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그:]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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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 놀이공원
전력 60분 – 놀이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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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이었고 꽃이 피었고 날이 좋았다. 놀이공원에 사람이 넘쳐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래서 놀이공원 입구를 막 들어섰을 때 김래빈은 조금 당황했다. 예상보다 인파가 적었다. 조금만 기다림을 감수하면 어떤 놀이기구든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구밀도가 낮아서 그런가. 이 시기쯤 되면 간혹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사람이 몰리던 조국의 놀이공원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우뚱한 그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라와 인구밀도는 달라도 놀이공원의 풍경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노랫소리, 화사한 빛깔로 칠해진 각종 놀이기구, 여기저기 널려있는 간식과 기념품 부스,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성.
'뭘 해야 하지?'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쭉 걷다 그는 조금 어색하게 놀이기구 사이에 우뚝 섰다. 벤치에는 이미 한껏 지친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달래거나 먹이거나 옷을 추슬러 주고 있어 앉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그에게는 썩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가 자랐던 강원도는 놀이공원이라고 부를 만한 게 마땅치 않았고, 그의 보호자는 먼 지역까지 그를 데리고 가 북적이는 인파에 치이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았다. 그래도 분명 한두번 정도는 그의 누나와 함께 사촌들 사이에 끼어 가 본적이 있었다. 그의 보호자는 어쨌든 그를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키웠으므로,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는 손주들의 소망을 다른 자식의 손을 빌려서나마 들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은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다. 가장 선명하게 남아있는 놀이공원의 상은 20대 때의 것이다. 그것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
그는 다시 놀이기구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각 놀이기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비어있는 펜스에 몸을 기대면 롤러코스터가 레일을 천천히 올라가며 내는 진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롤러코스터라도 타 볼까. 고개를 바짝 들어올리면 레일 사이로 햇살이 내리꽂혔다. 레일의 가장 꼭대기에 도달한 열차가 천천히 기울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하강이다. 점점 가속도가 붙어 굉음을 내며 내리꽂듯 떨어지는 열차를 따라 고개를 내리다가 비명과 함께 저 멀리 멀어지는 열차에 잠시 웃고 다시 시선을 돌리면, 비현실적인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차유진?"
난처한 얼굴로 쪼그리고 앉아 아이를 달래는 낯익은 얼굴. 무심코 불러버린 이름에 이쪽을 돌아본 차유진의 얼굴에도 언뜻 놀람이 스친다. 어, 어어. 무심코 손을 뻗어 예의 없이 사람을 삿대질하는 버릇도 여전했다. 누구야? 슬금슬금 차유진에게 붙은 아이가 제 딴에는 작게 속삭인다고 하는 말이 그대로 들렸다. 차유진이 난처한듯 목을 울리는 소리를 내자 아이가 그의 옷깃을 몇 번 잡아당겼다. 뒷목을 몇 번 주무른 차유진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내 친구야. 아이가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크게 떠지는 눈이 언뜻 차유진을 닮았다.
"나 미리 말해. 내 아이 아냐."
조카라고 했다. 둘째를 임신 중이라 거동이 어려운 부모 대신 차유진이 아이를 데리고 놀러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아직 차유진이 그를 친구라고 소개하기 전 망설인 이유나 세상에는 하나의 단어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여러 복잡한 관계들이 있다는 걸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렸다. 방금전까지 낯설었을 사람에게 금방 경계를 푼 아이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고 혼자 회전목마를 타러 들어가버렸다. 혼자 보내도 괜찮아? 그의 질문에 차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문제 없어."
벌써 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 나무 위 아지트도 정복한 날다람쥐같은 말괄량이 오렌지인걸. 내가 함께 가면 오히려 싫어할걸? 영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퍽 애정이 묻어있었다. 김래빈이 알아들을 것을 별로 기대하지 않는, 혼잣말에 가까운 그 말을 그는 이제는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빛을 받을 때마다 주황색처럼도 보이는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는 별명이네."
그 반응에 차유진은 퍽 놀란 기색이다. 부모에게 보고해야 한다며 동영상 촬영을 하던 손은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개만 돌린 휘둥그레한 눈이, 역시 제 조카와 조금 닮았다.
"김래빈 영어 알아들어?"
"응. 내 커리어와 관련해서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좀 더 신경써서 배웠어. 여전히 간혹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데 별 문제없었던 것으로 보아 이제 일상적인 회화는 그럭저럭 가능하다고 봐도 무방해. 그러니까 네게 영어가 더 편하다면 굳이 한국어를 쓸 필요 없어, 차유진."
오. 짧은 감탄사를 뱉어낸 차유진이 제 쪽을 돌아보는 조카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든다. 한 팔로 회전목마의 손잡이를 야무지게 움켜잡은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다시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동영상 촬영 종료 버튼을 누른 차유진이 반쯤 몸을 돌려 펜스에 기댔다. 표정은 조금 더 차분해진 채다.
"여기서 김래빈을 만날 줄 몰랐어.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어. 잘 지내? 김래빈 할머니 할아버지도 안녕하셔?"
"응. 다행이 건강하셔. ...여기서 널 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차유진이 사는 곳과 같은 지역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우연찮게 다시 만나는 걸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적어도, 놀이공원에서 그의 조카와 함께 마주치는 상상은 해본 적 없었다. 놀이공원을 고른 건 충동이었기에.
"놀러왔어? 혼자? 놀이공원을 혼자서라도 올 만큼 좋아했던가?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거라곤 생각 안 해봤는데."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문장이 줄줄 흘러나왔다. 여전히 어조는 경쾌하고, 제스쳐는 조금 더 정신없어졌다. 그는 애매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놀러왔다기보다는..."
그냥 와 보고 싶었다. 날씨가 좋았고, 마침 주변에 큰 놀이공원이 있었다. 아직 여행 예산은 넉넉했고, 놀이공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쩐지 롤러코스터가 보고싶었다. 그의 선명한 기억 속, 차유진과 함께 놀러갔던 20대의 놀이공원 나들이에서 마지막을 장식했던.
"나는 차유진 네 덕분에 롤러코스터가 퍽 즐겁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거든."
어릴 적 사촌과 함께 놀이공원에 갔을 때, 삼촌 부부는 날뛰는 사촌들을 감당하기에도 벅찬 것처럼 힘들어해서 김래빈은 주로 그의 누나의 손을 잡고 다녔다. 그와 나이차이가 꽤 나는 누나는 아주 어린애들이 타는 놀이기구보다는 좀 더 스릴넘치는 기구들을 타고 싶은 눈치였다. 불확실한 기억 속에서도 기억하기론 대개는 어쩔 수 없이 김래빈에게 맞춰 탄 것 같지만, 딱 하나, 롤러코스터만은 누나가 직접 골랐다.
키 제한을 그가 통과한 걸로 보아 아마 그 놀이공원에서는 비교적 어린 아이도 탈 수 있는 덜 무서운 롤러코스터였을 것이다. 그마저도 한바퀴 돌고 나니 무서워서 입을 꾹 다문 채 다음부터는 절대 롤러코스터는 타지 않겠다고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던 기억이 있다. 어릴 때의 기억은 강렬하다. 20대가 된 김래빈도 롤러코스터는 타지 않으려 했다. 다시 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의 팔을 잡아끌던 차유진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롤러코스터를 무서운 것으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서우면 내 손 잡아!'
잔뜩 긴장한 채 안전바를 생명줄마냥 붙잡고 있는 그를 보며 킥킥댄 차유진이 손을 내밀었을 때, 김래빈은 망설이다 그 손을 꾹 부여잡았다. 하강하기 직전이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고, 이리저리 쏠렸고, 비명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손에 있는대로 힘을 주고 있었다는 건 궤도가 다시 완만한 곡선을 그릴 때야 알았다. 차유진은 손뼈 부러지는 줄 알았다며 장난스레 손을 털었다.
'재밌지!'
아직 조금 얼빠진 얼굴을 한 채 그들이 빠져나온 롤러코스터와 바닥을 번갈아 보고 있던 김래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가 그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얼굴을 때리는 바람, 추락하는듯한 부유감이 마치 해방되는 것 같았다.
"한번 시도해보니까 내 상상보다 덜 무섭다는 걸 알게되어서 그 후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두려울 때마다 그 때를 떠올리면서 이것도 해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몇 번은 성공적이었고."
"와우.... 그건 분명 내 덕분이네!"
"응. 네 덕분이야."
언제나 동화같은 결말만 있지는 않았다. 몇 번은 도전이 실패로 돌아갔고, 몇 번은 결국 마지막 한 발짝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망설임이 길어질 때면 종종 생각났다. 다시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며 그를 잡아끌던 손의 온기와 경쾌한 목소리가.
"그럼, 김래빈 오늘 왜 왔어? 이번에도 뭔가 두려운 거라도 있는 거야?"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분명 처음 놀이공원에 들어설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멈춘 회전목마에서 달려온 아이가 차유진에게 안긴다. 익숙하게 아이를 들어올린 차유진이 무겁다고 불평하면서도 아이를 몇 번 흔들어주고 내려놓는다. 차유진의 손을 잡은 아이가 김래빈을 돌아보았다. 차유진 역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놀이공원에서 잠깐 만난 옛 친구와 내내 붙어다니는 건 역시 좀 이상하다. 적당히 안녕을 고하고 헤어지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면 또 우연히 만날 일은, 아마 다시는 없겠지.
그러니 다시 또 선택이다. 그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물리적 거리의 한계는 여전하다. 미국에서 일할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전히 확정된 건 없다. 그들은 이제 놀이기구 펜스 바깥에 서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나이, 놀이기구의 빛과 노래, 환상 속에서 한 발짝 벗어난 곳에 발 붙이고 서 있는 어른이 되었다. 일말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아직 꿈꾸고 싶다는 건 미련일까. 이 선택이 차유진에게 오히려 부담만 주는 건 아닐까. 고민은 계속해서 가지를 뻗어나간다.
그 성장을 끊어내듯 멀리서 흐릿하게 다시 롤러코스터의 굉음이 울렸다. 해보자며 제 팔을 잡아끌던, 언제고 상상 속에서 등을 밀어주던 손이 떠올랐다. 기억 속 얼굴의 주인이라면 아직 꿈을 꾸어도 좋다고 말해줄 것 같았다. 같은 얼굴을 한 현실의 차유진은, 잘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결정했다. 두려움을 여전히 발 아래 둔 채 그는 입을 열었다.
"---"
한 발짝 내딛는다. 추락이다. 어쩌면 비행이 될지도 모른다.적당히 현대배경의 AU 윶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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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도전(2023년)
100일 도전(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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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백 곡 달라는 차유진
테스타 윶랩
9월 24일~9월 25일
세헤라자데
연습 윶랩
9월 26일
금발
진성승부 윶랩
9월 27일~10월 1일
인어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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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일
강아지 산책
테스타 윶랩
10월 3일~10월 11일
유령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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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10월 19일
수인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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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10월 23일
고등학생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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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4일~10월 26일
아픈 김래빈
테스타 윶랩
10월 27일~10월 29일
이능력자 AU
레지스탕스x정부군 윶랩
10월 30일~10월 31일
스티어 김래빈과 차유진은 같은 방에서 뭘 했나
테스타 윶랩(+스티어 기억)
11월 3일~11월 8일
재봉사 차유진과 귀족 김래빈
판타지 AU 윶랩
11월 9일~11월 10일
붕어빵 사먹는 막내들
연습생 윶랩
11월 11일
흰동백
테스타 윶랩
11월 12일
모가지 떨어진 흰동백
테스타 윶랩(+스티어)
11월 13일
이런 날도 언젠가 오겠지
미래 동거 윶랩
11월 14일-11월 15일
블랙홀
테스타 윶랩
11월 17일
가사
테스타 윶랩(+스티어)
11월 19일~12월 1일
후원자x피후원자 윶랩
판타지 AU 윶랩
9월 23일부터 12월까지 트위터에 올렸던 윶랩 단문 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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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 비바체
전력 60분 – 비바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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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날 차유진이라고 불러도 돼. 동대륙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의 형태를 알게 된 유진은 그에게 뻐기듯 말했다. 그때부터 유진은 김래빈에게 항상 차유진이었다. '차'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유진의 가문도 한때는 동대륙에 뿌리를 둔 가문이었다고 한다. 다른 가문보다 동대륙어를 배운 가문의 일원이 조금 더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러니 김래빈이 유진에게 구출된 건 어쩌면 그에게 행운일지도 몰랐다. 그를 납치했던 유랑민들과는 달리 적어도 차유진의 가족들은 동대륙 출신인 그를 신기한 구경거리 취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김래빈이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구출되어 유진의 집안으로 간 뒤부터 그들은 하루하루 자라났다. 서로 다투듯 키가 부쩍 커지다가, 키만 너무 훌쩍 자란 거 아닌가 싶을 때쯤부터는 골격이 잡히고 몸에 양감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로 대놓고 경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차유진의 승리였다. 유진의 가족은 그를 피후견인이라기보단 반쯤 차유진의 젖형제마냥 대했기 때문에 먹는 것과 지내는 것에서 차유진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김래빈은 제가 차 가문으로부터 과분한 대우를 받았음을 항상 잊지 않으려 했다. 언젠가는 그들에게 은혜를 되돌려드리는 게 사람의 도리일 터였다. 교육을 받고 서대륙의 사회를 서서히 이해하게 된 김래빈은 피후견인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금전적인 보답이 어렵다면 명성을 떨쳐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방식으로라도! 원래 교양있는 귀족들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으로 가문의 우아함을 자랑하지 않던가!
"그래서. 김래빈 내린 결론이 궁정악사 되는 거야?"
"그래! 궁정악사는 음악가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고, 내가 궁정악사가 되어 훌륭한 음악을 작곡해 내면 차 가문 역시 예술적으로 좋은 안목을 지녔음이 증명될 테니까!"
그는 최선을 다해서 그가 계획한 바를 피력했지만 차유진은 별 반응이 없었다. 샐샐 웃고있는 그 얼굴을 보니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김래빈은 양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가문을 물려받는 건 이든 형님으로 결정이 되었다고 하지만, 둘째도 아닌 셋째는 짊어져야 하는 가문의 의무가 거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역시 차유진은 가끔 너무 사람이 가벼웠다!
"김래빈 지금도 유명해!"
"아니야. 평론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내가 네 가문의 피후견인이라는 점이 사람들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는 바람에 내 명성은 실제 내 성취보다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해. 물론 그렇게라도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들어주고 그게 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이왕이면 선입견 없이 실력을 평가받고 싶은 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오. 그렇게 따지면 궁정악사도 공정하진 않은데..."
얼굴로 흘러내리는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닦아 내려놓으며 차유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반응에 김래빈은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생겨난 피후견인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가문의 어른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음악의 길을 권유한 게 차유진이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궁정악사가 된다고 하면 네가 제일 반길 줄 알았는데. 나에게 궁정악사가 되라고 제일 먼저 추천해준 게 차유진, 너였잖아."
"나, 궁정악사도 될 수 있겠다고 했지 궁정악사 되라고 안 했어."
음악 시켜봐요. 그렇게 말했던 걸 차유진도 기억하고 있기는 했다. 그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이 그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오페라하우스 지하에서 손 닿는 재료라면 무엇이든 써 빼곡히 채워져있던 그 악보들. 그걸 보았다면 누구든 그에게 음악을 시키는 게 온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납치당한 후 정신이 들었을 때부터 수도의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할 때까지 몇 달간 숨어 지내듯 끌려다니면서 악보 읽고 쓰는 법이나 겨우 들었던 주제에, 벽 사이로 울리는 음악을 정확히 훔쳐듣고 악보로 구현해내는 능력을 봤다면 그 누구라도.
궁정악사 따위 되지 않아도 지나치게 찬란한 재능이었다. 아니지. 오히려 그 실속없는 명예직을 차지하느라 벌어지는 난장판 속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나 있나 의심가는 성격으로 궁정악사를 지망하는 게 오히려 손해였다. 김래빈을 내심 차유진의 심복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그의 할머니도 한두 해 김래빈을 지켜보더니 그건 안되겠다, 하고 혀를 쯧쯧 찼는걸. 물론 김래빈이 작곡한 곡을 가족 중에서 두 번째로 가장 좋아하는 것도 그의 할머니였다.
첫 번째는 당연히 차유진이다.
"김래빈."
