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김래빈은 찔끔 눈물이 나는 걸 느꼈다. 새벽 두 시였다. 인간의 감성이 가장 풍부해진다는 시간에 알코올의 작용이 함께 겹쳤다. 그가 얼근하게 취한 사이에 차유진이랑 요새 무슨 사이냐고 은근슬쩍 떠 보러 왔던 과 알파 선배만이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술잔을 든 채 당황한 얼굴을 했다. 김래빈은 상대가 왜 그런 질문을 던지는지 의도를 파악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테이블에 엎어졌다. 쿵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대체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아직은 날이 차가운 3월 말이었다. 신입생을 끌어들여 얼토당토않은 이유로도 술자리가 생길 때였다. 이미 동기들은 김래빈이 얼굴만 날 선 허당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술자리 값을 나누어 낼 인원을 한 명이라도 더 늘려보겠답시고 후배 사랑 내리사랑이라는 핑계를 대며 잡아끄는 사람들을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앉은 술자리는 시간이 흘러 갈 사람 다 가고 주정뱅이들만이 남아 서로의 귀에 닿지 않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앞에 앉아 있는 선배 정도가 전부였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떠올렸다. 작년에 벼락같이 친해진 동갑내기 알파. 어쩌다가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좋아하고 있었다.
“선배님…. 제가 차유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좋아한다는 건 대체 뭘까요? 짝사랑은 왜 이렇게 사람을 비겁하게 만드는 걸까요?”
비겁하다. 김래빈은 다시 한번 읊조렸다. 그래, 비겁했다. 자신의 마음은 드러나지 않게 꽁꽁 감추면서 차유진의 마음이 어떤지는 궁금했다. 알아내고 싶었다. 겁쟁이같이 혼자 카드를 잔뜩 쥐고 시작하고 싶은 거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닐 텐데 왜 이렇게 숨기고만 싶은지. 하지만 그것조차 실패한 모양이었다.
“혹시 제가 차유진을 좋아한다는 게 티가 많이 납니까?”
그는 우울하게 물었다. 선배가 여전히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쩔쩔매는 건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조금 긴가민가하긴 했지만. 그냥…. 별 사이 아니라고 하면 내가, 다음번에 혹시 한번 같이…. 아니, 아니다.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분명 그보다는 술에 덜 취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선배는 갑자기 얼굴을 손으로 연거푸 쓸어내렸다. 김래빈은 그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깜박였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그 애한테 그러지 말 걸 그랬습니다.”
형질인들이 하나둘씩 발현하기 시작할 때였다. 김래빈 역시 학기 초에 오메가로 발현했다. 아직 어린 형질인들은 페로몬이라는 새로운 감각에 적응해야 했다. 경고, 번식, 위헙, 구애…. 아주 단순하고 본능적이며, 가장 정직한 신호체계에.
왜 인류가 그런 식으로 진화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런저런 음모론이 떠돌았다. 알파와 오메가의 핵심 능력이 대부분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쏠려있다는 점 때문에 세계 1‧2차 대전과 같은 거대한 전쟁의 영향일 거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인류는 혼란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했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파, 오메가라는 새로운 특성은 글쎄, 사실 다른 특질들과 아주 크게 차이 나지는 않았다. 어떤 부분에서는 불리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유리하고. 오히려 거대한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체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와 위선이 필요했기에, 한국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회에서 페로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걸 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걸 배우는 시기였다.
아직 자신의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하는 어린 형질인들의 서툰 신호들이 드문드문 쏟아지는 교실이, 김래빈은 내심 편했다. 힘써 독해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점이 좋았다.
눈치가 없고 사회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종종 듣는 자신조차 페로몬은 오해 없이 정확히 감각할 수 있었다. 인류의 다수를 차지하는 베타를 제외한 의사소통 체계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서 김래빈은 한때 모두가 페로몬을 감추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저기, 너 혹시 나 좋아해?’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처지가 되고 나서 다시 떠올려보니, 제 입을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무심한 질문이었다. 상대는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여학생이었다. 이름은 알았지만 친하지는 않았다. 같은 학년이었고, 옆 반이었고, 아마 알파로 발현했을 거다. 어디선가 자신을 향한 호감의 페로몬이 느껴진다 싶어서 돌아보면 항상 눈이 마주치던 아이.
그 여학생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그 당시의 상황만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의 질문을 듣자마자 굳어버린 얼굴과,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싹 감추어지던 페로몬. 마치 문을 닫은 것처럼 한순간에, 일방적으로 단절되던 감각.
