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uet
Un poco 조금씩
Espressivo 감정을 담아서
Tempostoso 격렬하게
Un poco
1
김래빈은 수도 제일의 오페라극장에서 발견되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발견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고 회의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오페라극장이라는 장소가 퍽 김래빈과 어울린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곳은 명성만큼이나 유서 깊고 오래된 극장이었는데, 내부는 높아지는 명성에 맞추어 몇 번이고 화려하게 단장했어도 건물을 이루는 골격과 구조는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 어느 순간 극장주는 극장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불완전한 구조와 설계 탓에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공간들을 벽 속으로 감추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화려한 벽과 등불 사이로 비밀스러운 틈새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런 공간은 대개 철 지난 무대의상과 무대 장치가 보관되거나, 아니면 그 무대 장치를 움직이는 기계들이 설치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기계장치들을 움직이고 배우를 때맞춰 무대로 올리는 여러 관계자가 비밀스럽게 오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김래빈이 숨어있던, 혹은 갇혀있던 곳은 그런 ‘널리 알려진’ 공간이 아니었다. 약간의 공간이 있는 복도나 방이 전부인 대부분의 틈과 달리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이어지는, 관리인조차 왕왕 길을 잃는 그런 아주 오래되고 깊숙한 틈 어딘가. 고작 벽에서 새어 나오는 흐릿한 실내의 빛과 흘러들어오는 미미한 달빛만이 내부를 비추는 곳.
차유진이 처음 김래빈을 마주친 건 오페라극장의 숨겨진 지하실이었다.
세상에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있다. 열다섯 살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 백작가 차씨가문의 차남인 그가 그랬다.
부모를 따라 극장에 놀러 왔던 그 소년은 다른 또래들과 얌전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좀 지겨웠다. 그의 지위며 외모는 다른 이들에게 선망을 사기 좋았기에 어릴 적에는 제게 쏠리는 시선에 좀 우쭐할 때도 있었지만, 계속 우쭐함에 빠져 있기에 유진은 너무 영리한 소년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관심에는 다정한 호의만큼이나 껄끄러운 열광과 삐죽삐죽한 적의도 같이 섞여 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고 그걸 예쁘게 포장해 모르는 척 주고받는 대화에도 신물이 났다.
그는 부모가 어느 저명한 저술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조용히 옆으로 빠져나왔다. 휘황찬란한 촛대가 기둥마다 달린 벽면을 따라 걷다 그는 극장의 ‘그 틈’을 찾아냈다. 벽 사이에 살짝 가려진 그 틈 앞에는 혹여나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그 사이로 들어가 사고 나지 않길 바랐던 극장 관리인이 세운 출입 금지 줄이 쳐져 있었지만, 호기심이 인 유진은 거뜬히 쳐진 줄을 넘어 그 틈새로 들어갔다.
틈 안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평범했다. 어두컴컴한 데다 먼지 냄새가 좀 났지만 뼈가 굴러다니거나 쥐며 벌레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유진은 뒤를 한번 흘끔 돌아보았다가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만 탐험하다가 돌아가면 엄마도 눈치 못 챌거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어두워졌다. 유진은 처음에는 그냥 걷다가, 다음에는 발밑을 보며 걷다가, 이후로는 바닥조차 잘 보이지 않아서 손을 뻗어 벽면을 더듬어가며 걸었다. 몇 번인가는 넘어질 뻔했고 몇 번인가는 건물이 울리는 것 같은 이상한 삐걱대는 소리와 바람 소리에 놀라 돌아갈 뻔했지만, 그는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기라도 했으면 좀 망설이다가 돌아갈 것을. 하나로 쭉 뻗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 싶다는 이상한 오기가 그를 계속 걷게 했다. 중간중간 건물 외벽의 환기구로 들어오는 빛이 통로를 그나마 걸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준 것도 그의 고집에 한몫했다.
몇 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을까. 그 길의 끝에서 그는 기묘한 문을 발견했다. 온통 녹슬고 심지어 이끼까지 끼어있는 문이었다. 유진은 문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벽에 꽉 끼인 듯 한참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던 문은, 그가 한 다리까지 들어 벽을 지지대 삼아 온몸으로 매달리고 나서야 조금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그 안에서 유진이 마주한 건 어둡게 빛나는 눈 한 쌍이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악!!!!”
그는 소리를 치며 뒷걸음치다가 제가 연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뒤늦게야 상대가 내지른 비명을 깨달았다. 짐승 소리가 아니다. 그는 그제야 제가 마주친 것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 넓게 열렸다. 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를 통해 그는 상대가 그만큼이나 겁먹은 채 저만치 물러나 있으며, 어쩌면 그만큼 어린 소년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넌 누구야?!?”
그래도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그는 빽 소리쳤다. 상대가 무어라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흘러나온 소리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유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다.
‘동대륙 사람인가?’
그는 용기 내어 한 걸음 다가섰다. 반대로 소년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애초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지라 상대는 금방 반대편 창살에 걸음이 막혔다. 창살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는 모양인지 소년이 여러 번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상대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다 낡은 옷, 그 사이로 보이는 파리하게 질린 피부와 마른 몸. 삭은 나뭇가지로 보이는 막대기를 불안정하게 그를 겨누는 방향으로 쥐고 떠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 진짜 동대륙 출신이야?”
이번에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호자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소년, 그다지 잘 돌보아진 것 같지 않은 상태, 무엇보다도 이 대륙에서는 이국적인 외모에 아마도 타 대륙 출신. 유진은 서서히 그가 보고 있는 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인신매매가 아직도 있단 말이야? 진짜로?’
