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일~10월 23일 / 고등학생 AU
터져나가요 사건의 숲.
누군가가 교사 생활을 모 인기게임에 빗대어 그렇게 표현했을 때 동기들은 전부다 와르르 웃었다. 그들은 사범대 출신으로 많은 동기들이 현직 교사였으니, 그저 그들의 현실이 웃픈 탓이었다. 그리고 그 표현을 A는 어쩔 수 없이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 교사, 심지어 생활지도 담당 업무인 탓이었다. 고등학교쯤 되었으면 애들도 철들어서 생활지도가 쉽지 않을까. A는 발령받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이 완전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A쌤~. 6반에서 계속 애들이 뭘 자잘하게 잃어버렸다고 하네. 아무래도 CCTV 돌려봐야 할 것 같아."
그의 자리에 조심스럽게 다가온 학년부장의 뒤로 근심걱정이 가득한 6반 담임의 얼굴이 보였다. 6반 애들이 그래서 수업 중에 자꾸 학교 CCTV 못 보냐고 물었던 거구나. 무슨 일이래요, 이게. 입에 붙어버린 탄식을 내뱉으며 A는 CCTV를 확인할 수 있는 서버에 접속했다. 어차피 교실 안에는 CCTV가 없고 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복도 뿐이니 용의자를 걸러내는 수준밖에는 안 되겠지만 그거라도 보겠다고 온 걸 보니 반의 분위기가 꽤 흉흉한 모양이었다.
"언제로 보여드릴까요?"
"우리반이 오늘 연속으로 이동수업이어서... 그래도 1교시에 분명히 있었던 게 점심시간 때 꺼내려고 하니까 없어졌대요. 그러니까 2교시 아니면 3교시야. 그때 한번 쭉 볼 수 있어요?"
아, 네. 고개를 끄덕인 A는 시간을 지정하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6반 앞 복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학생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교과서를 빌리러 뛰어다니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 각종 이유로 종이 치고도 한동안 왔다갔다하는 모습들이 지나가고 나면, 한동안 적막이 흐른다. 이게 2교시 수업시간이고요. A는 재생속도를 조금 빠르게 돌렸다. 곧 종이 치고, 다시 화면으로 학생들이 와글와글 쏟아져나왔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애들이 혹시 6반쪽으로 향하지는 않나 눈을 부릅뜨고 화면을 바라보던 부장교사가 문득 화면 한 켠에 잡힌 모습을 보며 중얼거린다. 하. 이자식들 이거 복도에서 공 차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또 이러고 있네. 이거 누구야.
결국 4교시까지 CCTV를 쭉 돌려봤지만 6반에 접근한 학생은 없었다. 용의자 탐색은 용의자 리스트 대신 복도에서 공 찬 놈들, 다 마신 우유곽을 버리지 않고 몰래 창틀에 올려놓고 튄 놈, 복도에서 필통 던지면서 나잡아봐라 한 놈들만 남기며 부장교사의 혈압을 올리고 끝났다. 오늘도 담임교사들에게는 복도에서 장난치지 말자는 전체 훈화의 내용이 담긴 메세지가 전달될 예정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 옆에서 혼과 정신이 함께 빠진 것 같은 6반 담임교사는 한숨을 깊게 쉰다.
"뭐, 어쩌겠어. 찍힌 게 없는데. 걔한테 지 가방이랑 사물함 다시 한번 잘 찾아보라 그래."
부장교사가 다독이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간 애가 없는데 물건이 사라진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같은 반 학생의 소행이라는 뜻이다. 6반 담임교사의 얼굴에 어리는 피로에 저도 모르게 공감하며 A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 모르니까 제가 오늘치 한번 다시 전체적으로 돌려볼게요."
"아, 감사합니다. 선생님. 저도 애들한테 다시 한 번 물어볼게요."
