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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땡땡이

    땡땡이

    1. 차유진. 아마도 열 일곱.

    연습실 바닥에 열댓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있었다. 앞으로 같이 연습을 할 팀이라고 했다.

    "자자. 나이 순서대로, 또 이름 순서대로 한 명씩 앞에 나와서 소개를 해 볼까?"

    자기 소개를 하는 방식 치고는 아주 고루했다. 그래도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엇비슷한 자기 소개가 줄줄이 이어졌다. 듣는 이들 역시 야유 하나 없이, 호응은 박수뿐이다. 하기야 트레이너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누가 감히 튀려고 하겠는가. 그들의 평가에 자신의 데뷔가 걸려 있을 텐데.

    "안녕! 나 차유진! 캘리포니아에서 와요! 아이돌 멋져요. 재미! 기대해요!"

    아이돌로 무대에 서는 게 멋져보였다고. 앞으로의 나날을 기대하며 설레고 있었다고.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게 즐거울 것 같다고. 영어였다면 좀 더 근사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여긴 한국이었고, 차유진은 말은 쓸수록 늘어난다는 한국어 강사의 말에 내심 동의했다. 그러므로 그는 용기있게 낯선 언어로 자기소개하기를 감행했다. 차유진이 생각하기엔, 원어민들은 제가 좀 서툴다 한들 관용을 베풀어주는 게 맞았다. 무릇 외국어를 배운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보이는 건 제 말에 웃음을 참는 사람들의 면면들이다. 박수소리가 드문드문 울리지만 아무래도 이전 사람에 비하면 작고 뻘쭘하다. 웃음을 참느라 박수 칠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다수의 호의, 드문 적의, 익숙한 질투, 어쩌면 경외. 학교를 다니던 때 흔히 보아온 감정들이 또래들의 눈에 떠다닌다. 지구를 반바퀴 돌아도 세상이 뒤집어지지는 않는구나. 그 점에만은, 차유진은 조금, 아주 조금 실망했다.

    다만 그 중에서도 오직 한 명은, 읽기 어려운 표정을 한 채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 차유진은 눈썹을 까딱 위로 올린 채 입술을 오므렸다. 오며가며 마주친 얼굴이었다. 김래빈. 생긴것과는 영 다르게, 빠르게 부르면 토끼처럼도 들리는 그 이름. 그렇지만 김래빈은 그렇게 소리내지 않았다. 자기소개를 하는 내도록 아주 진중한 태도를 취했던 그는, 한 글자씩 새기듯 그의 이름을 말했다. 김래빈이라고 합니다. 부드러운 직선으로 끝맺어지는 래-와, 비교해 단호한듯 매듭지어지는 빈. 외국인인 자신이 듣기에도 발음에 혼동이 없으니 같은 한국사람이 듣기에는 더 명확히 들렸으리라.

    랩 하는 것도 들어보고 싶은데. 자기소개를 들으며 언뜻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의 곡은 이미 들어봤다. 네 또래의 작곡 잘 하는 친구도 있어. '실장님'이라고 불렸던 사람이 차유진에게 데모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잘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미리 들려주는 거야.

    그의 말이 맞았다. 쉬이 읽히는 것보단 읽히지 않는 것이 더 흥미롭다. 게다가, Artistic. 재능있고. 응. 좋아. 잘 지내면 좋겠네. 같은 팀 하면 즐겁겠어. 그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차유진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원래 인간관계란 연연하면 될 것도 오히려 안 되는 법이었다. 어차피 그들은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해야 했고, 시간은 대개는, 적어도 이럴 때 만큼은 차유진의 편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차유진은 가볍게 생각했다.



    2. 차유진. 어떤 열 일곱.

    김래빈은 그의 생각보다 더 재밌고 진지하고 골때리는 인간이었다.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은 올곧아 읽을만 했는데, 입에서 줄줄줄 나오는 문장은 발음만 약오를 정도로 정확했다.

    "이번에도 부탁을 하게 되다니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할머님이 말씀하시길 부족한 걸 배우는 것이 모르는 걸 숨기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어. 물론 너는 나와 동갑이지만 스승이란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들 해. 그러니 차유진 네가 지금 시간이 된다면 부디 월말평가 연습곡에 대해 기탄없는 지도를 받을 수 있을까?"

    일단 차유진을 배려하기는 한 모양인지, 속도는 느렸다. 그렇지만 발음이 정확하고 속도가 느리면 뭐 해. 뜯어보면 죄 모르는 단어, 단어, 조사, 접속사, 차유진 - 앗 이건 내 이름- 연습, 그리고 또 모르는 단어, 조사, 근데 이게 조사가 맞나? 아무튼 모르는 단어가 한무더기였다. 김래빈은 나름대로 쉬운 단어로 고쳐 말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그는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지 몇 개월 안 된 태생 미국인을 너무 얕봤다. 영어에도 서로 비슷한 발음은 차고 넘치지만 적어도 스펠링은 다르건만 한글은 무슨, 생김새마저 정확하게 같은 단어들의 뜻이 제각각이다. 그 말은, 차유진은 아직도 한글 단어가 익숙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차유진은 해맑게 웃었다. 알아들은 건 몇 개의 단어밖에 없고, 그게 어떤 맥락으로 이어지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평소처럼 그저 떠드는 거라면 차유진도 듣고 있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단어를 열심히 주워들어 가며 대화의 분위기를 즐기겠지만, 지금의 김래빈은 대답을 요하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다. 김래빈이 한번 더 말해주는 수밖에. 이건 김래빈이 말을 너무 어렵게 하는 탓이다.

    "나 말 몰라."

    김래빈의 미간이 살풋 찌푸려진다. 화난 것처럼도 보이는 저 얼굴은, 차유진이 이제까지 봐온 바에 따르면 그저 진지한 고민을 하는 중이다. 몇 번 입을 달싹거리며 말을 고르는가 싶던 김래빈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 앞뒤에 붙이던 설명과 예의와 형식을 과감하게 다 걷어내고 나면, 아주 짧고 핵심적인 한 마디만이 남는다.

    "차유진. 연습곡 도와줘."

    단어는 대충 세 개. 차유진, 연습곡, 도와줘. 셋 다 아는 말이다. 아하.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 내 도움 필요해?"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인다. 미간의 주름이 어느덧 말끔하게 사라졌다. 역시 화를 내고 있던 게 아니었다. 제가 맞았다. 차유진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김래빈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무엇보다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재능에 비해선 받는 평가가 낮았다. 김래빈은 그것이 제 춤과 노래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김래빈이 모르는 게 하나, 어쩌면 두 개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기서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제일 잘 알려줄 수 있었다. 아, 물론 춤도.

    적임자를 잘 찾아왔네. 제 잘난 걸 제일 잘 알고 있는 차유진은 뿌듯하게 제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좋아. 나 전문가. 김래빈 같이 가."

    죽죽 걸어나가는 차유진의 뒤를 따르던 김래빈이 뒤를 돌아보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혼란스러운 것처럼 그를 불렀다.

    "? 그쪽은 연습실이 아닌데?"

    Nope! 차유진은 경쾌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한술 더 떠 김래빈의 팔을 잡고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속도를 올려서 뛰기 시작하면, 김래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도 일단 같이 뛰었다. 차유진 어디 가? 당황에 길고 긴 꼬리를 뗀 물음은 예의를 차린 말씨보다 훨씬 알아듣기 좋았다. 차유진은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형들로부터 배운 단어를 써먹어보기로 결심했다.

    "'땡땡이' 알아?"

    땡땡이라니, 그건 속된말로, 입에 담기, 부적절한, 아니 그 전에, 알지만, 학생의, 본분은, 공부로서... 당황하고 숨 찬 김래빈은 횡설수설하더니 이내 상황을 깨달았는지 어? 하고 꽥 소리를 지른다. 오, 그래도 용케 상황을 알아차렸는데. 차유진은 그 와중에도 감탄했다.

    "차유진!!!"

    그는 대답 없이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올려다보면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놀러가기 좋은 날이었다.



    3. 김래빈. 올해로 방년 17세.

    "김래빈 너무 심각해."

    차유진은 너무 가볍다. 김래빈은 한숨을 쉬었다. 차유진의 입에 물린 닭꼬치의 막대기가 리듬에 맞춰 까닥였다. 한국인도 맵게 느끼는 맛이라고 말렸건만 매운 걸 잘 먹는다고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반쯤은 제가 먹고 차유진은 소금구이 한 꼬치를 더 들었다. 자신이 많이 먹어보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우기는 얼굴은 당당하고 뻔뻔하다. 김래빈은 그저 심란했다. 자율연습이라고 해도 연습을 빠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선뜻 연습생 계약을 권유해주신 회사 사람들, 손자가 서울 생활을 잘 할 거라 믿고 있을 할아버님, 그리고 할머님, 잠깐은 반대했지만 이내 하고 싶은 일을 해 보라며 저를 든든히 지원해주던 누나, 나중에 테레비에 나오냐며 응원해주던 마을 주민 분들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심했는데 벌써 이렇게 되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김래빈은 속으로나마 열심히 사과했다.

    '이거 김래빈 필요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차유진은 단호했다. 차유진은 영어를 섞어서 뭔가 더 설명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김래빈이 태반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나왔다.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울의 번화가를 맴돌았다. 차유진은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꼬아 말하지도 않는다. 말이 서툰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차유진은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만약 놀고 싶었던 거라면 진작에 그에게 놀자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차유진을 이제까지 몇 번 거절해왔기에 김래빈은 안다. 차유진은 거절에 별로 속상해하지도 않는다. Well, 하고 한번 눈을 굴리고는 다음에 놀아, 하고 가버린다. 쟤는 가끔 진짜 쿨해. 형들의 속삭임에 김래빈은 동의했다.

    그러니까, 차유진이 내린 판단이 옳은지 여부와는 별개로, 차유진은 이게 정말로 김래빈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차유진, 언제까지 있을 거야?"

    "더."

    핸드폰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검색하던 차유진은 아까부터 같은 자리에 죽치고 앉아았다. 곧 해가 저물 시간이었다. 김래빈은 더 묻는 대신 제 앞의 현수막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20XX년 OOO의 날 기념. OO구민을 위한 저녁 음악회. 나온다는 사람에도, 곡 리스트에도 특이한 점은 없었다. 참가자명으로 추정해보건대, 동아리와 아마추어 연주가들도 반 이상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연습곡과는 장르부터 달랐다.

    '혹시 차유진이 여기 나오는 누군가를 알고 있나? 차유진은 한국말로 길게 말하는 걸 불편해하니까, 그 누군가는 분명 아이돌 활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서 좀 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의 확실한 조언을 위해 차유진이 여기로 나를......'

    길게 흘러가던 사념은 무대가 시작되며 끊겼다.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면서 하나 둘 사람이 모여들었다. 아주 많지는 않은 수가 드문드문 공간을 채운다. 조깅하다 온 것처럼 위아래로 운동복을 챙겨입은 사람, 유모차를 끌고 가다 잠시 들른 것처럼 보이는 부부, 손에 커피를 들고 걷던 직장인들. 공연하는 사람들만큼 소박한 관중이었다. 색소폰 소리를 열린 공간에서 실제로 들으면 저런 느낌이구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것과는 별개로 김래빈은 짧게 감탄했다.