다시 말하지만,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아직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이 범죄 현장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흥분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머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인신매매를 발견한 거지? 이런 건 어디에 말해야 하더라? 경찰? 부모님? 당장 누군가를 불러와야 하나? 그럼 쟤는 어떡해?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근데 나라면 진작 탈출했을 텐데 왜 계속 여기 있었지? 열기가 좀 힘들어서 그렇지 문이 잠겨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부랑자인 건가? 고아? 말도 안 돼. 동대륙 애가 혼자서 대륙을 건넜다고? ’
그는 상대를 다시 확인했다. 소년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그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제가 들어온 방향을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러자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들어왔던 문은 안에서 보면 마치 벽처럼 교묘하게 위장되어 문인 줄 알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몰랐구나.’
상황을 이해하자 조금 머리가 식었다. 밖에서 잠긴 창살, 그리고 숨겨져 있어 나갈 수 없는 문.
그러니까 눈앞의 상대는 진짜 갇혀있던 사람, 즉 피해자다. 인신매매에 당했다면 아마도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먼 거리를 끌려왔겠지.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인신매매단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잔뜩 위축된 채로 지냈을 게 분명한데 갑자기 문이라고 생각도 못 했을 곳에서 누군가가 들어왔으니, 경계할 만도 했다.
“괜찮아. 저기, 좀 진정해 봐!”
그는 보다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으나 상대는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전히 나뭇가지를 다부지게 쥔 채 얼굴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해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한 발짝 물러설 때마다 천천히 결심이 섰다. 뒷수습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나랑 같이 가.”
못 알아듣는 건 알았다. 그래서 문을 향해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왔던 곳까지 물러서서 유진은 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만약 유진이 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빛과 우연히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그 공간을 온전히 채우지 않았더라면, 둘의 이야기는 평범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그의 눈앞에는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 광경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작은 돌로 긁어서 하얗게 일어난 자국이, 혹은 삭은 나뭇가지로 그어서 표시한 것처럼 얼룩덜룩한 검댕이 그 작은 곳을 완전히 채우고 있었다. 비뚤비뚤하고 흐릿할지언정 창살문을 제외한 사방의 벽과 바닥까지 온통 음악이었다. 그 어두운 곳에서 애써 그렸을 오선지와 음표가 쉼 없이 이어진 그 광경을 보다가 유진은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마저도 악보였다. 그의 눈이 저도 모르게 음표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얼마 전에 공연한 오페라의 아리아 한 구절, 저건 얼마 전에 발표했던 어느 연주가의 피아노 연주곡. 극장을 드나들며 익숙해졌던 음률이 아주 어설프고 거친 솜씨로 그 공간에 구현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매섭게 치켜세운 시선이 그가 밟고 있는 악보로 향한 것을 깨달아 음표가 없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면 그를 따라온 시선이 이번엔 곧바로 그의 눈을 향했다. 고작 그 한 발짝이 뭐라고. 그사이에 경계가 누그러진 것처럼 순하고 곧은 시선이었다.
“…가자. 나 따라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유진은 다시 재촉했다. 소년은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문을 나서고 몇 발짝 뒤에서 그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복도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 벽을 비집고 들리는 극장의 소리 속에서도 그 발소리는 유독 잘 들렸다.
나중에 차유진은 자신이 그때 김래빈에게 압도당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2
유진이 그 소년을 데리고 다시 극장의 홀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잠시 소동이 일었다. 그럴 만했다. 인신매매 현장이라니. 그리고 그걸 발견한 게 고작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라니.
그에게서 사정을 들은 그의 부모는 극장의 관리인과 길게 대화를 나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선과 웅성거림 속에서 그가 데려온 소년은 불안한 것처럼 주춤대기는 했지만 물러서거나 도망치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 손힘이 풀어지기 전 돌아온 그의 부모는 일단 집에 가자며 그를 이끌었다. 의외였던 건 그가 데려온 소년이 함께 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후원의 자격으로 우리가 맡게 될 거야.”
이유를 묻는 유진에게 그의 부모는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데려왔잖니. 책임을 진다는 건 그런 거란다. 그가 아무리 눈치 빠른 소년이어도 덧붙여진 말은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간결했다. 그는 그 행간을 캐묻는 대신에 그래도 넌 옳은 일을 했다며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만족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는 마차에서 그의 부모는 소년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그의 저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대륙의 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이었지만 그마저도 교양 수준의 배움이었고 의사소통을 온전히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무어라 전달을 한 건지 마차에서 내린 소년은 순순히 사용인을 따라갔다. 동대륙어를 할 줄 아는 교사부터 구해야겠구나. 그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집사를 불렀다.
“나도 동대륙어 배워도 돼요?”
그는 충동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별로 상관은 없다만 이제까지 붙여준다는 교사를 귀찮다는 이유로 고사한 건 너라는 걸 기억하렴, 유진.”
“그때는 할 이유가 없었고 지금은 달라요. 나 마음먹으면 잘할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잠시 흘겨본 뒤 이번에는 잘 해보라는 허락을 남기고 그를 방으로 올려보냈다. 저녁 만찬 시간에 맞춰서는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되어 내려왔을 때, 자신이 발견한 소년을 유진은 못 알아볼 뻔했다. 제대로 물에 씻고 옷까지 말끔하게 갈아입은 소년의 모습은 그를 막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그의 눈에도 제법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길게 뻗은 눈꼬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곧게 정면을 향했다. 먼지와 검댕을 씻어낸 깨끗한 뺨에 선명한 점이 하나 박혀있었다. 유진은 실없게도 최근 유행하는 애교점을 떠올리고 말았다. 얼마 전 극장의 프리마돈나는 입꼬리에 붙이고 와 화제가 되었던가.
“유진, 유진이 주워 왔다며.”