차유진은 그에게는 조금 낯선 형태의 이름을, 이제는 친숙하게 입에 담았다. 김래빈은 열심히 살았다. 새로운 말과 예의와 관습과 음악을 죽도록 익혀가면서. 차유진은 옆에서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보았다. 단어는 알고 있으되 어색한 문장을 입 밖으로 내기가 부끄러워 유독 말이 서툴던 시절부터 몇 문장에 달하는 긴 말도 막힘없이 내뱉는 사람이 된 지금까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건 미덕이기는 해. 차유진은 얼핏 냉소적으로 김래빈을 평가했다. 곧이곧대로 감탄하기에는 그의 눈에는 김래빈이 조금 무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아직도 김래빈은 간혹 가족의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차유진 스스로 느끼기에도 그의 가족들은 김래빈에게 최선을 다해 잘 해주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것도 차유진은 이해했다. 그게 왜 가문에게서 받은 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나타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김래빈 궁정악사 되는 거 응원 못 해."
한번 더 못을 박는다.
"이상한 의뢰 받아준다고 밤 새는 것도 별로야."
그렇게 고심해서 만들어진 곡에 김래빈의 이름이 아닌 어느 덜떨어진 귀족의 이름이 붙는 건 더 싫었다. 아직까지도 이 나라에 신기한 게 많은 김래빈은 어딜 데려갈 때마다 시시때때로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 같았는데, 차유진이 느끼기에는 김래빈은 그 곡들만 쓸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곡을 쓰기를 바랐다. 비바체. 차유진은 악보에 날아갈 듯 갈겨쓰여 있던 한 단어를 떠올렸다. 넌 항상 체력이 넘치는 것처럼 활기차니 너한텐 알레그로보다 비바체가 더 어울려. 김래빈이 진지하게 그에게 설명해주었던 내용도.
하지만 그 단어는 김래빈에게도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게 있으면 눈을 반짝이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표정부터 변하고야 마니까. 그러니까 차유진은 그런 김래빈이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궁정악사같은, 그가 보기에는 김래빈의 재능을 오히려 가리기만 할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이 마음은 우정일까? 아직 덜 자란 청년은 슬며시 드는 위기감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금방 특유의 낙천성으로 그 껄끄러움을 날려버린다. 여전히 자신의 책무를 설명하는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얹어 상대가 휘청거릴 때까지 무게를 더해 말을 끊으며 차유진은 제 팔 아래로 버둥거리는 체온에 웃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때였다.
후원자x 피후원자 유진래빈 / 100일 도전의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어질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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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60분 – 블랙홀
전력 60분 –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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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유진치고는 침묵이 길었다. 항상 반쯤 웃던 얼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입매가 굳은 선을 그렸다. 그걸 본 김래빈은 내심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교로움에 가까울 그 표정을 성대하게도 오독한 결과다. 저런 얼굴은 처음 보는데. 그렇다면 차유진은 지금 진지하게 고민중인 거구나. 그렇다면 설령 내가 바란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내 마음을 전달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어.
생각이 영 이상한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도 둘만이 남아있는 빈 교실에서 김래빈에게 네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라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김래빈은 차유진이 난감해하는 걸 알아도 제가 헛소리를 했다며 황급히 말을 주워담을 수 있는 유형의 사람도 아니니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평범하게, 고백을 한 사람과 누가 봐도 곧 거절할 사람이 남았다.
“미안. 나 김래빈하고 데이트 생각 없어.”
차유진은 입에 발린 말은 하지 않았다. 네 맘이 고맙다거나, 비록 나는 너를 거절해야 하지만 너는 좋은 사람이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말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간결하고 명백한 거절을 수긍하며 김래빈은 단순하게 안도했다. 결과적으론 거절했어도 어쨌든 그의 마음은 오해 없이 전달되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비장하게 이런 경우를 대비해 준비했던 말을 꺼내들었다.
“차유진,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여전히 우리 둘 다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 네가 나를 거절했어도, 나는 네게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 거야. 약속해.”
아무리 열심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며 마음의 준비를 했어도 막상 정말로 거절당하고 나자 눈물이 찔끔 나려고 해서, 김래빈은 서둘러 시선을 내리까느라 상대가 짓는 희한한 표정은 보지 못했다. 보통 그건 찬 쪽이 하는 말 아니냐고, 어이없어하는 차유진의 생각이야 당연히 모를 수밖에.
차유진은 5월에 그의 반으로 편입했다. 보통 5월은 전학생이 잘 없는 달이다. 갑자기 나타난 차유진은 교내 구성원들에게 오롯이 주목받았고, 외국에서 왔다는 사실과 잘생겼다는 점은 그 관심을 더욱 부추겼다. 차유진이 온 첫날 교단에 선 교사는 칠판에 차유진 석 자를 쓰고는 회장과 부회장을 번갈아 보며 난감한 얼굴을 했다. 회장은 성격은 참 좋았지만 영어 성적은 그저 그랬고 부회장은 새침하고 약았지만 어쨌든 성적은 좋았는데, 결국 교사가 고른 건 부회장이었다.
“부회장 너는 전학생 좀 많이 도와주고.”
네에-. 성의없게 말을 길게 끌며 부회장이 대답했다. 천성적인 귀찮음이 묻어 있긴 해도 약간의 호감과 호기심이 섞인 게 분명한 목소리였다. 빈 자리가 한 군데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김래빈의 옆에 앉게 된 차유진의 움직임을 따라 졸졸 따라오는 시선도 그랬다. 사실 부회장 뿐만 아니라 반 전체의 시선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회장만큼, 혹은 회장보다 더 영어가 약한 터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있던 김래빈만이 양손을 불끈 쥔 채 긴장하느라 제 자리로 함께 쏠리는 시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긴장을 하지 않았다고 눈치를 과연 챘을까? 그의 명예를 위해 공란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질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차유진은 김래빈의 곁으로 왔다.
“안녕해?”
하이. 나이스 투 미츄. 중학교 때 배웠던 기본회화를 소리없이 되새김질하는 김래빈에게 툭, 익숙한 언어가 던져졌다. 종이 치고, 교사가 나가고, 눈을 부릅뜬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첫 마디를 던졌다.
“한국말 할 줄 알아?”
“몰라! 나 연습해.”
차유진이 어설픈 발음으로 답하며 웃었다. 그 순간 김래빈은 긴장이 탁 풀렸다. 안녕. 나는 김래빈이야. 만나서 반가워, 머리속으로 읊던 영어 문장을 고스란히 한국어로 옮긴 듯이 어설픈 문장이 튀어나왔다. 뒤늦게, 허둥지둥. 긴장으로 미간 한 번 찌푸렸다고 누구 하나 죽일 듯이 사납던 인상도 그 순간에는 와르르 헐거워졌다. 그게 차유진에게는 퍽 인상깊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김래빈과 친해진 후 차유진은 몇 번이고 키득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나 김래빈 시비걸 줄 알았어. 하지만 그거 어물? 없는 일이야. 김래빈은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빼내며 점잖게 받아쳤다. 설마. 초면에 시비를 거는 건 무례한 일이야. 김래빈이 차유진에게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표현을 가르쳐줄 때 차유진은 그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정말로 많고 특히 그는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라는 건 김래빈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 날이 더워질 때쯤에, 계절이 하나도 채 지나가기 전에 둘은 금방 친해졌다. 김래빈과만 친해진 건 아니었다. 차유진은 언어의 장벽을 하나도 어렵지 않은 것처럼 넘나들었다. 잘 웃고, 겁없이 말하고, 여기저기 끼어들면서도 밉지 않은 애들 싫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반 전체가 차유진을 좋아하게 된 것도 금방이었다. 오히려 노는 무리로만 따지면 김래빈과 차유진이 겹칠 일이 없었다. 농구든 축구든 크게 마다하지 않는 차유진에겐 쉬는시간이건 급식시간이건 관계 없이 운동장 한 켠을 차지하고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애들이 금세 붙었다. 김래빈이야 원체 혼자 무언가 끄적끄적하기 바빠서 누구랑 같이 있는 걸 보기가 힘든 축이었고. 하지만 차유진은 지나가면서도 가벼운 인사 한 마디를 건네는 사람이었고 김래빈은 그 인사에 기어이 인사를 돌려주어야 마음이 편한 성격이었다. 한두마디씩 말을 주고받다 보면 어느덧 대화가 한가득 쌓였다.
고작 그런 걸로도 사람은 충분히 누군가한테 반할 수 있었다. 사례가 나온 이상 명제는 지위를 획득한다. 김래빈이 그랬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 비슷한 장르가 귀에 붙는 것처럼, 한번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여겨 눈길을 주기 시작하면 새로운 좋은 점들이 끝없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유진이 좋았다. 처음에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할머니. 저 좋아하는 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조심스럽게 털어놓은 고민에 김래빈의 할머니는 크게 웃었다. 우리 강아지가 벌써 누굴 좋아할 때가 되었냐고. 잘 되면 한번 데려와 보라고.
‘좋아한다는 말은 했고? 그게 중요한 거다.’
할머니. 만약 잘 안되면요? 아끼는 손주가 우물쭈물 꺼내는 걱정에 할머니는 노인 특유의 낙관과 오묘한 무관심이 섞인 다정으로 그 등을 슥슥 쓸어내렸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거야.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김래빈은 할머니의 다정을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윽고 고지식하고 순하게 수긍했다. 상대가 나를 받아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이내 그의 안에서 그 말은 기묘하게 재조립된다. 그러니 상대의 마음을 미리 재고 간보고 따지지 말고 제 마음을 정직하게 고백해보자고. 그래서 어느 방과후, 청소도 다 끝난 교실에서 단 둘만 남았을 때, 김래빈은 냅다 차유진을 들이받아 버린 것이다. 널 좋아한다고. 서로의 거리를 재고 눈치를 보고 상황을 살피는 것이 젊은이들에겐 소위 썸이라는, 연애의 전단계로 받아들여진다는 것도 모르고.
그리고 다시 첫 장면이다. 차유진은 김래빈을 거절했다.
그 뒤로 김래빈은 자신이 했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려 노력했다. 둘은 여전히 친구처럼 지냈다. 가끔 차유진은 김래빈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친구 사이를 망치지 않겠다는 맹세 -반쯤은 일방적인-를 굳건히 마음에 품은 김래빈을 말리지도 멀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도리없이 주체 못 하는 감정이 흘러넘쳤다. 사랑이 처음인 열일곱 김래빈은 제어되지 않는 감정에 당황하다가 누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도 그보다 몇 년은 더 살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경험도 많을 테니까. 평소 다정보다는 엄격에 가까운 태도로 김래빈을 다잡았던 그의 누나도 그 순간에는 어쨌든 팔이 안으로 굽어서, 혀 차는 소리가 말 사이 드문드문 돌았다.
“그냥 눌러둬봤자 소용 없어. 적당히 풀어야지.”
김래빈은 누나의 조언 역시 허투루 여기지 않았다. 일기장이 나날이 두꺼워지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음악을 만들었다. 오히려 차유진을 더 자주 생각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그의 염려는 어쨌든 감정을 되돌아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누나의 격려를 들으며 흩어졌다.
차유진은 아직도 한글이 서툴었다. 예전엔 더 그랬다. 수업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 심심한지 자꾸 그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 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집중하자고. 충고라고 한 마디씩 건넸다가 그게 쌓이고 쌓여 결국 떠든 게 되었다. 둘이 나란히 벌을 받으면서도 교사에게 그래도 차유진이 한글을 잘 몰라서 그런 거라고 조심스레 변호하던 그런 날이 있었다. 다른 친구들과 차유진이 금방 친해진 게 못내 신기해서, 시선으로 차유진을 졸졸 쫓았다가 그 웃는 얼굴과 허물없는 태도에 감탄했던, 유독 차유진이 반짝여보이던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멜로디가 하나씩 늘었다. 어디에도 공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김래빈은 도취하듯 음악에 자신의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걸 조금 부끄럽게 여겼다. 사람들에게 들려줄 음악은 좋고 어울리는 것들만 다듬어 직조해야 했다. 지금 만드는 것들은 너무 사적인 조각이었다. 가끔은 가사를 떠올렸지만 굳이 붙이지 않았다. 허밍조차 들어가지 않은 멜로디 조각들이 차곡차곡 하드에 쌓였다. 김래빈은 도서관에서 봤던 과학 잡지를 떠올렸다. 외계인의 회신을 기다리며 우주로 신호를 쏘아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꾸준히, 계속. 김래빈은 그들과는 다르다. 그는 답신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우주에서 그가 쏘아올리는 메세지들은 이미 도착지가 정해져 있다. 상대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않을 종착지. 그의 감정과 추억을 집어삼켜 그 무엇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종내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거대한 블랙홀.
상상하면 아득한데, 이상하게 허망하지는 않았다. 이건 나중에 한꺼번에 지워야겠다. 날짜를 제목삼은 파일들을 보며 김래빈은 광대 근처를 슥슥 문질렀다.
다만 어떤 메세지들은, 우연히 정확한 수신처로 흘러들어가기도 한다.
MP3에 연결된 이어폰이 차유진의 한쪽 귀에 꽂혀있었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갔다 느지막히 교실로 돌아온 김래빈은 퍽 당황했다. 굳이 차유진을 위해 변명을 해 주자면,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청소하던 아이들은 그날따라 빗자루로 칼싸움이 하고 싶었고, 그 서슬에 아직 채 정돈하지 못한 김래빈 책상 위의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진 건 차유진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액정 전원이 들어온 MP3를 주워주려다 제 이름이 적힌 곡을 보게 되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날짜를 제목삼지 않은, 차유진 석 자를 담은 곡을 차유진이 듣게 된 건 그런 연유였다. 멜로디들이 고스란히 블랙홀로 흘러들어갔다. 김래빈의 기대와는 다르게 사라지지도, 집어삼켜지지도 않은 채로.
“김래빈 이거 뭐야?”
김래빈은 변명하지 않았다. 당사자가 들어버렸다는 데에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성실하고 고분고분한 태도로 답한다.
“마음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돼.”
차유진이 최초로 흔들린 건 바로 그 순간이다. 서운함이 알게모르게 그를 감돌았다. 아직은 차유진 스스로도 모를 때였다. 김래빈이 그 마음을 차유진에게 듣기까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했다.전력 60분 1회차/[블랙홀][마에스트로][시작]/청소년AU
-
음 이름
음 이름
—
- Am은 영문으로 C는 한글로 음이름을 읽어보세요
1. Am

차유진에게서 답장이 왔다. 여러 번의 시도만에 돌아온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알았어. 김래빈. 여기로 와.]
그 아래에는 영어로 된 낯선 주소가 적혀있었다. 그는 짐을 챙겼다. 먼 길이었고 챙겨야 할 짐도 많았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이제는 이력이 난 짐 싸는 일보다도 비행기표를 끊는 게 더 오래 걸렸다. 비행기 안에 비좁게 앉아 구글로 찾아본 예상 이동 경로를 중얼중얼 복습해보며 그는 비행기모드로 바꿔둔 핸드폰을 열어 자신이 받았던 메세지를 눈에 담았다. 꼼꼼하게 준비하지 못하고 즉흥적으로 뛰쳐나와버렸으니 마음이 불안해야 할텐데, 어쩐지 그보다는 안도감이 더 강했다. 아직 차유진과의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그런 감각.
11시간을 비행해 낯선 공항에 내려서 다시 샌디에이고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창 밖으로 풍경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점점 더 분위기가 낯설어졌다. 이국적인 광경을 그는 느리게 둘러보았다. 시즌 그리팅을 제작할 때였나 뮤비를 촬영할 때였나. 그들은 이 인근까지 오게 된 적이 있었다. 차유진은 한껏 들떠있었고, 자신은... 잘 모르겠다. 차유진의 집에 초대를 받았는데 가지 못했던 것만 기억났다.
'차유진은 집이니까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은 당연히 개인행동 금지야. 김래빈 너도 나가지 말고 숙소에 있어.'
김래빈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차유진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혼자 자유롭게 놀러나가면 형들이 섭섭해하실 테니까.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되뇌며 떠나는 그를 배웅했다. 차유진은 조금 아쉬워했지만 친구를 혼자 둔다는 아쉬움이 집에 간다는 기쁨을 이길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음에 좀 더 한가할 때 같이 놀러오자는 약속을 남기고 집으로 떠났다.
물론 그 뒤에도, 그들이 오래 한가할 때에도, 김래빈이 차유진의 집에 가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는 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가 상상한 차유진의 집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그와 차유진은 연습생 생활을 함께 했고, 자연스레 그의 가족이나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드문드문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김래빈이 상상한 차유진의 집은 강아지를 포함해 대가족이 살고 있는, 해변가에 가까운 마당이 딸린 주택이었다. 하지만 그가 내린 곳은 공동주택에 좀 더 가까운 형태를 가진 건물의 좁고 작은 현관 앞이었다. 바다 근처도 아니었고.