    그때 차유진이 김래빈의 팔을 쿡 찔렀다. 김래빈 봐. 공연을 의식해서인지, 에너지 넘치는 평소보다는 훨씬 낮고 소곤대는 목소리였다. 김래빈은 차유진 쪽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차유진의 손가락이 앞을 가리킨다. 무대, 하고 속삭이고는, 이번에는 옆쪽을 쭉 훑듯이 손을 움직인다. 보는 사람. 그럼에도 여전히 물음표를 띄우는 그에게 좀 더 길어진, 그러나 여전히 느리고 대부분이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설명이 음악 사이로 드문드문 들려온다.

    "아이돌, 무대 하는 사람. 내 말 맞아? 무대, 보는 사람 있어. 김래빈, 보는 사람 몰라. 그 사람 김래빈 봐. 김래빈 곡 잘 골라. 잘 만들어. 음악 중요한 맞아. 근데 음악 하나 아냐."

    너, 하고 다시 차유진이 김래빈을 가리킨다. 관객들은 너를 보러 와. 툭툭 끊어지는 문법 속에서 김래빈은 어설프게 뜻을 잡아올린다. 그걸 다 소화할 새도 없이 말이 이어진다.

    "무대 즐거움, 에너지. 김래빈이 보여줘. 다른 사람 아냐. 보는 사람 너 봐. 무대에서 꼭 솔직한 행동 이유. 근데 아니다. 김래빈 규칙 좋아해. 선배 존중? 존경? 해. 김래빈 많이 말하는 단어. 맞아? 좋아. 근데 김래빈 안 보여. 숨어. 김래빈 예의 좋아. 근데 무대 나빠."

    중간중간 영어가 섞인다. 그래도 차유진은 멈추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영어가 흘러나오면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가, 다시 서투른 한국어가 힘겹게 등장한다. 김래빈은 김래빈 알아? 솔직해? 그걸 말하는 게 목적이라는듯, 무대에서 완전히 눈을 돌린 차유진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김래빈은 그제야 떠올린다. 차유진은 오늘 온종일 돌아다니며 그에게 많은 걸 물었다. 김래빈 재밌어? 김래빈 좋아? 대답하면서도 왜 묻는지 몰랐던 질문들이 연이어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오락실은 시끄러웠고 게임은 낯설었다. 동전을 많이 바꿔갔지만 인형뽑기는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피티 앞에서는 오래 머물렀다. 반쯤 녹슨 금속 가벽 위에 뾰족하고 과장되고 색색이 화려한 글자와 그림들이 엉켜 있었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기가 커서인지 압도적으로 인상깊었다. 차유진은 누가 그런 걸 입나 싶은 옷을 골랐고, 김래빈은 평소라면 입지 않을 옷을 잠시 매만져보았다가 곧 내려놓았다.

    그랬던가. 듣는 걸 내려놓고 김래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첫째. 내가 나를 모르는가?'

    김래빈은 어릴 적 잠깐은 이구아나를 기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강원도 시골에서 이구아나를 기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조부모는 이구아나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누나는 난처해 했고 김래빈은 여기서는 이구아나를 기르는 게 불가능하다는 길고 다정한 설명을 들었다. 어린 김래빈은 낙심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 다음에는 달팽이에 빠진 덕이었다. 그 느릿하게 더듬이를 움직이는 모양새와 반질거리는 껍데기, 야채를 갉아먹는 식성 따위를 김래빈은 퍽 귀엽다고 느꼈다. 다행이 달팽이는 이구아나와는 달리 집 옆 텃밭에만 가도 잡을 수 있었다. 김래빈의 누나는 질겁했지만, 그래도 김래빈은 달팽이를 꽤 오래 길렀다.

    '상황에 따라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건 당연해. 그렇지만 그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지 않다고 거짓을 말해본 적은 없어.'

    그렇지만 강원도에서 보고듣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서울에서 접한 건 사실이니, 취향에 대해서는 재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김래빈은 내심 끄덕이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둘째. 규칙을 지켜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차유진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럼 또 다음은.

    '내가 무대에서 나를 숨겼던가?'

    소속사에서 지정하는 연습곡들은 대개 그 소속사 선배 아이돌의 곡이었다. 소속사의 색을 맞추기 위해서라고 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어떤 분야에서 결실을 맺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선학들에 대해 공부하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김래빈은 그래서 연습곡이 정해지면 그 아이돌의 무대를 끊임없이 돌려보고 분석했다. 그리고 최대한 구현해보고자 노력했다. 물론 완전히 똑같이 하는 건 답이 될 수 없었다. 편곡에야 당연히 손을 댔지만 퍼포먼스는?

    김래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따라하기에 급급했는지도. 김래빈은 긍정했다. 차유진이 한 말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검토해볼 만한 제안이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겨, 김래빈은 입을 열었다.

    "차유진, 넌 아이돌에 진지해?"

    차유진은 왓? 하더니 도리어 의아하다는듯 얼굴을 기울인다.

    "매일 진지해!"

    그렇구나.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차유진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가 아이돌에 진심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대와 관중에 대한 고찰은 쉽게 생각해서 나올만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너를 오해해서 미안해. 그리고 조언에 대한 보답으로, 차유진에게 좀 더 적절한 표현을 알려주기로 했다.

    "차유진. 재미로 아이돌을 하냐는 질문은, 너는 아이돌에 진지하지 않냐고 묻는 거야."

    너는 재미로 아이돌 해? 누군가의 질문에 Yes 나 재밌고 잘 해, 하며 선선히 웃던 얼굴. 듣고 있던 다른 연습생들이 오히려 더 경악하며 수군대는 가운데 차유진 혼자만이 태연했다. 얼굴이 잘 나서, 미국 출신이라서, 학교에서도 잘 나가는 애였다고 하니까. 그 이후 차유진의 행동에 붙던 수많은 꼬릿말을 김래빈은 알았다.

    '차유진은 한국말이 아직 약하니까.'

    차유진은 그런 오해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차유진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그는 곧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며 다시 김래빈을 끌고 갔다. 둘은 저녁 때에야 다시 복귀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몫만큼 그들을 걱정하고 꾸중하는 사람들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4. 차유진. 여전히 열 일곱.

    차유진!

    김래빈이 저를 부른다. 다가온 김래빈의 눈이 반짝반짝하다.

    "내가 선배님들이 아닌 이상 동일한 방식의 무대로는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없으니 자신의 색을 섞어서 선배들의 무대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대중의 만족도에 좀 더 유의미할 거라는 너의 뜻은 과연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었어."

    차유진은 알게 되었다. 신난 김래빈의 말은 평소보다 더 장황하고 어렵군. 그리고 생뚱맞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내가 저렇게 이야기를 했던가? 결과물을 보면 김래빈이 자기 뜻을 이해한 것 같기는 한데, 그가 하는 말에서 제가 실제로 썼던 단어는 무대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차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는 하고 싶은 말을 했고, 김래빈은 신났고, 결과는 좋았다. 그러니까 HAPPY ENDING.

    다만 김래빈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해져보라는 네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봤어. 결론적으로, 나에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좀 더 솔직해지기로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제까지 너의 해석을 존중해서 하지 못한 말을 지금 해볼까 해."

    차유진. 브릿지 부분에서의 너의 안무는 분명 멋지지만 내가 저번에 작곡가 인터뷰를 통해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부분은 좀 더 무겁고 단조롭게 표현하는 것이 맞아.

    Oh. I see. 나도 김래빈 몰랐어. 제게 똑바로 와 꽂히는 시선, 그 완전한 확신을 보며 차유진은 중얼거렸다. 너 그런 사람이었구나. 그래도 웃음이 샜다. 그런 김래빈 역시 멋지니까.

    "좋아. 나 해봐. 김래빈 말 더 좋으면 바꿔. 아직 누가 맞다 몰라."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의 아이디어는 일단 듣기로 썩 나쁘지 않았다. 떠오르는 동작도 몇 가지 있었다. 그래도 차유진은 제 표현에 자신이 있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 눈을 빛내며 차유진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면, 김래빈이 옆으로 따라붙었다.

    다음엔 바다 놀러가! 차유진의 말이 복도를 울렸다. 그래. 그렇지만 연습은 빠질 수 없어. 꾸준한 노력은 아이돌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누구나 가져야 하는 미덕이고, 그것이 설령 자율 연습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김래빈의 느리고 길고 정확한 말이 그 뒤를 잇는다. 둘 사이 거리는 이전보다 좁았다. 설령 차유진의 한쪽 귀로 흘러간 그 문장이 그래, 를 제외하곤 전부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다고 한들 아직은 괜찮을 때였다.

    연습생시절 막내들. NCP에 가까움.

  • 무겁고, 편안하고, 설레는

    무겁고, 편안하고, 설레는

    모니터의 액정 속 노트들이 저들끼리 뭉개졌다. 김래빈은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래도 변화는 없었다. 집중력이 깨졌다는 신호였다. 헤드폰을 대충 벗어 내려놓은 그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이럴 땐 카페인 음료도 통하지 않았다. 모니터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책이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끼니를 때울 때 외에는 눈을 떼지 않았으니 꽤 오랫동안 모니터를 보고 있기는 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최근엔 전자기기를 오래 잡고 있으면 눈뿐만 아니라 몸이 전체적으로 피로했다. 이런 게 바로 나이들었다는 걸까. 김래빈은 이럴 때 세월을 실감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안경을 대충 밀어올린 손가락이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마감이 급한 작업은 아니었다. 그러니 적당히 하고 쉬었어도 될 것을, 그전까지 실마리가 없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아놨으니 오늘은 이만 해도 될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도 익숙하게 키보드의 단축키를 눌러 결과물을 저장한 그는 양 손을 서로 비벼 눈에 대었다. 머리가 멍했다. 30분에 한 번은 눈을 쉬게 해야 한다던 말은 몰라도, 인공눈물은 임시방편에 그치지 않으니 눈 운동을 꾸준히 하라던 의사의 충고는 되도록 지켜볼 생각이었다. 위로, 아래로, 다시 좌우로. 눈커풀을 닫은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는 뒤늦게야 뒤에서 문이 묵직하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는 걸 떠올렸다. 귀 역시 헤드폰으로 흘러나오는 소리에 혹사당한 탓에 듣고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도 김래빈은 놀라거나 눈을 뜨지 않았다.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야 뻔했다.

    Hey. 전자기기가 들릴 듯 말듯 나지막하게 웅웅대는 소리가 침묵 대신 방을 채우던 그 공간을 풍부하고 낮은 목소리가 가로질렀다. 이어 끼이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 저벅저벅 그에게 가까워지는 발소리, 그리고 아주 얕은 한숨소리. 김래빈은 제 뒤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을 마치 보는 것처럼 그릴 수 있었다. 방음시설을 온 벽에 두른 작은 방에선 소리가 궤적처럼 선명하고 고스란히 남았다. 이 방이 마음에 드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다.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데. 또 이러고 있네, 김래빈."