다음 교시가 수업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A는 재생속도를 조금 빠르게 한 채로 CCTV를 쭉 훑었다. 6반 앞을 왔다갔다하는 학생은 많고, CCTV의 사각에 가려서 조금 애매하게 의심이 가는 학생도 있지만.... 역시 2교시와 3교시 사이에는 별 일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한숨을 쉬고 서버를 종료하려던 A는 그 순간 멈칫했다. 무심코 봐버린 화면 속 이상한 모습이 눈에 잡힌 탓이다. 그는 화면을 멈추었다. 화면 한 구석에 서로 얼굴이 맞닿은 두 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복도에서 간도 크네...'
학교에서 이성교제를 금지하는 건 이제 대부분의 학교에서 사라진 낡은 규칙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학교는 학교라, 아직 학교 안에서 정도 이상의 스킨십을 하는 걸 금지하는 풍기문란의 규칙은 남아있었다. 이전에도 교사에게도 잘 알려져있던 교내 커플 한 쌍이 불꺼진 교실 안에 둘만 들어가있다가 불려와 꾸중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얘들은 누군데 이러고 있냐. 자그마한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A는 곧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차유진이랑 김래빈이잖아...?"
각자 다른 의미에서, 둘은 교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차유진이랑 김래빈이 왜.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다시 다가온 부장교사가 바로 이름부터 꺼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얘들이 여기서 이러고 있어서요. 부장님, 이거 애들 뽀뽀하는 거 아니겠죠?"
뭐? 하며 화면에 코를 박을 듯 고개를 기울인 부장교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냥 귓속말 같은 거 하는 거 아냐? 걔들 수시로 그러잖아."
그건 그랬다. A는 고개를 끄덕였다. CCTV는 천장에 달려있어서 비스듬한 각도로 내려다보는 화면을 보다 보면 얼굴이나 행동을 정확히 집어낼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다시 보니 귓속말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가. 갸웃하고 그는 마저 재생버튼을 눌렀다. 무슨 말을 한 건지 김래빈이 차유진의 등짝을 힘껏 내리치는가 싶더니 결국에는 차유진이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깜짝 놀랐네. A는 서버를 종료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가봐요. 어우. 이게 위에서 보니까 뭐가 잘 안보여서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걔들은 진짜 사귀어도 학교에선 뽀뽀 못할 걸. 차유진은 몰라도 김래빈 봐봐. 걔 얼마나 반듯하니."
깔깔 웃은 부장교사가 농담삼아 던진 말에 A는 다시 동의했다. 부장교사는 김래빈이 교무실 문 밖에서 노크하고 '선생님들 제가 잠시 볼일이 있어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부터 애가 예의가 바르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김래빈을 칭찬하던 사람이었지만, A가 보기에도 김래빈은 그 생김새와는 다르게 탈선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학생이었다. 차유진이야 아직 한국에 익숙하지 않은지 가끔 돌발적인 질문을 던져서 교사를 당황케 하기는 해도 이쪽도 마찬가지로 큰 사고는 안 치는 학생인 편이었다.
"둘이 아직도 엄청 친하죠? 요새도 쉬는시간마다 복도에서 만나는 것 같던데. 올해는 반도 갈렸잖아요."
"말해 뭐 해. 3반 담임이 그러잖아. 차유진이 자기 반인지 5반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도 5반에 가 있어서. 저번에는 체험학습하는데 애가 또 어디갔는지 안 보여서 5반 가봤더니 거기 있었다드라."
"저도 가끔 깜짝 놀라잖아요. 아니, 5반에서 진도때문에 종 치고도 수업할 게 좀 남아서 하고 있는데, 저기 창문에서 차유진 걔가 창틀에 고개 기대고 이렇게 빤히 보는 거야. 그러더니 저보고 뭐라는 줄 알아요?"
"왜. 뭐라 그랬는데?"
"걔 말투 있잖아요. 그걸로 '선생님~ 저 김래빈 봐야돼요~ 언제 끝나요?' 하는 거에요. 보통 애들이 그러면 가라 이럴텐데 걔가 그러니까, 제가 또 마음이 약해져가지고..."
