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도전 1(2023년)


9월 27일~10월 1일 / 인어AU

속에서 역류한 물이 그대로 아래로 쏟아졌다. 몇 번이고 컥컥대며 삼킨 물을 뱉어내면 코며 식도, 기도에 이르기까지 불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쇠, 피, 혹은 바다.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비릿한 내음으로 잔뜩 막혀 맹맹해진 코를 거칠게 문지르며 그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가운데서도 붉은 덩어리가 선명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몇 번 깜박였다.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따끔거리는 소금기가 덜어지면 그제야 히죽 웃는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물에 젖어 흐느적대며 달라붙는 머리, 인간이라기엔 예사롭지 않은 안광, 날카로운 손톱, 날카로운 송곳니, 그리고 물 아래에 반쯤 잠긴 거대한 지느러미.

김래빈은 인어와 마주하고 있었다.

'환각이 아니었어...'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지면 인간은 종종 환각을 본다고 했다.

거대한 꼬리지느러미를 본 순간 김래빈이 떠올린 건 예전에 뉴스 기사에서 언뜻 본 한 줄의 글이었다. 하필이면 인어였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이 바닷속에서, 점차 가까워질수록 점차 붉어지는 머리색을 뽐내던. 김래빈은 아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주는 데다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퍽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죽어가는 장소가 바다만이라는 이유로 마지막으로 보이는 환각이 인어공주 뺨치는 붉은 머리의 인어인 건 아무래도 좀 우스웠다.

그랬다. 김래빈은 죽어가고 있었다.

추락이었다. 발을 헛디뎌 뱃전에서 그대로 떨어졌다. 배의 모터가 만들어내는 급류에는 아슬아슬하게 휘말리지 않았으나 수영에 능숙하지 않은 몸뚱아리는 쉽사리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자꾸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앉았다.

산소가 부족해 환각을 보고 있다는 건 내가 죽어간다는 뜻일까.

허우적댈 힘도 없이 점점 가라앉으면서 그는 그의 조부모와 누나를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슬퍼하겠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인어는 뒷전이었다. 환각에 눈 돌리기에는 그는 그의 뒤에 남겨질 사람들에게 너무 다정했다. 그러나 실체가 없어야 할 그 대상이 의식이 흐려진 그를 붙들고 물이 얕은 곳으로 데려가 기어이 호흡을 틔우고 삼킨 물을 전부 뱉어내게 했을 때, 김래빈은 더이상 그를 환각으로 치부할 수 없게 되었다.

"저기,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듬거리며 감사 인사를 해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대신 인어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유독 눈의 깜박임이 적었다. 이어 상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하는 것처럼 가슴을 부풀렸다 꺼트렸다. 어딘가 작위적인 움직임이었다. 파도소리 가운데서도 선명히 들리는 색색대는 숨소리가 여전히 거친 그의 숨소리와 섞여 울렸다.

"인어....님...? 혹시 제게 용건이 더 있으십니까?"

그의 말에 대답을 해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떤 반응을 돌려주지도 않은 채 그를 집요하리만큼 바라보는 시선에 그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인어가 모호한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김래빈은 그에게로 조금 더 상체를 숙였다. 인어는 웃듯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고, 그를 살려주었던 은인이었다. 즉 인어가 그를 잡아당겨 머리를 물 속에 처박을 그 순간까지도 그는 인어를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채 감지도 못한 눈이 물 속에서 크게 떠지고, 크게 벌어진 코와 입으로 다시 물이 물밀듯 흘러들어가려는 걸 제 손으로 턱 막은 인어가 그의 귓속으로 무언가를 속삭일때까지도. 한참을 뒤늦게, 본능적으로 허우적거린 그가 겨우 상체를 물 밖으로 끌어올렸을 땐, 그의 팔이 휘저어낸 물결 너머로 이미 인어는 사라지고 없었다.

'내 이름, 유진.'

사라지기 직전 인어가 그에게 속삭인 건 자신의 이름이었다. 새롭게 콜록거리며 팔뚝으로 얼굴로 흐르는 짠물을 훔쳐내며 김래빈은 다시 얌전해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변을 수색하던 해경에게 발견되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자 김래빈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인어를 봤다는 그의 말은 바다에 빠져 의식을 잃은 사람이 흔히 보곤 하는 헛것으로 치부되었다. 병원에서는 그에게 전신 타박상과 정도가 심하지 않은 골절 판정을 내렸다. 폐 손상이 있을 수 있으니 입원하여 경과를 보자는 말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가족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가 물에 빠져서 실종상태가 되었다는 연락과 곧 발견되었다는 연락을 연달아 받아야 했던 그의 누나는 김래빈이 전화를 받자마자 몸 상태를 물었고, 의식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자 울음과 고함과 잔소리를 쏟아냈다. 진통제로도 다 커버되지 않는, 뒤늦게 몰려온 통증으로 끙끙대면서도 그는 기껍게 자신을 향한 걱정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언제쯤 돌아올거야.

"모르겠어. 본래대로라면 일주일쯤 뒤에 돌아가는 배편을 잡아놨는데, 몸 상태가 아직 확실한 게 아니어서 더 걸릴수도 있을 것 같아. 할머니, 할아버지는?"

- 너무 놀라실 것 같아서 자세하게 이야기 안 했어. 그럴 겨를도 없었고. 아무튼 몸 낫는 게 제일 우선이니까 천천히 와.