집안의 막내인 그의 여동생 아비게일이 그에게 몸을 붙이며 소곤거렸다. 그는 다시 소년을 힐끔거렸다. 주워 왔다고 표현하기엔 좀 크지 않나? 그도 또래 중에서는 키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소년 역시 비쩍 마르긴 했어도 눈높이가 유진과 얼추 맞았다. 사람한테 주워 왔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되지, 맞은편의 이든이 나지막하게 꾸중했다. 입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게 무슨 복화술 수준이었다. 나이 차가 제법 있어 이든을 조금 어려워하는 아비게일은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응. 내가 찾은 거 맞아.”
반면 유진은 굳이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고, 여동생의 표현에 비하면 그의 말은 점잖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는 아비게일이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저와 그 소년을 번갈아 보는 걸 내버려두고 식탁 의자에 등을 대충 기댔다. 그 방만한 자세는 식탁으로 내려온 그의 어머니가 유진, 하고 나지막하게 그를 부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 그의 조모가 식탁에 착석하고 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별생각 없이 음식을 덜어 입에 넣던 유진은 제게 드문드문 와닿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 절 보고 있었다. 그는 의아해하다가 소년이 슬그머니 들고 있는 식기를 바꾸는 걸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은 이곳의 제대로 된 식기 사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식탁 위에 올라온 식기가 몇 개던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몸에 익은 바를 따라 자연스럽게 식기를 바꾸고 있었지만, 저 멀리 동대륙에서 온 소년이 그 순서를 알 리 만무했다.
‘흠….’
그의 입꼬리가 장난기로 움찔댔다. 그는 음식이 바뀌기를 기다려 슬쩍 잘못된 식기를 집어 들었다. 다시 소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유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대를 흘긋 살펴보았다. 그를 따라서 식기를 들었던 상대는 그걸로 음식을 먹어보려다 멈칫하고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것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과 유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웃음기 담고 있는 그의 눈에 상황을 파악한 건지 소년의 눈이 더 커지더니 미간이 슬쩍 우그러졌다.
소리죽여 키득거리던 유진은 절 보던 조모와 딱 눈이 마주쳤다. 몇 번 헛기침을 한 그는 다시 제대로 된 식기를 들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식사가 끝나고 조모의 부름을 받아 올라가야만 했다.
“유진.”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은 채 그를 부르는 할머니 앞에서 일단 잘못했어요! 외치고 보려던 유진은 이어지는 조모의 말에 그 타이밍을 삐끗 놓쳐버렸다.
“그 애가 마음에 드나 보지?”
엑? 그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조모는 느리게 의자를 흔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머니. 나는 그 애 오늘 처음 봤어요! 마음에 든다 안 든다를 말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지만 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처음부터 책잡힐 만할 일을 안 하잖니. 오늘 보니 장난만 잘 치던데.”
“장난친 건 제가 잘못했어요. 걔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예요.”
그는 고집스레 덧붙였다. 사실 유진은 그가 벌써 조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조모의 말이 맞다고 인정할 순 없었다. 여기서 맞다고 하면 마치 제가 상대에게 관심이 있어서 장난을 친 것처럼 되지 않겠는가. 그는 겉으로는 의젓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앞으로 그 아이는 계속 네 곁에 둘 생각이거든.”
“…왜요?”
“들어보니 나이가 너와 동갑이라고 하던데 딱 좋지 않니. 동대륙은 지금 오랜 전쟁 중이라 돌려보내기도 어려우니…. 결국 걘 여기서 살게 될 테고 너도 주변에 둘 사람 하나 있어야지. 귀족 모임이라고만 하면 도망가는 이 말썽꾸러기야. 그래서 네 측근은 대체 어떻게 만들래?”
“그거 꼭 만들어야 해요?”
귀찮은데. 투덜거리는 유진을 그의 할머니는 손을 들어 불렀다. 그는 고분고분 의자 바로 앞에 섰다. 그의 할머니가 팔을 뻗어 그의 팔뚝 언저리를 토닥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진은 할머니를 좋아했고 그가 저를 제일 귀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네가 대단한 정치나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한 또래는 있어야 한단다. 어차피 너도 동대륙어를 배우고 싶다 했다며? 자주 대화해 보렴. 내가 보니 썩 괜찮은 품성을 가진 것 같던데.”
“할머니도 오늘 처음 봤잖아요. 그런데 괜찮은지 어떻게 알아요?”
주변의 의자를 끌어다 눈높이를 맞춘 그에게 그의 조모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웃었다. 어쩌면 아직 어린 것을 보는 시선 같기도 했다.
“그야 얼마 안 봤어도 이 나이가 되면 알지. 자세가 곧고, 말할 땐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 하잖니. 쉬워 보이지만 막상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좋은 집안에서 자랐거나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고. 말을 마친 그의 조모는 다시 그의 의중을 묻듯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눈을 마주치다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Espressivo
1
너는 날 차유진이라고 불러도 돼. 동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의 형태를 알게 된 유진은 그에게 뻐기듯 말했다. 차유진과 김래빈. 맞춘 듯 같은 형식이었지만 일부러 지어낸 건 아니었다. 그것도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차유진의 가문은 본래 동대륙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아직도 ‘차’라는 동대륙식 성씨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나 가문의 일원이 동대륙어를 배우는 것이 전통인 점이 그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이들은 그의 가문 일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동대륙인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에겐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평이었다.
‘벌써 몇 대가 지났는데 아직도?’
뭐. 어느 쪽이 진실이든 사교계에서 차 백작가 가문의 이미지와 평판은 대충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글쎄. 그는 진짜 동대륙 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안 닮았는데.”
적막한 서재에는 오로지 그들뿐이어서, 창문도 없이 서가가 벽면을 가득 채운 조용한 공간에서는 작게 말해도 소리가 지나치게 잘 울렸다. 턱을 괸 채 중얼거린 그의 혼잣말에도 팔딱 놀라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김래빈은 토끼 아닌가?’