자알 생겼지. 부장교사가 하는 말에 A는 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정확히는 차유진과 김래빈 둘 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 중에서는 월등하게 눈에 띄는 편이었다. 키도 크고, 이목구비도 오밀조밀해서 얼굴도 멀끔하게 생기고.
"아무튼 6반은 뭐 안 나온거지?"
"네. 확실하게 눈에 띄는 건 없어요."
거기도 참 큰일이야. 부장교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수업이 끝났다는 종이 쳤다. 복도가 빠르게 아이들의 소란으로 채워지는 걸 느끼며 A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보니 수행평가 때문에 불러야 할 학생이 있었다. 또 까먹기 전에 불러야지. 수학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는 아이들 사이를 고갯짓으로 인사를 받아주며 1반으로 향하던 A는 이번에도 복도에서 붙어서 뭔가 소곤거리고 있는 차유진과 김래빈을 목격하고는 농담처럼 타박을 던졌다.
"너희들 그만 좀 붙어다녀. 어떻게 매시간 그렇게 쉬는시간마다 붙어다니냐."
차유진이 입술을 비죽였다. 지난 담임 선생님 부탁 안들었어요. 나랑 김래빈 떨어뜨렸어요. A는 그저 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등 뒤로 그건 선생님께 할 수 없는 부탁이며 제발 존대 좀 제대로 쓰라고 차유진을 혼내는 김래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정말 잘 지내는 애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차유진이 김래빈의 반에 도착하는 게 좀 더 빠르다. 차유진은 대개 종이 치자마자 바로 벌떡 일어나 5반으로 향하지만, 김래빈의 경우 수업이 끝나는 종이 쳐도 잠깐동안은 교과서를 정리하고 다음 시간에 쓸 책을 꺼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차유진이 김래빈을 4반 복도 앞에서 마주친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김래빈이 종이 치자마자 바로 차유진의 반 쪽으로 다가왔다는 뜻이니까.
Oh. 김래빈! 손을 번쩍 든 채 반가움을 표시하려던 차유진은, 그러나 제게 무시무시한 박력으로 다가오는 그의 인영에 멈칫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김래빈의 얼굴은 묘한 박력이 있달까, 상대에게 상당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달까. 김래빈 쟤 왜저래, 하고 모였던 시선은 상대가 차유진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에이 하고 흩어진다. 둘이 좀 절친하다못해 유난한 사이라는 건 이 학교 2학년생들이라면 다 알았다. 그러니 새로울 것도, 재밌을 것도 없다. 차유진 바로 앞까지 다가온 김래빈은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유진, 혹시 괜찮다면 체육복을 좀 빌릴 수 있을까? 다음 교시가 우리 반 체육인데 오늘은 체육복을 준비하지 못했어."
이것도 퍽 드문 일이었다. 물론 김래빈도 어쨌든 고등학생에 불과한지라 필요한 걸 깜빡깜빡 놓고오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차유진과 김래빈 사이에서 교과서나 준비물을 빌리는 쪽은 차유진이었다. 오죽하면 김래빈이 3반의 시간표도 대강 꿰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김래빈 체육복 없어?"
"응. 체육복 빨아서 말려둔 걸 오늘 아침에 챙겼어야 했는데 깜빡하고 들고 오지 않았어. 그러다 너희반도 오늘 7교시에 체육이 들었다는 게 떠올라서... 물론 내가 먼저 너의 체육복을 착용하는 것이 너에게는 조금 찝찝한 일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깨끗하게 입었다가 돌려줄게."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일단 차유진은 김래빈이 좀 난감해하고 풀죽어있는 게 보였다. 어깨를 으쓱인 차유진은 제 반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나 상관없어!
"김래빈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 그럼 돼!"
사실 차유진은 좀 기분이 좋았다. 우쭐한 것 같기도 했다. 김래빈이 도움이 필요할 때 절 찾아온 것도 좋았고, 제 옷을 덮어쓴 김래빈을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이 좋았다. 만나는 사람에게 제 거라는 티를 굳이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세상은 넓었고 미래는 누구도 모르는 게 맞았나보다. 그는 휘파람을 불고는 제 체육복을 꺼내주었다.
