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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uet


    Duet

    Un poco 조금씩

    Espressivo 감정을 담아서

    Tempostoso 격렬하게


    Un poco

    1

      김래빈은 수도 제일의 오페라극장에서 발견되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닌데 발견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고 회의감을 표시하긴 했지만, 오페라극장이라는 장소가 퍽 김래빈과 어울린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었다.

    그곳은 명성만큼이나 유서 깊고 오래된 극장이었는데, 내부는 높아지는 명성에 맞추어 몇 번이고 화려하게 단장했어도 건물을 이루는 골격과 구조는 옛날 방식 그대로였다. 어느 순간 극장주는 극장이 처음 세워졌을 때의 불완전한 구조와 설계 탓에 만들어진 알 수 없는 공간들을 벽 속으로 감추기를 선택했고, 그렇게 화려한 벽과 등불 사이로 비밀스러운 틈새가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런 공간은 대개 철 지난 무대의상과 무대 장치가 보관되거나, 아니면 그 무대 장치를 움직이는 기계들이 설치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기계장치들을 움직이고 배우를 때맞춰 무대로 올리는 여러 관계자가 비밀스럽게 오가는 통로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김래빈이 숨어있던, 혹은 갇혀있던 곳은 그런 ‘널리 알려진’ 공간이 아니었다. 약간의 공간이 있는 복도나 방이 전부인 대부분의 틈과 달리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르는 좁은 계단과 길들로 이어지는, 관리인조차 왕왕 길을 잃는 그런 아주 오래되고 깊숙한 틈 어딘가. 고작 벽에서 새어 나오는 흐릿한 실내의 빛과 흘러들어오는 미미한 달빛만이 내부를 비추는 곳.

    차유진이 처음 김래빈을 마주친 건 오페라극장의 숨겨진 지하실이었다.

    세상에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꼭 하고야 마는 성미를 가진 사람이 있다. 열다섯 살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 백작가 차씨가문의 차남인 그가 그랬다.

    부모를 따라 극장에 놀러 왔던 그 소년은 다른 또래들과 얌전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좀 지겨웠다. 그의 지위며 외모는 다른 이들에게 선망을 사기 좋았기에 어릴 적에는 제게 쏠리는 시선에 좀 우쭐할 때도 있었지만, 계속 우쭐함에 빠져 있기에 유진은 너무 영리한 소년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관심에는 다정한 호의만큼이나 껄끄러운 열광과 삐죽삐죽한 적의도 같이 섞여 있다는 걸 금세 깨달았고 그걸 예쁘게 포장해 모르는 척 주고받는 대화에도 신물이 났다.

    그는 부모가 어느 저명한 저술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조용히 옆으로 빠져나왔다. 휘황찬란한 촛대가 기둥마다 달린 벽면을 따라 걷다 그는 극장의 ‘그 틈’을 찾아냈다. 벽 사이에 살짝 가려진 그 틈 앞에는 혹여나 눈썰미 좋은 누군가가 그 사이로 들어가 사고 나지 않길 바랐던 극장 관리인이 세운 출입 금지 줄이 쳐져 있었지만, 호기심이 인 유진은 거뜬히 쳐진 줄을 넘어 그 틈새로 들어갔다.

    틈 안은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평범했다. 어두컴컴한 데다 먼지 냄새가 좀 났지만 뼈가 굴러다니거나 쥐며 벌레 같은 것들이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유진은 뒤를 한번 흘끔 돌아보았다가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불빛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만 탐험하다가 돌아가면 엄마도 눈치 못 챌거야.’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어두워졌다. 유진은 처음에는 그냥 걷다가, 다음에는 발밑을 보며 걷다가, 이후로는 바닥조차 잘 보이지 않아서 손을 뻗어 벽면을 더듬어가며 걸었다. 몇 번인가는 넘어질 뻔했고 몇 번인가는 건물이 울리는 것 같은 이상한 삐걱대는 소리와 바람 소리에 놀라 돌아갈 뻔했지만, 그는 꿋꿋이 걸음을 옮겼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기라도 했으면 좀 망설이다가 돌아갈 것을. 하나로 쭉 뻗은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고 싶다는 이상한 오기가 그를 계속 걷게 했다. 중간중간 건물 외벽의 환기구로 들어오는 빛이 통로를 그나마 걸을 만한 곳으로 만들어준 것도 그의 고집에 한몫했다.

    몇 번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을까. 그 길의 끝에서 그는 기묘한 문을 발견했다. 온통 녹슬고 심지어 이끼까지 끼어있는 문이었다. 유진은 문손잡이를 잡아당겨 보았다. 벽에 꽉 끼인 듯 한참을 잡아당겨도 열리지 않던 문은, 그가 한 다리까지 들어 벽을 지지대 삼아 온몸으로 매달리고 나서야 조금씩 삐걱거리며 열렸다. 조심스럽게 들어선 그 안에서 유진이 마주한 건 어둡게 빛나는 눈 한 쌍이었다.

    “으아아악!”

    “으아아아아악!!!!”

    그는 소리를 치며 뒷걸음치다가 제가 연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뒤늦게야 상대가 내지른 비명을 깨달았다. 짐승 소리가 아니다. 그는 그제야 제가 마주친 것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의 몸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더 넓게 열렸다. 문을 통해 들어온 희미한 빛줄기를 통해 그는 상대가 그만큼이나 겁먹은 채 저만치 물러나 있으며, 어쩌면 그만큼 어린 소년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넌 누구야?!?”

    그래도 아직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그는 빽 소리쳤다. 상대가 무어라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서 흘러나온 소리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유진은 미심쩍은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다.

    ‘동대륙 사람인가?’

    그는 용기 내어 한 걸음 다가섰다. 반대로 소년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애초에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인지라 상대는 금방 반대편 창살에 걸음이 막혔다. 창살은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있는 모양인지 소년이 여러 번 흔들어도 열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선 채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상대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왔다. 다 낡은 옷, 그 사이로 보이는 파리하게 질린 피부와 마른 몸. 삭은 나뭇가지로 보이는 막대기를 불안정하게 그를 겨누는 방향으로 쥐고 떠는 모습을 보고서야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너 진짜 동대륙 출신이야?”

    이번에는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잔뜩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호자도 없이 덩그러니 놓인 소년, 그다지 잘 돌보아진 것 같지 않은 상태, 무엇보다도 이 대륙에서는 이국적인 외모에 아마도 타 대륙 출신. 유진은 서서히 그가 보고 있는 게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인신매매가 아직도 있단 말이야? 진짜로?’

    다시 말하지만, 유진 이그나시오 차는 아직 열다섯 살이었다. 자신이 범죄 현장을 발견한 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흥분하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머리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인신매매를 발견한 거지? 이런 건 어디에 말해야 하더라? 경찰? 부모님? 당장 누군가를 불러와야 하나? 그럼 쟤는 어떡해? 돌아갈 수는 있는 건가? 근데 나라면 진작 탈출했을 텐데 왜 계속 여기 있었지? 열기가 좀 힘들어서 그렇지 문이 잠겨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부랑자인 건가? 고아? 말도 안 돼. 동대륙 애가 혼자서 대륙을 건넜다고? ’

    그는 상대를 다시 확인했다. 소년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 그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제가 들어온 방향을 재빨리 돌아보았다. 그러자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들어왔던 문은 안에서 보면 마치 벽처럼 교묘하게 위장되어 문인 줄 알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래서 몰랐구나.’

    상황을 이해하자 조금 머리가 식었다. 밖에서 잠긴 창살, 그리고 숨겨져 있어 나갈 수 없는 문.

    그러니까 눈앞의 상대는 진짜 갇혀있던 사람, 즉 피해자다. 인신매매에 당했다면 아마도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먼 거리를 끌려왔겠지.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인신매매단이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잔뜩 위축된 채로 지냈을 게 분명한데 갑자기 문이라고 생각도 못 했을 곳에서 누군가가 들어왔으니, 경계할 만도 했다.

    “괜찮아. 저기, 좀 진정해 봐!”

    그는 보다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으나 상대는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다. 여전히 나뭇가지를 다부지게 쥔 채 얼굴에 잔뜩 날이 서 있었다. 그는 양손을 들어 해칠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한 발짝 물러설 때마다 천천히 결심이 섰다. 뒷수습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대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야겠다고.

    “나랑 같이 가.”

    못 알아듣는 건 알았다. 그래서 문을 향해 손짓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왔던 곳까지 물러서서 유진은 문을 좀 더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만약 유진이 연 문 사이로 흘러들어온 빛과 우연히 구름을 벗어난 달빛이 그 공간을 온전히 채우지 않았더라면, 둘의 이야기는 평범하게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일어났고 그의 눈앞에는 그의 말문을 막히게 한 광경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작은 돌로 긁어서 하얗게 일어난 자국이, 혹은 삭은 나뭇가지로 그어서 표시한 것처럼 얼룩덜룩한 검댕이 그 작은 곳을 완전히 채우고 있었다. 비뚤비뚤하고 흐릿할지언정 창살문을 제외한 사방의 벽과 바닥까지 온통 음악이었다. 그 어두운 곳에서 애써 그렸을 오선지와 음표가 쉼 없이 이어진 그 광경을 보다가 유진은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곳마저도 악보였다. 그의 눈이 저도 모르게 음표들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건 얼마 전에 공연한 오페라의 아리아 한 구절, 저건 얼마 전에 발표했던 어느 연주가의 피아노 연주곡. 극장을 드나들며 익숙해졌던 음률이 아주 어설프고 거친 솜씨로 그 공간에 구현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매섭게 치켜세운 시선이 그가 밟고 있는 악보로 향한 것을 깨달아 음표가 없는 곳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기면 그를 따라온 시선이 이번엔 곧바로 그의 눈을 향했다. 고작 그 한 발짝이 뭐라고. 그사이에 경계가 누그러진 것처럼 순하고 곧은 시선이었다.

    “…가자. 나 따라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이상하게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유진은 다시 재촉했다. 소년은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문을 나서고 몇 발짝 뒤에서 그를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래된 복도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바람 소리, 벽을 비집고 들리는 극장의 소리 속에서도 그 발소리는 유독 잘 들렸다.

    나중에 차유진은 자신이 그때 김래빈에게 압도당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2

      유진이 그 소년을 데리고 다시 극장의 홀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잠시 소동이 일었다. 그럴 만했다. 인신매매 현장이라니. 그리고 그걸 발견한 게 고작 열다섯 살짜리 소년이라니. 

    그에게서 사정을 들은 그의 부모는 극장의 관리인과 길게 대화를 나눴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시선과 웅성거림 속에서 그가 데려온 소년은 불안한 것처럼 주춤대기는 했지만 물러서거나 도망치는 대신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 손힘이 풀어지기 전 돌아온 그의 부모는 일단 집에 가자며 그를 이끌었다. 의외였던 건 그가 데려온 소년이 함께 가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후원의 자격으로 우리가 맡게 될 거야.”

    이유를 묻는 유진에게 그의 부모는 그렇게 대답했다. 네가 데려왔잖니. 책임을 진다는 건 그런 거란다. 그가 아무리 눈치 빠른 소년이어도 덧붙여진 말은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을 읽어내기에는 너무 간결했다. 그는 그 행간을 캐묻는 대신에 그래도 넌 옳은 일을 했다며 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만족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는 마차에서 그의 부모는 소년에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았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그의 저택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대륙의 말을 할 줄 아는 이들이었지만 그마저도 교양 수준의 배움이었고 의사소통을 온전히 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무어라 전달을 한 건지 마차에서 내린 소년은 순순히 사용인을 따라갔다. 동대륙어를 할 줄 아는 교사부터 구해야겠구나. 그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집사를 불렀다.

    “나도 동대륙어 배워도 돼요?”

    그는 충동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별로 상관은 없다만 이제까지 붙여준다는 교사를 귀찮다는 이유로 고사한 건 너라는 걸 기억하렴, 유진.”

    “그때는 할 이유가 없었고 지금은 달라요. 나 마음먹으면 잘할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는 익살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잠시 흘겨본 뒤 이번에는 잘 해보라는 허락을 남기고 그를 방으로 올려보냈다. 저녁 만찬 시간에 맞춰서는 내려오라는 말과 함께.

    시간이 되어 내려왔을 때, 자신이 발견한 소년을 유진은 못 알아볼 뻔했다. 제대로 물에 씻고 옷까지 말끔하게 갈아입은 소년의 모습은 그를 막 마주쳤을 때와는 달리 그의 눈에도 제법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길게 뻗은 눈꼬리가 그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곧게 정면을 향했다. 먼지와 검댕을 씻어낸 깨끗한 뺨에 선명한 점이 하나 박혀있었다. 유진은 실없게도 최근 유행하는 애교점을 떠올리고 말았다. 얼마 전 극장의 프리마돈나는 입꼬리에 붙이고 와 화제가 되었던가.

    “유진, 유진이 주워 왔다며.”

    집안의 막내인 그의 여동생 아비게일이 그에게 몸을 붙이며 소곤거렸다. 그는 다시 소년을 힐끔거렸다. 주워 왔다고 표현하기엔 좀 크지 않나? 그도 또래 중에서는 키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소년 역시 비쩍 마르긴 했어도 눈높이가 유진과 얼추 맞았다. 사람한테 주워 왔다는 표현을 쓰면 안 되지, 맞은편의 이든이 나지막하게 꾸중했다. 입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게 무슨 복화술 수준이었다. 나이 차가 제법 있어 이든을 조금 어려워하는 아비게일은 이크, 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응. 내가 찾은 거 맞아.”

    반면 유진은 굳이 목소리를 줄이지 않았다. 그건 사실이었고, 여동생의 표현에 비하면 그의 말은 점잖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는 아비게일이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저와 그 소년을 번갈아 보는 걸 내버려두고 식탁 의자에 등을 대충 기댔다. 그 방만한 자세는 식탁으로 내려온 그의 어머니가 유진, 하고 나지막하게 그를 부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 그의 조모가 식탁에 착석하고 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별생각 없이 음식을 덜어 입에 넣던 유진은 제게 드문드문 와닿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소년이 절 보고 있었다. 그는 의아해하다가 소년이 슬그머니 들고 있는 식기를 바꾸는 걸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소년은 이곳의 제대로 된 식기 사용법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식탁 위에 올라온 식기가 몇 개던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몸에 익은 바를 따라 자연스럽게 식기를 바꾸고 있었지만, 저 멀리 동대륙에서 온 소년이 그 순서를 알 리 만무했다.

    ‘흠….’

    그의 입꼬리가 장난기로 움찔댔다. 그는 음식이 바뀌기를 기다려 슬쩍 잘못된 식기를 집어 들었다. 다시 소년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유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대를 흘긋 살펴보았다. 그를 따라서 식기를 들었던 상대는 그걸로 음식을 먹어보려다 멈칫하고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것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다시 그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과 유진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웃음기 담고 있는 그의 눈에 상황을 파악한 건지 소년의 눈이 더 커지더니 미간이 슬쩍 우그러졌다.

    소리죽여 키득거리던 유진은 절 보던 조모와 딱 눈이 마주쳤다. 몇 번 헛기침을 한 그는 다시 제대로 된 식기를 들었지만, 그는 어김없이 식사가 끝나고 조모의 부름을 받아 올라가야만 했다.

    “유진.”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은 채 그를 부르는 할머니 앞에서 일단 잘못했어요! 외치고 보려던 유진은 이어지는 조모의 말에 그 타이밍을 삐끗 놓쳐버렸다.

    “그 애가 마음에 드나 보지?”

    엑? 그는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조모는 느리게 의자를 흔들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할머니. 나는 그 애 오늘 처음 봤어요! 마음에 든다 안 든다를 말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그렇지만 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는 처음부터 책잡힐 만할 일을 안 하잖니. 오늘 보니 장난만 잘 치던데.”

    “장난친 건 제가 잘못했어요. 걔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는지는 아직 모르는 거예요.”

    그는 고집스레 덧붙였다. 사실 유진은 그가 벌써 조금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조모의 말이 맞다고 인정할 순 없었다. 여기서 맞다고 하면 마치 제가 상대에게 관심이 있어서 장난을 친 것처럼 되지 않겠는가. 그는 겉으로는 의젓하게 표정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는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앞으로 그 아이는 계속 네 곁에 둘 생각이거든.”

    “…왜요?”

    “들어보니 나이가 너와 동갑이라고 하던데 딱 좋지 않니. 동대륙은 지금 오랜 전쟁 중이라 돌려보내기도 어려우니…. 결국 걘 여기서 살게 될 테고 너도 주변에 둘 사람 하나 있어야지. 귀족 모임이라고만 하면 도망가는 이 말썽꾸러기야. 그래서 네 측근은 대체 어떻게 만들래?”

    “그거 꼭 만들어야 해요?”

    귀찮은데. 투덜거리는 유진을 그의 할머니는 손을 들어 불렀다. 그는 고분고분 의자 바로 앞에 섰다. 그의 할머니가 팔을 뻗어 그의 팔뚝 언저리를 토닥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진은 할머니를 좋아했고 그가 저를 제일 귀여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네가 대단한 정치나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주변에 믿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한 또래는 있어야 한단다. 어차피 너도 동대륙어를 배우고 싶다 했다며? 자주 대화해 보렴. 내가 보니 썩 괜찮은 품성을 가진 것 같던데.”

    “할머니도 오늘 처음 봤잖아요. 그런데 괜찮은지 어떻게 알아요?”

    주변의 의자를 끌어다 눈높이를 맞춘 그에게 그의 조모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웃었다. 어쩌면 아직 어린 것을 보는 시선 같기도 했다.

    “그야 얼마 안 봤어도 이 나이가 되면 알지. 자세가 곧고, 말할 땐 사람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 하잖니. 쉬워 보이지만 막상 여간 어려운 게 아니란다.”

    좋은 집안에서 자랐거나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고. 말을 마친 그의 조모는 다시 그의 의중을 묻듯 유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한참 눈을 마주치다 그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Espressivo

    1

      너는 날 차유진이라고 불러도 돼. 동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의 형태를 알게 된 유진은 그에게 뻐기듯 말했다. 차유진과 김래빈. 맞춘 듯 같은 형식이었지만 일부러 지어낸 건 아니었다. 그것도 분명 그의 이름이었다.

    차유진의 가문은 본래 동대륙으로부터 왔다고 한다. 아직도 ‘차’라는 동대륙식 성씨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나 가문의 일원이 동대륙어를 배우는 것이 전통인 점이 그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이들은 그의 가문 일원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동대륙인의 모습이 남아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에겐 좀 의아하게 느껴지는 평이었다.

    ‘벌써 몇 대가 지났는데 아직도?’

    뭐. 어느 쪽이 진실이든 사교계에서 차 백작가 가문의 이미지와 평판은 대충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글쎄. 그는 진짜 동대륙 출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별로 안 닮았는데.”

    적막한 서재에는 오로지 그들뿐이어서, 창문도 없이 서가가 벽면을 가득 채운 조용한 공간에서는 작게 말해도 소리가 지나치게 잘 울렸다. 턱을 괸 채 중얼거린 그의 혼잣말에도 팔딱 놀라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김래빈은 토끼 아닌가?’

    김래빈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서대륙식 농담을 떠올리던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 늘어뜨리고 분주히 책장을 오가는 등짝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2년이 흘렀다. 그들은 하루하루 자라났다. 서로 다투듯 키가 부쩍 커지다가, 키만 너무 훌쩍 자란 거 아닌가 싶을 때쯤부터는 골격이 잡히며 얼굴이 날카로워지고 몸에 양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로 대놓고 경쟁을 한 적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차유진의 승리였다. 그의 가족은 김래빈을 피후견인이라기보단 반쯤 그의 젖형제처럼 대했기 때문에 먹는 것과 지내는 환경에서 둘은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김래빈 역시 많이 자랐다. 운동보다는 연주를 좋아하는 통에 몸은 그 나이 청년치곤 좀 날렵하게 빠진 감이 있어도 반듯하고 곧은 등과 어깨에 딱 맞게 지어진 옷이 제법 근사했다.

    “김래빈?”

    아직은 좀 낯선 이름의 형태를 그는 입에 담았다. 상대가 책을 팔에 안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품에 안은 책은 표지를 보니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책이었다. 그의 여동생인 제시가 저걸 몇 년 전에 뗐더라? 그래도 서대륙어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김래빈에게는 딱 알맞은 책일 것이다.

    “뭘 찾아? 책 아직도 찾아?”

    그의 앞에도 동화책에 가까운 책이 한 권 놓여있었다. 이쪽은 동대륙어로 된 책이다. 둘은 같은 시간에 같은 교사에게 각각 동대륙어와 서대륙어를 배우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고, 언어만 다를 뿐 익힌 수준만 비교하자면 진도 역시 비슷하니 같이 배우라는 조모의 뜻이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서로 각자의 언어를 잘 모르니 결국 주고받는 대화는 여전히 그들의 나이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아니, 필기구 찾아. 너는 아직 더, …기다린, …기다려, 기다려야 한다.”

    김래빈 쪽은 유진보다 좀 더 심했다. 그보다 언어를 주변에서 더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그는 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잘 모르겠으면 일단 단어만 툭툭 던지고 보는 유진과 달리 김래빈은 가급적 모든 말을 완전한 문장으로 만들려 했다. 그러니 오래 걸리고 늘지는 않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상대가 좀 답답했다.

    “김래빈 느려! 그거 오른쪽 서랍 봐! 그리고 빨리 와!”

    아. 차이가 하나 더 있다. 유진은 말이 안 통하면 몸을 쓰는 것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래빈은 아니었지만. 시계를 가리킨 뒤 손으로 피아노포르테를 치는 시늉을 하자 상대가 움직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서랍에서 공책과 펜, 잉크를 찾아 들고 온 김래빈이 책상 위에 필기구를 우르르 쏟았다. 성급한 손길이었다.

    “미안. 이거 끝나면… 오늘도 피아노포르테, 연주해.”

    책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김래빈이 하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집에 와서 김래빈은 언어와 예절, 관습을 비롯해 모든 것을 새로 익히게 되었는데, 그가 배우는 모든 것 중 김래빈이 가장 먼저 익힌 것이자 가장 좋아하는 건 피아노포르테였다. 극장 지하의 광경을 잊지 못했던 유진이 그의 부모님에게 건의한 결과였다.

    처음 몇 번은 어설프게 한 손으로 멜로디를 짚어내는 데 그쳤던 김래빈은 교습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놀랄 만큼 유려하게 피아노포르테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은 그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을 정도로 유명한 연주곡이었지만 가끔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음률이 김래빈의 손끝에서 흘러나오기도 했다.

    ‘나, 악보 만들어.’

    서툰 언어를 섞어가며 대화한 결과, 유진은 그게 그가 직접 만들어낸 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대륙 식의 악보를 읽고 쓰는 방법은 인신매매 무리를 따라 돌아다닐 때 만난 집시가 알려주었다고 하고.

    집시는 그를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영혼을 지켜주었던 건 틀림없다. 피아노포르테를 칠 때의 김래빈은 눈을 빛내거나 뺨을 붉히거나, 아무튼 그걸 정말 좋아한다는 걸 온 얼굴로 보여주는 모습이니까. 주제가 음악이기만 하면 서툰 말로도 자꾸만 말을 걸려 하는 것도 그랬다. 다른 수업에서 보이는 경직된 모습과 비교해 보면 좀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유진 이그나시오 차, 이제 김래빈에게는 차유진이라고 불리는 소년은 그걸 이용했다.

    ‘이거 먼저 끝내. 피아노 다음.’

    그렇다. 그는 과제를 다 끝내면 교습 시간이 아니더라도 피아노포르테가 놓인 방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 시간이 줄어들고 마음이 급해지면 김래빈은 문장을 완벽하게 조형하려는 노력을 버리고 더듬더듬 단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늘어나는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진 것도 그쯤이었다.

    오늘의 과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화책을 지정한 분량만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을 때 서로 상대의 언어로 설명해 줄 것. 아마 유진이 꾀를 내지 않았다면 김래빈은 고작 간단한 단어 뜻 하나를 설명해 주는 데에도 문장을 다듬느라 세월아 네월아 고심했으리라.

    “나 이제 끝났어!”

    거 보라지. 공책 위에 설명을 들어 알게 된 단어의 뜻을 정리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김래빈이 신난 목소리로 외치고는 휙 하고 일어섰다. 방향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로, 피아노룸이다. 김래빈이 그쪽으로 향하는 걸 보며 차유진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널브러진 펜과 책을 가지런히 정리해 올려둔 뒤 그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유진 역시 김래빈이 연주하는 곡이 좋았다. 피아노포르테의 연주 의자 옆자리에 낑겨앉거나, 혹은 조금 떨어진 1인용 소파에 드러눕듯 기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채신머리를 전부 내려놓고 피아노룸에 깔린 러그에 풀썩 주저앉아도 좋다. 피아노포르테에 기대면 김래빈이 연주할 때마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악기가 울렸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외로 꼬면 연주에 열중한 김래빈의 옆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김래빈 같이 가!”

    아직 환한 빛 아래에서 그를 돌아본 상대가 걸음을 멈추었다. 곧 둘은 나란히 피아노룸으로 들어갔다. 문 너머로 아름다운 멜로디가 오래 울렸다.

    2

      시간이 지나며 김래빈은 차씨 가문의 생활에 점점 적응해 갔다. 다만 그 방향은 유진이 기대한 쪽은 아니었다. 서대륙의 사회에 대해 교육받으며 김래빈은 피후견인으로서 자신의 입지와 역할을 자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은 그전부터 유진의 귀에 인이 박일 정도로 많이 했지만 최근엔 그 목표가 부쩍 구체적으로 변했다. 

    김래빈의 표현에 따르자면(그리고 그가 김래빈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면) 이랬다.

    ‘금전적인 보답이 어렵다면 명성을 떨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방식으로라도! 원래 교양 있는 귀족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가문의 우아함을 자랑하지 않던가!’

    “그래서. 김래빈 내린 결론이 궁정악사 되는 거야?”

    “그래! 궁정악사는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고, 내가 궁정악사가 되어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 내면 차 가문 역시 예술적으로 높은 안목을 지녔음이 증명될 테니까.

    흐음. 유진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어른들이 들으면 기특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좀 생각이 달랐다.

    “김래빈 지금도 유명해!”

    “아니야. 평…, 평론가들이 말했어. 내가 네 가문의 피후견인이니까, 음… 그게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바람에 내 명성은 실제 내 성취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해. 물론 그렇게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그게 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야. 그런데 나는 이왕이면 실력을 …, 선입견 없이 실력만 가지고…, 그 말은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공정.”

    “그래! 공정하게 평가받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오. 그렇게 따지면 궁정악사도 그리 공정하진 않은데…. 네가 궁정악사로 뽑히는 데 우리 가문이 아무런 영향이 없을까?”

