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낮의 숲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햇살 아래 숲은 밤의 숲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숨을 고르며 평소 그와 아이자크가 오갔던 길을 찾으려고 했지만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자크.”
숲 속에 에바리스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온이 자신에게 속삭인 순간 그를 봐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무작정 숲으로 달려왔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낮에도 아이자크가 나와 줄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뛰쳐나온 탓에 뒤에 남겨진 레온과 아치볼드는 당황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에바리스트에겐 아직 레온에게 해명해야 할 것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죽은 사람이 레온이 아니었다는 걸 들은 순간 에바리스트의 마음 한구석 어두운 부분이 그에게 속삭였다.
‘그때 그 사진의 사람이 레온이 아니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 명단을 찾으러 자료실을 뒤질 필요도 없었을 거고, 그러면 넌 여기에 올 일도 없었을 텐데.’
에바리스트는 죽은 줄 알았던 동료가 실은 살아있다는 것을, 자신이 기뻐하기보단 원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진저리쳐지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설령 다시 그때로 돌아가 그 사건을 모른 척 넘겨버린다고 해도, 이미 자신은 깨닫지 않았던가. 무엇을 하든 자신이 바라는 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아이자크…!!”
그는 다시 아이자크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숲을 헤매었다. 자신이 어디쯤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 숲이 원래부터 이렇게 넓었던가, 잠시 떠올렸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라졌다. 그때쯤 풀숲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희망에 차서, 그는 그쪽을 돌아보았다. 아이자크였다. 그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에바리스트에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이자크의 뒤쪽으로 숲의 끄트머리가 보였다.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의 앞에 앉아있었다. 그도 베른하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 전에 아주 긴 대화를 마친 참이었다. 이윽고 베른하드가 입을 열었다. 나지막하고 지친 목소리였다.
“그래. 에바리스트. 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겠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내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닐 테지.”
에바리스트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베른하드에게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베른하드는 그 이유를 물었고, 그게 방금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였다. 어떤 식으로든 베른하드는 납득한 것 같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에바리스트의 부모는 그가 어릴 적 어떤 국가적 사건에 휘말려 죽었다. 그들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고, 따지고 보면 정부의 잘못에 가까웠으나 정부는 아무런 배상도 해주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에바리스트는 어떤 죽음은 정부에 의해 쉽게 감춰지기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에바리스트의 부모가 잘못한 거라고 왜곡된 사실을 알고 있기도 했다. 아직 어린 나이었으나 그는 어렴풋이 이 나라가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에바리스트는 베른하드에게로까지 흘러들어 갔다. 그 이후로 베른하드는 쭉 그의 스승이었고, 보호자였다.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괜한 동요만 일 테니 아무도 모르게 떠나라고 베른하드는 그에게 충고했다. 에바리스트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적어도 그가 떠난다고 말해주어야 할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이자크였다. 그는 아이자크의 방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이곳에서 배우는 모든 것이 진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곳에 와서 깨우친 것들도 많았다. 인권과 정의, 혁명, 정부가 보여주지 않는 것들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시각과 같은 것들.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손때 묻은 책에는 날카롭고 명징한 비판들이 가득했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는 열정이 차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언젠가 새로운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고 그건 지금보다 훨씬 더 올바른 세상일 터였다.
노래와 구호들. 그들은 쉽게 울었고 쉽게 분노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끌려갔고 감정의 격류에 휩쓸리기는 아주 쉬웠다.
열일곱 살 즈음까지만 하더라도 에바리스트는 그들에게 쉽게 동조했다. 가끔은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그것마저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바뀐 건 처음으로 폭력이 오가는 시위에 참여했을 때였다.
폭력에 겁을 먹기도 했단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러나 에바리스트는 누구의 것인지조차 모르는 피가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곳에서 조금 다른 것을 보았다. 그곳에서 그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공존을 입에 담던 사람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순간 그 사람을 움직인 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증오와 순간적인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저게 과연 우리가 말하는 ‘옳은 일’인가. 에바리스트는 되물었다. 그 이후로 그는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둘씩 발견했다. 조직 내에 알게 모르게 형성되어 있는 파벌과 그 사이의 갈등, 일방적인 소통구조, 정말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다기보다는 남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다는 엘리트의식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 스스로는 나서지 않는 선동가의 존재 같은 그런 것들을.
2년 동안 그런 것들을 보아오면서 그는 이들이 제시했던 빛만큼이나 그 이면에 서린 그림자도 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에는 에바리스트도 여전히 동의하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회의감이 더 컸다.
‘벌써 그런 것들을 깨달아야 할 필요는 없건만. 이전에도 말했지만 생각이 지나치게 깊구나. 어떤 부분은 공감하는 바이면서도…. 안타깝다.’