    그는 이제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 그렇게 드러난 목덜미 위로 사뿐히 손가락이 닿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눈을 덮고 있으니, 제 목덜미에 닿은 것은 타인의 손가락이다. 간지러울만큼 뒷목을 어루만지던 손가락은 이내 힘을 실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꾹꾹 누른다. 뭉친 데를 직격으로 눌려, 김래빈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나 자는 거 아니다, 차유진. 잠깐 눈 운동 중이었어."

    변명하듯 손을 휘저은 그는 눈을 떴다. 그 사이 절전모드가 된 모니터의 까만 화면은 마치 거울처럼 뒷배경을 반사했다. 목은 여전히 차유진의 손에 맡긴 채, 김래빈은 모니터를 통해 가만히 시선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김래빈의 목 언저리를 응시하던 차유진이 그 시선을 알아챈 것처럼 기민하게 눈을 들어올린다. 액정을 경유한 시선이 서로 마주치고, 잠깐 눈을 크게 뜨는가 싶던 차유진이 그 흐릿한 실루엣으로도 근사하게 웃는다. 오늘은 일이 즐거웠나 본데. 이제는 차유진의 표정만 보고도 그럭저럭 그의 하루 일과를 추측할 수 있게 된 김래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처럼 입을 떼었다.

    "오늘 일은 재밌었어?"

    잘 다녀왔냐는 질문 대신 그는 종종 차유진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제야 고개를 돌리는 김래빈의 뺨에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 응. 최고였어. 마지막으로 양 어깨를 꾹 지압하고 떨어지는 손을 따라 그는 손을 뻗었다. 상대의 손을 잡고, 깍지를 껴서 힘주어 붙잡으면 손가락이 서로 단단하게 얽혀든다. 그 손이 이끄는대로 김래빈은 읏차, 하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그 무엇도 사이에 두지 않은 눈동자들이 서로를 응시한다. 눈가의 주름이 오히려 깊이를 더하는 그 눈동자가 삭 접히며 눈웃음을 지어내자, 그 모습을 보는 김래빈의 눈 역시 천천히 누그러지며 웃음기 같은 것을 머금는다. 차유진의 웃음소리가 스파클링처럼 반짝였다. 김래빈 안경 비뚤어졌어. 장난스럽게 안경테를 톡 친 차유진은, 이어 조심조심 손을 움직여 안경을 바르게 씌워준다. 김래빈은 이제 나도 손이 있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가슴까지 반쯤 올라왔다 멈칫한 손은 제 안경을 스스로 바로잡는 대신 여전히 웃는 상인 차유진의 뺨을 감쌌다.

    차유진의 웃는 얼굴은 꽤 파괴력이 높다. 언젠가는 그 웃는 얼굴에도 거리낌없이 해야 할 말을 할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네 번에 한 번쯤은 그 얼굴에 말이 막혔다. 덕분에 가끔은 곤란하다. 차유진은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원래도 잘 웃던 녀석이 요새는 더욱 더 휘황찬란하다. 차유진이라면 일부러 그런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래서 김래빈은 입맞췄다. 그게 제일 나았다. 가까이 붙을 수록, 웃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반쯤 감긴 눈커풀 밖으로 휘어진 눈썹과 송곳니 엿보이며 호선을 그리던 입꼬리가 사라진다. 체온이 높은가 싶은 손이 어깨에서 등으로, 다시 허리로 내려온다. 안경 또 삐뚤어졌겠네. 김래빈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이를 테면... 아니, 이를 테면은 빼고. 그러니까, 연인 사이다.



    이제 그럭저럭 15년차가 되어가는 테스타는 그 전만큼 그룹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는다. 멤버들의 나이도 이제는 격한 아이돌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운데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한때 그들의 이름을 수식했던 테스타가 가진 무게는 점점 줄어들어도 이제 그들은 오롯이 그들의 이름 자체로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곡부터 연기, 라디오와 예능에 걸친 폭넓은 개인 활동으로 커리어를 확고하게 쌓아 온 그들의 인지도는 그룹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김래빈은 솔로 활동을 길게 하는 대신 프로듀싱 쪽으로 반쯤 선회했다. 아주 크게 돌고 돌아 어릴 적의 꿈으로 돌아온 셈이다. 음원은 종종 내지만 여전히 솔로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른 멤버에 비하면 빈도가 낮다. 그래도 김래빈은 아쉽지 않았다. 자신이 상상했던 것을 직접 구현하는 재미는 그룹 활동을 하며 겪을 만큼 겪어보았다보니 요새는 슬슬 타인의 무대를 완성도 있게 가꾸는 게 재밌었다. 테스타만큼 개개인의 완성도가 뛰어나지 않아도, 그에게 익숙한 사람들이 아니어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새롭게 분석하고 고민하고 아이디어를 얻는 나날이었다. 그 새로움이 다시 자신의 무대에도 활력을 주었다. 무대에도 팬에게도 여전히 진심인 김래빈은, 그래서 여전히 자신이 타인과 함께 발전할 수 있음이 기꺼웠다.

    "그래서 작업은 얼마나 남은 거야?"

    "한 하루나 이틀 치 분량정도? 물론 컨펌이 바로 난다는 전제 하에 하는 말이긴 하지만..."

    "오. 걱정 마. 네 곡은 한번에 통과할 걸. 내가 들은 건 저번의 데모버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알겠던데. 설마 김래빈 자신 없어?"

    "그건 내 실력이랑은 별개의 문제야. 아직 나는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시류를 보는 게 약하니까, 혹시 무슨 변수가 생긴다면 곡의 완성도와는 상관 없이 곡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도... 잠깐, 이런 건 너도 알잖아, 차유진?"

    "말했잖아. 김래빈.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그런 일이 있다면 문대 형이 먼저 말을 해줬을걸? 요새 그 형 눈치가, 그러니까, 뭐라 하더라? 아, 그래. 더 귀신같아졌어."

    눈은 전방을 주시한 채, 차유진이 키득거린다. 김래빈의 만류에도 그는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김래빈이나 그나 일하고 온 피로는 비슷할텐데도 모니터에 눈 박고 일하느라 시야가 흐릴 사람의 운전은 못 믿겠다는 게 차유진의 말이었다. 그럴 때의 차유진은 여전히 좀 얄미웠는데, 김래빈은 입씨름하는 대신 묵묵히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차유진이 은근히 자신을 챙기는 걸 좋아하고 뿌듯해한다는 걸 아는 탓이다. 애인으로서의 차유진은 김래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정했다. 그 다정이 어느 지점에서 튀어나오는지는 여전히 제멋대로라 예측하기 어려워도, 눈에 깔린 잔잔한 애정은 그의 조부모의 눈에서, 형들의 눈에서, 혹은 팬들의 눈에서 엿보던 익숙한 것이었다. 아직은 좀 둔한 김래빈마저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 애정이, 김래빈을 누그러뜨렸다.

    ..그래도 여전히, 차유진의 모든 말에 다 져 주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 말했지만 이건 지나친 걱정이 아니라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아아아. 잠깐, My sweety. 그만. 지금 그걸로 토론할 때가 아냐. 저기 하늘 봐봐. 오늘 하늘 너무 멋진데? 저거 안 보면 후회한다?"

    또 끊겼다. Febulous. 김래빈의 말을 뚝 잘라먹은 차유진의 입에서 휘익 휘파람이 샌다. 한국에 10년을 넘게 거주하면서, 차유진의 한국어는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간혹 영어가 헷갈린다고 할 지경이었다. 문장이 길어지고 문법적인 위화감이 줄어들면서 어느 순간 차유진의 언어는 단정하고 부드러워졌다. 나이가 들은 탓도 있겠지만, 형들의 말에 의하면 영어를 쓸 때의 차유진은 본래 그랬던 모양이다. 영어가 얕았던 김래빈만이 몰랐다. 그래도 여전히 흥분하면 문장이 툭툭 끊겼다. 그럴 땐 열 아홉 차유진이나 곧 서른 다섯 차유진이나 똑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김래빈은 곧장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신호에 걸려 정차한 차의 모든 창문에 걸쳐 점점 어두워지는 공기 속 빛나는 네온핑크의 구름이 새털처럼 층층이 하늘을 덮었다. 이건 말을 끊을 만한 광경이라고, 그 선명한 색채에 압도된 김래빈이 저도 모르게 납득할 정도였다. 김래빈, 너도 맘에 들지? 던져진 질문에 그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좋아. 노을이 지기 전에 도착한다면 저녁은 분위기있게 테라스에서."

    둘은 이제 같이 살았다. 명목상으론 차유진의 집이다. 김래빈 역시 집이 있었다. 방금 전 작업실이 있던 공간이 김래빈의 명의로 된 집이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거의 차유진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김래빈은 굳이 제 명의의 집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차유진의 권유였다. 차유진은 작업실에 제대로 된 침실을 포함해 끼니와 생활을 챙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다. 김래빈의 집에서 차유진의 짐까지는 대략 차로 15분 가량. 너무 멀지도,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 아직 한국에선 그게 최선이었다.

    "물론 네 테라스의 풍경이 멋질 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저번의 사생 사건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이닝룸이 더 괜찮은 선택이 아닐까 싶은데, 차유진."

    "괜찮아. 대한민국은 어떤 면에선 놀랍게도 보수적이고 꽉 막힌 나라라, 우리 사이는 놀랍게도 스캔들이 날 사이가 아니거든."

    차유진의 입에서 픽 웃음이 샜다.

    "그리고 저번 일은, 굳이 따지자면 스케줄이 있는데 위험천만하게도 잇자국을 남긴 내 친애하는 김래빈 덕분이지."

    ".....그건...!"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밝히자면, 김래빈이 깨문 건 맞았다. 물론 그 이전에 다음 무대의상은 아마 폴라티가 될 것이고, 김래빈이 깨물어봤자 자신의 회복력을 이기지 못할 거라며 살살 그를 도발했던 차유진의 충동질이 있었다. 그래도 공인인 애인을 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이 무색하게 그 한마디에 넘어가 버린 것이 사실이라, 김래빈은 그저 침음을 냈다.

    차유진은 여전히 무대를 좋아했다. 솔로, 혹은 유닛으로 꾸준히 활동하는 멤버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다. 아무리 그라도 테스타 때처럼 연골을 갈아가며 춤을 추는 건 불가능했지만, 대신 느리되 리드미컬한 보컬에 연차와 관록에서 오는 은근한 뉘앙스가 가락가락마다 붙었다. 아직 어리고 활동적인 나이에 빛났던 개구지고 치기어린 얼굴에는 이제 세월이 묵어 여유로운 시선과 깊어진 미소가 어리고, 묵직한 스텝에 대비되도록 가벼운 손목 스냅을 넣는 포인트 안무가 지나치게 섹시하다는 게 세간의 평이었다. 고로, 차유진은 여전히 시선의 중심이었다.

    그 곡에는 당연한 듯 김래빈의 손길이 닿았고, 그래서 김래빈은 무대 모니터링도 제 몫이라 생각했다. 업무에 가까웠던 그 일이 잇자국이라는 결말로 끝난 건 반쯤은 무대 위 차유진이 흘리는 뉘앙스가 알 거 다 아는 사람의 눈에는 제법 자극적인 탓이었고, 나머지 반쯤은 김래빈 역시 아이돌 활동밖에 모르던 옛날의 김래빈이 아닌 탓이다. 그렇다. 그 역시 변했다. 차유진이 김래빈을 My sweety라고 부르게 된 만큼, 김래빈 역시 차유진의 충동에 변수를 간과한 채 넘어갈 수 있을 만큼만은 변했다.