    손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려놓으며 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응에 김래빈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생겨난 피후견인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가문의 어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음악의 길을 권유한 게 유진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궁정악사가 된다고 하면 네가 제일 반길 줄 알았는데. 나에게 궁정악사가 되라고 제일 먼저 추천해 준 게 차유진, 너였잖아.”

    “나, 궁정악사도 될 수 있겠다고 했지, 궁정악사 되라고 하지 않았어.”

    음악 시켜봐요. 그렇게 말했던 걸 유진도 기억하고 있기는 했다. 그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그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손 닿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써 빼곡히 채워져 있던 그 악보들. 그걸 보았다면 누구든 그에게 음악을 시키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납치당한 후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수도의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몇 달간 숨어 지내듯 끌려다니면서 악보 읽고 쓰는 법이나 겨우 들었던 주제에, 벽 사이로 울리는 음악을 정확히 훔쳐 듣고 악보로 구현해 내는 능력을 봤다면 그 누구라도.

    궁정악사 따위 되지 않아도 지나치게 찬란한 재능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 실속 없는 명예직을 차지하느라 벌어지는 난장판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나 의심 가는 성격으로 궁정악사를 지망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김래빈을 내심 유진의 심복으로 만들길 원했던 그의 할머니도 한두 해 김래빈을 지켜보더니 그건 안 되겠다, 하고 혀를 쯧쯧 찼는걸. 물론 김래빈이 작곡한 곡을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의 할머니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차유진이다.

    “김래빈.”

    유진은 그에게는 조금 낯선 형태의 이름을, 이제는 친숙하게 입에 담았다. 김래빈은 열심히 살았다. 새로운 말과 예의와 관습과 음악을 죽도록 익혀가면서. 그는 옆에서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단어는 알고 있으되 어색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기가 부끄러워 유독 말이 서툴던 시절부터 몇 문장에 달하는 긴말도 막힘없이 내뱉는 사람이 된 지금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건 미덕이기는 해. 그는 얼핏 냉소적으로 김래빈을 평가했다. 곧이곧대로 감탄하기에 그의 눈에는 김래빈이 조금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은 간혹 가족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그게 왜 가문에게서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나타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김래빈 궁정악사 되는 거 응원 못 해.”

    그는 한 번 더 못 박았다.

    “그렇다고 이상한 의뢰 받아준다고 밤 지새는 것도 별로야.”

    그렇게 고심해서 만들어진 곡에 김래빈의 이름이 아닌 어느 덜떨어진 귀족의 이름이 붙는 건 더 싫었다. 아직도 이 나라에 신기한 게 많은 김래빈은 유진이 그를 어딘가로 데려갈 때마다 시시때때로 영감을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그가 느끼기에 김래빈은 그 곡들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곡을 쓰기를 바랐다.

    Vivace. 유진은 악보에 날아갈 듯 갈겨 쓰여 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넌 항상 체력이 넘치는 것처럼 활기차니 너한텐 알레그로보다 비바체가 더 어울려. 김래빈이 진지하게 그에게 설명해 주었던 내용도. 하지만 그 단어는 김래빈에게도 어울리는걸.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눈을 반짝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표정부터 변하고야 마니까. 그러니까 그는 그런 김래빈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궁정 악사 같은, 그가 보기에는 김래빈의 재능을 오히려 가리기만 할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마음은 우정일까? 아직 덜 자란 청년은 슬며시 드는 위기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특유의 낙천성으로 그 껄끄러움을 날려버렸다. 여전히 자신의 책무를 설명하는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얹어 상대가 휘청거릴 때까지 무게를 더해 말을 끊으며 유진은 제 팔 아래로 버둥거리는 체온에 웃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때였다.

    3

      유진에게는 많은 형제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김래빈과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이든은 백작가의 장남으로서 벌써 후계자 교육을 받느라 바빴고, 김래빈 역시 이든을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아비게일은 김래빈과 수준은 가장 잘 통할 상대였지만(여기서 유진은 잠깐 킬킬 웃었다) 서슴없이 어울리기에는 나이 차이가 좀 있었다. 게다가 아비게일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로, 혈연도 아닌 연상의 남자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누나인 클로이는 얼마 전 결혼을 해서 집을 나갔고.

    그러다 보니 김래빈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유진이었다. 김래빈이 종종 새벽에 소리 없이 복도를 나돌아다니는 걸 가족 중에서 가장 먼저 눈치챈 것도 그였고.

    ‘잠이 잘 안 와.’

    김래빈은 그렇게만 대답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의 시선은 그들의 가족이 화목해 보이거나 서로에게 장난을 걸 때 유독 오래 머물렀으니까. 동대륙어에 가장 능숙해 종종 김래빈과 시간을 보내는 그의 할머니 역시 김래빈이 인신매매로 서대륙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이미 가족이랑 헤어진 상태였던 것 같다고 그에게 넌지시 언질을 주었다.

    그래서 유진은 복도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밤이면 저도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야, 하고 생각에 잠긴 어깨를 툭 건드리면 김래빈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가 곧 미안, 하고 대답해 왔다. 그러면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방 같이 가, 하고 그를 이끌었다. 둘은 불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벽난로 앞에 담요를 말고 앉았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지기도 하고, 밤새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다 새벽에 올라온 사용인에게 들키기도 했다. 음악, 가족, 사교계에서 만난 사람들, 서대륙에서의 생활, 동대륙에서의 김래빈. 잘 안 통하는 말로도 이야기할 건 무궁무진했다.

    가끔 둘은 유진의 방에 가는 대신 복도를 나돌았다. 등불을 끈 채 복도 창문 너머로 별을 짚어내거나 정원에 앉아 동틀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아침 식탁에서 유진이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꾸벅거리고 김래빈이 모든 말에 한 박자 느리게 반응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못마땅하게 고개를 젓는 이든의 손을 그의 할머니가 잡아 만류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단언컨대 김래빈의 가장 친한 친구는 유진이었다. 둘 다 그걸 잘 알았다. 다만 그게 둘이 언제나 잘 지냈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요 앞에.”

    “말도 안 하고? 차유진, 너 가족이 얼마나 걱정할지 생각 안 해?”

    김래빈의 서대륙어 실력은 그새 크게 늘었다. 차유진의 동대륙어 실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화가 통한다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었다. 한창 승마와 사냥에 재미를 붙여 오늘도 훌쩍 말을 타고 친구들과 함께 폴로를 즐기다 돌아온 유진에게 잔소리 폭탄이 떨어졌다.

    “호세 씨가 아니까 괜찮아, 바보야.”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호세는 가문의 말을 돌보는 사람이었다. 호세 역시 그의 말 없는 잦은 외출을 걱정했다는 건 김래빈에게는 비밀이었다. 아무튼 집에서 한 명만 그의 거취를 알고 있으면 되는 일 아닌가. 김래빈과는 다르게 집 바깥에도 친구가 많았던 유진은 몇 년이 지나도록 서대륙 사회에 서툰 구석이 있는 데다 제가 즐기는 놀이에는 별 흥미가 없으면서 계속 자신만 쫓아다니는 김래빈을 보는 게 요새 여러 의미로 심란했다.

    “너도 나가서 사람을 만나. 래빈. 지난번에 내가 살롱 소개해 줬잖아? 친구를 사귀고 놀다 보면 너도 나를 이해할 거야.”

    “거기는, 분명 흥미로웠지만, 그치만, 아니…. 물론 네가 추천해 준 대로 학계에 저명한 사람이나 고위 귀족을 만나는 자리도 의미 있는 사교활동이겠지. 하지만 나는 좀 더 음악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

    “그게 문제가 돼? 친해지면 돼. 그러면 그들이 다른 자리를 소개해 줄 걸? 네가 좋아하는 음악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자리도 분명 어딘가엔 있겠지. 부지런히 나가, 김래빈. 저번에도 초대에 응하지 않았잖아.”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김래빈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살짝 주눅 들어있던 걸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어쩌면 유진도 아직 순진했다. 김래빈이 집에서나 제 젖형제 취급이지 밖에 나가면 그저 평민 취급인 걸 아주 모르진 않았다. 그래도 귀족의 피후원자로 살롱에 드나들며 명성과 인기를 얻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김래빈도 곧 그럴 거라고만 생각했다. 자신이 김래빈에게 경탄하고 그를 금방 좋아하게 된 것처럼 사람들도 금세 김래빈의 진가를 알아볼 거라고. 아직 조금 서툰 언어와 매너, 사교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성격이 김래빈의 명성과 배경을 질투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일종의 비웃음거리가 된 줄은 모르고.

    불행하게도 그 굳건한 믿음으로부터 사소한 오해가 시작되었다. 왜 아직도 김래빈은 혼자 집에만 있지? 아, 사람들이랑 어울리려는 노력을 안 하는구나. 나한테만 자꾸 말 걸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좀 놀지. 아깝게. 이미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면서.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사실 차유진, 이번에 내가 쓴 곡이 있는데….”

    “됐어. 김래빈. 나 씻을 거야.”

    변명하자면, 유진은 정말로 피곤했다. 땀도 많이 났고, 그래서 씻고 싶었다. 김래빈이 하는 말들은 지금 당장 그를 붙들고 해야 할 만큼 급박한 말처럼 여겨지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붙잡고 계속 뭐라 말을 걸어오는 김래빈의 팔을 대충 밀어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몇 걸음 걸었을까. 뒤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넌 쉽잖아!”

    유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화가 난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김래빈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넌 몰라. 넌 가족도 있고, 신분도 높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너 좋아하잖아. 어디서나 환영받고! 난, 난 너랑 달라!”

    반박하려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러지 않았다. 어느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김래빈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낯선 광경은 아니다. 김래빈은 자주 울었다. 복도에서도 몇 번을 봤다. 하지만 대개는 그냥 눈물을 찔끔 흘리는 정도였고 혼자 손등으로 슥 문지르면 금세 사라질 만큼 짧게 울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말 그대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끅끅하고 울음을 참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너 가면 난 혼자란 말이야….”

    그 말에 유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아까와 정반대 방향으로.

    여전히 유진은 김래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지. 머리로, 상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감은 잘 모르겠다. 유진은 아직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본 적도, 혼자가 되어 본 적도 없었다. 왜 그의 가족은 김래빈의 가족이 될 수 없는지, 왜 김래빈은 그를 찾는 사교계 사람들과 그냥 가볍게 어울리지 못하는 건지, 왜 그 와중에도 자신만은 예외라고 말하는 건지, 그에게 자신은 대체 어떤 의미인지. 왜 자꾸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지.

    질문들이 흘러넘쳤다. 그래도 유진은 김래빈을 끌어안았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뿌리치고 싶은 것처럼 몸을 비틀었지만 손아귀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팔을 내려치는 손길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도, 공감할 수 없어도 유진은 그가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가끔은 귀찮고 가끔은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그는 김래빈이 홀로 그려냈던 오페라극장 지하실의 수많은 악보를 기억한다. 재능에 압도당했던 감정을 걷어내고 나면 벽 너머 들려오는 희미한 세계를 향해 겁먹고 외로운 누군가가 제가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말을 건 흔적이 보였다.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세계에서 단 한 명, 그 광경의 유일한 목격자인 차유진은 김래빈의 슬픔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김래빈, 울지 마.”

    그의 어깨로 뜨듯미지근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동대륙어로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도. 반쯤 울음에 먹힌 목소리에 빠른 속삭임이라 무어라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보고 싶다는 말이 섞여 있는 건 알았다. 싫다는 투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상대의 등을 도닥여주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젖은 뺨을 문질렀다. 눈물이 잔뜩 묻어나와 땀에 젖었던 손을 다시 적셨다. 시선이 마주쳤다. 붉어진 김래빈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렇게 고인 눈물이 점점 커지다 흘러내렸다. 그 궤적을 따라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올렸다. 눈가를 몇 번 닦아내자 김래빈의 눈이 손길을 따라 천천히 감겼다.

    “….”

    어쩐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유진은 손가락으로 아직도 눈물이 배어 나오는 김래빈의 눈가를 몇 번이고 쓸어주었다.

    “차유진. …억지 부려서 미안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김래빈에게서 조용한 사과가 흘러나왔다. 그는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팔에 힘을 풀었다.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온 김래빈이 얼굴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유진은 김래빈의 사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엉뚱하게 말을 돌렸다.

    “어차피 땀이나 눈물이나 비슷하잖아. 나는 이미 땀에 젖어있었으니까 전혀 문제없어.”

    노력이 통했는지 김래빈이 소리죽여 웃었다. 한바탕 쏟아낸 상대는 훨씬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둘은 집으로 돌아갔다. 상대가 머쓱해하는 것 같아서 유진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김래빈 역시 자신이 원래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지 그에게 꺼내지 않았다.

    그날 밤 꿈속에서 차유진은 우는 김래빈에게 키스했다. 느껴질 리 없는 짠맛이 입안에 오래 감돌았다.

    Tempostoso

    1

      놀랍게도 그의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김래빈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사용인까지를 통틀어 그의 집에서 지내는 모든 사람 중 가장 눈치가 없는 축에 속하던 그 김래빈이.

    “차유진. 너 왜 자꾸 나를 피해?”

    김래빈이 자주 다니던 길을 피해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가려던 유진은 제가 나가야 할 길을 턱 막고 있는 상대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미간의 찌푸림 정도를 보아하니 한두 마디 정도로는 절대 납득 안 할 얼굴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정말로 김래빈에게 항변하고 싶었다.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내가 요새 꿈에서 널 좀 난폭하게 다루는데 널 보면 가끔 현실에서도 똑같이 시도해 보고 싶은 충동이 들거든. 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으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겠는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차유진 너 미쳤어? 하고 물어볼 게 뻔했다. 미쳤냐고 묻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었다. 혹여라도 고민 상담 역할에 심취한 김래빈이 ‘나를 난폭하게 다룬다’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설명해 보라며 근심 어린 얼굴로 그를 바라보기라도 하면, 정말로 그보다 불미스러울 일이 없었다. 그런 걸 대체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유진은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김래빈의 양어깨를 잡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김래빈. 지금 당장 설명할 수 없지만 절대로 네가 싫어서 그런 건 아냐. 넌 나를 믿어야 해. 이게 다 너를 위해서니까.”

    이어 그는 김래빈이 그를 더 붙잡기 전에 도망갔다. 뒤에서 언뜻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척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만약 김래빈이 그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면 그의 상상은 아주 위험한 발상이 될 거고, 김래빈이 그와 같은 감정이라면… 더 위험했다. 같은 성별을 좋아한다는 게 예전처럼 징역형이 내려지는 죄는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사교계에선 매장되기 충분한 사유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진은 가끔 김래빈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친애 빼고 가족 빼고 그렇고 그런 의미로. 나르시시즘 같은 게 아니라, 정말 변명 같지만, 김래빈이 자꾸 사람이 의심하게끔 굴었다. 같이 살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그가 김래빈에게 특별한 것처럼 굴질 않나, 사람을 자꾸 묘하게 바라보질 않나. 차유진 네가 생각났다며 곡을 들고 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그런가?’

    아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가문은 어쨌든 백작가였으니 후원을 원하는 예술가들이라면 분야를 막론하고 만날 만큼 만나봤다. 예비 후원자들에게 아첨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소재로 지은 시나 노래, 그를 그린 초상화를 들고 오는 예술가들도 적잖이 보았지만, 그 누구도 김래빈만큼 순수하고 열렬하게 그에게 모든 걸 설명하려 드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생각나서 썼다는 곡만 몇 곡이냐고….’

    게다가 그것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김래빈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자꾸 상상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갔다. 키는 그와 비슷한 주제에 이상하게 허술한 면이 있어서 그대로 밀어붙이면 틈을 내줄 것 같이 무방비하니까. 그를 붙잡아서 벽으로 밀어붙이면 곤란해하는 얼굴로 허둥지둥하면서도 결국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지는 못할 거고….

    “아아악!!”

    유진은 허공에 고함을 질렀다. 요새는 전부 이런 식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마구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이상 상상이 진행되기라도 하면 매우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목적지도 없이, 그는 일단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생각을 날려버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말을 달리다 슬그머니 집으로 기어들어 온 유진을 기다리고 있던 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여 회중시계를 내려다보는 그의 손위 형제였다. 그는 유진을 보더니 양팔을 벌려 환대의 자세를 했다. 비록 그 입에서 나오는 건 비아냥거림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이라도.

    “우리 집 탕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내 돌아오셨군.”

    무언가 생산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얌전히 결혼할 상대를 찾아 사교계에 출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와락 끌어안은 이든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유진은 떨떠름하게 눈썹을 늘어뜨렸다.

    “형도 아직 결혼을 안 했으면서 나한테 그러기야?”

    “결혼을 안 했으니 더 이러는 거지.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유진?”

    “내가 보기에는 형이 딱 적임자인데. 이제라도 결혼 시장에 나가 말 잘 듣는 후계자 노릇을 해보는 게 어때?”

    토닥토닥. 대화를 주고받을수록 그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더욱 거세졌다. 마지막으로 그를 짓누르듯 꾸아악 팔에 힘을 주었다가 산뜻하게 물러난 이든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이제 적당히 해. 누굴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꼴사납게 구는 것 좀 그만하고.”

    “…뭐?”

    “오. 유진. 너 완전 티나. 설마 다들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난 그래서 네가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릴 적임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지.”

    이든은 한숨을 쉬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더니 그의 등을 떠밀어 계단 위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래빈한테도 좀 가 봐. 요새 그가 연주하는 곡이 얼마나 격정에 차 있던지, 그의 방을 담당하는 메이드가 이러다 비싼 악기 부서지겠다고 걱정하니까.”

    유진은 형 앞에서 겨우 욕설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피하는 걸 왜 그렇게까지 심란해하냐고. 이러니까 사람이 오해하는 거 아니야.

    마음 같아선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회피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큰형은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자신이 알아차린 걸 필요하다면 식구들에게 냅다 퍼트릴 수 있는 추진력도 상당했다. 유진과 래빈의 사이를 중재하려는 차씨 가문 긴급회의 같은 걸 열고 싶지 않다면 일단 가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는 무거운 걸음으로 미적미적 층계를 올라갔다.

    똑똑. 그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문을 열었다. 소파에 반쯤 기대 누워있던 김래빈이 고개만 돌려 그를 보더니 희미하게 한숨을 쉬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상대를 대충 손을 저어 말린 유진은 의자를 끌어다 소파 가까이 앉았다.

    “아까까지만 하도 나를 피하더니.”

    팔로 눈을 가린 김래빈이 가만히 중얼거렸다.

    “김래빈이 피아노 부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서 와 봤어.”

    “그 정도는 아니거든, 바보야.”

    영 힘없는 목소리였다. 그는 팔로 가려진 김래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어 길게 숨을 내쉰 김래빈이 팔을 내리더니 몸을 일으켜 소파에 반듯이 앉았다.

    “이럴 거면 내가 궁정악사 되겠다고 할 때 그냥 놔두지.”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한 거잖아. 아니야? 궁정악사가 되면 적어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묵을 수 있으니까, 그편이 너에게도 좋았을 거잖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해도 돼. 궁정악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예를 들어서 다른 후원자를 찾는다던가….”

    그건 싫어. 고민하기도 전에 먼저 입에서 속마음이 튀어 나가버렸다. 제법 단호한 유진의 목소리에 놀란 듯 눈을 깜박이는 김래빈을 앞에 두고 그는 잠시 입을 벌렸다가 곧 다물었다. 무언가 더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난처하게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그걸 어떻게 해석한 건지 김래빈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차유진. 지금 떼쓸 때가 아니잖아! 대체 넌 뭘 원하는 거야? 정확히 알려주지 않으면 나는 몰라.”

    “…김래빈. 나는 겁쟁이 아니야.”

    “그게 대체 무슨 뜻이야?”

    정말이었다. 김래빈과 그의 마음이 서로 같다면 사교계에서의 추방 따위 두렵지 않았다. 이제까지 귀족으로 살아오기는 했지만 유진은 뭘 해서 먹고살아도 썩 잘 살 자신이 있었다. 이미 상속받은 재산도 제법 있는 편이었고.
    하지만. 유진은 그가 보았던 김래빈의 찬란한 재능을 떠올렸다. 아무리 부르주아가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이라고 해도 여전히 예술을 후원하는 가장 큰 손은 귀족이었다. 특히 투자처로 주목받는 미술이나 성적인 욕망이 내포된 무용 같은 분야와는 달리 음악은 더 그랬다. 저와 함께 사교계를 벗어난다면 김래빈이 생전에 영광을 누리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게 너무 아까웠다. 그것만 떠올리면 김래빈이 절 좋아하는 게 정말 저의 착각이어도 좋았다.

    “나는 김래빈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 말은, 내가 너랑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앞으로 행복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유진은 제 생각을 꿀꺽 삼켰다.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너도, 나도.”

    지금은 납득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그는 인간의 회복력을 믿었으니까. 유진은 쉬어, 하고 김래빈의 어깨를 한번 짚었다가 손을 떼었다. 그걸로 대화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김래빈이 그의 손목을 붙잡기 전까지.

    “잠깐 기다려, 차유진. 너는 자꾸 내가 너랑 있으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 나는 너랑 있으면, …모르겠어. 네가 말하는 행복이란 게 대체 뭔지. 그래도 너랑 있어야 한다는 건 알아. 그래야 내가 충만해진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네 말은 틀렸어, 차유진. 자꾸 나를 피하지 마. 네가 나를 피하면,”

    어중간하게 붙잡혔던 몸을 다시 돌리는 데 1초. 무너트리듯 소파에 무릎을 대고 절 간절히 바라보는 그 얼굴을 붙들어 입을 맞추는 데 또다시 1초. 밀어내면 내가 이제까지 널 피했던 건 빌어먹을 이것 때문이었다고 김래빈에게 고백하고는 멀리 여행이라도 떠날 생각이었다. 대신 그의 팔을 도리어 더 바투 쥐는 손길이 돌아왔다. 이내 등에 팔이 감겼다. 그를 끌어당기는 힘에 유진은 저항하지 않았다.

    “우리 도망가자.”

    젖은 입술과 꼭 그만큼 젖은 눈동자 앞에서 유진은 세상에서 가장 진부한 대사를 기어이 읊고야 말았다. 그를 올려다보던 김래빈이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해, 차유진.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정답이었다.

    2

      유진 이그나시오 차가 사교계에서 사라졌다. 

    그 일은 한동안 사교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결혼 적령기의 딸을 가진 부모 중 유진을 신랑감으로 눈여겨 본 사람이 제법 있었기에 더 그랬다. 김래빈은 본래도 사교계에 그리 적극적으로 돌아다니던 자는 아니어서, 그도 함께 사교계에서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보다 적었다.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 짐작한 얼굴을 했지만 그들이 쉬쉬하는 사이 사교계에서는 금방 다른 누군가의 소문이 새로운 이슈로 부상했다. 원래도 스캔들이 그렇게 오래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렇게 잊혔다. 간혹 차씨 가문의 사람들이 지방 별장에 보낸다며 이런저런 물건을 사서 돌아가기도 하고, 익명으로 발표한 누군가의 곡이 사교계에서 화제가 되어 모두가 작곡가를 찾았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등의 소소한 일들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차 가문 영지의 외곽,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적당한 크기의 저택에서는 오래도록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몇 없는 이웃은 저택에 사는 사람을 궁금해했지만, 저택의 주인은 끝까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기도 전 평범한 농민들은 저기 또 어떤 괴짜가 왔나보다, 하고 결론을 내린 채 그들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내내 행복했을 것이다. 그 저택 안에서의 모든 사랑과 추억은 담장을 넘는 일 없이 둘만의 것으로 남았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결국 추측으로 끝난다. 그래도 끝내 정답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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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꽃피우는 사흘

    꽃피우는 사흘


    목차

    발단

    1일차

    2일차

    3일차


    발단

    마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분분하다.

    당신이 관료라면 마탑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행정 용어로 쓰일 것이다. 관료들의 손과 손 사이를 넘나드는 서류 위에서 마탑이란 가장 상징적인 그 탑을 포함하여 그 지근거리에 형성된 관계자들의 거주 공간, 시장, 주변의 공업지구와 과수원, 농장을 전부 포괄하는 도시공간을 뜻하는 말이니까.

    만약 당신이 보다 야망 넘치고 고귀한 이들에 속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마탑은 어쩌면 공간보다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지도 모른다. 마탑주를 중심으로 뭉친 마법사들은 정치에 뜻이 있는 이라면 그 누구든 쉬이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세력이며, 권력을 탐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머무는 공간은 실로 중요한 대상이 아니다.

    물론 가장 쉽고 직관적으로 답하려면 당장 손을 들어 각 도시 중앙에 있는 높은 탑을 가리키기만 하면 된다. 이 왕국 사람 대부분은 관료나 권력자만큼 마탑이라는 공간과 그 안의 마법사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마탑과 마법사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멀리서도 눈에 띄는 높은 탑과 그 안에서 마법사들이 일으키는 경이로운 현상을 보며 백성들은 경외와 감탄을 담아 외치는 것이다.

    ‘역시 마탑이야!’

    그럴 만했다. 마탑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경이였다. 하나같이 낡아빠진 그 탑들의 내부 공간은 겉으로만 봐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넓이를 자랑했고 상식을 벗어나게 기상천외한 공간의 배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리적으로는 결코 구현할 수 없는 그 공간감이야말로 마탑이 마법사들의 공간이라는 증거이며, 그러므로 마법사가 아닌 자는 제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천연의 방어막 역할을 했다.

    용의 피를 타고난 차유진에게는 그 모든 것이 별 소용 없는 이야기였지만.

    비행하든 공간이동을 하든 기묘하게 중첩된 공간 속에서 제대로 된 길을 찾을 수 있는 자에게 마탑은 그저 조금 복잡한 놀이터에 가까울 터. 그러니 차유진에게 마탑은 그저 재밌는 공간이었다. 굳이 하나를 더 꼽자면 그가 최근 애착을 품고 있는 인간, 김래빈이 머무르는 공간쯤 되려나?

    “김래빈 뭐해?”

    불쑥, 김래빈의 공간에 차유진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엄밀하게 차유진은 마탑 외부인이니, 원래대로라면 복잡한 허가 절차를 거쳐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김래빈의 공간으로 이동되어야 했다. 하지만 누가 용에게 허가며 안내를 운운하겠는가. 그건 그의 혈통이 반쪽짜리여도 마찬가지였다. 차유진은 제가 용과 같은 형질을 타고났음을 스스로 능력으로 증명한 지 오래다. 게다가 김래빈을 본답시고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상대라면야.

    여하튼 마탑은 예전부터 차유진의 방종한 출입을 스리슬쩍 눈감아주고 있었다. 허가도 안내도 없이 불현듯 쳐들어오는 차유진의 작태엔 김래빈도 이미 익숙해졌다는 뜻이다. 그래도 보통은 말 좀 하고 오라거나 멋대로 들어오지 말라는 잔소리가 안부 인사처럼 붙었는데 오늘은 어째 조용했다.