‘솔직한 게 항상 옳은 건 아냐. 사람이 항상 솔직할 수도 없고’
당황한 김래빈이 그의 누나에게 상담했을 때, 그의 누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답해주었다. 내내 솔직하게만 살아도 괜찮은 것도 일종의 특권이라고. 알쏭달쏭한 말이었다. 그때의 김래빈은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누나의 말이었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절 좋아하는 걸 알았는데…, 그냥 모르는 척해줄 걸 그랬어요.”
갑자기 전환된 화제에도, 대체 무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맥락을 건너뛴 김래빈의 푸념에도, 선배는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앞에 남아주었다. 김래빈에게 한 잔 권유하는 일도 없이, 테이블에 빈 소주병이 하나 더 늘었다. 새로 채운 술잔을 다시 원샷으로 비운 선배가 제 머리를 마구 헝클더니, 한숨을 깊게 쉬며 입을 열었다.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 한번 고백해 보지 그래?”
김래빈은 여전히 테이블에 엎드린 채로, 투명한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봤다. 차유진이 절 받아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친한 건 맞는데, 걔의 마음을 정말 모르겠어요. 차유진의 마음을 읽어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차유진도 조금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단서를 찾으려 애쓴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패였다. 차유진은 가끔 결벽적으로 보일 만큼 자기 페로몬을 감추는 사람이었고, 페로몬이 아닌 다른 신호들은 그를 혼란스럽게만 만들었다.
“말 안 하면 모르잖아. 래빈아. 그런데 내 생각엔 차유진이 너를….”
머뭇머뭇 흘러나오던 선배의 말은 중간에 딱 끊겨버렸다. 호랑이도 아니고, 차유진이 다가오는 걸 뒤늦게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도 느꼈을 거다. 차유진을 알아채자마자 김래빈 역시 페로몬을 싹 감추어버린 것을.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감정을 들키지 않게.
“안녕하세요. 나 김래빈 데리러 왔어요. 김래빈 술 취했어?”
혹시 들었을까? 김래빈은 고개를 들어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차유진은 그저 평소와 똑깉은 얼굴이었다. 그는 김래빈의 눈앞에 손을 흔들고는 팔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김래빈 거짓말 진짜 못해.”
이미 차유진의 존재가 익숙한 동기들은 그를 데리고 가는 차유진을 보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김래빈에게 잘 가, 하고 손을 흔드는 몇 명의 주정뱅이들을 뒤로한 채 그와 차유진은 술집 밖으로 나왔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일어서서 몇 걸음 걸어보니 확실히 자신이 휘청이는 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김래빈 넘어져.”
자신을 강하게 붙드는 팔에 기댄 채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눈앞이 흔들렸다. 조금 졸린 것도 같았다.
“김래빈 걸을 수 있어?”
“…으음.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
그의 어깨를 붙든 채 몇 걸음 걸어보던 차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김래빈 지금 걷는 거 못해. 그러더니 그에게 냅다 등을 내밀었다.
“이거 더 빨라.”
자신 앞에 불쑥 내밀어진 등을 보다가 김래빈은 못 이긴 척 팔을 뻗었다. 그 등에 몸을 기대고 목에 대충 팔을 감자마자 한순간에 몸이 들어 올려졌다. 김래빈은 어깨에 기대듯 고개를 떨구었다. 체구가 그렇게 많이 차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차유진은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그를 업고 있었다. 그리고 김래빈은 그가 자신에게 이렇게 묘하게 다정하게 굴 때마다 마음이 술렁였다.
“차유진.”
“왜?”
왜 너는 가끔 나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굴어? 페로몬 한 번만 풀어주면 안 돼? 네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어. 하고 싶은 말이 입안에서 잔뜩 맴돌았다. 하지만 김래빈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그냥. 너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어. 그때도… 내 기억에는 이 근처였던 것 같아서.”
“오. 맞아. 김래빈 그때 곤란했어. 내가 구해줬어.”
차유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시끄러운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차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1년쯤 전이었던가. 그때도 과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셨다가 혼자 빠져나가는 길에 같은 과 복학생 무리에게 붙들린 게 시작이었다.
‘이 새끼 웃긴다. 야. 더 해봐. 더 해보라니까?’
어깨를 툭툭 치는 팔, 그를 둘러싼 사람들, 비웃음, 위협적인 말투. 충분히 겁먹을만한 상황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던 건 그 무리의 중심인물로 보이는 알파의 페로몬이 위협적인 느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오히려 기분 좋은 것에 더 가까운, 들뜬 페로몬. 그래서 멀뚱히 있었다. 왜 말과 행동을 일부러 이렇게 꾸며내시는 걸까 궁금해하며. 분위기가 바뀐 건 그때부터였다. 아까 전까지는 분명히 괜찮았던 페로몬이 점차 공격적으로 변하는 감각에 그는 당황했다.