"이거 Size 맞아?"
"응. 아마 못입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
고마워, 차유진. 인사를 남기고 부지런히 탈의실로 향하는 김래빈을 그는 졸졸 따라갔다. 뒤돌아본 김래빈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는 게 보였다. 내 옷을 입은 모습이 보고싶어서 따라간다는 말을 하면 떨떠름한 얼굴이나 하겠지. 그는 히히 웃고는 새로 배운 한국어 표현을 써보기로 했다.
"나 김래빈 배우해!"
다시 한번 머리위에 물음표를 띄우던 김래빈은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자각했는지 탈의실로 쏙 들어가버린다. 차유진은 탈의실의 바깥에서 기다렸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단체로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도 알고 있고 그도 실제로 미국에서는 락커룸에서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유니폼을 갈아입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김래빈의 맨살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볼 자신이 없었다. 탈의실의 두꺼운 커튼 너머로 그건 배웅이라고 하는 거야, 하는 뒤늦은 말이 들려왔다.
"배-웅."
좀 더 발음을 신경써 뱉으면, 응 그거, 하는 답이 돌아왔다. 동시에 탈의실의 커튼이 드르륵 열렸다. 김래빈이 제 체육복의 허리 부분을 손으로 가늠해보며 나오고 있었다. 사이즈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했는데 팔을 휘적휘적 들어보고 자꾸 바지 밑단을 살피는 게 평소 입던 제 체육복이 아니라 낯선 모양이었다.
그게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냅다 김래빈을 끌어안았다. 우왁!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쟤들 또 저러네. 차유진 이거 놔! 하고 외치는 김래빈을 그 주변 학생들은 익숙한 듯 보아넘겼다. 결국 차유진은 종이 쳤다며 김래빈이 헐레벌떡 뛰....지는 못하고 서둘러 움직일 때까지 그를 질질 붙들고 늘어졌다. 종쳤으니까 너도 빨리 들어가 차유진! 김래빈은 계단 저 아래쪽에서도 끝까지 잔소리였다.
실용음악과는 대체로 대학 입시에서 실기의 비중이 높은 과 중 하나이다. 그러다보니 김래빈은 다른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자율학습을 할 때 그 혼자 음악실에서 실기준비를 했다. 그가 아직 고 3도 아니고 다니는 고등학교가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라는 걸 생각해보면 학교로부터 꽤 배려를 받은 셈이었다. 실기를 준비하는 다른 고3들은 대체로 입시학원에 다니고, 김래빈이 음악교사한테 예쁨을 받는 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방과후의 음악실은 오롯이 그의 차지다.
그는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음악실의 문이 빼꼼 열렸다 닫혔던 건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연주를 마치고 안도하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을 때에야 김래빈은 음악실의 의자에 차유진이 소리없이 와 앉아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는 기겁해서 몸을 일으켰다.
"차유진, 언제 왔어?"
"아까! 김래빈 노크 못들었어?"
당연하다. 음악실의 문은 교실 특성상 방음처리가 되어있었으니까. 그것도 이미 그가 차유진에게 몇 번이나 지적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차유진은 국적의 문제로 한국 대학 진학이 불투명했고, 자연히 야간 자율학습 대상에도 들어가있지 않았다. 그걸 김래빈이랑 같이 가고 싶다며 굳이 교사를 졸라 자율학습 신청을 한 건 차유진인데도 그는 도무지 도서관에 붙어있지를 않았다. 그럴 거면 자율학습을 왜 신청했어. 그냥 음악실에서 기다렸다 가지. 3반 담당교사가 차유진을 복도에 불러 허허로이 건넸던 말을 김래빈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차유진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그거 낭만? 이래요!'