그는 뒤를 돌아보았으나 그가 타고 온 택시는 이미 야속하게 떠난 상태였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있더라도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물어볼 만한 용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했다. 아무렴 택시가 영 이상한 곳에 떨궈두었으려고. 그는 호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차유진에게 도착했다고 메세지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 초인종을 눌렀다. 삑. 소리가 짧게 울렸다가 사라질때까지도 문은 조용했다가, 그가 실례를 무릅쓰고 한 번 더 눌러야 할지 아니면 차유진에게 전화를 걸어볼지를 고민하는 사이에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녕, 차유진."
어색한 인사였다. 몇 년만이더라. 그는 상대를 응시하며 느리게 세월을 가늠했다. 그래. 그가 떠난 지 그새 최소 3~4년은 흘렀다. 다 빠진 머리 염색에 군데군데 못 보던 상처가 보였고, 조금 피곤하고 거칠어보이는 얼굴이었다.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은데도 낯설었다. 차유진은 잠깐동안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가 차유진을 훑어보는 것처럼 상대 역시 그를 뜯어보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이 지나고 나서야 들어와, 하는 낮은 목소리와 함께 차유진이 비켜섰다.
"실례하겠습니다."
습관적으로 인삿말을 주워섬기고, 그는 그 공간으로 들어섰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을 뻔 하다가 멈칫한 그는 신을 신은 채로 어색하게 발을 옮겼다. 그리 넓지 않은 그 공간은 정돈된 듯 그렇지 않은듯 조금 어수선했는데, 집의 넓이도 그러려니와 널린 물건들도 혼자 사는 게 역력한 분위기였다. 그의 가족에게 선물하려 들고왔던 것들이 무색하게도.
"...네가 독립한 줄 몰랐어."
"...나 하이스쿨 졸업하면 미리 이래야 했어. 돌아와서 새로 집 빌렸어."
단어를 찾는 것처럼 모든 대답이 반박자 느리고 어색했다. 마치 그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같았다. 한국말을 잊어가는 걸까, 하고 생각하자마자 김래빈은 조금 쓸쓸해졌다. 서로 만나지 않은 기간 동안 그와 차유진 사이의 거리는 착실하게 멀어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나씩, 서로 공유했던 것들을 떨궈가면서.
"그러면..."
지금은 뭐 해? 질문이 혀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딱히 실례가 될 만한 질문이 아닌데도 그랬다. 어쩌면 언제까지고 아이돌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차유진이 지금 와서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는 걸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싶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공간 한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유진은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냥. 나 일 해. 차 고치고..."
차를 고친다고. 김래빈은 차유진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연습생 신분이었고, 그 후에도 쭉 아이돌인 차유진만을 봐 와서일까. 아이돌이 아닌 차유진의 모습은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다만 아까부터 눈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는 가만히 상대의 목을 향해 눈짓했다.
"그럼 그 흉도 혹시 차를 고치다가 다친 거야?"
목에 길게 남은, 눈에 띄는 긁힌 자국. 제 목 언저리를 대충 더듬어본 차유진이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위험한 거 아냐. 이건 실수했어. 나 일 금방 배웠어. 지금은 잘 해."
전혀 신경쓰는 얼굴이 아니라서 김래빈은 오히려 조금 더 속상해졌다. 우리는 항상 부상을 입지 않게끔 조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부분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대충 세탁기 안에 던져둔 차유진이 냉장고에서 탄산을 꺼내 내밀었다.
"김래빈은 싱어송라이터 잘 해?"
내미는 병을 손에 쥐고 상대가 툭툭 미는 대로 걸음을 옮겨 소파에 걸터앉으면 병의 서늘한 표면에 금방 습기가 서려 손 안이 축축해졌다. 어딘가에 손을 닦지도, 물방울을 털어내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병을 쥐고 있다가 김래빈은 젖은 손 그대로 힘주어 병 뚜껑을 열었다. 칙,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병을 양손으로 쥐었다. 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탄산은 그보다는 차유진의 취향이었다. 지금도 탄산을 좋아하는 입맛만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뜻 들여다 본 냉장고 안이 탄산으로 가득했다. 몇 병인가는 맥주도 섞여있었던 것 같았지만 그는 그건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들은 이제 아이돌도, 미성년도 아니었고, 그들이 일탈을 할 것 같으면 엄하게 분위기를 잡았던 사람도 없으니까.
"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지 않았어, 차유진."
"뭐??"
"...내 역량을 다시금 검토해본 결과, 내가 그럴 만한 주제는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군대는 다녀왔고, 작곡을 시작했어. 아직 프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맙게도 이런 나에게도 곡을 맡겨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고."
말을 꺼내자 목이 타는 것도 같아서 김래빈은 손에 든 병을 기울였다. 따가울 만큼 날카로운 탄산과 들쩍지근한 맛이 기묘하게 섞인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싱어송라이터가 되지 않았다는 말에 차유진은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그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대신 의례적인 말들은 그만하자는 것처럼 직설적인 물음을 던졌다. 그가 이전에 언제나 그랬듯이.
"그래서, 김래빈 여기 왜 왔어?"
그 질문 앞에 던져져,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줄 게 있어서 왔어."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며 차유진에게 몇 번이고 메세지를 보낸 이유. 메세지를 받자마자 다른 무엇도 생각할 겨를 없이 미국으로 향했던 이유. 그는 긴장한 것처럼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다 마시지 못한 탄산 병을 협탁에 내려놓으며 가방 깊숙이에 두었던 USB를 꺼냈다. 자. 그는 손을 내밀었지만 차유진은 받지 않았다. 대신 미묘한, 혹은 애매한 얼굴로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네 곡이야. 예전에 약속했잖아."
이제야 지킨다는 게 면목 없을 만큼 오래된 약속이었다. 한번 더 권하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차유진은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받아가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그는 기어코 여기까지 들고 온 노트북을 꺼냈다.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고 폴더를 열어, 단 하나뿐인 파일을 재생했다.
"......"
노래가 재생되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래빈 역시 노래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흐르는 내내 둘은 침묵했다. 가끔 노래 사이에 얇은 벽 너머 다른 집의 소음이 슬금슬금 섞여들었지만 듣는 걸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생바가 오른쪽 끝에 다 닿을 때까지 차유진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 고요를 앞에 두고 그는 아주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김래빈, 나 곡 준다고 했어! 잊으면 안 돼!'
열 여덟. 아직 그가 언젠가 자신의 곡으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세상 어려운 것이 없던 차유진이 그에게 서스럼없이 곡을 달라고 조를 수 있던 때.
차유진은 지금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김래빈, 고마워. 그런데..."
아주 멀리 돌아 지킨 약속을 상대는 썩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착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지른 차유진은 그 앞에 선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천장의 조명을 등진 그늘진 얼굴에 뜻모를 표정을 담은 채.
"이제 필요없어. 나 이거 못 해. 나는 이제 아이돌 아냐. 무엇보다 안 하고 싶어."
"......."
그는 차유진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내렸다.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였다. 그런 답을 듣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직접 입으로 듣는 건 역시 더 숨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알아. 차유진 네가 그 때의 너와는 다르다는 거. 너는 더 할 기회가 있었지만 안 하고 돌아가기를 선택했으니까. 그리고 사실 이 곡, 완성도로만 따지자면 남에게 선물하기에는 부족한 곡이라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약속한 게 있으니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단 한 곡을 완성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연습생 시절 차유진이 조르듯 던진 한 마디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몇 년이던가. 활동하는 중간중간 틈이 나면 다듬었다가 마음에 안 들어서 엎은 적도 여러번이었다. 결국에는 계약이 종료되고 차유진이 떠날때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마음의 빚으로만 남았다. 바빠서, 아니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어차피 차유진은 없으니까. 그 핑계들을 다 물리치고 다시 곡을 잡은 건 대학을 수료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난 이후부터였다.
"왜?"
차유진이 물었다. 여전히 그의 앞에 팔짱을 끼고 선 채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높이의 차이 때문일까. 불현듯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자신이 썩 환영받지 못할 손님일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막무가내로 문자를 보냈을 때에는 떠올리지 못했던 걱정이었다.
"...나는 곡을 만들 때 그 곡을 누가 부르는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을 하는 편이야. 그런데 이건 너에게 약속한 곡이고, 그렇다면 너 외에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셈이니까..."
김래빈. 차유진이 나지막하게 그를 부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멈칫하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거면 메일로 보내도 돼. 메세지도 좋아. 그치만 김래빈 여기 왔어. 나는 그 이유 궁금해."
그거라면 답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 전, 그는 차유진을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변한 모습과 달라지지 않은 부분까지. 현관에서 스치듯 눈치챈 것들을 다시금 하나하나 바라보다가 마주친 눈을 잠시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피하듯 시선을 내리면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맺혔다. 그렇게 궁금해할 만큼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안녕! 우리 보러 왔어요?'
팬이 찍어올린 아주 예전의 영상이었다. 곡을 다듬고 있다가 참고 차 틀게 된 영상을 그는 오래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의 차유진이 어땠는지를 더 객관적으로 알고 싶어 찾게 된 영상이었다. 마지막 활동 즈음의 기억은 그렇게 오래 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항상 흐릿했고, 일기를 뒤져봐도 그 때는 남긴 말이 많이 없었다. 결국 의존할 수 있는 건 남들이 찍어 올린 기록뿐이었다. 광고, 예능, 무대. 팬들이 개인적으로 찍어 올렸던 영상들까지.
맞아. 그땐 이랬었지, 하는 마음이 반. 그때 우리가 정말로 이랬었나? 하는 마음이 반.
자신이 기억하는 활동 후반부의 차유진은 열심히 하다가도 가끔 지치고 가라앉고 날선 모습이었는데, 영상에서는 훨씬 희망차고 밝고 유쾌한 얼굴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일까. 그걸 본 뒤로 도리어 그가 기억하는 차유진과 영상 속 그의 모습이 뒤섞여 음악이 얼룩덜룩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차유진의 얼굴이 점점 더 가물가물 흐려져서.
"그냥.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으니 갑자기 메세지나 메일로만 선물이라고 곡을 보내는 건 아무래도 몰상식한 일이잖아. 그리고, 네가 보고싶기도 했고."
지금의 차유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직접 보고싶었다. 얼마나 변했는지. 지금은 괜찮아졌는지. 핑계처럼. 충동처럼.
그는 파일을 다시 갈무리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USB는 빼서 잠시 옆에 올려두었다. 받지 않는 사람에게 선물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차유진이 기어코 받지 않겠다면 이대로 다시 들고갈 생각이었다.
"그럼 김래빈 진짜 그거 주러 온 거야?"
"응."
"....숙소는?"
"거기까지는..."
그도 그가 대책없이 왔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멋적게 말끝을 흐린 그 말에 김래빈에게 서스럼없이 바보라 부르며 장난치던 아주 예전의 차유진 얼굴이 잠깐 돌아왔다가 곧 사라졌다. 한숨을 푹 쉬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가 팔짱을 풀고는 소파를 훌쩍 건너 무언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곧 그의 눈앞에 하나, 둘 옷가지가 쌓이고, 차유진이 몇 모금 비워지지 않은 병을 치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김래빈 오늘 여기서 자.
저녁은 간단하게 먹었다. 차유진의 스튜디오는 좁아서 여분의 손님방이 없었고, 그와 김래빈은 한참을 설왕설래한 끝에 차유진이 소파에서 자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김래빈은 자기가 갑자기 찾아와 벌어진 일이니 자신이 소파에 자겠다고 의견을 피력했지만 나를 손님 대접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차유진의 말은 이길 수 없었다. 불을 끄고 각자의 자리에 누우면 길게 적막이 흘렀다.
예전에는 이럴 때 별 거 아닌 이야기들을 떠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아주 오래 전의 일을 떠올렸다. 활동 초기까지만 해도 둘은 자주 밤을 새가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하기야 지금은 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류청우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안부는 알 길이 없었고, 그동안의 일을 묻기에는 조금 전 이미 같은 주제로 대화를 했다. 그는 도리없이 눈을 감았다. 다시 돌아가는 긴 비행 시간을 버티려면 자 두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밤을 새고도 멀쩡하게 무대를 뛸 수 있을 체력이 아니었다. 군대에서도 기초적인 체력 단련은 성실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이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어떻게 하지.'
박차고 떠나올 때는 잊고 있던 뒤늦은 현실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김래빈."
그는 눈을 뜨고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 차유진은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천장, 그리고 벽을 한 번 바라봤다가 그는 대답했다. 응.
"할머니 일은, ....유감, 그래. 유감이야. 나 그때 못 갔어. 미안해. 늦게 알았어."
자그마한 목소리가 조심스레 건너왔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가 숨죽인 채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때 메세지 보내줬잖아. 괜찮아. 너는 멀리 사니까 오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알리지 않았던 거고."
할머니는 그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병이 재발했고, 그 이후로 그대로 깨어나지 못했다. 처음 발작이 일어났을 때에는 활동 때문에 곁을 지키지 못해 많이 울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임종 때까지 옆에 있으면서 이별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의 고모는 할머니 장례를 치르며 내내 통곡했다. 할머니께 생전에 못해준 게 너무 마음에 걸린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니 할아버지만큼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지내고 싶다고 해서 결국 할아버지는 하우스를 정리하고 고모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할아버지도 슬슬 허리가 안 좋으시고 고모의 집은 큰 병원에서 가까우니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다.
그는 저를 걱정하는 할아버지께 걱정 말라고 고개를 젓고는 곧 자취방을 얻어 나왔다. 하지만 가끔은 그리웠다. 강원도의 그 집은 오랫동안 그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스티어가 계약을 종료했을 때에도 그는 섭섭했지만 돌아갈 곳이 있어 아득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그것마저 없었다. 김래빈의 20대는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들도 언젠가는 사라지리라는 걸 깨닫는 시기인 모양이었다. 그룹도, 가족도, 친구도, 그리고 꿈도.
"김래빈 그 때 많이 울었어?"
"아냐. 조금밖에는. 장례를 치를 때 어른들을 도와드려야 할 게 많아서 바빴어. 슬펐지만... 슬프다고 손님맞이를 내팽개칠 수는 없으니까. 일하다보니 괜찮아졌고... 진짜야.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그 과정을 거치며 김래빈은 예전과는 달리 감정을 감추는 데 조금 능숙해졌다. 그는 차유진에게 하지 못할 말을 삼켰다. 사실 나 그때, 차유진 네가 많이 필요했어. 네가 가르쳐 줬잖아. 생각을 비우고 싶을 때 쉽사리 생각을 지우는 방법.
시작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스티어 시절 그들은 종종 섹스했다. 소리는 죽인 채로. 조금 거칠고 급하게. 사귀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몸을 맞붙이는 데 가까웠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싶지만 그 때는 그게 나름대로의 위안이었다. 그때의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김래빈은 뒤늦게 적당한 비유를 떠올렸다. 탄산 같았다. 몸에 안 좋고, 그래도 종종 생각나고, 따가운데 끈적거릴 만큼 들쩍지근하기도 한.
그 비틀린 관계가 그때만큼은 이상하게도 자꾸 떠올랐다. 그 행위가 그리운 건지 남의 온기가 그리운 건지 차유진이 그리운 건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하지만 그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차유진이 그런 식으로 제게 붙들릴 이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도 차유진을 붙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고.
"김래빈."
차유진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는 응, 하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예전 차유진의 얼굴과 영상 속 차유진의 얼굴과 지금 차유진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오르다가 서서히 지금의, 낯선 얼굴만이 남았다. 그가 모르는 세월을 살아낸. 그 기간동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그리고는 잠과 함께 천천히 사라졌다.
다음날 김래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차유진은 그래도 마지막에는 USB를 받아갔다.
그 뒤로 둘은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다.
2. C

그 날 차유진은 김래빈에게 외로웠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게 묻지 못한 건 하필 그 때 적절한 단어가 기억나지 않아서였다. 한때는 모국어보다도 더 자주 쓰던 언어였는데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드문드문 말이 어색했다. 불도 다 끈 상황에서 핸드폰을 들어 단어를 굳이 찾아보는 것도 이상해서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 사이 김래빈은 잠들어버려 그는 결국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가 돌아간 뒤 차유진은 김래빈을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많은 게시물 중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몰라서 일단은 뉴스 기사부터 살펴보았는데 스티어 활동 종료 이후에는 이렇다 할 기사가 없었다. 김래빈은 그의 말대로, 정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귀도 깨끗했지, 김래빈...'
피어싱은 말하자면 김래빈의 각오 같은 거였다. 답도 없는 원칙주의자에 때로는 어른들보다 더 고지식하고 꽉 막혔는데도 오로지 아이돌로서의 이미지를 위해 귀에 주렁주렁 매다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모두가 그랬겠지만 김래빈은 특히나 더 진심이었고, 그만큼 열심히 했다.
'그래도 김래빈은 어떻게든 끝까지 무대 위에 남아있을 줄 알았는데.'
그에게 김래빈은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과거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지막 보루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포기였고 차유진은 조금 허망해졌다.