‘거기서 뭐 해? 빨리 가, 나 추워.’
그때 끼어들어서 김래빈을 빼냈던 게 차유진이었다. 같은 교양 강의를 듣는 학우였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아직도 김래빈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은 기분이 상한 게 아니면서 상대가 굽신거리는 게 보고 싶어서 일부러 거친 말과 행동을 하는 그 마음이 무엇인지.
그때 이후 강의실에서 인사를 주고받다가 차유진과 친해졌으니, 어쩌면 전화위복인 셈이었다. 아니다. 지금 차유진 때문에 이렇게 마음고생하고 있으니 전화위복이라 하기도 어려운가. 그는 작게 웃었다.
“김래빈 그때 바보였어. 물론 그 사람들이 더 잘못했어.”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며 김래빈은 차유진의 어깨에 다시 고개를 묻었다. 자신을 향한 호감이 느껴지는, 희미한 페로몬의 기척. 하지만 이게 정말로 맞는 걸까. 자신은 차유진의 속내를 제대로 읽어낸 걸까. 제가 아무리 감춘다고 감췄어도 차유진도 알파인 만큼 한 번쯤 그가 차유진에게 보내는 페로몬을 느꼈을 텐데 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까.
참으로 복잡한 세상이었다. 마음을 감추는 사람들,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들. 말과 몸짓, 어조와 말투, 심지어는 페로몬까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많은데 왜 아직도 다른 사람과 마음을 통하는 일은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지.
“차유진. 사실 나 너 좋아해.”
그 말은 불시에 튀어나왔다. 말하고 나서 김래빈이 더 당황할 만큼. 그러다 불현듯 그는 깨달았다. 왜 선배가 한번 말해보라고 했는지. 때로는 무모하게, 불확실한 가능성에 뛰어들어야만 할 때가 있다는 걸. 아무리 페로몬이 정직해도, 속일 수 없이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어도, 말로 해야만 확실해지는 것들이 있었다. 김래빈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때 그가 믿던 세계를 이제 그는 뒤집어보기로 한다.
한때 그를 이루던 세계가 한순간에 뒤집힌 적이 있었다.
차유진은 술에 취한 김래빈을 둘러업은 채로 그날을 떠올렸다.
‘알파로 발현하는 걸 전제로 한 장학금 제안이었으니, 지금은 기회가 날아갔다고 봐야지. 유망한 대학을 가고 싶다면 빨리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을 거다.’
대학 진학을 1년여 남짓 앞둔 시점이었다. 그를 앞에 앉힌 채 코치는 다정하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선수 생활의 끝을 고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자신 이전에도 몇 명에게나 그와 같은 말을 해왔던 걸까. 그 말을 들으며 차유진은 문득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는 속내를 드러내는 대신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물었다.
‘그건 알파가 아니면 선수가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이에요?’
코치는 그의 말에도 화내지 않았다. 양손을 깍지 낀 채 턱에 대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복도 밖에서는 떠들며 달려가는 소년들의 목소리가 교정을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적막한 코치실 안과는 정반대로.
‘…자격으로 따지자면 그렇지 않지. 하지만 가능성을 따진다면,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통상적으로 그래. 유진. 넌 좋은 선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금방 한계가 오고 말 거야.’
너도 이미 느끼고 있잖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코치의 눈빛에서 차유진은 그 말을 읽어내었다. 코치는 베타였다. 그러니 그의 미래를 가장 정확히 말해줄 사람일 텐데도, 차유진은 그저 모든 걸 외면하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게도 맞는 말이었다. 미들스쿨 시기를 지나며 이미 성장이 느려진 몸으로는 점점 더 다른 선수를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알파로 발현했다면 발현 직후에 찾아온다는 짧고 폭발적인 성장기에 기대를 더 걸어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17살을 기점으로 발현의 가능성이 한없이 낮아진다는 게 일반론이었고, 이제는 무작정 희망을 걸 때가 아니라는 걸 차유진도 알고 있었다.
‘생각해 볼게요.’
그는 운동 가방을 어깨에 메고 코치실을 나왔다. 그때 차유진은 결심했다. 멀리 가야겠다고. 이름만 겨우 들어본 나라, 그의 복잡한 뿌리 중 한 곳. 한국으로.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나라로.
“차유진.”
“왜? 김래빈 토해?”
아니. 그의 등에 업힌 주정뱅이가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술집이 모여있는 대학가의 골목, 끝도 없이 이어진 네온 간판 너머로 희미하게 타인이 흘린 페로몬의 자취가 띄엄띄엄 흩어졌다. 김래빈의 자취방은 아직도 한참 더 걸어야 했다.
