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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화 4

    우화 4

      멀리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빛이 사그라들고 나자 그들은 어느새 동터오는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김래빈이 제 볼을 꼬집었다.

    “김래빈 아파?”

    “응. 아무래도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네가 직접 꼬집어 봐, 하고 받아치는 대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던 김래빈이 차유진 쪽을 보더니 얼떨떨한 얼굴로 멈칫했다. 주변 풍경만 달라진 게 아니었다. 그의 동행인 역시 평소와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너 차유진 맞아?”

    “맞아. 왜?”

    “모습이 갑자기 바뀌었어.”

    차유진은 고양이와 인간을 그야말로 반반 섞은 모양새로 변해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솟아오른 짐승의 귀, 더 밝아진 홍채와 가늘어진 동공, 더 날카로워진 송곳니, 전반적으로 변한 얼굴과 몸의 골격, 얼굴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얼룩무늬, 그리고 꼬리까지. 아니다. 고양이보다는 조금 더 맹수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 얼룩덜룩한 무늬와 날렵한 모습을 찬찬히 훑던 김래빈은 차유진이 염불처럼 외던 말을 떠올려냈다.

    “진짜 재규어 신이었구나. 이게 네 원래 모습이야?”

    “김래빈, 그게 보여?”

    “응.”

    차유진의 귀가 몇 번 쫑긋거렸다. 동공이 실시간으로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한다. 턱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웃하는 움직임에 맞춰 꼬리를 두어 번 살랑거린 차유진이 잠시 후 제 손바닥에 주먹을 탁 내리쳤다.

    “나 알았어! 여기 신이 만든 곳이야. 내 생각에 여기 특별한 공간이라 김래빈도 보여.”

    몇 번 제 귀와 얼굴, 꼬리를 만지작거리던 차유진은 손가락을 탁, 튕겨 익숙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차유진이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다시 고양이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때처럼 김래빈은 이번에도 또 댕그랗게 눈을 떴다. 차유진은 그게 어쩐지 우스웠다.

    “어…. 굳이 나에게 익숙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아, 차유진. 너 그것도 능력 쓰는 일 아니야? 힘을 비축해야 한다면서.”

    “알아. 나 다른 모습도 멋져. 그래도 난 사람 모습 좋아. 이거 힘 안 써서 괜찮아.”

    차유진의 소망이 다시 인간이 되는 것임을 알고 있는 김래빈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공간은 드넓었지만 그들이 뭘 해야 할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초가집 한 채. 다른 건 보이지 않으니 시도해 볼만한 일도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저기로 가야 하나 봐.”

    “동의해. 저기에 우리 부른 신 있어.”

    초가집을 한참 바라보던 차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으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는 게 그에게도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가 제사를 지냈던 곳이 원래도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으니까, 우리가 만나는 상대도 농사의 신일 확률이 높을 거라는 전제 하에 자료를 좀 찾아봤어. 우리가 만날 신은 아마 신농씨나 후직씨일 거야. 둘 다 사람들한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줬대.”

    “그럼 좋은 신이야?”

    터벅터벅. 그들이 초가집에 가까워질수록 길이 점점 변모했다. 발 아래에서 마른풀이 두텁고 푹신하게 밟히던 들판에서 사람의 발길이 닿은 게 분명한 풀이 없고 단단한 흙바닥으로. 그리고 그 끝은 초가집을 둘러친 돌담과 싸릿대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기록상으로는 긍정적인 서술이 대다수기는 했어. 물론 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신을 만난 후에 서술했다기보다는 그저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옮겨 적은 거라 얼마나 실제 신의 모습이 반영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능하면 좋으신 분들이셨으면 좋겠어. 우리가 그분들께 간청해서 재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성격이 좋지 않거나 까다로운 신이면 아무래도 일의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할 테니까. 더구나 우리는 이번이 처음이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호의적인 신을 만나는 편이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기에도 좋을 거라는 결론이…”

    아. 김래빈 긴장했네. 낮고 빠르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차유진은 짐작했다. 그로 말하자면, 별로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따지자면 김래빈보다 그가 더 일상적이지 않은 것, 신의 영역, 신비에 더 가까운 존재일 텐데도 그랬다. 어쩌면 그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시각을 포함한 감각에 쉽게 현혹되는 인간과 달리 차유진은 그래도 반은 신이기에, 이 공간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신적인 존재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환상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계십니까?”

    김래빈이 싸리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이 문을 살짝 밀었다. 빗장이 달리지 않은 문은 금세 틈을 열어 안쪽으로 통하는 길을 내보였다.

    “그냥 들어가면 집주인에게 실례이지 않을까?”

    김래빈이 불안한 눈을 하든지 말든지, 차유진은 안쪽으로 성큼 발을 옮겼다. 우물쭈물하는 상대를 잡아끌어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을 지나 한지 바른 창호문 앞에 선 차유진은 손을 들어 문고리를 잡았다.

    “괜찮아. 우리 초대한 거 저쪽이야.”

    쾅쾅. 두어 번 문을 두드린 차유진이 한 발짝 물러났다. 끼익, 하고 문이 열렸다. 봤지? 하는 얼굴로 절 돌아본 차유진 옆에서 김래빈은 크게 한 번 숨을 골랐다. 곧 방안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 한가운데 소의 머리를 닮은 모습의 신이 소박한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신은 그들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걸 시도하는 인간은 정말 오랜만인데.”

    김래빈에게는 그 말이 반쯤 소의 울음소리와 섞인 것처럼 들렸다. 신농씨인가 봐. 그가 바짝 긴장한 채로 그에게 속삭이는 동안 옆에서 차유진은 김래빈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소를 잡아서 탕을 끓여 나눠줬거든….’

    차유진은 신농씨의 머리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소머리를 한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소를 잡다니 이게 무슨 블랙 조크람. 하지만 그는 그가 잘 모르는 문화에 간섭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이고는 김래빈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우리 쌀 필요해요. 줄 수 있어요?”

    “차유진…! 그렇게 대놓고 요구하는 건 무례한 일이야!”

    옆에서 김래빈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신농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머리를 한 그 신은 차유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네 신성에서는 피와 수렵과 힘의 냄새가 나는구나. 나로선 마뜩잖은 일이다만… 네 역할이 저 인간을 비호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지.”

    이내 신농씨는 김래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크고 검은 눈이 그의 모습을 비추었다.

    “인간이여. 짐작하겠지만 나는 함부로 재료를 내어줄 수 없다. 나를 비롯해 네가 앞으로 만날 모든 신들은 네가 그 술에 합당한 인간인지를 시험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위엄있게 공간을 울렸다. 반질반질 빛나는 눈이 그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마치 그가 어떤 인간인지 살펴보겠다는 듯이. 그동안 김래빈은 차마 눈 한 번 깜박할 수 없었다. 소의 모습을 한 신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그의 기준으로는 꽤 길었던 눈 맞춤이 끝나고 나서야 신농씨는 입을 열었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무릇 농사에는 끈기와 성실함이 필요한 법이지. 너는 충분히 성실한 인간인가? 그걸 증명하는 게 네 시험이다.”

    그는 동쪽을 향해 팔을 들었다. 창 너머로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신은 그 가운데로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너를 기다리고 있는 세 가지 일이 있을 테니, 그걸 수행하고 다시 돌아오너라.”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곧 공간이 바뀌었다.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그와 차유진은 초가집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초가집의 문은 언제 열렸냐는 듯 굳게 닫혀있었고, 그들이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동쪽을 향해 생겨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차유진 역시 그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움직였다.

    “갈까?”

    첫 번째 일감은 초가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원두막의 위에 거대한 됫박이 하나 올라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모래와 쥐눈이콩,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낱알이 섞여 있었다. 됫박 옆에는 곡물을 넣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역센 천 주머니 두 개와 바가지, 대나무로 만들어진 소쿠리, 주먹밥이 놓여있는 큰 접시 하나도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차유진은 얼떨떨한 얼굴을 했지만 김래빈은 원두막 안을 한 번 더 둘러보고는 금방 답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걸 종류별로 골라내야 하나 봐.”

    할머니에게 전래동화를 듣고 자랐던 김래빈의 유년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엄청나게 큰 됫박을 막막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곧 밝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먹을 게 있으니 적어도 굶을 염려는 없어!”

    “그건…, 맞아.”

    하지만 차유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어쩐지 그 주먹밥을 볼 때마다 그들이 만났던 신농씨가 속삭이는 기분이었다. 너희들은 여기서 배가 고파질 때까지 노동하게 될 거란다…, 하고.

    “자. 그럼 시작해 보자.”

    김래빈은 마음속으로 기합을 한번 넣었다. 그리고 바가지로 됫박 안의 것들을 한 바가지 퍼 소쿠리에 부었다. 그도 방법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었지만, 딱 봐도 차유진은 이런 쪽의 지식이 전혀 없어 보이니 자신이 먼저 시험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소쿠리를 느리게 흔들면서 내용물이 흔들리는 모습을 관찰했다. 듬성듬성 짜인 소쿠리 사이로 모래가 떨어지는 사이에 여전히 알갱이가 큰 모래들은 곡물 사이에 섞여 있었다. 쥐눈이콩은 다른 것들과 색깔이 다르고 크기에서도 차이가 있어 금방 골라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모래와 곡물을 구분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음…. 이렇게 하자. 차유진 너는 바가지로 저걸 퍼서 그 안에서 콩만 골라내도록 해. 까맣고 동그란 게 콩이야. 골라낸 콩은 여기에 넣고.”

    그는 차유진에게 바가지와 천 주머니 하나를 주었다. 흘리지 않게 조심해.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콩을 다 골라내고 나면 남은 걸 나한테 줘. 그럼 내가 모래랑 곡물을 잘 분리해 볼게.”