그는 김래빈이 두고 간 USB 속 곡을 다시 재생해보았다. 솔로 아이돌에 어울릴만한, 화려하고 강렬한 노래가 울려퍼졌다. 김래빈은 여전히 김래빈이라서, 선물하기엔 부족한 곡이라 평가한 이유를 차유진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그에게는 종종 한국으로부터의 메일이 도착했는데, 그런 날에는 유독 그 곡이 듣고 싶었다. 그렇게 반복해 듣다보면 이 곡을 혼자 듣는 게 아까웠고, 아주 가끔은 예전처럼 온 몸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이 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춤도 노래도 놓은지 이미 몇 년 째. 그의 몸도 목소리도, 더이상은 가수의 것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음을 따라 허밍해봤다가 매끄럽게 올라가지 못하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그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진짜로 정신차릴 때도 됐잖아, 차유진.
그 사이 주고받은 메일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김래빈이 보낸 메일은 그가 가끔 쓰던 일기처럼 여전히 장문이고, 시시콜콜하고, 어려운 말이 많았다. 그는 마음이 내킬 때 느릿느릿 답장을 보냈고, 답장을 보내면 또 이야기가 돌아왔다. 아주아주 긴 이야기들이 몇 번을 오갔다. 그때쯤에는 더이상 스티어 때의 기억이 불편하지 않았다. 잊고 있던 버릇, 특유의 습관, 조금 달라진 모습. 메일에서 지금의 김래빈이 읽히면 읽힐수록 김래빈과 스티어 사이의 연결도 점점 흐려졌다.
'비는 시간에 취미삼아 재즈를 건드려봤는데 너무 오랜만에 작곡을 해서인지 결과물이 썩 만족스럽지 않아 마음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 상담선생님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어차피 취미라면 실패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냐고 나에게 되물으시는 거야.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는 말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팀에서 오랫동안 좋은 곡을 만들어내는 데 실패해왔고, 그 결과는 팀의 성적이랑 직결되니까. 그래서 쉽게 낙담했던 것 같아. 지금은 예전보다는 평가에 덜 흔들리는 것 같아. 물론 더욱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정진해야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김래빈은 여전히 작곡을 했고, 또 가족의 권유로 상담을 시작했다는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김래빈은 아주 오래된 친구로 되돌아오기도 했고, 어느 날에는 옛 사랑의 흔적을 더듬는 것처럼 마음이 아렸다. 그런 날엔 차유진은 김래빈이 준 노래의 가사를 제멋대로 사랑 노래로 개사했다.
김래빈은 모를 거다. 차유진은 아주 예전부터 그를 꽤 좋아했다. 그래서 더 보고싶지 않았고, 몇번쯤은 일부러 연락을 무시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메일에서 읽히는 김래빈이 점점 단단해져갈수록 차유진 본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꼭 김래빈과 제가 한몸인 것처럼. 여전히 그는 카센터에서 일했고 아이돌 쪽은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찌뿌둥할 때에는 옛날 버릇대로 스트레칭을 했고 가끔은 틀어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흥얼거렸다. 김래빈의 커리어가 하나둘씩 자리잡아갈 즈음엔 그도 다음에는 뭘 배워볼지 고민하며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언제까지고 계속 정비공으로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들은 계속 메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보내는 메일에는 점점 다정한 말들이 늘었고, 그러면 김래빈은 또 문장 사이에 염려와 제멋대로의 잔소리와 온기와 그만큼의 사랑스러움을 한가득 담아 보냈다. 자주 만나지 않아도 사랑하는게 가능할까. 십 대의 차유진은 그 말을 비웃었는데 삼십대가 된 차유진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처럼 잔잔한 마음이었다. 보고싶은 마음이 물결처럼 일어도 이제 차유진은 그 동요를 관조하며 덤덤히 내가 꼭 그만큼 김래빈을 좋아하는구나, 읊조릴 수 있었다.
그래서 김래빈이 다시 그에게 찾아오겠다고 했을 때 차유진은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오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그가 올 용건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슨일일까, 궁금해하며.
"이번에는 조금 다른 곡이야."
김래빈의 뒷머리는 어느새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노트북에 USB를 연결하는 뒷모습을 차유진은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면 이전과는 다르게 단조로운 음악이었다. 하지만 듣기 좋았고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느리고 쓸쓸하고 귀에 쉽게 들리는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차유진은 그 노래가 자신에게 편한 음역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노래를 그만둔 지금의 차유진조차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김래빈은 패드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악보가 띄워져 있었다. 다행이 악보를 읽는 방법은 아직 잊어버리지 않았다. 차유진의 눈이 음표를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이 그 위를 짚었다.
"이 곡의 메인 멜로디, 혹은 코드는 파와 도로 이루어져있어."
파-도. 김래빈이 천천히 발음하는 음계는 마치 한 단어처럼 들렸다.
"웹에 취미로 올리는 곡들 중 하나로 예정했던 거라 처음 음을 찍었을 때만 해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곡 설명을 쓰려고 메모장을 켠 순간 떠올랐어. 이걸 음이름으로 읽으면 영어로는 F랑 C지만, 한글 음이름으로는... 바- 다라고 읽어."
악보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음표 한 쌍을 김래빈의 손이 유연히 따라갔다. 파도, 그리고 바다. 그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차유진의 귀에서 철썩이는 환청이 맴돌았다. 그는 돌아온 이후 오랫동안 바다를 보러 가지 않았다. 평화로운 해변의 모습과 즐거운 사람들을 보고싶지 않았던 건 물론이려니와 바다를 보면 예전을, 후회를 자꾸 되짚어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점점 그에게서 멀어졌던 소리와 광경이 한순간에 다가왔다. 그 위로 상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얹혔다.
"그걸 안 순간에, 차유진 네가 너무 보고싶었어. 그래서 왔어. 이걸 들려주고 싶어서."
너는 바다를 좋아했잖아. 웃음기마저 담겨있는 목소리였는데도, 차유진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김래빈. 그는 잠기려는 목을 가다듬어가며 상대를 불렀다.
"우리 바다 보러 가자. 여기서 오래 안 걸려. 나 차 있어. 그러니까, 같이 가. 나랑."
김래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근처 해변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었다. 저멀리 지평선이 빛에 반짝이는 시간, 사람들은 맥주를 들고 느긋하게 돌아다녔다. 몰랐는데 김래빈은 기타도 가져온 모양이었다. 모래사장에 대충 주저앉아 그에게 들려주었던 곡을 연주하다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손이 멎었다. 그간 메일을 통해 어느정도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 차유진은 그에게서 기타를 뺏어들었다.
"너 기타 칠 줄 알아?"
"조금. 근데 나 잘 못해. 듣고 웃으면 김래빈 미워할 거야."
서툰 손이 몇 번 엉망으로 음을 튕겼다. 미심쩍은듯이 그를 응시하는 그 시선을 피해 차유진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 겨우 코드를 짚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 연주가 되지 못할 음의 조각들이 듬성듬성 떨어졌다. 어쿠스틱기타로는 어차피 연주하지 못할 곡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기준을 잡을 음이 필요했다. 아주 예전에 김래빈이 그에게 가져왔던 노래를 차유진은 가능한 만큼만 불렀다. 엉망이었고, 제멋대로에, 랩으로 된 파트는 다 잘라먹었다. 그래도 김래빈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주변에서 야유에 가까운 휘파람이 들렸다. 그는 씩 웃으며 우스꽝스럽게 인사했다.
"...그 곡은, 반기지 않아서 어디다 두고 잊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거 맞아. 나 아이돌 아니야. 그래서 내 곡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생각 틀렸지?"
"응. 아이돌을 그만뒀더라도 그건 네 곡이었어. 이것도 마찬가지고."
그는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어. 그래서 불렀어. 김래빈이 준 거니까."
기타를 품에 끌어안듯 잡아 그는 고개를 기댔다. 어쩌면 이것도 무대였고, 어쩌면 이것도 노래였다. 그리운 음악의 한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는 상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캘리포니아의 노을이 그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는 아주 오래된 과거를 끌어올렸다.
"김래빈."
"응."
"내가 섹스하자고 했을 때, 왜 거절 안 했어?"
섹스라는 말에 깜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는 건 여전했다. 그는 가만히 대답을 기다렸다. 김래빈은 그런 쪽으로는 한층 깐깐했기에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상하리만큼 순순한 태도로 차유진을 받아들였다. 가끔은 먼저 덤벼들기도 했다. 위안의 명목으로 서로가 몸을 갈취하던 시절, 그때부터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괜한 의문을 불러일으켜 아슬아슬한 합의를 깨고싶지 않았다. 어리고, 영악한 셈이었다.
귀가 발개질만도 했는데 김래빈은 생각보다 침착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조금 아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나는 위로가 서툴고 너는 뭐든 몸으로 겪어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네가 그런 방식의 위로라도 필요한 것 같아 시작했는데...."
나나 네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었겠지만 우린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덧붙는 말은 역시나 김래빈다웠다.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래. 그게 나한테도 필요했어."
김래빈에게도 필요했구나. 그는 속삭였다.
쉴 새없이, 온화하게 파도가 밀려들어왔다. 공백을 메우는 그 소리를 귀기울여 들으며 차유진은 그때의 김래빈을 다시 어림짐작했다. 20대의 자신이 무심코 넘겼을 장면을 30대의 눈으로 다시 돌아보고 곱씹었다. 나는 그때 네가 참 한결같고 부지런하게 무던해서, 곡에 그렇게 예민한 예술가치고는 일상에 무뎌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김래빈도 제 생각보다 조금 더 금 가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김래빈은 위안을 얻었을까.
차유진은 던지듯 입을 열었다. 김래빈. 나는 필요해서 하자고 한 거 아니었어.
"나 그때 비겁했어."
그때는 꺼내지 못했던 휴대폰을 차유진은 뒤늦게 꺼내들었다. 단어를 치면 한글로 번역된 말이 떠올랐다. 편법.
"나 편법 했어. 제대로 하려면 나 김래빈 좋아한다고 했어야 해. 그런데 안 그랬어."
핑계는 많았다. 그럴 수 없었던 분위기, 모자랐던 여유. 어리고 서툰 사이, 자존심. 그런 건 아닐 거라 생각했던 자만, 불안한 관계에 대한 두려움, 안그래도 쏟아져내릴 고민에 또 하나를 더해주고 싶지 않았던 연민.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비틀린 관계를 되돌릴 방법은 끊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까지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미안. 그는 평온한 바다를 보며 중얼거렸다. 김래빈의 답을 가늠할 수 없어서 그쪽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김래빈은 한참 답이 없더니 하지만, 하고 말문을 열었다.
"네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어, 차유진. 그래. 네가 한 일이 적절한 행동인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나는 괜찮았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나도 어쩌면. 김래빈은 불현듯 말을 꺼냈다가 그 한 마디를 완성하지 않은 채 입을 닫았다. 둘은 해가 다 질 때까지 거기에 앉아 바다를 봤다. 희미한 감정과 맺지 않은 결론들이 그들의 사이를 떠돌도록 내버려두면서. 이번에는 숙소 잡고 왔냐고, 차유진이 좀 더 후련해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꺼내기 전까지.
김래빈은 이번에는 숙소 잡는 걸 잊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그는 숙소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검색했다. 우연이겠지만 숙소는 그 해변에서 아주 가까웠다. 차유진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철회하고 그와 같이 해변가를 걸었다.
"다음에도 또 올 거야?"
밤의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지나가듯 물었다. 호텔의 문 앞에 서서, 김래빈은 그를 돌아보았다.
"응. 그치만 아주 자주 오지는 못할 거야. 우리는 또래보다는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게 흥청망청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썩 나쁘지 않은 답이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다음에 올 땐 우리집도 가 보자. 아주 뒤늦은 약속을 이번에는 제 쪽에서 꺼내놓으며. 어릴적만큼 밤을 새워 이야기하기는 힘들겠지. 그래도 같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그냥 좁은 침대에 우겨 잘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그가 먼저 한국에 돌아가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좀 더 괜찮아진 후의 그와 김래빈은 어떤 형태로든 함께 있을 것도 같았다.
"김래빈."
그는 상대를 불렀다. 이번엔 잘 있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나중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스티어 시절 그대로 막내들이 나이를 먹었다면… / 약 30세 전후 스티어 유진래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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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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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10. 25~2022. 11. 02. 트위터에 짧게 남겼던 글을 백업 용도로 다듬어 정리함.
1.
인간의 애착은 종종 오묘한 데가 있다고, 김래빈은 제게 온 의뢰서를 읽으며 오래된 감상을 떠올렸다. 애착이란 무엇인가. 그건 단순히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와는 달랐다. 인간은 제 애착의 대상을 아끼고 돌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 대상과 소통하고 감정을 나눴다고 믿는다. 여기서 그 대상이 실제로 상호 소통이 가능한지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불, 인형, 가전제품, 그리고 안드로이드까지. 생물을 모방하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많은 것들에 인간은 속절없이 정을 주고 그 대상이 자신의 옆에서 영속하기를 바란다.
김래빈은 그 애착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형 안드로이드를 전문으로 수리하는 사람이었다. 구형 안드로이드란 생산이 중단되어 더이상 생산기업에서 A/S를 제공해주지 않거나 부품을 만들어주지 않는 안드로이드를 통칭했다. 구형 안드로이드가 생산될 시기에는 아직 생산체계가 규격화되지 않아 제조회사별로 각각 특징이 다른 데다, 현재의 안드로이드와 명령 체계, 회로, 부품 종류가 전혀 다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니 수리하기 위해서는 부품을 확보하는 것부터 관건이었다.
오로지 끈기 하나로 제게 들어온 의뢰를 반절 정도는 성공시킨다는 점에서, 그는 그럭저럭 실력 좋은 수리공으로 평가받았다. 나머지 반의 의뢰는 글쎄. 그조차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실패하는 의뢰의 한 반 정도는 아무리 노력해도 호환되는 부품을 찾을 수 없거나 만들 수 없는 경우였고, 나머지 반은 아무리 그라도 손댈 수 없는 안드로이드의 본질적인 중추 시스템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건... 후자지.'
그는 그의 앞에 놓인, 정확히는 앉아있는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인간처럼 생기를 머금은 눈이 느릿하게 깜박이며 주변을 훑었다. 외양만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작동과 기능에도 별다른 이상이 없다. 문제는 사고체계였다.
"차유진."
혹은 유진 이그나시오 차. 김래빈은 안드로이드에게 전 주인이 부여한 이름을 불러보았다. 주변을 흥미로운 듯 바라보던 시선이 이름에 반응해 재깍 그에게 닿았다. 반응 속도는 놀랍게도 빠르지만 사실 그에게 안드로이드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수리를 위해서는 이름보다 제품명과 버전 정보를 아는 것이 우선이었다. 김래빈은 주인이 의뢰서에 함께 적어 보낸 안드로이드의 제품명과 버전 정보를 훑었다. 익숙한 품번이었다. 이 제품군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때는 그 때문에 리콜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던.
"고객님이 예상하셨던 것처럼, 인간화가 지나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미 리콜 조치가 취해진 시점에서 제조사로부터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음은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김래빈은 1차 점검 결과를 의뢰인에게 보내기 위해 창을 띄웠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음성이 문자로 변환되었다.
안드로이드는 점점 더 인간을 닮아가도록 진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인간과 같은 생김새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는 건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 인간과는 다르면서도 완전히 동일해 보이는 개체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안드로이드에게 정을 붙였던 많은 주인들은 고작 그런 이유로 반품할 수 없다며 리콜을 거부했다.
리콜을 거부했던 수많은 안드로이드 주인들은 제각각의 이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안드로이드의 인간화를 제어할 수 있을 거라 믿었고, 어떤 사람은 안드로이드가 지나치게 인간처럼 변해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성공했으리라. 하지만 이 의뢰인은 아니었다. 의뢰서에 적지 않은 그들의 과거를 김래빈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기꺼웠겠지. 사랑스러웠겠지. 자신을 모방하고 그래서 점점 닮은 모양새로 정교해지는 것이. 그리고 어느 순간 꺼림직해졌을 것이다. 이미 사고체계를 갖춘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학습해 점점 더 인간다워지는 과정을 주인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화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문제는 안드로이드 스스로가 신경회로를 들여다보길 거부하고 있습니다. 억지력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평소 안드로이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의 범위를 넓게 풀어두셨던 것 같은데, 이 경우 수리공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작업대에 걸터앉아 발을 간헐적으로 까닥이며, 안드로이드는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래도 김래빈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상대는 안드로이드다. 수리공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명제를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수단을 써서 메세지를 남길 수 있는 걸 굳이 음성을 통해 남기는 이유였다.