김래빈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서대륙식 농담을 떠올리던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 늘어뜨리고 분주히 책장을 오가는 등짝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2년이 흘렀다. 그들은 하루하루 자라났다. 서로 다투듯 키가 부쩍 커지다가, 키만 너무 훌쩍 자란 거 아닌가 싶을 때쯤부터는 골격이 잡히며 얼굴이 날카로워지고 몸에 양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로 대놓고 경쟁을 한 적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차유진의 승리였다. 그의 가족은 김래빈을 피후견인이라기보단 반쯤 그의 젖형제처럼 대했기 때문에 먹는 것과 지내는 환경에서 둘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김래빈 역시 많이 자랐다. 운동보다는 연주를 좋아하는 통에 몸은 그 나이 청년치곤 좀 날렵하게 빠진 감이 있어도 반듯하고 곧은 등과 어깨에 딱 맞게 지어진 옷이 제법 근사했다.
“김래빈?”
아직은 좀 낯선 이름의 형태를 그는 입에 담았다. 상대가 책을 팔에 안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품에 안은 책은 표지를 보니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이었다. 그의 여동생인 제시가 저걸 몇 년 전에 뗐더라? 그래도 서대륙어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김래빈에게는 딱 알맞은 책일 것이다.
“뭘 찾아? 책 아직도 찾아?”
그의 앞에도 동화책에 가까운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이쪽은 동대륙어로 된 책이다. 둘은 같은 시간에 같은 교사에게 각각 동대륙어와 서대륙어를 배우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고, 언어만 다를 뿐 익힌 수준만 비교하자면 진도 역시 비슷하니 같이 배우라는 조모의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서로 각자의 언어를 잘 모르니 결국 주고받는 대화는 여전히 그들의 나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니, 필기구 찾아. 너는 아직 더, …기다린, …기다려, 기다려야 한다.”
김래빈 쪽은 유진보다 좀 더 심했다. 그보다 언어를 주변에서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는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단어만 툭툭 던지고 보는 유진과 달리 김래빈은 가급적 모든 말을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니 오래 걸리고 늘지는 않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상대가 좀 답답했다.
“김래빈 느려! 그거 오른쪽 서랍 봐! 그리고 빨리 와!”
아.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유진은 말이 안 통하면 몸을 쓰는 것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래빈은 아니었지만. 시계를 가리킨 뒤 손으로 피아노포르테를 치는 시늉을 하자 상대가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서랍에서 공책과 펜, 잉크를 찾아 들고 온 김래빈이 책상 위에 필기구를 우르르 쏟았다. 성급한 손길이었다.
“미안. 이거 끝나면… 오늘도 피아노포르테, 연주해.”
책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김래빈이 하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집에 와서 김래빈은 언어와 예절, 관습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로 익히게 되었는데, 그가 배우는 모든 것 중 김래빈이 가장 먼저 익힌 것이자 가장 좋아하는 건 피아노포르테였다. 극장 지하의 광경을 잊지 못했던 유진이 그의 부모님에게 건의한 결과였다.
처음 몇 번은 어설프게 한 손으로 멜로디를 짚어내는 데 그쳤던 김래빈은 교습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놀랄 만큼 유려하게 피아노포르테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은 그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연주곡이었지만 가끔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음률이 김래빈의 손끝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나, 악보 만들어.’
서툰 언어를 섞어가며 대화한 결과, 유진은 그게 그가 직접 만들어낸 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대륙 식의 악보를 읽고 쓰는 방법은 인신매매 무리를 따라 돌아다닐 때 만난 집시가 알려주었다고 하고.
집시는 그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영혼을 지켜주었던 건 틀림없다. 피아노포르테를 칠 때의 김래빈은 눈을 빛내거나 뺨을 붉히거나, 아무튼 그걸 정말 좋아한다는 걸 온 얼굴로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주제가 음악이기만 하면 서툰 말로도 자꾸만 말을 걸려 하는 것도 그랬다. 다른 수업에서 보이는 경직된 모습과 비교해 보면 좀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이제 김래빈에게는 차유진이라고 불리는 소년은 그걸 이용했다.
‘이거 먼저 끝내. 피아노 다음.’
그렇다. 그는 과제를 다 끝내면 교습 시간이 아니더라도 피아노포르테가 놓인 방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시간이 줄어들고 마음이 급해지면 김래빈은 문장을 완벽하게 조형하려는 노력을 버리고 더듬더듬 단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늘어나는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진 것도 그쯤이었다.
오늘의 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화책을 지정한 분량만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서로 상대의 언어로 설명해 줄 것. 아마 유진이 꾀를 내지 않았다면 김래빈은 고작 간단한 단어 뜻 하나를 설명해 주는 데에도 문장을 다듬느라 세월아 네월아 고심했으리라.
“나 이제 끝났어!”
거 보라지. 공책 위에 설명을 들어 알게 된 단어의 뜻을 정리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김래빈이 신난 목소리로 외치고는 휙 하고 일어섰다. 방향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피아노룸이다. 김래빈이 그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차유진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널브러진 펜과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 올려둔 뒤 그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진 역시 김래빈이 연주하는 곡이 좋았다. 피아노포르테의 연주 의자 옆자리에 낑겨앉거나, 혹은 조금 떨어진 1인용 소파에 드러눕듯 기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채신머리를 전부 내려놓고 피아노룸에 깔린 러그에 풀썩 주저앉아도 좋다. 피아노포르테에 기대면 김래빈이 연주할 때마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악기가 울렸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외로 꼬면 연주에 열중한 김래빈의 옆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래빈 같이 가!”
아직 환한 빛 아래에서 그를 돌아본 상대가 걸음을 멈추었다. 곧 둘은 나란히 피아노룸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오래 울렸다.