    김래빈은 자신의 변화를, 그 느슨함을 변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그는 주변인들로부터 지나치게 고지식할 때가 있다는 평을 들었지만, 적어도 차유진에게는 그 선을 허물어뜨릴 줄 알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던 10대 때보다, 그리고 서로 아무렇지도 않게 투닥거리던 20대 때보다 더. 원리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던 20대의 김래빈이 듣는다면 귀를 의심할 말이었다.

    '그렇지만 차유진과는, 그때의 관계가 아니지.'

    그저 친구로 남아도 사실은 괜찮았다. 그들은 그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래된 친구관계를 넘어 더 굳건하면서도 불안한 형태의 결속을 그들이 선택했을 때, 김래빈은 자신 역시 그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변하게 될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근거 없는 확신이었다.

    "차유진."

    "음?"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너 때문에 변했다던가, 네가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는 말을 할 생각이 없다. 그가 변했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그가 그렇게 변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오묘한 책임감을 받아들였다. 무겁고, 편안하고, 설레는.

    "혹시 만약 유사한 일로 스캔들이 터져서 네가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겠어. 미국이든 어디든, 네가 활동할 수 있는 곳에서 네 무대를 해. 내가 따라갈 테니까."

    꼭 그 일을 염두에 둔 건 아니지만, 최근에는 영어 회화를 중점으로 공부하고 있기도 해. 이어지는 말에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차유진이 눈가를 찡그리듯 완전히 접어, 웃는다. 아마 웃음일 것이다. 여전히 비언어적 표현이 단조로운 김래빈은 그 복잡한 선들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도 그 말에 차유진이 행복해진 것은 알았다. 언어 없이도 김래빈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차유진이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댄 차유진은 김래빈을 그러안았다. 힘조절도 까먹은 채.

    30대 중반의 사귀는 막내즈가 보고싶다

  • 이름, 불

    이름, 불

    스텝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또 하나의 무대가 끝났다. 무대 사이 삽입된 VCR의 음향이 흐릿하게 울리는 사이 김래빈은 다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대기했다. 스탭들이 붙어 인이어며 마이크를 붙이더니 마지막까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그렇지 않아도 피어싱으로 화려한 귀에는 댕기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추가하고, 양손에 낀 결속 팔찌며 포인트로 맨 노리개 장식에도 자잘한 금속 조각들이 달랑달랑하다. 의상 불편한 곳 없으시죠. 다음 무대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덩달아 초조해진 스탭들이 마지막으로 점검하듯 질문들을 쏟아낸다. 손을 몇 번 쥐었다 편 김래빈이 단단하게 대답한다. 예. 좋습니다. 

    VCR이 끝나면 무대는 캄캄해질 것이다. 김래빈의 솔로 무대는 애초에 그렇게 계획되었다. 그가 무대 위에 올라가고 나면 다른 빛이 사라진 곳에서 빛나는 건 팬들의 응원봉과 등불 뿐일 예정이었다. 그의 솔로곡 <반짝>이었다. 두번째 콘서트 때에는 무대 조명으로 불빛을 표현했지만 이번에는 키네틱 아트에 초롱을 접목했다. 앨범과 무대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그룹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부분이다. 십 수 개의 초롱이 빛을 발하며 느릿하게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지만, 정작 리허설 무대에서 장치를 확인하던 김래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라푼젤이었지.'

    수백 개의 풍등이 하늘로 오르던 바로 그 장면. 유진이라는 이름이 다른 한국인들의 이름처럼 한글 아니면 한자로 이루어진 이름일 것이라 김래빈이 믿어 의심치 않았을 때, 차유진이 대뜸 들이민 영화였다.

    '이거 몰라? 내 이름, 유진.'

    손가락이 남자 주인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연습생의 신분으로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차유진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김래빈이 라푼젤의 남자주인공 이름인 'Eugene' 역시 영어 이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막엔 영문 이름 표기가 없었고, 엔딩롤에 흘러나오는 ost는 들어도 엔딩롤 자체는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았던 어린 김래빈을 그 역시 몰랐던 탓이다. 반응은 반박자 늦게 튀어나왔다. 아... 그 머쓱한 반응에 차유진의 목소리와 눈썹이 함께 휙 올라갔다. Seriously?

    '내 이름도 유진, 얘도 유진, 그래서 친구 놀림 많다.'

    "그럴 때는, 친구가, 많이, 놀렸다 라고 해.'

    '...친구가 많이 놀렸다?'

    작은 화면으로 함께 영화를 보면서 얼기설기 꿰어맞춘 한국어로 그 때 일을 들었다.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이름으로 놀림받는 일은 흔하다. 초등학교에서 동물과 관련된 영어 단어를 가르칠 때부터 김래빈 역시 종종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들을 들었다. 나도, 하고 그 때의 김래빈은 중얼거렸다. 어렴풋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차유진은 라푼젤이 지겹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흥얼거림이 한쪽씩 나눠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그 날 차유진은 결국 김래빈과 엔딩롤이 다 끝날 때까지 영화를 지켜봤다.

    사실 차유진을 생각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무대였다. 이 무대는 구성부터 차유진을 의식한 무대였다. 세트리스트상 중간에 짧은 VCR은 끼웠지만 차유진의 솔로 무대 바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솔로 무대로는 누가 들어간대도 부담스러울 자리. 박문대는 세트리스트를 고민하던 자리에서 김래빈을 따로 불러 물었다. 차유진 뒤에 무대 하는 거에 대해서 하는 말인데. 서두가 그랬다.

    '형께서 물으신 말은, 혹시 저에 대한 말입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혹시, 무대 퀄리티에 대한 걱정이었다면, 객관적으로 차유진을 능가하는 무대를 만들 수 있으리란 판단은 들지 않습니다만... 해야 한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김래빈의 대답에 박문대는 얼마간 침묵을 지켰다. 내가 또 행간을 잘못 읽었나. 김래빈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하나, 둘 떠오르고, 침묵을 이기지 못한 김래빈이 그 뜻이 아니라면 죄송합니다로 시작하는 긴 문장을 뱉어내려 할 때쯤, 다행히 박문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하는데, 네 능력엔 한 점 의심도 없다. 솔로 무대건 유닛 무대건 이제까지의 네 무대는 다 좋았어.'

    다만. 박문대는 김래빈의 역량을 담백하게 인정했지만 답지 않게 말끝을 흐렸다. 그 뒤에 생략된 말은 김래빈조차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상대가 차유진이지. 과찬이십니다, 하고 답하면서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박문대가 떠올리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에너지와 장악력을 지레 걱정하지 않았다. 어쩌면 김래빈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콘서트에서 무대구성과 관련된 고민은 저희가 이제까지 계속 해오지 않았습니까? 축적된 경험을 통해 좋은 전략을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음, 다른 분들의 염려는 감사합니다만, 차유진과의 비교가 저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힐 것 같진 않습니다.'

    테스타의 그 누구도 김래빈만큼 차유진과의 비교에 익숙할 수 없었다. 같은 소속사의 연습생, 동갑, 부분적으로 겹치는 포지션. 연습생 때는 물론 같은 데뷔조에 들어서도 달마다 평가를 받았다. 종종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심할 때에는 몇 달을 연속해서 차유진과 매치된 적도 있었다. 그러니 1 대 1 비교라 해도 이미 물릴 만큼 들었다. 편집으로 잘려나갔지만 아주사의 첫 번째 등수 산정일에도 비슷한 인터뷰가 들어왔다. 같은 소속사 출신과 나란히 1, 2등을 했는데 2등이라 아쉽진 않나요?

    그때 자신은 차유진을 질투했던가? 가슴을 간혹 찌르던 약간의 따끔거림과 비쭉거림, 그리고 막연한 슬픔과 흐릿한 아득함이 질투라면 그는 차유진을 질투한 게 맞았다. 그렇지만 김래빈은 강원도의 자연과 농사하는 조부모 아래서 자랐다. 온실로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가 계속해서 쏟아지면, 혹은 날이 가물면 작황이 안 좋은 걸 염려하다가도 한숨 한 번에 모든 걸 털어버리고 다음을 대비하는 농사꾼의 기질은 김래빈에게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그렇게 한숨으로 털어내고 나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보였다. 그래서 김래빈은 항상 그랬듯 말할 수 있었다.

    '예. 아쉽지 않습니다. 차유진 참가자는 배울 점이 많고 뛰어난 친구입니다. 결과에 승복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테스타로 데뷔하고 나서는 오히려 차유진이 센터로 가고 김래빈의 프로듀서로서의 능력이 부각되면서 둘을 비교하는 여론 자체가 급격히 감소했다. 아예 영역이 다르다는 거다. 그래도 김래빈은 은연중 차유진의 무대를 프로듀서의 눈 뿐만 아니라 같은 아이돌의 눈으로도 지켜봤다. 종종 돌려보고 분석했다. 그 역시 아이돌로서의 욕심이 있었기에.

    "VCR 종료 10초 전, 10!"

    아주 대조적으로 가죠. 박문대가 결론을 내렸을 때 김래빈은 그래서 망설임 없이 곡을 고를 수 있었다. 래퍼로서의 실력, 그리고 곡의 작곡가만이 가질 수 있는 이해, 그리고 무대 구성. 이 세 가지를 제 패 삼아.

    "9!"

    차유진에겐 이제 한자로 된 이름이 생겼다. 다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옥편을 뒤져가며 한자를 고를 때 김래빈도 옆에 있었다. 오로지 유에 별 진. 하나의 오롯한 별.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8!"

    다만 평소 사전을 끼고 살았던, 그래서 단어의 어감과 미묘한 뜻 차이에 예민했던 김래빈만은 성(星)과 진(辰)의 차이가 궁금해서 한자의 어원을 다룬 두꺼운 책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 두꺼운 책마저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렴풋한 차이는 인지할 수 있었다.

    "7!"

    진(辰). 별자리, 별이라는 관념 그 자체, 태양과 달을 포함해 행성과 항성까지를 포괄하는 천체의 총칭, 광활한 우주의 모든 빛나는 것과 빛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글자. 김래빈은 생각했다. 태양이든 별이든 무엇이든, 너는 거대한 천체임에 틀림없겠지. 그리고 자신은 그렇게까진 될 수 없었다.

    "6!"

    김래빈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숨소리가 고동을 타고 다시 몸으로 흘러들었다. 다시 숨을 내쉬고. 김래빈은 차유진만큼이나 그 자신 또한 오랫동안 곱씹어왔다. 비교란 그런 것이다. 너를 객관적으로 보는 만큼 나 자신 역시 객관화된다. 그것을 토대로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5!"

    피치를 낮추고, 조성을 바꾸고, 플로우 위로 자유롭게 언어를 얹는다. 본인이 만들었던 비트를 스스로 헤집고 가사를 비틀어 즉석에서 유영하듯 노래의 이면을 드러낸다. 탈바꿈한다. 변형은 김래빈만의 것이 아니지만 숨쉬는듯한 능란함은 그의 것이다. 차유진도 즉흥에 강하지만, 박자와 가사를 가지고 노는 건 김래빈이 한 수 위다.