    그는 안쪽 공간을 기웃거렸다. 김래빈은 서재 안쪽 책상에 거의 구겨지다시피 앉아있었다. 제 용건에만 집중하는 동그란 뒤통수에서 무언가 잘 안 풀리는지 끙끙거리는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흠, 하고 뒷짐을 진 차유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두루마리를 헤치고 그의 뒤까지 다가갔다. 책상 위에 펼쳐진 양피지가 바로 눈에 걸렸다. 그는 그걸 휙 들어 올렸다.

    “김래빈 고민 많아?”

    양피지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몇 개나 중첩된 수식이 그려져 있었다. 졸지에 연구 대상이 사라진 김래빈이 습관적으로 공중에 손을 허우적거려도 차유진은 요리조리 용케도 손을 피해 가며 마법진을 훑어보았다. 잡힐 듯 말듯 약 올리며 제 손을 빠져나가는 양피지 조각에 김래빈이 결국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볼 때까지.

    “차유진 그만해! 나한텐 중요한 연구 자료야!”

    눈 아래에 짙은 다크서클이 선명했다. 차유진은 소리 없이 입술을 모았다. 오. 한 며칠 밤새웠나 본데. 그는 굳이 속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바로 입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김래빈 또 잠 안 잤어? 김래빈 눈 마수보다 빨개!”

    그 말에 김래빈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김래빈을 약 올리듯 팔랑거리던 양피지 조각을 책상에 대충 내려놓았다. 한번 쓱 들여다본 게 끝이지만 그 정도만 훑어봐도 충분했다. 인간의 마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도 모든 마법은 용에게서 비롯된 바, 차유진이 양피지 속 마법진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 없었으니까.

    ‘스스로 빛을 내는 기구?’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이 마법의 상용화에 관심이 많은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만들어왔던 소소한 보조기구와는 달리 이번의 구상은 보다 본격적이다. 아직 완성작이라 부르기엔 한참 남았지마는.

    “김래빈 얼굴 너무 어두컴컴해! 그런 얼굴론 빛나는 마도구 못 만들어!”

    “말장난 하지 마, 차유진. 얼굴빛과 마법의 성취 사이에는 구체적인 연관관계가 없어!”

    김래빈 역시 차유진이 제 마법진을 정확히 해독했다는 데에는 놀라지 않는다. 다만 한층 장난기가 붙은 차유진의 어조에 발끈한 것처럼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게 휘둘러질 일 없는 그 주먹을 키득거리며 지나친 그는 상대의 책상 위를 차지한 책 무더기를 밀어 기어코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냐. 상관있어! 김래빈 잠 못 자면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해! 그러면 좋은 마법진 못 만들어. 지금도 그거 안 완성이야.”

    그럴 땐 미완성이라고 하는 거야. 그의 말에 꼭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도 김래빈은 물끄러미 제가 그리던 마법진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롭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가 은근슬쩍 축 쳐졌다.

    ‘차유진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한눈에 알아본 게 틀림없어.’

    자신은 한마디도 안 했는데 말이다. 게다가 이 마법진의 목적이 빛을 내는 마도구라는 것도 양피지를 단 한 번 흘긋대는 것으로 아주 손쉽게 알아차렸다. 인간이 저 마법 생물과 마법적 성취를 동등하게 논하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는 것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거듭해 실패하다 보면, 사실은 제가 너무 못나서 차유진처럼 쉽게 해내지 못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이 슬그머니 들 때도 있는 것이다. 마치 지금처럼.

    “밤을 새우려고 했던 건 아니야! 이건 마나석을 에너지로 삼는다는 조건과 특정한 밝기의 빛을 만들어낸다는 조건을 결합해 만든, 내 생각으로는 이론상으로 분명 문제없어야 할 마법식이었어. 그렇지만 실제로 조합해 시험해 보았을 땐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가설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마법식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내가 어딘가 실수를 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건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살펴보려다가… 그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잠깐 잊은 것뿐이야.”

    그 눈매만큼 풀죽은 변명이 김래빈에게서 슬그머니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길고 구구절절한 항변에 차유진은 넘어가지 않았다. 코웃음을 치고는 딱 한 마디만 물었다.

    “그래서 어젯밤에 잤어?”

    “…아니.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의로 밤을 새우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뜻인데,”

    “그 전날은?”

    “어… 조금?”

    “그럼 김래빈 안 잔 거 맞잖아.”

    잔 건 잔 거고, 안 잔 건 안 잔 거야. 김래빈 또 쓸데없는 핑계 붙여. 딱 잘라 말한 차유진이 책상에 걸터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 허리를 낮춰 턱을 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얼굴 사이로 대치하듯 시선이 꽤 오래 닿았다. 시선을 먼저 돌린 쪽은 김래빈이었다. 자각 못 한 채로 입술을 두어 번 삐죽인 그는 다시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를 끌어당기며 투덜거렸다.

    “쓸데없는 핑계가 아니라, 너에게는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을 설명하면서 네 염려를 내가 결코 무시하거나 간과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뜻을 표현하려고 했던 거야.”

    “….”

    차유진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김래빈은 옅게 한숨을 쉬곤 펜을 들었다. 마나석으로부터 마법진으로 마력이 전달되는 통로를 따라 증폭의 의미를 담은 마법진을 추가해 볼 생각이었다. 사각사각. 특수한 잉크를 담은 펜촉이 아주 조심스럽게 마법진 위로 도형을 덧붙여갔다.

    언어만으로도 아주 정교하게 마법을 행할 수 있는 용과는 달리 인간은 주문만으로는 마력의 제어가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 그걸 보완하려 만들어낸 게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은 일종의 제어문과 조건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법을 시전할 때 세부적인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은 편리했지만,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혹시 잘못 그리기라도 하면 마력이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하기 일쑤니까. 마도구는 일반적으로 마법을 시전할 때보다 훨씬 많고 섬세한 마법진이 필요해서 아무리 그가 마법진을 자주 그려보았다고 하더라도 할 때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느라 본의 아니게 차유진을 내버려두었던 건 김래빈으로서는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썩 마뜩잖은 얼굴을 한 상대를 그는 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김래빈은 바보야.”

    “뭐?”

    맥락을 알 수 없는 비난이 떨어져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유진은 그를 계속 보고 있었기에 눈이 마주치는 건 금방이었다. 그 눈을 지긋이 들여다보며 차유진은 뚱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김래빈 생각 너무 복잡해. 자기 행동에 자꾸 설명 붙이려고 해. 그거 부끄러워서 그래?”

    “그게 아니라,”

    “그거 나쁜 습관이야. 김래빈 저번에도 그랬어.”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차유진이 냉큼 말꼬리를 낚아챘다. 순간적으로 억울해 말문이 막힌 김래빈이 펜을 쥐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훅 높아진 그의 눈높이를 따라 차유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잉크가 점점이 마법진 위로 튀어 선과 문자를 어그러뜨린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가 언제?”

    “김래빈 저번에 나한테 키스하고 나서도 그랬어! 내가 나 좋아하냐고 물었는데 답 안 하고 딴소리했어!”

    “아니, 그건…!”

    김래빈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차유진이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는 상대에게 쭉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걸터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둥실 띄운 차유진이 도망가지 말라는 듯 그를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팔을 휘두른 김래빈의 손이 책상 위에 쌓여있던 책 무더기를 건드린 건, 그래. 우연이었다. 기울어 쏟아진 책은 실험을 위해 책상 한쪽에 놓여있던 마나석 위로 떨어졌고, 마나석 더미가 우당탕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가 그리다 말던 마법진 위로 정확하게.

    지지직-. 마나석이 닿은 마법진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새어나온 빛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변명을 더 해 보려던 김래빈이 책상을 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보호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강하게 그를 감싸는 팔이 느껴졌다.

    삼 초, 이 초, 일 초.

    쾅 하는 굉음이 마탑을 울렸다.

    1일차

    “그러니까 결론은 둘 다 부주의했다는 거잖아. 뭐. 됐어. 할 일이나 하자고. 마탑주의 이름으로 명하건대, 김래빈과 차유진은 마탑을 훼손한 벌로 사흘 동안 플라멜의 베일을 각자 200뿌리씩 채집해 오도록 해. 그게 내가 내리는 징계야.”

    앞뒤 사정을 들은 마탑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 처리가 된 배낭이 한 개씩 그들에게 날아들었다. 김래빈은 묵묵히 배낭을 받아 들었고 차유진은 다른 걸 하면 안 되냐고 작게 투덜거리다가 김래빈에게 옆구리를 거하게 찔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김래빈과 차유진이 각각 걸었던 보호 마법으로 그들은 마법 폭발 한가운데서도 무사할 수 있었다. 다만 서로가 상대에게만 보호 마법을 걸었던 탓에 김래빈의 연구실은 아주 아작이 나버렸다. 김래빈은 아직 시간을 다루는 마법을 모르니 복구를 할 수 없었고, 차유진의 마법은 마탑을 구성하고 있는 마법과 성격이 달라 섞일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마탑주 앞까지 불려 와야 했다.

    “잘 됐어. 이 기회에 아예 강화도 몇 겹 더 걸자고.”

    “하지만 탑주님. 그건 일반적인 복구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이 필요한데요.”

    마탑주 옆에 서 있던 총무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골치 아픈 얼굴이었다. 마탑이 평소 충분히 돈을 많이 벌어들인다고 해도 마탑의 재정을 책임져야 하는 총무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일이 떨어진 셈이었다. 마탑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자기야, 생각해 봐. 쟤가 아무리 잠재력이 뛰어나도 고작 마탑주 후보일 뿐인데 벌써 연구실을 날려먹었다고. 그러면 마탑주가 정해질 때까지 김래빈이 오늘처럼 방을 날리는 일이 또 생길 가능성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저, 저는 충분히 반성하였으니, 앞으로 절대로 오늘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조심한다면…!”

    “…제로는 아니지요. 탑주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땀을 삐질거리며 넙죽 무릎을 꿇은 김래빈의 말은 마탑주와 총무 그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모양이었다. 턱을 쓰다듬은 총무는 어차피 강화하려면 공간을 다시 구성해야 하니 아예 모든 게 터진 지금이 차라리 잘 되었다며 이런저런 서류를 끄집어내기 시작했고, 마탑주는 나가라는 듯 그들에게 대충 손을 저어 보였으니까. 결국 차유진과 김래빈은 배낭과 기본적인 야영 물품만을 든 채 마탑을 나와야 했다.

    “나 이제 이 길 외워.”

    쫓겨나오듯 뛰쳐나온 탑을 등 뒤로 한 채 차유진은 심드렁한 얼굴을 했다. 김래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와 차유진이 친해진 후로 둘이 사고를 몇 번을 쳤던가. 개수와 날짜만 달라졌을 뿐 플라멜의 베일을 채집해 오라는 징계를 받은 것도 벌써 여러 번. 차유진이 마탑을 방문하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특이하기는 해도 마탑의 모범생 축에 속하던 김래빈은 이제는 아주 차유진과 싸잡아 사고뭉치로 낙인찍혀버렸다.

    “사흘 안에 플라멜의 베일을 총 400뿌리나 채집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 서두르자.”

    그러니 이제는 체념도 빨랐다. 김래빈이 차유진을 잡아끌었다. 그는 순순히 김래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날이 좋았다. 마탑을 돌아 숲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밟으면 서서히 무성해지는 나무가 그들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마탑의 뒤로 위치한 가파른 산맥의 꽤 험난한 길을 넘어 플라멜의 베일이 서식하는 계곡 근처 분지까지 도착하는 게 그들의 첫 과제였다.

    “네가 마탑을 드나들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연구 중인 마법사를 함부로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깨닫고 반성하도록 해, 차유진.”

    아직 완만한 경사를 그리는 길에는 흙과 들꽃과 초목의 향이 깔려있었다. 선선한 공기와 새 소리 사이로 발걸음마다 한 마디씩 김래빈의 잔소리가 떨어졌다. 차유진은 그 말을 배경음처럼 흘려들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 위험한 행동 한 거 김래빈이야.”

    “무, 물론 실제로 행동을 한 건 나일지도 모르고 그건 내 잘못이 맞지만, 그건 네가 이상한 질문을 했기 때문이잖아!”

    솔직히 그들에게 첫 번째 과제는 의미가 없었다. 김래빈이 아직 공간이동 마법에 능숙하지 않다 뿐이지 차유진이 그를 들쳐업고 날아간다면 고작 몇 분 만에 도착할 거리였다. 실제로 두어 번은 그렇게 하기도 했다. 처음 난데없이 그에게 낚아채여 공중에 떠오른 김래빈이 지른 비명은 마탑에까지 다 들렸을 거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 날아가기를 포기한 건 상대와 걷는 시간이 꽤 즐거웠기 때문이다.

    ‘김래빈 안 힘들어?’

    ‘응. 이런 건 익숙해. 나는 평민 출신이라 마탑에 오기 전까지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약초를 캐며 살았거든.’

    그 대화를 나눌 때의 그는 어쩌면 가파른 산길이나 호미질 따위의 것들을 조금쯤은 그리워하는 것도 같았다. 산골에서 약초를 캐는 평민과 마탑의 전도유망한 마법사의 사회적 지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텐데도.

    그들은 계속 걸었다. 가팔라지는 길을 따라 계곡을 타고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온통 흔들렸다. 제가 항변하던 것도 잊고 크게 숨을 들이마신 김래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징계받는 사람이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나는 여기에 오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

    그래. 바로 저 얼굴. 양심에 찔린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제게 숨죽여 속삭이며 웃는 저 얼굴이 좋아 이 길이 차유진에게도 특별해졌다. 어쩐지 날갯죽지가 간지러웠다. 크게 홰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대신 그는 곧 바위를 타고 올라야 하는 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상대를 당겨 안았다.

    “김래빈 너무 느려.”

    그리 싫지도 않으면서 습관처럼 입에 붙은 타박을 주워섬기며 무릎 아래를 받치고 발을 힘껏 구르면 목에 팔을 걸어 몸을 바짝 붙인 김래빈이 그의 귓가 언저리에 숨을 폭 내쉬었다.

    아마 그 순간 공중으로 붕 떠오른 건 꼭 그의 몸만은 아닐 터다.





    분지에는 늦은 오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기울어져 황금빛으로 물든 햇살이 등 뒤를 따스하게 데웠다. 김래빈은 배낭에서 호미를 꺼내어 손에 바투 쥐었다. 어두워서 작업하지 못하는 시간과 탑까지 왕복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만 이틀, 만 이틀 안에 400뿌리를 캐려면 오늘 적어도 100뿌리는 캐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퍽 비장했다.

    “지난번처럼 해?”

    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친 차유진이 태평하게 그에게 던진 말에 대답하며 김래빈은 제 소매를 바짝 걷어붙였다.

    “내가 판단하기로도 그게 효율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

    대충 고개를 끄덕인 차유진이 손에 마력을 둘렀다. 손가락이 길게 자란 풀숲을 한번 훑고 지나가고 나면 마법처럼 흐리게 빛나는 푸른 꽃이 그 아래에서 우수수 피어났다. 그 빛이 사라지기 전 줄기를 조심스레 휘어 감은 김래빈이 땅에 호미를 꽂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곧 뿌리가 고스란히 딸려 나왔다.

    플라멜의 베일은 캐기가 아주 까다로운 약초다. 함께 서식하는 다른 풀과 아주 흡사해서 구분하기 위해서는 마력에만 반응해 피어나는 푸른 꽃을 확인해야 하지만 정작 그 뿌리는 마력에 아주 예민해 마법을 사용해 캐면 약초의 효능이 반토막 아래로 떨어졌다.

    각종 마법 약을 만드는 기본 시약의 재료로, 특히 김래빈이 몸담은 마탑에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재료임에도 플라멜의 베일을 캐는 게 마법사들에게 일종의 징계인 건 그 때문이었다. 마법을 쓸 수 없고 몸을 직접 움직여야 하는 번거로운 노동이니까. 게다가 이 분지는 언뜻 평화로워 보이지만 늑대 같은 맹수도 곧잘 나타나는 곳이라, 견습 마법사들은 최소 3인 1조로, 일반 마법사들은 2인 1조로만 파견되었다.

    “두 뿌리…, 세 뿌리….”

    수많은 시도 끝에 김래빈과 차유진은 역할을 나누는 게 그나마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유진은 호미질을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고, 마력을 둘러 풀을 찾았다가 다시 그 마력을 해제하고 호미질을 하기를 반복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그러니 그나마 호미질이 익숙한 그가 호미질을 전담하고, 차유진은 경계를 서며 수시로 마력을 휘둘러 꽃을 피워내는 게 나았다.

    ‘채집에 효율적인 방법을 찾을 만큼 징계를 받았다는 게 썩 자랑스러운 이력은 아니지만….’

    그는 묵묵히 호미를 휘둘렀다. 차유진은 넘쳐나는 마력을 굳이 아끼지 않아서 그의 옆에서 느리게 걷는 차유진의 걸음을 따라 파란 꽃이 한두 송이씩 피어올랐다.

    “김래빈.”

    고개를 들자 산머루가 붙은 가지를 쥐고 흔드는 차유진의 손이 불쑥 눈앞으로 들이밀어졌다. 김래빈은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붙은 흙을 털고 손을 내밀었다. 잘 익은 머루알 여러 개가 손 위로 데구르르 굴러떨어졌다. 그가 머루알을 입에 넣고 그 새콤함에 잠시 몸을 떠는 동안 차유진이 그 옆에 쭈그려 앉았다.

    “우리 저녁 토끼 잡아?”

    “육포랑 빵이랑 챙겨 오지 않았어? 직접 사냥해서 먹는 건 번거롭잖아.”

    “그래도 육포랑 빵 맛없어.”

    “너 저번에 왔을 때도 똑같이 말해 놓고는 소금이랑 향신료 없으면 고기도 맛없다고 투덜거렸잖아.”

    열네 뿌리, 열다섯 뿌리. 차유진이 피워낸 꽃이 다시 지기 전에 김래빈은 재개 손을 놀렸다. 그의 옆으로 플라멜의 베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다섯 뿌리씩 엮어 배낭 안으로 던져넣던 그는 씩 웃는 차유진을 보며 낯익은 불안감을 느꼈다.

    “너 설마?”

    “소금이랑 향신료, 내가 챙겼어!”

    참으로 경쾌하기도 했다. 대체 언제? 그가 아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더욱 활짝 웃는 얼굴을 한 차유진이 자랑하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올 때 사라 만났어. 사라가 챙겨줬어.”

    그 귀한 걸 징계받아 떠나는 사람, 아니, 용, 아니, 아무튼 차유진에게 덥석 넘겨주다니.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사라는 마탑 주방에 고용되어 일하는 하녀였다. 차유진의 친화력이야 몸으로 겪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마탑주에게 불려 간 직후부터 탑을 나올 때까지 그 짧은 순간 기어코 제일 먼저 챙긴 게 소금과 향신료라는 게 어이가 없을 뿐.

    “저번처럼 불 피우다 불똥이 튀면 곤란하니까, 제대로 주변을 정돈하고 하도록 해. 짐승 조심하고. 하지만 차유진, 넌 우리가 지금 놀러 나온 게 아니라 징계를 받는 중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유념할 필요가 있어! 플라멜의 베일을 캐는 것보다 먹을 걸 가리는 데 더 신경을 쓰는 건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야!”

    기어코 스무 뿌리를 채우고야 몸을 일으켜 손목을 한 번 툭툭 턴 김래빈은 결국 또 잔소리를 입에 올리고야 말았다. 차유진은 나도 그 정도는 안다거나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라고 투덜대는 대신 진지한 얼굴로 입술에 검지를 올렸다. 쉿. 상대의 엄중한 태도에 저도 모르게 덩달아 소리를 낮춘 그는 눈썹을 들어 올려 의문을 표했다.

    “김래빈 소리치면 토끼 다 도망가.”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소리였다. 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호미를 던질 뻔했다. 하지만 차유진은 집요했다. 결국 그날 김래빈이 꼬박 100뿌리를 채우는 동안 차유진은 돌을 던져 꿩을 잡는 기염을 토하며 토끼와 꿩으로 풍족한 저녁 식사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2일차

    김래빈은 눈을 떴다. 얇은 침낭 하나로 밤을 버틴 탓에 몸 여기저기가 찌뿌둥했다. 약간 후덥지근한 느낌에 옆을 보니 역시나 차유진이 바짝 붙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침낭 밖으로 팔을 빼내어 쭉 기지개를 켰다. 차유진, 하고 흔들어 깨우면 여전히 비몽사몽 중인 것이 분명한 웅얼거림이 돌아왔다.

    “오늘도 200뿌리를 캐려면 슬슬 일어나야 해.”

    어제 그들이 조금 늦게 잠들기는 했다. 천막을 치고 들짐승을 대비해 은폐 마법을 몇 겹씩 둘러 걸며 겸사겸사 이야기를 시작했던 게 생각보다 길어졌던 탓이다. 별이 예뻐 이야기하기 좋은 밤이기도 했다. 그래도 더 미적거릴 수는 없었다. 그는 차유진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렀다. 보들보들하고 탄력이 있는 게 제법 찌르는 맛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키득거림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김래빈 자꾸 그러면 잡아먹어….”

    크와아앙. 반쯤 잠긴 목소리로 어설프게 짐승 흉내를 내며 입을 쩍 벌리는 차유진의 입술 너머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저건 하프 드래곤의 특징인 걸까, 아니면 차유진 개인의 특징인 걸까? 그 뾰족한 끄트머리에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면서도 그는 침착하게 답했다.

    “용의 생태에 대해 잘 알려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용이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프 드래곤인 넌 더더욱 그럴 테고.”

    재미없어. 투덜댄 차유진이 그제야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잠이 눈꺼풀에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었다. 마탑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수면시간이 더 길었던 김래빈이 말똥한 얼굴인 것과는 정반대였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 차유진의 눈동자 속 동공이 줄어들었다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그는 침낭을 정리하고 천막을 나섰다. 등 뒤에서 큰 하품 소리가 들렸다.

    천막 밖으로 나온 김래빈은 주변을 점검했다. 새벽 내내 안개가 끼어있었는지 공기가 아직 축축했다. 전날 걸었던 은폐 마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고기를 구워 먹었던 장소 근처에 짐승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발자국이었다. 김래빈은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자국만 보아서는 무슨 짐승인지 알기 어려웠다. 천막을 다 정리했는지 차유진이 슬금슬금 그의 뒤로 다가왔다. 그는 상체를 뒤로 물려 발자국을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차유진, 너는 알겠어?”

    “몰라. 나 사냥꾼 아니야.”

    그건 김래빈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로 발자국을 슥슥 밀어 지웠다. 크기가 크진 않으니 아주 위험한 동물은 아니리라. 그보단 오늘의 임무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그는 손목을 돌려 풀고 다시 호미를 들었다.

    “플라멜이 사실은 실존 인물이라는 설도 있는 거, 차유진 너는 알고 있었어?”

    반복 노동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차유진의 인도에 따라 한 뿌리씩 할당량을 채워가며 그는 입을 열었다. 슬슬 지루함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어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때였다.

    이름이 붙은 꽃답게 플라멜의 베일에도 얽힌 설화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대마법사가 거인, 요정, 용, 유니콘,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그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는 여러 신화 속 존재들과 계약을 맺어 그 맹세의 말을 실로 자아 만든 길고 신비로운 베일. 위대한 마법사가 아끼던 이에게 베일만 남기고 인간계를 떠난 후 남겨진 이는 베일을 끌어안고 한 송이 꽃이 되었다 하는.

    어떤 이유에서건 플라멜의 베일을 캐러 가면 선배가 후배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왔다. 김래빈은 처음 차유진과 플라멜의 베일을 캐 오는 징계를 받았을 때 다른 마법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 이야기는 다시 고스란히 그의 입을 거쳐 차유진에게로 넘어갔다.

    “떠돌아다닐 때 몇 번 들었어.”

    만약 그게 사실이면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야. 차유진이 미미한 감탄을 담아 덧붙였다. 나라 여기저기 플라멜과 관련된 전설 하나 없는 곳이 없었다. 그도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처럼 전국 단위로 유명해질 자신은 없었다.

    “만약에 플라멜의 이름으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사실이라면 플라멜은 정말로 대단한 마법사였음이 틀림없어! 물론 플라멜이 실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가설과 별개로 전해 내려오는 모든 플라멜 전설의 등장인물이 실제로 그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전해지는 이야기 중 사분의 일만이라도 진실로 밝혀져도 지금 시대의 마법사들이 구현할 수 있는 마법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걸로 추측되거든.”

    김래빈은 손을 바지런히 놀리며 생각에 잠겼다. 흔히 가장 까다로운 마법이 생명과 정신을 다루는 마법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이제 생명은 신전이나 정령의 영역으로 옮겨갔고 정신 마법은 대개 실전되었다. 대단위의 시간이나 공간 마법을 구현해 내는 마탑주조차 정신 마법을 쓰려면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한다고 들었는데도 플라멜은 그 모든 영역을 상당히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마법사로 묘사된다.

    실로 악마와도 같은 재능. 그는 입속으로 이야기의 한 구절을 되새겼다.

    “그럼 김래빈 목표 바뀌어?”

    “응?”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잠시 호미질을 멈춘 김래빈이 고개를 들었다. 차유진은 손 위에 붉은 새를 얹은 채로 몇 마디 말을 읊조리고 있었다. 용족 특유의 언령으로 빚은 새가 그의 손을 떠나 포르르 날아갔다. 그는 잠시 새가 날아가는 궤적에 눈길을 두었다. 차유진이 구사하는 탐색 마법은 언제 보아도 퍽 아름다웠다. 그제야 그와 시선을 맞춘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 마탑주 되고 싶어했어. 다음엔 플라멜이야? 대마법사?”

    “으음. 그건 아직 모르겠어. 일단 지금의 목표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다음의 일을 논하는 건 너무 자만하는 것 같잖아.”

    대답하며 무심코 턱을 매만지느라 묻어버린 흙을 대충 훔치다 김래빈은 문득 옛일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왜 웃어?”

    “예전에 내가 마탑주가 되고 싶다고 하니까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마탑주가 되고 싶다던 그에게 차유진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럼 김래빈 빨리 탑 세워. 나는 바닷가가 좋아! 마치 마탑이 모래성처럼 쌓기만 하면 되는 양 명쾌한 어조였다. 마탑을 가지고 있으면 마탑주. 그 단순한 사고방식을 그때는 몰랐던 그는 한참을 차유진과 입씨름해야만 했다. 마탑주가 되고 싶다는 말이 제 탑을 가지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격을 인정받아 마탑주 자리에 오를 만큼 마법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뜻이노라고, 몇 번이고 시행착오를 거치고 고쳐 설명하고 나서야 그는 정확히 제가 뜻하는 바를 설명할 수 있었다.