    그렇게 역할 분배를 마친 그들에게 남은 일이라곤 평화로운 노동의 시간뿐이었다. 바가지를 살살 흔들어가며 손가락으로 콩을 골라내던 차유진은 금방 지루함에 입술을 내밀며 괴상한 얼굴을 했지만 그래도 손을 멈추지는 않았어.

    “이거 내 생각이랑 많이 달라. 나 신들이 시험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이름은 멋져도 하는 건 안 멋져.”

    신중하게 소쿠리를 흔들며 모래를 골라내던 김래빈은 소쿠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너는 우리가 뭘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음…. 모험? Like a True Hero! 괴물 잡거나 문제 해결하는 거!”

    차유진이 우스꽝스럽게 양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그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평범한 사람이야, 차유진. 그런 걸 시키면 아마 첫 단계부터 막혔을지도 몰라. 그리고 손 놀지 말고 계속 일해. 일하면서 이야기해. 내 생각엔 이거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와우. 김래빈 진심이야?”

    뜬금없는 차유진의 감탄사에 김래빈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차유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뭐가?”

    “김래빈 안 평범해.”

    “…? 물론 사람에게는 모두 각자의 개성이 존재하겠지만 나는 너처럼 반쯤 신인 것도 아니고 귀신도 안 보이고 다른 능력도 없으니 이런 임무와 관련해서는 지극히 평범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차유진은 그의 설명에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야. 김래빈 진짜 안 평범해. 평범한 사람이면 김래빈 여기 못 와. 그리고 김래빈한테는 나 있어. 나 뭐든 잘해. 어려운 거 나와도 우리 걱정 없어!”

    그 순간 그에게 꼬리가 드러나 있었다면 분명 그 꼬리는 의기양양하게 위로 바짝 세워져 있을 게 분명했다. 그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어쩌면 지금 그의 꼬리가 감춰진 상태인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김래빈은 무심하게 그런가, 하고 중얼거리고는 다시 소쿠리에서 모래를 골라내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차유진은 그 반응에 그만 김이 새 버렸다. 대단한 찬사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무반응이라니.

    “그런데 차유진.”

    앙금이 아주 조금 남아있던 차유진은 그만 은근슬쩍 비딱하게 상대를 바라보고야 말았다. 물론 김래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눈치채지 못했다, 쪽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네 말을 듣고 갑자기 떠오른 건데, 네가 쓸 수 있는 능력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지?”

    차유진이 멈칫했다. 오…. 말꼬리가 흐릿하게 늘어졌다. 이제까지 자신만만했던 반신의 어깨가 살짝 처지더니 시선이 슬그머니 먼 곳을 향했다.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차유진은 마지못해 인정했다.

    “…응. 없어.”

    김래빈은 별로 실망한 얼굴도 아니었다.

    “그래. 사실 이미 예상하기는 했어. 네가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너는 벌써 그 힘을 썼을 것 같거든.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시 일 하자.”

    차유진은 급격하게 말이 줄어들었다. 보이지 않는 귀가 축 처진 재규어 신 한 명과 인간 한 명은 다시 열심히 콩과 곡물과 모래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김래빈이 습관적으로 흥얼거리는 노래가 마치 노동요처럼 오두막을 둘러싼 평화로운 광경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농씨는 고지식할 만큼 자신의 말을 지키는 신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못 할 만큼 어렵지는 않으나 끈기와 성실함이 필요한 일’들을 직면해야 했다. 곡식과 콩을 다 구분했더니 다음으로는 잡초를 뽑아내야 하는 넓은 밭이 나타났고, 만 하루 동안 잡초를 전부 없애고 들고 온 씨앗을 심었더니 그다음에는 또 짓이긴 풀과 진흙으로 어떻게든 깨진 물독을 메꿔 씨앗에 물을 줘야 하는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김래빈도 물독 옆에 놓인 떡과 경단을 보면서도 웃지 못했다. 음식이 마련되어 있다는 건 배가 고파질 때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걸 반복된 경험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집이 준비되어 있으면 해가 져서 하룻밤 묵어야 할 때까지 일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 신 이상한 신이야….”

    투덜대는 차유진을 김래빈이 엄중한 표정으로 만류했다. 물독의 깨진 부분을 어떻게든 메꿔보느라 손에는 온통 짓이겨진 풀과 진흙이 묻은 채였다.

    “일은 분명 힘들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차유진. 보살님께서도 그러셨잖아. 신에게서 직접 재료를 받는 게 훨씬 더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고. 그러니까 주어진 기회를 감사히 생각해야 해. 물론 내가 이런 기회를 얻게 된 건 다 네가 내 수호신 역할을 하겠다고 한 덕분이라는 점도 잊지 않았으니 네게도 고마워하고 있고.”

    “김래빈. 나도 이거 좋은 기회인 거 알아. 그래도 힘들어.”

    물독을 든 차유진이 노골적으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을 보며 김래빈은 땀이 흐르는 뺨을 한 번 훔쳤다. 그는 깨진 물독과 끝도 없이 이어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저절로 입이 열렸다.

    “사실 차유진, 우리나라에 콩쥐 팥쥐라는 동화가 하나 있거든.”

    넓은 밭에 흩뿌리듯 물을 끼얹던 차유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김래빈 여기 흙 묻었어.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다시 뺨을 문지르던 김래빈은 포기하고 그냥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일을 하다 보면 흙이야 또 묻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일을 다 끝내고 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깨진 물독을 막는 일을 하다 보니 갑자기 생각났어. 거기도 깨진 물독으로 물을 길어야 하는 내용이 나오거든. 콩쥐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보다 조금 더 조건이 까다로워서 시간 안에 끝내는 게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일을 여럿 해야 했지만….”

    “왜? 콩쥐도 술 만들어? …잠깐, 쥐 술 마셔?”

    “아니, 술은 빚는다고 해야 해. 그리고 콩쥐는 쥐가 아니라 사람 이름이야. 주인공.”

    차유진의 말을 정정하면서 그는 어렸을 적에 읽었던 동화의 내용을 떠올렸다.

    “뭐였더라…. 콩쥐 어머니는 새어머니였는데, 콩쥐만 잔치에 못 가게 하려고 일부러 불가능한 일을 시키는 거야.”

    “나 그거 알아. 신데렐라? 조금 비슷해.”

    비슷하긴 하네. 김래빈은 어릴 적에 들었던 신데렐라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는 물에 젖어 떨어져 나가려는 진흙 덩어리를 다시 새 덩어리로 바꿔 물독의 틈을 메꾸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거기서는 콩쥐가 해야 하는 일을 동물들이 도와주거든. 예를 들자면 넓은 땅에 뿌려진 곡식을 다 모으라고 하니까 개미가 도와줬던가…? 음. 아무튼 콩쥐가 착한 소녀라 여러 동물이 도와주는 것처럼 나와.”

    나머지는 황소, 그리고 두꺼비였나? 그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렸다. 동화를 제대로 읽은 것도 너무 예전의 일이었다. 확실한 건 콩쥐의 깨진 물독은 두꺼비가 막아줬다는 거다. 김래빈은 두꺼비 대신 진흙과 풀을 이겨 구멍을 막아 낸 물독에 물을 채웠다.

    “처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보는데, 콩쥐가 해야 했던 일과 너무 비슷한 거야. 그래서 나는 우리 일도 동물들이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지.”

    차유진만큼 강렬하고 위험천만한 모험을 상상한 건 아니었지만 김래빈 역시 조금은 아이 같은 꿈을 꾸었다. 신을 만나는 게 모든 사람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테니까, 어쩌면 그도 콩쥐를 도와줬던 동물들처럼 기이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들판은 고요했고, 그는 차유진과 함께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그 모든 일들을 해내야 했다.

    “김래빈 실망했어?”

    옆에서 물을 뿌리던 차유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땀을 훔쳐냈다.

    “처음에는 조금. 내가 그만큼 착하게 살지 않은 걸까 싶었지.”

    조금 서운했다. 전혀 서운할 일이 아닌 걸 알면서도. 한 번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데도.

    그 양가적인 감정을 더듬어보며 김래빈은 차유진을 떠올렸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순도 이와 비슷한 걸까. 신으로써 가진 강한 힘을 자랑하면서도 끝까지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하지만 그는 구구절절하게 제 감상을 설명하는 대신 고개를 짧게 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시 떠올려 보니, 신께선 우리가 얼마나 착한지 시험하겠다고 하지 않고 우리의 끈기와 성실함을 시험하겠다고 하셨잖아? 그렇다면 동물이 와서 도와주지 않은 쪽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어. 동물이 도와주면 우리가 착한 사람이라는 건 증명될 수 있어도 얼마나 끈기가 있고 성실한지 보여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좀 힘들어도 일을 열심히 하면 시험을 통과하기에는 전혀 문제없다는 결론이 나왔어.”

    차유진은 그 덤덤한 목소리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김래빈이 그렇게 결론을 낸 건 하나도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김래빈은 옆에 반신(半神)인 그를 두고도 신의 힘을 빌릴 생각 한번 안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이제는 촉촉하게 젖은 넓은 밭을 어깨 너머로 가리키며 으쓱했다.

    “응. 우리 많이 일했어. 이만큼 하고 통과 못 하면 그 신 눈 부러?졌어.”

    차유진은 마지막으로 물을 손에 부어 손을 씻고 그와 김래빈의 입에 나란히 경단을 밀어 넣었다. 눈이 삐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차유진이 원래 하려던 말을 짐작하며 경단을 우물거리던 김래빈은 기어이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차유진이 신농씨에게 ‘눈 부러졌어요?’하고 묻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그 초가집으로 돌아왔을 때 신은 그들에게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커다랗고 통통한 참새를 한 마리 안겨 주었다. 그 참새가 너희에게 곡식과 약재를 줄 것이라고 덧붙이며.