    "4!"

    안다. 태양이든 별이든 차유진은 스스로 빛날 것이다. 때로는 그 빛이 모든 걸 압도한다. 김래빈은 그 대신 가장 인공적인 빛을 끌어들였다. 빛을 반사하는 금속의 장신구를 온 몸에 두른 채, 만들어진 불을 켜고. 그 반짝임은 너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이것은 모방이 아니다.

    "3!"

    퓨쳐 베이스. 가장 오래된 도깨비인 김래빈이 극도로 미래의 장르를 끌어들였다. 등불은 네온 빛이다. 번화한 도시의 찬란한 밤거리, 그리고 도깨비불이 뒤섞인다. 요사한, 아른한, 혼몽한. 장르와 무대장치가 뒤섞인다.

    "2!"

    도깨비불은 사람을 홀린다. 네가 별이라면, 천체라면, 나 역시 숲을 적시는 색채, 빛나는 무엇, 찬란한(彬) 것이다. 김래빈은 제 리허설 무대를 눈에 담은 차유진의 반응을 기억한다. 너는 좋아했다. 네 안목을 안다.

    "1!"

    팬들도 그럴 것이다. 등불이 켜졌다.

    함성이 쏟아졌다.

    김래빈 솔로곡 무대 상상

  • CDEFGAB +

    CDEFGAB +

    • 올캐러를 살짝 곁들인 막내즈 논컾페어.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소설 미리니름이 들어갑니다.  
    • 차유진과 김래빈의 연습생 시절은….  날조입니다. 익숙한 날조의 맛을 즐겨주세요 ㅇㅅ<)r 
    흡족하게 활동을 끝마치고 난 뒤 휴식기의 테스타 숙소는 대체로 평화롭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를 연줄로 예능 개인 출연을 제안받아 촬영을 나간 이세진을 제외하고는 각자 여기저기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여유를 즐기는 한가로운 오후였다. 서로 투닥거리는 막내들의 말소리마저 그저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정겨웠다. 멤버들이 그들의 투닥거림을 배경음 취급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그 선아현마저 그들을 말리거나 싸울까 걱정하는 대신 유진이랑 래빈이는 오늘도 사이가 좋네, 하는 온화한 눈빛을 보낼 만큼.

    "쟤들은 저렇게 맨날 싸우는 게 힘들지도 않은가봐..."

    말싸움은 커녕 누군가와 가벼운 긴장 상황에만 놓여도 곧잘 피로를 느끼곤 하는 배세진이 경이로운 생물 보듯 부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팬들을 위한 자체 컨텐츠에 대해 박문대와 대화를 나누다 대여할 수 있는 실내 체육시설을 찾아보고 있던 류청우가 노트북 화면에서 시선을 들었다. 소리가 흘러나오는 부엌 쪽을 마치 기색을 탐색하듯 지긋이 살펴보던 이 그룹의 리더는 이내 굳이 말리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린듯 픽 웃었다.

    "음. 아마 자기들 나름대로는 노는 거 아닐까? 저러고 나면 오히려 더 쌩쌩해지기도 하고."

    "저게 노는 거라고.....?"

    배세진이 질린 표정을 하는 사이, 평화롭게 파우치에 수를 놓고 있던 선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둘이 진짜로 싸우진 않으니까요. 치, 친해보여서 보기 좋기도, 하고... "

    "좀 길어진다 싶으면 중간에 끼어들고 있긴 하지만 내 생각에도 그래. 데뷔 하고 나서 더 친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주사 때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

    청우의 그 말에 그들 사이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때 쟤들이랑 같은 팀 되어 본 적이 한 번밖에 없어서. 말을 흐린 배세진이 눈치를 보듯 눈을 도록 굴려 선아현 쪽을 바라보지만 선아현 역시 난처하게 웃을 뿐이다.

    "저는 유진이랑은 하, 한번도....."

    "그때도 조금은 그랬습니다. 지금보단 덜했지만요."

    "응? 아, 아아.. 그랬구나....."

    "응. 김래빈하고는 2차 때부터 계속 팀원이었는데, 차유진은 그때도 자주 놀러왔거든."

    아마 친목 논란을 나름대로 신경쓴 거 아닐까요. 둘 다 상위권이었으니까. 결국에는 휴대폰을 토독 토독 두드리던 박문대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시선은 아직 액정에 둔 채로, 모니터링을 자주 했다고 태연하게 덧붙인 말은 덤이었다. 배세진은 모니터링이라는 말에 너는 참 한결같다, 하는 떨떠름한 시선을 던졌지만 잠시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청우가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동갑에 같은 소속사 출신이니까. 이미 친했어도 이상할 건 없지. 그리고 이젠 한 팀이니 서로 친하다고 문제될 것도 없고."

    "예. 둘만 친하다면야 문제가 되겠지만... 둘이 서로를 잘 알고 있던 덕분에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요. "

    "그치. 귀엽기도 하고?"

    그 말에 그들 사이에서 약간의 웃음기를 담은 눈빛이 오간다. 김래빈과 차유진은 그들보다 나이로도 막내였지만, 둘 다 서로 다른 느낌으로 붙임성이 좋았다. 제 역할을 잘 하는 타입에 말썽을 부린 일도 거의 없으니 형들이 막내들을 귀여워하는 것도 퍽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원래도 무른 청우나 아현이는 물론, 은근히 낯을 가리는 배세진이나 인간관계에 담백한 편인 박문대마저도 막내들에게는 비교적 느슨한 편일 만큼.

    "뭐. 내가 보기에 둘은 좀 비슷한 부분도 있으니까."

    그러니 배세진은, 딱히 부정적인 의미로 그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차유진과의 우유 쟁탈전에서 진 탓에 우유 대신 두유를 손에 들고 형들을 찾아 거실로 총총 다가오던 김래빈이 그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 것이 결코 그의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헉! 혹시 그 둘이라는 게 저와 차유진을 가리키는 게 맞습니까? 차유진과 제가 비슷하다니, 혹시 제가 요새 차유진처럼 뻔뻔하게 무례를 저지르거나 막무가내에 제멋대로 자기 주장을 밀고 나갔습니까?!?? 만약 형들이 그렇게 느끼셨다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무언가를 해명하려던 배세진의 말은, 부엌에서부터 공간을 왕왕 울리는 차유진의 목소리에 파묻혔다. 나 무례하지 않아, 김래빈 이상한 잔소리 해! 익숙한 개판. 2차전의 시작이었다.



    류청우가 가진 리더로서의 자질은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그와 눈빛을 주고받은 박문대가 자잘한 주전부리로 차유진의 주의를 돌려 입을 막는 사이 그는 삼천포로 뻗어나가려는 김래빈의 생각을 익숙하게 끊고는 능숙하게 형들 사이 소파에 앉히는 것으로 둘 사이의 2차전을 원천 봉쇄했다. 한번 흐름이 끊기면 굳이 사소한 일을 끄집어내어 다시 다투지 않는 둘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이미 비슷한 일을 몇 십번이고 해본 자의 여유였다.

    "세진이는 그냥 너희 둘이 친해 보여서 한 말이야. 비슷하다는 건, 가령.. 둘이 음악 취향도 비슷하고. 그치?"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예컨데 컨셉을 정할 때의 거침없는 추진력이나, 사람과 소통하는 방식에서의 묘한 박력이라던가..... 그러나 배세진이 눈으로 보낸 마음의 소리는 김래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대가 김래빈이라 배세진 역시 기대도 하지 않았다. 뭐, 어쨌든 오해만 풀린다면.....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제가 평소 형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다 보니 혹시 제가 최근 마음을 지나치게 놓아서 형들께 방자한 행실을 한 게 아닐까 고민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혹시 제가 만약 그렇다면 언제든 기탄없이 말씀 부탁드립니다! "

    "아니, 넌 방자한 행실을 한 적이 없대도......."

    다만 배세진은, 그 짧은 시간동안 기가 쪽 빨린 모양이었다. 내가 다시는 쟤들 사이에 끼어드나 봐라, 하는 회한을 담은 눈빛이 그랬고 소파의 등받이에서 팔걸이로 점점 흐늘흐늘 늘어지는 등의 모양새가 그랬다. 김래빈이 세진이 형 죽였어. 장난스럽게 키득대던 차유진이 소파 등받이에 걸터앉듯 몸을 기댔다.

    "취향 같은 거 항상 좋은 거 아니에요! 김래빈이랑 같은 거 원하면 싸워요. 지난 번 방처럼?"

    "바보야, 그럴 때는 서로간의 배려와 양보를 통해서 최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게 올바른 방식이야. 싸우는 게 아니라."

    차유진의 말에, 희소성이 있는 대상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던 문대가 이어지는 김래빈의 말에 잠깐 멈칫한다. 배려와 양보, 좋은 말이지. 티벳여우 표정으로 어색하게 흘러나온 다음 말에는 영혼이 없다. 박문대 역시 필요하다면 물 밑으로 기회를 노려 싸우고 뺏는 데 익숙한 탓이다. 물론 이상론이 항상 그렇듯 김래빈의 말에는 헛점이 있고, 차유진은 그걸 놓칠 만큼 눈치 없지 않았다. 심지어 차유진의 고향은 자본주의의 아성, 기회와 경쟁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미국이다. 작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취향 비슷한 사람, 있으면, 마, 많이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특히 그, 말을 잘 못 해도 비슷한 취향이면 잘 통하는 것, 같고... 내가 유학 때, 비, 비슷한 일이 있어서.... "

    "아. 그렇네. 유진이 지금은 말 많이 늘었지만, 처음에는 대화가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그쯤에서 슬그머니 중재해보려는 선아현의 말을 류청우가 받았다. 여기서 더 가면 양보와 배려를 주제로 3차전이 일어날 것을 직감한 탓이다. 차유진의 코웃음에 비쭉 올라가려던 김래빈의 눈썹이 둘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좋은 신호였다. 박문대가 주방에서 과일칩을 한 소쿠리 담아와 그들 사이에 내려놓았다. 암묵적인 휴전권고였다.

    "예. 그렇습니다. 떠올려보니 차유진과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한 것도 음악 장르에 대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맞아요! 김래빈 영어 못 해요! 영어는 음악만 알아요!"

    차유진이 아작아작 과일칩을 씹고, 안심한 선아현이 다시 바늘을 놀린다. 한풀 가라앉은 평화로운 공기 속에서 예전 일을 풀어놓는 김래빈의 목소리와 중간중간 사설을 넣는 차유진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울린다. 이건 팬들이 들으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박문대는 습관적으로 팬들의 니즈를 분석했다 곧 그만두었다. 필요하다면 W라이브 앱에서라도 나중에 풀면 될 일이었다. 괜히 미리 던져주었다 사이가 그렇게 나쁠 일 없었던 차유진과 김래빈의 개인 팬들 사이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까들이 괜히 물고 늘어지면 골치만 아팠다.

    "나 한국 단어 잘 모르니까 김래빈 말 따라했어요. 그때마다 김래빈 그거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 이런 부분이.