긴 대화의 끝에서 베른하드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에바리스트의 마음을 돌리려 하진 않았다.
에바리스트는 똑똑, 방문을 두드렸다. 벌컥, 문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아이자크는 그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안으로 이끌었다.
“어쩐 일이야? 베른하드에게는 잘 다녀왔어?”
아이자크는 들떠있었다. 비단 에바리스트가 찾아온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다음 날은 그들이 비밀리에 진행하던 모종의 계획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잘만 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들은 정부에게 큰 반격을 가할 수 있을 터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에바리스트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이자크. 나 떠날 거야.”
아이자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미 아이자크와도 여러 차례 이야기해봤던 문제였다. 그러나 아이자크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그와는 그전에도 비슷한 문제로 계속 다퉈왔다.
아이자크는 언제나 에바리스트보다 과격했다.
“잠깐만. 갑자기 어디로 떠난다는 거야?”
“말했잖아. 여기를 나가겠다고. 나는 더 이상 뜻을 같이할 수가 없어.”
아이자크가 에바리스트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화난 표정이 역력했다.
“또 그 문제 때문이야? 저번에도 말했잖아. 지금 정부는 우리가 어떻게 하든 우리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에바. 무력으로 투쟁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희생? 증오? 솔직히 나는 그게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 누군가는 죽겠지. 그건 너나 내가 될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만 그 누군가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게 될 거야.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에바. 이렇게 말했던 건 너잖아.”
에바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너랑 나는 이제 길이 달라졌어, 아이자크. 이거 놔. 나는 인사하러 온 거야.”
에바리스트는 기어코 아이자크의 팔을 뿌리쳤다. 아이자크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 입은 표정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애써 입을 떼었다.
“잘 있어.”
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도 아이자크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그는 걸었다. 한때는 아이자크를 설득해, 어떻게든지 데려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과 아이자크는 뜻이 너무 달랐고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에도 찬성해줄지 자신이 없었다. 에바리스트는 역으로 향했다. 여길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에바리스트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조직원 중 하나가 주위를 살피고는 재빨리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에바리스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분명 저 조직원은 경찰의 스파이거나, 그런 게 아니라 해도 조직의 일을 밀고하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에바리스트는 뒤돌아섰다. 그 사실을 조직에 알려야 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에바리스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다시 돌아가서 베른하드와 아이자크의 얼굴을 보면 뭐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또 설령 그가 돌아가 누군가 조직의 일을 알리고 있다고 말한들 그의 말을 믿어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경찰서로 들어간 그 조직원은 에바리스트보다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고 당연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신뢰도 훨씬 두터웠다. 떨리는 손으로 에바리스트는 짐 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신은 이제 외부인이라고 수도 없이 중얼거리면서.
그 다음 날 신문에는 들통 난 사실들과 줄줄이 잡혀 들어간 범죄자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 이후로 국가의 탄압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게 8년 전, 레온이 말했으며 아치볼드도 언급한 적 있는 그 사건이었다.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비겁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지.”
아이자크를 끌어안은 채 에바리스트는 털어놓았다. 자신이 모든 걸 방조했다는 죄책감은 그 후로도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걸 잊기 위해 에바리스트는 더 열심히 움직였다. 신분도 불분명하고 아는 이 하나 없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주로 고된 일이었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그런 일들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몇 년 후 에바리스트는 의경에 지원서를 냈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빠르게 출세하는 방법이었다.
아이자크는 가만히 에바리스트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걷기 시작했다. 반쯤 꿈꾸듯, 에바리스트는 그에게 이끌려갔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길의 끝은 절벽이었다. 아이자크가 그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추었다.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입술 사이를 스치는 숨결 속에서 에바리스트는 환청을 들었다.
‘에바.’
속삭이는 것처럼 가녀린 소리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아이자크에 의해 거세게 떠밀렸다.
에바리스트는 뒤늦게야 자신이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파란 하늘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언젠가는 죽을 거야. 다비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자크를 창귀라 칭하던 게오르그도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아주 홀가분해졌음을 느꼈다. 그는 정부 안에서 정부를 바꾸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너무 거대해지고 무거워져서 완전히 뒤엎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그 안에 들어가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돌아갈 곳도, 자신의 목표도 산산이 깨져버렸음을 알게 된 그 날 이후 줄곧 에바리스트는 어딘가 망가져 있었다. 언제 망설였느냐는 듯 손에 피를 묻히고 상대방의 증오를 거리낌 없이 마주했다. 단 한 순간 잘못 판단한 탓에 사랑하던 이도, 이상도 버린 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헤매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그것도 끝이었다.
에바리스트는 웃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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