    “우. 그거 내 잘못 아니야. 김래빈 원하는 거 정확하게 말 안 했어.”

    “다른 사람들은 다 제대로 알아들었으니 내 의사소통 방식에는 문제가 없었어. 차유진 네가 지나치게 단순하게 해석한 거야.”

    “틀려! 나 마법 쓸 때 정확하게 말해. 소원도 똑같아. 김래빈 더 솔직해야 해.”

    그러니 기도도 소원도 마법의 주문도, 결국엔 동일한 뿌리를 가진다. 말, 그리고 뜻.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언령의 재능으로 차유진은 그걸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감각하고 있었다. 그는 김래빈을 내려다보았다.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매를 보니 그는 여전히 그의 말이 와닿지 않는 모양이지만.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번성하는 데 김래빈이 말하는 예의며 도덕 같은 것들이 꽤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은 차유진도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어쨌든 반은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마법은 결국 시전자가 욕망하는 걸 마력을 빌려 현실로 구현하는 힘. 욕망을 감추고 돌려 모호하게 표현하면 마력은 가야 할 방향을 잃는다.

    ‘마음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그에게 김래빈의 마음은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과 같았다. 아무리 그가 일찍이 눈치챘어도 발화되지 않은 ‘좋아해’는 의미가 없으니. 나는 너 좋아해. 몇 번을 말했어도 아직 상대에게 진정으로 닿지 못한 그의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혹시 내가 그렸던 마법진도 그런 이유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걸까?”

    “조금은.”

    그걸 고민해 보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맥 빠진 얼굴로도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이 마법 바보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 점까지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제 팔자였다.

    그래도 이렇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민에 빠진 얼굴이라니. 역시 조금은 약 올랐다. 김래빈 손 놀아. 그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를 써 그의 생각을 끊어버렸다. 김래빈은 잠시간은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곧 그들이 캐야 할 뿌리의 개수를 떠올렸는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유진은 그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손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방향을 따라 푸른 꽃이 점점이 피어난 들판이 보였다.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나 확인이 간단하면 참 좋을 텐데.





    중간에 이쪽을 향하던 들개 무리가 탐색 마법에 걸려들어 멀찍이 쫓아냈던 걸 빼고는 평온한 노동의 시간이었다. 김래빈의 몸 상태만 빼면 그랬다. 머리에서 제가 썼던 마법진의 수식이 온통 굴러다니는 바람에 힘든지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손을 놀린 결과 그는 지금 손목, 허리, 무릎을 포함해 온몸이 삐거덕거리는 상태였다. 바보라며 입을 삐죽거리는 차유진의 말에도 반박하지 못할 만큼.

    “내일 김래빈 나랑 바꿔 해.”

    “알았어.”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으며 차유진이 건넨 말에 그는 가만히 수긍했다. 그가 이미 할당량 대다수를 캔 만큼 내일은 차유진에게 맡겨도 문제없을 터였다.

    “그럼 불 꺼?”

    “응.”

    잘 자. 너도. 여상한 말이 오가고 천막 안이 어두컴컴해졌다. 각자의 침낭 안에 기어들어 가며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가 그것도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날씨가 괜찮고 위험한 짐승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야.’

    맹수야 쫓아내면 그만이라지만 날씨가 궂으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저번이 그랬다. 워낙 비가 거세게 내리는 데다 분지는 계곡 바로 옆이어서, 둘은 결국 차유진의 힘을 빌려 마탑으로 철수했다. 마탑은 비 오는 날에도 그들을 내몰 만큼 매정한 집단이 아니었지만 받아야 할 벌이 한도 끝도 없이 미뤄지는 것 역시 찝찝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럴 일 없이 정해진 기한 안에 깔끔하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가면 반드시 마법식을 다시 살펴봐야지.’

    약초를 캐며 떠올렸던 여러 구상을 재점검해 보다가 김래빈은 침낭 속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잠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고약만으로는 근육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특히 혹사당한 팔과 어깨가 아릿하게 욱신거리는 통에 잠이 오지 않았다. 지금은 그 어디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그랬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았다.

    ‘냉찜질이라도 하면….’

    그는 손목에 손을 가져다 대고 숨죽여 주문을 외웠다. 냉기가 그의 손을 타고 돌았다. 차가운 기운이 아픔을 가라앉히는 감각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하다가 잠들면 되겠지. 그 순간이었다.

    “김래빈 아파?”

    차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도 깨운 모양이었다. 뒤척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차유진이 침낭 채로 꿈틀꿈틀 몸을 붙였다. 김래빈의 손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마력의 빛과 냉기를 확인한 차유진이 흠, 하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손 줘봐.”

    “미안. 내가 잠을 깨웠나 본데,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차유진 너는 자도 돼.”

    “김래빈 어깨랑 손목이랑 혼자 다 하려면 불편해.”

    양손에 쉽사리 냉기를 피워올린 차유진이 냅다 침낭 너머로 팔을 뻗어 그의 빈 손목과 어깨를 감싸 잡았다. 욱신거리던 부위가 시원해지는 감각에 김래빈은 괴상한 신음을 뱉어냈다.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이 빠졌다. 확실히 혼자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그래도 겸연쩍은 기분에 그는 한 번 더 상대를 만류했다.

    “그래도 너 자야 하잖아.”

    “우리 둘 중에 잠 더 부족한 거 김래빈이야.”

    코웃음과 함께 심드렁한 답이 돌아왔다. 그것도…사실이었다. 할 말을 잃은 그의 입이 조용히 다물렸다. 우습게도 통증이 가라앉으며 아까까지는 죽어도 오지 않던 잠이 슬금슬금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잠들면 너도 그만해도 될 거라고 말해주려 시선을 들었다가 김래빈은 마력의 희미한 빛 너머로 절 바라보고 있는 차유진의 눈을 보았다. 예상외로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김래빈 좋아해!’

    그 순간 왜 그 말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며 손목은 여전히 차가운데 그 너머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는 그냥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일차

    차유진이 언제까지 그의 냉찜질을 도와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만 중간에 잠들어버렸으므로.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여전히 차유진이 그를 반쯤 끌어안고 있었던 걸 보면 아마 꽤 오랫동안 그에게 힘을 쏟다 잠든 게 분명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는 차마 차유진을 깨우지 못하고 어물댔지만, 상대가 잠결에 그를 좀 더 끌어안으려 하자 그만 당황해서 후다닥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 서슬에 차유진 역시 덩달아 깨어버린 건 덤이었다.

    “뿌리를 파낼 땐 특히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뿌리가 호미 날에 잘리기 일쑤니까.”

    간밤의 그가 얼마나 심란했든 오늘은 징계 이행 마지막 날이었다. 그 전날 서로 합의한 대로 오늘은 차유진이 호미를 들고 그가 경계를 섰다. 차유진의 호미질은 그보다 느리고 김래빈의 마력량은 상대보다 적어서, 그는 차유진처럼 내도록 마력을 휘두르는 대신 호미질이 끝나는 걸 기다렸다 한 송이씩 느리게 꽃을 피워냈다.

    “우우. 김래빈 잔소리.”

    플라멜의 베일 한 포기를 캐낸 차유진이 다시 피어난 꽃을 따라 호미를 땅속에 콱 박았다. 살살 하라는 그의 말을 그새 잊은 게 틀림없었다. 그 엉성한 호미질을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쭈그려 앉은 차유진의 정수리로 옮겨갔다. 붉은색의 폭신폭신한 머리 뒷부분이 우습게도 붕 떠 있었다.

    ‘꾹꾹 눌러주고 싶다.’

    그는 손가락을 잘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그는 팔을 뻗는 대신 고개를 저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유독 차유진을 대상으로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된다는 자각은 꽤 오래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키스도 그런 충동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른다. 차유진의 오해와는 다르게 그는 퍽 진지하게 고민 중이었다. 대체 왜 자신이 차유진에게 키스했는지를.

    ‘확실히 들떠있기는 했지.’

    봄 축제의 밤이었다. 마탑도 축제 분위기를 피할 순 없었다. 탑 안쪽까지 음악이 들려왔다. 마법사들은 삼삼오오 가장 좋은 옷을 빼입은 채 거리로 놀러 나갔다. 김래빈은 그때 차유진과 함께였다. 일이 바빴는지 간만에 마탑을 들렀던 차유진이 축제라며 그를 끌고 나갈 때 내심 반갑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맛있는 걸 먹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어디서든 꽃을 받고, 광장에서 사람들의 손과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추기도 하고. 그리고 마지막은 불꽃놀이였다. 불꽃이 터지고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려올 때 무심코 차유진을 돌아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도 같았다. 돌아보고 나니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 처음에는 실수였고, 그다음은…. 모르겠다. 그냥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입을 맞추고 있었다.

    ‘네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그때 키스는 하고 싶어서 했는데, 해 보니 좋기는 했다…. 이건 너무 파렴치한 대답이잖아.’

    차유진이 아무리 정확하고 솔직한 게 좋다 해도 안 될 말이었다. 줄곧 키스의 이유를 묻는 차유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다. 차유진의 말마따나 그가 차유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건 더더욱 모를 일이었다. 그는 가끔 상대가 제게 던지는 좋아한다는 말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이게 충동인지 아닌지,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제 마음이 확실해지면 그때 대답해야지, 하고 김래빈은 오늘도 대답을 보류했다. 차유진이 들으면 속 터지는 소리라고 할 만한 결론이었다.

    “얼마나 남았어?”

    “스무 뿌리!”

    호미를 잠시 내려둔 차유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팔을 쭉 위로 뻗어 늘렸다. 김래빈은 육포를 꺼내 반으로 톡 쪼개어 반은 제 입에 물고 나머지 반은 차유진의 입에 물려주었다. 김래빈. 육포를 우물거리면서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왜?”

    “우리 갈 때는 날아서 가.”

    피곤할 만도 하지. 그는 제 손목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기에, 김래빈은 못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다시 작업이었다. 차유진은 쭈그려 앉아 호미를 들었고 그는 마력을 둘러 주변의 풀을 부드럽게 훑었다. 꽃이 두어 송이 더 피어났다.

    “돌아가면 씻고 맛있는 걸 먹고 잘 거야. 김래빈도 자. 안 자면 또 마수 돼.”

    “너 어차피 또 내 침대에서 잘 거잖아.”

    “응.”

    호미질 사이사이마다 말들이 퐁당퐁당 튀어 올랐다. 피워내고, 캐고, 다시 피워내고. 종종 고개를 들어 탐색 마법을 점검해도 김래빈의 시선은 결국 다시 차유진을 향한다.

    “그럼 너 잘 동안 나는 어디서 자? 불편하게 자꾸 그러지 말고 아예 네 방을 하나 마련해달라고 하라니까.”

    “싫어. 김래빈 나 쫓아내? 침대 나누면 돼. 마음 넓게 써.”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가 다시 소곤거림으로 바뀌었다.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바람처럼 일렁였다. 나란히 걷는 발자국이 풀숲에 흔적처럼 남았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마력이 점점이 떨어진 자리, 잎새 그늘 사이에서 푸른 꽃이 고개를 드러냈다.

    어쩌면 어떤 마음도 이미 피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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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낯선 추억

    낯선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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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어 기억을 되찾은 후의 윶랩

  • 천체관측동아리

    천체관측동아리


    목차

    • 태양
    • 금성
    • 낮달
    • 광년
    • 플라네타리움
    • 유성우
    • 별의 궤도
    • 오로라

    태양

    차유진이 그가 다니는 예고로 전학을 온 건 김래빈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듣기로는 아이돌 연습생이라고 했고, 오기 전부터 이미 데뷔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다. 무성한 소문의 당사자가 전학 온 그날, 그 반 복도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달라붙었다.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그도 들었지만 그 사이에 끼어들어 얼굴을 구경할 자신은 없었다. 

    ‘전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낯선 다수가 모여들어 구경하는 행위는 상대에게 실례되는 일이야.’

    그때 그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구경하기 힘든 빽빽한 사람들 틈새를 흘긋 보고는 교과서를 끌어안고 이동수업을 위해 자리를 옮겼더랬다. 그러니 김래빈이 차유진을 제대로 마주친 건 그가 전학 오고도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차유진이라는 건 금방 알았다. 예고는 학생 수가 적었고, 새로운 얼굴은 드물었다. 복도에서 우연히 그를 마주쳤을 때 김래빈은 왜 데뷔가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아이들이 왜 그렇게 술렁였는지 알 수 있었다.

    스쳐 가듯 본 게 다인데도 기억에 남을 만큼 눈에 띄는 얼굴, 그리고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분위기. 실력도 만만찮아 댄스 실기를 담당하는 교사가 첫 수업에 벌써 차유진을 격찬했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를 건너 돌았다. 언젠가 프로듀스까지 영역을 넓히고 싶은 작곡 지망생으로서 그는 차유진을 눈여겨보았으나 그뿐이었다. 한 번쯤 같이 작업을 해 보고 싶은 건 김래빈의 소망일 뿐 그와 차유진은 반도, 교우관계도, 생활영역으로부터 습관까지 겹치는 게 없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절 지나쳐 가는 그를 보며 김래빈은 앞으로도 그와 친해질 일은 없지 않을까, 추측했다. 차유진이 폐부 직전의, 그가 속해 있는 천체관측 동아리를 찾아오기 전까진.

    천체관측 동아리는 고 3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활동하지 않고 이름만 올라가 있는 선배들과 김래빈으로 겨우 최소인원을 맞춘 채 근근이 유지되고 있는 자율 동아리였다. 그마저도 신입생이 들어오지 않아 내년에도 동아리가 유지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연스레 학교에서는 동아리에 예산을 많이 할당하지 않았고 천체관측 동아리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낡은 장비로 겨우 구색을 갖춘 정도였다. 그러니 담당 교사도 거의 들르는 일 없는 학교 옥상 밑 동아리실을 처음 차유진이 열고 들어왔을 땐 적잖이 놀랄 수밖에.

    ‘너라면 네 특기를 살릴 수 있는 다른 동아리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잖아?’

    어색하게 서로 통성명을 하고, 두어 번 복도에서 마주쳐 떨떠름하게 인사를 하고, 그러다 사소한 대화를 거리낌 없이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때 김래빈이 비로소 던진 질문에 차유진은 No,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안 해 본 거 좋아! 여기 자유로워서 더 좋아!’

    그거야 선배도 담당 교사도 다른 학생도 없이, 오로지 김래빈과 차유진만 활동하는 동아리니 그럴 법도 했다. 심지어 차유진은 곧 데뷔를 목전에 두었다는 이유로 학교도 종종 결석하는 탓에 규정대로 한 달에 세 번씩 꼬박꼬박 활동하는 건 오로지 김래빈뿐이었다.

    그래도 오늘은 간만에 차유진이 있었다. 본래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 아니지만 부분 일식 예고가 있어 미리 옥상 출입을 포함한 활동 허락을 받아 둔 때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차유진은 오늘 시간 괜찮은지 묻는 그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였고, 둘은 일식 관측이 가능한 시간에 맞추어 종례가 끝나자마자 학교 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옥상에 자리를 잡은 채 초조하게 차유진을 기다렸다. 동아리에는 일식을 관찰할 때 햇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할 만한 별도의 도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는데, 차유진은 사정을 듣더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며 어딘가로 휭하니 가버렸다.

    ‘빨리 와야 할 텐데.’

    혹시 차유진이 오기 전에 일식이 끝나버리면 어쩌지 싶어 그는 자꾸만 하늘과 옥상 문을 번갈아 보았다.

    “김래빈 나 왔어!”

    옥상 문이 벌컥 열린 건 그때였다. 그는 차유진이 들고 흔드는 걸 바라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납작한 사각형 물체 여러 개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게 뭔데? 셀로판지를 얻으러 미술 선생님께 간 게 아니었어?”

    “나 물어봤어! 이게 더 좋대! 플로피디스크?”

    차유진이 기묘한 물체의 쇠로 된 부분을 밀어 그 내부의 검은 디스크를 보여주더니 경쾌하게 외쳤다. 나 어떻게 하는지 배웠어! 김래빈 나 따라 해. 그는 차유진이 내미는 사각형의 물체를 머뭇머뭇 받아 들었다.

    차유진을 따라 검고 반투명한 디스크를 눈에 대면 그 너머로 아주 조금 먹힌 해의 모습이 작고 붉고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날 둘은 옥상에 나란히 앉아 한 쪽 눈은 감고 다른 쪽 눈은 플로피 디스켓에 고정한 채 태양이 반쯤 이지러지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이거 불편해. 차유진은 조금 투덜거렸고 김래빈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태양을 맨눈으로 보면 눈이 상해, 차유진.

    *




    그런 날이 있었다. 별것 아닐 일이 기억에 오래 남는 건 김래빈이 이후 TV에서 차유진을 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리는 까닭이다. 카메라와 TV라는 몇 겹의 가림막 너머로 보아도 차유진은 여전히 눈부셨고, 마치 태양처럼 차유진 역시 맨눈으로 보면 눈 어딘가가 상해버리는 존재인 건 아닐지 하는 실없는 상상을 그는 몇 번이고 해왔기에.

    그리고 스물여섯 살. 작곡가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김래빈은 취직한 회사에서 그 어떤 가림막도 없는 차유진을 다시 마주쳐야 했다.

    무대용 화장을 반쯤 지우다 만 얼굴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글리터가 반짝였다. 리모델링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회사 복도는 아주 밝았고 글리터와 무대의상의 장식들은 그 빛을 사정없이 반사해 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차유진을 똑바로 바라보기 조금 어려운 건 꼭 글리터와 쇠 장식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7년의 공백과 아주 오래 묵은 감정. 여전히, 혹은 그때보다 더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차유진. 오랜만이야. 덧붙이며 그는 하릴없이 쓸쓸해졌다. 그를 만나자마자 차유진이 부재하던 김래빈의 시간이 천천히 휘발되며 한동안 잊고 살았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마음 한구석에서 비상등이 울렸다. 차유진은 그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그에게 거리낌 없이 말을 걸었다.

    “김래빈 설마 나 기억 안 나?”

    “그럴 리가. 방금까지는 공적인 자리였으니까 서로 아는 사이여도 예의를 갖춰 대해야지, 차유진.”

    그는 대학 때 들었던 교양을 떠올렸다. 신화와 인문이라는 교양과목이었다. 그때도 고지식했던 대학생 김래빈은 이카루스 이야기를 들으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신을 보며 반갑다 웃는 차유진을 보면서 그는 알면서도 재앙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욕망을 이해했다.

    그의 앞에 언제라도 그를 태울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잘못하면 추락할 걸 알면서도, 그래도 김래빈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샛별

    데뷔가 확정된 게 아니라면 동아리 활동마저 대학 입시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 선택해야 하는 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김래빈이 천체관측 동아리에 들어가게 된 이유는 별거 없었다. 
    첫째, 그는 대학 입시를 따져가며 동아리를 고를 만큼 썩 영악한 편이 못 되었다. 둘째, 그는 별 보는 걸 좋아했다. 셋째, 천체관측 동아리는 당시 신입생이 좀 급했다. 세 번째 항목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꽤 중요했다. 당시 2학년이었던 동아리 회장은 폐부의 위기를 맞아 엉성한 포스터를 기웃거리는 잘생긴 인상파 후배를 어떻게든 천체관측 동아리에 영입해야 했고 놀라운 말발을 발휘한 끝에 신입생을 성공적으로 낚는 데 성공했다.

    천체관측 동아리에 들어온 사람들은 대개 그런 식이었다. 동아리에 적응하지 못하면 이름만 남긴 채 활동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아주 괴짜거나 대책 없이 낭만적이거나 둘 다였다. 동아리 회장은 괴짜 축에 속하는 사람으로, 금성에 반쯤 미쳐있어 종종 새벽에도 금성을 관측한다고 학교에 오곤 했다.

    ‘눈으로 보는 금성도 좋지. 하지만 금성의 매력은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부분에 있다고 난 생각해.’

    간혹 회장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쏟아내곤 했다. 천체역학, 역행 자전, 중력 섭동, 대기 초회전…. 더 놀라운 건 회장의 그런 단어를 이해하고 받아쳐주는 사람이 천체관측 동아리에 꽤 많다는 점이었다. 그들이 들고 다니는 두꺼운 물리학이나 천문학 책을 넘겨보다가 김래빈은 주저하며 물었다.

    ‘저, 선배님. 혹시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 과학 분야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필수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아무래도 저는 그쪽 분야의 지식이 희박한 편이라 동아리 활동을 잘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혹시 저처럼 입문자도 읽을 만한 책을 선배님께서 추천해주신다면 기꺼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선배와 눈빛을 주고받던 동아리 회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그럴 필요 없는데. 네가 관심 있는 건 이런 분야 아니잖아. 그냥 하늘 보는 게 좋아서 들어온 거라며.’

    ‘하지만 다른 선배님의 사례를 보더라도 많이 알면 그만큼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선배님들과 대화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테고요.’

    좀 엉뚱해도 어쨌든 성실하고 의욕 넘치는 신입 부원을 보며 웃고 있던 다른 선배가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이 동아리에서 그나마 그의 인상에 주눅 들지 않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선배였다.

    ‘래빈아. 억지로 시야를 늘릴 필요 없어. 너는 지금도 열심이니까 궁금해지면 그때 찾아보거나 물어봐도 돼. 솔직히 회장 얘가 좀 또라이인 거지, 안 그래? 누가 고등학교에서 이런 걸 읽어. 여긴 심지어 예고라고. 과탐 선택과목이 열리지도 않는 곳인데.’

    너 죽는다, 진짜. 회장의 주먹에 어깨를 맞으면서도 웃는 그 선배를 바라보다가 김래빈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도 두 분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시는 건지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있습니다. 이건 궁금한 게 아닌가요?’

    그것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지. 동아리 회장은 순순히 인정했지만 책을 추천해주는 대신 그의 속마음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런데 지금 넌 우리랑 이야기하고 싶은 거지 금성에 흥미가 있어 궁금한 건 아니잖아. 그거랑 이건 다르지. 네가 더 깊게 알고 싶어지는 천체가 생기면 그 때 질문해.’

    좋아하면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모르는 걸 찾다 보면 이전에 흥미 없던 분야까지 궁금해지고, 그렇게 되면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읽어보게 되어있으니 지금은 물을 필요 없다고. 회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벌써 작년의 일이었다. 회장은 그에게 동아리 회장직을 물려주고 홀가분하게 고등학교 3학년으로 진급했고, 수시에 합격하면서 이제는 학교에서 마주치기 더 어려워졌다. 그의 가르침은 김래빈에게 인상 깊게 남았지만 그는 여전히 물리학도 천문학도 어려웠고, 심지어 근래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하늘 위에 떠 있는 별도 아니었다.

    김래빈의 시선이 슬그머니 창밖의 차유진을 향했다. 얼마 전부터 붉은 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운동장을 활보하는 소년은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눈에 띄었다. 골을 넣었는지 즐거워하는 얼굴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친구랑 하이파이브를 하고, 그러다가 고개를 돌리고 이쪽과 눈이 마주쳤나 싶을 때 크게 손을 흔들며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래빈!!! 나 골 넣었어!!!!!”

    발성연습도 따로 하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아주 우렁찼다. 으악, 하고 몸을 움찔한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 질렀다.

    “차유진, 이 바보야! 지금 수업시간인 거 몰……!!! …라…?”

    그렇지. 수업시간이지. 급격하게 깨달음을 얻은 그의 고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말끝도 순식간에 소리가 줄어들었다. 제게로 쏠린 같은 학급 친구들의 시선과 교과서를 든 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국어 교사의 얼굴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김래빈. 국어교사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어질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창밖에서는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나 김래빈 위로해. 김래빈 이거 먹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90도로 몸을 숙이며 사과하는 김래빈에게 교사는 푹 한숨을 흘리고는 다음부터는 그런 일 없게 하라며 딱딱거리고 사라졌다. 교대하듯 올라온 차유진은 잔소리를 시작하려던 그의 입에 제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냅다 밀어 넣었다. 점차 서늘해지는 날씨에 반팔 하나 입었으면서도 그에게서는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수업시간 내내 뛰어서겠지. 희미하게 풍기는 땀 냄새를 인지하며 그는 일단 제게 물려진 하드를 베어 물었다.

    “입에 그렇게 갑자기 먹을 걸 넣다가 상대가 사레라도 들리면 큰일 나잖아! 상대방의 의사를 묻고, 그냥 건네주는 걸로도 충분해.”

    “의사? Oh. I see. 그거 Doctor 아냐! Opinion이야! 그럼 김래빈 아이스크림 먹어?”

    “…물어보는 건 입에 넣기 전에 해야 한다니까, 차유진.”

    졸지에 한 입 더 강요당하게 된 아이스크림은 귤 맛이었다. 차유진은 아주 단 맛도 좋아했지만 한두 번씩은 꼭 이렇게 새큼한 맛을 찾았다. 그래도 자신이 먹던 채로 나눠주는 일은 드문데 오늘은 아무래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제가 알고 있는 차유진을 찬찬히 되새겨보았다. 활동적인 일이라면 운동이든 춤이든 가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데 요령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아주 가끔은 부상도 무섭지 않은 것처럼 승부욕에 몸을 던진다. 기분이 좋을 때는 하이 톤의 목소리를 내면서 나지막하게 노래를 흥얼댈 때는 톤이 퍽 낮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굴 때도 많고. 같은 반에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는 둘에서 셋 정도. 발이 넓으면서도 방과 후 동아리실에 들를 때에는 그 누구도 데려오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궁금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차유진과 음악이나 별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을 그 역시 방해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은 묻고 싶은 게 더 많지만….’

    무엇을 더 좋아하는지, 여기로 전학 오기 전에는 어땠는지, 왜 가끔은 제게 그렇게 거리낌 없게 구는 건지. 누구와 데뷔 조를 이루고 있으며 저와 있는 시간은 충분히 즐거운 건지…. 반으로 돌아가는 차유진의 등을 바라보며 아직 남아있는 수많은 질문들을 헤아리다가 김래빈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를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금해지고,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보게 되는 이유. 이제는 회장이 아닌 옛 선배의 목소리가 고요히 그의 마음을 울렸다.

    ‘좋아하면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

    낮달

    열여덟의 차유진은, 김래빈이 쉽게 잊힐 인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세월은 무서워서, 스물여섯의 차유진은 미팅 룸에서 서로 인사할 때까지도 김래빈을 바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처음엔 어쩐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했고, 김래빈이라는 이름을 들은 그 다음에야 어렴풋하게 교복을 입은 모습을 기억해냈다. 

    사람의 기억은 놀라운 데가 있어서, 하나가 생각나기 시작하자 연관된 기억이 사슬마냥 줄줄이 딸려오기 시작한다. 그의 기억은 결국 고등학교 때까지 거슬러 살아나 그는 김래빈에게 웃으며 물었다.

    “김래빈 아직도 별 봐?”

    상대는 의외의 답을 했다.

