 아치볼드가 그들에게로 돌아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나. 둘이서. 어? 짐 문제? …그건 게오르그가 알아서 할 거야.”

아치볼드는 어깨를 으쓱, 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결국 에바리스트는 아치볼드와 함께 건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치볼드는 간수로 근무하는 사람들과 그 외의 일로 근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본래 서로의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예전부터 묵인되었던 규칙이었음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게오르그의 미심쩍은 태도에 대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결국 에바리스트는 비는 시간을 틈타 창고로 내려갔다. 그때까지도 물건을 나르고 있었는지 식당 관련 일을 하는 사람 몇 명이 그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숙였다.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게오르그는 그를 보자마자 단박에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여기 또 왜 내려온 거요?”

“혹시 손이 부족하다면 도와드리려고 왔습니다만…. 여쭤볼 것도 있고요.”

에바리스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는 비상식량을 까먹던 괴물의 능숙한 손놀림을 떠올렸다. 괴물이 식량을 구할만한 곳은 결국 여기밖에는 없었다. 게오르그는 그 말에 신음성을 흘리며 근처 상자에 걸터앉았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다 나간 후였다.

“일단 보시다시피 도와줄 건 없소. 다 옮겼으니까.”

에바리스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비행장에서 그가 눈으로 세었던 것보다 수가 줄어있는 건 확실했다. 그는 다시 게오르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심스럽다는 그의 표정을 본 건지 게오르그는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괴물을 목격했다는 소문은 들었지. 괴물에 대해 캐고 다닌다는 것도 말이오. 뭐 꼬투리라도 잡은 모양이지만……. 짐작하는 그대로요. 물품들 일부는 괴물이 가져가도록 놓아두고 있소.”

물건의 일부를 비행장의 한구석에 남겨놓으면 언제 다녀갔는지도 모르게 가져간다고, 그는 설명했다. 간섭하진 않아도 아마 아치볼드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으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도 나도 이유는 모르오. 나도 이 전에 여기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들은 건데, 아주 예전부터 주방 담당 사이에 내려오던 약속이랍디다.”

게오르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는 더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것처럼 손을 홰홰 저었다. 본래도 말이 많지 않은 이였으니 이 정도만 해도 꽤 많은 것을 이야기해준 셈이었다. 모든 의문이 다 풀린 것은 아니었지만 에바리스트는 일단 물러났다. 그가 창고를 벗어나기 직전 게오르그는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그의 선임은 괴물을 ‘창귀’라 불렀다고 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궁금한 것들이 자꾸만 생겨났다. 에바리스트는 숲을 향하며 생각했다. 대체 이곳엔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괴물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지, 죄수는 어째서 죽이며 자신은 어째서 살려두는지. 배고픔 때문에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인했지만 다른 많은 문제는 여전히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괴물은 여전히 숲의 입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자크.”

에바리스트는 그를 불렀다. 숲에서 괴물을 만났던 다음 날부터 그는 괴물을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알고 나자 차마 그의 앞에서 괴물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고작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름을 붙여도 되는 걸지 에바리스트는 고민했지만,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소리에 반응해서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를 느릿하게 훑어보던 괴물은 이내 그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부볐다. 이제는 에바리스트도 괴물이 그를 껴안을 때마다 일일이 놀라지 않았다. 자신을 죽일 거라는 생각은 반쯤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괴물을 토닥였다. 이렇게 토닥여야만 괴물은 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마치 정에 굶주린 강아지처럼.

에바리스트는 그가 여느 때처럼 자신을 데리고 그 바위가 있는 공터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괴물이 걷는 방향은 그쪽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하고 에바리스트가 물었으나 괴물은 몇 번 뒤돌아보며 손을 잡아끌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에바리스트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어느 개울가였다. 이런 곳도 있었던가.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기록 보관소의 지도에서도 본 적 없는 곳이었다. 아마 지도가 만들어진 이후에 생겨난 것 같았다. 옆에서 괴물이 손을 붙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괴물은 에바리스트가 들고 있던 손전등의 스위치를 꺼버렸다.

에바리스트는 잠시 당황했다. 그때 빛을 내는 벌레들이 하나둘씩 개울가 사이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많은 수는 아니어서 빛은 희미했지만 깜박깜박 움직이는 빛이 물가를 이리저리 맴도는 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는 괴물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괴물은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이 광경을 에바리스트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처럼.

홀린 듯이, 에바리스트는 괴물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길고 푸석푸석하고 거칠기까지 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괴물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의 어깨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갑자기 에바리스트의 속에서 무언가가 왈칵 솟구쳐 나왔다.

이미 그가 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자크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소한 행동마저도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는 것인지.

그는 한참 동안 괴물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 서 있었다.






아이자크와는 열다섯 봄에 처음 만났다. 베른하드가 관리하는 비밀 아지트에서였다.

어떤 아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세상에 대해서 좀 더 빨리 깨달았다. 그 아지트는 그런 아이들이 모여서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을 배우는 곳이었다. 학교나 신문에서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진실에 아이들은 쉽게 빠져들었다. 남들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지각은 그들에게 일말의 우월의식과 동질감을 주었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에바리스트와 아이자크는 단짝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자크가 먼저 에바리스트를 쫓아다녔지만 일단 친해지고 나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둘은 날마다 붙어 다녔고 밤새 이야기했다. 손때 묻은 책들에 대해, 그들이 배웠던 것들에 대해,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소식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그들이 하고 싶은 것과 해나갈 것들에 대해. 그중에는 어느 가게에는 무엇이 맛있다더라 하는 그런 사소한 것들도 있었다.

열여섯 살이 되자 그들은 조금씩 조직의 일에 끼어들었다. 시위나 투쟁처럼 직접적인 일에 관여하기에는 그들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들은 주로 몰래 찍어내는 팸플릿과 신문의 조판을 맡거나 그것들을 사람들 사이에 뿌리는 일을 했다. 때로는 각 인사들 사이의 연락책을 맡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도 그와 아이자크는 한 조로 묶여 다니곤 했다.

서로 동지애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된 건 그래서였을까.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위험할 때도 있었다. 쫓아오는 구둣발소리를 피해 어두운 곳에 숨거나 골목을 빠져나오곤 하면 서로가 정신없이 몸을 더듬으며 무사한지를 확인했고 그러다 보면 입술이 닿을 때도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그저 당연했다.

베른하드는 그런 둘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말리지도, 찬성하지도 않았다. 네가 사랑한다고 여긴다면 그런 거겠지. 그는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덧붙여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주고 같은 길을 걸어가 준다면 그것 또한 행복한 일일 거라고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방해 없이 그렇게 지냈다. 때로는 그저 친구처럼 지낼 때도 있었고, 때로는 크게 싸울 때도 있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함께했지만 어떤 부분에선 아주 달랐다. 몇 번이고 싸우고, 몇 번이고 둘 중 한 명이 죽거나 체포당할 위험에 처했으면서도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했다.

8년 전, 그들이 19살이 되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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