    김래빈이 신농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사이 그 참새는 차유진이 받더니 냉큼 제 팔 사이에 끼웠다. 참새는 잠시 날개를 퍼덕이며 몸부림치는가 싶더니 차유진의 동공이 가늘어지고 송곳니가 드러나자 곧 조용해졌다. 김래빈이 신에게 허리를 몇 번이고 숙이느라 보지 못한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그들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참새는 참새 모양 도자기 연적이 되어 있었다. 보통의 연적보다는 주둥아리가 좀 더 큰 그 연적을 기울이자 물 대신 쌀 낱알과 말린 약재들이 쏟아져나왔다. 손으로 그 낱알을 문지르니 기름진 윤기가 돌았다.

    “좋은 쌀이네.”

    낱알들을 매만지던 김래빈이 다시 그걸 연적의 주둥이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계는 이제 막 오전 세 시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서 머문 건 적어도 이틀은 넘었을 텐데, 현실의 시간은 고작 두 시간이 흘러있었다. 연적이 없었다면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차유진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간단하게 평했다. 거기 환상이라서 그래. 여기랑 시간 달라.

    “그래도 한동안 가게 휴무라고 적어놓길 잘한 것 같아. 아무래도 나 근육통 올 것 같아.”

    김래빈은 뻐근해져 오는 어깨를 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가게의 창고에서 500ml 맥주병 두 개와 생강 전병이 담긴 종이상자 한 개를 들고나왔다.

    “김래빈 이거 다 뭐야?”

    김래빈의 칵테일 바에는 여러 종류의 술이 있었지만 맥주는 거의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던 차유진이 의아하게 물었다. 김래빈은 병따개를 그들 사이에 놓고 접시를 하나 꺼내 생강 전병을 옮겨 담으며 답했다.

    “얼마 전에 주류 관련해서 업계 사람이 영업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맥주도 한번 생각해 보시라며 한 팩 두고 갔거든. 여전히 맥주까지는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결국 들이진 않았지만…. 에일 종류고, 맛과 향이 괜찮았어. 우리 일 열심히 했잖아. 들어가기 전에 한잔하는 것도 피로를 푸는 데 좋을 것 같아서.”

    그는 병따개로 제 맥주병의 뚜껑을 열었다. 좁은 주둥이 사이로 꽃과 과일을 닮은 향긋한 향이 퍼졌다.

    “일반적으로 파는 맥주보다는 쌉쌀한 맛이 더 강하겠지만, 지금 안주로 먹는 건 좀 달콤한 종류니까 괜찮다고 생각해. 지난번에 이렇게 먹어보니까 괜찮았어.”

    김래빈은 병을 들었다. 그리고 차유진 쪽으로 팔을 기울였다. 차유진은 웃음을 터트리더니 맥주병을 들어 그의 병에 살짝 부딪히고는 외쳤다. 건배!

    “좋아! 우리 성공 축하해.”

    그는 병을 기울였다. 부드러운 거품과 탄산감이 적은 맥주가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놀랍도록 시원했다.

    에일 편

  • 우화 3

    우화 3

      신에게 올리는 술은 가장 귀한 것으로 공들여 빚어야 한다. 이 땅에서 술 빚는 재료 중에 가장 귀한 건 곡식, 그중에서도 쌀이다. 쌀과 약재를 넉넉히 써 여러 번 덧술을 해서 빚은 술. 김래빈이 빚어야 하는 술은 그런 술이었다. 물, 쌀, 누룩과 약재. 신에게 올리는 것 중 가장 귀한 술이니 그 재료 역시 신에게서 받아 쓰거나 처음부터 아주 정갈하게 길러내 준비해야 한다.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은 할머니 텃밭 가꾸는 걸 도와준 정도인 김래빈이나 아예 경험이 없는 차유진이 쌀이며 약재를 처음부터 기르는 건 어려우니 결국 남은 건 신에게 기대는 길이다. 

    “여기서 우리 제사 해?”

    눈썹 위에 손날을 얹어 주변을 휙휙 돌아본 차유진이 의아한 얼굴로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3월의 첫 주말. 새순도 올라오지 않은 잔디밭에 포석이나 겨우 놓인 그 공간은 제사를 올리던 곳이라기엔 다소 볼품이 없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모양새가 좀 이상할지 몰라도 여기는 조선 시대부터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유서 깊은 곳이야. 요새도 4월에 제사를 지낸대. 그러니까 여기가 맞아.”

    그는 어깨에 이고 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냈다. 접이식 미니 탁자, 작은 도자기 접시, 휴대용 라이터, 술잔, 무당이 그들에게 준 향, 그리고 그의 집안 사람들에게 가장 호평을 받았던 제사용 청주 한 병.

    “차유진. 나를 잠깐 이목에서 가려줄 수 있어?”

    “가능해! 왜?”

    “그래도 여기는 문화재인데 불 피우는 걸 남들에게 보이는 게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서.”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딘가에는 CCTV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관리기관에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기도 어려운 노릇이었다. 누가 이런 걸 믿어주겠는가? 신고나 안 당하면 다행이었다. 이건 비상 상황이라 어쩔 수 없노라고 김래빈은 마음을 다잡았다. 고개를 갸웃한 차유진이 손가락을 탁 튕겼다. 이제 됐어. 그 말에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본 김래빈이 바닥에 주섬주섬 탁자를 펴고 그 위에 접시와 술병, 술잔을 올렸다.

    향에 불을 피워 접시 위에 올려 사르고 술잔에 술을 따른 후 서서히 올라오는 향의 연기 위로 술잔을 들어 올려 조심스레 돌린다. 술잔에 담겨있던 술은 주변에 뿌리고, 다시 새 술을 따라 반복한다. 술을 총 세 번 올린 후 바닥에 엎드려 절하고 무릎 꿇은 채 남은 향이 다 타기를 기다린다. 향이 다 타고 나면 주변을 정리하고 가게로 돌아가 신이 부르기를 기다린다. 그게 무당이 그들에게 설명한 방법이었다.

    “다 끝났어?”

    “응. 절을 여러 번 해야 하니까 다음번엔 무릎 방석 같은 걸 같이 준비하는 게 낫겠어.”

    “나는 제사? 안 하는 거 맞지?”

    “그래. 보살님의 말에 따르면 너는 신에게 간청하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역할이라고 하니까 너는 안 해도 되는 게 맞아.”

    무당의 말은 여전히 알쏭달쏭한 부분이 많았다. 설명을 듣는 것보다 직접 해보면 알 거라고도 했다. 그들은 일단 가게로 돌아갔다. 김래빈은 잠깐 고민하다가 바의 문 앞에 ‘출장으로 당분간 쉽니다’라는 종이를 붙여 두고 SNS에도 같은 공지를 띄웠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한동안 계속 바를 비워두는 게 나았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바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터앉았다. 바 근처 스탠드를 제외한 나머지 전등은 꺼 둔 채였지만 아직 낮이라 가게 안은 제법 환했다. 바 뒤로 벽장을 가득 채운 술병 장식들이 오후의 비스듬한 햇빛을 반사해 희미하게 빛났다.

    “우리 언제까지 기다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들은 바가 없어.”

    “집에서 기다리는 거 안 돼?”

    “여기가 도깨비 터라서 영적인 분야에선 집보다 가게가 낫대.”

    그들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무것도 안 하니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중간부터는 너무 심심했던 차유진이 가게의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왔다. 행맨을 했을 때는 차유진이 연전연승하는 수준이었고, 오목은 그래도 승률이 반반이었다. 제 처참한 영어 어휘 실력을 지적당한 김래빈은 바에 머리를 박았다가, 채소만 가득한 저녁 식사를 주문하는 것으로 차유진에게 복수했다. 나중에는 패드를 비스듬히 세워두고 서로 머리를 맞댄 채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거 말 안 돼. 이야기 너무 이상해! 김래빈 왜 이거 골랐어?”

    “할머님께서 좋아하던 드라마라….”

    “…오.”

    한국의 막장 드라마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던 차유진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화라고 남의 할머님 취향을 매도할 순 없는 일이다. 특히 그 할머님이 보내주시는 반찬에 환장하는 차유진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에 계속 집중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남녀가 한창 싸우고 있는 화면에 금방 흥미를 잃은 차유진은 어느새 느껴지는 기척을 따라 고개를 돌려 가게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아직은 해가 짧은 계절, 어느새 창밖도 어둑해져 바 주위를 제외한 가게 안은 어두컴컴한 그늘에 잠겨있었다.

    “김래빈. 술 있어? 아까 쓴 거.”

    “제사 올리고 남은 거? 왜? 마셔보게?”

    차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게의 가장 구석진 곳을 응시했다. 그늘 사이에 언뜻언뜻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가 계속 한 곳을 응시하는 게 신경 쓰이는 듯 김래빈 역시 같은 곳을 향해 흘긋 시선을 돌렸지만,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저건 인간이 아닌 존재의 흔적이다.

    “저기 귀신 있어. 김래빈 안 보이지?”

    귀신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김래빈이 차유진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다시 고개를 움직였다. 흡사 목에서 끼기긱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도였다. 김래빈은 쭈삣거리면서도 꽤 오랫동안 가게 한구석을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안 보이던 귀신이 보일 리는 없었다.

    “너…,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냐. 김래빈 겁 많아. 그러니까 나 약속 지켜.”

    한때 차유진은 시도 때도 없이 저기 귀신 있다를 외치며 김래빈을 질겁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소리 없이 얼굴로만 경악한 채로 펄쩍 뛰는 상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였다. 조금 심했던 건 인정한다. 김래빈에게 목 잡혀 흔들릴 뻔한 뒤로 그와 김래빈은 극적인 타협을 보았다. 적어도 귀신으로는 김래빈을 놀리지 않는 걸로.

    귀신이 없는데 있다고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건 김래빈에게는 비밀이다. 도깨비 터인지 뭔지, 이 술집에는 정말로 생각보다 많은 영이 드나들었다. 그게 설령 전부 귀신은 아닐지라도, 김래빈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체질이라 다행이었다.