2
시간이 지나며 김래빈은 차씨 가문의 생활에 점점 적응해 갔다. 다만 그 방향은 유진이 기대한 쪽은 아니었다. 서대륙의 사회에 대해 교육받으며 김래빈은 피후견인으로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자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은 그전부터 유진의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많이 했지만 최근엔 그 목표가 부쩍 구체적으로 변했다.
김래빈의 표현에 따르자면(그리고 그가 김래빈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이랬다.
‘금전적인 보답이 어렵다면 명성을 떨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방식으로라도! 원래 교양 있는 귀족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가문의 우아함을 자랑하지 않던가!’
“그래서. 김래빈 내린 결론이 궁정악사 되는 거야?”
“그래! 궁정악사는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고, 내가 궁정악사가 되어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 내면 차 가문 역시 예술적으로 높은 안목을 지녔음이 증명될 테니까.”
흐음. 유진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이 들으면 기특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좀 생각이 달랐다.
“김래빈 지금도 유명해!”
“아니야. 평…, 평론가들이 말했어. 내가 네 가문의 피후견인이니까, 음…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바람에 내 명성은 실제 내 성취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해. 물론 그렇게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그게 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야. 그런데 나는 이왕이면 실력을 …, 선입견 없이 실력만 가지고…, 그 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공정.”
“그래! 공정하게 평가받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오. 그렇게 따지면 궁정악사도 그리 공정하진 않은데…. 네가 궁정악사로 뽑히는 데 우리 가문이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손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려놓으며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응에 김래빈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생겨난 피후견인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가문의 어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음악의 길을 권유한 게 유진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궁정악사가 된다고 하면 네가 제일 반길 줄 알았는데. 나에게 궁정악사가 되라고 제일 먼저 추천해 준 게 차유진, 너였잖아.”
“나, 궁정악사도 될 수 있겠다고 했지, 궁정악사 되라고 하지 않았어.”
음악 시켜봐요. 그렇게 말했던 걸 유진도 기억하고 있기는 했다. 그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그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손 닿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써 빼곡히 채워져 있던 그 악보들. 그걸 보았다면 누구든 그에게 음악을 시키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납치당한 후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수도의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몇 달간 숨어 지내듯 끌려다니면서 악보 읽고 쓰는 법이나 겨우 들었던 주제에, 벽 사이로 울리는 음악을 정확히 훔쳐 듣고 악보로 구현해 내는 능력을 봤다면 그 누구라도.
궁정악사 따위 되지 않아도 지나치게 찬란한 재능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 실속 없는 명예직을 차지하느라 벌어지는 난장판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나 의심 가는 성격으로 궁정악사를 지망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김래빈을 내심 유진의 심복으로 만들길 원했던 그의 할머니도 한두 해 김래빈을 지켜보더니 그건 안 되겠다, 하고 혀를 쯧쯧 찼는걸. 물론 김래빈이 작곡한 곡을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의 할머니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차유진이다.
“김래빈.”
유진은 그에게는 조금 낯선 형태의 이름을, 이제는 친숙하게 입에 담았다. 김래빈은 열심히 살았다. 새로운 말과 예의와 관습과 음악을 죽도록 익혀가면서. 그는 옆에서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단어는 알고 있으되 어색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기가 부끄러워 유독 말이 서툴던 시절부터 몇 문장에 달하는 긴말도 막힘없이 내뱉는 사람이 된 지금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건 미덕이기는 해. 그는 얼핏 냉소적으로 김래빈을 평가했다. 곧이곧대로 감탄하기에 그의 눈에는 김래빈이 조금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은 간혹 가족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그게 왜 가문에게서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나타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김래빈 궁정악사 되는 거 응원 못 해.”
그는 한 번 더 못 박았다.
“그렇다고 이상한 의뢰 받아준다고 밤 지새는 것도 별로야.”
그렇게 고심해서 만들어진 곡에 김래빈의 이름이 아닌 어느 덜떨어진 귀족의 이름이 붙는 건 더 싫었다. 아직도 이 나라에 신기한 게 많은 김래빈은 유진이 그를 어딘가로 데려갈 때마다 시시때때로 영감을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그가 느끼기에 김래빈은 그 곡들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곡을 쓰기를 바랐다.
Vivace. 유진은 악보에 날아갈 듯 갈겨 쓰여 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넌 항상 체력이 넘치는 것처럼 활기차니 너한텐 알레그로보다 비바체가 더 어울려. 김래빈이 진지하게 그에게 설명해 주었던 내용도. 하지만 그 단어는 김래빈에게도 어울리는걸.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눈을 반짝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표정부터 변하고야 마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런 김래빈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궁정 악사 같은, 그가 보기에는 김래빈의 재능을 오히려 가리기만 할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마음은 우정일까? 아직 덜 자란 청년은 슬며시 드는 위기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특유의 낙천성으로 그 껄끄러움을 날려버렸다. 여전히 자신의 책무를 설명하는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얹어 상대가 휘청거릴 때까지 무게를 더해 말을 끊으며 유진은 제 팔 아래로 버둥거리는 체온에 웃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때였다.
3
유진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김래빈과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이든은 백작가의 장남으로서 벌써 후계자 교육을 받느라 바빴고, 김래빈 역시 이든을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아비게일은 김래빈과 수준은 가장 잘 통할 상대였지만(여기서 유진은 잠깐 킬킬 웃었다) 서슴없이 어울리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었다. 게다가 아비게일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로, 혈연도 아닌 연상의 남자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나인 클로이는 얼마 전 결혼을 해서 집을 나갔고.
그러다 보니 김래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유진이었다. 김래빈이 종종 새벽에 소리 없이 복도를 나돌아다니는 걸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그였고.
‘잠이 잘 안 와.’