    “군대 이후로는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왜? 하고 묻는 그에게 김래빈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한국에 머문 지 벌써 9년이 넘은 차유진에게 여전히 고등학교 때의 습관이 남은 것처럼 어휘와 발음을 신경 써 가며.

    “서울은 별이 잘 안 보이는데, 장비는 값이 비싸서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거든.”

    그는 약간 그늘진 김래빈의 눈 아래와 익숙하게 노트북을 펴는 손, 그리고 좀 더 두꺼워진 안경을 순서대로 훑었다. 어른이 된 그는 조금 더 피곤해보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볼 시간조차 없었던 걸까. 차유진은 입술을 알게 모르게 삐죽였다. 미팅 룸에서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여전히 음악에는 진심인 것 같았지만.

    너 고등학교 때에는 장비가 있건 없건 하늘을 봤잖아. 그는 그렇게 물어보려 했으나 김래빈으로부터 먼저 질문이 돌아왔다.

    “너는?”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바쁜 몸이었다. 그것이 무대 조명이건 카메라 플래시건, 쉴 새 없는 빛을 받고 있노라면 그가 스스로의 직업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때때로 빛이 피곤했다. 저 멀리서 빛나는 것들을 굳이 찾아볼 이유가 없었다.

    “그거 봤어, 한국어로, umm…, 낮달?”

    새벽부터 차를 타고 스케줄을 위해 여기저기 이동할 때 별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면 종종 낮달이 보였다. 빛나지 않지만 거기에 있고, 곧 태양빛에 사라져버릴지언정 그때까지는 마치 그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내내 보이는 희고 뚜렷한 형상.

    그렇구나. 김래빈은 짧게 긍정하고는 한참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옛 친구를 차유진은 가만히 기다렸다. 고등학교 때에도 김래빈은 간혹 저랬다. 열심히 생각했고, 제멋대로의 답을 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과 어울리기엔 썩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너희 반 김래빈 있잖아. 잘생겼긴 한데 좀 무섭지 않아?’

    차유진은 어느 날 복도에서 스쳐들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걔 그렇게 무서운 애는 아냐. 착해. 근데 좀 독특해. 말을 못 걸겠어.’

    키득거리며 흘러나온 대화에는 딱히 악의가 없었지만, 글쎄. 김래빈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들 사이에서 배제되었다.

    “차유진 너는 고등학교 때에도 별을 좋아해서 우리 동아리에 들어온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뒤로 별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지.”

    “응. 그래도 동아리 가끔 재밌었어.”

    김래빈의 결론에 그가 산뜻하게 긍정하면 김래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곳엔 둘 뿐이었다. 매니저는 그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에 적당히 자리를 비워주었다. 그를 오래 담당해 온 매니저는 그의 성격을 파악한 후로는 종종 방관하는 자세를 취했다. 좋은 처세였다. 덕분에 그는 이 화려하고 차고 비정한 세계에서도 적당히 건강한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둘만 남아서 차유진은 한층 편하게 물을 수 있었다.

    “김래빈 내 무대 봤어? 내 노래 어때?”

    차유진은 자신이 꽤 성공한 아이돌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그의 노래 역시 찾아듣지 않아도 쉽게 들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아까 미팅룸에서 김래빈이 회사 관련자와 주고받던 이야기에서도 그가 차유진의 노래를 들었다는 전제가 당연한 것처럼 깔려있었지만 그는 김래빈에게서 친구로서 해줄만한 좀 더 개인적인 감상을 듣고 싶었다.

    예상대로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상대의 입에선 그가 원하던 방향의 감상은 나오지 않았다.

    “앞으로 함께 일할 사람들의 전 작업을 내가 함부로 평가하는 건 옳지 못한 일이야. 특히 생산적인 피드백을 위한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하물며 그들이 없는 자리에서 후임자인 내가 너에게 전임자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봐.”

    무대나 노래에 대해 물으면 신나서 차유진이 모르는 부분까지 줄줄이 늘어놓던 열여덟 살 김래빈은 사라진 모양이었다. 대신에 예의와 규칙을 따박따박 잔소리하던 김래빈만 그대로 남았다.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김래빈이긴 했다. 차유진은 샐쭉하니 턱을 괴었다.

    “그 노래 내가 불렀어. 나도 피드백 받을 자격 있어. 김래빈 무례한 거 걱정되면 그 사람 말고 내 피드백 주면 돼.”

    솔직하게. 그는 그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은 통할 모양이었다. 김래빈이 다시 말을 골랐다. 생각에 잠긴 눈이 길게 가늘어진다. 동공이 허공을 향했다. 네가 떠올리는 무대는 이제까지 했던 내 많은 무대들 중 무엇일까. 차유진은 턱을 괸 채 답을 기다렸다. 김래빈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네 표현력은 고등학교 때부터 항상 좋았고 무대로 볼 때에도 여전히 굉장한 박력이 느껴져. 하지만 가끔 무모한 퍼포먼스가 눈에 걸리거나 애드리브가 불필요하게 많을 때가 있는데, 안무를 네 마음대로 변형하는 게 꼭 좋은 결과로만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으니 조언을 먼저 구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신중하고 그만큼 가차 없는 평이었다. 차유진은 속으로 감탄했다. 이제까지 이쪽 업계에 취직한 바 없던 김래빈이 안무가와 가끔 삐걱거리는 제 속사정까지는 모를 텐데도. Right. 네 말이 맞아. 동의하며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건 자신의 무대를 여러 번 본 이후에 나올만한 분석이었다. 애드리브와 안무의 구분은, 동일한 무대를 여러 번 봤다는 가정 하에 가능한 일이니까.

    “김래빈 내 무대 많이 봤어?”

    거짓말을 잘 못하는 김래빈은 대답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네 무대라면, 아마 볼 수 있는 건 전부. 돌아오는 간결한 대답에서 차유진은 김래빈이 의도치 않게 말에 엮어낸 감정의 결을 읽는다.

    김래빈은 음악에 진심이니 많은 무대를 챙겨보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건 사실이니 어쩌면 그의 무대를 좀 더 집중해서 봤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볼 수 있는 걸 전부 챙겨보고 그 차이를 비교하는 건 제 팬 중에서도 아주 열성적인 이나 그러할까.

    차유진은 아주 뒤늦게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며 잊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기억을 끌어올렸다. 때때로 제게 붙던 조심스럽고 열 띤 시선을, 고개를 돌리면 높은 확률로 김래빈과 눈을 마주쳤던 것을.

    우습게도 다시 낮달이 떠올랐다. 저 멀리서 그를 따라다니던 것처럼 보이던 희고 고요한 그 무엇.

    광년

    차유진은 가이드보컬의 목소리가 더해진 제 솔로곡을 주의 깊게 들었다. 큰 흐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그러나 귀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곡에 색이 덧입혀져 있었다. 이전의 데모버전에선 없던 변화였다. 별빛처럼 톡톡 튀어서 그에게 잘 어울리는 그 색에서 그는 고등학교 때의 김래빈이 자주 쓰던 기법의 흔적을 읽어냈다. 익숙하게, 한층 더 원숙해진 채로 김래빈은 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저번에 만났던 네 동창, 실력이 꽤 좋은 모양이야.”

    매니저가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끼어들었다. 그는 기쁘게 긍정했다.

    “나도 알아요. 김래빈은 brilliant하니까!”

    김래빈의 재능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첨예했다.
    둘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천문 관측 동아리는 그 특성상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늦은 밤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할 때가 있었다. 연습을 빠지고 싶은 날이면 차유진은 학교 동아리 핑계를 대며 별을 보다 갔다. 별을 보다 갔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별 보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보다는 별이 뜰 때까지 동아리실에 누워 노닥거리거나 김래빈을 졸라 별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재미있었으니까.

    그 이야기조차도 듣고 싶지 않을 때면 차유진은 김래빈이 하나 둘 쌓아둔 습작들을 제멋대로 듣곤 했는데 아직은 터치가 거친데도 하나같이 선명하던 그 곡들을 떠올리면 그가 스물여섯에야 커리어를 시작한 건 그의 기준에선 한참 아까운 일이었다. 대학이며 군대며 그런 것들이 다 뭐라고.

    물론 차유진은 알았다. 재능과 별개로 김래빈이 맞춘 것처럼 그에게 맞는 편곡을 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차유진을 잘 알고 오래 지켜봐 왔기 때문이란 걸. 그 근간에는 김래빈의 감정이 있었다. 그가 눈치 챈, 눈치채버린.

    물론 그 고지식하고 작곡을 사랑하는 김래빈이야 사람을 가려가며 일감에 공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취향이 분명하고 안목이 있으니 그의 무대는 틀림없이 그 마음에 들었을 테고, 특히나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상대라면 별 사감이 없더라도 계속 챙겨 봤겠지. 그러나 이런 독특한 강조는 무대를 보는 것만으로는 나올 수 없다. 이건 그보다는 좀 더 사적인 질감이다. 무대 밖의 차유진, 그러니까 일상에서밖에 드러날 수 없는 그의 성격, 성향, 특징,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을 모으고 걸러 이제까지 차유진이 무대에서 잘 보여주지 못했던 매력의 색을 입혀 곡으로 뽑아내는 그 솜씨.

    그거야말로 김래빈이 한 때 그를 내도록 생각했음을, 몇 번 안 되는 동아리에서의 만남과 일과 속에서의 엇갈림에서 집요하게 차유진을 그 시선 끝에 두었음을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든이 이걸 알게 되면 감 다 떨어졌다며 놀렸겠는걸.’

    왜 그 때는 눈치를 못 챘을까, 궁금해하며 차유진은 다시 곡을 재생했다. 다시 별의 반짝임이 튀었다.

    노래 가사건 팬서비스건 아이돌로 살다 보면 별별 비유와 표현, 의미부여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지구에 닿는 별빛이 사실은 저 먼 우주, 빛의 속도로도 몇 십 년이 걸리는 거리에서부터 왔음을 노래 가사로 배웠다. 정작 별을 보던 동아리에서는 한 번도 알려준 적 없는 지식 토막이었다.

    별빛처럼 몇 년을 흘러 그에게 도달한 감정의 흔적을 허밍으로 더듬어가다가 차유진은 그 별의 현재가 못내 궁금해졌다. 8년이라는 시간은 김래빈에게 꿈처럼 길었을지, 혹은 어제처럼 짧았을지, 김래빈의 감정은 그래서 현재진행형일지.

    ‘뭐. 곧 알 수 있겠지.’

    차유진은 김래빈과 잡은 다음 약속을 떠올렸다.

    플라네타리움

    김래빈은 빈말을 할 줄 몰랐고 차유진은 그 뿌리를 이 나라에 두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관용구로 받아들였을 언제 밥 한 번 먹자던 그 흔한 약속은 그 둘에게는 결국 두 번째 만남을 예고하는 말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차유진과 그는 활동을 앞둔 차유진의 식단 조절용 메뉴를 앞에 두고 다시 만났다. 

    약 8년 동안 연락도 거의 없던 동창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오로지 사소한 몇 개의 기억과 음악, 음악뿐이었다.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은 마치 비즈니스 미팅처럼 차유진의 솔로곡으로 넘어간 그의 작업을 대화주제로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차유진은 여전히 차유진이라, 어색하게 시작한 그 대화가 김래빈의 작업 겸 개인공간을 즉석으로 방문하는 것으로 결론 나는 데에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의 공간 안에서도 차유진은 주눅 들지 않고 그의 곡들을 들려주기를 요구했고, 심지어 미완성곡 중 하나를 다음 앨범에 쓰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조르며 이제 고작 팀의 막내이자 경력 반년 차 김래빈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군기가 바짝 든 신입사원 김래빈은 규칙과(“차유진! 회사에는 체계와 절차라는 게 있어!”) 상식을(“내 경험이 아직 프로젝트를 주도하기에는 변변치 못해”) 들먹여가며 겨우 그 말도 안 되는 말을 억누르곤, 묘하게 불만 가득해진 차유진의 주의를 돌릴 겸 작곡 프로그램의 창을 열고 음을 찍었다.

    정말 별 거 아니었다. 비록 김래빈이 차유진이 탐내던 그 미완성곡의 빈 공간을 습관적으로 차유진에게 어울릴만한 요소들로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긴 했지만, 곡의 밀도가 높아졌음 높아졌지 김래빈과 차유진 사이에는 뭔가를 촉발할 만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어진 차유진의 질문은 그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재앙이었다.

    “김래빈 나 좋아해?”

    키보드를 만지던 손이 삐끗, 어긋난 건반을 누른 탓에 뜬금없는 불협화음이 작업실을 울렸다. 차유진은 폭탄 같은 말을 던져두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이어트용 탄산음료 병의 뚜껑을 열고 있었다. 김래빈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가, 모니터 속 마디에 어울리지 않는 흔적을 남긴 그의 동요를 꾹꾹 눌러 지웠다. 눈치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은 지금보다도 더 많이 서툴고, 사람들은 종종 그가 속내를 전혀 감추지 못한다고 평했으므로.

    그래도 혹시 몰라 그는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그 좋아함이 혹시 친구 사이의…,”

    어림도 없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채 빤히 절 보는 차유진의 얼굴이 김래빈이 내놓은 답이 정답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좋아했어. 옛날에, 고등학교 때.”

    그는 기어이 자백했다.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해 시선을 내리깔며 김래빈은 자신의 얼굴이 너무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자신의 부끄러움은 차유진에게 그대로 탄로 났으며 곧바로 다음 질문이 떨어질거란 것도 모르고.

    “그럼 지금은?”

    “뭐?”

    “지금도 내가 좋아?”

    그가 되물은 건 질문을 다시 듣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지만 차유진은 회피하지 말라는 양 다시 한 번 물음을 못박았다.

    “그건 왜 묻는데?”

    그는 대답 대신 이유를 물었다. 아까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었던 것은 차유진과 그가 공유했던 저 옛날의 시간과, 그를 일방적으로 바라봐왔던 그간의 날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재회하고 나서 이제 고작 두 번째, 일로 묶인 남에 가까운 사이.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착각을 할 만한 어떤 일도 없었다.

    차유진은 대답 대신에 나지막하게 허밍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다른 사람이 만든 뼈대와 살에 그가 몇 번의 터치를 덧대어 그에게 넘겼던 곡이었다. 그에게 갈 것이 분명해 작업 내내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유진을 생각하며 덧대었던 아주 소소한 부분에서 정확하게 끊은 차유진이 여보라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듣고도 발뺌할 거야? 시선에서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옛날 몰라. 이거 김래빈 최근에 작업한 거야. 이거 듣고 알았어. 김래빈 나 계속 생각했어.”

    그는 침묵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몰랐구나.

    “그럼 앞으로는?”

    “…….”

    “김래빈?”

    “…모르겠어.”

    침묵은 별 소용이 없었다. 김래빈이 패배를 선언했다.

    차유진은 데뷔를 하자 학교에 나오는 날이 점점 더 적어졌고 그 역시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동아리 활동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부원을 맞이하지 못한 천문관측 동아리는 곧 폐부되었다.

    차유진과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는 생각했지만 동아리 외에는 딱히 연락할 용건으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데뷔 후에 얼마나 바쁠지 충분히 짐작 가니 용건 없이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꾸준히 연락하기도 좀 그랬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닫고는 혹시 들킬까 더 조심스러웠던 것도 있고.

    그래도 한동안은 때때로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면 아주 간간히 뒤늦은 답장이 왔다.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도 스크롤을 내리면 그의 메신저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차유진과의 대화방은 김래빈이 대학에 가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점 아래로 밀려나갔고, 번호를 바꾸었는지 대화방 너머의 상대가 사라진 이후로는 몇 번의 업데이트와 데이터 초기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졌다.

    그 뒤로는 오로지 화면 너머의 차유진만이 존재했다.

    차유진은 잘 나가는 아이돌 일원 중 한 명이었고 청소년 시기의 행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 그와 같은 예고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김래빈에게 학창시절의 차유진을 묻곤 했다. 그 때마다 그는 말을 아끼며 고개를 저었는데 그의 성격과 주변머리를 아는 사람들은 으레 같은 학교라도 친하진 않았나보다, 하고 결론 내렸다.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차유진과의 추억이 다른 사람에게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가 되지 않기를 원했는지도 모르지.’

    고등학교 때의 차유진은 그의 이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춤도 재능도 상관없이 그저 오롯이 차유진이어도 괜찮았다. 그래서인지 김래빈은 종종 닿을 수 없는 화면 속 차유진이 낯설었다. 그가 알고 있던, 제 옆에서 말하고 움직이던 차유진과 연예인 차유진은 가끔 다른 사람 같았다.

    ‘화면 속 차유진도 어쨌든 차유진일 텐데.’

    그는 때로 그가 기억하고 있는 차유진이 실제의 차유진인지 아니면 그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의 차유진인지를 골똘히 고민했다. 그가 그리웠지만 저 차유진이 제가 그리워하는 그 차유진인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화면 속의 차유진을 보면 친숙한 듯 낯설고, 존재감만이 폭력적이었다.

    8년 동안, 살아 숨 쉬던 언젠가의 차유진이 점점 화면 너머 우상으로, 그리고 다시 관념으로 제 안에서 변해가는 과정을 그는 전부 겪었다. 장막에 투영된 가짜의 별을 보는 것처럼,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어떤 존재를 더듬는 것처럼. 차유진이 소속된 회사에 들어가면서도 재회할 때까지 그를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지금의 네가 비현실 같아. 가만히 말을 삼키다가 그는 아, 하고 떠올린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어느 쪽이든 일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야, 차유진. 애초에 우리가 마주칠 일이 많을 리도 없고.

    유성우

    유성우가 떨어지는 밤이었다. 사람들이 맨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제법 많은 양의 유성우가 떨어질 거란 예측은 큰 사건 없던 연말의 소소한 뉴스거리가 되었다. 물론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별은 웬걸. 차유진은 하늘 한 조각 볼 수 없는 서울의 어느 엔터 사옥 지하 연습실에 드러누워 있었다. 데뷔를 앞두고 예정자들을 갈아 넣는 바쁜 스케줄은 그 차유진조차 별을 보러 잠깐 나가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그는 유성우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몇 달 전부터 알게 모르게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김래빈과는 달리 그가 천문관측 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는 별이 좋아서가 아니었으니까. 떨어지는 별에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그 오래되고 로맨틱한 기원행위를 진심으로 믿는 건 어린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 아직 만으로 열여덟 살에 불과한 차유진은 섣부르게 으스댔다.

    ‘김래빈? 김래빈은 그럴 수 있지.’

    김래빈은 생일도 그보다 한참은 늦을뿐더러 묘한 구석에서 순진해빠진 데가 있었으니까. 그는 코웃음 쳤다.

    그럼에도 고작 별 하나 못 봤다고 이렇게 삐딱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 아마도 그가 여유가 없기 때문이리라. 데뷔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데뷔 조 사이에서는 안도와 초조가 동시에 돌았다. 서로 대칭을 이루는 감정이 양보 없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아닌 듯 은근히 날을 세웠고, 차유진 역시 그 속에서 유례없이 피곤했다. 갑갑했다. 어딘가 탁 트인 곳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군중 속 고독이라도.

    지하실에 벌렁 드러누운 그에게 데뷔 조 동료 몇 명이 숙소에 안 들어갈 거냐며 말을 걸었지만 차유진은 설렁설렁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래. 그럼 내일 봐.”

    굳이 그의 곁에 남아있지도, 그를 끌고 돌아가지도 않을 적당한 거리의 동기들은 적막을 남기고 사라졌다.

    연습은 끝났으니 지금 주차장에라도 나가면 별똥별 한 두 개 정도는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차유진은 미적미적 몸을 굴렸다. 막상 볼 수 있다고 하니 내키지 않았다. 빛공해 심한 이 도시에서 가느다란 빛줄기를 찾을 일이 막막해서일지, 아니면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유성우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넬 누군가가 없어서일지.

    그는 맥없는 손길로 휴대폰을 죽 끌어당겼다. 김래빈은 평소에도 연락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답장은 성실하게 잘 해주었지만 먼저 연락을 하는 건 용건이 있을 때 정도일까. 방학을 맞아 간만에 조부모를 본다 했으니 핸드폰은 어딘가 구석에 처박아두었을지도 몰랐다. 김래빈의 교우관계야 올해 전학 온 그보다도 빈약했고, 묘하게 올드한 데가 있어 십대들이 휴대폰을 붙들고 있을 만한 이유를 차지하는 태반의 것들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도 시시콜콜 연락을 하는 편도 아니었고. 최근에는 바쁘다고 휴대폰을 버려둔 지도 꽤 되었다.

    ‘마지막 연락은, 가만있어보자. 언제였지?’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별을 볼 게 아니라면 이제는 진짜로 몸을 일으켜 숙소로 돌아가 쉬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켰다. 켜자마자 울리는 각종 알림은 빠르게 넘겨버렸다. 그를 찾는 친구들, 시답지 않은 연락들, 아, 동생한테 온 메시지는 좀 이따가 체크하기로 하고.

    “음?”

    알림을 손가락으로 연신 넘겨 없애던 차유진이 영문 모를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김래빈. 이름 세 글자로 저장해두었던 연락처가 그 알람들 사이에 조붓이 끼어있었던 탓이다. 무슨 일 있나, 하고 대화창을 열면, 항상 사담 없이 말풍선을 꽉 채워 용건을 보내던 김래빈답지 않게 짧은 몇 마디와 영상 한 개가 올라와 있었다.

    [서울은 별이 잘 안 보일 테니까.]

    차유진은 영상을 재생했다. 까만 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줌을 엄청 당긴 것 같았지만 휴대폰으로 직접 촬영한 건지 화질은 좋지 않았다. 1분 30초 남짓? 영상은 길지 않았다. 그는 영상을 다시 한 번 재생했다. 먼지인지 뭔지 모를 작은 점들이 겨우 별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면 그 사이에서 몇 줄기인가의 실선이 스쳐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김래빈 이거 뭐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메시지 옆의 숫자가 사라졌다.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며 차유진은 이어폰을 연결했다. 곧 메시지가 떴다.

    [너 요새 연습 때문에 바쁘다며. 유성우까지 챙겨 볼 여유가 없을 것 같아서 내가 찍었어. 그래도 강원도가 서울보다는 별이 잘 보이니까. 더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좋았겠지만 일단은 그게 내 휴대폰 한계야.]

    그 뒷말은 약간의 텀을 두고 도착했다.

    [너는 아마 이런 게 없어도 잘 하겠지만 무언가 하나라도 더 응원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친구 입장에선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그는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소리의 볼륨을 조금 더 키우자 적막 사이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잘 안 보이네. 속삭임에 더 가까운 목소리였다. 작은 한숨 소리, 그리고 추운 듯 떨리는 숨을 길게 내뱉는 소리. 추운 겨울이었다. 강원도는 서울보다 더 춥다고 했던가, 따뜻하다고 했던가. 그 소리를 들으며 차유진은 김래빈이 몇 시간이나 밖에서 기다렸을 지를 어림해보았다.

    화면은 일정하지 않았고 가끔 떨리는 것처럼 흔들렸다. 노이즈가 잔뜩 낀 어둠 속에서 다시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가느다란 빛줄기가 하나, 둘.

    차유진은 웃고 있는 제 입가를 문질렀다. 놀랍게도, 위안이 되었다. 천문대가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유성우를 송출하는 이런 시대에 잘 찍히지도 않은 핸드폰 영상을 직접 보내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It’s so sweet of you. 고마워. 나 더 열심히 해. 그를 응원했던 사람들에게 보내던 상투적인 문구 대신 그는 김래빈 소원 뭐 빌었어? 하는 뜬금없는 말이나 보내길 선택했다. 곧 돌아온 김래빈의 답장은 정말로 그다웠다. 조부모의 건강, 안녕, 누나의 건강과 성공, 선생님들과 그가 아는 사람들의 건강, 내년의 희망….

    [물론 차유진 너도 마찬가지고.]

    신기한 일이었다. 자기 자신의 부귀영화 대신 의미 있는 타인의 행복을 줄줄이 늘어놓는 어느 남자애의 리스트 마지막에 자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자꾸 웃음이 난다는 건.

    그 순간 차유진은, 그 스스로도 명확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스치듯 아주 짧은 소망을 가졌다. 그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혔고, 김래빈의 존재 자체가 흐려지며 다시 꺼낼 일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별을 향한 궤도에서 이탈해 세상에 부딪혀 깨지더라도, 산산조각난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줄기로 겨우 흔적을 남기다 사라지더라도, 어느 다정한 누군가의 옆에 내려앉아 그가 말하는 걸 들어주고 싶었노라고.

    별의 궤도

    [It’s me, 래빈! 전화 저장해.]
    
    이름 한 글자 없어도 저절로 누군가의 목소리로 읽히는 메시지였다. 그는 발신인 칸에 표시된 열 한 자리의 숫자를 눈으로 반복해 훑었다. 저번에 명함을 주고받으며 알게 된 매니저의 번호와도 달랐고,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차유진의 학창 시절 번호와도 달랐다. 차유진의 개인 번호인 모양이었다. 
    
    [차유진?]
    
    답장을 보내면서 그는 의외라고 중얼거렸다. 차유진의 솔로 활동 작업이 끝난 뒤로 그를 한동안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데뷔한 지 만 7년. 재계약을 앞두었으나 그 가능성은 불투명한 그룹의 활동을 회사가 제대로 지원해줄 것 같지 않다는 게 김래빈이 속한 팀의 중론이었다. 그 그룹이 한동안 앨범 낼 일이 없으니 공적으로 만날 일도 없을 테고, 사적으로 만나기에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가 껄끄러웠다.
    
    ‘어느 쪽이든 일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야, 차유진. 애초에 우리가 마주칠 일이 많을 리도 없고.’
    
    그 말에 차유진은 잠시간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제 눈치로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표정 변화가 풍부해서 다행이라고 한때 생각했던 얼굴이 알 수 없게 적막한 채였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채 흘러가던 시간이 일초, 이초, 삼초. 그 이유를 알 수 없던 그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하나 둘 띄울 때쯤 느지막한 답이 돌아왔다.
    
    ‘응. 김래빈은 그럴 거야.’
    
    자신을 좋아하는지를 캐묻던 사람치고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기뻐하는 것 같지도, 그렇다고 아쉬워하는 것 같지도 않은 담담한 얼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나오지 않는 손, 애매하게 내리깔리던 시선. 
    
    그러고는 활동기간 내내 연락이 없어서 김래빈은 역시 만날 일이 많지 않으리란 제 예측이 맞았구나 싶었다. 그는 대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방송을 틀었다. 그가 좀 더 정교하게, 조금 더 풍부하게 다듬은 곡을 덧입은 차유진이 거기에 있었다. 여전히 반짝이고, 예전만큼 사무치게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랬는데.
    
    같은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 김래빈 나랑 별 보러 가!
    
    “갑자기?”
    