    ‘사람이 인간 아닌 거랑 자꾸 말 섞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김래빈이 미간을 찌푸린 채 술을 찾는 동안 자신도 반쯤은 인간 아닌 존재라는 걸 망각한 차유진이 다시 귀신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인 채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은 언뜻 보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이 나라의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끔찍하거나 징그러운 외양을 가진 귀신은 아주 일부분이다. 대부분은 보통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게 생겼다. 저게 사람이 아니라는 감각만 명확할 뿐.

    “자. 여기. 이것만 있으면 돼?”

    “컵도.”

    김래빈에게서 술과 잔을 받아 든 차유진이 잔에 청주를 반쯤 채웠다. 크게 원한이 없이 떠도는 귀신이라면 술을 올리는 것만으로 조용히 사라지리라. 그가 구석진 테이블에 잔을 올리고 돌아오는 내내 김래빈은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 갔어?”

    “아직. 김래빈 저기 자꾸 보지 마. 귀신은 자기 보는 사람 좋아해. 그래도 내 생각에 쟤 금방 가. 여기 귀신 오래 못 있어. 다른 신한테 걸리면 혼나.”

    그가 이제까지 이 바에서 돌아다니면서 목격한 바로는 대체로 그랬다. 저승사자든 신이든, 귀신은 상위의 존재에게 꼼짝 못 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무슨 기준인지는 몰라도 그가 다가가기만 하면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는 넋들도 몇 보았고. 그건 다행이네. 김래빈이 여전히 구석을 흘긋거리며 술병을 받아 들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너, 이제까지는 술 올리고 그런 거 안 했잖아.”

    보통 차유진은 귀신을 살살 달래 내보내는 대신 힘으로 밀어내는 편이다. 귀신이 보이지 않는 김래빈도 차유진이 그를 한창 귀신으로 놀리고 난 후 제가 한 일을 주절주절 떠들어댄 통에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바꿀 거야! 나 힘 아껴.”

    차유진은 김래빈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술을 올리고 제를 지내고 이런 것보다는 그냥 힘으로 꼼짝 못 하게 누르는 게 더 편했다. 그래도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당의 말 때문이었다. 차유진이 거의 떠밀다시피 상대를 재촉한 탓에 먼저 문을 나섰던 김래빈은 듣지 못한 말이었다.

    ‘술을 만든다고 끝이 아니다, 범아.’

    차유진이 돌아보았을 때 무당은 부채로 얼굴 반을 가린 채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신에게 간절히 빌고 싶은 소원은 꼭 너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 꼭 인간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악에 받친 삿된 것들이 그 술을 보고 무엇을 하겠느냐.’

    무당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낯설어도 직감적으로 그 뜻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지켜야 할 것이 술이든 김래빈이든, 지금까지처럼 힘을 낭비할 수 없었다.

    “힘이 걱정이면 주기적으로 제주(祭酒)를 받으라니까.”

    김래빈은 어이없다는 듯이 차유진을 바라보았다. 붕붕 소리가 날 것처럼 고개를 흔드는 걸 보니 그건 또 싫은 모양이었다. 청주가 대체 어디가 어때서. 바텐더를 준비하면서 술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루 매료되었던 김래빈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기다림은 새벽녘에나 끝이 났다. 가게 한구석에서 때이른 빛이 흘러들어오는 걸 눈치챈 김래빈이 바에 엎드려 반쯤 졸고 있던 차유진을 흔들어 깨웠다. 그들이 빛에 삼켜지기 전 확인한 시계는 오전 2시 무렵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신인진 몰라도 정말 너무하네. 차유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녹록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청주

  • 우화 2

    우화 2

    모주

        ‘느이 할아버지 삼촌이 아직 살아계시지 않니. 근데 그분이 예전에 그 비슷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고 하시네.’

    차유진과 김래빈은 이동 중이었다. 할머니의 연락을 받은 뒤였다. 할머니 말로는 김래빈의 증조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아주 오래전 읽은 기록이라 이제 와 기록을 다시 뒤질 수는 없다 했다. 시간을 셈해보면 광복도 되기 전의 기록이 분명하니 김래빈이 생각하기에도 제가 그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대신 할머니는 그들에게 어떤 무당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무당 주소 하나를 알려주기 위해 할머니는 그의 집안이 알고 지내던 무당 네트워크를 탈탈 털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 아니야.”

    그 무당은 전주에 머물고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주택처럼 보이던 무당의 거처 내부에는 화려한 제단이 차려져 있었는데 그 앞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무당은 부채를 탁 접자마자 그들에게 대뜸 말을 던졌다.

    “예?”

    김래빈이 눈을 휘둥그레 뜰 때 차유진은 잠시간 무당을 경계하는가 싶더니 색색의 깃발로 알록달록한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분명 술을 더 급하게 찾았던 건 차유진이었는데, 막상 정말로 술이 있다고 하니 초조하게 무당의 앞으로 의자를 바짝 끌어다 앉은 쪽은 김래빈이다.

    “그렇다면 그 기록은 무엇입니까? 할머님께서 분명 소원을 들어주는 술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 듣기로는 분명 무당님께서…,”

    “어허, 보살님! 보살님이라고 부르라니까!”

    모시는 신에 따라 영험함이 결정된다면 이 무당은 분명 나라에서 손꼽히는 무당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제대로 된 신내림을 계승한 무당도 점점 줄어드는 이 시대에 무려 칠성신을 모시는 무당이라니. 특정한 위인을 모시는 무당보다 훨씬 격이 높다.

    믿기 힘든 일이라 김래빈의 할머니도 몇 번이고 확인을 거쳤는데 이미 관련자들 사이에서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모양이었다. 별도로 홍보할 필요도 없이 소개만으로도 손님이 꽉 차서 아는 사람만 아는 무당이라고. 김래빈의 집안이 그 무당과 연이 있지 않았더라면 그들 역시 이렇게 급박하게 끼어들어 무당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걸 아는 김래빈은 납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보살님께서 저희를 도와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내 신어미의 신어미가 이북에서 피난으로 내려왔을 때 잠시 너희 가문과 인연이 있었지. 그 은혜를 이제사 갚게 되었으니 잘 된 일이다. 잘 들어라. 그건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 아니야. 정확히는 신께 간청할 때 쓰는 술이다. 그러니까 술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고, 그 소원을 들어주십사 하고 간청할 때 도움을 주는 술이다. 그러니 아무나 만들 수도 없고, 빈다고 소원을 다 들어주지도 않고, 만들 때부터 신의 힘을 빌려야 한다. 그런 술이다.”

    한꺼번에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내렸다. 김래빈의 눈이 핑글핑글 돌았다. 그러니까 내가 만들어야 하는 술은 신의 힘을 빌려야 하는 술이고, 근데 그 술만 있다고 소원을 들어주는 건 아니고, 소원도 신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신과 술과 소원이라는 단어가 김래빈의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뒤섞였다.

    “신 마음 작아요? 왜 소원 안 들어줘요?”

    차유진이 툭 끼어들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김래빈은 마음이 좁다고 말을 고쳐줘도 되는지, 혹시 그 말이 신에게 불경한 건 아닐지, 그렇다면 차유진을 말려야 하는 게 맞는지 안절부절못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당의 호통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 술이 만능이었다면 너희 가문이 아주 오래전에 이 나라를 틀어쥐고도 남았을 것이다. 합당한 신에게 원하는 것을 정확히 비는 게 쉬운 줄 아느냐?”

    퉁명스럽게 그 말을 툭 던진 무당은 차유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걸 범이라고 해야 하나. 난처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너희가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만들 때부터 신의 힘을 빌려야 하니 신의 시험도 여러 번 통과해야 하는데 어렵기도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고, 기회도 딱 한 번뿐이지. 이번에 네가 이 어린 범을 위해 소원을 빌면 널 위해서는 소원을 빌 기회가 없다는 뜻인데….”

    그 말에는 차유진이 더 놀랐다.

    “김래빈 소원 못 빌어요?”

    “성공한다면 그렇게 되겠지.”

    무당은 혀를 쯧 차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반면 차유진의 표정은 사뭇 심각해졌다. 김래빈 잠깐만.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우리 나가, 하고 그를 잡아끌었다. 아니 왜. 어리둥절한 김래빈의 말조차 무시하면서. 무당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어차피 나도 지금은 안 되겠고 그럴 각오가 서면 다시 오너라. 그때는 저 범이 네 수호신 역할도 해야 할 테니 어차피 둘이 이야기는 한 번 해보아야 해.”

    둘은 그렇게 무당의 집을 빠져나왔다. 저녁 시간이었다. 김래빈은 시장으로 차를 돌렸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국밥집 한가운데에서 차유진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콩나물국밥을 앞에 둔 채 입을 비쭉 내밀고 앉아 있었다. 김래빈은 같이 나온 막걸리잔에 모주를 따라 내밀었다.

    “자.”

    “…시나몬?”

    “시나몬 아니고 계피. 모주라고 부르는 거야. 이름은 술인데 사실 도수는 굉장히 낮아서 그다지 술 느낌은 들지 않아. 굳이 비교하자면 뱅쇼랑 유사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데 구성은 좀 차이가 있어. 혹시 네 취향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럼 마시지 않아도 돼.”

    차유진은 고개를 젓고 잔을 들었다. 몰라. 그래도 마셔볼래. 상대가 잔을 든 걸 확인한 김래빈은 그의 잔에도 모주를 따른 후 건배하듯 살짝 부딪혔다. 차유진이 말문을 연 것만으로도 한층 안심한 기색이었다.

    “난 네가 좀 더 기뻐할 줄 알았어.”

    조부모와 같이 살면서 각종 한약이나 수정과에도 익숙해진 김래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모주를 들이켰다. 따뜻하게 데워진 술에서 올라오는 약재 냄새를 먼저 맡은 차유진이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가, 막상 한 모금 마셔보더니 입에 맞았는지 곧 훌쩍 잔을 비워냈다.