김래빈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의 시선은 그들의 가족이 화목해 보이거나 서로에게 장난을 걸 때 유독 오래 머물렀으니까. 동대륙어에 가장 능숙해 종종 김래빈과 시간을 보내는 그의 할머니 역시 김래빈이 인신매매로 서대륙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가족이랑 헤어진 상태였던 것 같다고 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그래서 유진은 복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밤이면 저도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야, 하고 생각에 잠긴 어깨를 툭 건드리면 김래빈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곧 미안, 하고 대답해 왔다. 그러면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 같이 가, 하고 그를 이끌었다. 둘은 불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벽난로 앞에 담요를 말고 앉았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밤새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 새벽에 올라온 사용인에게 들키기도 했다. 음악, 가족, 사교계에서 만난 사람들, 서대륙에서의 생활, 동대륙에서의 김래빈. 잘 안 통하는 말로도 이야기할 건 무궁무진했다.
가끔 둘은 유진의 방에 가는 대신 복도를 나돌았다. 등불을 끈 채 복도 창문 너머로 별을 짚어내거나 정원에 앉아 동틀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아침 식탁에서 유진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꾸벅거리고 김래빈이 모든 말에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못마땅하게 고개를 젓는 이든의 손을 그의 할머니가 잡아 만류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단언컨대 김래빈의 가장 친한 친구는 유진이었다. 둘 다 그걸 잘 알았다. 다만 그게 둘이 언제나 잘 지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요 앞에.”
“말도 안 하고? 차유진, 너 가족이 얼마나 걱정할지 생각 안 해?”
김래빈의 서대륙어 실력은 그새 크게 늘었다. 차유진의 동대륙어 실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통한다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창 승마와 사냥에 재미를 붙여 오늘도 훌쩍 말을 타고 친구들과 함께 폴로를 즐기다 돌아온 유진에게 잔소리 폭탄이 떨어졌다.
“호세 씨가 아니까 괜찮아, 바보야.”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호세는 가문의 말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호세 역시 그의 말 없는 잦은 외출을 걱정했다는 건 김래빈에게는 비밀이었다. 아무튼 집에서 한 명만 그의 거취를 알고 있으면 되는 일 아닌가. 김래빈과는 다르게 집 바깥에도 친구가 많았던 유진은 몇 년이 지나도록 서대륙 사회에 서툰 구석이 있는 데다 제가 즐기는 놀이에는 별 흥미가 없으면서 계속 자신만 쫓아다니는 김래빈을 보는 게 요새 여러 의미로 심란했다.
“너도 나가서 사람을 만나. 래빈. 지난번에 내가 살롱 소개해 줬잖아? 친구를 사귀고 놀다 보면 너도 나를 이해할 거야.”
“거기는, 분명 흥미로웠지만, 그치만, 아니…. 물론 네가 추천해 준 대로 학계에 저명한 사람이나 고위 귀족을 만나는 자리도 의미 있는 사교활동이겠지. 하지만 나는 좀 더 음악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
“그게 문제가 돼? 친해지면 돼. 그러면 그들이 다른 자리를 소개해 줄 걸? 네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자리도 분명 어딘가엔 있겠지. 부지런히 나가, 김래빈. 저번에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잖아.”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김래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살짝 주눅 들어있던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유진도 아직 순진했다. 김래빈이 집에서나 제 젖형제 취급이지 밖에 나가면 그저 평민 취급인 걸 아주 모르진 않았다. 그래도 귀족의 피후원자로 살롱에 드나들며 명성과 인기를 얻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김래빈도 곧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김래빈에게 경탄하고 그를 금방 좋아하게 된 것처럼 사람들도 금세 김래빈의 진가를 알아볼 거라고. 아직 조금 서툰 언어와 매너, 사교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성격이 김래빈의 명성과 배경을 질투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비웃음거리가 된 줄은 모르고.
불행하게도 그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사소한 오해가 시작되었다. 왜 아직도 김래빈은 혼자 집에만 있지? 아, 사람들이랑 어울리려는 노력을 안 하는구나. 나한테만 자꾸 말 걸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좀 놀지. 아깝게. 이미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면서.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사실 차유진, 이번에 내가 쓴 곡이 있는데….”
“됐어. 김래빈. 나 씻을 거야.”
변명하자면, 유진은 정말로 피곤했다. 땀도 많이 났고, 그래서 씻고 싶었다. 김래빈이 하는 말들은 지금 당장 그를 붙들고 해야 할 만큼 급박한 말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붙잡고 계속 뭐라 말을 걸어오는 김래빈의 팔을 대충 밀어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넌 쉽잖아!”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김래빈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넌 몰라. 넌 가족도 있고, 신분도 높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너 좋아하잖아. 어디서나 환영받고! 난, 난 너랑 달라!”
반박하려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래빈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광경은 아니다. 김래빈은 자주 울었다. 복도에서도 몇 번을 봤다. 하지만 대개는 그냥 눈물을 찔끔 흘리는 정도였고 혼자 손등으로 슥 문지르면 금세 사라질 만큼 짧게 울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말 그대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끅끅하고 울음을 참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너 가면 난 혼자란 말이야….”
그 말에 유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아까와 정반대 방향으로.
여전히 유진은 김래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지. 머리로, 상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감은 잘 모르겠다. 유진은 아직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본 적도, 혼자가 되어 본 적도 없었다. 왜 그의 가족은 김래빈의 가족이 될 수 없는지, 왜 김래빈은 그를 찾는 사교계 사람들과 그냥 가볍게 어울리지 못하는 건지, 왜 그 와중에도 자신만은 예외라고 말하는 건지, 그에게 자신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왜 자꾸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질문들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유진은 김래빈을 끌어안았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뿌리치고 싶은 것처럼 몸을 비틀었지만 손아귀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팔을 내려치는 손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공감할 수 없어도 유진은 그가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귀찮고 가끔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그는 김래빈이 홀로 그려냈던 오페라극장 지하실의 수많은 악보를 기억한다. 재능에 압도당했던 감정을 걷어내고 나면 벽 너머 들려오는 희미한 세계를 향해 겁먹고 외로운 누군가가 제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말을 건 흔적이 보였다.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세계에서 단 한 명, 그 광경의 유일한 목격자인 차유진은 김래빈의 슬픔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김래빈, 울지 마.”