"별도의 연락이 없으면 사전에 기재하셨던 대로 자체적으로 처분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메세지를 송신했다. 그리고 긴 한숨을 쉬었다. 안드로이드는 김래빈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IGN-C5ii형 0306-477. 혹은 차유진이나 유진 이그나시오 차. 그에겐 전자가 익숙했고 안드로이드는 자신을 후자의 인격체라고 주장했다.
"나 폐기할 거야, 정말로?"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눈 앞의 안드로이드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눈썹을 늘어뜨리며 한번 더 물었다.
"왜 대답 없어?"
그래도 대답이 없자 입술을 비죽인다. 기본적으로 설정되는 안드로이드의 성격과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활기차고 분위기 파악과 표정 변화가 능수능란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인간' 같았다. 김래빈은 입을 다문 채 그를 가만히 관찰했다.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처음 기동할 때에는 기본적으로 설정된 몇 가지 중 한 유형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그 이후부터는 주변 환경과 주인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기 시작한다. 얼마나 섬세해지는지, 얼마나 인간을 잘 모방하는지는 안드로이드의 기본적인 성능 외에도 주변과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는다.
"김래빈?"
'차유진'은 여기 온 첫 날에 이미 작업대 위에 놓인 명함을 제멋대로 집어올렸고, 이름과 하는 일을 파악한 후에는 그의 신상을 그럴듯하게 추론해냈다. 그와의 몇 번의 대화, 그리고 며칠간의 생활이 제공된 정보의 전부이며 그가 구형 안드로이드라는 걸 감안하면 무시무시한 연산능력이었다.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 김래빈 어차피 마음 약해서 제대로 폐기하지도 못하잖아."
그러니 '차유진'이 그가 수리가 불가능한 안드로이드를 그 즉시 내버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내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작업대에서 가볍게 내려선 안드로이드가 그에게 다가왔다. 허리를 굽혀 눈을 마주치고, 손으로 뺨을 쥔다. 안드로이드 특유의 미적지근한 온기가 김래빈을 감쌌다.
"나 김래빈 마음에 들어. 이런 거 첫눈에 반했다고 해?"
생존을 갈구하는 달콤하고 텅 빈 말들이 미형인 것으로 유명했던 그 특유의 웃는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그 손을 가만히 내버려둔 채, 그는 안드로이드의 인공 각막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약간의 물기가 어려 더욱 사람같은 그 각막 안쪽으로는 안드로이드의 모든 사고체계를 관장하는 신경회로가 뇌마냥 위치해있을 것이다. 김래빈은 수리를 위해 그걸 들여다보고자 했지만 안드로이드는 한번도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김래빈은 악력도, 신체 능력도 차유진보다 떨어졌고, 안드로이드를 강제로 셧다운시키는 차단기는 차마 사용할 수 없었다.
"안드로이드에게는 호오가 없어. 애초에 기본적인 취향도 설정값에 불과해. 그러니 필요하다면 언제든 자체적으로 바꿀 수 있지. 감정은 더더욱 불가능해. 유사한 신체반응을 모사할 순 있어도."
그러니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아. 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눈썹을 느리게 깜박인 차유진이 손을 물렸다.
"...김래빈 낭만이라는 거 없어? 말하는 게 나보다 안드로이드같아."
안드로이드가 인간에게 던진 말에 김래빈은 웃지 못했다. 안드로이드를 수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고체계를 이해해야 했다. 때로는 인간보다 안드로이드의 사고과정이 더 합리적이고 명쾌했고, 그들이 내린 결론을 이해하고 그들과 같은 결론을 내려고 노력하다보면 그들의 사고과정에 어느 정도는 동화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습관적으로 사고하게 된 지도 오래. 김래빈은 가끔 자신이 인간인지, 혹은 어쩌다 유기체의 형상을 하게 된 안드로이드인지 알 수 없다고 자조했다.
다만 감정은 인간만의 것이기에.
"차유진."
김래빈은 오직 그 이유로 자신이 여전히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제 앞에 선 안드로이드가 부질없이 던지는 말들이 슬펐다. 그는 고작 약간의 유예를 위해 인간의 불확실한 감정에 매달리는 차유진을, 안드로이드를 연민했다. 안드로이드는 스스로를 고장내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안드로이드를 고장내는 건 항상 인간이었다. 사랑을 너무 주어서, 그러다가 제멋대로 내팽겨처서, 같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실수로, 사고로.
차유진이 망가진 것 역시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도 그는 언젠가 폐기되어야 했다. 그의 주인이 그를 책임지기를 포기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위협이 될 거라고 믿어서. 그러니 약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사실은 의미가 없다.
"굳이 나를 설득할 필요 없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완전히 동작할 수 없게 되기까지는 여기 머물러도 되니까."
자체적인 처분이란 그런 뜻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은 그 집에서 시간을 소모하다 끝내는 기동을 멈추었다.
그 시간은 안드로이드보다는 그를 위한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는 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개념도, 죽음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실을 두려워하는 건 결국엔 인간이다. 김래빈도 인간이라서, 제게 맡겨진 기계들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기지 않기가 어려웠다. 김래빈은 안드로이드들이 기동을 멈추는 동안 그들이 안드로이드임을 곱씹으며 천천히 그들과 이별했다.
그래서 그의 집은 거대한 무덤이었다.
2.
김래빈은 단종된 안드로이드의 부품을 찾기 위해 종종 거대한 폐기장을 찾았다. 그곳에는 부서진 기계더미들이 즐비했고 그 안을 뒤지다보면 간혹은 예전에 생산이 중단된 부품을 찾을 수 있었다. 확률은 극히 낮아 지루한 작업이었다. 차유진은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라와 몇 번 더미를 뒤적이는 시늉을 하더니 그게 얼마나 생산성없는 활동인지를 금방 알아챈 모양이었다. 차유진은 그를 내버려둔 채 높인 쌓인 기계더미에 훌쩍 뛰어올라 몇번 슥슥 발을 굴러보더니 그 자리에 냉큼 주저앉았다.
"꼭 그 부품을 써야 해? 기능이 동일하면 되잖아."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점에서 차유진은 뛰어난 개체가 맞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예컨대 감정이나 심리와 같은 문제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김래빈은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일어서 굽혔던 허리를 쭉 펴고는 입을 열었다. 작동의 문제로만 보면 그렇지.
"그렇지만 대부분의 안드로이드 소유자들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부품을 정도 이상으로 장착한 안드로이드를 보면 위화감을 느낀다고 해. 자신이 애착을 가졌던 그 대상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거지."
"생김새만으로 그렇게 판단하는 거 이상해. 그럼 수리하는 것도 문제 아냐? 어디까지가 동일한 개첸데?"
"그건 안드로이드 주인마다 달라."
의뢰를 할 때 양해를 구하긴 하지만, 까다로운 작업이야. 김래빈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커다란 고철 더미를 옆으로 밀었다. 찾던 것과 유사한 부품이 틈새에 끼어있었다. 하나를 찾았으니 같은 제조사의 다른 부품을 찾을 확률도 높아졌다. 그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상대의 본질적인 부분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생김새일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고."
복잡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차유진이 아예 폐기물 위에 드러누웠다. 그가 누운 장소가 폐기물이라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 태도였다.
"김래빈 본질은 뭔데?"
되돌아온 질문에 그는 더미를 뒤지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확실히 대화의 범위나 반응 양상이 풍부했다. 어떻게 구형 안드로이드 주제에 회로에 부하가 걸리지도 않은 채 그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 걸까. 그는 고개를 들어 차유진, 정확히는 그 얼굴 거죽 안에 들어있을 회로 부근을 미심쩍은 눈으로 더듬거리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수리하는 건 분명 안드로이드인데, 안드로이드를 수리하다보면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과 가장 닮은 존재라서일까.
"...나도 모르겠어."
인간은 언젠가 늙고, 외모는 시시때때로 바뀐다. 성격 역시 예전의 김래빈과 지금의 김래빈이 같지 않을 것이다. 취향, 습관, 인간관계,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시간 앞에 변하지 않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김래빈을 이루는 본질적인 부분은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게 영혼에 있다고 믿었지만 그는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인간들은 그런 생각 많이 하던데."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그는 차유진의 말에 대답하며 조금 웃었다.
존재를 고민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자기 자신보다 당장 내일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만 김래빈은 방금의 대화를 통해 차유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개 부유한 사람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하지는 않았다. 차유진의 주인은 그런 주제를 퍽 즐겨 말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사람이라 안드로이드의 자기 제어 능력도 그렇게 자유롭게 설정해두었던 걸까.
"정체성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야. 주인이 안드로이드를 가늠하듯, 인간도 사회적인 동물이라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남들이 나를 무엇으로 보느냐도 중요하거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차유진은 그제야 연산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안드로이드같은 표정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워."
"내가 아무리 나 스스로를 김래빈이라고 인식해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나는 사회적으로 김래빈이라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뜻이야."
차유진은 한참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 없었다. 그 적막함 속에서 김래빈은 하던 작업을 이어나갔다. 단순작업이라 생각을 이어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는 차유진을 생각했다. 스스로를 인격체라고 주장하는 안드로이드. 그에게 오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차유진의 주장은 계속해서 부정당했겠지. 인간조차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부정당한다면 자아를 확고하게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 차유진은 여전히 자신이 인간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했다.
김래빈은 그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그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정작 인간인 그는 스스로의 인간성을 매양 재확인해야 하는데도.
"그러면 김래빈."
차유진이 몸을 일으키더니 폐기물 더미 위해서 훌쩍 뛰어내렸다. 쿵, 하고 지면이 울렸다. 인간의 몸보다 충격을 더 잘 흡수하도록 설계된 안드로이드의 몸뚱아리는, 인간이라면 제법 무리가 갔을 높이에서 뛰어내리고도 절뚝임 없이 움직였다. 그에게 다가온 차유진이 그 옆에 쪼그려앉았다.
"김래빈한테 차유진은 어디까지 교체되어도 차유진이야?"
네가 생각하는 차유진의 본질을 말해줘. 김래빈에겐 차유진의 그 말이 그렇게 들렸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 눈에 시선을 마주치며, 그는 느리게 손을 뻗어 그 안드로이드의 머리를 몇 번 쓸어넘겼다.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감촉을 지니도록 설계된 모발이 그의 손가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론상으로는, 안드로이드는 다른 기체에 옮겨가더라도 그 신경회로가 완전히 보존된 채라면 동일한 개체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연구를 진행했을 땐 다른 몸에 옮겨진 신경회로가 몸에 적응하는 과정 중에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연상작용을 보인다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그 안드로이드는 동일한 개체일까, 아니면 완전히 달라진 개체일까. 사람들은 연구결과를 두고 끊임없이 토론했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질없는 의문이 되었다. 안드로이드는 자아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연구결과로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수한 안드로이드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김래빈은 나름대로의 기준을 만들었다.
"나는 너를 더 이상 수리할 생각이 없어. 그래도 답이 궁금하다면, 그래. 네가 너 스스로를 차유진이라고 주장하는 이상, 그리고 나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이상은 넌 차유진이야."
그렇구나. 차유진은 웃었지만, 그 직후 튀어나온 결론은 꽤 생뚱맞았다.
"그래도 나는 부품교체 없이 이대로 죽을래!"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다니까..."
휘파람을 불며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차유진의 등을 바라보면서, 그는 모은 부품을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인간화된 안드로이드의 문제가 처음 대두했을 때, 리콜로 수거한 안드로이드들을 회사가 폐기하는 모습은 소소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감정과 인지능력이 생겨난 것이 인간화이니, 안드로이드의 폐기는 살인행위와 같다며 회사를 비판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제까지 한번도 인간화된 안드로이드의 폐기를 살인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어떤 안드로이드도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니 차유진이 제 구동 종료를 죽음으로 표현하는 건 법률적으로 어폐가 있었다. 김래빈은 머리로, 머리만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부품을 고쳐안으며 한숨을 삼켰다. 세상을 0과 1로만 판단했다던 옛 컴퓨터처럼 무감하게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선을 그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못해 그는 차유진의 말을 고치지 못했고, 그러지 못해 그는 사람을 떠나보내듯 안드로이드들이 그의 집에서 천천히 기능이 마비되어 끝내는 구동을 멈추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차유진 역시 언젠가는 그런 종료시점을 맞을 거라면, 김래빈은 그걸 죽음이라고 표현해주고 싶었다.
3.
차유진이 가동을 완전히 중지했다. 그에게로 온 후 꼭 3년만이었다.
김래빈은 차유진이 종종 입에 담았던 대로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고 안드로이드의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구형 안드로이드에 정통했던 만큼 그는 언제부턴가 차유진이 언제쯤 완전히 구동을 중지할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막상 차유진의 마지막이 왔을 때, 김래빈은 마치 오래 기다려온 일이 실현된 것처럼 홀가분하고 허망하기까지 했다.
그는 차유진을 분해했다. 항상 하던 일이라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쓸 수 있을 것 같은 몇 가지 부품을 따로 떼어놓고 쓸 수 없는 부품은 폐기를 위해 한 군데 모아두고 나자, 차유진이 끝까지 보이지 않으려 했던 그의 신경회로만이 남았다. 김래빈은 그 회로를 만지작거렸다.
"......"
차유진은 그가 회로를 들여다보아도 그를 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그걸 들여다볼 수 있었다.
'차유진은 원하지 않았지.'
그는 제가 떠올린 구절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원하다. 안드로이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의지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이드는 종종 인간을 모방하여 욕구를 표현했지만, 그건 주인의 성향과 관리방식에 따른 것일 뿐 근본적인 욕망을 가진 존재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니 설령 안드로이드의 표현에 반하여 그 사고과정과 기억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어떤 윤리적 문제도 생겨나지 않았다. 하물며 김래빈은 차유진에게 그가 죽은 후에도 기억을 들여다보지 않겠노라고 약속한 적도 없었다.
분석기계에 연결해두어 조작만 한다면 차유진의 모든 기억과 사고과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어쩐지 섣불리 회로에 손댈 수 없었다.
'원래는 인간화가 가속된 과정을 분석해보려고 했지만...'
그는 손을 쥐었다 폈다. 목적의식은 이미 흐려진 지 오래였다. 차유진이 그에게까지 온 이유가 인간화였던 만큼 그 원인을 찾아보려면 전 주인과의 기억을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그가 망설이며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는 목록은 그와 함께 있었던 근 3년간의 기억이었다. 그가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그런데도 궁금했다.
"딱 한번이라면..."
결국 김래빈은 멋없이 중얼거리고는 기억파일을 골라 재생했다. 연산이 진행된 시간에 비해서는 쓰인 전하량이 많다는 특이점을 가진 기억이었다. 그는 날짜를 확인했다. 차유진이 김래빈의 작업실에 머물게 된 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의 시점이었다.
기억파일은 안드로이드의 시야와 그 사고과정을 충실하게 재현한다. 그의 앞에 작업실의 전경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 수리 작업을 하던 그의 모습이 비췄다. 배경이 서서히 흐려지고, 영상 속 시야의 초점이 서서히 그에게로 맞춰졌다. 그때의 차유진은 아마 그를 관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유진은 그의 작업실에 머무는 내내 김래빈을 쫓아다녔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드로이드를 수리하는 건 그의 일상같은 거라 전하량을 소모할 만한 특별한 일이 없었을 텐데.
그는 턱을 괸 채 차유진의 기억 속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5분, 10분. 변화가 생긴 건 그 때였다. 영상 속 김래빈이 멈칫하더니 왼손을 들어 허공에 탈탈 털었다. 그는 그 익숙한 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땜질하다가 데였나본데. 수리를 하다 보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영상 속 김래빈도 아무렇지도 않게 작업을 재개했다.
다만 차유진의 신경회로는 그때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시선이 그의 왼손을 향해 옮겨졌다. 손에 초점을 맞추고 시야를 확대하자, 방금 생겨난 것처럼 발갛게 부풀어오른 자국이 영상을 가득 채웠다. 차유진의 회로는 그게 1도 화상에 해당하는 상처임을 금방 도출해냈다. 차유진이 김래빈의 왼손을 재차 확대했다. 그 손에는 금방 생긴 상처 외에도 흉터와 굳은살이 빼곡했다. 그 두 가지 정보를 토대로 차유진은 연산을 시작했다. 몇 가지 사실과 가능성들이 떠오르고, 선택되고, 자기들끼리 연결되었다. 두 가지 명제가 떠올랐다.
1. 김래빈은 화상을 입었다. 1도 화상은 통증을 수반하며 빠른 처치를 요구한다.
2. 김래빈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김래빈에게는 유사한 상해 흉터가 다수 존재하며 그런 경우 인간은 확률적으로 통증에 무디고 별도의 처치를 요구하지 않는다.