    - 예약했어! Camper van? 매니저 형이 별 잘 보이는 곳 찾았어. 김래빈 안 바쁘면 나랑 가.
    
    예약한 날짜라며 차유진이 읊는 숫자를 그는 달력에서  찾아보았다. 연차를 낼 필요도 없는 주말. 토요일에 출발해 일요일에 돌아온다면 몸이야 좀 피곤하겠지만, 회사에는 당장 급한 일이 없으니 일에 큰 지장은 없을 터였다. 마치 노린 것 같은 날짜 선정이었다.
    
    “따로 일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차유진, 넌 나랑 가도 괜찮겠어?”
    
    우리는 아마 어색한 사이로 남았다가 서서히 멀어지리라 비관했던 이성이 끝내 말끄트머리에 조심스러운 질문을 붙인다. 돌아오는 답변은 명쾌했다. 
    
    - 난 김래빈이랑 가고 싶어.
    
    결국 그는 같이 가겠노라고 대답한 후 통화를 끝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번부터, 정확히는 차유진이 그의 감정을 알고도 별 대응 없이 돌아갔을 때부터 모든 게 뭉그러지고 경계선이 흐려져 서로 섞이는 느낌이었다. 차유진을 향한 그의 감정도, 차유진이 그와 맺고 싶어 하는 관계도, 그와 차유진 사이의 거리도, 그래서 그 자신은 대체 뭘 하고 싶은지도.
    
    ‘차유진은 저번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지도 몰라.’
    
    이건 차유진이 미국인이어서일까, 아니면 우리가 나이를 먹어서일까. 차유진은 워낙 단순하니까 이 일도 별거 아니라 생각했거나, 아니면 그에게는 고백이 너무 흔해서 감흥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김래빈이 그의 옛 여자 친구처럼 쿨하게 굴리라 기대했을지도 모르지. 아주 예전에 들었던 차유진의 연애사를 떠올리며 그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라도 안 된다 핑계를 대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그는 차유진에게 다시 연락하는 대신 캘린더 앱에 일정을 추가했다. 미련인 걸 알면서도 보고 싶었다. 
    
    차유진, 별, 캠핑. 그 와중에도 셋 중 설레지 않는 단어가 없었다.
    
    
    

    *




    별 보러 가는 캠핑. 김래빈은 열여덟 살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비슷한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다. 가 보진 못했다. 미성년자끼리는 숙소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도, 연습생이 회사가 정해준 연습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알았다. 둘 다 보호자가 강원도에, 그리고 저 멀리 바다 건너에 있는 고로, 보호자 동반을 기대해볼 수도 없었다.

    “학교 옥상 빌리는 것도 실패했어. 그때 선생님, Hmm…. 뭐라 했지?”

    “아무리 부 활동이라도 사전에 허가받지 않은 활동은 안전 및 형평성 문제로 학교에서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을 걸. 그리고 학교를 벗어난 캠핑은 허가해줄 수 없는 활동이라고 했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대충 비슷한 내용이었을 거야.”

    “나 아직도 이해 못 해….”

    삼각대를 설치하는 그의 옆에서 차유진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 위로 묵직한 카메라를 올리고 핫팩을 뜯어 흔들면서 그는 책임소재의 문제인 거겠지, 하고 덧붙였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왜 기록과 절차가 그렇게 중요한지, 왜 어른들은 어느 순간 몸을 그렇게 사리는 것처럼 보였는지. 비겁한 이해와 여전한 무지, 실낱같이 살아있는 부끄러움 사이에서 그 역시 천천히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웃음처럼 한숨이 샜다.

    “이제 불 꺼?”

    김래빈이 카메라를 세팅한 걸 확인한 차유진이 캠핑카의 모든 등을 껐다. 사위가 캄캄해졌다. 조리개를 잔뜩 넓혀 둔 카메라 액정에 밤하늘이 떴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단발의 셔터 음을 시작으로 설정해놓은 간격에 맞춰 데이터가 하나하나 쌓이기 시작했다.

    별의 일주운동. 지구의 자전에 맞춰 별이 남기는 궤적을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그들은 아주 오래도록 동일한 공간을 찍을 예정이었다. 이것도 고등학교 때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그 때는 엄두도 못 냈던 고스펙의 카메라를 이틀 동안 대여하는 게 지금은 너무나도 쉬웠다.

    “추워.”

    어둠 속에서 패딩을 걸친 차유진이 조심성 없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의 곁에 앉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겨울밤이란 대개 차고 시리고 바람이 날카롭기 마련이었다. 잔뜩 준비한 핫팩을 하나 더 그의 손에 얹어주고, 그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차유진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카메라가 빛에는 예민해도 소리에는 반응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추우면 들어가 있어도 돼. 어차피 사진은 자동으로 찍히잖아. 넌 이제 아이돌이니 목도, 몸도 아껴야하기도 하고.”

    나 혼자 있으면 재미없어. 투덜거린 차유진이 그에게 몸을 기울인다. 사람 한 명의 무게가 두터운 패딩과 패딩을 완충재 삼아 그에게 전해졌다. 체온까지 맞닿기엔 너무 두꺼운 방벽이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김래빈 옆이 편해.”

    차유진은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또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찰칵, 또 찰칵. 주변에 빛이 없고 인적이 드물어 적막하고 별 보기 좋은 공간에 연속적인 셔터 음이 고요히 흘렀다. 그 사이로 가끔 패딩끼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입김을 길게 뿜어내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세상에 그들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그는 기꺼운 착각에 편안하게 몸을 맡겼다. 한 장, 두 장. 셔터 음이 들릴 때마다 카메라의 작은 SD 카드에는 별의 미세한 움직임이 기록될 것이다. 수천 장의 사진을 합성하면 드러나는 거대하고 또렷한 원.

    “김래빈.”

    차유진이 그를 불렀다.

    “왜. 핫팩 더 줘?”

    어둠 속에서 모자를 뒤집어쓴 고개가 좌우로 움직인다. 나 할 말 있어. 핫팩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차유진의 손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따뜻한 손끝이 얼어있는 그의 손을 매만졌다가, 느슨하게 손가락을 끼웠다가, 숨을 들이키고는 다시 단단히 붙들었다. 그가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마치 도망가지 말라는 듯이.

    “나도 답 못 냈어, 김래빈.”

    그건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백이었고,

    “나랑 데이트 해.”

    그건 그가 들을 거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 뭐? 하고 되물으니 손을 쥔 차유진의 아귀힘이 좀 더 강해졌다. 초조한 듯이, 불안한 듯이. 손이 잘게 떨리는 게 꼭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처럼.

    “김래빈 나 지금 좋은지 잘 모른다고 했어. 모르면 알 때까지 해보면 돼.”

    시선이 마주친다. 이 어둠 속에서도 일말의 반짝임 어린 눈이 그를 잡았다. 찰칵거리는 카메라 소리 사이로 그가 한동안 느꼈던 모호를 아는 것처럼 말이 이어졌다.

    “나도 몰라. 옛날에도 지금도 그래. 그러니까 데이트 해. 그러면 확실해져.”

    차유진의 말은 길고 서툴게 이어졌다. 만나보고 즐거우면 또 만나고, 또 즐거우면 그 다음 약속을 잡고. 감정에도 관계에도 잠시간은 유예라는 도장을 찍어두었다가 마음이 명확해지면 결론을 내자고.

    “우리 너무 오래 안 만났어. 그러니까 우리 시간 필요해. 기회도.”

    그 기회는 나에게 주는 거야, 혹은 너에게 필요한 거야?

    김래빈은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차유진은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데이트가 연인간의 행위일 필요가 없다는 걸 그는 미국의 드라마들을 통해 배웠다. 그런데도 말이 끝난 차유진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놓아주지 않았고, 긴장으로 다물어진 입은 낯선 표정이었다. 결론은 불확실했고, 많은 것들이 아직 불명의 영역에 놓여있었다. 그래도 그의 말대로 여러 번 만나고 나면, 자신의 마음도 이 관계도 보다 명확해질까.

    “그래.”

    김래빈은 그렇게만 말했다. 서로 즐거운 동안만 데이트를 하다가 어느 날엔 결론을 내자. 수천 장의 사진이 별의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하루하루의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고 나면 우리의 궤적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보일 거라고 믿자. 그 많은 말들은 다짐으로만 가슴 속 어딘가에 남겨놓고.

    “네 말대로 우리 만나보자, 차유진.”

    그는 다시 대답했다. 허락을 받는 것처럼 차유진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시작이었던 거구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닿은 숨이 따뜻해서 맞닿은 코끝이 차가운 건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오로라

    차유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을 때 김래빈은 마침 개인 작업을 끝내고 헤드폰을 벗고 있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그는 젊음을 불태우는 대신 앞으로의 커리어를 대비해 개인 작업을 쌓고 있었다. 회사에 말뚝을 박는 것보다는 작곡 팀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걸 고려해보라던 대학 선배 및 주변의 충고를 신중히 고려한 결과물이었다. 충고를 해준 사람 중에서는 심지어 회사 사람까지 있었으니, 충분히 새겨들을만한 조언임이 분명했다.

    하루는 좀 쉬어볼까 고민하다 그래도 꾸준히 작업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노트북을 열었는데, 다행이었다. 피로에 못 이겨 먼저 누웠다면 전화가 왔다는 것도 몰랐을 테니.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Hello, 김래빈! 좋은 밤! 내가 깨웠어?

    화면 가까이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던 차유진이 통화가 연결된 걸 확인하더니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제 얼굴이 잘 나오도록 휴대폰을 올려둔 거치대를 조정하고는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상대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 Oh. 김래빈 침대 아냐. 안 자?

    “작업을 좀 하고 있었어. 너는 지금 촬영 중인 거 아냐? 이렇게 전화해도 돼? 내가 깨어있었으니 무사히 받긴 했다만, 설마 한국이 몇 시인지 생각도 안 해보고 무작정 전화한 건 아니지?”

    걱정으로 시작해 습관적으로 타박으로 끝내고야 만 김래빈이 제 풀에 찔려 입을 다물었다. 선배들에게는 깍듯이 대하고 있는지, 하고 싶은 거 한다고 막 튀어나가는 건 아닌지. 아직도 입 안에 걱정이 간당간당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열여덟 김래빈이 열여덟 차유진에게 익숙하게 던졌던 걱정과 잔소리들은 스물일곱 김래빈이 스물일곱 차유진에게 익숙해지면서 슬그머니 다시 부활했다. 이제는 차유진이 그보다 촬영과 방송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 걸 알면서도.

    - 촬영 잠깐 쉬고 있어! 우리 Aurora 보러 간대. 김래빈 좋아할 것 같아서 전화했어.

    턱을 괸 차유진이 잔소리에 고개를 막 젓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웃으며 소리 낮춰 속삭였다. 우리 전화 많이 못한 거 아쉬워서 전화했어. 김래빈 안 받으면 끊으려 했어. 이어지는 말들은 속삭임이 늘 그렇듯 지나치게 간질거렸다.

    차유진은 지금 예능촬영을 하러 아이슬란드에 가 있었다. 시차가 9시간이라고 했던가. 지금이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좀 넘은 시간이니 그가 있는 곳은 늦은 오후쯤 될 터였다. 밀도 있는 작업으로 평소보다 피곤한 뇌가 느리게 답을 도출해냈다. 차유진은 한국의 아이돌은 예능이니 모델이니 하는 부가적인 활동을 너무 많이 한다고 거침없이 평가하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새로운 시도를 할 만한 대부분의 일을 좋아했다. 이번 촬영도 선배 연기자들과 함께 레저를 접목한 여행을 가는 예능이라는 걸 듣자마자 신나서 받아들였던 걸 김래빈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도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오로라도 보는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때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다 좋아서 이곳저곳 알아보기도 했다. 결국 가보진 못했지만.

    “나 대신 잘 보고 와.”

    - 응. 김래빈 보고 싶으면 나중에 나랑 또 와. 여기 좋아.

    화면 속 차유진의 뒤로 촬영 스텝으로 보이는 사람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습관적으로 차유진과 나누던 대화를 곱씹었다. 이 정도는 괜찮았다. 친구 사이에서 일어난 대화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중에, 하고 답하려다가 그는 입을 다물었다.

    ‘나중을 기약할 수 있을까.’

    그들이 데이트라는 이름으로 결론을 미뤄둔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그 사이 그는 어느새 관계자와 차유진의 열성 팬들 사이에서 차유진의 절친으로 도장 찍혔다. 그간의 데이트가 문제였다.

    처음에는 심야 영화, 그 다음에는 국악 공연이었나. 김래빈은 맹세코 그런 자리에서조차 차유진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어쩌면 그 추임새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했던 걸 기억해 맘대로 움직이고 추임새를 넣어도 되는 공연을 일부러 골랐는데 그가 생각해도 차유진의 목소리와 발음은 귀에 독특하게 꽂히는 데가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알아볼 만 했어. 내가 경솔하게 장소를 고른 게 맞아.’

    목격담은 빠르게 번졌지만 큰 이슈가 되지는 않았다. 그가 차유진의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게 알려지고, 같은 소속사에서 일하게 된 일반인 친구 정도로 관계가 정리된 뒤부터는 둘이 어딘가에서 함께 목격되어도 친한 친구끼리 같이 놀고 있겠거니 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종종 차유진은 김래빈을 놀리듯 익명의 목격담(‘캘리촤 지같은 존잘남하고만 다니네. 동창이라더니 쟨 왜 데뷔 안함?’)을 들고 왔지만, 둘 사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아이돌로서 차유진의 입지를 고려한다면 다행인 일이기는 하지만….’

    김래빈? 대답 없는 그를 차유진이 다시 불렀다. 통화 연결을 확인하고 있는 듯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망설이다 입을 떼었다.

    “차유진, 오로라를 나중에 같이 보러 가자는 건 우리가 아직 나중을 기약해도 되는 사이라는 뜻이야?”

    김래빈은 지난 데이트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차유진의 얼굴이 잘 알려져 있는 만큼 밖에서 돌아다니는 덴 한계가 있어 데이트장소는 주로 그의 작업실이나 차유진의 개인 거처였다. 둘은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자주 티격태격했다. 밥을 할 때가 제일이었다. 레시피 순서나 방법을 가지고 엄청 다퉜으니까. 그래도 꼭 그만큼 자주 입을 맞췄다. 남는 시간엔 머리를 맞대고 음악을 논하거나 가까운 미래를 이야기하거나 영화를 봤고, 서로에게 어깨나 고개를 기대는 데 점점 더 익숙해졌다. 데이트를 하면 할수록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가끔은 멀리 놀러갔는데, 짚라인을 타러 갔을 때 김래빈은 차유진이 어린아이에겐 무릎을 굽혀 눈을 맞대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데이트가 항상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어서, 힘들게 날짜를 맞춰 천문대를 예약했을 때에는 비가 내렸다. 창밖으로 바로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곡예처럼 오르는 버스를 타고 올라 볼 수 있었던 건 겨우 뚜껑 덮인 지붕 아래의 대형 망원경이었다. 둘이서 얼굴을 맞대고 허탈하게 웃고는 기념품을 사러 갔었지. 그래도 즐거운 기억이었다.

    차유진도 그동안 나만큼 즐거웠을까.

    그의 물음에 차유진은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다. 그렇지만 잠깐이었다. 시선을 든 차유진이 그에게 또렷이 눈을 맞춰왔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 시선에 김래빈은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건 차유진이 아니라 내 쪽이었구나.

    - 응. 나 김래빈이랑 하고 싶은 거 많아. 같이. 물론 김래빈도 Yes 해야 해.

    단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구나. 그 말에 김래빈은 깨달았다. 제 무의식 속에선 이미 예전에 났을 결론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며, 다음 기회가 있을지 의심하며 데이트 약속을 잡던 시기를 지나 데이트의 횟수가 쌓일수록,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점점 차유진과 연락을 하고 다음 약속을 잡는 게 당연해지고,

    다시 일곱, 여덟, 아홉, 열, 혹은 그 이상.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중을 기약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의 컴퓨터 하드에는 차유진에게 선물할 곡이 하나 둘 쌓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궁금해 했던 차유진의 옛 모습이나 가족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고, 사진첩에는 친구와 그 이상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사진이 가득했다. 최근에는 차유진이 아이돌에서 은퇴한 후의 계획을 이야기해보기도 했다. 김래빈은 변한 자신을 깨달았다. 차유진이 무대에서 내려와도, 그래서 저 먼 하늘에 빛나던 항성이 하나 사라져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차유진이 제 곁에 있으리라고 상상하게 되었으니까.

    아주 길게, 또 멀리 돌아온 기분이었다.

    “차유진.”

    그는 상대를 불렀다. 휴대폰 화면의 화질 너머로 제게 귀를 기울이는 얼굴이 보였다. 여전히 근사하게 웃는, 빛나는 그 얼굴.

    김래빈은 아직도 가끔 열여덟 그들의 시간과 오래도록 차유진을 그리워했던 날들을 곱씹었다. 그렇지만 이제 화면 너머 차유진의 얼굴도 예전처럼 아득히 멀지 않았다. 8년의 공백. 어정쩡했던 사이. 그 간극이 좁혀지기까지 그들에게 부족했던 기회와 시간은 차유진이 벌었다. 그렇다면 그 결론은 그가 전해야만 했다.

    “네가 돌아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얼굴을 보고 하고 싶은 말이라 지금 당장 하지 못하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해.”

    -김래빈?

    “아주아주 중요한 이야기야. 우리 미래가 걸려있으니까. 그러니 통화는 여기까지 하자. 촬영 잘 해. 조심히 돌아오고.”

    김래빈이 제 마음을 돌아보는 사이 제멋대로 아이슬란드의 명소를 줄줄 늘어놓으며 떠들던 차유진이 무엇을 예감했는지 입을 벌렸다. 그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보지 않았다. 마음이 너울거렸다. 기억과 감정이 총천연색의 빛을 띠고 그를 맴돌았다. 이곳에도 오로라가 있었다. 설레도록 아름다웠다.

    비로소 그는 열여덟 차유진에게 안녕을 고하고 스물일곱의 차유진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 둘은 아마 오래도록 지상을 함께 걸으리라. 김래빈은 차유진이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로 했다.

    가수X작곡가 AU / 천체현상 옴니버스 단문모음 윶랩

  • 보호된 글: xx의 재정의

    보호된 글: xx의 재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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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자 날개

    그림자 날개


    목차

    • 국경의 그림자
    • 범에게 이무기 날개 달아주는 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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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과 인간 AU 윶랩 모음(2023)

  • 무형을 사르며 돌이켜 널

    무형을 사르며 돌이켜 널

    ※ 링크는 새 창으로 열립니다.

    목차

    현대 판타지 AU 윶랩(2023)

  •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무엇이든 찾아드립니다.

    • 유진래빈 앤솔로지 PLAYLIST 수록 글
    • Spring out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날조가 많습니다.

      긴 기적소리가 울렸다. 기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흐린 하늘로 증기가 쉴 새 없이 솟아올랐다. 김래빈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주저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저 기차 어딘가에 그가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 상대가 타고 있으리라. 그는 회중시계를 들어 올렸다. 곧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길고 긴 세월을 살아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요괴들은 보통 시계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으나 인간의 세계는 이제 정해진 시간에 맞춰 굴러가는 고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가자. 차유진. 역까지 마중을 나가려면 지금쯤은 출발해야 해.”

      그의 옆에서 입 안의 것을 우물대던 차유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 사람, 뭘 찾아?”

      “자식.”

      차유진은 여전히 말이 조금 어눌했다. 처음 만났을 때야 어린 요괴라 그랬다지만 이제는 둘이 만난 지도 제법 시간이 흘러 말이 늘 법도 한데, 언제나 그의 앞에선 아이 같은 말투가 먼저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대상이어서인지도 모르고, 어쩌면 차유진이 다른 나라의 말에 지나치게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툭하면 몇 달을 사라져 바다 건너 인간들의 주변을 맴돌며 경호 일을 도맡아 하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차유진은 그 덕에 미리견(彌利堅 : 아메리카의 음역)의 말인지에 아주 능통해졌다. 그들의 말은 통 알아듣지 못하는 김래빈과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둘 사이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둘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기차에서 쏟아져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이 찾던 이들은 한참이나 뒤에 나왔다. 허름한 인상의 노부부였다. 내내 서서 왔다는 그들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넷은 걷기 시작했다. 기차역에서 다시 전차를 타고, 다시 또 야트막한 산을 올라 채석장이 나올 때까지.

      아무리 가스등이라는 게 생겨났다고 해도 어디에나 설치할 수는 없으니 여전히 많은 작업장이 어둠이 내리면 문을 닫았다. 채석장 역시 작업을 하는 인부 하나 없이 굳건히 닫혀있었다.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한다는 간판과 철조망 앞에서 김래빈은 차유진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가벼운 몸짓으로 철조망을 뛰어넘었다. 그 뒤를 따르기 전, 그는 뒤를 돌아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두 분께선 여기서 기다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산 위로 올라올 때부터 불안한 기색이던 여자는 채석장의 안내문을 보고 무엇을 직감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았다. 제 아내를 붙든 남자가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소리 없이 철조망을 건너뛰었다. 날이 흐려 달빛도 비치지 않아 철조망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요괴에게는 어둠을 비추기 위한 불이 필요 없으니 그에겐 문제없었다. 더구나 김래빈처럼 그 본신이 등불 자체라면. 도깨비불조차 켜지 않고 채석장의 샛길을 걷던 김래빈은 차유진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채석장의 한구석이었다. 비탈이 무너진 것처럼 거대한 돌이 어지럽게 쏟아진 틈으로 작고 가냘픈 팔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혼의 빛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 인간으로선 불가능할 힘과 속도로 돌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김래빈은 시신을 쌀 무명을 바닥에 주섬주섬 펼쳤다.

      아직 성년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어리고 마른 체구였다. 가출인지, 납치일지, 제대로 된 고용이었을지 아니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 있는 시대였다. 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어디에서나 일을 찾는 사람들과 그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힘들고 고된 일일수록 드문드문 인력이 부족했고, 어릴수록 더 싸게 부릴 수 있어서 작업장에서는 납치되어 온 걸 알면서도 모른 척 암암리에 사람을 샀다. 언젠가 집을 나섰다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인간의 무너지고 상한 얼굴을 그는 잠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서툰 손놀림으로 그를 감쌌다. 김래빈이 염한 시신을 차유진이 둘러멨다. 이 영혼도 이제 제 가족에게 돌아갈 때였다.

      수습한 시신을 노부부 앞에 내려놓으면 비명을 닮은 오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와 차유진은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잠시 침묵했다. 일면식 없는 인간의 슬픔은 그들에게 너무 멀었고 보편적인 수준의 비애를 느끼기에는 그들은 이미 비슷한 광경을 너무 많이 보았다. 아들의 시신을 되찾아 준 것으로 저 인간과의 계약도 종료되었다. 그들에게는 노부부의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돈과 인간을 도와주었다는 증표가 남았다.

      김래빈은 조용히 읊조렸다.

      “돌아갈까?”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허가받지 않은 잡상인들이 모인 시장은 정돈이 되지 않아 시끄럽고 혼란스러웠다. 그 가운데를 헤쳐 나가던 사람들은 간혹 차유진에게 흘끗 시선을 던졌다. 낡은 군복, 파란 눈에 빨간 머리. 한성(漢城)은 조선의 수도로 조선에서 가장 큰 도시인 데다 다른 곳보다 양인(洋人 : 서양 사람을 가리키던 말)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라 이국적인 외모를 볼 일이 다른 곳보다 많을 텐데도 그랬다.

      물론 차유진은 양인이 아니다.

      김래빈은 인간들이 그에게 붙인 이름을 떠올렸다. 불가살(不可殺), 혹은 불가사리. 불을 제외한 무엇으로도 죽지 않고 끝없이 쇠를 삼킬 수 있는 요괴. 그래서 차유진은 전투가 일어나는 곳 근처를 좋아했고 가끔은 양인의 경호원이나 용병으로 가장하기도 했다. 본인 말로는 그 근처가 아무래도 주워 먹을 게 많다던데, 다른 사람 눈은 신경도 안 쓰고 고철을 사탕마냥 자꾸 까득거려서 그는 걱정이었다. 저게 인간 무서운 줄을 모르고.

      ‘그러다가 소멸할 뻔한 적도 있었으면서.’

      이제 인간은 요괴를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

      목종 4년, 서력 1518년. 한양의 모 씨가 집에 숨어든 요괴를 횃불로 쫓아낸 일이 조정에까지 올라 임금이 친히 교지를 내린 이래 인간은 불과 화약으로 요괴를 물리치는 법을 익혔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총통을 개량하고 화란(和蘭 : 네덜란드의 음역)으로부터 무기를 들여오더니, 기술을 익혀 기계라는 것으로 하여금 인간의 손을 대신하게 하였다.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어디서든 동과 구리, 철이 환영받았고, 산을 깎아 기차가 달리고 바다 깊숙이까지 스스로 헤엄치는 탐사정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산과 바다의 요괴들이 제 터전을 빼앗기고 인간 사이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여전히 배척의 대상인 채로.

      “차유진.”

      시장을 빠져나가 그들의 보금자리로 향하는 골목에서 그는 다시 차유진을 불렀다.

      “응?”

      또 시장 어디서 빼 온 건지 손톱만큼 작은 못을 손가락으로 굴리던 차유진이 해맑게 그를 돌아보았다. 그 뒤로 골목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벽보와 방이 보였다. 눈을 굴려 혹시나 그 벽보 중 그들을 찾고 있는 수배지가 있지 않을까 확인하면서 그는 물었다.

      “넌 시민권을 요청할 생각 없어?”

      요괴 시민권에 대한 칙서가 내려진 지도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모든 신문에서 며칠에 걸쳐 그 칙서에 대한 내용을 떠들썩하게 보도했기에 김래빈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리고 순한 나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이 나라 산천에 살고 있는 요괴 역시 그 책무를 다한다면 시민의 권리를 부여하기에 모자람이 없음이라. 일정한 재산을 갖추어 국가에 이바지하고 인간과 공존할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요괴에게는 시민 증서를 부여하여 다른 백성과 동등하게 대할 것이니…’

      한때 인간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이 오간 모양이지만 자격을 갖춘 요괴를 대상으로 시민권이 부여되고 있음은 사실이었다. 그 자격요건을 갖추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인간들 역시 초반과는 달리 최근에는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차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못을 공중에 튕기더니 그대로 입을 벌려 묘기처럼 받아먹었다. 아드득.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꼭 필요해?”

      “그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인간과 이렇게 지낼 줄 예상하지 못했잖아. 그리고 있어 나쁠 것도 없지.”

      시민권이 없는 요괴는 제대로 된 재판을 받기 어렵다. 그걸 제하고서도 김래빈은 항상 차유진이 지하나 밤보다는 햇빛 아래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제 정체를 감추거나 인간들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려면 시민권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차유진은 영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김래빈 하면 나도 해. 돌아오는 말도 열의 없이 대충이다.