“아니야.”
김래빈이 다시 한번 웅얼거렸다.
“나는 그으냥… 너를 더 알고 싶어….”
상대는 제법 취한 게 분명했다. 그에게 고백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그 뒤로 긴장이 풀렸는지 영 혀가 꼬였다. 김래빈답지 않게 페로몬도 슬금슬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를 향한 호의와 애정이 뒤섞인, 복잡하면서도 직설적인 표식이었다. 한국인답게 페로몬을 함부로 흘리는 걸 예의 없다고 잔소리하던 평소의 모습이 무색했다.
등 뒤에 업힌 상대가 꿈지럭거려 차유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들썩여 그를 추슬렀다. 가만히 안 있으면 떨어져. 그는 엄중하게 경고했다. 안 그래도 김래빈은 키도 길쭉하고 무거워서 운반하기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움찔한 김래빈이 다시 얌전하게 늘어졌다. 긴 숨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머리카락이 닿았는지 목덜미가 계속해서 간지러웠다. 나 힘들어. 너 내일 맛있는 거 사야 해. 차유진은 괜히 김래빈을 좌우로 흔들었다. 김래빈의 고개가 꼭두각시처럼 흔들거렸다.
“김래빈 벌써 나 많이 알아. 그리고 나 물으면 솔직하게 답해.”
“그건 그렇긴 한데…. 어떤 건 물어봐도 괜찮은지 모르겠어….”
와우. 김래빈은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줄 알았는데.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는지 상대의 손이 올라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야. 아파. 장난스럽게 소리치자마자 바로 힘이 빠졌지만. 붙들렸던 부분을 털어내듯 머리를 두어 번 흔드는 그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가끔 너… 네가,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아?”
차유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모르겠다. 분명 술 취한 사람의 횡설수설이었다. 도무지 분명한 게 없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뭐가 괜찮냐는 건지. 그런데도 차유진은 왠지 알 것 같았다. 김래빈의 말과 페로몬이 다정하게 그를 감싸안고 있어서. 그는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모국어가 흘러나왔다. 김래빈은 결코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다.
“[한때는, 좀, 확실히 쿨하지 못했어. 내가 삽질을 하긴 했지.]”
우습게도 행운은 가장 치명적일 때 그를 배신했다. 한국에서 대학에 진학한 지 1년 만에 그는 알파로 발현했다.
원하던 타이밍을 빗겨가 알파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허탈함을 차유진은 잊지 못한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가는 건 소용 없을 걸 알았다. 고대하던 알파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뒤늦은 발현으로 원하는 만큼 성장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1년간 모든 운동을 쉰 몸으로 뒤늦게 계속 노력해 온 사람들을 따라잡기가 쉬울 리 없었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차유진은 한동안 그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미련을 다 버리고 왔다고 믿었는데도 그랬다. 그때는 그래서 모든 게 다 싫었던 것도 같았다. 알파, 페로몬, 아무튼 형질과 관련된 모든 것이. 한편으론 알고 싶었다. 형질이란 게 대체 뭐길래 때로는 사람을 제약하고, 때로는 나 자신조차 싫어지게 만드는 건지.
형질을 다루는 교양 강의 제목이 홀린 듯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차유진은 수많은 영어강의를 두고 그 교양을 수강하기로 결심했다. 그건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거기서 그는 김래빈을 만났으니까.
“[행운의 여신이 그때야 내게 윙크를 한 게 틀림없어. 오. 아니면 축복이 변장했던 걸지도? 이런 걸 한국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네.]”
취객으로 소란스러웠던 거리를 지나자 또렷해진 차유진의 말이 차가운 밤의 공기를 울렸다. 등 뒤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라는 거야. 말 너무 빨라. 그 웅얼거림을 들으며 차유진은 나지막하게 키득거렸다.
“나 김래빈 만나서 괜찮다고 했어.”
“으음….”
반문이나 반박 없이 얌전한 걸 보니 그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얌전하게 우물거리는 목소리 너머로 페로몬이 불규칙하게 넘실거렸다. 그 안에 들쭉날쭉 흘러나오는 감정의 물결을 차유진은 가만히 느끼며 걸었다. 온기가 등으로부터 천천히 그를 적셨다. 그의 마음까지도.
“처음에 김래빈 이상했어. 그래도 지금은 아냐. 나 알아.”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등 뒤에서는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잠들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차유진은 성큼성큼 걷던 걸음걸이를 조금 더 조심스럽게 고쳤다. 김래빈의 흔적을 따라, 기억이 서서히 1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때도 학교 근처 어딘가의 골목이었다.