그의 어깨로 뜨듯미지근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대륙어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도. 반쯤 울음에 먹힌 목소리에 빠른 속삭임이라 무어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보고 싶다는 말이 섞여 있는 건 알았다. 싫다는 투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상대의 등을 도닥여주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젖은 뺨을 문질렀다. 눈물이 잔뜩 묻어나와 땀에 젖었던 손을 다시 적셨다. 시선이 마주쳤다. 붉어진 김래빈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인 눈물이 점점 커지다 흘러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눈가를 몇 번 닦아내자 김래빈의 눈이 손길을 따라 천천히 감겼다.
“….”
어쩐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유진은 손가락으로 아직도 눈물이 배어 나오는 김래빈의 눈가를 몇 번이고 쓸어주었다.
“차유진. …억지 부려서 미안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래빈에게서 조용한 사과가 흘러나왔다. 그는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팔에 힘을 풀었다.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김래빈이 얼굴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유진은 김래빈의 사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하게 말을 돌렸다.
“어차피 땀이나 눈물이나 비슷하잖아. 나는 이미 땀에 젖어있었으니까 전혀 문제없어.”
노력이 통했는지 김래빈이 소리죽여 웃었다. 한바탕 쏟아낸 상대는 훨씬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둘은 집으로 돌아갔다. 상대가 머쓱해하는 것 같아서 유진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김래빈 역시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지 그에게 꺼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속에서 차유진은 우는 김래빈에게 키스했다. 느껴질 리 없는 짠맛이 입안에 오래 감돌았다.
Tempostoso
1
놀랍게도 그의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김래빈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까지를 통틀어 그의 집에서 지내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눈치가 없는 축에 속하던 그 김래빈이.
“차유진. 너 왜 자꾸 나를 피해?”
김래빈이 자주 다니던 길을 피해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려던 유진은 제가 나가야 할 길을 턱 막고 있는 상대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미간의 찌푸림 정도를 보아하니 한두 마디 정도로는 절대 납득 안 할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로 김래빈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내가 요새 꿈에서 널 좀 난폭하게 다루는데 널 보면 가끔 현실에서도 똑같이 시도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거든. 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겠는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차유진 너 미쳤어? 하고 물어볼 게 뻔했다. 미쳤냐고 묻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혹여라도 고민 상담 역할에 심취한 김래빈이 ‘나를 난폭하게 다룬다’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라며 근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라도 하면, 정말로 그보다 불미스러울 일이 없었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유진은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김래빈의 양어깨를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김래빈. 지금 당장 설명할 수 없지만 절대로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냐. 넌 나를 믿어야 해.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니까.”
이어 그는 김래빈이 그를 더 붙잡기 전에 도망갔다. 뒤에서 언뜻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약 김래빈이 그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면 그의 상상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될 거고, 김래빈이 그와 같은 감정이라면… 더 위험했다.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는 게 예전처럼 징역형이 내려지는 죄는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사교계에선 매장되기 충분한 사유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진은 가끔 김래빈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친애 빼고 가족 빼고 그렇고 그런 의미로. 나르시시즘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변명 같지만, 김래빈이 자꾸 사람이 의심하게끔 굴었다.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가 김래빈에게 특별한 것처럼 굴질 않나, 사람을 자꾸 묘하게 바라보질 않나. 차유진 네가 생각났다며 곡을 들고 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그런가?’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문은 어쨌든 백작가였으니 후원을 원하는 예술가들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만날 만큼 만나봤다. 예비 후원자들에게 아첨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소재로 지은 시나 노래, 그를 그린 초상화를 들고 오는 예술가들도 적잖이 보았지만, 그 누구도 김래빈만큼 순수하고 열렬하게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나서 썼다는 곡만 몇 곡이냐고….’
게다가 그것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김래빈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꾸 상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키는 그와 비슷한 주제에 이상하게 허술한 면이 있어서 그대로 밀어붙이면 틈을 내줄 것 같이 무방비하니까. 그를 붙잡아서 벽으로 밀어붙이면 곤란해하는 얼굴로 허둥지둥하면서도 결국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할 거고….
“아아악!!”
유진은 허공에 고함을 질렀다. 요새는 전부 이런 식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 상상이 진행되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목적지도 없이, 그는 일단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생각을 날려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말을 달리다 슬그머니 집으로 기어들어 온 유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여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는 그의 손위 형제였다. 그는 유진을 보더니 양팔을 벌려 환대의 자세를 했다. 비록 그 입에서 나오는 건 비아냥거림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이라도.
“우리 집 탕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돌아오셨군.”
무언가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얌전히 결혼할 상대를 찾아 사교계에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와락 끌어안은 이든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유진은 떨떠름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형도 아직 결혼을 안 했으면서 나한테 그러기야?”
“결혼을 안 했으니 더 이러는 거지.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유진?”
“내가 보기에는 형이 딱 적임자인데. 이제라도 결혼 시장에 나가 말 잘 듣는 후계자 노릇을 해보는 게 어때?”
토닥토닥.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그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더욱 거세졌다. 마지막으로 그를 짓누르듯 꾸아악 팔에 힘을 주었다가 산뜻하게 물러난 이든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이제 적당히 해. 누굴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꼴사납게 구는 것 좀 그만하고.”
“…뭐?”
“오. 유진. 너 완전 티나. 설마 다들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난 그래서 네가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릴 적임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지.”