나중에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를 물어보았다가 할머님께서 그 나이에는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게 좋다고 말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용히 수긍했다. 하지만 오늘 김래빈은 그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과연 차유진의 할머님께서 말씀하신 다양한 경험이라는 게 자율학습을 신청해놓고 계속 자리에 없어서 자율학습 감독을 하시는 선생님께 걱정을 끼치라는 뜻이셨을까?'
아마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차유진, 또 허락 안 받고 여기 왔지?! 네가 선생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여기에 오면 선생님께서 걱정하시잖아!"
"괜찮아. 나 안 들켜! 친구들이 가짜 차유진 만드는 거 도와줬어!"
내 친구들 손재주 좋아. 거의 Jazz에 가까운 그 발음을 들으며 김래빈은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자율학습을 하기 싫은 학생 중 일부가 여분의 옷을 사용해서 마치 엎드려있는 것처럼 형상을 만드는 모습은 그도 종종 본 적이 있었다. 차유진이 말하는 건 바로 그런 거일 터였다. 안 들키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차유진. 그는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반응에도 차유진은 상관없다는 듯 히히 웃더니 손에 든 걸 번쩍 들어올렸다. 매점에서 파는 빵 봉투였다.
"같이 먹어, 김래빈."
"너 석식 먹었잖아? 그리고 음악실도 교실이니까 당연히 먹을 걸 가지고 들어오면 안 돼!"
"우... 오늘 밥 맛 없어! 그럼 여기 말고 나가서."
오늘따라 나물이 많이 나와 차유진이 좀 깨작거리기는 했다. 배고플만도 하지. 그는 석식 메뉴를 떠올리며 얕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음악실에서는 안 된다. 그는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음악실 앞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가을이었고, 야간자율학습 시간이라 해도 진 다음이었다.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진 계단은 싸늘했다. 엉덩이 차가워. 차유진이 불평해서 김래빈은 걸치고 있던 가디건을 주섬주섬 벗었다. 자, 하고 내밀면 차유진은 그걸 받아 기묘한 얼굴을 하더니 제가 두르고 있던 후드집업을 교환하듯 내밀었다.
"김래빈도 엉덩이 차가운 거 안 돼."
"? 그래."
이럴 거면 그냥 자기 옷을 깔고 앉았으면 되는 거 아닌가? 김래빈은 의아했지만 이제와 유난을 부려 바꾸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차유진이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빵봉지를 뜯었다. 곧 그의 손에 빵 하나가 들렸다. 크림이 많이 들은 빵이었다. 텁텁하지 않고 깔끔한 맛이라 매점에서는 인기 품목에 속하는 편이었는데 용케 가져왔다 싶었다. 놀란 눈으로 차유진을 돌아보자 그는 이미 빵을 입에 넣은 채 히죽 웃고 있었다.
"운 좋았어! 나 가니까 아주머니 정리하고 있었어."
계셨어야. 그는 무심결에 상대의 말을 고쳐주며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상대에게 건네고 제 입 주변을 톡톡 건드리면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쳐 크림을 닦아낸 차유진이 Thanks, 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질문을 던졌다.
"김래빈 오늘은 안 먹어?"
"지금 먹고 있잖아?"
그는 어리둥절하게 제가 먹고 있는 빵을 들어올렸다. 차유진에겐 세 입거리였지만 김래빈에게는 아니었다. 그러나 차유진은 고개를 젓고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제 입가를 톡톡 쳤다. 혹시 나도 뭐가 묻었나? 김래빈은 입가를 문질러봤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차유진의 말은 조금 뒤늦게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김래빈은 했다. 차유진이랑. 키스를, 아니 뽀뽀를. 저번에. 차유진의 집에서. 그때 차유진의 입가에 뭐가 묻었다고 핑계를 댔었다. 그랬지. 그는 무릎을 세워 이마를 쿵 박았다.
"그건...! ....여기는 학교야, 차유진!"
"학교 왜 안돼?"
"그거야 우리는 학생이고 여기는 학업을 위한 공간이니까 학생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은 하면 안 돼!"
여전히 몸을 완전히 웅크려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는 김래빈은 차유진이 입모양으로 투덜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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