‘야. 이 새끼 눈 봐라? 너는 선배가 우스워?’
지금보다도 한국어가 서툴 때였다. 그래도 표정과 어조, 껄렁한 태도를 보면 뻔했다. 세상에는 타인을 지레 위협하면서 자존감을 채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차유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쪽이었다.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교양 강의에서 계속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오메가로 추정되는데도, 출석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낮았고 강의에 집중하는 눈매가 꽤 매서웠다. 체구는 말랐지만 키는 적당히 큰 편이라서 솔직히 인상만 써도 어지간한 사람들을 위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피지컬이라면 조무래기 꼰대를 입 다물게 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왜 그냥 듣고 있을까.
별것도 아닌 놈에게 쩔쩔매는 호구. 그게 김래빈의 첫인상이었다. 그가 아예 그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친해진 이후의 일이다.
“[지금만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김래빈. 잘 들어야 해.]”
상대가 잠든 걸 알아 차유진은 마음껏 입을 열었다.
“[넌 정말 이상하지만, 난 그런 네가 좋아. 네게 도움도 많이 받았어. 정말이야.]”
김래빈은 자신이 오메가인 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자기가 오메가라는 데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 같았다. 오메가답지 않다는 평가를 수시로 들으면서도 그랬다. 차유진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런 말을 들은 것도 여러 번이니 뒤에서는 그런 말들이 더 노골적으로, 더 많이 오갔겠지. 다만, 김래빈은 그런 악의에, 혹은 염려를 빙자한 통제에 전혀 타격받지 않았다.
‘물론 나 역시 우리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오메가에게 부여하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눈으로 보이는 광경에 크게 좌우된다는 이야기도 여러 번 들었어. 하지만 특정한 유형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의 형질을 함부로 추측하거나 부정하는 건 편견이야. 그리고 누가 어떤 형질인지만을 따져 사람의 본질을 파악하는 건 그 사람이 가진 다른 잠재력을 제대로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사실 정확하게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간혹 김래빈의 말은 지나치게 길고 횡설수설했다. 그래도 차유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의 본질을 볼 땐 형질 외에도 중요한 게 많다는 것.
띵. 엘리베이터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는 익숙하게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옷을 제대로 벗겨 줄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그는 김래빈의 신발만 겨우 벗긴 채 길게 늘어진 몸뚱이를 침대 위로 떨궜다.
“[이건, 진짜, 정말로 비밀이야. 난 아직도 내가 알파라는 게 가끔 신경 쓰여. 한심하지만 그래.]”
잠든 게 역력한 얼굴을 옆에 두고 침대에 걸터앉아 차유진은 중얼거렸다. 상대가 자고 있을 때조차 차마 그쪽을 바라보고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김래빈이 오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가 페로몬을 잘 쓰지 않는 건 그게 한국의 공공 예절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을 숨기고 싶은 건 더 아니었다.
요컨대 자존심 문제다. 발현 전까지 차유진은 자신이 알파가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고, 그렇다고 해도 연연할 일이 아니라고 일부러 더 당당하게 콧대를 세우던 시기가 있었다. 그랬는데 어떻게 알파가 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페로몬을 휘두르고 다니겠는가. 그가 생각하기로는 아무래도 꼴불견이었다. 그렇게 알파가 되고 싶어하더니, 하는 눈길을 받기라도 한다면 정말 기분 나쁠 것 같았다.
“[내가 알파가 아니더라도, 너라면 괜찮다고 말해줬겠지. 어쩌면 지금처럼 날 좋아했을 수도 있고. 넌 내가 알파라서 좋아하는 것 같진 않으니까. 그래도….]”
차유진은 손끝으로 김래빈의 뺨을 콕콕 눌렀다. 깨지 않을 만큼, 하지만 그의 감촉이 충분히 느껴질 만큼.
“너랑 있으면 내가 알파인 게 좋아. 그건 아주 멋진 일이지.”
형질에 대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그와 나눌 수 있어서, 형질인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지고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어서, 그의 페로몬이 언제나 그의 표정이나 그의 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읽을 수 있어서, 때로 언어로 하는 의사소통보다 페로몬으로 하는 의사소통이 더 편한 것처럼 구는 이 괴짜 동갑내기의 세상을 함께 감각할 수 있어서.
그는 침대의 남은 공간에 몸을 구겨 넣고 아직도 술 냄새가 풀풀 나는 김래빈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페로몬이 은은하게 퍼져 상대를 감싸기 시작했다. 서로의 페로몬이 섞여들었다. 아주 충만한 감각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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