명제로부터 다시 연산이 재개되었다. 차유진은 둘 중 어느 것이 결론으로 합당한지 금방 도출해내지 못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보편적인 안드로이드의 역할과 그의 반응, 상황을 고려해봤을 때 보통의 안드로이드가 합리적으로 도출해내야 할 결론은 두 번째였다. 그러나 차유진은 평소 사용하는 몇 배의 부하량을 소모한 끝에, 연산결과에 약간의 오류를 남겨가며 첫 번째 결론을 골랐다.
결론 : 김래빈은 아프다. 치료가 필요하다.
김래빈은 화면에 뜬 결론을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그리고 차유진이 거실로 이동해 장식장을 뒤져가며 반쯤 빈 화상 연고를 찾아내는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화상에 익숙해졌을 무렵부터 그는 화상연고가 있어도 굳이 찾아 바르지 않았다. 당연히 화상 연고의 유효기간은 예전에 지나있었다. 차유진은 그걸 확인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다시 거실을 뒤져 약간의 돈을 들고 외출해,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안드로이드를 가장하여 천연덕스럽게 새로운 화상연고를 구입했다.
영상 속에서 차유진은 그렇게 구한 연고를 그에게 내밀었다. 연고를 받은 자신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 때 그 연고를 결국 발랐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김래빈은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차유진의 기억을 종료했다. 보지 말 걸,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차유진의 생각이 궁금했지만 이런 건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기록이 그를 통째로 흔들고 있었다. 그는 차유진의 신경회로를 재생장치로부터 분리했다. 대신 그는 서랍 속에서 작은 저장칩을 꺼내 꽂았다. 다시 재생버튼을 누르면 아직 멀쩡했던 때의 차유진이 투영되었다. 그가 단 한 번 남긴 기록이었다.
차유진은 웃고 있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았다. 시덥잖은 일이었을 것이다. 차유진은 잘 웃는 편이었다. 본래 성격이 그러했는지 아니면 인간화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차유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기억보다 조금 더 평범한 모습이었다. 기억 속 차유진은 그보다는 좀 더 환하게 웃는 안드로이드였지만,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김래빈은 인정했다. 왜곡된 건 그의 기억이다. 그가 차유진을 그렇게 기억하는 건 차유진과의 기억, 그의 감정, 관계가 개입된 탓이다.
그러니, 세상엔 분명히 데이터로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김래빈에게 차유진이 찬란한 존재였고, 그래서 실제 모습보다 그의 기억속에서 좀 더 빛났던 것처럼. 차유진이 안드로이드에게 보다 자연스러운 결론을 포기하고 김래빈의 상처를 살펴 연고를 사러 나갔던 건 그 어떤 합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세상에서는 그 비합리적인 판단을 아마 걱정이라고 부를 것이다. 혹자는 사랑이라 했다.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에 그가 그었던 금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차유진은 안드로이드라고 수없이 되뇌였던 날들이, 그래야만 억누를 수 있었던 마음 속 흔들림이 되살아났다. 부정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의심하면 차유진의 마지막을 평온하게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끝까지 차유진을 안드로이드로 대하고 싶었다. 이제까지 그를 스쳐간 수많은 개체들처럼 특별하지 않은 무언가로 묻어두고 싶었다.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작업실을 뒤져 상자를 하나 꺼냈다. 간혹 눈물로 시야가 흐렸지만 오랫동안 비슷한 작업을 반복해 온 몸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그 안에 차유진의 신경회로와 제 기록을 넣고 뚜껑을 닫았다. 금속은 녹슬고 뒤틀리고 마모된다. 인간은 각종 저장장치를 만들며 기록의 영속성을 꿈꿨지만 그 어떤 기록장치도 영원하지 않았다. 기억은 보다 연약하다. 언젠가는 오늘의 기억도 왜곡되고 흐려지고 잊혀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았다. 김래빈은 차유진을 그 어떤 장치와 기계 속에도 남기지 않고 그저 기억 속에 두기로 했다. 그는 레이저를 들어 뚜껑에 각인을 새겼다. 망설임 끝에 상자엔 IGN-C5ii 0306-477 대신 차유진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남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인간처럼 생각하는 안드로이드를 마주칠지도 모른다. 수리공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김래빈은 그 중 무엇도 차유진과 같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차유진은 그에게 유일한 개체로 남을 것이다. 김래빈은 인간의 영혼조차 믿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어쩐지 이미 가동이 멈추고 조각조각 분해된 차유진이 그의 곁에서 거 보라며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비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김래빈은, 오늘만큼은 인간의 그 특권을 고스란히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수리점의 문을 닫았다. 추모의 시간이었다.안드로이드x수리공 AU 막내즈 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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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n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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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슨열쇠님과의 연성교환으로 썼습니다. 녹슨열매님의 연성은 https://posty.pe/5tqezj 이쪽
- 사망소재가 있습니다. 사망소재가 있는 김에 캐붕을 감수하고 암울한 취향을 넣고 싶은 만큼 끼얹어봤습니다.
- 작중 인물이 사용하는 영어는 이탤릭체로 표시했습니다.
생존은 어째서 그렇게도 힘겨운가.
Side A. 차유진의 노래
열 아홉살의 유진 이그나시오 차가 가이드 판정을 받았을 때 그의 가족들은 우선 그가 이능력자가 아님에 감사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부의 에이전시가 그의 집까지 직접 찾아와 한국이라는 저 멀고 위험한 나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전달했을 때 집안 분위기는 뒤집어졌다.
"왜 하필이면 한국이에요? 거기는 준- 전시- 국가라고요!"
차유진은 계단에 걸터앉아 그의 어머니가 에이전시에게 항의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국. 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피가 그 나라로부터 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외에는 별로 아는 게 없는 나라였다. 아니다. 하나는 알았다. 뉴스에서 종종 떠들곤 하는 이야기 덕분이었다. 한국은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고 크리쳐가 등장하는 빈도가 잦아 비슷한 조건의 다른 나라에 비해 피해가 컸다. 징병제의 경험을 살려 대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력이 마비되는 일이 종종 일어나 다른 나라로부터는 준 전시국가, 즉 여행금지구역으로 치부되는 나라였다.
그곳에 자신이 가야 한단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능력자가 있기 때문에.
유감입니다. 차유진이 있는 자리에서 정부에서 온 에이전시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크리쳐의 출현이라는 인류의 초국가적 재앙사태를 맞아 이능력자와 가이드의 파견 문제는 국가 간의 전략과 이득보다는 보편적인 인권과 생존권의 문제로서 다루어졌다. 이능력자의 자유와 권리는 인류의 생존에 우선할 수 없다. 가이드의 자유와 권리는 이능력자의 생존에 우선할 수 없다. 코드 옐로우.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가이딩이 시급한, 그리고 그와는 거의 완벽할 정도로 파장이 맞는 이능력자가 한국에 있었다. 그러니 가야 했다. 깔끔한 결론이었다.
"미국에는 당장 가이딩이 급박한 이능력자가 없습니다. 한국의 '그' 이상으로 유진과 파장이 맞는 이능력자도요. 그 경우 국제공조 요청을 무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에이전시가 꺼낸 파장 그래프는 학교에서 과학 실험 시간에 했던 크로마토그래피와 닮아있었지만 그는 그 그래프에 담긴 뜻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에이전시가 떠난 후 그에게는 한국에 가야 할 의무와 한국어를 익혀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그쪽이 영어를 배우는 게 더 낫지 않냐는 그의 질문에 에이전시는 묘한 얼굴로 웃었다.
차유진은 몇 달 후 한국어 교재를 옆에 낀 채 한국에 도착했다. 뺨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추운 겨울이었다.
코드 옐로우.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이딩 부족상태. 이능력자는 능력을 사용할 경우 반동에 시달리며, 그 증상은 가이드와의 접촉에 의해 이루어지는 가이딩을 통해서만 완화될 수 있다. 이능력자들의 반동은 여러 증상으로 나타나나 공통적으로는 두통, 이명, 불면증이 관찰된다. 그 이외의 증상은 대체로 이능력자 개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능력이 강할수록 반동 역시 강하며, 당장 처치를 요하는 코드 레드 상태 이상으로 가이딩을 받지 못하면 이능력자들은 폭주한다. 코드 블랙. 막대한 인명피해와 이능력자의 사망을 전제로 하는 그 폭주현상을 관계자들은 그렇게 칭했다.
그러니까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라는 거지. 차유진은 제 눈 앞의 이능력자, 그의 파트너를 훑어보았다. 딱 봐도 얼굴에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멍한 표정이며 짙은 다크서클이 퀭했다. 오랫동안 제대로 자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자세는 꼿꼿했지만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가 초점을 잃고 나붓이 접히다 간헐적으로 지나치게 또렷해지는 시선은 섬뜩하리만치 숨을 삼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생년이 같으면 같은 나이로 취급한다고 했던가.'
한국 나이로 스무 살. 생일은 늦어도 그와 생년이 같은, 말하자면 동갑. 의아한 일이었다. 듣기로는 발현한 지 약 3년. 한국이 아무리 준 전시국가라고 해도 아직 미성년자를 내보내야 할 정도로 국가 체계가 엉망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면 능력을 쓸 일 역시 별로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는 일단 질문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차유진입니다!"
자고로 그 어떤 언어든 회화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건 인사인 법이다. 통째로 외워버린 첫 인사만은 완벽한 채로, 그는 그의 파트너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현재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잘 지내는 게 나았다. 상대는 한참을 답이 없었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대로 다문다. 조심스럽게 뻗어진 손이 그의 손 끝에 겨우 닿았다. 순간적으로 상대가 비틀거리는 걸 닿은 손을 그대로 낚아채듯 끌어당겨 지탱하면 손톱이 파고들도록 그의 손등을 꾹 쥐는 악력과 함께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에서 쑥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첫 가이딩이었다.
"괜찮아요?"
반사적으로 영어로 튀어나간 말에도 여전히 상대는 대답이 없다. 놀란듯 숨을 들이키더니 몸을 바로세우고는 대뜸 허리를 꾸벅 숙인다. 다시 한 번 더 꾸벅, 그러다가 또 비틀. 아무리 봐도 환자의 몰골에 가까웠다. 차유진은 대충 손을 내젓고는 그를 부축했다. 어쨌든 접촉면적은 넓을 수록 좋다고 하니까.
"영어 몰라요? 내 말 어려워요? 어렵지 않으면 답해줘요. 당신이 얼마나 아픈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누워야 할 것 같은데. 근데 나는 당신 방을 모르잖아."
"......"
제대로 된 접촉도 아닌데 무섭도록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그는 혀를 내둘렀다. 코드 옐로우라는 명칭이 가진 무게가 그제야 실감이 났다. 상대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뭐라도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벙어리라고 들은 적은 없는데. 차유진이 딴 생각을 하다 못해 일단 어디 빈 곳이라도 눕혀놓으려는 생각으로 무작정 걸음을 옮길 때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영어 조금 알아요."
다 쉬고, 긁히고, 잠긴 목소리였다. 하도 긁혀서 숨소리처럼 귀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소리. 차유진에게 반쯤 끌려가던 상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팔을 물린다. 상대의 거부에 그가 순순히 물러나면 아까보다는 좀 더 나아진 안색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또렷해진 시선이 그에게로 곧장 향한다. 상대는 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더니 차유진이 했던 것과 똑같이 악수하는 모양새로 내밀었다. 차고 건조한 손이었다.
"...김래빈입니다."
센터는 처음에 차유진에게 그의 파트너, 김래빈에 대한 정보를 서류 형식으로 알려주려 했다. 그걸 거절한 건 차유진이다. 어떻게 사람을 종이와 글자로 알아갈 수 있겠냐며 만나서 직접 친해지겠노라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대략 일주일 만에 그는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김래빈이 도통 입을 열지 않는 탓이다. 그에게서 별다른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싫어서 무시하는 건 아닌 거다.
'아니 그렇다면 왜 말을 안 하는데?'
그렇다고 지금 와서 했던 말을 물리기는 자존심이 상한 상태. 차유진은 주변인들을 공략하기로 했다. 센터에 김래빈이 온지 근 3년. 그에 대해 말해줄 사람은 차고 넘쳤다. 의사소통에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차유진은 그제야 에이전시가 묘하게 웃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람의 뜻은 어떻게든 통하는 법이었다. 덕분에 파트너와는 기껏해야 몇 마디 해 본 게 다면서도 그의 한국어 듣기 실력은 그새 비약적으로 늘었다.
"능력 때문이겠지."
"능력? 김래빈 능력 잘 몰라요!"
차유진의 그 말에 연구원이 애매한 얼굴을 했다. 직접 보는 게 낫겠다며 연구원이 그를 데려간 데이터 분석실에서 그는 한 영상을 보았다. 약 2년전 찍힌 영상이었다. 실험실 같은 곳에 지금보다 앳된 얼굴이 확연히 눈에 띄는 김래빈이 있었다. 그는 불안하고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김래빈에게 초점이 맞춰진 카메라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적어도 그는 김래빈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그 직후, 영상 속 김래빈이 펄쩍 뛰며 비명 섞인 고함을 내지르는 순간.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방탄유리에 가까운 두께를 가진, 실험실의 모든 유리창이 박살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후 카메라 역시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꺼졌다.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잡혔던 김래빈은 떨고 있었다. 옆에서 그 영상을 함께 보던 연구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가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차유진은 그 말을 드문드문 알아들었다. 소리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능력. 그것이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혹은 크리쳐든. 벤시, 세이렌, 모르페우스. 주변에서 김래빈의 능력을 뭐라 부르든 요지는 그거였다. 김래빈의 능력은 그가 직접 내는 목소리를 통해 발휘된다.
"김래빈 말해도 괜찮아요! 지금은 말할 때마다 저렇게 주변이 파괴되는 모습은 보지 못했는데요."
"그렇게 되기까지 2년이 넘게 걸렸어."
그동안 그는 줄곧 방음시설이 튼튼하게 갖춰진 방호시설에 스스로 격리되어있었다고 한다. 반복되는 제어 실험과 연습으로 목이 다 망가지고, 끝내는 원하는 소리에만 힘을 싣게 되기까지. 소리를 내면 크고 작은 피해를 입히기에 놀라고 당황하고 겁먹어도 소리만은 내지 않으려 끊임없이 노력했던 열 일곱, 열 여덟, 그리고 열 아홉의 김래빈.
"그래서 현장에 나갈 일 없던 미성년자가 코드 옐로우가 될 때까지 힘을 쓴 거에요?"
"어쩔 수 없어. 모든 이능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제어하게 될 때까지 그 과정을 거쳐. 래빈이는... 다른 이능력자보다도 좀 더 운이 나빴지. 첫 번째로 제어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방식의 능력을 가졌고, 두 번째로 맞는 가이드를 만나지 못했으니까."
인류는 여전히 이능력자의 힘과 가이드와의 상호작용 원리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한국은 그 특수성으로 인해 다른 지역보다도 이능력자에 대한 연구가 앞섰음에도 불구하고, 개별 이능력자의 파장을 측정하고, 기록하고, 그걸 다시 각 국가에 보내 가이드의 파장과 맞춰보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불합치, 불합치, 불합치, 가이드의 사망, 다시 불합치. 연구원은 말을 아꼈지만 그는 그런 반복되는 기대와 절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래빈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아주 천천히 가능성을 포기해왔던 거다. 그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렇게 미식축구를 놓았던 것처럼.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러면 왜 능력을 제어하게 된 지금도 입을 열지 않는 건데요?"
연구원은 그 질문에는 답해주지 못했다.
시간이 흘렀다.
차유진이 김래빈보다는 센터의 연구원과 다른 이능력자들, 가이드들과 더 친해지는 사이 센터는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김래빈이 임무를 나갈 때를 제외하고는 그와 붙어지내라는 권고를 들었다. 말이 권고지 지시에 가깝다는 걸 센터도 차유진도 알았다. 그 필요성은 납득했지만 이제까지 대체로 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해왔던 사람으로서 차유진은 센터의 권유의 탈을 쓴 지시가 썩 내키진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그의 짐은 김래빈의 방으로 옮겨졌다. 합숙 훈련을 제외하고는 타인과 방을 써 본 적 없던 그는 졸지에 룸메이트를 갖게 되었다. 김래빈이 지극히 조용하리라는 건 확실했지만 그게 그에겐 별로 장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제 생활을 간섭받아, 차유진은 투덜거렸다.
"이건 폭거야.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김래빈, 말해. 너는 불편하지도 않아?"
"......"
기다란 종이에 펀치로 규칙적인 구멍을 내던 김래빈이 고개를 들어올려 그를 응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내리깔던 그는 종이를 자르더니 오르골에 넣고 태엽을 감기 시작했다. 작곡은 김래빈의 취미였다. 간혹은 노래처럼 보이는 악보가 방바닥에 굴러다녔다. 차유진은 종종 악보를 집어들고 제멋대로 노래를 부르다가 김래빈에게 타박을 들었다.