    "맥락이 있으니까 같은 단어라도 아무 데나 함부로 갖다 붙이면 안된다고 했잖아! ...예. 아무튼, 차유진에게 알려주다보니 저 또한 생각보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모른 채 사용하는 경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평소 사전을 지참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어휘력을 늘리고 단어를 가다듬어 정련된 가사를 쓸 수 있도록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단어 중요하지 않아요! 몰라도 통할 때 있어요! 김래빈도 그거 알아요."

    "내가?"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깜박이던 김래빈이 문득 아, 하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차유진이 얄미울 때조차 맞는 말에는 반박을 하지 못하는 특유의 성미가 전투력을 급격하게 떨어뜨렸다. 그렇지. 김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연습생으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별 거 아닌 이야기다.

    차유진은 한글을 모른다. 김래빈은 영어를 몰랐다. 조부모의 손에 강원도 시골에서 자란 김래빈에게 사교육은 남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자연스레,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가 그가 배운 외국어의 전부였다. 그는 간혹 영어로 된 노래를 들었지만 그 때의 영어는 언어라기보다 음악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유튜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곡 프로그램을 다루는 동영상을 볼 때, 김래빈의 감각은 그들의 말 대신 화면에서 움직이는 프로그램과 마우스 커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차유진과도 말이 통하지 않을 수밖에. 처음 만난 차유진은 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낯선 생명체에 가까웠다. 그때도 한결같이 남들의 눈치는 보지 않고, 게다가 에너지는 넘치는. 실생활용 외국어를 배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차유진 역시 인사, 감사, 사과, 그리고 호오의 표현을 가장 먼저 외웠다. 춤과 음악은 좋고, 점호랑 트레이너가 머리를 쓰다듬는 건 싫고. 그래도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좋다는 말을 먼저 들었다. 그가 무심코 전자키보드로 찍은 코드 덕이었다.

    '이거?'

    'Yes! Swing?'

    '어? 아아..아....'

    C#으로 시작하는 코드 두세 개. 레트로 느낌을 살리고 싶은 건 맞았지만 특정 장르를 의도하고 누른 건 아니었다. 다만 이어지는 코드는 반사적으로 차유진의 움직임에 맞춰 찍은 게 맞다. 따-다, 따-다, 따-다다. 밀고 당기고, 장르의 어원 그대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어깨며 팔과 정반대로 과감하게 쿵, 하고 박자에 맞춰 내리찍는 스텝. 김래빈도 그때는 지금보다 어려서, 머리속을 통통 울리는 경쾌한 멜로디를 아직 손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박자를 쪼개서 음을 밀어넣던 것이, 점점 힘에 부치자 결국 김래빈은 쭉 글리산도로 음계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그 흐름을 끊어버렸다.

    짝, 짝짝. 호쾌한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리듬을 타던 곡이 갑자기 끊겼는데도 차유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대신 털썩 주저앉아 제 의자를 김래빈을 향해 휙 돌리고, 시선이 마주치자 웃는 얼굴 그대로 외쳤다.

    '좋아!'

    짧고 단순해서 폭력적이리만큼 강렬한 감상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그럼에도 어딘가 짜릿해서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쥐었다. 기묘한 경험이었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오히려 그런 본질적인 소통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음악을 통해 넘나드는 왜곡되지 않은 의도와 감정들. 서양 음계를 기준으로 고작 7개, CDEFGAB, 반음을 포함해도 12개밖에 안 되는 기호가 알파벳 26자와 한글 자모 24자의 경계를 뛰어넘어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 12자를 제외한 나머지는 달라도 좋았다. 아니 달라서 더 좋은 걸지도 몰랐다. 비트와 멜로디로 구성된 하나의 세계가 상대에게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석되었을 때의 충격이 주는 두근거림을 김래빈은 알았다. 그가 무언가를 만들어가면 차유진이 저만의 방식으로 부수고 재조립해 피워내고, 그 과정에서 받은 느낌과 해석을 덧붙여 서서히 무언가 완성되어 가던, 그 성취감.



    "아, 나, 나도 그런 거 느낄 때 있어. 춤 출 때도 조금 그랬고, 우리 콘서트 할, 때라던가.... "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새 바늘을 내려놓은 선아현이 주섬주섬 자신의 예시를 늘어놓았다. 은근히 감명받은 얼굴이었다. 우리 콘서트, 에 이르러서는 거기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김래빈의 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곰곰히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슬쩍 덧붙인 것이다.

    "그러고보면 예의범절이라던가 가치관의 기준에서의 차이로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느꼈던 적을 제외하면, 차유진이 말을 잘 하지 못했을 때에도 뜻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차유진은 표정이나 제스쳐가 크고 분명하고... 다소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일단은 숨김이 없으니까요."

    "맞아요! 나는 솔직한 사람이니까~ 김래빈 예전에 표정 알기 어려웠어요. 매일 눈 이렇게 뜨고."

    차유진의 손 끝이 눈썹 끝을 쭉 끌어올린다. 그 흉내에 여기저기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김래빈이야 여기서 화를 내야 할 지 아니면 다들 웃고 있으니 넘어가야 할지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지금도 표정은 별로 안 바뀌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알아요. 김래빈 표정 많아요. 그러니까 내가 맞아요. 말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 차유진. 그건 아니지. 김래빈이 정색했다.

    연습생시절 김래빈과 차유진은 의사소통을 어떻게 했을까? / * 올캐러를 살짝 곁들인 막내즈 논컾페어.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소설 미리니름이 들어갑니다. *차유진과 김래빈의 연습생 시절은…. 날조입니다.

  • 그랬어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 소설의 미리니름이 군데군데 들어가있고, 날조가 심합니다.
    • 슽윶랩의 관계를 특별하다고 상정하고 있지만, 특정한 커플링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각 번호는 떠오르는 대로 갈긴 내용을 정리한 정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0. 

    박문대는 대비했다.
    차유진이 쓰러진 직후에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미처 눈치채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의심스러운 지점이 있었다. 당시 차유진과 유사한 증상을 보인 멤버는 셋. 그것도 류청우, 배세진, 김래빈이다. 전부 한때 스티어에 속해있던 멤버들이었다. 이제까지 시스템에게 수없이 뒤통수를 맞아온 사람으로서 그는 언젠가 차유진과 유사한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면, 하는 생각을 안 해볼 수 없었다.
    다만, 그도 알았다.
    사실 확률은 높지 않았다. 시스템의 '업데이트'는 첫번째 조각과 두번째 조각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예외적인 상황이었고, 남은 조각은 고작 하나인데 스티어의 멤버였던 이들은 셋이나 남았으니까. 시스템이 업데이트 할 때마다 일어나는 일이라고 가정하기엔 숫자가 맞지 않았다. 다음 업데이트는, 혹시나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다른 양상으로 튀어나올 확률이 더 많았다. 그래도 박문대는 대비하기로 했다. 한때 그가 잘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어떤 누군가가 아주 낯선 세상에 떨어졌을 때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 느끼게끔. ...혹은 그의 멤버들이 더는 마음을 졸이며 컨디션을 갉아먹지 않아도 되게끔, 지금의 활동에 부자연스러운 공백이 남지 않게끔.
    어쩌겠는가. 그는 여전히 그 자신에게 다는 솔직해지지 못한 사람인 것을.



    1.

    박문대는 신이 아니었기에, 일이 터지는 정확한 때는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김래빈이 쓰러졌을 때 그가 미리 마련해놓았던 비상체계는 무리 없이 돌아갔다. 언론이 차단되었고 관계자들은 입단속에 들어갔으며 김래빈은 신속하게 숙소로 옮겨졌다. 차유진 때와는 달리 매니저는 김래빈이 과로로 쓰러진 것 같다는 말에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앨범 작업 때마다 그가 엄청난 작업량을 소화한다는 건 관계자들 사이에서 비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AR 팀 안에서는 김래빈이 추천한 에너지 음료 순위가 부적처럼 돌기도 했다. 심지어 관계자가 아닌 팬들마저도 김래빈의 개인 팬이거나 그룹 코어 팬이라면 눈치채고 있을 거라는 게 테스타 내에서의 정설이었다.
    김래빈을 제외한 테스타의 멤버는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숙소에서 김래빈을 케어하는 그룹, 다른 하나는 활동과 그룹 외부와의 소통을 담당하는 그룹이었다. 차유진의 일이 일어난 후에도 과거의 스티어에 얽힌 정확한 사정을 아는 멤버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때만큼은 그룹 내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짧지만 치열한 고심 끝에 박문대는 배세진과 류청우를 그룹 외부 활동으로 뺐다. 눈을 뜬 직후의 김래빈이 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문대가 그룹 외부에 시선을 돌리기 힘든 지금, 팬들이나 회사와의 소통과 조율은 이세진이 맡아줄 것이다. 그는 다시금 이세진의 존재에 감사했다.
    숙소에 남은 건 그리하여 그와 차유진, 선아현이었다.
    '선아현은......'
    박문대는 거실에 살짝 긴장한 기색으로 앉아있는 선아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선아현 역시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사정을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박문대는 그를 남기기까지 제법 고민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두 명만 남기기에는 어떤 돌발상황이 일어날지 몰랐으니까. 일차적으로, 그는 선아현의 무해해보이는 인상에 기대를 걸었다. 같은 아주사 출신이면서 폭력이나 비행과 같은 이슈와는 관련이 없었던, 그래서 설사 낯선 곳에서 깨어나 마주치더라도 비교적 경계심이 덜 할.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는 김래빈을 제압할 수 있는 인선이기도 했다.
    "차유진, 네 생각엔 어떨 것 같아?"
    "Umm. 그 경험, 기억... Whatever, 그건 Bad차유진 거에요. [그러니 그 때의 일로 이번에는 어떻게 될 거란 가정을 하는 건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죠.] "
    차유진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표정은 찌푸린 채였고, 제스쳐에는 과장이 묻어났다. 그 역시 완전히 평정한 상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염려, 혹은 긴장일까. 박문대는 생각했다. 아무리 투닥거려도 차유진이 김래빈을 친구로 아끼는 건 사실이었다. 차유진의 눈이 미동없이 누워 있는 그의 동갑내기 친구를 향했다. 그렇지만 김래빈, 항상 김래빈이에요. 이번에도 그럴 거에요. 그 믿음만이 여전히 굳건했다.
    "그래. 그렇겠지."
    박문대는 동의했다.
    그때 김래빈이 눈을 떴다.



    2.