이든은 한숨을 쉬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더니 그의 등을 떠밀어 계단 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래빈한테도 좀 가 봐. 요새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얼마나 격정에 차 있던지, 그의 방을 담당하는 메이드가 이러다 비싼 악기 부서지겠다고 걱정하니까.”
유진은 형 앞에서 겨우 욕설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피하는 걸 왜 그렇게까지 심란해하냐고. 이러니까 사람이 오해하는 거 아니야.
마음 같아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회피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큰형은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자신이 알아차린 걸 필요하다면 식구들에게 냅다 퍼트릴 수 있는 추진력도 상당했다. 유진과 래빈의 사이를 중재하려는 차씨 가문 긴급회의 같은 걸 열고 싶지 않다면 일단 가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미적미적 층계를 올라갔다.
똑똑.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문을 열었다. 소파에 반쯤 기대 누워있던 김래빈이 고개만 돌려 그를 보더니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상대를 대충 손을 저어 말린 유진은 의자를 끌어다 소파 가까이 앉았다.
“아까까지만 하도 나를 피하더니.”
팔로 눈을 가린 김래빈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김래빈이 피아노 부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서 와 봤어.”
“그 정도는 아니거든, 바보야.”
영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팔로 가려진 김래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 길게 숨을 내쉰 김래빈이 팔을 내리더니 몸을 일으켜 소파에 반듯이 앉았다.
“이럴 거면 내가 궁정악사 되겠다고 할 때 그냥 놔두지.”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한 거잖아. 아니야? 궁정악사가 되면 적어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묵을 수 있으니까, 그편이 너에게도 좋았을 거잖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도 돼. 궁정악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예를 들어서 다른 후원자를 찾는다던가….”
그건 싫어. 고민하기도 전에 먼저 입에서 속마음이 튀어 나가버렸다. 제법 단호한 유진의 목소리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는 김래빈을 앞에 두고 그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곧 다물었다. 무언가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난처하게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김래빈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차유진. 지금 떼쓸 때가 아니잖아! 대체 넌 뭘 원하는 거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김래빈. 나는 겁쟁이 아니야.”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정말이었다. 김래빈과 그의 마음이 서로 같다면 사교계에서의 추방 따위 두렵지 않았다. 이제까지 귀족으로 살아오기는 했지만 유진은 뭘 해서 먹고살아도 썩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이미 상속받은 재산도 제법 있는 편이었고.
하지만. 유진은 그가 보았던 김래빈의 찬란한 재능을 떠올렸다. 아무리 부르주아가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이라고 해도 여전히 예술을 후원하는 가장 큰 손은 귀족이었다. 특히 투자처로 주목받는 미술이나 성적인 욕망이 내포된 무용 같은 분야와는 달리 음악은 더 그랬다. 저와 함께 사교계를 벗어난다면 김래빈이 생전에 영광을 누리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게 너무 아까웠다. 그것만 떠올리면 김래빈이 절 좋아하는 게 정말 저의 착각이어도 좋았다.
“나는 김래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은, 내가 너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앞으로 행복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유진은 제 생각을 꿀꺽 삼켰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너도, 나도.”
지금은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는 인간의 회복력을 믿었으니까. 유진은 쉬어, 하고 김래빈의 어깨를 한번 짚었다가 손을 떼었다. 그걸로 대화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김래빈이 그의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
“잠깐 기다려, 차유진. 너는 자꾸 내가 너랑 있으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는 너랑 있으면, …모르겠어. 네가 말하는 행복이란 게 대체 뭔지. 그래도 너랑 있어야 한다는 건 알아. 그래야 내가 충만해진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네 말은 틀렸어, 차유진. 자꾸 나를 피하지 마. 네가 나를 피하면,”
어중간하게 붙잡혔던 몸을 다시 돌리는 데 1초. 무너트리듯 소파에 무릎을 대고 절 간절히 바라보는 그 얼굴을 붙들어 입을 맞추는 데 또다시 1초. 밀어내면 내가 이제까지 널 피했던 건 빌어먹을 이것 때문이었다고 김래빈에게 고백하고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날 생각이었다. 대신 그의 팔을 도리어 더 바투 쥐는 손길이 돌아왔다. 이내 등에 팔이 감겼다. 그를 끌어당기는 힘에 유진은 저항하지 않았다.
“우리 도망가자.”
젖은 입술과 꼭 그만큼 젖은 눈동자 앞에서 유진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대사를 기어이 읊고야 말았다. 그를 올려다보던 김래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해, 차유진.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답이었다.
2
유진 이그나시오 차가 사교계에서 사라졌다.
그 일은 한동안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결혼 적령기의 딸을 가진 부모 중 유진을 신랑감으로 눈여겨 본 사람이 제법 있었기에 더 그랬다. 김래빈은 본래도 사교계에 그리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던 자는 아니어서, 그도 함께 사교계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보다 적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 짐작한 얼굴을 했지만 그들이 쉬쉬하는 사이 사교계에서는 금방 다른 누군가의 소문이 새로운 이슈로 부상했다. 원래도 스캔들이 그렇게 오래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잊혔다. 간혹 차씨 가문의 사람들이 지방 별장에 보낸다며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돌아가기도 하고, 익명으로 발표한 누군가의 곡이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어 모두가 작곡가를 찾았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등의 소소한 일들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차 가문 영지의 외곽,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적당한 크기의 저택에서는 오래도록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몇 없는 이웃은 저택에 사는 사람을 궁금해했지만, 저택의 주인은 끝까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기도 전 평범한 농민들은 저기 또 어떤 괴짜가 왔나보다, 하고 결론을 내린 채 그들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그 저택 안에서의 모든 사랑과 추억은 담장을 넘는 일 없이 둘만의 것으로 남았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결국 추측으로 끝난다. 그래도 끝내 정답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