'내 노래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나 네게 갈게~'
'거기는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야.'
김래빈은 차유진이 아무리 졸라도 그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임무 때에만 노래를 불렀다. 그랬다. 김래빈은 제 능력을 노래에 담았다. 자장가였다. 차유진은 센터에서 김래빈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지직거리며 끊기는 영상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는 김래빈은 다 상해버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살해당하는 크리쳐들 사이에 홀로 서 있었다.
'능력은 조절할 수 있어. 그렇지만 부르고 싶지 않아.'
그는 딱 잘라 말했지만 노래를 잃은 그의 방에는 노래하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차유진이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김래빈은 뚫린 구멍의 배열에 맞춰 건반을 울리는 오르골 소리를 한참을 귀기울여 듣는가 싶더니 그제야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센터에서 하라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어."
Ohhhh. 센터와 규칙을 사랑하는 김래빈. 그가 김래빈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있다면 규칙을 지키라는 말일 것이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양 팔을 벌린 차유진이 소파로 쓰러진다. 바닥에 앉은 김래빈의 어깨에 팔을 얹고 그 위에 머리를 올리면, 무거워, 하는 나지막한 탄식이 돌아온다. 이마저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차유진은 이 짧은 대답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우리는 파트너가 아니었냐는 토로부터 나는 누군가와 대화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너스레까지.
"너는 몰라. 차유진."
그럼에도 김래빈은 여전히 멀고 그와 김래빈 사이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다. 그는 울컥했다.
"모르면 가르쳐줘!"
이능력자는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차유진이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에까지 오게 된 건 김래빈의 생존이 그에게 달려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김래빈은 마치 그가 필요 없는 것처럼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지금도 그에게서 가이딩 에너지를 쭉쭉 가져가는 주제에. 여전히 능력을 조금만 써도 두통과 이명으로 얼굴이 하얘지는 주제에.
내가 네 유일한 파트너일텐데도.
"알고 싶어?"
김래빈이 속삭였다. 곧 흩날릴 것처럼 작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과 함께 도착한 곳은 센터 한 켠에 있는 추모공간이었다. 센터를 세운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그동안 센터에서 사망한 이능력자들의 이름까지 거대한 벽의 꼭대기부터 명패가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조용한 공간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렸다.
"한국의 센터는 처음엔 국가에 의해 설립되지 않았어."
차유진도 들은 내용이었다. 크리쳐의 첫 출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한국에서 국가 대신 센터를 세우고 이능력자와 가이드를 끌어모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의 사후에 센터는 국가에 인계되었지만 그가 세운 체계는 여전히 센터의 중심축이었다. 김래빈은 명패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이 이어진다. 다 쉬어빠진, 작은 목소리였지만 워낙 조용한 공간이라 듣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때 만들어진 모든 규칙은, 누군가의 피로 쓰인 것들이래."
김래빈은 어른에게 깍듯하다. 차유진은 알았다. 센터 내 김래빈의 인간관계는 주로 제 또래보다는 좀 더 연배가 있는 사람들과 맞닿아있다. 센터가 세워졌을 때부터의 역사를 알 법한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분명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김영배. 이능력자. 크리쳐와의 조우 후 발현되었으나 본인이 이능력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탈주. 약 50여명의 사상자를 낸 후 자살. 그 이후부터 센터는 발현된 이능력자들을 데려와 능력의 제어를 훈련시켰다. 한지은. 센터 소속 가이드. 미등록 이능력자에 의해 납치 후 살해당함. 해당 가이드와 매칭되었던 이능력자의 폭주가 이어지며 센터 건물 반파. 다수의 사상자 발생. 센터는 가이드가 혼자 외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기수. 이능력자. 임무 중 코드 블랙 발동. 함께 파견되었던 다수의 이능력자 사상. 이능력자들의 주기적인 가이딩 수치 체크 의무화. 공간이동을 통한 긴급 가이딩 체계 마련.
살해. 자살. 타살을 빙자한 자살. 폭주. 또 폭주. 자살. 폭주. 실종. 임무 중 사망.
수많은 죽음의 기록과 거기에 엮인 규칙들이 줄줄줄 흘러나온다. 이능력자의 평균 수명은 아직도 만 40세를 넘지 못하고, 자살률은 그 어느 집단보다도 높다. 차유진은 언젠가 센터의 상담사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이능력자는 크리쳐와의 조우를 통해 각성한다. 그 과정에서 이능력자의 주변인이 사망하는 경우는 전체 건수의 80%가 넘는다. 흔한 일이라 언론에 보도되지도 않는 조용한 죽음. 이능력자는 시작부터 커다란 상실을 경험한다. 그 중 일부는 각성 직후 제어하지 못한 이능력자 그 자신의 힘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다. 김래빈 역시 각성과정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상담사는 단언했다. 크든 작든 이능력자는 모두 자신의 능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
'본래는 발설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너는 가이드니까 알고 있는 게 좋겠지. 그는 내 담당은 아니지만, 어쨌든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어. 래빈이 가족들은 적어도 크리쳐의 습격으로 사망했거든.'
그렇지만 걔도 알겠지. 머리가 안 돌아가는 애는 아니니까. 설령 가족들이 크리쳐의 습격에서 살아남았더라도 곧 그의 능력에 의해 죽었을 거라고. 무사를 확인하는 단 한 마디면 제 눈 앞에서 죽어버렸을 거라고.
'그래서 센터 안의 이능력자들은 서로가 서로의 이해자고 가족이야. 그마저도 몇 년 안 되서 태반은 사망하지.'
크리쳐들에 의해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삶. 점점 자신을 죽여가는 능력을 폭탄처럼 안고 있는 삶. 김래빈도 다른 이능력자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할 가능성이 있다. 상담사는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추측했다. 어쩌면, 반 정도는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번거로워도, 규칙을 지키는 게 제일 안전해. 차유진 너는 갑갑할 수 있겠지만..."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사실은 다 눈치챘다. 김래빈의 말 저변에 깔린 건 걱정이다. 김래빈은 차유진의 안전을 걱정하고 그래서 그의 힘, 그 스스로에게서도 격리해버리려 한다. 그런데 싫었다. 필요 없는 배려였다.
"김래빈."
차유진은 그의 말을 뚝 끊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너는 내가 네 파트너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나만 안전하면 다야? 저번에 네가 죽으면 나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왜 했어? 왜 살려달라고 하지 않아? 노래 좋아하잖아. 부르고 싶지 않아?
스무살이 된 김래빈은 이제 임무에 차출될 수 있었고, 첫 임무를 마친 김래빈은 호흡 곤란으로 쓰러졌다. 코드 레드. 반동이었다. 차유진은 그 날 김래빈과 처음 입을 맞췄다. 그 행위에 수줍어하거나 어색해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김래빈을 붙잡고 차유진은 그가 죽을까 두려워 반쯤 울면서 매달렸다. 그도 고작 스무살이었다. 자신밖에 구할 수 없는 상대의 고통이 눈 앞에서 낱낱이 전시됐다. 끔찍했다. 버거웠다.
김래빈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단 속내를 말한 건 그러니 반쯤은 투정이었다. 김래빈은 그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능력자가 죽으면 파견으로 온 가이드는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답이나 내놓았다. 정말로 모든 가능성을 고심해본 진지함이라 더 최악이었다.
김래빈의 손이 아직 명패가 걸리지 않은 빈 공간에 닿아있었다. 차유진에게 그 길고 긴 설명을 하는 동안 김래빈은 그곳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언젠가 그곳에 걸릴 그의 이름을 상상하는 것처럼. 그래서 차유진은 하고 싶던 모든 말을 던져버리고 딱 하나만 물었다.
"너는 죽고 싶어?"
김래빈은 한참 답이 없다가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서야 겨우 말했다.
"......가능하다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로 다짐했어. 그러려면 할 수 있는 데까진 버텨야겠지."
차유진은 다시 묻고 싶었다. 살리려는 그 '사람들' 속에 너는 있어? 대신 그는 우악스럽게 김래빈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계절이 한참은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그 손은 차고 건조했다. 살아있는 사람의 손 같지 않았다. 그는 힘주어 그 손을 주물렀다. 그래야 그의 손에서 옮겨붙은 것처럼 아주 약한 온기가 돌았다.
"그래도 김래빈 살아. 왜냐하면 내가 너를 살리고 싶으니까. 네 생존이 나한테 달려있다면 그 정도는 내가 정해도 되잖아. 그렇지? 김래빈 들었어? 들었으면 대답 좀 해 줘!"
속에서 북받쳐오르는 말을 투명한 벽을 두드리는 기분으로 마구 쏟아냈다. 침착하게 시작한 말이 결국엔 고함으로 끝났다. 조용한 공간에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말하면서 차유진은 저 역시 김래빈에게 제 속내를 완전히 까발리는 게 처음임을 깨달았다. 죽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는 김래빈을 살리고 싶었다. 파트너라서, 그가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이능력자라서, 아니면 그냥 그의 앞에서 죽는 걸 보지 못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그냥, 그가 김래빈이라서.
긴 침묵이 흘렀다. 허탈했다. 차유진은 한숨을 쉬고는 여전히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으려 했다. 이렇게 해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 때, 김래빈이 다시 그의 손을 붙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김래빈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목 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니다. 모르겠다. 김래빈의 목은 상했고, 쉬었고, 언제나 목소리가 작았고, 그래서 가끔은 울지 않아도 우는 것 같았다. 그래도.
드디어 대답이 돌아왔다.
*
그러나 그 어떤 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차유진은 신조차 아니었기에.
Side B. 김래빈의 노래
차유진이 죽었다. 스물 둘은 꽃다운 나이라던데 차유진의 인생은 스물 둘에 목 꺾인 꽃처럼 툭 부러져버렸다. 도로공사 중 일어난 폭발사고였다. 그 거리에서만 차유진을 포함해 현장 근처를 지나가던 가이드 5명, 이능력자 1명, 민간인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서울에선 이제 그런 사고가 사람들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크리쳐가 습격하는 도시에선 아무리 행정력이 뛰어나도 커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예전의 명성을 잃고 천천히 낡아가는 도시는 멸망해가는 세계를 아득바득 붙들어 생존 중인 사람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종종 정비되지 않은 이전 시대의 산물로 크고 작은 재앙을 만들어냈다.
정해진 센터의 수칙을 A부터 Z까지 빠짐없이 지켜도 어김없이 죽을 사람은 죽었다. 김래빈은 그래서 외출했다 죽어 돌아온 차유진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실은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그는 차유진의 하나뿐인 파트너였지만 신원 확인에도, 장례에도, 그의 귀환에도 끼어들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차유진의 가족들은 과연 차유진을 닮아서 절차를 안내하러 온 공무원의 멱살은 잡았을지언정 그에게는 손 끝 하나 대지 않았다. 대신 다정한 축객령을 내렸다.
'유감이지만 돌아가주었으면 한다는군요.'
지친 목소리로 흘러나온 몇 마디의 낯선 문장이 통역가의 한 마디로 정리되었다. 차유진의 가족은 그들의 슬픔을 김래빈과 나누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방인이 되었다. 그 앞에선 차유진과 그가 함께 했던 시간도, 추억도, 노래도, 그가 품었던 낯선 감정도 전부 무용했다. 며칠에 걸친 절차 끝에 센터를 갑갑해했던 차유진은 가족들의 품에 들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넓고 푸르고 탁 트인 바다가 있는 곳. 차유진이 신나게 설명하던 광경을 되새겨 곱씹으며 김래빈은 그가 몇 글자의 명패로 남는 대신 그 곳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차유진의 짐이 사라진 빈 공간에 충동적으로 산 국화를 내려놓았다. 가이드를 잃은 이능력자에겐 잠시간의 공백이 주어졌다. 그는 그 대부분의 시간을 오르골 태엽을 감아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보냈고 차유진이 보고싶어지면 그제야 일어나 센터의 사람들이 그의 문 앞에 조심스레 두고 간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차유진은 워낙 삶 같은 사람이었기에 그는 먹는 행위로 차유진을 떠올리는 것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떠드는 사람이 없는 방 안은 새삼 조용했고 그는 잠기듯 서서히 그의 죽음을 실감했다. 점점 시들어가는 흰 꽃을 바라보며 김래빈은 제 미래를 상상했다. 별로 어렵진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느린 폭주와 빠른 자살이라는 선택지만이 남았다.
그의 처우를 두고 센터에서는 공방이 오갔다. 새로운 가이드의 등장 가능성과 그의 폭주가능성을 계산한 복잡한 수치들 사이에서 그의 운명은 삶과 죽음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그의 조부모와 누나, 센터의 수많은 사람들, 차유진의 죽음을 거치며 그는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없음을 깨달았는데도,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가 죽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 했다. 그 중 어느 곳에도 김래빈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명제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의 힘 한 번엔 여전히 비할 수 없이 수없는 사람 목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탓이다.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는 회의의 결말을 기다리는 대신 김래빈은 돌아오기 어려운 임무에 자원하기로 했다. 사람을 조금이라도 살리는 것이 그가 생을 건 목표였으니 기왕에 죽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들의 위험이 줄어들기를 바랐다. 죽은 다섯 가이드의 이능력자 중 둘이 그와 함께 자원서를 작성했다. 그 승인이 떨어졌다는 말을 전해주면서 그의 얼굴을 5년간 보아온 센터의 한 연구원은 통곡하듯 그의 손을 붙들고 울었다. 김래빈은 멋적은듯 이마를 긁고는 그를 가만히 위로하듯 안아주었다. 제 예정된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 앞에서 홀가분함을 느낀다는 건 참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는 숙소를 정리했다. 대부분은 버렸다. 남길 것이 없어 좋았다. 이름 세 글자면 충분했다. 이제는 불러줄 사람이 없는 악보들 역시 불길 속에 사라졌다.
"-가없는 밤 꿈조차 사라지면"
그를 삼키려 했던 크리쳐들이 잘게 터져나갔다. 그는 단조로운 음률의 자장가를 읊조리며 제게 튄 크리쳐들의 체액을 훔쳐내고는, 얼굴의 반이 날아간 동료의 남은 눈 하나를 감겨주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김래빈을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가 그들 사이에서 가장 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능력이 피아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능력의 폭주를 포함해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들을 죽여줄 수 있는 누군가를 이능력자들은 안전고리로 남겨놓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갈 아주 작은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는 끝내 홀로 남았다. 주변을 둘러싼 크리쳐들의 소리없는 아비규환 속에서 그의 쉰 목소리가 끝없이 울렸다.
"네 작은 영혼 평온 속에 뉘여놓고-"
죽는 걸 목표로 왔어도 누구도 포기한 것처럼 바로 죽지 않았다. 센터의 이능력자들은 대개 저울의 한 쪽에는 그들의 피가, 다른 한쪽에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 올려져 있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와 함께 자원한 동료들은 그래서 한계에 다달을 때까지 바득바득 능력을 사용했다. 그리고는 홀가분하게 웃으며 축복받듯 죽었다. 덕분에 김래빈은 예상보다도 더 시간을 많이 벌었다. 공간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만,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만 이 크리쳐들이 전부 나가지 못하도록 틈새를 틀어막고 버티면 그의 임무는 끝이었다.
"달빛 벗 삼아 은하수 걸어-"
노래를 부를 목 이외에는 보호를 포기했다. 그래서 그의 사지는 엉망이었다. 크리쳐의 독과 산성,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들로 너덜너덜해지면서도 그는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이명이 울렸다. 눈 앞이 흐리고 어지러웠다. 부작용의 전조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저 작은 별 따 네 머리맡에."
마지막 구절과 함께 세계가 닫히는 감각이 울렸다. 틈새가 막혔다. 정말로 끝이었다. 서울은 당분간 안전했고, 그는 이 곳에 남았고, 이제 죽을 수 있었다. 그는 주저앉았다. 이제는 그래도 되었다. 자잘하게 기침이 새어나왔다. 틈새를 찾지 못한 크리쳐들이 그 공간에 유일하게 남은 피식자를 에워쌌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아, 아아. 그 짧은 음절에도 크리쳐 두엇이 터져나가, 다시 그의 주변에는 약간의 빈틈이 생겨났다.
그는 제가 만들었던 노래들을 떠올렸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어도 악보는 죄다 머리속에 있었다. 하나를 골랐다. 언젠가 차유진이 불렀던 노래였다.
"네가 힘들고 지칠 때, 온 세계가 널 홀로 남겨둘 때...."
딱 한 소절을 불러보고, 그는 허망하게 웃었다. 차유진을 구박할 처지가 아니었다. 목을 혹사하고 오로지 단조로운 노래만 불러왔던 제 노래실력이 차유진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그래도 불렀다.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은 부를 수 없는 노래였다.