      그는 저와 차유진의 조건을 되짚어 보았다. 둘 다 인간을 섭취하지 않으니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요괴라는 건 금방 증명할 수 있었다. 인간의 일을 하는 것도, 인간과 섞여 사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생활하는 방식이 그를 증명할 테니. 하지만 다른 조건은? 글쎄. 재산이 부족한 건 확실했다.

      “그러면 일단 인간을 도왔다는 증거를 모으면서 가능성을 고려해 보자.”

      그들은 골목의 그늘 속으로, 연이어 지하 수로로 파고들었다. 한성의 상수도가 연결된 복잡한 지하의 수로, 한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빈민이 둥지 트는 성 외곽에 그들의 보금자리도 있었다. 가로등의 빛도 닿지 않아 기계와 건물이 드리우는 어둠 속을 걸으면 빈민의 자식들이 헐벗은 채 그들 근처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김래빈만 보면 울거나 도망가던 아이들이었다.

      김래빈은 시장에서 싸게 산 누룽지 덩어리를 뭉텅이로 건네주었다. 그에게서 이미 여러 번 먹을 걸 받았던 아이들이 잽싸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 물에 넣고 잘 끓이면 서너 명은 먹을 양으로 불어나리라. 얼굴이 환해진 아이들에게 쉿 하고 손가락을 입에 대면 아이들은 깔깔 웃으면서 다시 흩어졌다. 그들이 요괴인 걸 아이들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관계없었다. 어쨌든 비밀은 지켜지고 있었다.

      위로, 조금 더 위로. 그들은 걸었다. 계단과 파이프를 밟아 오르다 보면 보다 지상에 가까운, 그리고 좀 더 깨끗한 물이 지나는 곳에 그들의 은신처가 있었다. 사는 이들이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아 비를 막는 용도의 천장만이 어설프게 하늘을 가리는 곳이었다.

      그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차유진 역시 덩달아 멈추었다. 누군가 그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인간. 중년 남성. 옷차림은 썩 대단치 못했고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무력이 대단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김래빈 저 인간 약해. 걱정 없어. 옆에서 차유진이 속살거리는 목소리에는 조용히 해, 하고 같이 속닥이면서.

      “도깨비님이 여기 계신다고, 들었는데…”

      차유진의 말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던 인간은 서신을 내밀었다. 서신에 찍힌 인장은 익숙한 것이었다. 옆에서 차유진이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인장을 확인하고 짧은 휘파람을 불었다. 인장은 그들에게 인간의 일을 소개해 주곤 하는 다른 요괴, 박문대의 것이었다. 그는 서신을 열었다. 종이 위에서 붉은 꽃이 끝없이 피어오르다가 기다란 천이 되어 사라졌다. 인간은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그림이 또다른 증명이 되어주었다. 그걸 확인한 차유진이 은신처의 입구 역할을 하는 장막을 걷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요력(妖力)으로 가려뒀던지라, 인간은 잠시 놀란 얼굴을 하다 두리번거리며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무엇이든 찾을 수 있으시다 들었소. 맞소?”

      넓지 않은 보금자리 안에서 인간은 무릎을 꿇었다. 서신의 인장을 봤을 때부터 그 질문을 예상하던 김래빈은 평연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도깨비를 찾아올 만한 일은 많지 않다. 이전에는 대개 요괴를 토벌하여 공을 세우기 위해 왔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었고, 그 외에는 절박하게 찾고 싶은 게 있을 때 왔다.

      그는 등불이었다. 정확히는 청사초롱. 인간에게 경사가 있을 때 가장 앞장서 들리던 등불이 아주 오랜 세월을 먹고 자라 요괴가 되었으니 그 역시 도깨비불을 길잡이 삼아 원하는 길을 찾아주는 데 능했다. 하지만 등불은 발 바로 앞을 비추는 불. 목적지가 불분명하다면 아무리 등불이 있어도 좋은 길로 이끌 수 없었다. 그러니 목적지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길에서는 등불을 든 이의 의지가 개입할 수밖에. 김래빈의 능력 역시 그랬다. 조금 헤매어도 괜찮다면, 등불을 목적지로 이끌 수 있는 건 탐색을 요청한 자의 굳은 의지였다. 그래서 김래빈은 인간을 시험해 보아야만 했다.

      “그러면 당신의 의지를 시험해 보겠습니다.”

      그는 등불을 띄웠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나타난 도깨비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차유진이 손을 들어 등불을 톡 건드렸다.

      “하지 마, 차유진.”

      그는 소리 낮춰 속삭였다.

      “김래빈 불 예뻐.”

      반대로 차유진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점잖지 못한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 차유진은 입술을 몇 번 비죽이고는 인간의 손을 끌어다 등불에 가져다 댔다. 인간은 흠칫 몸을 떨며 팔을 빼내려는 듯하더니, 불이 뜨겁지 않다는 걸 확인했는지 천천히 손을 등불에 맞대었다. 곧 꺼질 듯 흐리던 불은 어느 순간 점점 커져 환하게 은신처 내부를 밝혔다. 상대의 의지가 목적지에 도달할 만하다는 증거였다. 은신처에 그림자처럼 몇 개의 상이 떠올랐다. 부유한 차림새를 한 사람. 한성으로 추정되는 공간. 술자리. 좁고 어두운 통로. 그 모습들이 목적지로 향하는 길목을 잇는 징검다리일 터였다.

      “저걸 보고 뭔가 떠오르는 게 있습니까?”

      그는 상을 하나씩 띄우며 물었다. 상대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상을 한참 보더니 망설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괜찮았다. 김래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몰라도 어차피 의지가 확고하니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실마리를 알게 되리라. 대신에 그는 물었다. 당신은 무엇을 찾으러 예까지 오셨습니까.

      남자는 할아버지의 서화첩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의 조부는 서예로 이름을 날린 이였다. 당연히 그가 쓴 글씨며 서화 역시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가 찾고 싶어 하는 서화첩은 금전적 가치가 높은 건 아니라고 했다. 널리 알려진 시도 아니고 그가 어린 시절 시를 연습하며 썼던 것을 할아버지가 다듬고 그림을 그려서 감상을 붙인, 굳이 따지자면 조부와의 추억이 제일 귀한 가치일 법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조부 이후 그의 집안이 서서히 몰락해서 할아버지의 작품들도 하나씩 팔려나갔을 때도 그 서화첩만은 남자가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물건이 사라졌다고 했다.

      ‘도둑을 맞은 게 아닌가 싶소.’

      가산이 바닥난 후 식솔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집안이 어지러운 시간이 길어 물건이 드나드는 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고 했다. 남자는 이제 제게 남은 조부의 흔적은 그것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걸 찾아달라고. 집안이 몰락하여 사례는 충분치 못하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애원은 낡고 지치고 구차했지만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문대가 그림을 맡긴 이라면 사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남자는 몇 번이나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갔다. 다시 인기척이 사라진 집 안에서 김래빈은 의관을 정돈했고 차유진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김래빈.”

      제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 못 하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풀어헤친 옷자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인간이 돌아가고 나자 굳이 등을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해 공간을 채운 어둠 속에서 절 바라보는 차유진의 빛나는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의뢰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는 항상 그랬다. 무언가를 훔치거나 꼭꼭 감추어진 귀한 물건을 찾는 의뢰를 유독 좋아했다. 저번의 의뢰에서 차유진이 씹어 삼켰던 은행의 금고 문을 떠올려 봤다가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포식했지, 그때.

      “우리 내일부터 찾아?”

      “짐작 가는 바가 없으니 우선 범위를 좁히는 것부터 해야겠지.”

      머릿속에서 몇 가지 가능성과 방안이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졌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휴식해야 할 때였다. 인간의 의복을 가지런히 정돈해 둔 김래빈이 낡은 초롱으로 돌아가자 그 곁에 머리를 댄 차유진이 웅크렸다. 한성의 수많은 기계가 증기를 내뿜으며 삐걱대는 소리가 흐릿하게 적막을 채웠다. 그 위로 매연과 가스등의 불빛에도 살아남은 별빛이 쏟아져 내렸다. 맑은 새벽이었다.

    *

      남자는 서화첩을 찾을 때까지 한성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체류비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까지 그들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그와 차유진은 그 남자와 지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며 점차 범위를 좁혀나갔다. 그나 차유진이나 인세의 소문에 썩 밝지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에게는 소문을 물어다 주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신문 좀 봐요. 나야 까막눈이래두 도깨비님은 글자도 읽을 줄 안다 하셨으면서.”

      막자는 글은 못 배웠어도 몸이 날쌔고 귀가 좋았다. 눈치가 있어 일에 깊이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김래빈에게 필요한 이런저런 소문을 곧잘 물어오곤 했다. 이 빈민촌에 사는 아이 중에서도 제법 대장 노릇을 하는 아이였다. 그는 막자의 호의를 몇 년 전 고작 약 몇 포로 샀다. 더는 아이를 낳지 말자고 자식 이름을 막자로 붙이고도 기어이 또 막냇동생을 보고 만 부모 대신 동생의 약을 그가 구해주었을 때 막자는 제가 언젠가 꼭 보답해 드리겠다고 울었다.

      그런 막자가 이렇게 어이없어하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서화첩을 찾는 남자 앞에서 등을 띄웠을 때 나타났던 누군가의 모습이 모르기에는 지나치게 유명한 사람이어서였다. 김래빈이 머쓱하게 갓 끝을 매만졌다. 옆에서 차유진이 코웃음 쳤다.

      “김래빈 기억력 나빠.”

      “아니…! 나는 그저 인간에게 관심이 덜하고 더구나 인간보다 오래 살다 보니 신문에 자주 실리곤 하는 얼굴들은 어째 죄 비슷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에 잘 구분할 수 없었던 것뿐이야! 게다가 차유진, 그렇게 따지면 너도 알아보지 못했잖아!!”

      “나는 신문 안 봐! 김래빈은 신문 자주 봐! 그러니까 김래빈이 더 바보야!!”

      “고작 사람의 얼굴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상대를 바보로 칭하는 건 대단히 부적절한 언사야!”

      저기요, 할아버지들.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요. 막자가 떨떠름한 얼굴을 하건 말건 잠시 차유진과 투닥거리던 김래빈은 이내 갓을 고쳐 쓰며 어린 것 앞에서 뒤늦게 면목이 없다는 듯 헛기침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형조판서란 말이지. 고맙구나.”

      막자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 이상은 모른다며 그에게서 약간의 고기를 받아 돌아갔다.

      그 뒤부터는 소문을 긁어모으기 어렵지 않았다. 육조의 판서들이야 하나같이 높으신 어르신들이니 관심 갖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을 만했다. 알아보니 형조판서는 본디도 예술을 사랑하는 걸로 유명했던 모양이었다. 제 소장품을 여기저기 자랑하고 전시했다는 기사를 이전의 신문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형조판서의 소장품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그 서화첩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도둑이면 훔친 거 안 보여줘.”

      차유진은 당연하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그들에게 형조판서는 도둑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그가 직접 훔친 게 아니라도 최종적으로 서화첩이 그에게 흘러 들어갔음은 분명했다. 그의 등불이 그 증거였다. 형조판서씩이나 되었으니 누군가에게 샀다고 하더라도 그게 장물임을 모를 리 없겠지. 서화첩 주인을 불러야겠네. 김래빈은 착잡하게 필묵을 꺼내 들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그림자를 보면서도 혹시나 했습니다만 역시 그 사람이었군요. 허나 상대가 형조판서라면 설사 그 사람에게 정말 그것이 있더라도 제게 돌아올 길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릅니다. 제게 있는 것보다 화첩을 아낀다는 그분께 있는 것이 좀 더 귀하게 다뤄질 테고….”

      여인숙의 작고 초라한 방에 셋은 겨우 끼어 앉아있었다. 남자의 신세로는 그 방을 얻는 게 고작이었을 터. 김래빈은 불평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어질 때마다 조금씩 하얗게 질리던 남자는 결국 말을 하다 말고 막막한 듯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차유진이 그 남자에게로 몸을 기울이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방법 있어. 훔치면 돼.”

      예? 남자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김래빈이 상황을 설명할 때까지만 해도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던 차유진이 어느새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본론만 던지면 상대가 당황스러우니 그렇게 대뜸 던지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거늘. 김래빈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장죽을 물었다. 차유진이 저렇게 치고 나갈 건 이미 예상하였기에 대비책 역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소리를 먹는 풀에 도깨비불로 피운 연기가 자욱이 방을 메웠다. 방음이 좋지 않은지 옆방의 소리가 웅웅대며 들려왔지만 그들의 대화는 새어나갈 일 없을 터였다.

      역시 여러모로 남들에게 들려주기 썩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그는 소리 없이 뻐끔대었다.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그쪽이 먼저 훔쳤잖아. 그러니까 우리 안 나빠.”

      형조판서 신고 못 해. 자기 거 아니야. 차유진이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그야 평소에도 요괴가 인간의 법을 지킬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김래빈도 이제까지 인세의 흐름을 보아온바 인간의 법을 어긴 자를 항상 인간의 법으로만 처단할 수 없다는 데에는 동의했다. 다만 의뢰 대상자에겐 제발 정중하게 굴어달라는 그의 말을 오늘도 어긴 건 아무래도 좀 짜증나서 그는 차유진의 옆구리를 냅다 찔렀다. 갑자기 찔려 어이없다는 얼굴로 돌아본 그가 무어라고 항의하기도 전 김래빈은 말을 받아 이었다.

      “원하신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다만 그에 상응하는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만약 붙잡힌다면 저희는 당신이 부탁했노라고 말할 테니까요. 그리고 설령 서화첩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걸 찾았다는 걸 드러내어 밝히지 못할 겁니다. 형조판서가 보복할 테고요.”

      “그건….”

      상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혼란을 이해하기에 김래빈은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장죽을 허리끈에 찔러넣고 갓을 비스듬하게 써 얼굴을 가리는 김래빈의 옆에 머리를 두건으로 대충 싸매 색을 감춘 차유진이 섰다.

      “마음의 결정이 되는 대로 연락을 주십시오.”

      입김을 후 불어 연기를 흐트러뜨린 김래빈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옆에서 차유진은 눈앞의 인간이 해야 할 고민은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안녕, 하고 경쾌하게 손을 흔들었다.

      한성의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짧게 내기했다.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내기였다. 아쉽게도 성립되지는 않았다. 김래빈은 인간의 의지를 근거로 들었고 차유진은 그쪽이 재밌고 속 시원한 결론이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어쨌든 둘 다 서화첩의 본래 주인이 훔쳐서라도 그걸 되찾겠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주장에 걸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뒤 심부름꾼을 통해 각오를 다졌으니 그대로 실행해달라는 쪽지가 도착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차유진은 그래도 제가 먼저 주장했으니 제가 내기에서 이겼노라고 우겨댔다. 어차피 내기에 이겼다고 해 봤자 걸었던 게 입맞춤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김래빈은 이건 성립되지 않은 내기라고 뻐기어 보았지만 결국 제가 먼저 차유진의 입술을 찾아 물고야 말았다.

      의뢰인이 결정을 내렸으니 이제는 계획을 짤 때였다. 온통 깨물려 욱신거리는 입술에 간혹 미간을 찌푸리며, 김래빈은 가장 빠른 전서구로 이제까지의 진행 상황을 박문대에게 알리고 조언을 구했다. 박문대의 서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도움이 될 만한 요괴를 하나 소개해 줄 터이니 연락해 보시게.

      그렇게 소개받은 이세진은 호조에서 적당한 지위를 차지한 채 둔갑 중이었다. 우두머리는 일만 많잖나. 그는 눈을 찡긋했다. 어중간한 직책이 눈에 띄지 않으면서 오히려 어색하지 않게 고위 관리와 접촉할 수 있다는 설명이 덤으로 붙었다.

      “호조 선택한 거야 별 이유 있으려고. 예나 지금이나 돈이 인간을 움직이는 거 아니겠어~? 특히 요새는 말야.”

      형조판서라. 그는 중얼거리며 그의 단안경에 붙은 작은 톱니바퀴를 손으로 살살 굴리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니 이세진의 눈앞에 투사될 정보 역시 알 길 없는 김래빈은 묵묵히 그를 기다렸다. 그와 달리 차유진은 지루한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지고 자욱한 연기 속 방 안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귀한 돌로 만든 벼루며 멋스럽게 청화 얹어진 두꺼비 연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시선이 무심하게 흘러갔다가, 철로 만든 기물이 등장하고 나서야 눈을 빛낸다. 손에 들고 맛을 가늠하듯 스읍, 입맛을 다시는 걸 뒤늦게 발견한 김래빈이 기겁했다.

      “차유진!!”

      “나 아직 입 안 댔어, 김래빈.”

      억울한 듯 꿍얼거린 차유진이 얌전히 기물을 내려놓았다. 자네들도 참 여전해. 혀를 차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묘한 얼굴을 한 이세진이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며 눈을 찡긋했다.

      “형조판서라~. 호조랑 형조는 평소에 교류가 잦지 않으니 아는 게 많진 않지만, 도움이 될 만한 건 하나 알지.”

      그들에게 모임이 있는 거 알고 있나? 이세진은 말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부러 그러듯 소리를 낮추어 속닥대었다. 자연스레 그에게로 고개를 숙인 김래빈의 옆으로 불쑥 차유진이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이세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악을 사랑하는 관리들이 모인 것처럼 가장한 그 모임은 비정기적으로 한성의 어느 주루에서 모임을 갖는데,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알음알음 흘러나오는 이야기로는 그 모임에서는 그들이 공개적으로 내보이지 않는 작품들도 간혹 선보여진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을 내보이고 자랑하는 자는 호조판서라고.

      “서화첩이 나올 가능성도 있겠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실마리는 찾는 셈이지.”

      소개해 준 이의 면을 보아 그 모임이 어느 주루에서 열리는지 까지는 알아내 보겠노라고, 이세진은 짐짓 거드름을 피우는 얼굴로 웃고는 그들을 내보냈다. 그들은 대문을 나서서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우리 뭐 해?”

      “지금 당장은, 글쎄. 어디 사는 지나 먼저 눈여겨볼까.”

      그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골목에 자박이는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사람 수로 팔도 제일인 한성이라도 어디든 북적이는 건 아니었다. 궁궐과 가까운 북촌은 달그락거리는 인력거 소리와 담장 너머로 은은하게 울리는 인기척을 제외하면 퍽 고요한 곳이었다.

      그는 담장 너머와 너머로 길게 이어진 기와지붕들을 더듬었다. 저 기와집들 어딘가에 형조판서가 머무르는 곳도 있겠지. 아무리 돌과 철로 벽과 기둥을 보강해 하늘처럼 전각을 올린 건물들이 늘어나고 승강기라는 것이 새로 생겨 도르래로 사람들을 위아래로 실어 날라도 그건 성곽 바깥의 사정일 뿐, 여전히 부유하고 높은 이들은 너른 땅에 발붙이고 사는 걸 고아한 양 여겼다. 특히 대대로 벼슬길 하며 북촌에 터 잡은 가문들이야 오죽하겠나. 형조판서도 그런 집안의 일원이었다.

      김래빈은 도깨비가 된 후로부터 태백의 깊은 산속에 살던 이였다. 처음에는 산 속 동굴에. 나중에는 탄광의 광맥 속에. 한성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형조판서가 어디 사는지도 알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는 등불이자 길잡이. 염원이 그를 이끌고 의지가 그의 앞을 밝혔다. 그는 그에게 느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차유진이 당연한 듯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도착한 집은 굉장히 묘했다.

      “요력이 느껴지는데.”

      부채로 얼굴의 반절 가량을 가리며 김래빈이 속삭였다. 옆에서 봇짐을 맨 채 머슴인 척 행세하던 차유진은 한쪽 눈썹을 찌푸리고는 담장 기와 위를 돌돌 굴러가는 도둑잡이 자명종에서 시선을 떼었다.

      “형조판서 우리랑 같아?”

      소리 좀 죽여. 손가락을 제 입 앞에 가져다 대며 김래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이세진이 미리 일러주었을 테다. 둔갑의 귀재가 인간인 척하는 요괴 하나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럼 뭐야?”

      “글쎄. 정확히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추측건대 어느 요괴의 비호를 받고 있거나?”

      인간 중에는 간혹 그런 이들이 있었다. 그는 힐끔 형조판서의 집을 다시 보았다. 역시 은근한 요력이 마치 그물처럼 그의 집을 감싸고 있었다. 정확한 내력은 알 수 없어도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이러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겠는데. 뒷짐을 진 김래빈이 중얼거리면 옆에서 차유진이 발을 두어 번 굴렀다. 나 싸우는 거, 자신 있어! 평화로운 풍경 속에 평화롭지 않은 말들이 소곤소곤 돌아다녔다.

    *

      이세진은 약속을 지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와 차유진은 요괴들만이 읽을 수 있는 표기로 쓰인 서신 한 통을 받았다. 그 서신에는 한성의 유명한 기루 한 곳의 이름과 특정한 날짜, 들어갈 수 있는 방법과 시간이 적혀 있었다. 서신을 다 읽은 김래빈은 도깨비불로 편지를 태웠다. 편지는 흔적도 없이 불에 먹혀 사라졌다.

      오랜만에 역할을 바꿀 때였다. 차유진은 제 옷 꾸러미를 뒤졌다. 그 옆에서 김래빈은 회중시계며 지팡이 같은 것들을 꺼내주고는 저는 외출했을 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만 최소한으로 갖춰 입었다.

      그들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한성의 골목을 소리 없이 누볐다. 아직은 가스등이 없어도 골목이 밝아 순라군이 돌 때가 아니었으니 기척만 죽이면 될 일이었다. 이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주루의 입구는 시끌벅적해도, 일하는 이들이 주로 오가는 뒷문은 고요했다. 하품하며 긴장감 없이 걸어 나오는 인간을 제압하는 건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오늘은 김래빈이 내 하인 해.”

      옷을 벗긴 인간은 근처 창고에 두고 문을 걸어 잠그며 차유진은 짓궂게 웃었다. 혹시 다른 이들이 올까 초조한 안색인 김래빈과는 정반대로, 아주 여유롭게 뒷짐을 지며. 그는 화사하게 꾸민 채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정장을 각 잡아 차려입고 머리를 넘긴 채 지팡이를 든 차유진은 이국의 어느 귀한 집 자제 같았다. 기루에서 일하는 이의 복장을 옷 위에 걸치며 김래빈은 짧게 반박했다.

      “네 하인은 아니지.”

      차유진은 키득댔다. 김래빈 진짜 아니니까 내가 맞아. 잡담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쪽문을 통해 조용히 들어섰다. 정문으로는 갈 수 없었다. 복장을 갖춰 입었어도 다른 종업원을 만난다면 김래빈이 그곳에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는 걸 금방 눈치 채일 터였다.

      “여기쯤이지?”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벅저벅 걷는 발소리가 바닥과 벽을 통해 울려 되돌아오는 느낌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었다.

      그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밀통로나 숨겨진 공간은 아무리 잘 숨겨놓는다고 하더라도 방식에 한계가 있다. 특히나 이런 곳에 만들어지는 공간은 더욱 그렇다. 종업원이나 손님이 계속해서 드나들어야 하므로 오래 드나들면 알 수 있도록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하물며 그들은 은행 금고도 털어봤던 몸. 김래빈은 쉽게 손잡이를 찾아낼 수 있었다.

      손으로 벽을 짚으면 미묘한 벽의 요철이 느껴지는 곳 바로 옆,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족자의 걸이대를 매만지자 돌리는 방향에 따라 인간의 귀로는 잡을 수 없는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좌로 세 번, 우로 두 번, 위로 한 번. 소리를 따라 손을 움직이면 소리 없이 드르륵 벽이 열리고 홈이 드러났다.

      “열쇠가…”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혹시 이 옷의 주인은 여기까지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 종업원이었던가. 김래빈이 곤란한 얼굴을 하는 사이 홈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차유진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김래빈.”

      “왜.”

      “이거 그냥 뜯어먹어 버리면,”

      “당연히 안 돼, 바보야. 벽을 뜯으면 침입한 게 바로 티가 나잖아. 이 정도 규모의 주루에는 반드시 경호 인력이 있을 테니 나갈 때 곤란해지게 돼. 일부러 종업원도 한 명만 기절시켰는데 네가 시선을 끌어버리면 소용이 없어!”

      김래빈은 소리를 낮춰 그를 꾸짖었지만 차유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멀뚱한 얼굴이었다. 언제쯤 저 이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텐가. 그가 탄식하고 있으면 그를 빤히 바라보던 차유진이 손을 뻗었다. 목 부분이었다.

      “그래도 김래빈 나 없으면 성공 못 해.”

      씩 웃으며 차유진이 내민 건 카라핀이었다. 그가 착용한 종업원 복장에 달려있던 물건이었다. 목 바로 아래에 달려있어 그의 시선에는 닿지 않았지만 지금 다시 살펴보니 핀의 머리 부분이 홈과 딱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차유진 잘 했어, 속삭이며 손을 뻗어 상대 손을 도닥이면 우쭐거리듯 그와 시선을 맞춘 차유진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그는 카라핀을 홈에 맞춰 밀어 넣었다. 그러자 가늘게 진동한 벽이 스스로 갈라져 열리고 그 사이로 계단이 보였다. 그들은 계단을 올랐다. 새롭게 등장한 복도의 양옆으로 놓인 화분이며 키 높은 장식장들 사이로 가려진 것처럼 드문드문 장지문이 보였고, 한적하고 향기로운 공기가 감돌았다. 여기야. 차유진이 나지막하게 그를 부르더니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어느 방인지 알겠어?”

      “응. 여기서 형조판서 대감이라고 했어.”

      장지문 너머 어른거리던 그림자를 눈으로 어림하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숙였다. 차유진이 그 앞을 가리듯 섰다. 그는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다행히도 이 주루는 최신의 유행을 따라 벽돌과 타르로 벽을 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소매 속에서 나팔처럼 끝이 벌어진 기구를 꺼내어 뾰족한 끝을 힘주어 벽에 박았다. 픽, 소리와 함께 벽에 박힌 그 기구에 귀를 가져다 대고 톱니를 돌려 초점을 맞추면 벽 안의 소리가 보다 또렷이 그의 귀로 파고들었다.

      한성 각 기루의 술과 음식, 그리고 기예를 평가하는 대화가 이어졌다. 김래빈 아직 멀었어? 차유진이 입 모양으로 묻는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복도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뒤 손을 접었다.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들은 복도 장식장의 그림자 옆으로 몸을 숨겼다. 혹시 들킨다면 소란을 일으키기 전 빨리 제압해야 했다. 다행히 술이며 음식을 양손에 아슬아슬하게 쌓아 나르던 종업원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재게 발을 놀려 복도를 지나갔다. 그러나 아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음식을 나르러 간 사람이니 볼일을 마치면 다시 또 돌아올 터였다. 차유진과 그는 몸을 돌려 장식장 반대편에 숨었다. 이윽고 아까의 종업원이 다시 복도를 지나쳤다. 주변으로는 눈길 하나 안 주는 태도에 어이없는 얼굴이 된 차유진이 중얼거렸다.