    “방법을 찾은 거 기뻐. 김래빈 기회 뺏는 건 안 기뻐.”

    새우젓 그릇이 손과 손 사이를 오갔다. 국물의 간을 확인한 차유진이 상대를 따라 김을 집어 들었다. 수란에 국물을 살살 부어 입에 넣던 김래빈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차유진이 왜 심각한 얼굴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는 네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런 기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텐데. 그럼 어차피 마찬가지인 거 아니야?”

    “아니야. 김래빈 잘 생각해야 해. 나한테 주면 김래빈은 소원 비는 거 못해. 그거 큰 기회야. 난 그거 몰라서 달라고 했어.”

    차유진이 답답한 마음을 담아 수저를 흔들었다. 앞에서 김래빈의 얼굴이 저게 무슨 밥상머리에서 무엄한 짓인가 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래빈의 젓가락이 차유진의 숟가락을 톡 건드렸다.

    “알았으니까 이거 내리고 밥 먹어. 네 말대로 잘 생각해 볼 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차유진은 아무것도 모르는 김래빈을 속이듯 기회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약속한 건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 성격이니 김래빈은 꽤 진지하게 무당이 했던 말을 고민하리라. 그에게서 그 답을 얻어내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 흐린 얼굴을 지운 차유진은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 김래빈 믿어.”

    차유진이 밥을 뜨기 시작해서 김래빈은 그걸로 대화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차유진은 다시 진지한 얼굴을 했다. 김래빈. 의미심장하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김래빈은 다시 몸을 차유진 쪽으로 기울였다.

    “우리 이거 한 병 사가.”

    차유진은 모주가 정말로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둘은 그 후로 사흘 내내 전주의 맛집을 돌며 하루 한 번씩 모주를 마셨다. 오늘도 숙소로 돌아가는 차유진의 손에 모주 한 병이 달랑달랑 들렸다. 차유진은 처음엔 술집에서 일하니 새로운 술을 탐구해야겠다고 핑계를 댔다가 나중에는 그냥 먹고 싶으니 먹겠다고 우겼다.

    “모주가 아무리 도수가 낮고 일부는 무알콜이라고도 한다지만, 엄연히 술을 재료로 만들어진 데다 당도가 높아 너무 많은 양을 한 번에 섭취하면 아무리 약재가 들어갔어도 건강에 좋지 않아!”

    차유진이 술을 사는 내내 같은 요지의 말을 어휘만 바꿔서 여러 번 반복했던 김래빈은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숙소로 모주를 들고 들어온 이상 이건 차유진이 이미 90% 이상 승기를 잡은 게임이다. 차유진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거 술 아냐! 그래서 김래빈 안 마셔? 그럼 나 혼자 마셔!”

    나 뚜껑 땄어. 이거 늦장부림이야. 페트병 마개를 당당하게 들어 올린 차유진이 어떻게 할래, 하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김래빈은 하늘을 한 번 보고, 바닥을 한 번 보더니 긴 종이컵을 두 개 꺼내왔다. 늦장부림이 아니라 낙장불입이겠지. 투덜거리는 말은 한 귀로 흘린 차유진이 신난 얼굴로 숙소에 딸린 작은 탁자에 병을 내려놓았다.

    “우리 안주 먹어?”

    “아니. 이것만 마셔도 충분히 배불러. 우리 저녁도 먹었잖아. 안주 시키지 말자.”

    진짜로 안주를 먹고 싶어서 물은 건 아니었는지 쉽게 수긍한 차유진이 그들의 앞에 놓인 컵에 술을 따랐다. 병에서 여러 번 흔들린 술이 작고 부드러운 거품을 내며 컵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들이 묵는 숙소는 취사 금지여서 불을 쓸 수 없어도 모주는 차갑게 마시면 또 그 나름의 맛이 있는 술이다. 천천히 잔을 비울 요량으로 반쯤 마시다 만 모주를 내려놓은 김래빈은 의자에 늘어지듯 등을 기댔다.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창밖으로 전주 시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창이 난 방향대로 시내를 가로질러 외곽으로 가면 그들이 방문했던 무당의 저택이 있을 터였다.

    “차유진.”

    “김래빈 술 아직 있어서 더 못 줘.”

    자신의 빈 컵에 부리나케 남은 모주를 붓던 차유진이 그의 컵을 힐긋 넘겨보며 말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거 말고.”

    이럴 때마다 김래빈은 종종 마음이 이상했다. 저럴 때의 차유진은 정말로 평범한 인간 같아서. 그래서 사람이 고양이로 변할 수 있다거나, 소원을 비는 술이 있다거나, 아니면 어떤 술집에 저승사자가 드나든다거나 하는 일이 전부 그냥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가 계속해서 겪고 있는 일인데도.

    “네가 고민해 보라고 했던 이야기 말이야. 그동안 좀 생각해 봤거든.”

    차유진이 컵을 내려놓았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김래빈은 손을 느리게 흔들었다. 반쯤 남은 탁한 갈색 액체가 종이컵 안에서 휘돌았다. 그는 천천히,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생각이 바뀌진 않았어. 나보단 네가 이 기회를 쓰는 게 맞아.”

    차유진은 숨을 들이켰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김래빈 할머니 아파도?”

    김래빈이 그를 돌아보았다. 차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차유진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고 장난기가 없는 걸 확인한 김래빈이 탁자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톡. 손가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야. 네가 고민해 보라고 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정해 보았거든.”

    만약 소원을 빌 기회가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빌고 싶은가.

    차유진이 고민하라고 한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김래빈은 그 답을 찾으려 했다. 쉽지 않았다. 자잘하게 원하는 거라면 무수히 많았다. 조부모가 계속 건강했으면 좋겠고, 바에 드나드는 손님들이 행복했으면 좋겠고, 진상 없이 평온한 하루가 계속되었으면 좋겠고, 누나가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고, 나중에라도 좋아하는 공부를 더 할 수 있으면 좋겠고…. 그렇게 빌고 싶은 게 수없이 많다가도 반드시 신의 힘을 빌려 소원해야 하는 한 가지만 꼽으라면 들 수 있는 게 없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몹시 편찮으시게 된다면 조금 아쉬울지도 몰라. 하지만 어차피 소원을 빌 수 있는 건 단 한 번뿐이라며. 나한테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누나도 있고 할아버지도 있는데, 그중에 누가 가장 중요한지, 어떤 때에 소원을 비는 게 가장 적합한지 어떻게 결정하겠어? 가족한테 일이 생길 때마다 그때 쓰지 말고 지금 쓸걸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원래 내 기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게 나아.”

    정말로? 차유진이 물었다. 김래빈은 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컵을 들어 차유진의 컵에 가볍게 부딪혔다.

    “그리고 무당, 아니 보살님께서도 말씀하셨듯 내가 소원을 빈다고 신이 그걸 꼭 들어준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렇다면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신에게 기대기보다는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 쪽이 후회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어.”

    반면 차유진은. 그는 컵 너머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너는 신의 힘이 아니면 방법이 없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기회는 너에게 양보할게.”

    술을 비우며 한 말에 차유진은 답이 없었다. 둘의 눈이 오래 마주쳤다.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차유진이 탁자에 엎드리듯 기댔다. 그래도 여전히 시선은 그를 향했다. 김래빈은 빈 컵을 내려놓았다. 차유진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그래도 결론은 같았다.

    “내일 다시 그 보살님을 찾아가서 말씀드리고 방법을 알아내 돌아가자. 우리 바도 너무 오래 비웠어. 손님들이 이유를 궁금해할 거야.”

    그러니까 빨리 너도 잔 비우고 잘 준비해. 김래빈은 차유진을 가볍게 재촉했다. 마치 그것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차유진은 맥 빠진 듯 한숨을 쉬고는 술을 비웠다. 사람이 좀 감동을 받아볼까 했더니 생각할 시간조차 주질 않았다.

    “김래빈 조금 이상해. 이상한 사람이야.”

    “뭐? 너는 사람이 기껏 고심해서 답을 줬더니…!”

    나 양치할래. 김래빈의 말을 끊고 상대의 컵까지 냅다 잡아챈 차유진이 두 컵을 같이 구겨 쓰레기통에 톡 던져넣었다. 의자를 드륵 밀어 몸을 일으킨 그는 김래빈을 내려다보았다.

    “왜. 더 할 말 있어?”

    “…아냐.”

    뭐야. 김래빈은 차유진을 한번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너 지금 양치 안 할 거면 나 먼저 들어간다. 김래빈이 던진 말에 퍼뜩 고개를 든 차유진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김래빈 그거 반칙이야! 내가 먼저 한다고 했어!”

    “그럼 빨리 씻고 나와. 그동안 난 여기 좀 마저 치워야겠다.”

    그들이 숙소에 나란히 놓인 침대를 하나씩 차지하고 눕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침대 옆 간접 등만 어렴풋하게 켜 둔 채로 차유진은 김래빈의 침대가 놓인 쪽으로 몸을 굴렸다.

    “김래빈.”

    “왜.”

    “만약에 소원 비는 거 성공하면… 나 여기 조금 더 있어도 돼?”

    바르게 누워 있던 김래빈이 차유진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여기 더 있고 싶어? 어두운 밤의 숙소는 조용해서 조금만 속삭여도 말이 잘 들렸다.

    “모르겠어.”

    “모르겠으면서 왜 여기 있어도 되냐고 물어?”

    너도 좀 이상하다. 마치 복수하듯 차유진이 했던 말을 반복한 김래빈이 피식 웃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빨리 자. 내일 늦게 일어나지 말고.

    모주

  • 우화 1

    우화 1

    백주

      김래빈의 바가 위치한 곳은 미류동이라고 불리는 동네였다. 