"내 노래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다면..."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노래가 인위적으로 끊겼다. 폐가 막힌 것처럼 호흡이 북받쳤다. 노래를 잇기가 어려웠다. 서서히 목이 막혀왔다. 김래빈은 헐떡이며 죽음을 확신했다. 노래가 멈추면 저 크리쳐들이 그에게 달려들 것이고, 그럼 끝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차유진을 다시 생각했다. 차유진은 센터 안에서도 곧잘 뛰었다. 실내에서는 뛰지 말라는 충고도 소용 없었다. 만약 저승으로 가는 길이 있다면 그는 그 곳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달려나갈 것 같았다. 두고 온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누구보다도 즐겁게, 죽은 뒤의 일을 기약하며.
그러니 벌써 거리가 한참은 벌어졌겠지. 너무 화는 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아픈 것도 추운 것도 졸린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마지막 구절은 끝내 부르지 못했다.가이드버스윶랩 + 사망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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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노래
돌림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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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로윈 합작을 모집하고 수합하느라 고생하셨을 3333님께 감사드립니다. (합작페이지는 지금은 삭제되었습니다.)
- 음악과 함께 보시면 좋을지도…
차유진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앞섶이 피로 범벅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흐느끼는듯한 첼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맞은편에 첼리스트가 앉아있었다. 우아한 연미복에 볼로타이를 한 채 목과 양 손은 온통 붕대로 감싸여 있었다. 얼굴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고풍스러운 촛대에 올려진 촛불이 겨우 희미하게 식탁을 비추는 어두운 방이었다. 주변은 안개가 낀듯 희끄무레했다. 음산하고, 온통 어둡고, 몇명이고 앉을 수 있을 것처럼 거대한 식탁에는 그와 첼리스트뿐이었다.
식탁에는 방금 조리한 것처럼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이 올려져 있었지만 식욕은 들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은식기는 아주 묵직해서 도리어 피로하기만 했다. 그래도 어쩐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음식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끼익- 하는 소리가 그를 방해했다. 활줄이 다 끊어질 것 같은 강하고 기분나쁜 불협화음이었다.
차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첼리스트가 굳은 것처럼 멈춰있었다. 붕대로 감겨 움직임이 무딘 손이 가만히 활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먹으면 안 돼.”
잔뜩 쉰 목소리였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그 다 긁힌 목소리만으로는 나이와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차유진은 물었다. 왜?
“이유는 듣지 못했어.”
그건 알려주지 않았잖아. 중얼거린 첼리스트가 그에게로 무언가를 던졌다. 그의 앞접시로 둘둘 말린 종이가 안착했다. 종이를 펼쳐보니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가 보였다. 짧은 악보였다. 급하게 그린 것처럼 형태가 들쭉날쭉했다. 그래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음악을 배웠던가?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 악보를 읽는 방법은 —에게 배웠던 것 같다. 구박을 엄청 들었던 것도 같았다. 사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차유진은 악보를 더듬었다. 단순한 멜로디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마디의 가장 마지막에 그려진 도돌이표 위에 무한대 기호(∞)가 표기되어 있다는 것 정도. 이 악보대로라면, 이 멜로디를 무한히 반복해야 하는 노래였다.
“차유진, 모르겠어? 네가 알려준 거잖아. 악보도, 식사도.”
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첼리스트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 나 알아?”
“너는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만큼은 잘 하니까 괜찮을 거야. 다른 곳 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만 가. 노래는 멈추지 말고. 절대 멈추면 안 돼.”
첼리스트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알쏭달쏭한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잘 가 차유진. 붕대 감긴 손이 점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느새 식탁 역시 사라져 있었다. 촛불도 사라지자 주변이 완전히 어두컴컴했다. 당황한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잔뜩 쉰 목소리의, 작은 흥얼거림이 들려온 건 그 때였다.
단순한 멜로디였다. 차유진은 그 노래에 귀를 기울여 그것이 제가 받았던 악보의 그 멜로디임을 알아챘다. 처음 듣는데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그는 입을 떼었다. 첼리스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음악이 흘러가기를 기다려 중간마디 부분을 잡고 끼어들면, 그가 흥얼거리는 멜로디가 앞선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졌다. 노래는 멈추지 말고 앞으로 가라고 했지.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그 멜로디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차유진도 멈추지 않았다. 연습한 적도 없는데 음을 헷갈릴 것 같지도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동일한 선율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화음을 만들어냈다. 그 음을 쫓아 걸었다. 그러다 어느새 달리고 있었다. 헐떡이면서도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 빛이 보였다.
“—!!”
그리고 눈을 뜨면. 낯선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헉, 차유진, 정신이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그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랬다. 맞다. 김래빈이다. 그에게 악보 읽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 잔소리 많은 나의 친구. 그런데 왜 아까는 기억나지 않았지. 차유진은 부신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김래빈, 여기 어디야. 약의 기운에 아직 절어, 그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그걸 들으며 떨리는 숨을 훅 들이키던 김래빈은 문득 입을 다물었다. 다시 크게 숨을 내쉬고. 아 김래빈, 화났네. 차유진이 깨닫자마자.
“너는 왜 항상 위험을 자초하는 거야!!”
고함이 그의 귀를 울렸다. 그는 그제야 떠올렸다. 도주한 범인을 잡으려 했고, 그러다가 칼에 찔렸던가. 그는 가슴을 더듬었다. 온통 붕대가 감겨있었다. 김래빈. 그는 친애하는 그의 친구를 불렀다. 목이 말라 목소리가 다 갈라졌어도 지금이어야 했다. 그가 모든 걸 잊어버리기 전에.
“나, 김래빈이 작곡해줬으면 하는 거 있어.”
“뭐?”
“녹음기 있어? 따라리라, 따, 하는 멜로디로 시작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그게 문제야? 너, 넌… 죽다 살아났다고!”
안 돼. 지금 해야 해. 휴대폰을 찾기 위해 차유진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하자 김래빈은 미친놈 보는 눈으로도 질겁하며 그를 만류하곤 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차유진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너 아직 덜 아물어서 그렇게 몸을 일으키면 의사선생님께서 애써 봉합한 게 아무 소용이 없잖아, 이 바보야! 차라리 내가 꺼낼게. 빨리 안 누워?“
물론 차유진은 제가 움직이면 김래빈이 저럴 걸 알았다. 소리죽여 웃고는 그는 김래빈이 녹음기 버튼을 누르기를 기다려 점점 가물거리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이거 꼭 다듬어줘야 해. 맨 마지막에는 무한대로 도돌이표가 들어가고. 두 명이서 불러. 한 명은 늦게 들어가. 알겠어, 김래빈? 떠오르는 대로 제멋대로 말을 꺼내다보면 다시 약과 함께 잠이 밀려들어왔다. 김래빈 꼭 해줘야 해. 차유진은 제가 그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모른 채 잠들었다.
*
김래빈은 약속을 지켰다. 퇴원은 애저녁에 마친 차유진이 연락을 받고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미심쩍은 얼굴로 짧은 악보를 내밀었다.
“자. 부탁했던 거. 이게 맞는진 잘 모르겠지만, 네가 녹음해준 멜로디로 미루어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이런 형태야. 이거 말고도 후보군을 세 개 정도 더 만들어두었으니까 아닌 것 같으면 말하고.”
차유진은 악보를 들어올렸다. 아주 단정한 필체로 그려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가 한때 보았던 악보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수정할 게 없었다. 과연 김래빈이었다.
“아냐. 이거 맞아.”
“그럼 됐어. …근데, 차유진. 대체 이런 멜로디를 언제 떠올린 거야?”
네 말로 유추해봤을 때, 이건 아주 단순한 형태의 돌림노래야. 2성부만으로 제대로 된 화음을 만드는 건 쉽지 않은데, 네가 이제까지 작곡에 조예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궁금했어. 물론 내가 모르던 너의 재능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너는 작곡을 배운 것도 아니잖아? 주절주절 의문점을 털어놓은 김래빈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그 시선에 차유진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거 네가 알려줬어.”
“? 나는 이런 걸 작곡한 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었다. 차유진은 김래빈의 의문을 못 들은척 하기로 했다. 대신 김래빈에게서 펜을 빌려, 그는 악보의 서두에 제목을 슥슥 적어넣었다. 이걸로 하자! 경쾌하게 말하면 김래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도 그 제목을 진지하게 눈에 담았다. Orpheus.
“상황을 떠올려봤을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제목은 아니다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김래빈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연미복에 볼로타이, 그리고 얇게 잘린 붕대. 차유진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익숙한 행색이었다. 한켠에 놓인 첼로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저 가방을 메고, 저 붕대를 목과 손에 감으면, 그러면.
“….김래빈, 오늘 어디 가?”
“자선연주회. 저번에 내가 말하지 않았나?”
“말 하긴 했는데, 분장한다는 말 없었어!”
할로윈이잖아. 붕대가 좀 거추장스럽긴 하겠지만, 단순한 곡이고 또 익숙해질까지 연습을 반복했으니까 문제 없어. 김래빈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차유진은 웃을 수 없었다. 김래빈. 겨우 이름을 부르고는,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꾹 쥐었다. 그랬어. 그랬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그를 스쳤다. 그는 김래빈에게로 척척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 완성된 악보를 쥐어주었다.
“김래빈. 잘 들어.”
“뭐야. 이걸 왜 나를 줘?”
김래빈은 눈치는 꽝이지만 진지한 부탁을 무시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납득시키지 못해도 꼭 필요하다고 우긴다면 들어줄 것이다. 차유진은 거기에 믿음을 걸었다. 그래야만 했다.
“아무것도 먹으면 안 돼. 이 멜로디도 잊어버리면 안 돼. 김래빈 나보다 노래 잘 하니까 괜찮을 거야. 다른 곳은 보지 말고 무조건 앞으로 가.”
“지금 너 빼고 맛있는 거 먹을까봐 이래?”
차유진은 김래빈의 말을 무시했다. 지금은 무시하기로 했다. 말하고 있는 게 저인지, 아니면 기억 속의 목소리가 제 몸을 빌려 흘러나오는 건지. 차유진은 알지 못했다.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에 계속 말했다. 돌림노래야. 김래빈 알고 있어. 노래는 멈추지 마. 절대 멈추면 안 돼.
차유진? 의아한 얼굴을 한 김래빈에게 시선을 맞추며, 그는 그 손을 꾹 잡았다. 내 말 잊지 마.
“김래빈. 꼭 돌아와.”
차유진은 그 밤 내내 김래빈 없는 공간에서 그 단조로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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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난 보육시설의 아동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연기를 들이마신 걸로 추정,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한국계 첼리스트는 병원에 실려간 그 다음날 아침에 무사히 깨어났다.CP맛 첨가 NCP. 할로윈 합작 참여글 / 주제 ‘되돌아온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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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생선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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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유진, 잠깐만."
탁. 작은 마찰음이 식탁을 가로질렀다. 하? 차유진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박문대의 젓가락이 생선구이를 향하던 그의 젓가락을 가로막고 있었다. 차라리 먹을 걸 애초부터 주지 않았으면 않았지 먹던 중에 방해하는 박문대는 생소했던 탓에, 옆에서 김래빈 역시 얼떨결에 수저질을 멈췄다. 막내들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하나씩 떴다.
"나 이거 먹지 마요? 또 익는 거 덜 했어요?"
어리둥절한 얼굴의 차유진이 미국에서의 일을 떠올려 물었지만 박문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기다려, 하면서 다시 차유진의 젓가락을 접시 밖으로 물리는 것이다.
'어쩐지 김래빈까지 묘하게 손을 못 댄다 했지.'
박문대는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껍질에 반질반질 기름이 돌 정도로 바짝 잘 구워진 꽁치구이에는 잘못이 없었다. 다만 꽁치는, 흔히 먹는 생선들 중에선 비교적 잔가시가 많은 생선이다. 젓가락질이 서툰 차유진은 뼈를 바르기가 쉽지 않을. 김래빈도 집에서는 어지간히 귀여움받은 막내였는지 큰뼈는 몰라도 잔가시 부분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몇 번 젓가락을 대는가 싶더니, 아예 생선을 포기하고 다른 반찬을 집는다. 깨작거릴 바에야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이상한 곳에서 엄격한 밥상머리 예절이었다.
"그러다가 입 안 찔려."
차유진은, 보아하니 가시가 귀찮아도 먹고는 싶으니 아예 통째로 가져가 냅다 씹어먹으려 한 모양이었다. 그마저도 잘 떨어지지 않는 껍질과 엉겨 고전하고 있던 것을 박문대가 저지한 것이 방금 전이다. 한 번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니 차유진이고 김래빈이고 생각하는 바가 빤했다.
"괜찮아요! 입 튼튼해요!"
"맞습니다. 차유진은 이도 뾰족하면서 뭐 먹을 때 입 베는 걸 한번도 못 봤습니다."
얼마 전 포도당 캔디를 녹여 먹다가 혀 어디를 베었다며 한동안 매운 걸 멀리하던 김래빈이 반쯤은 부러움이 섞인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박문대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단호한 어조와 함께 한 손에는 젓가락을, 다른 손에는 숫가락을 집어들더니 그대로 꽁치를 발라가기 시작한다. 등지느러미와 중앙 뼈 사이로 젓가락을 넣어 그대로 살을 죽 들어내더니, 지느러미에 붙어있는 잔가시를 같은 요령으로 한쪽으로 쭉 밀어낸다. 머리를 분리하고, 중앙뼈와 꼬리를 제거하고, 내장 쪽의 쓴 부위와 잔가시들을 죽죽 훑어내더니, 껍질의 기름지거나 비린부분까지 깔끔하게 떼어내 살코기만 남기는 솜씨가 일품이다.
"WOW.... 형 묘기 부려요!"
"형이 이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저희는 괜찮습니다. 이런 일로 형을 번거롭게 해드리다니...!"
막내들로부터 상반된 반응이 튀어나온다. 저러다 김래빈은 식탁에 머리 박겠네. 한숨쉬듯 픽 웃은 박문대가 김래빈이 대충 혹할만한 면죄부를 던진다. 너희는 아이돌이니까, 목에 가시걸려서 병원갈 일은 없어야지. 김래빈은 넘어갔다. 이런 일까지 잘 하시다니 과연 프로아이돌이십니다, 하는 말이 들려오는 착각이 일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하다. 그 눈빛에, 박문대의 얼굴 역시 미미하게 누그러진다.
"형 멋져요! 나도 배울래요!"
"뭘 배우기까지 해. 하다 보면 는다."
"배워서 형 해줘요!"
"그렇습니다! 다음에는 저희가 해드리겠습니다!"
"나 말고, 나중에 너희보다 어린 애들한테 해줘. 조카라던가..."
"으음.... 그럼 고맙습니다 해요! 형 때문에 잘 먹어요"
"바보야, 그 땐 '덕분에'라고 하는 거야"
한층 편하게 생선을 먹을 수 있게 되니 막내들의 젓가락질이 분주하다. 그거 하나로 퍽 신났는지 텐션이 올라간 차유진과 김래빈의 만담 아닌 만담을 들으며 박문대는 대충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냥 감사하다는 말이나 할 걸 그랬지.'
부모가 살아있을 때에는 류건우도 생선을 잘 바를 줄 모르는 어린애였다. 부모가 죽고 나서는 그런 어리광을 부릴 상대가 없었고, 혼자 밥을 챙겨 먹으며 먹을 수 있는 건 뭐든 악착같이 먹다 보면 생선 바르는 기술이야 자연스레 늘었다. 때론 생선 뼈에 붙은 약간의 살도 아까웠다. 생선은 생각보다 고가의 식재료다.
그래도 종종, 류건우 역시 잘 발려진 생선을 받았다. 몇 번 만난 적 없던 먼 친척과의 어색한 식사자리, 동아리의 대 선배, 졸업 후 찾아간 담임교사. 고마우면 너보다 어린 사람한테 되돌려주라던 말을 했던 건 누구였더라. 하루 버텨내기도 피곤한 삶을 살면서 기억은 많이 뭉그러졌지만 그래도 그 지쳤던 삶에도 중간중간 빛나는 선의가 있었다. 필사적으로 혼자서도 괜찮은 척 하던, 자존심을 세우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 멋적을 만큼.
어쩌면 박문대를, 그러니까 큰달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것도 그 이전에 자신에게 쏟아졌던 그 작은 호의들 때문이다.
"형도 많이 먹어요!"
제 쪽으로 생선 접시가 슥 밀린다. 어두육미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머리는 제가 발라드리겠습니다! 시끌벅적함을 타고 다시 반짝임이 돌아왔다.막내즈 챙기는 문대….. 로 리퀘를 받았었습니다. 짧습니다.