      “여기 너무 쉬워!”

      “은행처럼 뭘 지켜야 하는 곳도 아니고, 고작해야 별도의 공간을 원하는 높으신 분들을 위한 곳이니 그럴 수밖에. 애초에 손님이 약속한 이 아닌 다른 이를 데려와도 들여보내 주는 허술한 곳인걸.”

      “그래도.”

      맥이 빠졌단 얼굴의 차유진을 제 앞에 가림막처럼 세워둔 채 그는 다시 기구에 귀를 기울였다. 몇 마디의 대화를 듣고 나니 형조판서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 목소리에 특히 집중했다.

      웃는 소리가 다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형조판서가 헛기침했다. 각자 떠들던 소리가 다시 고요해졌다. 김래빈은 본능적으로 저 모임의 중심이 형조판서임을 알아챘다. 형조판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좀 더 귀를 가까이 대었다. 어쩌면 형조판서의 집에 둘러진 그 알 수 없는 요력에 대해 들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드르륵.

      김래빈이 재빨리 벽에 꽂아두었던 기구를 수거해 소매 안에 넣는 사이 문이 열렸다. 손님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것처럼 차유진의 앞으로 허리를 숙여 고개를 가리면 나오던 이의 시선이 그의 정수리에 꽂혔다. 혹시 무언가 어색해 보이는 걸까. 그의 손이 긴장으로 느려졌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저벅저벅 복도를 걸어 나가는 가죽신이 시선에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그의 머리 위로 즐거워하는 차유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뭘 봐! 할 걸 그랬어.”

      “괜히 시비 걸었다가 일이 더 커지면 골치 아파.”

      손님이 복도 저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허리를 일으켜 세운 김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있으면 위험할 테니 이제 가야겠어. 속삭이고 턱짓하면 차유진이 진짜 손님마냥 당당히 앞장섰다. 그 반 발짝 뒤에서 따라가듯 걸으며 김래빈은 그가 들은 말들을 조합해 보았다. 정리하자면 은행 금고가 털린 일로 귀한 물건들을 집에서 보관하는 이들이 늘었고, 형조판서도 그 중 한명인 듯싶었다.

      ‘그런데 요력을 동력기관으로 쓴다고?’

      김래빈은 흘긋 좋은 천으로 감싸인 제 앞의 등을 바라보았다.

      “김래빈 할 말 있어?”

      그 시선을 기민하게 알아챈 차유진이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상대가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비호가 아니었어.”

      요력을 동력기관으로 쓴다? 요괴의 비호를 받는 자라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조판서는 대체 요괴를 어디서 어떻게 데려다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가. 그 복잡한 심경을 조용히 전달하면 차유진은 그 맘도 모르고 또 신나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 우리 또 탐정놀이 해?”

      끝까지 종업원인 척 차유진을 앞서나가 나가는 손님 배웅하듯 쪽문을 열어준 김래빈이 약간 작아 불편했던 복장을 주섬주섬 벗어 문 안으로 던져넣으며 으레 그랬듯 차유진의 말을 받았다. 차유진. 우리가 하는 건 놀이 같은 게 아니래도.

      김래빈은 은신처에 큰 지도를 주르륵 펼쳤다. 한성의 지도였다. 한성의 모든 건물과 샛길들까지 샅샅이 표기되어 있으니 범상한 것은 아니었다. 형조판서의 집 위치를 그 위에 표기하며 그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렸다. 은행 털어먹을 때 금고 위치랑 도주로 찾으려 잘 사용했었지.

      “가택은 기억하기론 평범했어.”

      형조판서의 말을 엿들은 뒤 그는 막자의 도움을 받아 식료품 배달부로 분장하여 그 집에 접근한 적이 있었다. 안채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고 바깥채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담장 내부에 무언가를 획책할 만한 숨겨진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절 두고 혼자 잠입했을 때부터 골나있던 차유진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눈을 흘겼다.

      저를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그 눈초리에 김래빈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 차유진?”

      “김래빈은 어린 것한테 약해.”

      차유진이 소매에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알 수 없는 쇳조각을 꺼내어 손 위로 굴렸다. 어느 기계의 부품인지 나선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벽에 등을 기대며 시선을 던지면 그걸 다시 소매 속에 집어넣은 차유진이 그의 곁으로 다가붙었다.

      “어린 것들한테는 당연히 잘 해줘야 하는 게 맞지만, 대체 어떤 맥락에서 차유진 네가 그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우리 둘이서도 할 수 있어! 다른 인간 없어도 돼!”

      막자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눈을 끔벅였다. 그는 차유진이 왜 그 어린 인간에게 불만을 가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야 그렇지마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는 데다 도움을 주겠다는 그 마음이 가상하잖아.”

      “…김래빈 그 인간도 주울 거야?”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울인 차유진이 입을 비쭉이더니 어린 강아지가 주인에게 매달리듯 그에게 뺨을 부볐다. 그 어리광에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끼며 김래빈은 제법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는 몸을 틀어 차유진과 마주 보았다. 절 보는 빛나는 눈을 시선으로 더듬으며 손을 뻗어 얼굴을 감싸면 매끄러운 피부가 그의 손에 감겼다.

      “나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이가 아니야. 하물며 단명하는 인간들이야.”

      제가 주워 건사하는 건 차유진 하나로도 족했다. 그는 새삼스레 차유진의 얼굴을 훑었다. 이제는 그도 다 자란 요괴가 되어 더 이상 건사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지만 처음 만났을 때의 차유진은 제법 어렸다.

      그는 우연히 제가 살던 곳에 굴러들어 왔던 어릴 적의 차유진을 떠올렸다. 아직 인간이 요괴를 불로 물리칠 줄 모르던 때인데도 어찌 불가사리가 불에 약한 걸 알았는지, 차유진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어가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눈이 내릴 기미는 한참을 없었다. 이대로라면 죽어버리겠지. 같은 요괴인 걸 알아 제게 뻗던 손을 그는 뿌리치지 못해 그 몸에 도깨비불을 온통 덮어씌워 주었더랬다. 허구의 불이 실제의 불을 잡아먹고 불에 담긴 요력이 상처 입은 몸을 치유해 주도록.

      ‘예뻐.’

      제게 얹어진 푸른 불을 한참 바라보던 어린 요괴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때 김래빈은 제 불만큼 깊게 반짝이는 그 푸른 눈을 보며 어렴풋하게 지금의 결과를 예감했다. 언젠가 제가 완전히 닳아 없어져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저 어린 요괴가 계속 신경 쓰이겠구나, 하고.

      “인간 주울 거 아니면 김래빈 왜 자꾸 시민권 얘기해?”

      “? 그거야 시민권을 확보한 요괴는 비교적 정당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데다, 굳이 요괴인 걸 숨기지 않고도 지낼 수 있고 기차며 인간들의 이동 수단을 이용할 때도 편리하잖아. 무엇보다도 서북부 지역에서 미개척지에 대한 우선 점유권을 가질 수 있고.”

      한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차유진이 한 말이었다.

    ‘김래빈, 여기 너무 답답해.’

      한성은 어디든 건물과 사람으로 그득한 도시였다. 그전에 그들이 머물던 곳은 사람이 드나들었어도 산이었다. 그때도 차유진은 인간의 발이 닿지 못하는 가파른 절벽 위에 훌쩍 올라가 있곤 했다. 나는 넓은 데 좋아. 바다도 좋아. 막 달릴 수 있는 곳도 좋아. 머무는 곳의 한 뼘짜리 하늘로 손을 뻗으며 차유진이 어느 날 밤 중얼거렸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넌 넓고 트인 데가 좋다며.”

      상대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돌려주면 상대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연신 깜박이다 물었다.

      “진짜 그거 때문이야?”

      “바닷가는 힘들어. 배 타고 오가는 이들이 늘었으니까 여기만큼 번잡할 거야. 하지만 서북부 지역은 다르지.”

      “…김래빈 그거 빨리 말했어야지!! 나 갑자기 의욕 마구 생겨!”

      그를 와락 끌어안은 차유진이 제 머리가 죄 헝클어지는 것도 아랑곳 앉은 채 그에게 고개를 마구 문댔다. 그는 제게 달려드는 그 무게를 익숙하게 받아내며 좀 겸연쩍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당연히 눈치 챘을 거라고 생각했어.”

      잠깐의 포옹과 짧은 입맞춤들이 오가고,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김래빈의 손가락이 지도 위 형조판서의 집을 툭 건드렸다.

      “그럼 이제 여기 좀 봐봐.”

      차유진의 시선이 고분고분 지도로 향했다.

      “집안에 광이나 곳간은 많았지만 감춰진 곳은 없었어. 요력은 여전했고. 형조판서는 지금 집이 아닌 어딘가에 요괴도 두어야 하고, 실험도 해야 하는 상황이야. 차유진 네가 그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이세진은 알아낸 걸 알리는 그들의 연락에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걸 아직도 연구하는 치들이 있단 말이지?’

      놀랍게도 요괴에게서 요력을 뽑아내어 기계의 동력으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요괴를 확보하는 것도, 그들에게서 요력을 뽑아내는 것도, 그 요력을 흐트러트리지 않은 채 보관하는 것도 요원한 일이라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의 왕은 요괴조차 제 백성으로 삼아 국가에 필요한 재원과 능력을 구하려고 하는 자. 조정에서는 진즉에 그러한 논의가 사라진 지 오래인데 물밑으로 계속되고 있었던 모양이라며 혀를 끌끌 찬 그는 그러니 형조판서가 드러내 놓고 실험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제일 쉬운 데 김래빈도 알아. 지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행 금고가 그랬다. 지하 깊숙이 공간을 파고 방과 금고를 어지럽게 배치했었지. 무언가를 숨기기에도 가장 편한 장소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는 한성의 지하수로와 파이프를 그려둔 반투명한 종이를 꺼내어 지도 위에 겹쳤다. 톱니바퀴를 돌리고 기계를 움직이는 힘, 증기기관은 불과 물의 혼합으로 돌아간다. 한성은 조선의 수도답게 가장 최신의 기계들이 움직이는 곳이었고 각 기계과 기관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파이프가 거미줄처럼 지하를 차지하고 있었다. 형조판서의 가택이 위치한 땅 아래도 그런 곳이었다.

      “형조판서의 집 아래에는 그만한 공간이 없어. 파이프 아래까지 공간을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번거로워서 그가 그런 판단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한 차유진이 한참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김래빈 나 돈 많이 벌려고 수배된 요괴 잡은 적 있잖아.”

      차유진은 그에게 제 행선지를 숨기는 일이 거의 없어서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런데 그게 왜?”

      “나 그때 들었어. 옥에 들어간 후로 친구 요괴 사라졌댔어.”

      그때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말을 흐린 차유진이 북촌에 위치한 형조판서의 집으로부터 손가락을 쭉 아래로 내렸다. 김래빈은 지도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전옥서. 형조의 관할로 죄수를 관장하던 너른 공간이 그 손끝에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수도 한성을 이리저리 옭아매는 수도관과 파이프가 유독 전옥서의 주변에는 성기게 배치되어 있었다. 형조판서의 집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면서 형조가 손댈 수 있고, 요괴를 공급하기도 실험을 숨기기에도 알맞은 공간이 있을 곳.

      아무래도 습격해야 할 곳이 두 군데가 될 모양이었다. 김래빈은 한숨을 쉬었고, 차유진은 사납게 웃었다.

    *

      차곡차곡 계획이 세워졌다. 역할을 나누고, 필요한 물건을 챙기고, 지도에 진입로와 도주로를 표시하고, 지키는 이들의 신경을 끌 방도와 추격할 이들을 따돌릴 방도들을 두런두런 의논했다. 형조판서의 집과 전옥서 부근을 몇 번이고 왕복하는 사이 어느덧 그들은 빈민가 동냥 분장의 귀재라는 꽃단이라는 아이와도 안면을 트게 되었다.

      꽃단이의 손길 아래에서 그들의 정체는 몇 번이고 바뀌었다. 지친 인력거꾼, 새벽의 채소 배달부, 옥바라지하러 가는 늙은 아비. 차유진은 한 번쯤은 부부로 가장하고 싶다 했지만 누가 되었든 키 육척의 멀대같은 요괴를 인간 여성으로 분하는 건 어려워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그들의 계획은 조밀하지 않고 성겼지만 지도에는 그들이 남긴 선과 짧은 소견이 덕지덕지 붙었다. 애초에 서화첩의 흔적을 추적하는 건 김래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자연스레 형조판서의 집에 그가, 전옥서 지하에 차유진이 가게 되었다. 한 번 헤어지면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방도가 없기에 유사시에는 각자의 판단을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하루 이틀 합을 맞춰온 것도 아니니 그들의 생각이 서로 크게 어긋나지 않을 거란 신뢰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뭘 해야 하는지 기억하고 있지, 차유진?”

      결행의 시간을 앞두고 북촌과 종로로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김래빈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저 멀리서 순라군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리가 어슴푸레하게 들려왔다.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공간 찾기. 실험 자료랑 이상한 거 다 없애고 증거 가져오기. 무사히 도망치기. 김래빈 너는?”

      똑같은 질문이 되돌아왔다. 그는 제가 해야 할 일을 나열했다.

      “서화첩 찾기, 형조판서에게 있을 증거 빼 오기, 무사히 도망치기.”

      마지막이 제일 중요했다. 그들의 의뢰인이 들으면 섭섭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일에 목숨까지 걸 생각이 없었다. 요괴가 얽혀있는 일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을 뿐. 이따 봐. 뻗은 손에 상대의 손가락이 굳게 감겼다 떨어졌다. 먼저 출발하는 차유진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다 김래빈도 걸음을 옮겼다.

      딱딱거리는 소리와 희미한 가스등의 불빛에 유의하면 순라군을 피해 돌기는 어렵지 않았다. 북촌 드넓은 저택들 사이 샛길에서 김래빈은 쉽게 익숙한 방향을 따라 형조판서 저택의 옆길로 들어섰다.

      여전히 형조판서의 집은 알 수 없는 요력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는 근처 느티나무에 몸을 기댔다. 저게 무슨 힘인지 알 수 없는 한 그는 섣불리 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때 형조판서의 말에 의하면 요력을 동력으로 쓰는 기술은 아직 실험 단계야. 어떤 형태든 동력기관의 크기는 아직 눈에 띄게 클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 집이 아니라 그곳에 제어장치가 있을 수도 있겠지. 어차피 요력은 거리와 관계없이 작동하니까.’

      ‘알았어! 이상한 거 다 때려 부수면 돼?’

      ‘너무 소란 피우지는 말고.’

      그는 차유진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확률은 반의반. 전옥서 지하에 수상한 공간이 없어도, 그곳에 제어장치가 없어도 문제였다. 그는 고개를 빼어 종각 쪽을 바라보았다. 축시(丑時 : 새벽 1~3시)가 다 되어가도록 이쪽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 전옥서에서 제어장치를 찾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물러나기로 했다. 실험의 증거를 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형조판서를 실각시키고 팔다리 잘린 그의 집을 다시 뒤지면 되니까.

      그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문득 형조판서의 저택이 크게 깜박이는 것처럼 빛났다. 요력이 크게 부풀었다 찢어지듯 늘어나더니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동시에 저택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횃불이 하나둘씩 솟아오르고 병장기 소리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담장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곁으로 바짝 붙었다. 전옥서와 습격이라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곧 곁문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차유진이 뭔가 한 모양인데.’

      사람이 빠졌으니 몰래 들어가기 쉽겠다, 생각하면서도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걱정 어린 눈길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간 방향을 흘긋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체할 순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잘할 거라고 믿는 수밖에. 그는 손가락을 튕겨 그가 변장하면서 봐 두었던 저택의 곳간 근처에 실제의 불과 아주 흡사한 도깨비불을 피워 올렸다. 한차례 소란이 일면서 이미 저택의 많은 사람들이 깨어난 상황. 불은 금방 발견될 터였다. 그의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아 이내 집 안에서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와 허둥지둥하는 사람들의 기척, 물을 떠 오라는 고함이 함께 섞여서 들렸다.

      ‘한밤중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지키는 사람마저 빠져버린 쪽문을 살짝 열고 들어섰다. 잘못한 건 형조판서이지 그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어디선가 희미하게 쾅 소리가 들려왔다. 원인이야 뻔했다. 그는 물건을 뒤지는 손놀림을 더 빨리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차유진, 너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운이 좋았다. 형조판서는 병졸들과 함께 전옥서 방향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아니다. 차유진이 그와 마주칠지도 모르니 운이 좋은 게 아닌가? 아무튼 그는 주인이 없는 바깥사랑으로 손쉽게 숨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전옥서에 실험을 명하는 그의 수결이 담긴 문서가 서재 금고에서 금방 발견된 것과는 달리 서화첩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여기 어딘가에 공간이 있었다. 채소 배달부로 분장하고 바깥사랑까지 들어와 본 게 적어도 세 번. 4칸의 긴 건물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바깥에서 걸었던 발걸음 수와 방과 방을 잇는 마루에서 셌던 발걸음 수, 그리고 이 방에서 걸었던 발걸음 수를 조합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 여기였다. 그의 직감도 이곳에 서화첩이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도, 책장 뒤에도 서화첩을 둘 만한 비밀 공간은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차유진이 날뛰는 모양이니 형조판서는 금방 돌아올 수 없을 테지만 혹시 그가 피운 도깨비불이 가짜라는 것이 들통나고 집이 습격당했다는 걸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언제까지고 차유진의 양동작전에 의지할 수만도 없었다. 차유진이 습격한 건 어쨌든 관아였고 저러다 수배라도 붙는다면 시민권은 한층 요원한 길이 될 게 분명했다. 그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 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형조판서가 이 방 안에 어떤 장치를 해놓은 건 분명해.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그 장치를 작동시키는 손잡이를 그는 어디에 두었을까.’

      주루와는 달랐다. 그곳은 종업원을 비롯해 자격이 있는 손님이라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지만 여기는 형조판서의 개인 공간. 더구나 그 비밀공간은 아무나 손댈 수 없어야 했다.

      ‘객이나 부리는 자가 건드리지 않을 만한 물건이면서 이 방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물건. 장치와 연결할 수 있도록 위치가 고정된 물건. 그러면서도 혼자서 조작할 수 있을 만한 물건.’

      몇 가지 물건이 그의 눈을 스쳤다. 하지만 죄다 만져볼 여유는 없었다. 그는 과감하게 움직였다. 키 낮은 서탁 위에 놓인 단계석 벼루가 아까부터 눈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는 벼루 뚜껑의 무늬를 매만지다 힘주어 돌렸다. 흐릿하게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물도 붓지 않고 먹을 갈 수야 없는 일이지.’

      그 주변에 붓은 걸려있을지언정 연적이 보이지 않았던 게 그가 벼루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맞았다. 드르륵거리는 소리, 삐걱거리는 소리가 공간을 은은하게 울렸다. 가구가 마룻바닥의 널판 째로 레일 위를 움직였다. 방 안이 통째로 재구성되고 있었다. 감탄마저 나오는 광경이었다. 마루 아래에서 튀어나온 공간이 층층이 선반을 구성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방 한쪽 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진열대가 되어 있었다.

      “허….”

      김래빈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서화첩뿐만이 아니었다. 도둑맞았거나 어느 순간 사라져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귀물 몇 점이 그곳에 있었다. 꼴에 귀하게는 모셔두었는지 상태는 멀쩡한 채였다. 그는 서화첩을 손쉽게 찾아 떨어지지 않게 싸매 단단히 제 허리춤에 매었다. 이제는 여기에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시간을 지체한 모양이었다. 사랑채를 채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그는 다른 사람과 맞닥뜨렸다. 하인인지 무언지, 그와 정통으로 마주쳐 버린 젊은 청년은 김래빈이 무언가 대처하기도 전에 으악 고함을 질러버렸다.

      “도둑이야!!!”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연막탄을 던지고 냅다 가장 가까운 담을 향했다. 그의 등 뒤에서 무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 연기를 헤치며 달렸다. 사람들이 습격이라며 소리치는 소리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그를 바짝 뒤쫓았다. 눈치채이기 전에 빠져나갔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사람이 더 몰리기 전에 잽싸게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뒤에 꼬리를 붙인 채로 미리 약속한 곳으로 갈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차유진까지 위험할 수 있었다.

      김래빈의 머릿속에서 한성의 수많은 골목길이 떠올랐다 재조립되었다. 그는 차선을 골라 방향을 틀었다. 통금령 내려 고요한 길에 그를 뒤쫓는 인간들이 내는 소리가 다닥다닥 따라붙었다. 담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넘는 것으로 가볍게 도둑잡이 자명종의 함정을 피하고 북촌의 고택들 지붕 위를 뛰어, 그는 시전 거리를 덮은 아케이드의 철제 아치 위를 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유리가 덮이지 않은 곳을 골라 그대로 땅으로 낙하해 시전 거리의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그가 모퉁이를 돌았을 때, 그의 팔을 누군가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숨을 삼키고 몸을 비틀자 차유진이 귓가에 나야, 하고 속삭였다. 그는 몸에 힘을 빼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둘 다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도주로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상대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어느 상점의 뒤편 창고 같은 곳이었다. 있어야 할 자물쇠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천이 그득하게 쌓여있었다. 그들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좁은 공간에 몸을 구겨 숨으면 서로의 숨이 엉켰다. 골목 밖에서 인기척이 어지러이 울렸다. 두터운 면포 더미가 한동안은 그들의 모습을 가려줄 것이다. 하지만 오래 머물면 곧 발각될 터였다.

      탈을 벗은 차유진이 그를 보며 말했다.

      “김래빈이 나중에 나가.”

      차유진이 도망의 귀재라는 건 이미 증명된 명제였다. 외국 공사의 목숨을 구해준 것도, 한번은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는 약조를 받아낸 것도, 그래서 유사시엔 치외법권의 특권을 이용해 즉시 한성을 떠날 수 있는 것도 그였다. 그러니 혹시 추적에 몰린다면 상대가 시선을 끌기로 한 것 역시 사전에 합의된 일이었다. 지금이 그럴 때야. 차유진이 눈으로 말을 건넸다. 김래빈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차유진의 손으로부터 그의 손으로 미끄러지듯이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들어 올려보니 실험일지처럼 보이는 종이 묶음이었다. 거기 있었어. 차유진이 속삭였다.

      “잘 찾았네.”

      그는 두건 사이로 삐져나와 제 손가락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손이 관자놀이를 스쳐 뺨으로 향하자 차유진이 눈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고 상대의 머리카락을 쓸어보다가 다시 두건을 끌어당겨 잘 여며주었다. 당분간은 이 부슬거리는 감촉도 안녕이었다.

      “불 조심해.”

      조선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불과 철과 증기의 나라로 변모해 가는 그 모든 세월 속에서도 김래빈의 염려 가장 첫 마디는 변하지 않았다. 널 죽일 수 있는 건 불 뿐이니 불을 제일 조심하라고. 김래빈이 나 또 구해주면 돼. 짐짓 장난스레 되받아쳤던 차유진은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금방이라도 불만 어린 잔소리를 뿜어낼 기색을 보이자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으며 속삭였다. 쉿, 김래빈 들켜.

      “나 김래빈한테 꼭 돌아와.”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김래빈 잘 도망쳐. 제 손을 거둔 차유진이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망설이던 그는 제 하관을 가리고 있던 입가리개를 내리고 고개를 들어 제 입술을 붙였다. 짧은 입맞춤이 오가고 다시 손에 탈을 든 차유진은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둑잡이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소란을 피우려 일부러 노렸겠지, 하고 김래빈은 추측했다. 주변을 배회하던 기척이 저쪽으로 홱 쏠리는 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감시망에 빈틈이 생겼다. 그는 기민하게 제 퇴로를 계산했다. 셋, 둘, 그리고 지금. 시끄러운 호각 소리와 고함을 뒤로 하고 그는 달렸다. 가장 주된 병력이 저쪽을 향한 이상 추격을 따돌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성의 여느 병졸보다 그에게 익숙할 골목과 지하 수로를 달음질쳐 누비는 동안 그를 쫓는 이들은 다시 반으로, 또 그 반으로 줄었다.

      마침내 모두를 따돌린 그는 숨을 고르며 어느 골목에 가만히 섰다. 해야 할 일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차곡차곡 정리되었다.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떳떳하지 않은 일을 한 이상 병조판서는 절대로 정도 이상 소란을 피울 수 없을 터였다. 북촌 근처 골목이야 계속해서 시끄럽겠지만 그가 선 이곳은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소리 없이 산을 올라 절벽 위에 서면 탁 트인 정경 속 한성이 보였다. 아직 캄캄한 새벽 속에 몸을 숨긴 채 김래빈은 어떠한 신호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하늘이 희뿌옇게 밝았다. 긴장된 얼굴로 고개 너머를 응시하다 그는 이내 안도하듯 큰 숨을 내뱉었다. 가까운 한성의 외곽에서 비행선의 기체가 검고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떠오르고 있었다.

      차유진은 무사히 도망친 모양이었다.

      비행선을 띄우느라 이지러진 공기가 돌풍이 되어 그가 서 있는 곳까지 치달았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넘겨 누르며 김래빈은 비행선이 점점 더 작아져 점이 될 때까지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쪽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는 손을 흔들며 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중에 봐, 차유진.

      한성이 좀 잠잠해지고 제 목표한 바를 이루고 나면 차유진은 다시 그에게 돌아올 것이다. 언제 떠나있었냐는 듯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며. 그때까지는 저도 무사해야겠지. 김래빈은 그들의 은신처에 요력으로 남긴 암호를 떠올렸다. 그들이 찾은 서화첩과 증거는 꼼꼼하게 싸매 안전한 전서구를 거쳐 이세진에게로 갈 터였다. 그 뒤는 이세진의 몫이었다. 미덥지 않을 리 없었다. 이세진은 궁에서 그 수많은 세월을 견딘 요괴였다.

      남은 건 다시 지하로, 광맥을 따라 개미굴처럼 얽힌 무수한 미로로 숨어드는 것뿐이었다. 막자를 포함해 빈민가에서 인간들과 맺었던 연들은 또 끊어지겠지. 하지만 괜찮았다. 그는 그런 세월을 질리도록 겪었다. 그는 가까운 광산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언젠가 찾아올 이를 위한 은밀한 표식이 걸음걸음 남았다. 아주 오래, 어쩌면 평생 그를 떠나지 않을 연이었다.

    끝.

    유진래빈 앤솔로지 PLAYLIST(2024) 수록 글 Spring out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날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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