    깨어났을 때 눈 앞에는 낯선 사람이 하나, 둘. 그리고 차유진이 있었다.
    "차유진? 한국엔 언제 돌아왔어?"
    습관적으로 그의 이름을 가장 먼저 불렀다가, 김래빈은 문득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낯선 공간이었다. 반사적으로 자기 자신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입고 있던 옷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차유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면 바로 납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전화기를 좀 빌릴 수 있겠습니까? 할머님, 할머님께 전화를 드려야... 아니, 그게 안 된다면 누나한테라도 연락을 남겨야 합니다. 제가 갑자기 없어지면 다들 놀라실 텐데,"
    몸을 일으키는 그를 부드러운 손길이 내리눌렀다.
    "쓰, 쓰러졌을 때 머리를 부딪혔을, 수 있어서... 몸을 바로 일으키면, 위험해, 래빈아."
    선한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내용이 걱정이었다는 것도, 그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불렀다는 것도 김래빈에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 팔에서 벗어나려 했다. 여전히 뿌리치지는 못했다. 그때 옆에서 불쑥 핸드폰이 내밀어졌다. 김래빈, 바보야. 위험하잖아. 일어나지 마. 이거 네 거야. 이걸로 연락해. 차유진이었다.
    "괜찮겠어?"
    "하지 못하면 김래빈 더 불안해요. 가족은 김래빈 우선순위니까, 존중해 줘야 해요. 김래빈 가족들 나중에 우리가 설명하면 돼요."
    알 수 없는 대화를 뒤로 한 채 그는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의 반응에 더 큰 혼란에 빠져들었다



    3.

    박문대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간략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단단하게 정돈된, 울림이 좋은 미성이었다. 여긴 네가 살던 세계와 다른, 평행세계의 일종이고 너는 사고로 잠시간 이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당장이라도 질문이 범람할 것 같았다. 그래도 김래빈은 일단 참았다. 무작정 던지는 질문과 단서 없이 전개하는 추론은 제대로 된 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걸 이제 그는 알았다. 사람들은 때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을 속였고, 그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 역시 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서툴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상황을 파악하며 입을 여는 게 옳았다. 지난 5년의 세월동안 그는 큰 댓가를 치러가며 그걸 배웠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제가 여기서 테스타라는 그룹에 속해있고, 또 프로듀싱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그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익숙한 기기들이 보였다. 작업실도 따로 있다고 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기기들의 품명을 김래빈은 믿을 수 없었다. 회사는 그가 기기며 녹음실에 자유롭게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사비로 구입해 채워넣기에는 자금도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거짓말 같았다. 아니면 잘 지어진 꿈일지도 몰랐다.
    "문대형. [내가 보는 게 지금 경계하는 김래빈이 맞아요?]"
    "너는 그런 반응이면 안 돼, 차유진. 너 때를 생각해봐."
    "Oh, 나 이젠 기억 안 나요."
    영어를 쓰는 차유진. 잘 들리지 않는 소곤거림. 이해할 수 없는 대화. 차유진이 낯설었다. 평행세계라면 그럴 수 있겠지. 그는 붕 뜬 머리로 생각했다. 그래도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편하게 대화하는 차유진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박문대가 선아현에게 눈짓을 보내는 걸 알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탕, 하고 물병이 놓였을 때 놀라서 옛 버릇마냥 움찔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박문대와 눈이 마주쳤다. 제 앞에는 생수를 두 병 둔 채, 어쩐지 비장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시작하자. 김래빈. 이제부터, 궁금한 게 해결될 때까지 뭐든 다 물어봐도 좋아."
    그에게는 올바른, 그러나 너무나 낯선 대응에 김래빈의 입이 벌어졌다. 차유진이 옆에서 팔장을 꼈다. 길고 긴 문답이 이어지는 동안 차유진은 그 자리를 계속 지켰다.



    4.

    "드세요."
    선아현이라고 했다.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었다. 같은 팀은 아니었다. 얼굴과 춤선이 인상적이어서, 지나가듯 그가 들어간 무대를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벌써 옛날 일이었다. 김래빈은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그가 내미는 사과를 받아 입에 넣었다. 생수 두 통을 다 비우고도 깔깔한 목에 과즙이 달게 돌았다. 뜨개질 바늘이 사각사각 움직였다. 그 일정하고도 태연한 움직임이 어쩐지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도 사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은.... 몰라요. 그렇지만 역시 믿,기 어렵죠? 그래도 저기, 우리가 수상한 사람은 아니고......"
    "괜찮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납득했습니다. 번거로우셨을 텐데 충분한 설명을 해주신 점에도 감사드립니다. 믿기 어렵지만 일단 일어난 이상 이 상황을 부정하는 건 지금의 현실 인식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수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차유진이 근본적으로 제가 아는 차유진과 다르지 않다면, 그가 믿는 사람은 적어도 저희, ...저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간주해도 될테니까요."
    이렇게 침착하게 말할 수 있을때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이 남자는 김래빈의 옆에서 조용히 뜨개질을 했다. 차유진은 김래빈 고장났어요!를 외치다 다른 남자에게 연행되었다. 체구상 그가 차유진에게 억지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을 테니, 말로는 문대형이 어쩌고 해도 차유진이 그에게 대충 맞춰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눈을 떴을 때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박문대를 향했던 것을 기억한다. 여전히 사람 사이의 일에는 눈치가 그렇게 좋지 않은 김래빈조차 바로 알아차릴 만큼 즉각적이고 동시적인 움직임이었다. 그 중에는 차유진도 있었다. 활기가 죽지 않은, 반짝반짝한, 기대도 설렘도 아직 살아 있는. 차유진은 한국말이 서툴렀다. 예의와 규칙도, 종종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판단력은 자신보다 나았다는 걸 김래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비상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때 바로 그를 바라볼 정도라면.
    "...혹시, 유진이, 불러줄까요?"
    김래빈은 제 세계의 차유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동안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5.

    "넌 안 들어가봐도 되겠어?"
    박문대는 차유진을 흘끗 바라보았다.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김래빈이 어느 정도 진정했을 때부터 차유진은 태연한 태도를 되찾았다.
    "Oh. 나랑 김래빈 달라요. 김래빈 지금 나 필요 없어요. [예상치 못한 일에 대응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잖아요. 그쵸? 하지만, 음. 궁금하긴 하네요.] 김래빈 눈 자주 안 마주쳐요. [김래빈은 나쁜 차유진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걸까요? 글쎄.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어쨌든, 만약 사과받을 일을 했다고 해도, 그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내가 아니죠.] 그러니까 지금은 나 여기 있어요. 대신 김래빈에게 맛있는 거 먹여요. Umm. 치킨?"
    ".........."



    6.

    김래빈은 조심스럽게, 그가 작곡에 개입한 곡은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견해를 전달했다. 만약 언젠가 다시 그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면 작곡에 영향을 받을 만한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 게 나았다. 특히 그와 악기와 기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유사하다면 더욱 그랬다. 여기가 평행세계라도 김래빈은 작곡가로서 그가 행해야 하는 도의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박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들은 뮤직비디오나 음악방송 무대를 보는 대신, 자체컨텐츠를 포함한 예능을 골라 보았다.
    김래빈은 화면 배경에 작게 잡힌, 차유진과 그가 투닥거리는 모습에서 잠깐 화면을 멈추더니 그 장면을 오래 응시했다.



    7.

    지표가 없었습니다.
    김래빈은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았지만 그 때에는 이미 이걸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지금 이걸 그에게 털어놓는 건 부러움 때문인지, 미련 때문인지.
    "그저 무대에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차유진도, 저도요. 미처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에서 나온 구설수가 활동에 그렇게 방해가 될 때까지 커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에는 늦었습니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하면 안 되는지. 본받을 대상이 없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이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말려주거나 도와주거나 감춰주는 사람 역시 적었다. 회사의 대응은 서툴렀고, 리더는 지쳐 있었고, 멤버들은 각자 자신들의 문제를 떠안고 있었다. 김래빈은 그들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종종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대신 '수용'해야만 했을 때,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아주사'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분명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더 크고 교묘한 서바이벌 프로그램 안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끝없이 평가가 이어지지만 관객은 점점 줄어드는.
    "여기의 차유진은, 그러니까....."
    "문대 형이라고 부르면 된다."
    "예.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호칭을 편하게 하겠습니다. 음.. 문대 형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듣기로는 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 다 잘 해결되었다고... 다행인 일입니다."
    자신들의 세계에서 차유진은 그러지 못했다. 김래빈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자신 역시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인관계에 요령이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다. 노력은 했지만,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재빠르게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았을까, 떠올렸을 때에는 이미 기회가 다 떠나고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프로듀싱에도 사람 사이의 알력이나 정치, 경제논리 따위가 개입했다. 그가 손댈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의 의도는 종종 왜곡되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었다.
    차유진과 김래빈은 불안한 그룹 안에서 서로가 서로의 의사소통의 서툶에 상처받지 않는 유일한 관계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의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룹 내의 분위기도 한 몫했지만, 그들 스스로도 저 영상처럼 서로 편하게 장난치는 빈도를 점점 줄였다. 서로가 너무 무거웠기에, 친밀하면서도 종종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언제라도 좋은 무대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네 재능엔 문제가 없어. 문제가 있었다면 그 상황이었겠지"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과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 때에는 막막해서 곡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한 적도 많으니까요."
    김래빈은 차유진이 아까웠다. 그가 자신에게 보내는 신뢰는 소중했고 그의 재능과 안목을 아꼈다. 그렇지만 주눅들어있었다. 체념은 점점 빨라졌고 시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제 능력을 자신할 수 없었다. 가끔은 일단 해보자는 차유진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종종 그 대책없음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화를 냈다가도 곧 후회했다.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이해자를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우리는 저런 사이여야 했습니다. 제가 더 단단했다면, 어쩌면 가능했을 겁니다."
    가끔 티격태격하고, 그래도 서로의 무대를 보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리고, 가끔은 차유진이 김래빈의 랩에 비트를 넣고, 김래빈이 짚어내는 멜로디에 차유진이 즉석에서 춤을 추는. 그 대신 그들 사이에는 짧은 작별 인사와 넓고 깊은 바다가 남았다.



    8.
    김래빈은 오래 훌쩍였다.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했다고 했다. 할머님이 그때 잠깐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가족들의 신경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고 했다. 말하는 걸 멈출 줄 몰랐던 막내는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긴 말을 품고 살았다. 그래서 작곡을 놓았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역시나 김래빈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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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의 미리니름이 군데군데 들어가있고, 날조가 심합니다. 슽윶랩의 관계를 특별하다고 상정하고 있지만, 특정한 커플링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각 번호는 떠오르는 대로 갈긴 내용을 정리한 정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 피어싱

    피어싱

    *차유진 시점. 논커플링 막내즈 일상. 대충 부름(Nightmare) 활동기 어디쯤… 

    * 부분적으로 소설의 미리니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차유진은 테스타가 좋았다.

      무대는 멋졌고 활동은 즐거웠다. 그룹 멤버들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이 표현을 근래 배웠다. ‘나쁘지 않다’의 이중 부정은 어딘가 젠체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한번 더 꼬아 만든 한국의 최상급 극호(好) 표현이란 마치 제대로 된 블랙 유머처럼 톡 쏘는 맛이 있었다. 차유진은 이 표현을 이해하려 다른 팀원들을 세 시간은 붙들고 늘어졌고 그렇게 소요한 시간을 보상하듯 여기저기 써먹었다. 

      그래. 테스타는 아주 멋진 팀이었다. 그들은 유능하면서도 온정적이었고 그의 말과 행동에도 크게 선입견을 가지지 않았다. 차유진은 항상 그 자신을 귀엽다기보다 멋지다고 생각했으나 귀여움 받는 막내 포지션으로 얻을 수 있는 약간의 이득은 거절하지 않았다. 새로운 ‘형들’과 친해지는 과정을 그는 마음껏 즐겼고, 유닛 편성에서의 약간의 사심을 제하고도 차유진이 김래빈을 굳이 룸메이트로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김래빈과 공간을 공유하는 건 꽤 간만의 일이다. 