    지금은 도로명주소를 더 일반적으로 쓰지만 미류라는 이름은 아무리 보아도 근처에 있는 미류산으로부터 온 게 틀림없었다. 미류산은 시내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미류동은 동산에 가까운 높이의 그 산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골목들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골목골목을 따라 오래된 상권이 마치 버섯처럼 웅크린 채 버티고 있는 그 동네에서 그의 바는 번화가와 주택가 사이쯤 위치한 낡고 깨끗한 건물에 있었는데, 1층에는 제법 큰 규모의 낙지 철판볶음 집이 있는 그 건물에는 그 외에는 별다른 간판이 없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2층에 칵테일과 양주를 파는 바가 있는지 눈치채기 어려웠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냥 거기 2층이라고 통용되는 곳이 김래빈이 자신의 바를 꾸린 곳이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그는 한참 오픈 준비 중이었다. 두터운 유리문에 부딪힌 주먹이 텅, 텅 하고 둔중하게 먹히는 소리를 냈다. 김래빈은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는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되었는데, 생각하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가 문 가까이 다가가자 반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무언가를 바짝 들이대고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미류 지구대에서 나왔습니다. 계십니까?”

    유리창에 들이밀어진 것이 경찰 공무원 신분증인 것을 확인한 그는 문을 열었다. 경찰 로고가 새겨진 외투를 걸친 사내 두 명이 나란히 서 있었다. 둘 중 하나는 김래빈에게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영업, 특히 술을 팔다 보면 반년에 한두 번쯤은 경찰과 만날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에 갔을 때는 뭐였더라? 주취 폭력, 아니면 기물 파손…?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런 류의 자잘한 일일 게 분명했다.

    “아이고, 사장님. 잘 지내셨어요?”

    그에게 좀 더 낯익은 경찰이 건성으로 고개를 숙였다.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한 그에게 상대가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저희가 여쭤볼 게 있는데, 협조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협조를 구하는 것 치고 썩 열정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혹시 최근에 이런 사람 목격하신 적 없습니까?”

    사진에는 어떤 남자 하나가 찍혀 있었다. 생김새는 언뜻 평범했다.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짧은 패딩을 걸친 4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성이었다. 사진을 보여주면서도 경찰은 바 주인이 금방 대답을 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지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린 채 사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김래빈의 입에서는 어,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미심쩍은 반응에 경찰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보신 적 있나 보네. 아는 사람입니까?”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리긴 어렵긴 합니다만…”

    “어쨌든 얼굴 기억하잖아요. 아닙니까?”

    그의 우물쭈물하는 반응에도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손님이 아주 특색있거나 어지간히 진상이 아니었던 이상, 보통 자영업자들이 얼굴 한두 번 본 손님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은 편이다. 그들이 찾는 자는 영 별 특색이 없는 자였고 이전에 들렀던 다른 곳에서도 특별한 단서는 얻지 못했다.

    ‘여긴 번화가도 아닌 데다 이렇게 좁고 가게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바는 단골들 위주로 굴러가기 마련인데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 자주 오던 사람이었나?’

    어쩌면 경찰은 조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구대 소속으로 수사를 전담하는 직분은 아니었지만, 협조 요청으로 출동한 이상 뭐라도 하나 건져 가는 게 모양새가 좋다. 좀 귀찮아서 그렇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바 주인이 한숨과 함께 꺼낸 내용은 그들이 기대한 만큼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분은, 말씀드리자면, 지난주 금요일에 처음 오셨는데… 본인이 마신 술값을 안 내고 도망가셨습니다….”

    김래빈에게 그 얼굴이 익숙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제가 착각한 게 아닌가 걱정하며 몇 번이고 가게 내부를 비추던 CCTV를 돌려 보았기 때문이리라. 아래층의 음식집만큼은 아니더라도 금요일 저녁이면 충분히 손님이 많은 때였다. 바텐더 역할을 하느라 바빴던 그가 어느새인가 사라진 손님이 돈을 냈는지 안 냈는지 금방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 그러니까, 무전취식이요?”

    “네.”

    그러면 기억에 남을 수밖에. 경찰은 순식간에 바 주인을 이해했다. 그에게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작은 해프닝은 경찰의 귀에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펜으로 뒷머리를 슥슥 긁더니 수첩을 꺼내는 동작에 긴장이라곤 없었다.

    “음… 뭐. 어쨌든. 그러면 그때 상황을 한번 말씀해 보실까요.”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CCTV를 돌려 보느라 익숙해진 정황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그분은 혼자 오셨고, 바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가져온 짐 같은 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옆자리 분이랑 어떤 술을 마실지 잠깐 이야기하셨던 것 같고요.”

    혼자 오는 손님이 바 자리에 앉는 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칵테일 바에서 서로 모르던 사람이 한두 마디씩 주고받는 것 역시도. 술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음료니까. 가게에 설치된 CCTV는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둘이 메뉴판을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어렴풋이 떠올리기로 그때 손님은 옆 손님에게 술 추천을 받고 있었다.

    ‘…꿈을 꿀 수 있을 겁니다.’

    바텐더는 자신이니 그 대화에 끼어들어 술을 추천해 드려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손님들의 대화를 방해하는 것도 실례라 판단하여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건 그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술을 한 잔 시키셨습니다. 몽지람(夢之藍)이라고, 중국의 맑은 술인 백주의 일종입니다. 자주 나가는 주종은 아니지만 종종 찾는 분들이 있어서 한 병 갖춰 두고 있습니다! 결코 도수가 낮은 편은 아닙니다만 취하진 않으셨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술이 나오고도 한참을 그냥 보고만 있었고, 또 딱 한 잔이었으니까요.”

    이만한 잔으로요. 김래빈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벌려 소주잔만 한가 싶은 잔의 크기를 묘사했다.

    “그러다가… 다른 손님의 주문을 내가는 사이에 잠깐 보니까 잔이 비어 있었고, 그리고 저에게 화장실이 어딘지를 물으셔서 알려드렸습니다. 그게 제가 기억하는 마지막입니다. 나중에야 그 손님이 돈도 안 내고 가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만 그때는 벌써 화장실을 핑계로 나가신 지 좀 되어서요.”

    “화장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화장실은 가게 바깥에 있습니다. 1층이랑 2층 사이에요.”

    “그 뒤로는 따로 보신 적 없고요?”

    “예. 그 뒤로는 전혀요.”

    “그런데 무전취식으로 신고도 안 하셨다고…?”

    “그거야 술 한 잔이니까요. 일반적인 술보다는 조금 가격이 있긴 하지만… 제 할머님께서 먹는 장사하면서 너무 쩨쩨하게 굴면 복이 달아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옆에서 둘의 대화를 건성으로 듣고 있던 다른 경찰관 하나가 몸을 돌렸다. 좀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 경찰관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까 알겠네. 거 원래 여기 밑에서 백반집 하시던 분 손주죠? 근데 왜 음식점은 안 물려받고?”

    “저희 할머님을 아십니까? ”

    “예. 할머님 계실 땐 내가 꽤 자주 드나들었는데 손주분은 나 못 봤나? 지금 낙지볶음도 나쁘지 않은데 예전에 있던 백반집이 진짜 괜찮았어. 반찬도 잘 주고. 아직도 가끔 생각나잖아. 할머님은 잘 계세요?”

    “예. 시골 생활을 즐기고 계십니다. 몸은 잠깐 안 좋으셨다가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고요. 답변해 드리자면, 음식점은 안타깝게도 제 솜씨가 할머님만 못 해서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제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많지 않으니 아무래도 그런 큰 음식점을 제대로 꾸려나갈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아주, 아주 잘 쳐봐야 30대 초반이나 겨우 될까 말까 한 술집 주인의 앳된 얼굴에 경찰은 그건 그렇지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끝이었다. 등을 돌린 채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닥거리나 싶던 경찰들은 이윽고 수첩이며 무전기를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그래요. 협조 감사합니다. 혹시 그 뒤에 그 사람 오면 연락 좀 해줘요.”

    그러면 이 주변 CCTV부터 다시 봐야겠네. 경찰들이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말들이 유리문에 가려 점점 흐려졌다. 출입문에 달린 종소리마저 잦아들자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김래빈은 마치 안도하는 것처럼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찬장을 뒤져 작고 검은 잔과 얇고 주둥이가 긴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가 잔에 술을 따르자 청량한 사과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혹자는 파인애플 향이라고도 평가하는 농향 특유의 향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켰다. 따뜻하게 데우면 좀 더 농밀한 과실 향을 느낄 수 있을 테지만 그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갔어?”

    아무도 없는 가게 안에서 목소리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람이 아니었다. 주황색에 가까운 갈색 털을 가진 고양이 하나가 깨끗하게 닦아둔 바 테이블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 사람 못 찾을 텐데. 너무 늦었어.”

    고양이가 키득거리며 인간의 말을 하는 놀라운 광경에도 잔을 닦아 내려놓는 술집 주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다만 불만스러운 어조로, 거기는 다 닦아둔 데니까 내려와, 하고 고양이에게 말을 걸 뿐이다. 그야 말하는 고양이라면 사람과 대화가 통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만, 애초에 말하는 고양이를 태연하게 대하는 가게 주인도 평범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잖아.”

    “오, 맞아. 믿지도 않을걸?”

    고양이, 차유진은 지루하다는 듯 꼬리를 살랑대더니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걸어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나 바닥에 착지했을 때, 그는 더 이상 고양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의 술집 주인만큼이나 키가 큰 인간이 좀 더 붉어진 머리를 대충 넘기며 바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의 앞에는 김래빈이 따라두었던 술잔이 놓여있었다.

    “이게 그 술이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유진은 잔을 들어 올리더니 이리저리 잔을 돌리며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향이 좋았다. 그래봤자 지금은 평범한 술일 테지만.

    경찰이 찾는 손님에게 술을 권했던 건 저승사자다.