응. 누나. 그는 얌전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4인실이었지만 입원한 건 그 혼자뿐이었다. 그는 그가 들었던 목소리를 곱씹었다. 물 속이었는데도 울리지 않고 뚜렷했던 그 목소리. 인어라서일까. 잠깐 자세를 바꾸려다 엄습하는 통증에 끙끙거리면서도 그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왜 자신을 구해줬을까. 왜 그렇게 과격하게 자신을 또 물 속에 처박은 걸까. 혹시 인어는 물 속에서만 말을 할 수 있는 걸까. 가설을 세워보자. 인어는 말하고 듣는 방식이 인간과 다른 걸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그에게 표하고자 하는 감사의 뜻을 그는 들었을까.

그는 진통제에 마취되듯 잠들었다. 꿈 속에선 끊임없이 물이 찰랑거렸다. 물 속에 빠지는 사고를 겪었는데도, 김래빈은 그 물이 무섭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폐손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리의 반깁스는 그대로 놔둔 채로 그는 퇴원했다. 이 적적한 바닷가 마을은 관광지라기에는 조금 초라해서 김래빈은 어렵지 않게 오랜 기간동안 방을 빌릴 수 있었다. 그는 아직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인적이 드문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청년이 적고 노인이 많은 곳이었다. 그가 그날 마주친 낚시꾼 역시 나이가 지긋한 이였다. 은퇴 후 옛 고향으로 돌아와 눌러살게 되었다는 이는 잡히는 고기 없어도 틈나면 제방둑 위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인어나 용왕 이야기야 바닷가 근처면 어디든 다 있지, 여기라고 특별하겠소?"

인어에 대해 들은 바 있냐는 김래빈의 질문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실제로야 본 적 없지만서도, 나 어릴 적에 떠도는 이야기야 많았지. 그렇게 김래빈은 마을의 노인들에게 하나 둘씩 인어 이야기를 수집했다. 하지만 그 어느 이야기에서도 그처럼 인어에게 구해진 사람의 이야기나, 인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대개는 잡힌 인어를 놓아줬더니 그 다음날 그물에 물고기가 가득했다는 류의 전설이었다. 그는 조금 실망했고 실망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인어를 다시 마주칠 확률은 매우 낮아. 그러니 인어의 목격담을 수집해봤자 소용 없는 일이야.'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김래빈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바닷가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 날엔가는 바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손을 넣고 휘저어보기도 했다. 바닷물. 물. 액체. 그날 그의 노트북에는 음파와 매질, 소리가 전달되는 경로와 고막의 역할 같은 검색어들이 하루 종일 떠다녔다. 답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다. 파동은 밀도가 높을 수록 빠르게 전달된다. 물은 공기보다 음파가 잘 전달되는 매질이다. 그렇다면 물 속에서 사는 인어의 목소리는 환경에 적응해 고막 속 공기를 뚫고 인간에게 전해질 수 없을만큼 약한 파동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기엔 그가 물 속에서 들은 인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뚜렷했다. 그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의 과학 지식은 딱 의무교육과정을 마친 정도였고 인어는 교육과정 너머의 생명체였다.

그때쯤 그는 어렴풋하게 깨달았다. 그는 그 인어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그의 이름도. 인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의미의 왜곡 없이.



스피커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 속에서는 그게 아주 둔하고 흐릿하게 들렸다. 그는 몸을 끄집어냈다. 그의 몸을 타고 물이 촤악, 흘러내렸다. 그는 손을 뻗어 버튼을 눌렀다. 욕실을 채우던 음악이 멈추었다.

"확실히 물 바깥의 소리가 물 속까지 전달되는 데엔 한계가 있어. 물론 이건 인간과 인어의 청각기관이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지만..."

그렇다면 그가 했던 말도 인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으리라 가정하는 게 옳겠지. 그는 여전히 그 때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잊히지 않는 화두였다. 김래빈은 방금 전까지 그가 몸담고 있던, 물이 가득 차 있는 욕조를 노려보았다. 아무 죄 없는 물은 그의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잘게 흔들리며 파동을 만들어냈다. 그 동심원을 들여다보다가 그는 홀린듯 중얼거렸다. 파동. 음파. 간혹 초음파의 형태로 물 속 생물들의 의사소통 수단이 되기도 하는.

그게 그의 다음 실험대상이 되었다. 김래빈은 그 후 며칠간 음의 성질에 대해 파고들었다. 이미 그는 그 바닷가 마을에서 아주 괴짜같은 관광객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물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는 이유로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을 때부터 그랬다. 바다에 빠졌을 때 머리 어딘가를 크게 다친 데 아니냐는 속삭임은 그가 눈치채지 못한 채 마을에 돌았고, 점잖고 다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그는 그걸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파동에 매달렸다. 아주 높은 음, 그리고 아주 낮은 음. 길게, 짧게. 아주 크고 육중한 악기부터 사람이 쉽게 휴대하고 다닐 수 있는 작고 가벼운 타악기까지. 어떤 게 더 멀리까지 울려퍼지는지, 오래 가는지, 혹은 공기로 전달되어 귀로 들을 때와 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느꼈을 때 어떻게 다른지.

어떤 날은 스피커를 연결해 음악을 아주 크게 틀어두고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그럼 스피커에서 나뭇결을 타고, 다시 그 위에 올려진 그의 몸을 타고 진동이 흘렀다. 음악의 흐름에 따라 강하고 몰아치듯이, 그러다 아주 약하고 속삭이듯이. 김래빈은 눈을 감았다. 문자의 이해는 장담할 수 없다. 그가 겪은 단 하나의 사례는 음성언어를 통한 소통뿐이었다. 인어는 그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럼 그의 언어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물속에서도 정확한 음가를 가진 파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소리를 전달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느리게 호흡하며 온몸을 울리는 파동을 느끼고 있다가 그는 손으로 제 눈을 덮었다. 음악이 멎자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그가 길게 내쉰 숨이 미미하게 적막을 갈랐다.

어차피 만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게 다 소용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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