      같은 방을 고른 통에 서로 나가라 싸우면서도 차유진은 결국 그가 김래빈과 같은 방을 쓰게 될 줄 알았다. 음악 취향이야 전 소속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들은 본래도 취향이 꽤 겹쳤다. 어떤 면으론 좋은 일이다. 그와 김래빈은 생활패턴이 비슷했으니 당분간은 새벽에 ‘형, 자요?’하며 룸메이트의 침대를 급습하는 일도 없을 터였다. 김래빈이 작곡에 뼈를 갈아넣을 때만 아니라면. 

      우습게도 김래빈은 흥미로운 갭으로 가득한 사람인 것 치고 정작 창작활동 만큼은 전형적인 예술가의 선입관에 들어맞는 행동 양식을 보였다. 떠오르면 바로 메모를 해야 했고, 작업 시간으로 낮보다는 밤을 선호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야행성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작업할 때 건드리는 건 좀 위험했지만 그거야 괜찮았다. 그는 김래빈의 선을 알았다. 그리고 김래빈의 작업 동안 견뎌야 하는 심심함 정도는 충분히 참아낼 수 있었다. 

      ‘그야 그가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내는 음악이 훨씬 더 흥미로운 걸.’

      물론 김래빈이 없어도 놀자고 찔러볼 형들이 이제는 많기도 했다. 차유진은 히죽 웃었다.

      그는 팔에 머리를 괸 채 방을 쭉 훑어보았다. 여기저기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2인 1실이라고 해도, 인지도를 얻은 아이돌의 숙소라 그런지 방이 퍽 넓었다. 연습생 시절에는 이것보다 좁은 방에 여럿이 묵었다. 그와 김래빈은 같은 이층 침대를 썼는데, 김래빈은 위층 침대를 고집하는 차유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보면서 선선히 윗층 자리를 넘겨주었다. 서로가 지금보다 더 요령이 없고 낯설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김래빈도 지금보다 본인의 ‘영감’을 주체를 못 해서, 곡이 생각나면 바로 메모라도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다른 연습생이 잠들고 난 후 이불을 뒤집어 써 가며 작업을 했다. 그럴 때면 이불 사이에서 새어나온 전자기기의 화면 불빛이 침대와 바짝 닿은 벽을 타고 은은하게 그의 침대까지 번져왔다. 

      ‘래빈, 잠 안해?’ 

      그 희미한 불빛을 보며 말을 걸면 집중한 김래빈은 잠시간 말이 없다가, 액정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춘 후에야 기계를 끄며 멋적어했다. 너의 숙면을 방해해서 큰 실례를 끼쳤다고. 보통 새벽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불과 침대 바닥, 매트리스로 가로막힌 두 사람 사이에서도 벽을 타고 올라와 희미하게 번지던 불빛처럼, 이번엔 새벽의 무거운 공기를 따라 숨죽인 말들이 내려갔다. 서로에게 익숙치 않은 언어로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지금은 그렇게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작업할 필요가 없지.’

      래빈이라고 부르던 것이 김래빈이 되고도 한참이 지났다. 전 소속사와는 달리 여기선 팀원들의 지지가 날개처럼 그의 친구를 받쳐주고 있었다. 차유진은 당연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한 실력이었다. 귀가 있다면 알 수 있었다. 김래빈은 이제 더 좋은 여건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 그가 관여하는 영역이 대폭 늘어나면서 김래빈은 한동안 작업을 위한 충분한 전자기기들을 갖추는 데 신경을 쏟았고, 그 결과가 저 작업 책상이었다. 제법 늘어난 전자기기들은 김래빈만의 질서를 갖추어 책상 위 공간을 차지했다. 차유진은 그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가끔 이해하고 싶은 것처럼 그 배치를 뜯어보곤 했다.

      “Hmm~” 

      그 사이에 뭔가 배열이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차유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전자기기의 면면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덜컥, 하고 열렸다. 파자마를 반듯하게 갖춰입은 김래빈이었다. 

      “이제 네가 씻을 순번, 잠깐, 차유진. 그 옷은 그렇게 입고 누우면 원단 특성상 주름이 잡히기 쉬워. 저번에 분명 그 옷을 아낀다고 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옷도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눕다니,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어김없이 엄숙한 잔소리였다.

      “김래빈은 옷 아낄 때 안 입어?  중요한 건 많이 입는 거야. 소중하게 걸어놓고 안 입으면 좋아하는 옷도 의미 없어!”

      차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그의 친구를 좋아했지만, 종종 지나치게 원칙적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아낀다는 말은 오래 함께 하고 싶다는 뜻을 내포해. 그리고 오래 입으려면 옷이 손상되지 않게 할 필요가 있어. 항상 입는 것과 함부로 입는 건 달라! 넌 지금 옷을 함부로 입고 있어! “

      결국엔 또 티격태격이었다. 심지어 단둘이 룸메이트였던 탓에 지금은 평소 그들의 말싸움을 익숙하게 봉합하던 류청우나 박문대도 없었다. 그래도 차유진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그가 김래빈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아, 소독약 바를 시간이다.”

      “Pierce? 또? 김래빈 그거 어제도 했어.”

      “또라니..! 이건 매일 꾸준히 관리하는 게 중요한 거야.”

      그의 생각엔, 어쨌든,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저기로 주제가 튀다가 어느샌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는 지금처럼. 

      “이제 귀 몇 개 뚫었어? 두 개? 세 개?”

      “이번 활동기에 추가된 건 두 개야. 왼쪽 하나, 오른쪽 하나.”

      이제 왼쪽에도 아웃컨츠로부터 시작해서 귓바퀴를 감아 도는 체인 장식을 할 수 있다느니, 무대 모니터링을 해봤는데 핀라이트를 넣었을 때 도금 광택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는 차유진은 잘 모른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활동에서도 차유진은 귀를 뚫지 않았다. 스타일링을 담당하는 직원들은 귀찌로 만족해야 했다. 대신 차유진은 그의 옷소매를 내주었다. 팔을 강하게 움직일 때마다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또 팔꿈치부터 어깨까지 길게 이어진 사슬들이 잘랑거리는 소리는 종종 인이어를 넘어 반주와 섞여들었다. 

      그가 귀를 뚫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장신구는 종류를 불문하고 움직일 때 좀 거추장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물때까지 꾸준히 관리해야 한다면 더욱 그렇다. 차유진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았다. 제 얼굴이야 장식 없이 그 오롯이로도 근사하기도 했고. 그러나 김래빈은 귀찮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다. 그에겐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김래빈에게는 아마 무대에서 원하는 만큼의 장식이 혼몽하게 잘랑거리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다. 무대를 구상하는 김래빈은 그 스스로조차 무대를 구성하고 빛내는 하나의 요소로서만 간주한다. 자기 자신조차 때로는 객관화하는 철저함과 완벽에의 지향 앞에서 스스로의 귀찮음은 고려해야 할 우선순위에 들지 않았다. 그건 그가 누구를 대하든 사람을 어떤 목적이 아니라 오롯이 하나의 사람으로서 대하는 것과는 별개의 부분이다. 프로로서의 김래빈이다. 

      하기야, 그는 원래도 해야 하는 일과 메뉴얼이 주어지면 기본적으로 성실하게 소화해내는 성격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입으로는 장신구가 빛을 받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효과에 대해 주절거리면서도 손으로는 익숙하게 새로 뚫린 곳을 소독한다. 데뷔 초부터 꾸준히 반복하면서 그는 능숙해질 대로 능숙해졌다. 거울을 앞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귀 뒷편은 잘 보이지 않을텐데도 약을 묻힌 면봉은 꼭 알맞은 자리를 찾아갔다. 한 두 번 정도, 차유진은 도움 필요해? 하고 물었지만 그가 보기에도 보이는 저보다도 안 보이는 김래빈이 나았다. 

      차유진은 그가 처음으로 귀를 뚫을 때도 함께 있었다. 그는 한국에 별 연고가 없었고 데뷔 전 공백기에는 자연스럽게 김래빈을 따라다녔다. 김래빈은 처음 귀를 뚫을 때에는 좀 긴장했던 것도 같은데, 한 번 뚫어보고 별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자 그 다음부턴 마치 주사를 맞듯 잠깐 눈만 한 번 감고 말았다. 무딘 신경줄이었다. 저번 무대에서도 길어진 머리카락이 체인에 끼었는데, 스타일링 팀 막내누나가 황급히 떼어주려 달려오는 사이 김래빈은 무심하게 끼여서 꼬인 머리카락을 양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뚝 끊버렸다. 오히려 제 앞까지 달려온 황망한 얼굴에 놀라 혹시 제가 이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뜯어내 버려서 머리를 다듬는 데 문제가 생기냐 묻기나 했지. 김래빈은 그의 인상에 익숙하지 않은 그 신입이 제멋대로에 까다롭고 성격 나쁜 아티스트를 상상하고 지레 겁먹어 달려왔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김래빈 바보.’

      김래빈은 제 위치를 모른다. 정확히는 그 위치를 악의적인 의도로 휘두르는 법을 몰랐다. 김래빈에겐 할 수 있는 것보단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다. 다른 연습생들이 차유진을 질시하고 견제할 때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춤을 배우며 제가 만들고 싶은 무대나 상상했을 것이다. 물론 그때부터도 김래빈은 차유진의 말이나 행동에 태클을 걸곤 했지만 걱정과 타박의 어드메쯤에 있는 그 잔소리들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종종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혹은 단어를 잘못 사용할 때 이상한 승리감에 차 그저 웃기만 했던 누군가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물론 기분 나쁘지 않다는 말이 귀찮지 않다는 말은 아니었지만. 

      “피어스 오래 한 사람들 자국 잘 안 없어진다. 김래빈 이제 아주 오랫동안 귀에 구멍 뚫린 채 살아.”

      “? …그게 무슨 문제라도?”

      한국의 문화는 조금 갑갑한 부분이 있다. 20년, 30년 뒤, 아주 먼 미래에 혹시 아이돌을 하지 않을 때가 온다면 사회 통념상 예의바르지 않은 것들을 신경쓰는 김래빈은 저 흔적들을 신경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쩌면 20년, 30년 뒤에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며, 지금 고민해야 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차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It looks like constellation.”

      사슬도, 장식도, 두꺼운 관도 다 뗀 채 고스란히 드러난 귀에 구멍이 막히지 않도록 작은 볼만 점점이 남은 그 모양새는 별자리를 닮았다. 김래빈은 낯선 단어에 잠깐 눈썹을 들어올렸지만 피부 위에 스킨케어 화장품을 덧바르는 손길은 평연했다. 차유진이 그의 앞에서 부연 설명 없이 낯선 영어를 쓸 때에는 굳이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걸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 차유진은 방해 없이 그 작은 별자리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김래빈이 차유진, 씻고 자,라며 등을 내리칠 때까지. 

    *차유진 시점. 논커플링 막내즈 일상. 대충 부름(Nightmare) 활동기 어디쯤…  * 부분적으로 소설의 미리니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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