    김래빈은 영적으로 아주 둔감하기 그지없어 귀신도 신도 잘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다. 그 손님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인간으로 둔갑한 저승사자였다는 건 차유진이 귀띔해 주고야 알았다. 그제야 김래빈은 일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바의 조명이 켜졌으니 검은 술잔에 고인 맑은 술은 마치 거울처럼 그 앞에 있는 걸 비추어내었으리라. 저승에서 거울은 보통 망자의 업과 덕을 비추는 데 사용되는 물건이다. 그 순간 손님이 내려다본 술은 저승의 업경이 되었으리라.

    그 손님이 거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그는 모른다. 저승사자가 직접 지목하여 보여주었으니 가볍지 않은 죄였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그 뒤의 일도 불분명하다. 자신의 죄에서 도망쳤거나, 저승으로 떨어졌거나, 아니면 이승과 저승 사이 그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거나.

    “차유진 네가 갑자기 검은 잔에 내가라며 우길 때 알아차려야 했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때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제대로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어.”

    “김래빈 그거 변명이야. 김래빈 안 바빠도 눈치 못 채.”

    김래빈이 인간 아닌 것들을 태연하게 인간처럼 대하는 걸 한두 번 본 게 아닌 차유진은 코웃음을 팽 치더니, 제 앞에 놓인 술을 홀짝 마셔버리고 다시 고양이로 돌아가 총총 사라져 버렸다. 저는 바보가 아니라고 피력하려 주먹을 불끈 쥐었던 김래빈은 고양이가 사라지자 김샜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는 밀대를 꺼냈다. 슬슬 가게를 열 준비를 끝내야 했다.

    블러디메리

      세상에는 도깨비 터라는 게 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도깨비 터를 찾으면 수많은 게시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제각각의 방법으로 도깨비 터를 정의하는 걸 볼 수 있는데, 김래빈의 할머니는 도깨비 터를 영적인 존재들이 오가는 통로라 했다. 

    ‘그러니까 그걸 생기로 누르려면 사람이 많이 오가야 하는 거란다, 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단언컨대, 김래빈의 할머니도 귀신을 보는 능력은 없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까. 무당도 그 홀로는 그 모든 제사와 굿을 감당할 수 없으니, 누군가는 악기를 다루어야 하고 누군가는 제단을 차려야 하며 누군가는 무복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제단에 올라갈 술을 빚어야 할 테고. 김래빈의 친가가 그런 역할을 했던 가문이라고 한다. 뭐, 김래빈이 예전에 지나가듯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가 아주 어릴 때 만났던 어떤 친척은 우리 가문이 왕실의 제사에 올릴 술을 만들기도 했다고 떠벌렸지만, 김래빈은 솔직히 거기까지는 믿지 않았다.

    아무튼 결론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집안은 무당들과 좀 인연이 있다, 이 말이었다. 조금씩 주워듣기만 해도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보다는 좀 더 많이 알 정도로. 그들이 관리하게 된 터가 도깨비 터라는 걸 알게 된 그의 조모는 백반집을 차렸다. 그의 조모는 손맛이 좋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백반집을 찾았다. 도깨비 터를 잘 누르기만 하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는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식당은 번영했다.

    그걸 물려받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안타깝게도 그는 조리에도 음식점 운영에도 조예가 없었다. 결국 경찰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그는 건물의 가장 넓은 구역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고 2층에 작은 바를 차렸다. 아래층 음식점만큼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지 않아서일까. 종종 그의 바에는 인간이 아닌 것들이 마치 손님처럼 드나들었다. 마치 이 고양이처럼.

    “아니, 여기 언제부터 고양이 키웠어요? 귀엽다! 사람 엄청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두어 번 쓰다듬자마자 귀찮다는 듯 슥 피해버리는 고양이를 본 손님이 멋쩍게 말끝을 흐렸다. 고양이답네요. 덧붙이는 말은 칭찬인지 욕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김래빈은 흔들던 쉐이커를 내려놓고 그새 떨어진 고양이 털을 손등으로 밀어 치웠다. 차유진은 진짜 고양이도 아닌 주제에 왜 털은 진짜 고양이만큼 빠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기는 식음료를 다루는 곳이라 동물의 모습으로 오가기에는 위생적인 측면에서 부적절한 공간이라고,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따져 물은 게 벌써 여러 번이었다. 차유진은 물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가 키우는 고양이가 아닙니다. 갑자기 여기로 오더니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습니다!”

    “그게 바로 집사로 간택되었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보통 그렇게 시작하던데…”

    그 말에 김래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꾸 대신 그가 단골에게 내미는 건 블러디 메리가 담긴 잔이었다. 해장용이니 보드카의 비율은 조금 낮추고 타바스코 소스는 조금 더 넣었다. 단골이 좋아하는 대로였다.

    고마워요. 가볍게 인사한 손님은 잔을 우아하게 잡는가 싶더니 장식으로 올라간 셀러리를 앞접시에 올려 치우곤 그대로 술을 쭉 들이켰다. 무릇 칵테일은 향과 맛과 색을 즐기는 거라던데 그런 기색은 일절 없고 대신 걸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우. 이제 좀 살겠네요. 난 꼭 이걸 마셔야 좀 술 깨는 것 같더라. 아니 어떤 미친 회사가 화요일에 술 퍼마시는 회식을 하냐고. 근데 그게 우리 회사네. 이게 말이 돼요?”

    “소미 님께서 저번에 회식 날짜에 대해 건의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겁니까?”

    “네! 진짜 짜증 나요. 오늘 오전 내내 토할 것 같은 걸 참고 일했더니 아주 그냥 죽겠는데 윗대가리라는 새끼는 자기는 반차 쓰고 안 나오고, 내가 진짜 카드값만 아니면 때려치웠다, 이런 회사.”

    수요일 오후는 아무래도 한가한 시간이다. 지금은 다른 손님들도 없으니 그가 단골의 푸념을 받아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프레첼 몇 개를 담아 손님 앞에 밀어준 김래빈은 손님의 맞은편에 살짝 걸터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통탄할 일입니다…. 그 구성원의 정당한 건의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회사가 극히 드물다는 말은 제 누님으로부터도 들은 바 있긴 합니다만 정말로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으신 거라면, 지금이라도 댁으로 귀가하셔서 휴식을 취하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숙취 해소에는 적절한 수분 섭취와 충분한 숙면이 도움이 된다는 건 이미 충분히 증명된 명제이기 때문에….”

    “아뇨. 괜찮아요. 여기 있는 게 내 힐링이야. 진짜 래빈 씨 은근히 웃긴 거 알아요?”

    “저 말입니까?”

    김래빈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의 바를 찾는 많은 손님이 그의 까닭 없는 진지함과 끝없이 늘어지는 말들을 즐거워했지만 김래빈의 눈치는 차유진의 표현에 따르자면 바닷가 모래알 크기만큼이나 작고 하찮은 고로, 그는 대체 왜 손님들이 저를 웃기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종종 다른 손님들께서도 유사한 평을 제게 해주시는 걸 보면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았을 때 저에게 특정 손님에게 통용되는 유머 감각이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합리적으로는 그렇게 판단하는 게 맞겠지요… 하지만 저는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칭찬은 감사합니다.”

    봐요. 방금도 그랬잖아. 손님이 깔깔 웃는 소리가 퍼졌다. 그러더니 곧 잦아들었다.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내는 손님에게 김래빈은 단골에 대한 의리를 담아 꿀을 한 스푼 넣은 미지근한 물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근데, 그러고 보니… 여기 지난번에 되게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하나 있지 않았어요? 오늘은 안 보이네.”

    “아, 그 친구는…”

    김래빈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 친구의 근무시간은 일정하지 않아서요. 너무 바빠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때만 오라고 부탁하는 편입니다. 오늘은 안 왔고요.”

    “…하긴 여기가 좁아서 굳이 아르바이트까지 안 써도 되긴 하겠죠. 아니다.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 아르바이트생까지 SNS에 소문나면 나만 알고 싶은 내 술집 같은 거? 없잖아요. 지금도 주말에 손님 너무 많아서 못 오겠는데.”

    김래빈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지금 손님 다리 옆을 총총 지나쳐 가는 갈색 털의 고양이가 사실 손님이 찾는 그 잘생긴 알바생이라고. 그는 대신 그저 웃었다. 단골은 그 뒤로도 무알콜 칵테일을 두 잔이나 더 시키고 회사의 온갖 부조리함을 그에게 떠들다가 돌아갔다. 김래빈이 조심스럽게 ‘저, 내일은 혹시 출근 예정이 없으십니까?’ 하고 물은 뒤였다.

    그날은 그 손님이 마지막이었다.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는 김래빈의 뒤로 언제 인간으로 변한 건지 모를 차유진이 살금살금 접근했다. 고양이 모습으로 손님한테 애교를 부리고 먹태까지 야무지게 얻어먹어 기분이 좋은 채였다. 팔을 뻗어 김래빈의 어깨 위로 올린 그는 그대로 그의 어깨를 한번 끌어당겼다 놓았다.

    “Hey, 집사?”

    놀리는 게 역력한 어조였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너는 실제로는 고양이가 아니잖아.”

    “나 고양이로 변할 수 있어. 하프-고양이야. 그러니까 김래빈도 하프-집사야.”

    그가 닦을 식기를 모아오는 사이 차유진은 테이블 위로 의자를 올리더니 밀대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대로 바닥을 쭉 밀어내는 동작에는 시원스러운 데가 있다. 차유진은 그의 장담대로 꽤 일을 잘했다.

    “그래서 정말로 언제까지 있을 건데?”

    “나 분명히 말했어. 김래빈이 내가 원하는 거 주면 가.”

    “나한테는 그런 거 없다니까. 아무래도 그 신께서 착각하신 것 같아, 차유진.”

    “김래빈. 신은 거짓말 안 해.”

    “할머님께서 찾아보신다곤 하셨지만….”

    “그럼 나 더 기다려. 그리고 여기 재밌어.”

    그냥 처음부터 받아주질 말아야 했는데. 김래빈은 아주 잠깐 후회했다. 반대로 차유진은 퍽 의기양양한 태도로 밀대를 내려놓고 각종 비품을 착착 정리했다.

    ‘나 특별한 술 찾아.’

    ‘메뉴판에 없는 술을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새로 주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습니다만…’

    ‘내가 찾는 거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야.’

    ‘…그건 새로 나온 술 이름입니까? 저는 들어본 적 없는데요.’

    ‘아냐. 김래빈 찾을 거야. 그때까지 나 여기 있어도 돼?’

    ‘? 예. 제가 서둘러 검색해 보겠습니다.’

    ‘김래빈 분명 허락했어.’

    그러지 말고 더 자세히 물어봐야 했는데. 차유진도 확인시켜 주었다. 그가 아무리 반은 신이어도 그의 허락 없이 그의 공간에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김래빈은 길게 후회하지는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차유진은 일을 참 잘했으니까. 근래 바빠진 그의 바에는 확실히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가끔은 고양이로 변하는 사람이라도.
    그는 문의 표지를 ‘close’로 돌리고 셔터를 걸어 잠갔다.






    ‘왜 연락 안 해?’

    차유진이 두 번째로 그의 바에 찾아왔을 때 김래빈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바에 한 번 찾아왔던 손님이라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 쪽지 줬어. 기억 못 해?’

    김래빈은 쪽지라는 말을 듣고야 제대로 떠올렸다. 아. 지난주에 왔던 손님. 그를 빤히 바라봐서 무언가 잘못이라도 했냐고 물으려던 그 순간 이름을 묻더니 대뜸 쪽지를 내밀어서 그가 더 놀랐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차유진이라는 이름과 11자리의 숫자가 적혀있었는데, 그는 이걸 왜 제게 주지 고민하다가 이벤트 함에 넣어버렸다. 명함을 넣으면 추첨을 통해 무료 칵테일 한 잔을 드립니다. 그때 벽에는 그런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아직 직업이 없으면 명함이 없을 수도 있지. 취업 준비생의 삶은 고달픈 법이다. 무료 칵테일 한 잔이 고플 정도로.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 그대로 연락을 달라는 말이었던 건 모르고.

    차유진은 김래빈이 이벤트 함에서 뒤늦게 그의 쪽지를 주섬주섬 꺼내는 걸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그 뒤 소원을 들어주는 술을 그에게 요구했고, 김래빈이 허락한 틈을 타 그대로 눌러앉았다.

    띠리리릭-. 알람이 울렸을 때 김래빈은 피곤한 눈을 꿈뻑였다. 옆구리가 뜨끈하고… 무거웠다. 그는 익숙하게 팔을 들어 제 옆구리에 상체를 올리고 있는 고양이를 밀어냈다.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눈을 가늘게 뜬 고양이가 불만스러운 듯 애옹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가 곧 당당하게 김래빈이 비운 자리를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차유진, 일어나. 오늘도 계속 고양이인 채로만 있을 거야?”

    “김래빈 일어나는 거 너무 빨라….”

    김래빈은 차유진의 말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밥을 다 차리고 나면 알아서 어슬렁거리며 올 것이니 걱정도 되지 않았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는 밥을 하러 몸을 일으켰다.

    조부모가 시골로 내려간 뒤 조부모와 김래빈의 누나, 김래빈까지 넷이 살던 집은 김래빈이 물려받았다. 정확히는 그 집의 명의는 여전히 조부 앞으로 되어 있었지만 김래빈의 누나까지 회사 근처로 집을 얻어 나가면서 실질적으로 김래빈이 혼자 사는 집이 되어버렸다. 그때는 이 넓은 집을 어떻게 건사해야 하나 고민했던 김래빈은 최근에는 집이 넓어서 다행이라고 생각 중이었다. 처음에 그가 주장했던 대로 집을 내놓고 원룸이나 얻었다면 차유진이랑 같이 지내기에 곤란했으리라. 고양이 모습까지야 어떻게 같이 산다고 쳐도 멀대 같은 남정네 둘이 부대끼며 살기에 원룸은 너무 좁다.

    “김래빈 할머니 아직 답 안 했어?”

    식탁에 수저를 내려놓자 때맞춰 거실로 나온 차유진이 반찬 뚜껑을 열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리신다고 이미 말했잖아.”

    차유진이 처음에 김래빈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았을 때 김래빈은 바로 그의 조부모에게 연락했다. 돌아온 대답이 썩 신통치는 않았지만.

    ‘에구. 우리 집이 술 빚는 집안이었던 건 맞지. 그런데 사실 맥이 끊긴 지 오래되어서…. 일제강점기 때는 빚으면 큰일 나서 한동안 못 빚었다고 들었거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술도 처음 듣지만… 우리 강아지 빌고 싶은 소원이라도 있나? 그럼 이 할미가 한번 알아봐야지!’

    그 뒤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장조림을 반찬통째로 제 쪽으로 끌어가는 차유진의 젓가락을 제 젓가락으로 툭툭 내리쳐 멈춘 김래빈이 그 대신 가지구이를 차유진 쪽으로 밀었다. 차유진이 입을 비쭉거리더니 가지구이를 한 무더기 집어 올렸다. 이럴 때의 차유진은 그냥 아주 평범한 인간 같았다.

    그가 차유진과 살게 된 지도 벌써 반년. 부대끼고 산다는 게 뭔지, 둘은 금방도 친해졌다. 김래빈이 차유진의 사정을 대강 전해 들은 지도 꽤 되었다는 말이다.

    ‘나 원래 인간이었어. 할머니 도와줬는데, 신 되라고 했어. 그 할머니 배움만득이야.’

    ‘배움만득?’

    ‘김래빈 저번에 말했어!’

    ‘아. 그건 배은망덕이야!’

    스물두 살의 차유진은 차에 치일 뻔한 할머니를 구해주고 대신 바닥에 굴렀다. 할머니는 차유진의 두 손을 잡고 네게 신의 축복이 내려질 거라 빌어주었다. 글쎄. 그 스스로는 그다지 열성적인 신자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유진은 가톨릭의 분위기가 익숙한 집안에서 자라온 사람이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신이 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 어느 순간 그는 그가 반쯤 신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이상한 능력과 잘 상처 입지 않는 몸, 그리고 세월이 비껴나간 얼굴.

    차유진은 자신의 상태를 저주라고 표현했다. 김래빈은 글쎄, 섣불리 판단하지 못했다. 그는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었다. 역사에서나 이야기에서나 불로불사라던가 신이 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것처럼 굴던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나. 그 사람들에게는 차유진이 받은 건 마치 축복처럼 여겨질 테다.

    하지만. 김래빈은 속으로 작게 차유진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무래도 자기 뜻과 상관없이 지금까지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설령 준 쪽이 더없이 선한 의도였더라도. 그는 일말의 씁쓸함을 느꼈다.

    “그런데, 차유진.”

    “왜?”

    “어쨌든 너는 지금 반절은 신인 거잖아? 그러면 제사용 술을 조금이라도 마시는 게 낫지 않아? 우리 할머니께서 이전부터 말씀하시기를 신이 공양을 받지 않으면 점점 힘이 약해진다고 하던데.”

    “나 반 사람이야. 그 술 맛없어.”

    참고로 차유진의 취향은 위스키 쪽이다. 달짝지근한 맛을 가미한 하이볼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고 칵테일도 제법 잘 마신다. 소주는 마시자마자 으, 하고 입을 헹궜고 제사용 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청주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 너는, 신의 힘이라고 주장하는 그 힘도 곧잘 쓰잖아. 정말 괜찮은 거야?.”

    그랬다. 새롭게 얻게 된 수많은 힘을 차유진은 진상 퇴치에 곧잘 써먹었다. 환각이라던가, 괴력이라던가. 그뿐만이 아니다. 김래빈은 둔감하기만 하니 눈치 못 챘지만 차유진이 몰래 도깨비 터에 이상한 게 꼬이는 걸 막아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김래빈 대신 인간이 아닌 존재와 소통하는 것도 차유진의 몫이었다. 김래빈의 집안에 소원을 들어주는 술이 있다는 정보도 방법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중 신 비스무리한 존재한테 들은 것이다. 차유진도 그게 무슨 신이었는지까지는 잘 모른다. 아주 멀리서 온 그는 이 동방 작은 나라에 둥지 튼 신들의 이름과 내력을 잘 몰랐다.

    “그래도 싫어!”

    단호하게 말한 차유진이 잘그락거리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김래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는 그저 싫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할 뿐이다. 그때 김래빈의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막 화장실에서 씻으려던 김래빈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의 할머니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예, 할머님.”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칫솔을 내려놓고 공손히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 아이고 내 새끼 잘 지내나? 반찬은 안 모자라고? 남자애 둘만 사니 아무리 너희가 요리를 한다고 해도 얼마나 하겠어? 아무튼 잘 먹어야 하는데…. 어떻게, 반찬 좀 더 부쳐줄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할머니는요, 건강은 어떠십니까? 반찬은 괜찮습니다! 요새는 시장에서도 반찬을 팔아서 반찬이 모자라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차유진이 할머님께서 만들어주신 장조림 정말 맛있다고 꼭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 나야 잘 지내지! 여기 내려와서 텃밭이나 가꾸니 아주 좋다. 괜찮긴 무슨! 시장에서 만든 게 아무리 맛있어도 이 할미가 만든 것만 하겠어? 금방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아니, 이게 아니지. 지난번에 우리 강아지가 물어봤던 거 말이야. 그거 할미가 찾았다.

    “예?”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차유진을 돌아봤다. 통화를 듣고 있던 차유진 역시 그를 보며 씩 웃었다.

    현대판타지AU 윶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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